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또비됴2025-02-11 23:39:05
팬데믹 시대가 불러온 고딕 호러의 향취
<노스페라투> 리뷰
이건 운명이다! 고딕 호러 영화로, 뱀파이어를 소재로 한 기념비적 작품 F. W. 무르나우의 <노스페라투>와 <더 위치> <라이트하우스>의 로버트 에거스는 엘렌과 올록 백작처럼 언젠가 만날 운명처럼 보인다. 이 영화의 광팬으로 잘 알려진 감독은 원작의 으스스한 분위기와 고딕 호러의 요소를 재소환하면서도, 현시대에 맞는 새로운 변화보다는 고전미를 계승한다. 안전한 선택처럼 보이지만, 로버트 에거스가 어떤 감독인가! 자신이 제일 잘하는 것만 골라 골라 관객에게 잊지 못할 영상미를 전한다. 그리고 제목처럼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전염병’의 공포까지 소환한다.
어렸을 때부터 알 수 없는 악몽에 시달려온 엘렌(릴리 로즈 뎁). 토마스(니콜라스 홀트)와 결혼 후 조금은 나아진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그 행복도 잠시, 토마스의 갑작스런 출장 소식은 잊고 지냈던 불안을 데려온다. 힘들어하는 아내를 친구 하딩(애런 존슨) 부부에게 맡긴 그는 중요한 계약을 맺기 위해 타국에 있는 올록 백작(빌 스카스가드)을 찾아간다. 한편, 엘렌은 점점 환각 상태가 심해지고, 급기야 악몽을 다시 꾼다.
<노스페라투>를 색으로 표현하자면 회색, 잿빛이 가장 어울리듯 하다. 원작 자체가 흑백이었던 것을 소환하듯 영화는 높은 채도의 색 사용을 기피한다. 대부분의 호러 영화가 그렇듯 음울하고 차가운 분위기를 이어 나가려는 방법으로서 보이지만, 감독은 꿈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를 지워나가는 것으로 그 영역을 확장한다. 당시 고딕 문학이 성행했을 때의 시대적 분위기는 철학, 과학 등의 경계가 모호하고 혼란스러웠다.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 원작은 앞서 소개한 사회상을 반영했고, 감독은 이를 계승한다.
영화가 빛나는 장면은 이 모호한 경계를 공포로 치환하는 부분이다. 기술의 발전이 가속화될 무렵임에도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고,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존재의 등장은 그 자체로 공포의 대상이 된다. 여기에 한 술 더 떠 보이지 않는 것, 인지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극대화하는데, 감독은 올록 백작의 모습과 형상을 모호하게 보여준다. 빛과 어둠의 경계, 환상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질 때까지 기다려 서서히 조여오는 노스페라투의 존재, 점프스케어를 통한 공포는 관객으로 하여금 멋스럽게 다가와 섬뜩함을 안긴다.
이 클래식한 호러 영화가 시대착오적이지 않고 지금의 관객을 공포로 무장해제 시키는 건 다름 아닌 전염병이다. <노스페라투>란 제목의 어원은 그리스어로 ‘병을 옮기는 자’에서 따왔다. 이는 19세기 만연했던 흑사병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팬데믹을 상시기킨다. 극 중 올록 백작이 엘렌이 사는 도시에 뿌린 쥐 떼는 그 자체로 공포. 100년도 넘은 이 원작을 현시점에 소환한 것은 관객이 전염병의 공포를 경험해 봤기 때문이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그 악몽 같은 시간을 반강제적으로 체험하는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현실 공포와 맞닿게 된 것. 뱀파이어의 공포와 전염병의 공포를 동시에 전하는 1타 2피 격인 작품은 전자든 후자든 간에 한 번은 무서움을 느낀다.
두 가지 공포를 스크린에 재현한 영화는 원작의 에로티시즘도 놓치지 않는다. 채워지지 않는 욕망에 시달리는 엘런, 그 빈구석을 채우고자 관에서 나와 먼 여정을 떠난 노스페라투의 기이한 앙상블은 그 자체로 묘한 섹슈얼리즘을 표방한다. 너무나 싫고 증오하지만. 원초적으로 올록 백작에게 끌리는 엘렌의 두 얼굴은 당시 결혼이란 제도 아래 여성의 억압된 성적 욕망과 탐험을 죄악시했던 사회적 현상을 대변하는데, 죽음의 화신으로서도 보이는 올록 백작과의 결합은 그 자체로 타나토스의 아름다움으로도 비춘다. 여튼 마지막 장면은 꼭 눈여겨 보기 바란다.
로버트 에거스 감독의 뛰어난 연출력 아래 배우들은 호연을 펼치는데, 특히 엘렌 역의 릴리 로즈 뎁의 연기는 인상적이다. <포제션>의 이자벨 아자니를 떠올리게 할 만큼 다양한 감정에 휩싸여 다층적인 불안을 입체적으로 연기하는 모습은 엄지척! 중후반부 토마스와 격렬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백미다.
<노스페라투>의 국내 관객은 2.4만명(2/11 기준)이다. 영화의 완성도에 비해 턱없이 낮은 수치. 이는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관객들에게 소구 되지 못했다는 걸 증명한다. 숏츠 영상으로 도파민을 충족하는 관객들에게 영화가 너무 클래식해서 그런것 인지, 아니면 영화보다 더 공포스러운 현실을 살고 있어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이렇게 보내주기에는 뭔가 아쉽다. 참고로 <노스페라투>는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 촬영상, 의상상, 분장상, 미술상 후보에 올랐다.
사진 제공: 유니버셜픽쳐스
평점: 3.5 / 5.0
한줄평: 영화가 흡혈한다면 이런 느낌일까?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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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자 영역과 함께 사라진 시리즈의 매력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타노스로부터 우주를 구한 후 당당히 어벤져스의 일원이자 슈퍼 히어로가 된 '스콧 랭(폴 러드)'. 그는 앤트맨으로서의 업적을 책으로 써내는 등 화려한 셀러브리티의 삶을 누린다. 그러던 어느 날, 스콧은 가족 식사 자리에서 깜짝 놀랄 소식을 듣는다. 딸 '캐시 랭(캐서린 뉴트)'의 주도 하에 파트너 '호프 반 다인(에반젤린 릴리)', 그리고 은사인 '행크 핌(마이클 더글라스)'이 미지의 세계인 양자 영역에 신호를 보낼 수 있는 기계를 개발했다는 것.
하지만 스콧보다 더 놀란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수십 년을 양자 영역에서 보냈다가 간신히 지구로 되돌아온 '재닛 반 다인(미셸 파이퍼)'. 그녀는 기계를 보자마자 당장 파괴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그녀도 기계가 오작동해 앤트맨 일행이 양자 영역에 빠지는 걸 막지는 못했고, 그들은 양자 영역을 돌아다니며 빠져나갈 방법을 찾는다. 그 사이, 양자 영역에 갇혀 있던 '정복자 캉(조나단 메이저스)'도 유배지에서 탈출할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하면서 앤트맨 일행을 위기에 빠트린다.
가상의 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소설, 드라마 등이 성공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당연히 매력적인 캐릭터, 뛰어난 기술력, 탄탄한 시나리오 등 여러 가지 요건을 갖춰야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의 밑바탕에는 '그럴듯함'이 있어야 한다. <스타워즈> 속 타투인이나 나부 같은 외계 행성이든, <반지의 제왕> 속 중간계든 그 공간이 실제로 존재하는 듯 느껴져야 한다. 이는 CG와 같은 시각적인 요소만 뜻하지 않는다. 영화가 디테일함으로 가득할 때, 비로소 실제로 주인공이 살아 숨 쉬는 시공간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빌뇌브 감독의 <듄>에서 주인공인 폴 아트레이스(티모시 샬라메)의 대련 장면을 보자. 이 장면 속 주인공들은 일반적인 액션과 달리 찌르거나 베려고 하는 순간 속도를 급격히 늦춘다. <듄>의 세계관에서 사람들은 일정 속도 이상이면 무조건 튕겨내는 방어막을 두르고 있기 때문이다. <해리포터> 시리즈도 호그와트, 버로우, 다이애건 앨리, 마법 정부 등에서 마법사들이 어떻게 생활하고 행동하는지를 세밀히 보여주면서 숨겨져 있던 마법 세계의 매력을 각인시킨 바 있다.
즉, 사람들의 행동 하나, 말 하나에도 이유와 맥락을 불어넣을 때 관객들은 비로소 가상의 공간을 실제처럼 인식한다. 달리 말해 그 이유와 맥락을 보여주지 못하면, 아무리 화려한 그래픽과 특수 효과를 동원해 새롭고 다른 걸 보여준다고 해도 가상공간은 진짜가 될 수 없다. 이는 MCU 페이즈 5의 시작을 알리는 영화 <앤트맨 앤 와스프: 퀀텀매니아>(이하 <앤트맨 3>)가 공허해 보이는 결정적인 이유다.
양자 영역을 배경으로 모험을 펼치는 <앤트맨 3>는 시리즈 중 가장 이질적인 작품이다. 본래 <앤트맨> 시리즈는 아기자기한 하이스트 영화이자 유쾌한 가족 영화였다. 주인공인 스콧 랭의 특징 때문이다. 우선 스콧은 도둑이다. 애초에 행크 핌의 집에 강도로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스콧은 앤트맨 슈트를 입을 일이 없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매 작품마다 앤트맨은 항상 어딘가에 침투하고, 무언가를 훔친다. 1편에서는 어벤져스 기지에 침투했다가 팔콘을 만난다. 옐로우 재킷과의 마지막 전투에서도 생각한 것보다 더 몸 크기를 줄여서 상대의 슈트에 침투해 문제를 해결한다. 2편에서는 양자 영역에 잠시 들어가 빌런이었던 고스트를 위한 치료 입자를 가져오기도 한다. <시빌 워>에서도 스파이더맨이 잠시 뺏은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를 다시 되찾아오기도 하고, <엔드게임>에서는 아예 시간을 강탈하자는 계획을 제안하기까지 한다.
한편 그는 지극히 소시민적이다. 앤트맨 슈트를 벗은 그는 그저 캐시와 가족, 그리고 친구들을 신경 쓰는 평범한 사람이다. 감옥에서 출소한 그는 범죄에 손대지 않는 자랑스러운 아버지가 되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다시 도둑질을 한 것도 캐시를 만나기 위해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비록 도둑질을 하다가 행크 핌에게 붙잡히기는 했지만, 행크의 요구대로 앤트맨이 된 것도 다시 한번 범죄에서 손을 떼고 속죄하기 위해서였다. 즉, 기본적인 정의감은 지니고 있지만, 우선 가족부터 챙기고 지키려는 마음이 더 큰 바로 그 지점이 앤트맨이라는 히어로만의 매력인 셈이다. 그래서 <앤트맨> 시리즈는 항상 가족 영화로서의 분위기를 공유한다. 1편에서는 스콧과 캐시의 만남만큼이나 행크와 호프 부녀의 화해도 중요한 소재였다. 2편은 아예 행크의 아내이자 호프의 어머니인 재닛을 찾는 이야기가 중심 스토리였다.
그런데 <앤트맨 3>의 분위기는 이전 작품들과 다소 다르다. 유쾌함 대신 진지함이 가득하다. 막중한 임무를 맡은 까닭이다. 이번 작품은 <어벤져스: 캉 다이너스티>와 <어벤져스: 시크릿 워즈>로 나아갈 페이즈 5의 시작을 알리고, 타노스의 뒤를 이을 빌런 캉을 소개해야 한다. 그래서 <앤트맨 3>는 이전까지 맛보기로 등장했던 양자 영역을 활용해 본격적으로 스케일을 키운다. 작중 양자 영역의 묘사를 보면 이는 나름대로 흥미로운 설정이다. 비록 물리적으로 지구 외부에 있는 우주는 아니지만, 외우주에 못지않은 스케일과 다양성을 자랑하는 소우주로 양자 영역이 등장하니까. 닥터 스트레인지가 멀티버스의 문을 열었듯, 이제 앤트맨은 숨겨진 우주를 탐험하는 셈이다. 그렇기에 <앤트맨 3>는 가족 영화이기 이전에 새로운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스페이스 오페라에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영화를 보다 보면 거대해진 스케일을 온전히 즐기기 어렵다. 규모는 커진 반면, 이 넓고 새로운 우주를 어떻게 채울 지 고민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양자 영역이라는 새로운 장소에서 주인공들이 펼치는 모험은 이미 다른 영화에서 본 것 같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재닛이 양자 영역의 원주민을 만나 탈 것을 빌리는 장면만 봐도 그렇다. 사막 같은 비주얼은 <스타워즈> 속 타투인 행성을, 헬멧을 쓰고 있는 유목민과 그들의 탈 것은 타투인에서 사는 '터스켄 약탈자'를 빼닮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캉의 군대는 스톰트루퍼를, 캉의 제국은 은하제국의 수도인 코러산트를 떠올리게 한다. 사막에 숨어 있는 저항군의 존재도 마찬가지다.
눈에 띄는 몇몇 신선한 요소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양자 영역에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캐릭터가 등장한 것은 맞다. 해파리나 브로콜리를 변형한 듯 보이는 생명체가 여럿 눈에 띈다. '자유의 투사들'의 일원인 베브도 민달팽이처럼 생긴 독특한 생김새를 자랑한다. 그런데 이야기가 진행되다 보면 이들은 이내 배경으로 밀려나고, '젠토라'나 '쿼즈'처럼 인간 형태의 조력자만 남아 분량과 비중을 차지한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시리즈의 로켓이나 그루트, <토르> 시리즈의 코르그와 미에크처럼 전향적으로 활용되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나마 베브와 살아 움직이는 건물들 정도가 임팩트를 남길뿐이다. 결국 <앤트맨 3>에서 양자 영역은 MCU의 지평을 한 차원 넓힐 공간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저 정복자 캉이라는 새 빌런을 등장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소비될 뿐이다.
그 결과 <앤트맨 3>는 시리즈의 본래 개성과 지향점 사이에서 부유하는 듯 보인다. 스콧이 정복자 캉에게 저항하는 양자 영역의 원주민들, 곧 자유의 투사들을 돕는 전개만 봐도 문제점을 알 수 있다. <어벤져스: 엔드게임> 이후 자서전도 내고 사인회를 다니며 셀러브리티로서의 삶을 누리는 스콧. 그는 세상을 위해 싸우는 대신, 마침내 되찾은 가족과 일상을 누리고자 한다. 그래서 그는 양자 영역에 빠지거나 정복자 캉에 맞서 싸우는 이들을 만난 후에도 얼른 집에 돌아가려 한다. 하지만 스콧은 끝내 다시 히어로의 길을 외면하지 못한다. 캐시 때문이다. 그녀는 계속해서 이들을 도와야 한다고 아빠를 설득한다. 스콧이 좀처럼 설득되지 않자 독단적으로 캉의 군대와 싸우기도 한다. 이에 스콧도 결국 자유의 투사들 옆에서 캉에 맞서 싸우기로 결심한다.
영화는 스콧이 마음을 바꾼 이유를 시리즈 내내 강조되었던 그의 부성애로부터 찾는다. 확률 폭풍 안에서 캐시의 외침을 들은 스콧의 모든 가능성들이 힘을 합쳐 진짜 스콧을 도와주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 장면은 스콧이 모든 선택의 기로마다 언제나 캐시를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았다는 걸 보여준다. 그렇기에 스콧은 이번에도 캐시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다. 이는 앞으로 어벤져스와 캉이 멀티버스 속에서 펼칠 싸움을 암시하는 대목이기에 더욱 인상적이기도 하다. 멀티버스 속에서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나'에게는 수많은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렇지만 사실 중요한 건 가능성이 아니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한 단 하나의 희망과 가치를 깨닫고, 이를 지켜내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스파이더맨, 닥터 스트레인지, 그리고 이제 앤트맨이 그러하듯이. 그렇지 못하면 수많은 가능성 속에서 '나'는 절망하고 좌절할 것이기 때문이다. 캐시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스콧이 생판 남인 자유의 투사들을 돕는 이야기가 말이 되는 이유다.
그런데 정작 영화는 자유의 투사들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를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다. 정복자 캉에게 맞서 자유를 갈망한다는 언급은 있지만, 구체적으로 그들이 어떤 피해를 입었고 캉이 그들을 어떻게 억압했는지는 보이지 않는다. 양자 영역에 대한 설명과 상상력이 부재한 만큼이나 이들에 대한 설정도 대사 몇 마디를 제외하면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캐시 랭을 가교로 삼아 사람들이 마음을 합치는 모습에서는 당위성을 찾기 어렵다. 왜 앤트맨이 그들을 도와서 모험을 떠나야 하는지 그 이유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캉이 죽고 자유를 찾아다며 기뻐하는 사람들의 카타르시스를 공유하는 것도 쉽지는 않다. 덩달아 스캇 일행과 이들 간의 가교가 되어야 할 캐시의 역할도 애매해지고, 캐시를 따라 이들을 도와준 스콧의 이야기도 힘이 빠진다. 이처럼 양자 영역 안에서 <앤트맨> 시리즈는 본연의 매력과 개성을 잃어버리고 만다.
심지어 스콧 랭만 양자 영역에서 길을 잃은 것도 아니다. 앞으로의 MCU를 지탱할 빌런 정복자 캉도 헤매기는 매한가지다. 작중 캉은 다른 변종 캉들이 보기에도 너무 위험하기에 외부의 시공간과 분리된 양자 영역에 갇혀버린 인물이다. 어찌나 위험한 사상과 힘을 가지고 있는지, 재닛 밴 다인이 가족과의 재회를 포기하면서까지 캉을 양자 영역에 가두기 위해 수십 년 간 노력했을 정도다. 그런데 정작 영화를 보고 나면 캉이 과연 타노스만큼 위협적인 빌런인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이유는 두 가지다. 우선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힘이나 능력이 인상적이지 않다. 개미 군단의 공격에 쩔쩔 매고, 앤트맨과 와스프에게 고전하기 때문이다. 인피니티 스톤 없이도 헐크를 무너뜨리던 타노스와 비교하면 더욱 평범해 보인다.
물리적으로 위협을 가하지 못하며 사상적으로라도 어벤져스의 적수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하지만, 그조차도 실패한다. 연출 상의 문제로 캉의 과거사나 그의 사상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캉이 앤트맨에게 자신의 과거를 설명하는 대목을 보자. 캉은 자기가 수없이 많은 어벤져스를 죽였다고 말한다. 이때 영화는 플래시백과 같은 연출 기법을 활용하는 대신 그저 캉의 설명을 고스란히 들려줄 뿐이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서 타노스의 과거사를 설명한 대목을 떠올려 보면, 지나치게 정적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재닛이 캉과 겪었던 일을 털어놓는 장면도 다르지 않다. 재닛, 행크, 호프는 한 테이블에 나란히 둘러앉아 있다. 재닛은 어떻게 캉을 만나고, 그의 우주선을 고쳤고, 그를 양자 영역에 가둔 이유를 몇 분에 걸쳐 설명한다. 나머지 둘은 그저 리액션을 할 뿐이다. 이처럼 설명을 위한 시퀀스가 계속되다 보니 자연히 영화는 지루해진다. 설명의 내용 역시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수없이 많은 캉이 등장하는 쿠키 영상에서도 그들이 딱히 무섭지 않은 이유다. 그들의 목적이나 사상, 대립 구도가 와닿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정복자 캉의 데뷔전은 어떤 의미로든 만족스럽지 않다.
사실 <어벤져스: 엔드게임> 이후 MCU가 예전 같지 않다는 지적은 이제 새롭지 않다. 몇몇 작품을 제외하면 페이즈 4를 구성하는 영화와 드라마들이 줄줄이 혹평과 부진한 흥행을 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앤트맨 3>의 어깨는 무거웠다. 시들어가는 관객들의 관심을 다시 점화하고 멀티버스 사가에 몰입할 유인을 제공해야 했다. <앤트맨> 시리즈로서의 재미도 선사해야 했다.
하지만 <앤트맨 3>는 실패했다. <앤트맨> 시리즈의 연장선상이라고 보기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확실하게 페이즈 5의 초석을 놨다고 하기도 어려운 결과물을 내놓고 말았다. 의문을 더 키우는 것은 덤이다. "시끄럽던 옆동네 DC 확장 유니버스가 전면 리부트를 선언한 가운데, 과연 마블의 멀티버스 사가는 평탄히 목적지까지 항해할 수 있을까?" 미래는 모를 일이나 한 가지는 확실해 보인다. 마블에게 남은 기회가 이제는 정말 많지 않다는 것. 개봉까지 두 달여를 남긴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3>로 시선이 쏠리는 이유다.
P(Poor, 형편없음)
큰 그림도, 시리즈의 매력도, 빌런의 위압감도 양자 영역과 함께 사라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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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씨너스> 속 뱀파이어화, 그리고 뱀파이어
<씨너스(Sinners)>(2025, 라이언 쿠글러)
* 작품의 장면과 결말 포함
<씨너스>의 두 번째 오프닝은 위장이다. 먼저 영화는 (아마도 애니의) 스토리텔링으로 열린다. 생과 사의 경계를 허물어 혼을 소환할 능력이 있는, 또한 악마도 불러들이는/매혹하는attracts 목소리에 관한 이야기. 이어 1932년 미국 남부라는 배경을 알리는 간결한 문구가 화면에 뜨고, 앞뒤 설명 없는 상황이 뒤따른다. 지옥을 뚫고 달려온 듯한 몰골의 소년이 손잡이만 남은 기타를 들고 교회로 들어선다. 목사는 그를 알아본다. 대립하듯 마주보는 두 사람을 번갈아 조명하는 숏들 사이에 이질적인 상이 끼어든다. 관람을 마친 후의 관객은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게 되지만, 이 시점에서는 판별할 수 없다. 영화가 그 미지의 존재를 소년과 포개고 있다고 추측하게 될 수도 있다. 그동안 우리는 할리우드 영화에서 성직자가 십자가를 들고 기도문을 외우면 괴로워하는 악마의 상을 수없이 봐 왔다. 첫 시퀀스에서 ‘그 목소리The voice를 지닌 자가 악마를 불러들일 것’이라는 정보를 얻었으므로, 관객은 기타를 쥔 소년이 위험한 존재라고 짐작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후 전개를 따라가며 전자의 일부가 다시 이해되고, 후자는 완전히 뒤집힌다. 영화 후반부에 이 교회 씬이 재등장하면 관객은 아주 다른 것을 읽어내게 된다.
사실 라이언 쿠글러 감독의 세계를 대강이라도 안다면, 악마에 씌인 블루스 뮤지션이 십자가에 의해 구원받는 서사를 연상하도록 관객을 유도하는 제스처에 다른 속셈이 있음을 어렵지 않게 예상했을 수도 있겠다. 이 위장은 거기 속아넘어갔건 그 이면을 예상했건 효과적으로 작용한다. 미리 적으면, 악마에 맞서는 힘은 부두교와 블루스- 블랙 헤리티지에서 나온다. 러닝타임을 한참 건너뛰어 새미가 뱀파이어 수장 레믹에게 붙들리는 클라이맥스 씬을 보자. 프리쳐 보이인 새미가 기도문을 외우자, 레믹이 웃으며 그것을 따라 외기 시작하더니 뱀파이어들 모두가 합창한다. 이는 영화가 위장의 해체를 완료하는 장면이다.
환상을 퍼트리는 뱀파이어와 감염의 매개 - 메리와 그레이스
다시 오프닝으로 돌아가, 목사가 소년에게 ‘기타를 내려놓고 악을 버리라’고 강력히 애원하는 와중 영화는 하루 전으로 시간을 되돌린다. 이 다음부터 묘사되는 것은 스모크와 스택이 새미를 데리고 주점 오픈 준비를 하는 과정이다. 초점은 준비 단계 자체보다는 인물 소개에 있다. 오가는 대화와 행위로 과거사와 관계성이 드러난다. 보, 그레이스, 슬림, 메리, 콘브레드, 애니가 등장한 후, 다음 장으로 넘어가는 신호처럼 뱀파이어 악마 레믹은 충격음과 함께 화면에 뚝 떨어진다. 그가 퍼트리는 뱀파이어화는 좀비화를 수반한다. 물린 자들은 피를 필요로 하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을 감염시키기를 갈망하게 되며, 자아를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집단적으로 사고하고 움직이게 된다. 뱀파이어화와 함께 퍼지는 것은 “서로에게 무조건 친절한”, 피부색을 ‘인식하지 않는’ 거대한 연합체에 대한 환상이다. 이는 현재에도 All Lives Matter나 Equalism 같은 이름으로 존재하는, 차이를 뭉뚱그리고 차별을 덮는 ‘휴머니즘’적 태도들을 조롱하는 은유가 아닐까.
영화가 쌓아두었던 각 인물의 특징은 감염의 상대적 취약성, 그리고 누가 어떻게 감염되고 감염시키는가와 관련이 있다. 이를테면 동료에게 행사된 혐오성 법폭력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슬림은 스스로를 희생해 타인을 지킨다. 뱀파이어에 관한 지식과 영적 능력이 있어 전략적 구심점이 되는 부두교 주술사 애니는 감염되면 자신을 죽여달라고 스모크에게 당부한다. 뛰어난 블루스 싱어/댄서인 펄린은 마늘을 먹기는 싫어했으나 결정적인 순간 새미를 구한다. 더 취약하다/덜 취약하다는 당연히 악에 가깝다/선에 가깝다의 의미가 아니다. 이는 상대적이고 어느 정도 우연한 것이며, 경우에 따라 인물이 실제로 그러한가보다 영화가 인물에게 부여한 상징성과 더 관련이 깊어지기도 한다.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 매개 역할로 배정된 메리와 그레이스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뱀파이어인 상태로 처음 건물 안에 들어오는 자가 백인의 얼굴을 한 메리라는 점, 뱀파이어들을 건물 안으로 들이는 대사를 뱉는 자가 인종분리정책의 직접적 대상은 아닌 그레이스라는 점은 의도적인 설정으로 보인다.
기차역 대화의 말미에 메리는 ‘지옥에나 가라’고 저주했고, 스택은 멀어져가는 메리를 향해 ‘네 자리도 마련해 둘게’라고 받아친 후 ‘내 바로 옆에’라고 속삭이듯 덧붙였다. 상대방에게 일부러 닿지 않도록 전달된 이 대사는 스택의 진심을 드러내는 와중 일종의 느슨한 복선 역할 또한 한다. 서로 사랑하는 매리와 스택의 관계는 복잡하다. 메리의 조상 중에는 흑인이 있으므로 당시의 원-드롭 룰에 따르면 그는 백인이 아니다. 그러나 인종은 (레이시스트들이 주장하듯)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 계획적으로 구성된 것이다. 후에 우리는 메리가 부유한 백인 남성과 결혼하도록 스택이 주선했음을 알게 된다. 여기엔 (특히 부유한 백인)여성이 남성의 울타리 안에 포함되는 역학과 흑인이 여전히 명백히 차별받는 노예‘해방’ 이후의 역학이 있다. 후자를 피부에 샅샅이 감각하는 스택은 메리를 인격체로 존중함에도 전자의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전자에서 빠져나오려 하는 메리의 지속적인 주장은 후자를 염두에 두지 않는 것처럼 들린다. 이 관계는 남성과 여성, 흑인과 백인이 아닌 1930년대 미국 남부의 흑인 남성과 백인 여성의 관계다. (가부장제는 영화가 중점적으로 다루는 부분은 아니니)이들의 사랑은 인종을 뛰어넘는다고 볼 수도 있지만, 실질적인 관계를 맺을 때는 인종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
메리는 스택으로부터 주점이 적자라는 이야기를 듣고, 도움이 되고자 레믹 일행과 교류를 시도한 결과 감염된다. 영화는 메리를 영리하고 민첩하게 묘사함으로써 그의 행동이 부주의했다고 평가할 여지를 차단한다. 메리가 매개로 선택된 것은 그가 지닐 수밖에 없는 특권 때문이다. 백인의 얼굴로 흑인들의 공간에 드나들며 “가족”으로 환영받는 메리는 분리정책에서 자유로운 개인으로 보이기도 한다. 허나 한편으로 양쪽을 오가는 것은 그가 백인이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세 백인의 선의를 믿고 밖으로 나간 메리는 ‘모두의 화합’이라는 사상에 상대적으로 취약하다. 스택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길 바라는, 백인이 아닌 인류human being로 인식되길 바라는 메리는 틀리지 않았다. 다만 영화는 메리의 감염을 통해, 그 바람이 시대 맥락과 사회적 상황을 무시하고 차별을 무화하는 막연한 관념, 심지어는 종교로 변질되는 모습을 은유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뱀파이어화된 메리는 별안간 그 복잡한 과거사가 녹아내리기라도 한 듯 스택을 유혹한다. 스택은 메리를 거부한 상태에서 거기 넘어간다. 스택과 뱀파이어-메리의 베드신은 애니와 스모크, 새미와 펄린의 것과 달리 부자연스럽고 이상하다. 침을 줄줄 흘리는 메리를 보고, 스택은 ‘그거 침이냐’고 묻는다. 메리는 ‘좀 줄까?’라고 묻고, 스택은 달라고 한다. 이후 메리는 스택의 입 안에 침을 뱉는다. 이는 단지 페티시가 아니다. 이미 메리가 아닌 메리의/백인의 몸에서 떨어져나온 것을 스택이 아래에서 받아먹는 일련의 행위에, 위계와 취약성에 대한 은유가 있지는 않은가? 이들의 사랑에 애초에 위계와 동경이 내포해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이 순간-감염되었고 감염시키는 백인과 감염되는 흑인 사이의 역학을 말하는 것이다. 영화가 1992년에 (레믹과의 끈은 끊어지고 뱀파이어화된 개별 신체만 남은, 햇빛은 보지 못해도 함께 펍에 입장할 수 있게 된 연인으로)스택과 메리를 재등장시킨 까닭은 어쩌면 이들이 사랑을 나누는 행위를 오염시킨 것에 대한 사과의 표현은 아니었을까.
그레이스의 경우는 어떤가, 그는 영화가 드리운 상징성 때문에 매개로 선택된다. 길을 사이에 두고 흑인 전용과 백인 전용 마켓을 운영하는 보와 그레이스 차우 부부 역시 양쪽을 오갈 수 있다. 영화는 두 사람의 자녀인 리사가 그레이스를 부르기 위해 흑인 전용 마켓에서 백인 전용 마켓으로 이동하는 모습을 하나의 숏으로 연결해 촬영하며 이 점을 강조한다. 동시에 메리와 그들은 분명히 다르다. 아시안인 그들은 백인들의 공간에서 이를테면 ‘안 보이는’ 존재가 된다. 스모크가 총을 쏜 직후 백인 전용 마켓의 손님들은 카운터에 있는 그레이스를 ‘보지 않은’ 채 “유색인종”을 폄하하는 발언을 주고받는다. 반면 흑인 커뮤니티 내에서 이 부부는 메리처럼 손님으로서의 가족보단 함께 일하는 동료로서의 가족으로 간주된다. 새미의 노래로 과거와 미래의 예술혼들이 소환되는 ‘I Lied to You’ 씬에서 영화는 중국 전통 극예술 재현을 잊지 않는다.
한편으로 영화는 보와 그레이스의 캐릭터에 미묘한 차이를 심는다. 첫 등장에서 보는 흑인 전용 마켓에서 일하고 있었고, 그레이스는 백인 전용 마켓에서 흰 앞치마를 입고 일하고 있었다. 새미의 아버지를 비롯해 교회에서 예배를 보던 이들이 전부 눈이 시릴 정도로 흰 복장을 하고 있었음을 떠올려보자, <씨너스>에서 새하얀 옷은 단지 옷이 아니다. 스모크를 허물없이 반기는 보와 달리 그레이스는 총격 사건을 먼저 언급한다. 주크 조인트에서 스택이 메리에게 물렸을 때도, 보는 도우려 하고 그레이스는 선을 긋는다. 결정적으로, 그레이스는 건물의 봉인을 해제해 뱀파이어들을 안으로 들인다. 사실 부부의 반응이 다른 까닭은 성격의 차이나 자녀를 주로 누가 보살펴왔는가의 문제로 짐작된다. 뱀파이어들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면 마을로 향했을 수도 있으므로 그레이스의 걱정은 타당하다고도 생각한다. 허나 슬림이나 메리, 애니에 비해 얕게 다루어지는 그레이스가 ‘실제로 어떠한가’는 내 생각에 여기서 별로 중요하지 않다. 영화가 보에 비해 그레이스를 조금 더 ‘백인적인 것’에 가까운 인물로 ‘정했기 때문에’, 그의 대사가 뱀파이어들을 안으로 들이는 것이다. 그레이스가 정말로 백인성을 추구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상징성을 걸치고 있다는 뜻이다. 제 의지와 상관없이 감염을 품고 들어오는 메리의 경우 인물의 특권적 특성이 감염이라는 은유로 발현된다면, 제 의지로 뱀파이어들을 들이는 그레이스의 경우 영화가 부여한 상징성이 실제로는 그것과 상관없는 인물의 행동과 큰 그림에서 연결되는 것이다. 메리와 스택에게 불멸의 로맨스가 선사되었다면 그레이스에게는 이른 죽음이 배정된다. 그는 문이 열리자마자 화염병을 던지고, 한 뱀파이어의 심장에 말뚝을 찔러넣은 채 함께 활활 타오른다. (그 죽음은 자의로 보이기도 한다.) 그레이스를 뱀파이어화하지 않는 것은 관객의 미움을 받을 것이 분명한 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을 수 있다.
신들린, 그리고 한이 서린 음악들 - 레믹과 새미(들)
<씨너스>는 델타 곳곳에 산재해 있는 인물들을 따라가며 다른 공간을 번갈아 보여주는 한편 시간선은 분리하지 않는다. 인물의 과거 회상을 시각적으로 재현해 관객에게 공유하는 대신, 인물이 자신의 이야기를 발화해 주위 인물들과 공유하게 한다. 스토리텔링이 영화 안 청자에게 들리고 울려퍼지는 것이 <씨너스>에선 중요하다. 스택, 새미와 차를 타고 가던 중 슬림은 아직도 노역을 살고 있는 동료를 마주친다. 그가 겪은 폭력에 관해 슬림이 털어놓는 동안 화면에는 청각적 재현이 배경 사운드로 깔린다. 슬림의 대사와 그가 떠올리는 과거의 소리가 겹치며 재생되는 것이다. 과거의 소리는 슬림과 관객에게만 들리는 것이겠으나, 슬림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스택과 새미도 어쩌면 그것을 ‘듣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두 가지 사운드는 슬림의 신음으로 모이고, 그것은 싱잉으로 이어진다. 애초에 그것들은 블루스 ‘안에’ 있다고 영화는 이야기하려는 듯하다. 새미가 주크 조인트에서 아버지를 위해 쓴 곡을 부르는 것 또한 일종의 스토리텔링, 이 곡은 과거와 미래의 예술혼을 불러낼 뿐 아니라 그곳의 사람들이 한데 모여 각자의 모양대로 춤추게 한다. 뱀파이어를 매혹하는 블루스는 후에 그들에게 맞서는 무기가 된다.
블루스를 비롯한 블랙 헤리티지 뮤직들 말고도 영화에는 또다른 음악, 뱀파이어들이 합창하는 포크송이 등장한다. 이는 영화가 오프닝에 소개한 미디엄의 기원 중 하나이며 블루스와도 관련이 있는 아일랜드 포크다. 이와 더불어 영화가 숨겨둔 결이 드러난다. 레믹은 단지 미국의 백인이 아닌 상당히 나이든 아일랜드인 뱀파이어다. 영국의 식민지배를 기억하고 미국 내 차별을 겪었을, ‘터전을 빼앗긴’ 적이 있음을 언급하는 레믹은 1932년 델타에서 오히려 흑인들, 특히 자신과 같은 음악가인 새미에게 공감한다.(라이언 쿠글러 감독은 레믹이 “그가 도달한 시점에 이 장소에 있던 인종적 정의가 존재하기 이전 시대를 살아온 자”라고 말한다.[Indiewire]) 그가 처음 등장해 조안과 버트에게 애원하는 씬으로 돌아가보자. 집 안쪽에 있는 KKK단 복장이 흔들리는 시선으로 잡히는 숏이 있는데, 이는 아마도 레믹의 시점숏이다. 그가 늘어놓는 이야기는 델타의 동료가 덮어쓴 누명과 유사한 인종차별적 망상 서사다. 다만 대상이 흑인에서 아메리카 선주민, 촉토 “인디언”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뒤이어 찾아온 선주민들은 정중하게 위험을 경고하지만, 문을 연 조안은 불안해하면서도 겨눈 총을 내리지 않는다. 레믹이 백인성을 꾸며내 KKK단 일원인 백인을 먼저 감염시키는 것은, 전략적 선택이면서 일종의 대리 복수 겸 조롱(제 ‘종’차별에 제가 넘어가도록 하는)이 아닐까.
주크 조인트 입구에서 가로막힌 레믹은 제 손등을 쓸며 대수롭지 않은 것을 이야기하듯 “이거?”라고 뱉고 실소한다. 처음엔 이 반응의 원인을 그는 스스로의 피부색을 인식하지 않아도 되는 백인이기 때문으로 읽었다. 허나 레믹의 헤리티지를 알고 나니 그에게 있어 그 ‘분리’는 ‘정말로 이상한 것’인 동시에 이해가능한 것이리란 판단이 든다. 스모크와 스택이 알 카포네 밑에서 일했었다는 점, 아일랜드 맥주와 이탈리아 와인을 훔쳐 주점을 꾸리고는 양쪽이 싸우도록 내버려두었다는 점을 기억해보자.(그저 범법적 비즈니스 전략일까, 혹시 어떤 복수의 일환일까.) 이와 더불어 20세기 미국에서 아일랜드 이민자들을 비롯한 가난한 유럽인들은 한때 백인으로 여겨지지 않았으나, 흑인을 노예화하는 시스템에 포섭되고 동참하며 ‘백인으로 통합되었다’는 것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소수적 인종/민족을 분리하거나 묶으며 착취 피라미드를 만드는 인종주의의 역학, ‘아닌 것을 골라냄으로써 제 1의 종을 형성하는’ 종차별. 레믹은 이 구조를 이해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지만, 이미 증오에 사로잡힌 그의 목적은 흑인들과 연대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내 고통을 다들 느끼라’, ‘내가 바라는 대로 움직이라’고 강제한다. 회유를 위한 위장처럼 들렸지만 레믹은 원하는 바를 순순히 밝혔다. KKK단, 그리고 사실상 KKK단을 허용하는 지배세력의 말살. ‘우리를 핍박한 저들’을 전부 해하려 한다는 면에서, 레믹은 <블랙팬서>의 에릭 킬몽거와 닮은 데가 있다. 이들은 ‘적들’을 파괴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수단화할 준비가 돼 있다. 레믹은 자신이 퍼트리는 ‘모두의 화합’ 사상을 스스로 믿지 않는다. 그가 상상하고 원하는 그림은 ‘I Lied to You’ 씬의 말미에 카메라를 등진 그가 바라보고 있는 상- 음악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모든 것이 불타는, 아무것도 살아남지 못하는 세상이다.
레믹이 새미를 붙들고 목을 대뜸 물어뜯는 대신 구구절절 과거사를 늘어놓는 까닭은, 새미야말로 그가 이해받고 싶었던 단 한 사람, 갈망하는 동시에 두려워하는 것을 지닌 이였기 때문일 수 있다. 결국 레믹은 새미의 음악적 상징-기타로 인해 치명상을 입고 스모크에게 심장을 뚫린다. 그가 증오에 사로잡힌 악마가 되면서도 지켜온 단 하나가 음악이었기에, 뱀파이어화된 채 오랫동안 살아온 그를 죽이는(해방시키는) 것 또한 음악이어야 했던 것이 아닐까. 새미는 레믹의 증오에도, ‘모두의 화합’ 사상과 닮은 종교에도 포섭되지 않고 기타 조각을 꼭 쥔 채 제 길을 떠난다. 60년 후 새미가 펄린의 이름을 걸고 공연하는 장면, 재회한 스택과 메리가 그의 음악에 감동받는 장면은 슬림, 펄린, 새미와 같은 이들이 전해 온 음악의 유산이 현재로 이어짐을 긍정한다. 분노에 매몰돼 너의 주변을 불태우지 말라, ‘모두의 화합’이라는 예쁘장한 환상에 빠져 인종주의의 역사와 현존하는 차별을 무화하지 말라, <씨너스>의 자발적 ‘죄인들’이 블루스로 전하는 말씀은 2025년에 너무나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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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자 하는 내용이 주로 흑인이 아닌 인물들에 관한 것이어서 스모크와 애니의 이야기가 빠졌는데, 연결… 보단 비교해야 할 지점이 있어 엔딩만 언급한다: 스모크의 복수는 레믹의 파괴와는 다르다. 영화가 플래시백으로 강조하듯 그 스스로 한 말을 지키는 행위이며, 극단적인 저항이다. 영화는 픽션이라는 전제 하에 이 반격을 긍정한다. 죽어가는 스모크 앞에 나타난 애니는 “연기smoke가 아이에게 닿는 게 싫다”는 언어 유희로 “스모크”의 정체성을 내세에 가져오지 말 것을 요구하면서도(그는 늘 스모크를 ‘일라이자’라는 본명으로 부른다), 그가 호그우드를 쏘는 행위는 암묵적으로 허용한다. 하나 더, 크리스천이 아닌 애니가 입은 흰색은 교회 신도들이 걸쳤던 흰색과는 다르다고 본다. 이승에서 바라보고 상상하는 막연한 구원과 순수, 믿음의 (어쩌면 백인성 추구의) 상징이 아닌, 사후에 다다른 낙원에서 얻은 평화를 반영하는 흰색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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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WFF 데일리] 그들의 손에서 내일이 태어난다
- Summary‘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직업’인 조산사가 되기 위한 5년간의 교육을 마친 루이즈와 소피아. 두 사람은 마침내 모성, 때때로 죽음까지 다루는 조산사의 현장에 발을 들이게 된다. 이들은 과연 이런 폭풍 같은 생활을 견뎌낼 수 있을까? (출처: 서울국제여성영화제)Cast감독: 레아 페네르출연: 카디자 쿠야테, 엘로이즈 장조, 미리엠 아케디우 외낯선 세계와의 조우는 언제나 신비롭습니다. 고귀한 탄생의 순간도 신비하기로는 못지않죠. 그럼, 출산을 돕는 조산사들의 삶을 담은 영화는 얼마나 신비로울까요? 레아 페네르 감독은 첫 아이를 낳을 때 곁에서 출산의 고통과 탄생의 기쁨을 제 일처럼 함께해 준 조산사들에게 깊은 감명을 얻어 이 작품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조산사의 세계를 조명한 영화 <조산사들>을 제25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만났습니다.⊙ ⊙ ⊙<조산사들>은 신입 조산사 '루이즈'와 '소피아'의 이야기입니다. 바쁨에 형체가 있다면 아마도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분만실은 정신없이 흘러갑니다. 분만실에 들어오는 산모들은 족족 '응급'. 조산사들은 화장실에 가거나 식사할 틈도 없이 이 방 저 방을 뛰어다니며 산모와 곧 태어날 아기를 보살핍니다.조산사들은 산모에게 방을 배정하고, 진통을 완화하는 마취 주사를 놓고, 고통을 줄여주는 호흡법을 안내하고, 원활한 출산을 유도하고, 활력 징후가 보이지 않는 위급 상황의 아기를 긴급하게 조치하는 업무를 수행합니다. 생과 사, 고통과 기쁨의 한가운데서 세상 밖으로 나온 내일의 생명을 맞이하는 것이 바로 조산사들의 소명이죠.바쁘고 번잡스러운 와중에도 그들은 산모와 가족에게 따뜻한 안심의 말을 건네는 것을 잊지 않습니다. 선배 조산사 '베네딕트'는 신입 조산사 '루이즈'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우리는 안심을 줘야 해."⊙ ⊙ ⊙<조산사들>은 러닝타임의 상당 시간을 업의 현장을 묘사하는 데 할애합니다. 극영화인데도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있는 그대로 그려내고자 노력하죠. 출산을 앞둔 산모의 동의를 얻어 진짜 아기를 출산하는 장면도 여럿 담아냈습니다. 실제 출산의 현장을 포착한 덕분에 산모의 고통, 탄생의 전율, 모성의 분출, 조산사의 직업의식이 관객에게 더 고스란히 전해질 수 있었죠.이렇게 사실적인데, 다큐멘터리가 아닌 픽션의 형식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때로는 픽션이 다큐멘터리보다 더 강력한 진정성을 전달할 때가 있습니다. 이야기는 실제 현실을 반영하고, 이야기 속 인물들은 현실에 존재하는 인간 군상의 일면을 극대화하여 만들어지기 때문이죠. 이를 통해 좋은 이야기는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현실을 더 효과적으로 알립니다.이 작품 역시 그러한 면에서 좋은 이야기입니다. 잘못된 판단으로 산모와 아기를 죽일 뻔한 이후,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소피아'. 종종 실수를 저지르는 신입 조산사지만, 산모와 아기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조금씩 성장해 가는 '루이즈'. 산모와 아기를 제대로 돌볼 수 없는 조산사의 업무 현실에 회의를 느끼는 '베네딕트'. <조산사들>의 인물들은 조산사 한 명당 세 명꼴로 산모를 맡는 높은 업무 강도를 버텨내야 하는 고된 현실, 그런 상황에서도 산모와 아기를 누구보다 배려하는 조산사의 투철한 직업 정신을 효과적으로 투영합니다. 픽션의 형식을 빌려 출산의 현장에서 살아가고 버티고 나아가는 조산사들의 삶을 조금 더 세밀하게 그려낸 것이죠.⊙ ⊙ ⊙극중 조산사들은 의사와 간호사 사이에서 출산에 전문성을 가진 직업인으로서의 자긍심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 병원에서 의사와 간호사의 도움을 받아 아기를 낳기에 조산사의 존재 자체가 다소 낯설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도 조산사는 있습니다. 다만, 간호사와 그 역할이 혼재되고, 나날이 떨어지는 출생률로 인해 그 수가 매우 적을 뿐이죠. 2023년에 조산사가 된 사람은 고작 8명에 그쳤다고 합니다.영화의 내용이 우리나라의 현실과 완전히 부합하지는 않지만, 견주어 생각해 볼 만한 부분은 분명히 있습니다. 이를테면 소아청소년과의 폐과입니다. 조산사가 생명의 탄생이라는 거룩한 순간에 함께하는 것에 행복과 기쁨을 느끼며 그 밖의 힘듦을 이겨내듯이, 저출생 경향이 심해지는 상황에서도 소아청소년과를 선택한 의료진들은 아이를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 하나로 그 길을 걸었을 겁니다. 그러나 소명 의식만으로는 버티기 힘든 낮은 수가, 전문 인력 부족 등의 문제가 곪아 터지면서 결국 폐과의 길에 들어서고 말았죠.<조산사들>은 산모 한 명을 더 제대로 보기 위해 시위에 나서는 조산사들의 모습으로 끝맺습니다. 조산사들은 "환자를 제대로 대하게 해줘!"라는 팻말을 들고 거리에 나서죠. 이런 모습에서는 자긍심만으로는 버틸 수 없는 업무 환경의 고충을 호소하는 우리나라 교사들의 모습이 엇비쳐 보이기도 합니다.⊙ ⊙ ⊙낮은 출생률이 지속되는 국가에서 감히 조산사, 산부인과 의료진, 소아청소년과 의료진의 길을 선택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일 겁니다. 영화 <조산사들>을 내일의 세상을 위해 애쓰는 직업인들에 대하여 한번 생각해보는 계기로 삼는 것은 어떨까요?Schedule in SIWFF2023.08.27(일)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1관 13:002023.08.29(화)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8관 14:30서울국제여성영화제 기간: 08월 24일 - 08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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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할을 바꿔도 결혼은 결혼
박강아름 결혼하다 (Areum Married, 2019)
제작 : 한국, 셀프 다큐멘터리
감독 : 박강아름 │ 출연 : 박강아름, 정성만, 정보리강, 슈슈
등급 : 전체관람가 │ 러닝타임 : 86분여자를 따라 유학길에 오른 남자
우리가 흔히 아는 유학 커플의 사연이란. 남자가 박사과정을 취득하러 해외 유학길에 오를 때, 교제 중이던 여자 친구에게 결혼을 약속하며 함께 가자고 하는 그런 사연일 것이다. 남자는 공부를 하고, 여자는 공부하는 남자를 위해 일명 내조라 불리는 가사를 담당하게 되는 것이다. 영화 <박강아름 결혼하다>의 '아름'과 '성만'은 이 젠더 역할을 완전히 뒤집었다. 프랑스에 가서 영화 공부를 하고 싶었던 아름은 성만에게 제안했다. "나는 프랑스에 가서 영화 공부하고, 당신은 요리 공부했으면 좋겠다"라고. 36살까지 서울을 떠나본 적 없던 서울 토박이 성만은 그렇게 애인 아름을 따라 프랑스로 갔다.
여기서부터 벌써 슬슬 웃겨서 입꼬리가 씰룩거리기 시작했다. 성만이 주부우울증에 걸린 것이다. 프랑스어를 하나도 할 줄 모르는 성만에게 주어진 젠더 역할이 기존의 '아내'역할이었기에, 집에서 외부와의 소통 없이 살림과 요리를 담당하던 그는 점점 시들어간다. 반면 아름은? 그녀는 프랑스어에 능통했기에, 마치 기존 젠더 역할의 '남편'처럼 경제와 행정을 담당했으며, 학교를 다니는 터라 외부인과의 소통도 잦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름이 바깥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성만에게 재잘재잘 얘기하고 싶어 하면, 주부인 성만은 이미 가사노동에 지쳐 받아줄 여력이 없는 식이다. 아, 이렇게 남자 여자 역할이 바뀔 수도 있는 거구나.
보리가 태어나고, 결혼은 더욱이 현실이 되다
아름은 프랑스 유학 도중 임신을 했고 출산을 했다. 그녀의 몸을 빌어 나온 아기 '보리'를 돌보는 것은 당연히 이 가정에서는 성만의 몫이다. 아름은 출산 후 다시 학구열에 불타기 시작하고, 성만이 차려주는 도시락을 들고 학교에 간다. 젠더 역할이 바뀐 결혼생활이라 해서 다를 건 없었다. 여전히 살림을 하는 쪽은 우울증을 겪고, 경제를 담당하는 아름의 목소리는 어쩐지 커진다. 이번 달 식비는 왜 이렇게 많이 나왔냐며 타박하던 남편의 역할을 아름이 하고 있고, 가사노동 파업을 선언하고 가출하는 쪽은 성만이다. 그러니 남성과 여성의 역할은 태어날 때 정해지는 게 아니라 사회적 상황에 따라 언제든 바뀔 수 있음을, 박강아름 감독은 자신의 결혼생활을 통해 증명하고 있는 셈이었다.
영화 속의 코너, 외길식당
영화 속에서 부부가 운영하는 '외길식당'은, 원래 이 다큐멘터리의 본 소재였다고 한다. 자신을 따라 프랑스에 왔다가 주부우울증에 걸린 성만을 위해, 아름이 기획한 일이었다. 요리 일을 해왔던 성만은 자신의 재능을 십분 발휘할 수 있고, 마찬가지로 가난한 유학생인 아름-성만 부부가 생활비를 벌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하지만 외길식당 자체보다는 성만과 아름의 결혼에 대한 성찰이 많아지면서, 영화의 주제는 곧 '결혼'이 되었다. 때문에 외길식당은 영화 속의 작은 코너가 되어버렸지만, 외길식당의 지분은 꽤나 존재감 있고 또 의미 있었다. 특히나 2차로 진행된 '외길식당'에서는 프랑스에서 살고 있는 커플들이 손님으로 오면서, 영화의 이야기를 더 풍성하게 하는 느낌이 들었다.
2차 외길식당을 진행할 당시, 아름과 성만 부부는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아이(보리)와 서로 간의 막중한 노동으로 다투는 일이 잦아지고 있었다. 그러면서 감독인 아름의 머릿속에는 "결혼이란 건 뭘까?"라는 생각이 피어오른다. 다른 이들을 통해 그 답을 얻고 싶었던 박강아름 감독은, 외길식당의 손님으로 현지 커플들을 초대하기로 했다. 비록 감독은 외길식당을 통해 명쾌하게 그 답을 얻지는 못했다고 밝혔지만, 관객인 나는 여러 모습의 국제커플들을 보며 결혼에 대한 생각을 해볼 수 있어 좋았다. 특히 프랑스에 존재하는 제도인 '팍스'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예식을 올린 뒤 서로의 가족과 끈끈하게 얽혀야 하는 것이 결혼제도라면, '팍스'는 그런 것들로부터 자유롭지만 배우자 권리는 인정받을 수 있는 대안적 제도이기 때문이다.
결혼은, 비바람이 부는 덩케르크 해변 같은 것
비혼 아니면 결혼. 이렇게 두 가지 밖에는 답안이 없는 나라에서 태어나 살아온 한국인이었기에, 나는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결혼을 택했다. 어쩌면 박강아름 감독도 성만을 사랑했고, 비혼주의는 아니었기에, 결혼을 해야겠다는 일반적 사고를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듯, 그녀도 결혼이 주는 다소 힘든 책임의 무게를 결혼 전에는 가늠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어질러진 집을 치우고, 침 흘리는 아가를 돌보고, 공과금을 내고, 지지고 볶고 살아가는 일상의 무게에 대해. 결혼에 대한 이런 일반적인 회의는 기혼자라면 누구에게나 한 번씩 찾아오는 지점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 다큐멘터리가 뻔하지 않고 색다른 의미를 갖는 건, 내가 남편 역할을 하든 아내 역할을 하든 결혼은 결혼이고 생활은 생활이라는 감독의 자전적 성찰을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젠더에 상관없이 결혼생활이 비슷한 결을 띤다는 것은, 나도 이 영화를 통해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으니까.이 영화의 엔딩은,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 덩케르크 해변으로 나가는 아름과 성만, 그리고 큰 유모차에 실린 보리, 그리고 강아지 슈슈 모습이다. 박강아름 감독은 나중에 이 영상을 보고 울었다고 했다. 온몸이 비에 젖고, 아이와 강아지를 끌고 바람에 맞서는 것이 결혼생활처럼 느껴져서라고 했다. 기혼자인 나의 마음에도 그 장면은 감독의 의도대로, 지난한 '결혼생활'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음악도 없이 롱 테이크로 이어지는 그 장면을 전혀 지루하지 않게 바라볼 수 있었다. 원래 결혼이란 그런 거니까, 로맨틱한 음악이 깔리면 그건 연애지. 음악 없고, 날씨도 좀 궂고, 양손 가득 챙겨야 할 것들이 주렁주렁 매달린... 그런 게 뭐 결혼생활 아니겠나, 하는 마음에 홀딱 빠져서 봤다. 그러나 그 모습이 억울하기보단 아름답게 느껴졌다면, 나 좀 해탈한 건가.
결혼에 대한 이해를 돕는 영화나는 이 영화가 결혼을 장려하는 영화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두 부부의 모습은 때때로 귀엽고 유쾌하지만, 너무나 날 것이어서 갈등과 회의도 적나라하게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결혼을 부정하는 영화냐 하면 그것은 또 아니라 생각한다. 그저, 이 영화는 결혼에 대한 이해를 돕는 영화라고 해야겠다. 비혼주의가 유행하는 시대에 기혼의 삶을 택한 여성 감독의 이 '젠더 체인지' 자전적 다큐멘터리는, 결혼을 앞두고 있는, 혹은 결혼에 대해 알고 싶은, 혹은 이미 결혼을 한 사람들 모두에게 성찰의 여지를 주는 이야기가 될 테니까. 하루하루 지지고 볶는 기혼자의 삶을 사는 나는 어찌나 울고 웃으며 보았는지. 마, 이게 결혼이다!
** 본 콘텐츠는 브런치 '우두미'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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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악일 때 사랑하면 최악이 된다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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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개봉 전부터 이미 포스터로 유명해진 영화다. 배우 정재영이 주연을 맡은<나의 결혼 원정기>(2005)의 한 장면과 유사하다는 것. 배급사인 그린나래미디어는 공식 트위텅 정재영 배우로부터 온 메시지를 게재하며 이 밈(meme)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한국 사람들은 재미있다. 어쩌면 머나먼 노르웨이에서 온 이 영화가 포스터 때문이라도 한국에서 대박을 칠지도 모르는 일이다.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선언은 진부하지만 나름대로 유효하다. 나는 자꾸만 '누구나 사랑할 땐 최악이 된다'로 제목을 혼돈했다. 주어의 자리를 어디에 둘 것인가는 중요한 문제다. 누구나 사랑할 때 최악이 된다고 할 때는 최악이 되는 사람의 변명 같이 들리지만 주어의 자리를 바꾸었을 때는 사랑에 빠진 사람이 종종 저지르는 귀여운 어리석음처럼 보인다. 어쨌거나, 사랑할 때 사람들은 자주 바보가 된다. 나도 그렇다.
사랑할 때 나는 얼마나 최악인가를 떠올렸다. 성숙한 사람들은 사랑할 때 최고의 모습만 보여줄까? 지나고 나서 보면 나는 항상 최악이었던 것 같은데, 내가 미성숙해서일까. 일련의 과정들을 거치며 성숙해지기는 할까. 언젠가 성숙한 어른이라는 모양새를 갖추기는 할지 의문이다.
'사랑할 때'라는 때는 언제일까. 영화의 원제는 덴마크어, 영제는 <The Worst Person in the World>이다. 세상에서 제일 별로인 사람. 그 제목이 어쩌다 '사랑할 땐'이라는 조건이 붙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목이 멋지다. <더 워스트 퍼슨 인 더 월드>라는 제목으로 개봉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오랜만에 음차번역을 하지 않은 제목을 만나 반갑기까지 하다.우리나라는 사랑 이야기를 좋아하는 나라고, 그렇기에 '사랑하면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선언에 공감하며 영화표를 끊을 관객도 많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서른, 잔치는 끝났나?
율리에는 의학을 공부하다가 때려치우고, 심리학을 공부하다가 또 때려치우고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다. 사진을 공부하면서 연애도 하고, 사람도 만난다. 그러다 <밥캣>의 작가로 유명한 악셀과 사랑에 빠진다. 악셀과 살림을 합치고, 악셀의 친구들과 가족을 만난다. 40대 중반인 악셀은 율리에와 아이를 낳고 키우고 싶어한다. 그러나 율리에는 이제 겨우 서른이다.
'서른'이라는 숫자는 유난히도 사람을 불안하게 한다. 마치 서른이 되면 인생이 끝난다는 듯이, 혹은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다는 듯이. 나는 스물아홉 살에서 서른 살로 넘어가던 날 밤에 혼자 집에 앉아 나의 이십대에 관하여 구구절절 썼다. 이제 그 파일은 어디에 갔는지 지워졌는지 기억도 안 나고, 그 사이 내 노트북이 두어 번 바뀌었으며 뭐라고 썼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마지막 문장이 '다 사랑 때문이었다'였다는 것만 기억한다.
그렇게 나는 어리석었다. 사랑할 때 최악이 되었다는 진부한 생각을 했다. 나의 방황과 슬픔과 우울과 불면의 밤들을 사랑 때문이었다고 단순히 정의내렸다. 20대의 나는 공공연하게든 공공연하지 않게든 늘 누군가를 만나왔고, 그것이 내 안에 있는 어떤 사랑의 결핍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율리에의 부모는 이혼하였고 아버지는 새 가정을 꾸렸으며 율리에에게 절대 먼저 연락하거나 찾아오는 법이 없다. 율리에가 악셀에게 헤어지자고 말하자 악셀은 그 점을 지적한다.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악셀에게 전이된 거라고.
악셀은 40대 중반의 남성으로, 카툰 <밥캣>으로 이미 성공을 거둔 작가다. 악셀을 제외한 친구들은 모두 결혼하여 자식을 키우며 평범하게 산다. 악셀은 율리에와 동거하면서 율리에와 친구들처럼 살기를 바란다. 하지만 율리에는 자꾸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다고만 한다. "넌 좋은 엄마가 될 거야"라는 악셀의 말들은 율리에의 마음을 더 불편하게 만들지만, 악셀은 잘 모르는 것 같다.
악셀은 다정하고 섬세한 남자다. 물론 그의 작품에 성차별적 요소가 다분하고,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여 여성혐오적 발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으며 '예술에 도덕적 잣대를 들이댈 수는 없다'는 식의 사고방식을 가졌지만.
율리에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로 엄마가 되면 앞으로의 인생은 오직 '엄마'로만 점철될 것이다. 악셀은 아빠가 되어도 여전히 유명한 만화가이자 아빠로 존재하지만 율리에는 그냥 누군가의 엄마일 뿐이다.
악셀이 새로 나온 만화의 출판기념회를 하던 날, 율리에는 떠들썩한 행사장에서 조용히 빠져나온다. 한참을 하염없이 걷다 어느 파티장으로 들어가 파티에 초대받은 사람처럼, 또 자기가 의사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아무도 자기를 모르는 장소에서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설령 아무것도 되지 못한 사람이더라도.
익명의 파티장에서 익명의 참가자가 된 율리에는 익명의 남자와 대화를 시작한다. 둘 다 동거인이 있는 상황이기에 '선'을 정하고, 어디까지가 바람이고 어디까지가 아닌지를 테스트한다. 이들은 '테스트'라는 이름 아래 온갖 기행을 하는데, 이들 스스로가 '이건 바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행동에 거침이 없다.
날이 밝아 헤어질 때까지도 서로의 본명을 모른다. 뭘 하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이름을 알면 궁금해지고, 찾아보고 싶어지니까. 그렇게 되면 그들이 정한 '선'을 넘어버리게 되니까.
중요한 건 타이밍
의사가 아니라 서점 점원으로 일하고 있는 율리에의 앞에 운명처럼 그 날의 그 남자가 다시 나타난다. 그의 애인과 함께. 아직까지는 아슬아슬하다. 그러나 어느날 아침, 그를 다시 만나야겠다고 결심한 율리에는 그가 일한다는 카페로 달려간다. 그의 이름을 부른다(에이빈드). 주변의 모든 시간이 멈추고 세상에 오직 그와 자신만 존재하는 듯하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
율리에는 악셀에게 사랑하지만 헤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악셀은 '오래 살아봐서 아는데, 이런 사랑은 없다'며 율리에를 붙잡는다. 그러므로 율리에는 악셀의 곁을 떠나야 한다. 아직 이룬 것도, 원하는 것을 찾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직업적으로도 성공한데다 율리에가 살아보지 못한 시간들까지 미리 살아본 악셀과 함께 있으면 율리에는 자꾸만 스스로를 악셀과 비교하게 된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그 마음을 티낼 수도 없다.
악셀을 떠나야 하는 이유는 율리에의 상황이 최악이라서다. 타이밍이 안 좋다. 상황이 최악일 때 사랑(또는 연애)을 하면 최악이 된다. 가진 것도 없고 내밀 것도 없고 당당하지도 못하고, 하필이면 가장 가까운 사람과 비교하다 결국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상처를 주고 마는, 세상에서 제일 후진 사람이 되는 거다.
에이빈드 역시 수니바와 헤어진다. 에이빈드의 여자친구였던 수니바는 어느날 자신의 멀고 먼 조상에 대해 알게 되었고, 별안간 요가를 시작하고,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에이빈드는 딱히 신념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하자는 대로 잘 따랐던 것 같다. 운명처럼 수니바는 요가와 명상을 위해 떠나고 SNS 스타가 된다. 헤어져야 할 타이밍이다.
각자의 관계를 정리하고 본격적으로 만나게 된 율리에와 에이빈드. 이들의 앞에도 비단길만 깔려있지는 않다. 에이빈드는 환경을 위해 자식을 낳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나 실수로 율리에가 임신을 하게 되고, 율리에의 눈에는 미래 계획도 없이 파트타이머로만 일하는 에이빈드가 한심해 보인다.
영화는 프롤로그와 열두 개의 챕터, 에필로그로 구성되어 있다. 프롤로그에서는 의학을, 심리학을, 사진을 찍다 사귀게 된 남자친구를, 오슬로를 싫증내는 율리에의 모습을 담는다. 에필로그에서는 무엇을 하고 싶고 무엇을 잘하는지를 찾아내고 마침내 홀로 선 율리에가 등장한다.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사람을 쉽게 속인다. 어쩌면 외롭다는 생각이 들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연애가 아니라 성취가 아닐까. 율리에는 하고 싶은 일과 잘하는 일을 찾지 못한 채 불안한 서른을 눈앞에 두었을 때 연애에 몸을 내던졌다. 하지만 그 연애는 율리에의 내면 깊은 곳에 있던 결핍을 채워주지 못했다.
율리에의 결핍을 채울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었다. 악셀과의 운명같은 사랑도, 에이빈드와 아이를 낳고 안정적인 가정을 이루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이 영화의 제목은 낭만적인 오역이다. 율리에는 사랑해서 최악이 된 것이 아니었다. 최악일 때 사랑하는 바람에 최악의 상황들이 만들어진 것이다. 공허함을 사람으로 채우려고 할 때 비극이 시작된다.
영화의 위의 장면에서 시작한다. 악셀의 출판기념회 현장을 미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는 율리에. 사랑하는 사람을 질투하는 못난 사람, 세상에서 가장 별로인 사람(The worst person in the world)이 되는 순간. 그 감정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The Worst Person in the World, 2021)
감독 : 요아킴 트리에
출연 : 레나테 레인스베, 앤더슨 다니엘슨 라이, 할버트 노르드룸 외
상영시간 : 121분
*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시사회에 참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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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제를 초월하는 아름답고 슬픈 영화적 체험
- 햇볕에 피부가 타지 않도록 바르는 제품이 선크림이라면, 애프터썬(Aftersun)은 타버린 피부를 진정시키기 위해 바르는 제품을 말합니다. 햇빛 아래에 있을 때는 까맣게 모르다가 하룻밤 자고 나서야 따끔따끔 아파지는 살갗 위에 우리는 애프터썬을 바르죠.영화 <애프터썬>은 그 이름처럼 ‘애프터썬’이 필요한 작품입니다. 영화를 볼 때는 까맣게 모르다가 다 보고 나서야 마음이 저릿하게 아파오기 때문입니다. 곱씹을수록 아프고 저린 영화 <애프터썬>에 관한 감상을 나눕니다.※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1월 31일(화)에 진행된 <애프터썬> 시사회를 통해 영화를 감상했습니다. <애프터썬>은 2023년 2월 1일 국내 개봉했습니다.애프터썬Aftersun<애프터썬>은 30살 아빠 ‘캘럼’과 11살 딸 ‘소피’가 어느 여름날에 떠난 휴가지에서 촬영한 캠코더 영상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캘럼’과 ‘소피’가 찍은 캠코더 영상은 때때로 어지러이 흔들리며 어느 한 곳에 정확히 초점을 맞추지 못하는데요. 이 영화도 비슷합니다. 단 한순간도 의도적인 대사나 장면으로 주제를 명확히 짚어주지 않죠. 대신 아빠이자 청년인 ‘캘럼’과 딸이자 소녀인 ‘소피’, 그리고 그 여름날의 휴가를 오롯이 체험할 수 있도록, 지근거리에서 인물과 사건을 포착할 뿐입니다. 관객은 이러한 영화적 체험 안에서 직접 영화의 주제를 찾아 나서야만 하죠.저는 ‘소피’였다가 ‘캘럼’이기를 반복하며 영화를 보았습니다. 어느 순간에는 이혼한 엄마와 함께 살 가능성은 없는지 스리슬쩍 떠보는 ‘소피’였다가, 또 어느 순간에는 소속감을 잃어버린 곳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다고 말하는 ‘캘럼’이었죠. 그러다 다시 어른스러운 척하면서도 실은 성숙해지고 싶은 어린 소녀 ‘소피’가 되었고, 한편으로는 저도 모르는 새에 어른이 되어버린 미성숙한 청년 ‘캘럼’을 이해했습니다. <애프터썬>에는 이러한 체험의 순간들이 상영시간 내내 이슬비처럼 슬며시 내립니다. 작고 미세한 이슬방울은 알아차리기가 어렵듯이, 영화를 보는 도중에는 이런 순간들이 그저 흘러가버리죠. 관객은 영화 막바지에 다다라서야 비로소 이슬비에 온몸이 젖어버렸다는 걸 깨닫습니다.⊙ ⊙ ⊙아빠 ‘캘럼’과 딸 ‘소피’가 휴가의 마지막 밤을 기념하며 함께 춤을 추는 장면이 제가 온몸이 다 젖어버렸다는 걸 알아차린 순간이었습니다. 사실 <애프터썬>은 여러 장면을 통해 ‘캘럼‘이 삶의 끝자락에 서 있는 인물임을 암시합니다. 딸 ‘소피’가 없을 때의 ‘캘럼’은 난간에 위태롭게 올라서고, 살이 베일 정도로 거칠게 깁스를 풀며, 남이 버린 담배를 주워 피는 등 삶에 큰 미련을 보이지 않습니다.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 시도를 하려다가 실패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그도 살아있음을 느끼는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춤을 추거나 기체조를 하며 몸을 움직일 때였죠. ’캘럼’은 그 감각을 ‘소피’에게도 전해주고 싶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함께 춘 춤은 아빠에 대한 ’소피‘의 마지막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어른이 된 ’소피‘는 춤을 추는 아빠를 계속해서 떠올립니다.이 장면에 배경음악으로 삽입된 퀸(Queen)의 노래 ‘Under Pressure’에는 “This is our last dance”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토해내듯 절정을 향해 치닫는 퀸의 노래 속에서 가사처럼 모든 걸 뒤로 한 채 그저 딸과 함께 마지막 춤을 추는 ‘캘럼‘의 모습을 보고, 울컥 눈물이 차올라 당황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도 모르게 <애프터썬>의 감정에 서서히 젖어들고 있었다는 걸 몰랐던 것이죠. 햇빛 아래에서는 약해진 피부의 아픔이 잘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애프터썬>의 주제는 한 문장으로 명확히 정리하기 어렵지만, <애프터썬>의 감정은 분명히 와닿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덩어리로 분명히 존재하는 이 감정을 무어라고 정의하기는 또 쉽지 않습니다. 샬롯 웰스 감독은 이 영화의 맥락과 맞닿아있는 단어로 튀르키예어 단어 ’harset’을 골랐다고 합니다. 튀르키예어에서 ‘harset’은 그리움, 사랑, 상실의 어떤 조합을 의미합니다. 영어 단어로도, 한국어 단어로도 대체할 수 없는 표현이죠. 형언할 수 없는 여러 감정이 한데 엉겨 붙어 있는 영화 <애프터썬>은 그 감정의 힘으로 관객을 사로잡습니다.⊙ ⊙ ⊙‘소피’에게 그 여름날을 담은 캠코더 영상은 살갗을 벗길 만큼 뜨거운 태양이겠지요. 아빠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아빠를 잃은 상실감, 아빠를 향한 그리움 같은 것들이 그를 아프게 할 테니 말입니다. 그러나 또한 상처 입은 피부 위에 덧바를 수 있는 ‘애프터썬’이기도 할 겁니다. 위태로움과 미숙함 속에서도 있는 힘껏 나를 사랑해 주었던 아빠의 모습이 그 안에 가득할 테니까요.영화를 떠올릴 때마다 너무 아파서, 또 그만큼 너무 좋아서, 고통과 치유 사이를 오가며 이 글을 썼습니다. 아무래도 <애프터썬>은 제게도 뜨거운 태양이자 '애프터썬'인가 봅니다.Summary아빠와 20여 년 전 갔던 튀르키예 여행. 둘만의 기억이 담긴 오래된 캠코더를 꺼내자 그해 여름이 물결처럼 출렁이기 시작한다. (출처: 씨네21)Cast감독: 샬롯 웰스출연: 폴 메스칼, 프랭키 코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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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죽을 날을 알려준다면 당신은 4% 안에 들겠습니까??
#버킷리스트#죽기전에꼭봐야할영화#인생영화
▼구독은 여러분의 큰 힘입니다https://www.youtube.com/channel/UCNqd...
▼무비워크 먹여살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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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기예르모델토로 감독이 선사하는 숨을 조이는 매혹적인 범죄 스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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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애플> 메인 예고편
당신을 사로잡을 가장 특별한 여운
원인 모를 단기 기억상실증 유행병에 걸린 ‘알리스’에게 유일하게 남은 기억은 이름도 집 주소도 아닌 한 입 베어 문 사과의 맛. 며칠이 지나도 그를 찾아오는 가족이 나타나지 않자 무연고 환자로 분류된 ‘알리스’에게 병원에서는 새로운 경험들로 기억을 만들어내는 ‘인생 배우기’ 프로그램을 제안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알리스’는 자신처럼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는 ‘안나’를 만난다.
괜찮아요, 다들 잊고 사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