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카타임2025-02-14 17:46:19
아직 우리 사회에 숨어있는 ‘신분제’에 대하여
영화 <아노라> 리뷰
신데렐라 스토리
신데렐라 스토리는 진부하다. 단순히 반복적 활용 때문에 생긴 싫증은 아니다.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이야기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루아침에 왕자를 만나 삶이 역전된다는 서사는 적어도 내가 살아가는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노라>의 이야기는 그런 신데렐라 스토리를 정면으로 비튼다. 그래서 지극히 현실적이고, 그래서 더욱 마음 아프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후에도 여운에 묻혀 자리를 뜨지 못하였던 것은 외면했던 현실을 마주했기 때문이다. <아노라>의 이야기가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평범한 대학생에게도 작용될 만큼 우리가 외면해 왔던 냉혹한 사회의 현실을, 그 현실에 살아가고 있는 한 여성을 조명하기 때문이 아닐까.
아노라 그녀의 꿈과 현실
‘아노라’는 스트립 클럽에서 일하는 성 노동자이다. 그렇다고 별반 다를 게 없다. 기계적으로 일을 하며, 일을 마친 후 좀비처럼 집으로 퇴근하는 모습은 지하철 속 직장인의 얼굴과 다를 게 없다. 호화롭게 살진 못해 밤에 일하고 낮에 자야 하는 삶임에도 교각 위 지하철이 시끄럽게 울려대는 집에서 도움 안 되는 수면 안대를 끼고 억지로라도 잠을 청하는 삶이다. 그런 그녀에게 어느 순간 꿈만 같은 남자 ‘이반’이 찾아오게 된다. 스트립 클럽 손님으로서 맞이하게 된 ‘이반’은 재벌 2세이다. 그것도 소위 ‘다이아 수저’라 불릴 만큼 돈이 많은. ‘아노라’는 그런 그와의 행복한 삶, 신분 상승을 꿈꾸게 된다. 대체 왜 마약, 파티, 섹스의 끝이 결혼이었던가. ‘아노라’와 ‘이반’은 그렇게 충동적으로 라스베이거스에서 결혼까지 하게 된다.
행복했던 나날들도 잠시, 그들의 결혼 문제가 기사화가 되며 러시아에 사시는 ‘이반’의 부모님은 하수인 세 명을 시켜 ‘이반’의 결혼을 무효화시키려 한다. 그렇게 둘의 집으로 불청객 세 명이 무단 침입하게 되고, 부모님의 화가 무서웠던 ‘이반’은 ‘아노라’를 버리고 도망가며 영화는 전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신분의 벽과 권력의 작용
<아노라>는 우리가 외면해왔던 소외 계층 사람들의 모습과 그들에게 작용하는 권력 관계를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이러한 사회 현실에 대해 교훈적으로 내용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영화에 반영함으로써 반감 없는 큰 공감을 이끌어낸다. 스트리퍼인 ‘아노라’는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시종일관 쾌락에만 관심있는 ‘이반’과 달리, 그녀는 신분 상승의 욕망, 돈에 대한 욕심을 가감 없이 드러내면서도 결혼 문제, 가정 문제에 대해서 누구보다 진지한 모습도 내비치는 입체적인 인물로서 그려진다. 그녀가 갖고 있는 신분 상승의 욕망은 이미 어그러질 것을 짐작하고 있는 관객의 입장에서 안쓰럽고 처량하다. 그러한 모습은 동시에 ‘블랙코미디’와도 맞닿아 있다. 하수인 세 명이 맨션에 침입한 씬에서, 자신을 버리고 도망간 ‘이반’을 시종일관 찾으며 나는 이반의 아내임을 끊임없이 주장하는 ‘아노라’와 그런 그녀를 쩔쩔매며 통제하려는 건장한 러시아 아저씨들의 모습은 웃음을 자아낸다. 이 시퀀스에서 그녀는 처량하기도 하면서 동시에 ‘웃기다’. 씁쓸한 웃음을 짓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녀의 발버둥은 사라진 줄 알았던 우리 사회의 ‘신분제’ 시스템이 아직도 인식 차원에서 잔존해 있음을 상기시켜준다. 행동 대장인 ‘이고르’, ‘가닉’ 그리고 그들의 보스인 ‘토로소’와 ‘아노라’의 육탄전에서 그러한 미묘한 권력 관계를 엿볼 수 있다. ‘가닉’과 ‘토로소’는 ‘이반’의 가문에서 고용한 수행원들로, ‘이반’의 ‘사고’를 어떻게든 수습하기 위해 투입되었다. 그들은 꽤나 건장한 체형의 ‘몸을 쓰는’ 남자들이지만 ‘이반’에게 손을 대면 안 된다. 그러나 그들은 ‘아노라’를 대할 땐 다르다. ‘창녀’라는 수식어를 붙이며 그녀가 ‘이반’의 가문에 ‘결혼 제도’로써 들어오게 된 것을 좋지 않게 생각한다. 물론 그러한 인식은 그들이 자발적으로 갖고 있는 것이 아닌 그들의 고용주인 ‘이반’의 부모에게 잘 보여야 하고 이번 사고를 수습하지 못하면 이 고용 관계가 끊길 수도 있다는 압박이 오기 때문이다. 세 하수인과 ‘아노라’ 그리고 도망가버린 ‘이반’과 그의 가문에 명확히 보이는 ‘계급’이 존재한 것이다. 재밌는 인물은 ‘이고르’이다. 그는 ‘가닉’이 오늘 일만 도와줄 사람으로 부른 어찌 보면 세 하수인 중 권력이 가장 낮은 인물이다. 멍청하게도 보이는 그는 ‘아노라’에게 어색한 공기 속에서 연신 미안하다, 이러면 안 된다 등의 말을 되풀이한다. 이런 사소한 유머 씬에서도 우리는 더 미묘한 권력 관계를 엿볼 수 있게 된다.
비극적 희극, 씁쓸한 웃음
영화는 이러한 미묘한 관계를 블랙코미디 요소와 결합하여 더욱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세 하수인과 ‘아노라’의 도망가버린 ‘이반’을 찾는 좌충우돌 로드 무비도 인상적이다. 하는 일마다 꼬이고 난관에 봉착하며 시종일관 소리를 지르며 싸우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서는 미묘한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다만 그 상황에서도 권력 관계는 영향을 미치며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미묘하게 드러난다. 영화를 보며 씁쓸한 웃음을 계속 짓게 되는 이유이다. 이런 미묘한 권력 관계와 블랙코미디를 적재적소에 배합하여 하나의 극을 이끌어 간 그 능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의 여운을 자아내는 엔딩씬, 여러 해석이 존재하지만 그런 해석의 다양성이 이 영화를 더욱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영화가 끝나고 난 뒤,
신분이란 무엇인가. 분명 조선시대 이후로 봉건 사회가 개혁되며 노예 제도, 신분 제도는 분명 없어진 것 아니었나. 단지 ‘스트리퍼’라는 직업을 가졌다는 것만으로 한 인물의 욕망이 좌절되며 바꿀 수 없는 큰 벽에 부딪히게 된다. 소위 ‘결정사(결혼정보회사)’라고 불리는 곳에서 아직도 남아있는 신분제의 모습을 더욱 적나라하게 확인 할 수 있다. 남자의 학력, 연봉, 여자의 외모와 직업.... 이 모든 것이 평가에 대상이 되고 등급이 매겨진다. 그리고 하나가 더 있다. ‘성매매’가 이루어지는 곳을 보면, ‘돈’을 매개로 육체적 관계를 놓고 일종의 ‘거래’가 이루어지며 돈 있는 자와 몸을 파는 자의 권력 관계가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그러고 보니 과연 그뿐만일까. 우리 사회에 곳곳에 이러한 권력 관계는 미묘하게 숨어있다. 그러니 영화의 마지막, ‘아노라’가 ‘이고르’와 관계 도중 갑자기 울어버리는 그 장면에서 아직 빠져나올 수 없게 된다. 그녀의 울음은 아마 진실된 사랑을 찾은 안도감에서 나오는 눈물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신분’이라는 큰 사회적 장벽에 부딪히고, 자신을 ‘애니’가 아닌 ‘아노라’ 자체로 봐줄 수 있는 남자가 있음에도 변하지 않는 자신의 위치와 정작 그 남자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곤 섹스뿐인 그 비참한 현실에 낡은 차를 가득 뒤덮는 현실의 무거운 눈처럼 먹먹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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