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평2025-02-10 13:19:55
지금 청춘은 어디에 있는가
단편영화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비평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영화의 제목이자 핵심인 문장이다. 우리는 어디에 있을까. 또는 대체 우리는 누구일까. 약 6분 내외의 단편영화지만, 그 짧은 시간에 많은 의미들이 영상 속에서 부유하고 있다.
단편영화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는 단 두 명의 인물로만 흐름을 전개한다. 단편영화의 특성이나 한계가 명확하기에 적은 인원을 사용하지는 않았을까, 생각할 수 있다. 평론을 하는 입장에서 그것을 정확히 파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겠지만 그 부분이 사실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주목해야 하는 것은 단편영화가 가지는 그 한계점을 '적은 인원으로도 관객에게 충분히 소구 가능한' 이야기로 타파해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와 식물들의 관계에는 무엇이 있는가
비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과거가 있다. 그것도 아름다우면서도 슬픈 사랑의 과거가 있다. 청춘에 사랑이 빠질 수 있으랴. 우리는 한 아파트의 야외에서 우산을 펼치고 비를 맞으며 쪼그려 앉아 있는다. 첫 카메라 앵글에서 우리는 정말 비를 맞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이내 미래가 뿌리는 '가짜 비'라는 것을 관객은 알게 된다. 우리는 왜 비를 맞고 있나.
러닝타임 내내 영화 곳곳에서 식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종류는 다양하다. 토마토, 딸기 모종, 몬스테라. 미래는 우리에게 토마토를 준 적이 있고, 우리는 토마토를 기른 적이 있다. 토마토는 햇빛과 물만 있으면 쉽게 자란다. 우리도 그걸 알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애써 그 사실을 부정한다. 그 토마토 화분을 버린 적도, 그렇다고 기르지 않은 적도 없지만 열매가 맺는 것은 우리와 다른 상황에 놓여있는 것이 된다. 우리는 아직 비를 맞고 싹을 틔우지 못한 상황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 슬픈 사랑의 과거가 자기 자신의 성장을 저해하는 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 싹도, 햇빛도 들지 못한 마음에 열매를 맺은 토마토를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을까.
미래는 그런 우리에게 희망을 심는다. 지금 마음이 어떨지 몰라도 심고 기르다 보면 마음이 편해진다고. 우리의 마음에 볕을 들게 하라는 듯이 말을 건넨다. 미래의 할머니가 미래에게 전한 말이기도 하다. 우리의 시간보다 곱절은 더 많은 시간을 보냈을 할머니의 말을 잘못됐다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 말을 듣고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미래가 기르는 몬스테라는 방 안에서 길러지고 있다. 인공조명의 도움으로 빛을 받고 자란다. 어쩌면 우리와 비슷한 모습으로 보인다. 우리는 스스로 물을 받아내지 못해 위층에서 미래가 물을 뿌려주어야만 하고, 스스로 마음에 빛을 들이지 못해 미래에게서 위로되는 말들과 조언을 들어야만 한다. '답답하지 않을까'. 우리가 몬스테라를 보고 처음으로 꺼낸 말이다. 일은 일사천리로 이루어진다. 우리와 미래는 몬스테라 화분을 방에서 끄집어내고, 계단을 통해 내려보내고, 끌차로 끌어 햇빛을 보게 하려 한다.
급한 마음에 사고가 잇따르는 것은 필연일까, 우연일까. 그 과정에서 몬스테라가 심어져 있는 화분이 떨어져 깨지고 만다. 깨진 화분을 들고 갈 수는 없다. 끌차에 올려 끌고 갈 수도 없다. 몬스테라를 심었던 그 흙들은 이미 모두 깨진 화분의 틈새로 새어 나와 주워 담을 수 없게 된다. 우리와 미래는 결단해야 한다.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결국 몬스테라를 봉지에 담아 바깥에 아주 심기로 택한다. 인공조명과 미래가 주는 물로 애써 생명을 이어가던 몬스테라는 이제 자유로이 빛을 받고 물을 머금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우리가 있다. 우리가 몬스테라에게 그 기회를 주었고, 직접 몬스테라를 이고 가 심어준다.
우리에게도 그럴 기회가 있어야 할 것이다. 직접 빛을 받아야 할 것이고, 직접 물을 머금을 기회를 가져야 한다. 그 누구도 인공적으로 도움을 준대도, 직접 하지 않으면 그 어느 것도 온전히 자기 자신의 양분이 되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미래에게 의존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도 우리의 힘으로 자유롭게 방향과 양분을 찾아야 한다.
과거는 오래 간직해도 좋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 그 위에도 결국 다시 싹이 튼다고 한다. 어떤 과거에도 새로 싹은 트고, 삶은 다시 한번 새롭게 트여 계속해서 돋아날 것이다.
단순히 작 중의 우리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지금의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들, 즉 '우리'에게도 통하는 말이다. 사랑과 이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모든 시도에는 실패가 따르기 마련이고 좌절이 있기 마련이다. 주변에서 건네는 위로와 조언들이 많겠지만 언제까지나 그 인공적인 것들에 의존하며 살 수는 없다. 우리의 삶이 우리만의 것이듯, '우리'의 삶도 '우리'의 것이니까.
많은 좌절과 실패 끝에는 자기혐오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 또한 필연적인 것이다. 불행한 운명이라면 운명이라 하겠지만, 현시대의 인간이라는 존재는 계속해서 그 틀을 깨고 부숴 나아가야 한다. 어떤 형태의 과거이든 간에 그 위에 새로이 싹을 틔우고 돋아나게 해야 한다. 그렇게 나아간다.
영화의 종반부에서 재미있는 구도를 보여준다. 바로 우리가 카메라에 직접 물을 뿌려 주는 것. 우리는 몬스테라에게 물을 줬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왜 그 모습을 보는 '우리'에게 주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우리가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는 감정을 느끼는 몬스테라에 물을 뿌려주는 것처럼, 결국 '우리'도 '우리'에게, 정말 '우리' 스스로가 아니더라도 동일시할 수 있는 것들에 힘을 주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안에 있는가 바깥에 있는가. 안에 있다면 바깥으로 가야 하는가. 바깥에 있다면 안으로 가야 하는가. 그 어느 곳에도 정답은 없지만, 안에 있다가 보면 바깥으로 나가야만 하는 순간이 오고, 바깥에 있다 보면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순간이 온다. 마치 작 중에 등장하는 몬스테라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몬스테라이고, 몬스테라는 우리다. 몬스테라는 바깥에 없다. 바깥에 없다는 것은 직접 무언가를 쟁취할 수 없다는 것이 된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된다. 우리의 마음도 바깥에 없다.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는 그 속에서 변화할 기회를 모두 놓친다. 우리 또한 몬스테라처럼 그렇게 야외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그 메시지는 영화의 끝에서 몬스테라가 심어지게 되는 그곳, 자유롭게 햇빛을 쬐고 물을 머금을 수 있는 그곳이지 않을까. 실내에서만 지내던 몬스테라가 야외에서 어떻게 잘 살아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영화에서조차 그 이후의 이야기는 다루지 않는다. 그래도 우리는 몬스테라에게 물을 준다. 우리 자기 자신도 미래도 서로를 그렇게 믿고 방치해야만 한다. 사랑이 오면 떠나가야 하는 순간이 온대도, 모든 시도에 실패와 좌절이 따를 수밖에 없대도 직접 뿌리내리고 고개를 치켜들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게 진정한 삶이고, '우리'를 향한 애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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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일대학교 사진영상학부 학생들의 단편영화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는 유튜브에서 관람할 수 있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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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나고 다시 보니 느끼는 부러움
개봉 10주년 기념으로 재개봉한 <위플래쉬>
첫 관람과는 사뭇 다르게 다가왔다.
[장편 영화 데뷔작부터 보인 에너지]
영화 <위플래쉬(Whiplash, 2014)>는 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장편 영화 데뷔작으로, 음악을 소재로 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스포츠 영화 같은 긴장감과 리듬감으로 관객을 몰입시킨다. 재즈 드러머를 꿈꾸는 주인공 앤드류(마일스 텔러)와 그를 가혹하게 지도하는 플래처 교수의 관계를 중심으로, 열정과 강박, 재능과 노력, 스승과 제자의 의미에 대해 깊은 질문을 던진다. 단순한 음악 영화라기보다 극한의 도전을 통해 성장과 파멸이 종이 한 장 차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강렬한 심리극에 가깝다.
셔젤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의 연출 스타일과 주제 의식을 뚜렷하게 각인시켰다. 빠른 컷 편집, 박진감 넘치는 음악 연출, 그리고 집착에 가까운 예술가적 욕망을 탐구하는 인물들. 이는 이후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계속해서 반복되는 특징이기도 하다. 위플래쉬는 단순한 '음악 영화'라는 틀을 깨고, 한 인간이 목표를 위해 어디까지 몰아붙일 수 있는지를 집요하게 파헤친다.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플래처 교수는 분명 악당처럼 보이지만, 정말 그렇게만 단정 지을 수 있을까?
[플래처 교수는 정말 악인이었을까?]
플래처 교수는 악랄하다. 학생들에게 폭언을 퍼붓고, 심지어 신체적 폭력까지 서슴지 않는다. 오디션 장면에서 실력 미달인 학생을 무자비하게 쫓아내고, 박자가 어긋난 앤드류에게 의자를 집어던지는 모습은 공포 영화에 가까울 정도다. 그가 내뱉는 대사들은 독설을 넘어 거의 가스라이팅에 가깝다. "최악의 두 단어는 '좋은 연주였어(Good job)'"라며 안주하는 순간 성장은 멈춘다고 주장하는 그의 방식은, 일반적인 교육자의 역할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영화는 단순한 '악역'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가 왜 이런 방식으로 가르치는지를 탐구한다. 플래처의 교육 철학은 “진정한 천재는 한계를 넘어서 탄생한다”는 믿음에 기반한다. 그는 찰리 파커가 스승의 잔인한 혹평을 듣고 이를 극복해 최고의 뮤지션이 된 이야기를 반복해서 언급하며, 앤드류에게도 그와 같은 계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즉, 그의 가혹한 훈련은 단순한 학대가 아니라, 진정한 천재를 만들어내기 위한 극단적인 방법론이다. 그래서 그가 입체적이면서도 흡입력있는 캐릭터로 발돋움한다.
그렇다면 그의 방식은 정당화될 수 있을까? 영화가 흥미로운 점은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앤드류는 플래처의 혹독한 훈련을 받으며 점점 더 집착적인 인물로 변해간다. 그는 결국 연습에 몰두하다 교통사고를 당하고도 무대에 오르지만, 결국 한계에 부딪혀 좌절한다. 플래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앤드류는 결국 폭발하고, 스스로 음악을 포기하는 길을 택한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모든 것이 뒤집힌다. 앤드류는 다시 무대에 서고, 플래처와의 긴장감 넘치는 연주 대결 끝에 기적 같은 연주를 펼친다. 이 장면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묘한 교감을 나눈다. 플래처는 처음으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앤드류는 완벽한 연주로 스스로를 증명한다. 플래처가 원했던 찰리 파커의 탄생 순간이, 앤드류를 통해 실현된 셈이다.
단순히 '악한 스승에게 학대당한 제자가 마침내 성공했다'는 결론이 아니다. 오히려 영화는 그 과정이 옳았는지, 그리고 다른 방법이 없었는지를 묻는다. 플래처의 교육 방식은 천재를 만들어낼 수도 있지만, 수많은 사람들을 망가뜨릴 수도 있다. 앤드류 역시 재능을 꽃피웠지만, 그 대가로 인간적인 관계와 정신적 건강을 희생했다.
<위플래쉬>가 특별한 이유는 단순한 성공 서사가 아니라, 예술가의 집착과 광기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마지막, 앤드류의 폭발적인 드럼 연주는 단순한 승리가 아니라, 하나의 '도취'에 가깝다. 그는 음악과 하나가 되는 경지에 이르지만, 그 끝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다.
결국 위플래쉬는 플래처 교수의 교육 방식이 옳았는지 그르다는 답을 내리지 않는다.
다만, 예술을 향한 끝없는 집착이 인간을 어디까지 몰아붙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며, 관객들로 하여금 각자의 결론을 내리게 만든다. 데이미언 셔젤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의 색깔을 강렬하게 각인시켰으며, 이후 라라랜드(2016), 퍼스트맨(2018), 바빌론(2023) 등의 작품에서도 집착과 꿈, 성공과 희생의 주제를 지속적으로 탐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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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파더> "미친 연기에 걸맞는 놀라운 연출!" 뜨거운 관객 호평
인생의 단 한번의 1승을 위해 달리는 영화 <1승>
4개월간의 대장정 마치고 크랭크업!
영화 <1승>이 4개월간의 촬영을 마무리하고 지난 2월 25일 (목) 크랭크업하였다.
대한민국 대표 배우 송강호와 충무로 멀티플레이어 신연식 감독의 만남으로 화제를 모은 영화 <1승>이 지난 2월 25일 전격 크랭크업하였다. <1승>은 인생에서 단 한번의 성공도 맛본 적 없는 배구 감독이 단 한번의 1승만 하면 되는 여자배구단을 만나면서 도전에 나서는 이야기이다.
<동주>로 유수의 각본상을 휩쓴 작가이자 <페어러브>, <조류인간>, <러시안소설>, <배우는 배우다>, 등의 작품을 쓰고 연출하며 탄탄한 필력과 섬세한 연출력을 인정받은 신연식 감독이 연출을 맡고, <괴물>, <변호인>, <택시운전사> 등 수많은 작품 속에서 강렬하고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인 것은 물론 <기생충>으로 각종 영화제를 휩쓸며 세계를 빛낸 배우 송강호가 주연을 맡은 <1승>은 인생의 단 한번 1승을 위해 달려가는 여자배구단의 가슴 뛰는 이야기를 그리며 관객들에게 웃음과 감동을 전할 예정이다. 여기에 <그것만이 내 세상>, <사바하>,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등 다양한 캐릭터를 특유의 개성으로 완벽하게 소화해내며 탄탄한 연기를 선보여온 대세 배우 박정민이 <동주>에 이어 다시 한번 신연식 감독과 의기투합해 기대를 모으고 있다. 또한 박명훈, 장윤주, 이민지 등 다채로운 매력을 겸비한 배우들이 대거 합류해 이들의 완벽한 연기 앙상블에 대한 궁금증을 고조시키고 있다.
한편, 망해가는 어린이 배구 교실을 운영하다가 해체 직전의 여자배구단 감독으로 발탁된 '김우진' 역의 송강호는 "새롭고 신선하고 영화적인 재미가 풍부한 영화가 만들어진 것 같아 기쁘다. 신연식 감독과 배우들을 비롯해 <1승>을 위해 헌신해준 배구인들까지 그동안 영화를 위해 애쓰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며 촬영을 끝낸 소감을 밝혔다. 재벌 2세이자 '김우진'을 감독으로 발탁한 배구단의 구단주 '강정원' 역을 맡아 송강호와 처음으로 호흡을 맞춘 박정민은 "좋은 배우들과 스탭들이 모여 유쾌하고 훌륭한 영화가 탄생한 것 같다. 찍는 동안 너무 행복했고 하루 빨리 극장에서 만나고 싶다"며 영화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드러냈다.
대한민국 최고의 배우 송강호와 대세 배우 박정민, 독창적인 씨네아티스트 신연식 감독의 만남으로 기대를 모으는 영화 <1승>은 후반 작업 이후 관객들을 찾아갈 예정이다.
씨네랩 에디터 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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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주가 내가 되고, 내가 우주가 되는
보름달이 뜨면, 사건이 벌어진다. 악마의 능력이 어떤 사람에게로 옮겨가기도 하고, 사람이 늑대가 되기도 하고, 외계인이 하늘로 떠오르기도 하는 그런 밤, 어김 없이 달이 어둠을 환히 밝히고 있다. 달은 그냥 저렇게 가만히 있을 뿐인데, 우리는 다정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가까운 우주의 이웃에게 온갖 서사를 부여하고 오명과 왕관을 씌우기도 한다. 눈에 담을 수 없는 태양과 달리, 가만히 청연하게 빛나는 얼굴로 나를 내려다 보고 있는 달과 마주 할 수 있기 때문일까? 보는 사람의 상황에 따라 두려움의 존재가 되기도 하고, 마음의 안식처가 되기도 하는, 정형이지만 비정형인 것. 결국엔 나 자신이 어떤 상황이냐에 따라 달이 달리 보이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신비로운 존재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영화 <문샷>의 배경은 2049년 가까운 미래, 기술은 발달하고, 기계와 공존하는 사회다. 더불어 화성에도 새로운 정착지를 만들게 되고, 많은 사람들이 화성에 거주하고 있는 세상이다. 남자 주인공 월트는 늘 화성에 가고 싶은 꿈이 있지만, 화성으로 가는 비행기표를 쿨 하게 결제하기에는 우주선 티켓은 터무니 없이 비싸기 때문에, 대학생 선발단을 뽑는 심사에 지원하지만 번번히 탈락하게 된다. 여자주인공 소피는 자신의 가족과도 다름없는 남자친구와 그의 가족들이 모두 화성에 가 살고 있다. 소피는 화성에 갈 수 있는 여건이 충분히 되지만, 비행공포증으로 인해 지구에 남아 있다.
어느 날 소피는 주변 사람들은 모두 화성에 있고, 자신의 곁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외로움과 공허함을 느낀 소피는 큰 용기를 내어 화성으로 향하게 되고, 월트는 불법으로 화성을 가려고 소피에게 접근해 화성으로 가는 우주선에 몰래 숨어든다. 우주선이 이륙한 뒤, 소피에게 사실이 발각되지만, 자신도 공범이 될까봐 월트를 숨겨준 소피는 화성에 가는 36일간 월트와 가까이 붙어 다니게 되면서 여러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데…
꿈에 그리던 화성에 도착했지만 월트는 곧 붙잡힌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화성이주프로젝트를 담당하고 있는CEO 리언코비는 월터를 내 쫓는 대신 오히려 화성에 머물게 하고, 한편 소피는 남자친구와 다정한 그의 가족들과 재회 하고 행복함을 느낄줄 알았지만, 자신과 맞지 않는 생활과 꿈에 여전히 허전함을 느끼게 된다.
영화는 다른 SF물 보다 웅장하지도 않고, 엄청난 서사가 펼쳐지지도 않는다. 가벼운 하이틴 로맨스인데 배경이 화성과 우주선일뿐. 대단한 철학적인 멋진 스토리를 기대했다면 실망할 것이 뻔하다. 게다가 …화성으로 가는데 moonshot이란 말인가 !!!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장면의 대사가 자주 생각났다.
화성에서 지내는 동안 우주선 캡틴이 월트에게 묻는다.
“화성은 지낼 만해?”
원대한 꿈을 가지고 우주선에 몰래타고 화성까지 온 월트가 대답한다.
“솔직히 다를 줄 알았어요 여기 오면 내가 바뀌거나 그럴 줄 알았죠. 하지만 여기 왔는데도 여전히 똑같아요.”
캡틴은 당연하다는 듯 이야기한다.
“월트 아무리 멀리 여행해도 너 자신에게선 절대 못 도망쳐.”
이 장면 하나로, 나는 우주를 다시 생각했다.
내가 우주고, 우주가 나인 것이 삶이라는 것을
오늘은 일년 중 가장 큰 달이 뜨는 정월 대보름이다. 하늘을 바라보며 새삼스레 우리가 우주의 모래알 같은 존재라는 사실에 묘한 안도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나를 둘러싼 걱정 따위가 쓸모 없고 하찮게 느껴지는 순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 아름다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외에 중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하게 만들어 주는 마법 같은 밤. 달이 뜬 밤의 고요는 그렇게 이번 보름에도 나를 토닥여 줄 것만 같다.
내가 좋으면 다 좋은거야.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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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여름의 일주일 / A Week Away, 2021
뮤지컬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넷플릭스 오리지널인 <그 여름의 일주일>은 나름의 기대를 걸었던 작품입니다. 점차 뮤지컬 영화가 보기 힘들어졌을 뿐 아니라 코로나19로 인해 그나마 볼 수 있었던 뮤지컬 영화들을 만나기 힘들어졌으니까요. 그런 와중에 넷플릭스에서 종종 뮤지컬 영화를 제작해 주니, 비록 집에서 관람해야 하지만 경쾌한 음악이 곁들여진 신작 영화를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게 되었네요.
아무튼 기대를 품었지만 자세한 조사까지 하지는 않았던 터라 영화를 틀자마자 조금은 당황했습니다. 개인적으로 포스터만 봤을 때는 우연히 만난 남녀의 풋풋하고도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를 풀어낼 것처럼 보이는데, 갑자기 여름 캠프를 떠나더라구요. 이때 아차 싶었습니다. 영화의 관람 등급을 보면 알겠지만 <그 여름의 일주일>은 가족들이 모두 볼 수 있게 만들어진 가족 뮤지컬 영화입니다. 그래서 전체 관람가 등급이 가지고 있는 몇몇 한계점들을 자연스레 내포하고 있기도 하구요.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유치하게도 느껴지는 스토리는 물론, 아이들이 신경 쓰지 않을 캐릭터의 묘사부터 배경 설명, 그리고 급한 전개 등이 보인다는 점은 어쩔 수 없이 아쉽게 다가왔네요. 의미없는 행동들의 나열들도 상당히 거슬리기도 하구요. 하이틴 분위기의 로맨스인 줄 알았는데, 이것도 저것도 아닌 구성 또한 상당히 애매하게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전체적으로 디테일에 신경 쓰지 않고, 가족 영화라는 큰 틀 안에 일단은 두루뭉술하게 맞춰둔 느낌이 강한 영화였습니다.
노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일단 노래의 멜로디 자체는 좋았습니다. 딱히 꽂히거나 중독성 있는 넘버는 없지만, 어느 정도 신나게 들을 수 있을 정도의 노래였네요. 다만 넷플릭스 오리지널 뮤지컬 영화는 확 다가오는 무언가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 참 아쉽게 다가옵니다. <더 프롬>도 그랬지만 보통 뮤지컬 영화하면 플레이 리스트에 넣어 두고두고 듣는 맛이 있어야 하는데, 한 방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드네요. 개인적으로 노래 가사도 뭔가 깊은 의미를 담고 있지 않고 그 순간의 즐거움을 표현하는 것에 그친다는 점도 조금은 아쉽게 다가옵니다. 뭐 이것 또한 가족 영화라는 틀에 맞춰 쉽게 쓴 탓도 있겠지만, 뭔가 뮤지컬 영화임에도 노래는 사이드 메뉴에 불과한 느낌이랄까요. 중요한 연결고리에 노래들을 집어넣어 그 효과를 상승시키는 것이 아니라, 일단 무조건 신날 때 넣고 보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노래가 여운이 남지도 않고 휘발성이 강하네요.
개인적으로 놀라웠던 점은 대놓고 기독교적인 색채를 띠고 있다는 점입니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더 프롬>에서 줄기차게 까댔던 게 기독교였던 것 같은데, 같은 넷플릭스 오리지널에서 기독교를 찬양하는 내용이 나오니 참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하네요. 종교에 관한 내용을 다루는 것은 뭐 제작자 마음이지만, 개인적으로 조금은 아쉽게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일단 정통 기독교적인 착하디착한 내용은 조금 낡아 보이기도 하거든요. 또한 영화의 메인 스토리에 너무 뜬금없이 끼어있는 느낌이 강하기도 하구요. 한계가 있었겠지만 어차피 다룰 소재면 조금 다듬어서 다뤘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구요.
나름의 장점도 보였는데, 디테일을 완전히 포기해버린 느낌이 강해서 안타까웠네요. 나름 캐릭터 간의 케미도 좋아서 짧지만 즐거웠던 어느 여름날의 기억을 상기시켜주기도 하지만 너무 순간적인 흥분으로만 다루고 있어서 허전한 느낌이 강했습니다. 유치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상당하구요. 여러모로 아쉽게 다가온 영화였습니다.
* 본 콘텐츠는 블로거 팬서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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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벽한 타인
스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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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이 영화가 나왔을 때 다양한 반응이 있었다. 아직까지도 기억나는 건 '우리는 저런 게임 해도 광고나 게임초대 밖에 안 온다'는 후기다. 나도 그럴 것 같다.\
월식이 일어나던 날, 호수이자 바다인 영랑호에서 불장난(사실 얼음낚시이지만)을 하다 주먹다짐을 했던 어린이들은 약 40년 뒤, 또 다시 월식이 일어나는 날 석호와 예진의 집들이에서 새로운 불장난을 한다.
40년 지기 친구들과 그 아내들이 휴대폰으로 오는 모든 알림들을 공유하는 게임.
이 영화는 낯선 게임의 형식을 빌려 내부의 클리셰들, 너무 흔한 가정들을 여과없이 보여준다. 배신과 타자성 보다는 오히려 풍자에 가깝다.
더 바랄 것도 없을 정도로 완벽해 보이는 석호-예진 부부. 그들의 공부 잘하고 착한 딸.
유방 성형외과 의사인 석호는 자상하고 가정적이며, 정신과 의사 예진은 딸에게 엄격한 엄마다.
대학생 때 혼전임신으로 낳은 딸인 만큼 딸이 자신의 전철을 밟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예진의 아버지도 의사인 걸로 보아, 처음부터 석호가 결혼을 승낙받는 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석호는 예진 몰래 투자한 속초 리조트에 사기를 당한다. 정신과 의사인 예진은 성형을 정신적 문제라고 인식하고, 성형외과 의사인 석호는 정신과 의사를 꿀 빤다고 여긴다. 하지만 예진은 가슴 성형수술을 예약했고, 석호는 정신과 치료 6개월차다.
한국 영화, 아니 한국 가정의 클리셰들을 몽땅 모아둔 것 같은 태수-수현 부부를 들여다 보자.
고시 뒷바라지 해서 변호사 만들어 놓았더니 이제는 식모 취급하는, 보통 성격 아닌 어머니를 모시고 살지만 "우리 엄마 그런 사람 아니야!"를 외치는, 아내 모르게 다른 여자와 야한 사진을 나누는 태수. 친구 아내의 옷차림을 보고 "너무 꽉 끼는 거 아니야?"라며 평가질까지.
엄마로, 아내로, 며느리로 살면서 자존감이란 자존감은 뉘집 개나 준 듯한 수현.
문학반 수업을 들으며 살아있음을 느낀다는 레파토리는 제법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문학반 다니는 사람에게 예진을 험담하는 것도 낮은 자존감에서 온다. 자기 자신이 없으면 남이 기준이 되니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음주운전 후 수현 대신 태수가 자수을 하면서 죄책감까지 가중된다. 죄책감과 자존감은 디커플링.
거기다 슬쩍슬쩍 몰래 술도 마신다. 알콜중독과 자존감은 커플링.
준모-세경 부부를 보자. 준모는 부잣집에 맨몸으로 장가간 남자의 전형이다. 사업병에 걸려 온갖 사업을 벌이고, 망하고, 그리고 또 하고.
뒤에서 호박씨 까면서 앞에서는 천하에 둘도 없는 사랑꾼인 척. 사업장의 어린 알바생과 바람피우는 것까지 완벽하다.
그러면서도 친구들 사이에서는 늘 무시받는, 사업이라도 해서 '사장님' 소리를 들어야만 자존감을 올릴 수 있는 한없이 약한 존재.
한편 세경은 여기서 가장 평범하고 상식적인 사람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세경은 말한다. "결혼할 생각 없었어요. 저 인간이 하자고 하자고 해서"
마지막으로 애인 '민서'를 데리고 오겠다고 했지만 몸이 아프다며 혼자 온 영배.
다니던 학교도 그만두고(사싱 잘리고), 친구들끼리의 골프 약속에도 소외된다. 40년지기 친구에게도 사실 애인은 민서가 아니라 '민수'임을 비밀에 부친다.
게임은 점점 과열되고, 그만 두자고 하는 사람과 한번 폭로되면 '나만 당할 수 없다'는 심정으로 불난 곳에 기름을 붓는다.
서로를 속이고, 속였다는 것이 발각되는 걸 관음하는 것이 관객의 역할이다.
게임-스릴로 흥분되는 순간은 잠깐이다. 그 이후는 타인의 사생활을 들여다 보는 관음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스마트폰은 그 자체로 메타포다. 마치 타인의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화려한 생활을 관음하며 그 뒤에 어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불행이 있을 것이라 상상하는 것, 상상이 현실이 되는 순간만을 기다리는 것.
그리고 그 순간이 왔을 때, 완전무결하지 않은 타인에 대한 비난은 너무도 쉽다.
그렇기에 기존 포스터에서 차용하지 않는 방식인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기'는 마치 "너, 나 보고 있었지?"라고 말하는 듯 서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훔쳐보고 있는 걸 다 안다는 듯 여유로운 미소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동성애자.
자존감이 낮은 이가 SNS에서 화려한 삶을 거짓으로 꾸미듯이ㅡ물론 자존감도 높고 화려한 사람도 있겠다만은ㅡ세경을 제외한 모든 이들은 친구들에게도 자신의 본 모습을 보여줄 수 없다.
사회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는 영배와 보통 수준의 자존감을 가진 세경을 제외하고, 나머지 인물들은 결핍 그 자체다.
인정받고 싶지만 능력이 없는 준모, 책임감 없지만 책임감 있는 척 해야 하는 태수, 아내에게 금전적으로 달리는 석호, 자신을 잃어버린 수현, 성(性)적으로 억압된 예진.
예진의 억압된 성은 희한한 방향으로 가지를 친다. 첫째가 딸 소영에게 보이는 반응이 그렇다. 스무 살이 넘은 딸의 연애사를 일일이 간섭하며, 딸의 가방을 뒤져 기어이 콘돔을 찾아낸다.
딸이 만나는 남자를 격렬하게 거부하며 딸에게 순결을 강요한다. 둘째로는 유방 성형외과 의사인 남편으로 말미암은 신체 컴플렉스다.
성형은 정신적 문제임을 인지하지만, 결국 가슴 수술을 감행하려 한다. 그것이 자신의 여성성을 회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앞의 두 가지 요소는 자신의 삶과 몸을 완전히 부정한다.
마지막으로 준모와의 관계다.
<인셉션>에서처럼 세경이 빼 놓은 반지가 테이블 위에서 멈추지 않고 돌아간다. 그 순간 관객들은 이 모든 일이 가상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실제로 영화 끄트머리에서는 게임을 아예 하지 않았다는 설정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돌아가는 차 안, 준모는 예진에게 온 문자를 확인한다. '자기랑 있고 싶었어'
하필이면 준모일까. 남편은 의사고 태수는 변호사, 준모는 사업병 걸린 백수다. 그럼에도 준모를 선택한 것은, 억압된 욕망의 육화 그 자체가 아닐까.
계산 없이 몸만 생각할 수 있는 상대.
마지막까지 관객의 관음 욕망을 채워준다. 이로서 가상이라고 여겨졌던 1시간 50분을 진짠가, 가짠가 헷갈리게 한다. 하지만 알고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진짜라는 것을. 그리고 진짜라고 믿고 싶은 건 아닐까.
태수의 말처럼 누구나 '공적인 삶, 개인의 삶, 비밀의 삶이라는 세 가지 삶'을 살고 있음이 영화의 주제일 수도 있겠다.
그리하여 옆에 있는 타인들을 속이며 '완벽한 타인'들로부터 결핍을 채워가는, 그것은 너무도 익숙한 풍경이다.
영랑호에서의 불장난으로 시작된 이 영화는 한강이 보이는 서울 고급 아파트에서의 불장난으로, 친구 아내와의 불장난으로ㅡ불장난이라 순화하고 싶지는 않지만ㅡ 끝난다.
어쩌면 '완벽한 타인'이라는 제목은 40년지기 친구도, 가족도 아닌 자신의 결핍을 채워주는 그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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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에이트 쇼 | 메시지도 이야기도 놓쳐버린 불상사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4년제 대학을 졸업한 후 평범하게 살아가던 '진수'(류준열). 하지만 그는 지인을 따라서 주식에 손을 댔다가 투자한 돈을 다 잃고, 사채업자에게 쫓기던 중 한강 다리에서 뛰어내릴 결심을 한다. 그 순간 갑자기 도착한 입금 문자와 게임 참가를 종용하는 메시지. 계좌에 꽂힌 엄청난 액수의 돈에 놀란 진수는 그 자리에서 게임 참여를 결정한다.
3층 카드를 골라 방에 입주한 그는 1분에 3만 원씩 버는 규칙에 놀라고, 다른 참가자 7명, '8층'(천우희), '7층'(박정민), '4층'(이열음), '6층'(박해준), '2층'(이주영), '5층'(문정희), '1층'(배성우)과 안면을 튼 후 게임을 가능한 오랫동안 지속할 규칙을 만들어 간다. 그러나 우연히 갈린 층수에서 비롯된 불평등이 가시화되자 참가자 8명은 서로를 짓밟고 더 많은 돈을 쟁취하기 위한 경쟁에 돌입한다.
감독이 작품보다 우선될 때
거울. 영화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할 때 흔히 사용하는 비유다. 거울을 보면 안 보이던 외적인 문제를 찾을 수 있듯이, 영화도 관객이 미처 깨닫거나 생각 못했던 사회적 문제를 일깨워줄 수 있으니까. 봉준호의 <기생충>과 <설국열차>가 그랬듯이.
한재림 감독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더 에이트 쇼>를 자기만의 거울이라 생각한 듯싶다. 배진수 작가의 웹툰 '머니게임'과 '파이게임'을 각색한 이 드라마는 한국의 사회적, 경제적 구조를 비판, 풍자, 고발하려는 의도를 숨기지 않는다. 전작인 <관상>, <더 킹>, <비상선언>에서 선보인 연출력과 스타일을 적극 활용해 메시지를 펼쳐 보이고, <오징어게임>의 아류작이라는 이미지를 탈피하려고도 한다.
그러나 <더 에이트 쇼>는 한재림의 <기생충>도, <오징어게임>도 되지 못했다. 우선 거울에 비춰 보여주려는 문제점을 영화적으로 설득력 있게 제시하지 못했다. 다른 작품과 차별화되는 지점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감독 자의식이 과하게 반영된 마무리는 시청자가 작품을 소화할 여지를 없앴다. 그 대가로 8부작 드라마의 화려한 볼거리는 단순한 기교에 불과해지고, 의도도 메시지도 가학성과 자극성에게 잡아먹혀 버렸다.
명확한 목적
<더 에이트 쇼>의 목적은 확실하다. 8개 층으로 이루어진 시스템에 한국 사회를 빗대어 그 모순점과 불평등함을 비판, 풍자하려 한다. 우연히 1층부터 8층까지 선택한 8명의 주인공. 그들의 운명은 순전히 운에 달렸다. 가장 이상적인 비율의 피보나치 수열로 1층부터 8층까지의 상금이 주어지지만, 시간이 갈수록 권력과 부의 격차는 벌어진다. 금수저론, 코인과 주식 열풍이 불었던 원인을 유비적으로 드러내려 한다.
어떻게 보면 <기생충>과 <오징어게임>의 만남이다. <기생충>이 계단을 활용해 계층 관계를 보여줬듯이, <더 에이트 쇼>도 위아래로 움직이는 동선 속에 1층부터 8층까지의 위계를 녹여냈다. 바삐 움직이는 캐릭터들도 한국인의 대표적인 모습을 집약한 듯하다. 위로 올라가려 발악하는 1, 2, 3층. 이를 폭력적으로 진압하는 4, 6, 8층. 그 사이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5층과 7층. 주변에서, 또 뉴스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인물상이다.
이에 더해 윤리적인 선도 함께 건드린다. 8층을 장악한 이들은 자기 이익을 지키기 위해 아래층을 잔인하게 찍어 누른다. 인간의 기본적인 3대 욕구인 식욕, 성욕, 수면욕을 통제하거나 자극하면서 인간의 존엄성을 시험한다. 이때 <더 에이트 쇼>는 '모든 악행의 책임은 권력을 악용한 개개인의 몫인가? 아니면 그렇게 환경을 조성한 시스템의 문제인가?'라는 질문을 함께 던진다. <오징어게임>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한재림이 한재림 한 전반전
한재림 감독 특유의 스타일은 <더 에이트 쇼>가 목적에 다가서는 원동력이다. 특히 한재림 감독의 장점이 빛나는 전반부가 유도 인상적이다. 그는 다양한 코미디를 다룰 때도 탁월한 역량을 보여준 바 있다. <더 킹>에서는 검사 주인공을 내세워 한국 현대 정치사를 비꼬았다. 계유정난에 개입한 관상가의 비극 속으로 관객을 자연스럽게 초대한 <관상>의 전반부도 인상적인 코미디였다.
<더 에이트 쇼>의 전반전도 마찬가지다. 블랙 코미디 느낌이 짙다. 노동 소득만으로는 부를 늘릴 수 없는 가운데, 주식과 코인 대박을 꿈꾸지만 현실을 벗어나지 못하는 평범한 2030의 모습을 진수에게 투영한다. 그 덕분에 <더 에이트 쇼>는 별다른 설명 없이도 극의 몰입도를 빠르게 끌어올릴 수 있다.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를 연상시키는 여러 장치는 풍자의 화법으로서도, 블랙코미디라는 신호로서도 탁월하다. 과거 무성영화 스타일의 자막, 필름 화면, 영화 비율을 활용한 대목이 대표적이다. 진수가 슬랩스틱을 여럿 보여주는 것도 마찬가지다. <모던 타임즈>가 비인간적인 공장 노동에 시달린 노동자의 피폐한 삶을 꼬집었다면, <더 에이트 쇼>는 약 1세기가 지나자 그 노동 자체가 무가치해졌다고 일깨우는 셈이다.
자가당착에 빠진 후반전
문제는 후반부다. <더 에이트 쇼>는 앞서 던진 비판점을 강조하기에 충분한 전개를 보여주지 못한다. 사회 시스템에 대한 비판의 끝은 냉소와 자조에 가깝다. 어떻게든 꼭대기층으로 올라가려던 1층의 발버둥을 잔인하게 짓밟으며 열심히 살면 언젠가는 계단 위에 설 수 있다는 희망을 지워 버린다.
그런데 1층을 제외한 게임 참가자들의 삶은 정작 희망적이다. 비록 게임 속에서 겪은 충격적인 일 때문에 피폐해진 듯 보이지만, 거액의 상금을 챙겨 바라던 삶 또는 더 좋은 삶을 누린다. 즉, 현실에서 층수를 바꿀 수 있는 사다리를 제대로 챙긴 셈이다. 1층은 영원히 1층, 8층은 끝까지 8층이라는 게임의 끝과는 거리가 멀다.
자연히 <더 에이트 쇼>는 무슨 이야기인지 알기 어렵다. "모두가 용이 될 수 없으며 또한 그럴 필요도 없다"라고 말하는 듯하지만, "개천에서 붕어·개구리·가재로 살아도 행복한 세상"과는 거리가 먼 결말을 보여준다. 빈부격차와 사다리 걷어차기라는 문제를 비판하려는 건지, 시스템에 순응한 채 조용히 살아야 한다는 건지, 인간성을 버리면서까지 상금을 타내는 참가자들의 노력과 인내심을 본받자는 건지 혼란스럽다.
이 단점은 감독의 전작인 <비상선언>과의 공통점이라 할 수 있다. 처음에는 화려한 스펙터클로 눈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캐릭터들이 군상극을 펼치기 시작하자 메시지와 개연성, 캐릭터는 모두 흔들리기 시작한다. 더 나아가 주제 의식마저도 공감되지 않고, 억지스러운 해피 엔딩은 실망감을 키운다. 말하고 싶은 메시지는 있겠지만, 정작 그 메시지를 담아낼 이야기를 만드는 데 실패한 전철을 답습하고 말았다.
허망한 마지막
어떤 면에서는 <비상선언>보다도 더 큰 실패다. <비상선언>에서는 못 본 단점이 드러나기 때문. '7층' 캐릭터가 대표적이다. 7층은 자기가 경험한 게임을 토대로 '더 에이트 쇼' 시나리오를 쓴다. 한때 흥행 감독이었던 7층이 이제는 현실적이고 예술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는 점에서는 감독의 자의식이 투영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런데 7층이 쓴 시나리오 제목을 비추는 엔딩은 인상적이지 않다. 허세에 가까워 보인다. <더 에이트 쇼>의 내용이나 문제의식은 결코 날카롭거나 새롭지 않기 때문. 경제적, 정치적 기득권이 나날이 발전하는 기술을 활용해 하위 계층을 더 촘촘히 감시하고, 착취하는 현상은 이미 <설국열차>, <오징어게임>, <헝거게임> 등 숱한 작품이 다룬 바 있다.
또 다른 작품들과 달리 문제의식을 제시할 뿐, 그 대안이나 비전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설국열차>에서는 기차가 전복됐다. 캣니스는 헝거게임 경기장을 부수고, 성기훈은 프론트맨을 잡으러 간다. 반면에 <더 에이트 쇼>는 게임을 끝낸 참가자들이 상금 덕분에 해피엔딩을 누리는 것 다음 이야기가 없다. 그저 영화감독인 7층의 입을 빌려 사회 모순을 통찰했고, 그 비판을 드라마(영화)에 담아냈다는 도돌이표에 그친다.
만약 <기생충>처럼 아예 새로운 문제의식을 보여줬다면 다른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 <기생충>은 기득권은 악하고, 빈곤층은 선하다는 고정관념을 깨면서 관객의 시야를 넓혀 버렸으니까. 그런데 <더 에이트 쇼>는 그 정도의 통찰력까지는 못 보여줬다. 권력자는 악하고 타락하고, 빈자는 선하지만 고통받는다는 오래된 도그마를 답습하기 바쁘다. 자연히 메타적인 결말은 더욱 허망하고 실망스럽다.
<더 에이트 쇼>가 <오징어게임>이 될 수 없는 이유
주제 의식과 의도에 공감하기 어려워진 상황에서 게임 자체를 보는 재미도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이는 <오징어게임>과 <더 에이트 쇼>의 결정적인 차이다. 두 게임의 참가자 모두 돈을 원한다. 하지만 전자는 예상치 못하게 목숨을 걸어야 하는 수동적인 플레이어였다. 반면에 후자는 능동적인 주체다. 자기 의지로 상대의 존엄성을 가능한 잔인하게 짓밟는다. 그 결과 계속해서 연장되는 게임 시간은 쾌감 대신 거북함으로 가득해진다.
지나치게 평면적이고 극단적인 참가자도 몰입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특정한 인물상을 대변하는 장기짝에 불과하다. 정신병자, 천재, 선인, 악인 모두 처음부터 끝까지 티끌만큼도 변하지 않는다. 다시 한번 속고 속이는 후반부에서는 속는 사람의 아둔함에 탄식이 나올 정도다. 캐릭터 간의 관계와 심리 변화를 쫓는 <오징어게임>의 재미는 찾아볼 수 없다.
마지막으로 영화 대신 드라마를 선택한 결정도 악수다. 드라마는 영화에 비해 전개가 느리다. 그러다 보니 <더 에이트 쇼>는 중간마다 가학적인 장면을 의도적으로 전시할 수밖에 없다. 왕게임이나 숨바꼭질처럼 특별하지 않은 게임이 등장하다 보니 필요 이상으로 자극적인 상황을 조성하기도 한다. 수면 고문 장면처럼.
결국 <더 에이트 쇼>는 거울이 아니라 빈 깡통이다. 감독과 출연자의 명성은 요란하고, 볼거리는 화려하다. 하지만 정작 그 내용은 특별하지도, 새롭지도, 놀랍지도 않다.
Poor 형편없음
<더 킹> 마냥 이륙해서 <비상선언>처럼 착륙한 한재림표 <오징어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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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틀린 집 - 집 구조를 잘못 지으면 벌어지는 소름돋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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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 뒤틀린 거.. 아세요?”
피치 못할 사정으로 외딴집에 이사 오게 된 가족.
엄마 ‘명혜’는 이사 온 첫 날부터 이 집이 뒤틀렸다고 전하는 이웃집 여자의 경고와
창고에서 들리는 불길한 소리로 인해 밤잠을 설친다.
아빠 ‘현민’은 그런 ‘명혜’를 신경쇠약으로만 여기고
둘째 딸 ‘희우’는 가족들이 보지 못하는 무언가를 마주하지만 그 사실을 숨긴다.
그러던 어느 날, 알 수 없는 기운에 이끌려 잠겨있던 창고문을 열고 만 명혜는
무언가에 사로잡힌 듯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기 시작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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