9년 전 조지 밀러가 선보인 <매드 맥스>의 조력자 퓨리오사는 상냥한 설명 대신 긴박한 침묵으로 삶이라는 투쟁에 임하는 전사였다. ‘물건’이 되기를 거부하는 임모탄의 아내들을 데리고 도망쳤던 그는 과거의 그 무엇도 제대로 보여주지 않는 신비주의로 인해 더 호기심을 끌었고 해결되지 않는 질문들을 남겼다. 예를 들면 이런 질문들. (샤를리즈 테론이 연기해 더 이해할 수 없었던) 저 아름다운 여자가 어떻게 임모탄의 출산 기계로 뽑혀가지 않았지? 어떻게 여자가 저 잔혹한 시타델의 근위대장이 됐지? 의수를 찬 왼팔에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9년 후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는 이 모든 의문에 또박또박 답하며 돌아온다. 다만 이번엔 그를 미지의 영역이 아니라 우리가 잘 아는 ‘인질로서의 여성’ 삶에 데려다 놓으며, 끝내 사랑이란 클리셰까지 극복하지 못한 장애물처럼 성실히 답습한다.
모체에서 분리된 태아처럼 어머니의 땅에서 강제로 쥐어뜯긴 퓨리오사는 새 인생을 시작해야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집에 가는 길이 적힌 지도는 팔과 함께 영영 유실되고 절망의 오디세이는 끝나지 못한다. ‘Not now’에 가로막힌 약자들에게 퓨리오사는 ‘Now’라고 소리 질러 그들을 해방하려 들지만, 혁명은 매번 실패하고 그는 어린 시체를 내려다보며 비탄에 빠진다. 아끼는 이들의 죽음은 그들의 명성과 고결한 성품만큼 멋지지도 장엄하지도 않다. 여기저기 둘러봐도 온통 비천함과 분노뿐이다.
‘정상적인’ 육체도 자본도, 복구에 대한 희망도 사라진 이 세계에서 여전히 통하는 절대 법칙은 주인과 노예의 역학, 즉 “네 가치를 높이면 디멘투스가 아끼고 귀히 써 줄 것”이라는 믿음이다. 늙은 역사가의 입으로 전해진 이 말은 시퀄 <매드 맥스>에서 도망길에 올랐던 어린 여성 중 하나가 “임모탄은 우리를 예뻐하잖아. 좋은 것만 주고 아껴줬잖아”라며 어여쁜 출산 노예의 삶으로 다시 돌아가려던 장면을 자연히 연상시킨다.
<설국열차>처럼 옆을 뚫고 나갈 길은 없고 오로지 수직의 도로와 상승 욕구만 남는 이야기. 위를 바라보며 위의 구미와 논리에 맞게 나를 갈아넣어 죽음 직전까지 소진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 하던대로 순종적인 노예가 되어 거짓 자유를 얻는 것과,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걸어 죽음 혹은 완전한 해방을 직면하는 것 사이의 선택이 매 순간 발 밑에 놓인다. 그래서 인류세가 끝난 후를 다루는 이 영화는 역설적으로 무척 동시대적인 여성 서사로 읽힌다.
장하게도 누구의 꾐에도 넘어가지 않은 퓨리오사는 제 삶에 깊이 침투하길 희망하며 아버지, 스승, 남편이 되려 하는 포식자 남성들에게서 도망치며 끊임없이 자기를 갱신한다. 그러나 가장 큰 산이 남아있으니 바로 그가 ‘주체적으로’ 고른 남성 연인이다. 남들처럼 자신을 정서적/육체적으로 착취하려는 남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즉 최악을 면했다는 이유만으로 근위대장 잭은 손쉽게 믿음과 애착의 대상이 된다. 게다가 잭과 함께 하는 장면들에서만 퓨리오사는 전투에 제법 방해될 게 분명한 긴 머리로 등장한다. 릭투스의 정욕을 감지한 어린 퓨리오사가 머리를 내어주고 도망치는 필사의 각오를 보였고, 강간 위협을 피해 여성임을 숨기고자 말 못 하는 체 아등바등 생존해 온 과거를 생각하면 이 재빠른 전환은 당황스럽다.
트럭 전투 씬 중 정확히 잭과 처음 눈을 마주치는 컷에서 그의 긴 머리가 나풀대며 노출되는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다. 영화 바깥의 우리는 그가 언제 다시 삭발로 ’돌아올지‘를 가늠하며 이 퓨리오사를 우리가 아는 퓨리오사로 만들어줄 비극적 사건의 시작을 예감한다. 하지만 그 예고의 기능을 하기 위한 머리가 굳이 그렇게 극적으로 길고 치렁치렁하고 아름답게 굽슬거릴 이유가 있을까. 긴 머리는 퓨리오사가 잭과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다시 말해 성애적 호감을 얻을 자격과 의지가 있는 여성이라는 표지로 작용한다. 이는 분명히 잭보다는 스크린을 보는 현대의 관객에게 어필하기 위한 장치다.
수납공간이 그렇게 많은 의복이며, 한 몸처럼 붙일 수 있는 기계 장치를 두고 씨앗을 몸에 지녀야 한다는 고향 땅의 풍습을 내미는 건 적당히 이어 붙인 핑계처럼 느껴진다. 진짜 이유는 퓨리오사가 ‘확실히 (아름다운) 여자로 보여야’ 둘의 닿을 듯 말 듯한 풋풋한 로맨스를 관례적으로 적당히 납득할 관객을 (의도했든 아니든) 의식했기 때문일 테다. 그래서 조지 밀러는 ‘굳이’ 퓨리오사의 외모가 현대의 관객에게 시각적으로 익숙한 여성성 구현에 복무하도록 만든다.
이윽고 잭의 제자이자 부하가 된 퓨리오사가 그의 옆자리에 앉아 여전히 머리를 늘어뜨린 채로 위험한 전투에 출정하는 모습은 그가 잭의 여자로서 안전한 지위와 보호를 제공받는다는 즉각적 암시가 된다. 잭이 화면 밖으로 완전히 퇴장한 뒤 퓨리오사가 다시 삭발하는 건 그를 우리가 아는 퓨리오사로 만드는 장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다시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겠다는 일종의 정절에 대한 결심처럼 느껴진다. 구태여 두 번씩 머리를 깎게 만드는 건 남성의 욕망이 얼마나 위험한지 처음으로 인지했던 어린 시절 각성의 의미를 흐리는 선택이 될 뿐이다.
전투적인 여성 인물에게 유약하고 사랑에 의존적인 면이 전혀 있어선 안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하필 그 퓨리오사’이기 때문에 실망감이 배가 된다. 단단한 육체와 전투력보다 더 명확한 표현인 삭발이란 외연을 경유해 비성애화되되 무성화되지 않은 드문 타입의 여성 전사로 등장했던 <매드맥스>의 퓨리오사, 그리하여 그 어떤 남성적 질서에도 영향받지 않고 영원히 단독자로 우뚝 설 것만 같았던 퓨리오사가 결국 이 비극적 사랑의 서사를 거친 잔여물에 불과했다는 게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퓨리오사>에서 제가 고른 유일한 좋은 것(유니콘남)을 타의로 잃은 여자의 상실감 같은 걸 기대하진 않았다는 뜻이다.
게다가 “여성을 포함한 소수자 정체성을 지닌 캐릭터나 관계에 대한 리터러시“가 심각하게 부족한 남성 관객들(조혜영)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단 몇 초 등장한 뱃사공 남성의 사연을 궁금해하고, <바비>의 진짜 주인공은 켄이라고 오판했듯, 이번에도 당연한 수순처럼 멋있는 잭에게 동일시해 퓨리오사 이상으로 열광하며 그의 프리퀄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으름장을 놓기도 한다. 그렇게 퓨리오사는 사가 중 유일하게 제 이름을 건 영화에서조차 남자친구의 뒷전으로 밀려난다.
그간 우리는 ‘결국 인생의 사랑 앞에 함락되는 여성’ 캐릭터를 얼마나 많이 봐왔던가. 인간다움을 상실한 세계에서 드물게도 인간미를 간직하며 외로이 살아가는 두 이성이 만났을 때는 왜 반드시 애틋한 연정을 나누게 되는 것인가. 따스한 동료애나 전우애 정도로는 부족한 것일까. 조지 밀러에게 그만한 상상력이 부족했다고 하기엔 이미 맥스와 퓨리오사가 동지애의 좋은 예시를 보여준 바 있다. 그들은 서로의 목적이 불일치한다는 오인 속에 육탄전을 벌이며 투닥거리다가 어느 순간 목적이 일치한다(어떻게든 탈출한다)는 것을 깨닫고 서로의 조력자가 된다. <블랙팬서>의 오코예는 ‘나를 사랑하면서 나라를 위할 수 있냐’는 남편의 도발에 주저 없이 그에게 창을 겨누는 결단으로 새로운 여성 영웅의 지평을 열었다.
더 멀리 가자면 웹툰 <이런 영웅은 싫어>의 이능력자 영정을 들 수도 있을 듯하다. 불후의 전략가인 그는 언젠가 사랑하는 남자가 자신의 약점이 될까 두려워 남자에게 자결을 명하고, 자신을 너무도 숭배해 그 명에 그대로 따른 연인의 시신을 안고 “드디어 모든 인간성을 버렸다”며 읊조린다. 디멘투스가 쳐둔 덫에 제대로 걸린 잭을 구하기 위해 거의 성공한 탈출을 포기한 순간, 퓨리오사는 바로 이 단계를 완수하지 못한 -미완의 - 영웅에 머물게 된다.
기껏 희생해 자기를 빼낸 어머니를 두고 가지 못해 다시 적진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던 것처럼, 훗날 맥스에게 “당신이 돌아오지 못하면 어떡하냐“는 질문을 던지며 동요했던 것처럼, 위험에 처한 잭에게 돌아가는 퓨리오사의 무른 면을 이해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에게도 내면의 다듬어지지 못한 혼란과 다 버리지 못한 다정이 있고, 그의 불완전성이 도리어 그를 인간답게 하는 본질이라는 당연한 서술로도 나아갈 수 있다.
잭과 퓨리오사가 끝까지 명시적인 연인 관계에 진입하지 않았고, 그러니 둘이 나눈 것은 연정이 아니라 황폐한 세상에 인간다운 인간이라곤 단 둘뿐인 것 같은 유대감이었을 거라고 애써 독해해볼 수도 있겠다(퓨리오사의 어머니 메리 자바사와 대모 케이티가, 퓨리오사와 발키리가 머리를 맞대며 나눴던 부발리니 일족의 인사를 퓨리오사가 잭에게도 나누어줬기 때문에 - 그 역시 여전히 거슬리지만).
하지만 그런 ‘우정’이 꼭 자신을 알아봐준 남성 상사와의 유사 부녀, 유사 연인 관계에서만 가능한 것인가. 차라리 잭과의 애틋한 교감에 할애할 시간을 헐어 임모탄의 신부들과 기거하던 시절을 그렸다면 어땠을까. 자신이 너무 어려 힘이 없던 탓에 함께 도망갈 수 없었던 신부들, 괜찮을 거라고 안심시켜줬던 다정한 그들, 세 번의 비정상적 출산 후에는 모유를 뽑는 기계 취급되던 불쌍한 그들에 대한 부채감을 갖고 있었기에 7천일 후 <매드맥스>에서는 신부들부터 탈출시켰던 거라면. 퓨리오사에게 잭 외의 유의미한 관계를 만들어줄 가능성이 있었지만 여느 영화들처럼 그것을 쉽게 포기해버린 지점에서, 조지 밀러가 여성 서사를 정확히 이해하고 잘 써온 남성 감독이라는 판단은 빛을 바랜다.
여성이 인질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분투할 때 끝의 끝까지 발목을 잡는 것이 바로 그 ‘친절한 남성 (연인)’에 대한 로맨틱한 유대감이란 사실을 이젠 알기 때문에, ‘나에게 특별한 남성’의 생존 여부에 그토록 미련을 두는 퓨리오사를 지켜보는 건 어쩔 수 없이 괴롭고 안타까운 일이다. 벨 훅스가 말했듯 “가부장제 문화에서의 낭만적 사랑은 사람을 바보로 만들고 힘과 통제력을 앗아”가며, “지배가 있는 곳에 사랑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그렇기에, ’네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란 디멘투스의 질문은 어딘지 영화 바깥에서 던져진 것처럼 느껴지는 구석이 있다. 관객인 우리는 이미 퓨리오사가 시리즈 끝의 끝까지 주인공은 되지 못한다는 답을 알고 있다. 시리즈의 순행적 흐름만을 생각한다면, 퓨리오사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매드 맥스’의 기회가 도래할 때까지 시간을 벌어주는 것에 그친다. 사구에 우뚝 서서 퓨리오사의 탈주를 지켜보던 그가 몇 년 후 무사히 주인공의 자리에 도착해, 다친 퓨리오사를 부축하곤 뒤도 안 보고 떠나가는 멋있는 영웅이 될 수 있도록.
물론 퓨리오사가 있었기에 씨앗이 보존되고 다음 세대 여자들은 도망치고 노골적 착취만큼 역겨운 거짓 자유는 파훼된다. 그의 고통은 아물지 않음으로써 남과 나를 구하는 동력이 된다. 인간적인 정 때문에 100% 냉철해질 수 없는 여자는 복수 대신 구원이란 해법을 기어이 찾아낸다. 더한 급진을 상상할 수 없는 세계에서 주류의 시선이 가닿을 수 있는 페미니즘 서사의 최후란, 아쉽지만 아직은 여기까지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