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블러2025-02-15 19:13:56
가능성의 우주 속 현대인의 우울, 그리고 자기혐오
다니엘 쉐이너트, 다니엘 콴의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Ⅰ. 모든 것이 가능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2022년 개봉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은 모든 것이 가능한 세상 속에서 무력감을 느끼는 현대인의 모습을 다중우주라는 SF적 요소를 통해 환상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전세계에서 제작비의 4배가 넘는 1억 달러 이상을 벌어 들이면서, 명실상부 올해 ‘예술영화’계의 다크호스로 부상했다. 주·조연 배우 모두 동양인으로 가득 채운 신인 감독의, 난해하다면 다소 난해한 SF 영화가 이다지도 평론과 대중의 눈길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 ‘모든 것이 가능한’ 에블린과 조부 투파키가 겪는 멜랑콜리가 세대와 성별, 국적을 가로질러 신자유주의 시대를 사는 관객의 마음을 관통했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차별이 철폐된 건 아니지만, 신자유주의의 물결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라도 ‘모든 것이 가능한’ 세상을 상정한다. 성별에 따라, 인종에 따라, 계급에 따라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명확히 구분되었던 과거와 달리, 현대인들은 ‘노력과 의지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있다. 하지만 이 가능성의 우주 속에서 사람들은 오히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휩싸이곤 한다. 이들에겐 세탁기 속 옷처럼 소용돌이치는 세상에서 중심을 잡아줄 그 어떤 대책도, 계획도, 보호 장치도 없기 때문이다. 한병철 교수는 이러한 가능성의 사회를 ‘피로사회’ 규정하면서, 현대인들이 흔히 겪는 무력감, 자기 소진 등을 “긍정성의 과잉에서 비롯된 병리적 상태”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긍정의 세계는 부정의 변증법, 즉 적대성을 전제하지는 않지만, 대신 ‘내재성의 테러’라는 눈에 띄지 않는 방식으로 사회를 좀먹는 새로운 폭력을 양산한다. 달리 말해, “긍정성의 과잉 상태에 아무런 대책도 없이 무력하게 내던져져 있는 새로운 인간형은 아무런 주권도 지니지 못한 채, 자발적으로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따라서, 면역학적 도식 바깥에 존재하는 우울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하다.
웨이먼드를 따라가면 연을 끊겠다는 아버지의 불호령을 무시하고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미국에 온 지도 벌써 수십 년째건만, 오프닝 시퀀스 속 에블린의 삶은 여전히 고난의 연속이다. 철저히 관찰자 시점에서 카메라는 국세청 세무 조사를 위해 책상을 모두 덮을 만큼 쌓인 영수증과 자꾸 대화를 보채는 남편, 아픈 아버지와 여자친구를 데려온 딸, 세탁소 손님들의 각종 요구를 응대해야 하는 에블린의 일상을 훑는다. 각박한 에블린의 삶은 젊었을 적 꿈꿨던 아메리칸 드림과는 멀어도 한참 멀지만, 에블린은 아버지에게 조이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애써 숨기고, 남편의 대화 요청을 무시하면서 꾸역꾸역 자신의 환상 속 정상 가족을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러나 이미 삐걱거리는 에블린의 가족상은 에블린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다시 돌아가기’ 쉽지 않다. 이것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유예하는 피로사회의 모습과도 닮아있지만, 동시에 ‘잔혹한 낙관주의’의 결과이기도 하다.
로랜 벌랜트는 “실현 불가능하여 순전히 환상에 불과하거나, 혹은 너무나 가능하여 중독성 있는 타협된 가능성의 조건에 대한 애착 관계”를 ‘잔혹한 낙관주의’라 명명하면서 애착 대상이 “심지어 자신의 안녕을 위협할 때조차 대상의 상실을 견디지 못한다는 점에서 잔혹하다”라고 설명한다. 에블린의 애착 대상은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끊임없이 광고하는 신자유주의적 ‘아메리칸드림’이다. 에블린을 여태껏 버티게 한 이 환상은 아직 상실되지 않았지만, 상실한다는 상상만으로도 에블린의 삶 자체를 무너뜨릴 만한 강한 정동을 유발하기에 에블린은 ‘가능성’의 조건에 집착한다. 언젠가는 자신의 환상이 성취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현실의 고통을 인내하지만, 세상은 에블린이 원했던 성취의 결과를 가져다주지 않는다. 오히려, 아메리칸드림 -그리고 정상 가족-에 대한 에블린의 집착은 남편과 대화를 거부하게 만들고, 딸의 여자친구를 아버지에게 소개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가족의 균열을 심화시킬 뿐이다.
벌랜트는 잔혹한 낙관주의가 ‘정치적 우울’을 유발한다면서, 잔혹한 낙관주의로 인한 정치적 우울은 “다루기 힘든 세상의 난관에 대한 냉담, 냉소, 무관심 등의 정동적 판단 속에 집요하게 남아있다” 라고 설명한다. 영화의 초반부 에블린이 모든 사람에게 무뚝뚝하고 불친절해 보이는 것은 견디기 힘든 난관을 헤쳐나가는 에블린 나름의 방어 기제이자, 잔혹한 낙관주의가 유발하는 우울이 초래한 것이다. 우울증은 이렇듯 개인에게 부과되는 원칙적인 제약이 없을 때만 발병한다.
계급, 인종, 성별에 따라 차등적인 가능성을 부여받았던 과거와 달리, 현대인은 법적으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이러한 가능성을 다중우주라는 과학적 개념을 통해 극단적으로 확장한다. 영화 속 등장인물은 ‘버스 점프’ 라는 기술을 이용해 다중우주, 그러니까 드넓은 ‘가능성’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데, 이 다중 우주는 수천, 수만 명의 에블린 중 최악의 삶을 사는 중인 우리의 에블린에겐 기회의 땅이지만, 조부 투파키에겐 긍정성의 과잉이 초래한 병리적 허무주의의 세계에 불과하다.
SF가 과학적 외삽을 통해 현재의 사회 규범을 재고하도록 유도하는 것처럼, 버스 점프 기술은 에블린의 삶을 중지시키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버스 점프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했던 세무 조사를 한순간에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고, 그 누구보다 가깝다고 여겼던 가족과의 관계를, 더 나아가 나라는 사람이 현존하는 시공간 자체를 낯설게 만든다. 영화는 에블린의 시점 쇼트를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숏-역숏 기법을 사용할 때도 늘에블린의 뒷모습을 프레임에 넣으면서 관객이 에블린과 동일시하는 것을 방해한다. 이렇듯 버스 점프라는 기술이 촉발한 중지의 사유는 관객이 철저히 에블린의 삶을 ‘관찰’함으로써 관객자신의 일상에 ‘노붐 Novoum’을 가져오는 효과를 낳는다.
타자의 이미지를 통해 나 자신을 성찰한다는 관점에서, 영화 속 거울 이미지는 라깡의 거울 단계를 떠올리게 한다. 거울 속 나의 이미지는 외형적으로 ‘나’와 닮았지만, 현존재로서 ‘나’와는 다르다. 거울 단계를 거치면서 아이는 사실 타자적 이미지인 거울 이미지를 진정한 자신으로 착각하며 살아간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첫 장면은 함께 행복한 웃음을 터뜨리는 에블린 가족의 거울 이미지로 시작한다. 에블린은 이 거울 이미지, 그러니까 정상 가족이라는 자신의 환상이 투사된 이미지를 현실이라고 믿지만, 불이 켜지고 반사된 이미지 속엔 가득 쌓인 영수증을 정리하는 고단한 에블린만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내, 진짜 남편인 웨이먼드와 알파버스의 웨이먼드가 거울 속에서 불쑥 나타나 에블린을 부른다. 거울 이미지는 에블린의 현실이 아니라고, 그래서 이제는 잔혹한 낙관주의로부터 깨어나야 한다고. 그러므로 에블린과 관객 사이의 동일시를 방해하는 미묘한 어긋남은 거울 이미지가 사실 환상에 불과함을 폭로하는 장치이다. 영화가 선사하는 중지의 미학은 ‘모든 것 everything’의 세상에서 중심을 잃고 방황하는 관객에게도 경종을 울린다.
Ⅱ. 상실이 유발하는 자기 혐오적 멜랑콜리
프로이트는 우울을 사랑하는 사람, 또는 사랑하는 사람 대신 들어선 어떤 추상적인 무언가의 상실에 대한 반응으로 규정한다. 흔히 우울을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느끼는 감정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우울은 사람뿐만 아니라 사물, 심지어는 실존하지 않는 추상적인 무언가를 잃었을 때도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삶은 필연적으로 상실을 수반한다. 어쩌면 삶 자체가 무언가를 상실해가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 속 모든 등장인 물은 무언가를 상실하고, 그래서 슬퍼한다. 커다란 모자 속에 너구리를 숨기고 함께 요리하던 요리사는 너구리를 뺏기고, 국세청 직원은 남편과 이혼하며, 손이 소시지로 변해버린 평행 우주 속 에블린은 연인과 이별한다. 가족에게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받을 수 없는 조이는 정체성을, 그 모든 평행 우주 속 가능성 속에서 조부 투파키는 삶의 목적을 상실한다.
사람은 누구나 상실을 겪지만, 누구나 우울한 것은 아니다. 프로이트는 슬픔과 우울의 유일한 차이점을 자애심(自愛心)의 추락으로 설명한다. 슬픔을 느끼는 사람에게는 ‘세상’이 빈곤하고 공허해지지만, 우울증에 걸린 사람에게는 “자아가 빈곤해지고 공허”해진다. “쓸모없고, 무능력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자아. 그래서 “비난하고 처벌하고, 추방”해야 하는 자아. 영화속 등장인물들을 불안, 분노, 좌절과 같은 다른 부정적 감정이 아닌 ‘우울’로 설명하는 것은 바로 이런 자기 혐오적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들은 “상실의 리비도를 자아에 통합하고 결국에는 자기 자신을 공격” 한다는 점에서 ‘우울’하다.
국세청 직원은 욕을 섞어가면서까지 자신이 받은 상을 과시하고, 과도할 정도로 깐깐하게 세무 조사를 진행한다. 하지만 과시는 결핍이라고 했던가.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지 떠들어대는 인물의 내면에는 자기 자신을 향한 혐오가 자리한다. 조부 투파키는 가능성의 우주 속에서 비난의 화살을 자기 자신에게로 돌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할 줄 아는 인물이다. 4655번째 평행 우주에서 국세청 직원은 조부 투파키의 열렬한 신자로, 에블린을 찾아 죽이려고 한다. 그녀의 이마엔 방금 ‘진짜’ 에블린의 세상에서 영수증에 싸인 펜으로 그린 원이 그대로 그려져 있다. 4655번째 평행 우주의 에블린을 때려눕힌 국세청 직원은 조부 투파키가 “사람들의 본질과 그들의 자존감(self worth)이 얼마나 취약한지 알고 있다”라고 말한다. 모든 것을 알고 어디에도 있을 수 있는 전지전능함 앞에서, 쓰러진 에블린 앞에 인질로 잡힌 직원들은 나약한 ‘찰나의 순간’에 불과하다. 조부 투파키는 자신이 선택할 수 있었던 모든 가능성 앞에서 한 개인의 무력함을, 자기 자신의 쓸모없음을 이해해 줄 단 한 명의 에블린을 찾아 수많은 사람을 학살한다.
미친 사람처럼 우주를 누비며 학살을 일삼는 조부 투파키는 단순히 자신을 이렇게 만든 에블린에게 화가 난 것도, 이 세상에 절망한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이 무인 세계로 돌아가려는 조부 투파키의 자기 파괴적 ‘열광’은 가능성의 세계 속에서 삶의 목적을 잃어버린 우울증 환자의 조증과도 같다. 조부 투파키는 마치 구원을 원하는 듯이 자신의 우울을 이해할 수 있는단 한 사람, 에블린을 애타게 찾아다닌다. 그리고는 마침내 찾은 ‘그’ 에블린에게 자기와 함께 베이글 속으로 들어가자고 말한다. 세상을 호령할 수 있음에도 무의 세계로 자멸하려는 조부 투파키의 모습은 무엇이든 할 수 있음에도 오히려 무기력증에 빠지고 마는 현대인과 닮아있다. 그의 멜랑콜리는 평행 우주 속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무엇이든 ‘될’ 수는 없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진화 과정에서 인류의 손가락이 소시지가 될지언정, 어떤 평행 우주에서도 ‘나’는 그저 나일 뿐이다. 가능성의 우주에서조차 나는 ‘고작’ 내가 될 수밖에 없다는, 자기혐오. 조부 투파키는 자기의 삶이 거대한 세상 속 찰나의 순간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허무나 좌절의 외침이 아니다. “어디든 갈 수 있잖아. 그냥 가 버려. 딸이 ‘이것’보다는 더 나은 세계로.” 모든 것이 가능해서, 바로 그 이유로 우리는 상실을 경험할 때마다 세상을 탓하는 대신, 자기 자신을 비난한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특별함은 엄마를 영웅으로, 딸을 빌런으로 내세운 줄거리에서 모성애의 아름다움이나 애증의 모녀 관계를 넘어, 현대인의 고질적인 자기 혐오적 멜랑콜리를 그려냈다는 데 있다. 그러나 영화의 클라이맥스 장면에서 ‘이것’보다는 딸을 찾아 떠나라고 외치는 조부 투파키의 멜랑콜리는 조이의 문화적 우울과 겹쳐 새로운 정동의 물결을 만들어낸다. 버틀러는 젠더 이상과 현실적인 젠더 사이의 차이에서 젠더 규범을 전복할 수 있는 저항성을 찾아냈지만, 동시에 그런 저항은 우울증의 형태로 드러나게 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상실의 내면화는 상실의 부인이 되고, 상실의 거부는 우울증이 된다. 만약 상실의 대상이 동성애라면, 동성애적 리비도 집중은 죄의식을 수반한다. 이렇듯 우울증적 주체는 상실의 대상이 무의식화되어 있으므로 드러내는 애도를 통해 상실을 ‘해소’할 수 없다.
할아버지에게 여자친구를 ‘좋은 친구’라고 설명하는 에블린에게 화가 난 조이는 차를 타고 세탁소를 떠나려고 한다. 에블린은 조이를 불러 세우지만, 옴싹달싹 움직인 입에서 내뱉은 말이라곤 ‘살 좀 빼’라는 핀잔뿐이다. 조이는 평생을 중국에서 살아온 할아버지에게 거리낌 없이 자신의 동성애 성향을 드러냄으로써 이성애 중심의 ‘정상 가족’에 끊임없이 저항한다. 그러나 버틀러의 지적처럼, 고착화된 젠더 규범에 균열을 내려는 시도는 자기혐오적 멜랑콜리를 수반 한다. 에블린의 아버지에게 에블린은 늘 ‘무엇 하나 제대로 끝내지 못하는 변변찮은 딸’이었 고, 따라서 퀴어라는 정체성은 에블린에게 있어 숨겨야만 하는, 수치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이 다. “나르시시즘과 죄책감, 수치심”을 동반하는 자기혐오는 오랜 시간 “성적 타자로서 차별적 배제와 억압적 대우를 받은 결과”이다.
조이의 문화적 우울과 성적 타자로서 자기혐오는 조부 투파키의 자기혐오와는 분명 다르다. 조부 투파키는 가능성의 세계에 속해 있지만, 조이는 주체의 세계에서 배제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이 둘의 우울을 한 장면에 겹쳐 놓는다. 데칼코마니처럼 수미상관을 이루는 두 장면은 차 문을 열고 떠나려는 조이를 에블린이 붙잡는 구도로 촬영되었다. 파란 옷과 붉은 옷, 대낮과 한밤, 우울과 열광. 동전의 양면처럼 조부 투파키와 조이는 이어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똑같은 경험을 겪지 않고도 소외되고 차별받고 배제되는 타자에게 먼저 손내밀 수 있다. 그들이 느끼는 우울과 자기혐오의 감정을 우리도 충분히 느끼고 있으므로. 상대방이 우울하다는 사실, 그 자체를 온몸으로 맞이할 때, 비로소 타자를 향한 손짓이 시작될수 있다.
Ⅲ. 우연의 접촉이 만들어낸 정동의 이행
영화는 말한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 혐오적 우울에 찌들어 있다고. 그래서 어떻다는 말인가?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현대인의 멜랑콜리를 드러내는 데 그쳤다면 이렇게 호평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3부 ‘올 앳 원스’는 모든 것, 모든 곳에서 너와 내가 만나는 찰나의 순간이 소중함을 설파하면서, 몸과 몸의 ‘접촉’을 통해 자기혐오로부터 타인을 구원하는 몸짓을 선보인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몸짓’은 언어로는 포착될 수 없다. ‘손가락이 소시 지인 인간이 발로 피아노를 치는 장면’이라는 설명은 엽기 코믹 영화를 소개하는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사실은 영화의 가장 감동적인 장면 중 하나이다. 이는 영화가 서사 매체로서 앞뒤 문맥에 따라 관객이 느끼는 감정적 반응과는 별개로, 언어적 묘사나 대사 사이를 빠져나가는 정동적 ‘잉여’가 존재함을 의미한다.
스피노자와 들뢰즈에서 기원한 정동은 세 가지 다른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첫째는 전이 로서의, 그리고 우리가 휘말리게 되는 비인격적, 또는 전인격적(pre-personal) 힘의 운동으로, ‘인간이 인간 아닌 모든 것과 공유하는 것의 한계 표현, 즉 사물에 자신을 포함하도록 하는 것’으로서 정동이다. 두 번째는 좀 더 인격적인 정동으로, 정동적 강도들이 신경계로 들어와 종국에는 인지하게 되는, 즉 인격체의 표상으로서 정동이다. 세 번째로 정동은 “정동을 촉발하고, 정동이 촉발될 수 있는 능력”이다. 이때 정동은 끊임없는 변주 속에서 “전이”하며 고정된 상태가 아닌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정동은 무엇보다, 몸과 몸의 마주침을 통해 촉발되는 강도 또는 힘을 의미한다.
조부 투파키가 보여준 베이글과 마주한 에블린은 자신의 인생이 빙빙 도는 무의미한 하루에 불과함을 깨닫는다. 사소한 선택이 쌓여 만들어진 인생의 궤적은 어느 우주에서는 중요하게 느껴지지만, 다른 우주에서는 ‘바다에 휩쓸릴’ 모래 알갱이일 뿐이다. 에블린은 베이글이 촉발한 이 모든 우울과 공허함, 자기혐오의 감정을 타인에게 쏟아낸다. 모든 것이 무상한 세상에 서는 타인의 의견과 감정 모두 무가치한 것이 된다. 그래서 에블린은 이혼 서류에 서명하고, 너구리를 고발하고, 웨이먼드를 유리 조각으로 찌르고, 세탁소를 부수고 결국엔 돌이 되기를 택한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세상 모든 것이 무의미함을 깨달은 자의 첫 발걸음이 고작 타인을 향한 공격이라는 게? 인생의 경로를 마구잡이로 활주하는 조부 투파키와 달리, 우리가 고작 '이따위’로 살게 된 데엔 차마 인간의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전인격적 정동이 작용한다. 운명과도 같은 전인격적인 힘에 계속해서 부딪히면서, 인간은 또한 언어로 굳어진 감정을 인지한다. 아마 에블린은 베이글을 보면서 좌절과 혼란과 절망과 분노와 환희를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차마 언어로 포착될 수 없는 이 영화처럼, 몸과 몸의 우연한 접촉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어떤 힘의 연속체이기도 하다. 세탁소를 압류하러 찾아온 국세청 직원은 웨이먼드와 몇 마디 나눈 후, 난동을 피운 에블린을 풀어주라고 말한다. 에블린이 어떻게 했냐고 묻자, 웨이먼드는 그냥 얘기했을 뿐이라고 답한다. 조부 투파키는 갑작스러운 인생의 흐름이 단지 확률적 결과일 뿐이라고 주장하지만, 웨이먼드의 울음기 어린 눈망울에서, 지친 듯 떠나는 국세청 직원의 발걸음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에블린이 깨뜨린 유리 조각을 치우며 웨이먼드가 부르는 노래에서 에블린은 운명의 장난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지금 이 순간이, 곧 있으면 휩쓸릴 모래 알갱이에 불과한 찰나의 순간이 소중한 이유를 발견한다.
세상은 전례 없이 넓어졌다. 버스 점프라는 기술 없이도 누구든지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삶을 엿볼 수 있게 되었고, 역경을 딛고 성공한 사람의 사례는 매일같이 SNS와 인터넷을 떠돈다. 에블린이 겪는 우울과 절망은 타인의 삶을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게 된 우리가 느끼는 우울과 절망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같이 싸우고, 욕한 뒤, “이 모든 것이 내 잘못인 것처럼” 느낀다. “친절해야 한다”라는 웨이먼드의 외침은 알파버스의 웨이먼드가 거울 속에서 에블린을 부름으로써 촉발했던 중지의 사유가 관객의 삶을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보게 했던 것처럼, 내가 혼란스럽다는 이유로 남을 공격하는 이상한 작태를 성찰하게 한다. 그러나 이 ‘친절’은 표면적인 다정함이나 기계적인 배려를 의미하지 않는다. 웨이먼드의 친절은 조부 투파키의 자기혐오적 우울까지 모두 끌어안을 수 있을 만큼 당신을 사랑한다는 표현이자,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몸짓이다. 영화 속에서 웨이먼드가 국세청 직원에게 정확히 무슨 뭐라고 말했는지는 묘사되지 않지만, 타인을 존중하는 웨이먼드의 태도가 잔혹한 낙관주의의 냉소를 끊어낼 만큼 강력하다는 사실만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베이글을 마주한 조부 투파키와 그의 추종자, 그리고 에블린은 모두 우울의 정동에 속박되어 있다. 무엇을 상실했는지도 모른 채 욕망하기를 포기하고 자기 파괴의 충동으로 나아가는 조부 투파키는 이 모든 가능성 속에서 인간은 한낱 미물에 불과하다고 외친다. 그러나 이는 달리 말하면 그 모든 가능성 속에서 우연히도 너와 내가 지금, 바로 여기에서 마주하고 있음을 경탄하는 표현이다. ‘모든 가능성’은 행복을 줄 수 없다. 전지전능한 조부 투파키는 불행하지만, 현재에 집중하는 웨이먼드는 행복하다. 괴롭다는 이유로 타인을 공격하는 조부 투파키는 불행하지만, 괴로워도 타인에게 다가설 줄 아는 웨이먼드는 행복하다. 그게 웨이먼드가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온 방식이다.
조부 투파키와 거의 비슷할 정도로 전지전능한 힘을 가진 에블린은 웨이먼드에게 부와 명예, 권력을 주는 대신, 웨이먼드를 안아준다. 몸과 몸의 접촉. 그 사이를 흐르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떤 힘. 변주하고 흐르고 이행하는 정동의 물결. 혼란스럽고 무서운 세상에서 벗어나 차라리 돌이 되기를 택한 에블린처럼, 우연의 접촉이 행복을 향한 열쇠였음에도 우리는 꿋꿋하게 거리 두기를 고집해 온 것은 아닐까? 단지 포옹 한 번이면 해결될 일을 애써 말로, 문자로 표현하려고 했던 건 아닐까? 몸과 몸의 접촉만큼이나 타인을 향한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 또 있을까. 에블린은 영화가 시작한 지 장장 두 시간 만에, 처음으로 미소 짓는다. 에블린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행복은, 조부 투파키가 그토록 갈구하던 삶의 의미는 타인과의 우연한 접촉에 있다.
조부 투파키는 그 접촉마저도 금방 사라질 것이라며 비웃는다. 에블린은 공격을 멈추고 ‘이 멍청한 세상에서도 언제나 사랑할 존재가 있다’라며 모든 우주의 국세청 직원을 껴안는다. 총알은 곧 철없는 남편이 세탁소 곳곳에 붙여 두던 눈알 스티커로 변하고, 에블린 자신의 이마와 조부 투파키의 추종자에게 스티커를 쏜다. 생채기를 내거나 박히지 않고 찐득하게 들러붙는 스티커의 감촉은 웨이먼드의 친절함과 맞닿아 있다. 타인이 접촉을 거부하는 그 순간에도 타인을 향해 나아가는 접촉의 몸짓. 영화는 그제야 에블린의 시점에서 조부 투파키의 추종자들을 훑는다. 그러나 이 시점은 에블린의 두 눈이 아닌 멍청함으로 가득한 찰나의 순간에도 사랑을 찾을 줄 아는 ‘스티커’의 시점이다.
이마 한가운데 눈알 스티커를 붙인 에블린은 자신을 공격하는 추종자들과의 신체적 접촉, 즉 몸과 몸의 마주침을 통해 긍정의 감정을 이행(移行, passage)한다. 이 장면에서 접촉은 그것이 키스이든, 골절된 뼈의 접합이든, 향수의 감각이든 간에 신체의 오감을 포함하는 감각의 이행으로 확장된다. 에블린과 접촉한 사람들은 싸우려는 의지를 잃고 일종의 환각 상태에 빠지는데, 이때 그들이 느끼는 정동은 손으로 움켜쥔 모래처럼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 사이로 빠져나간다. 영화 속 등장인물만 에블린의 정동을 경험하는 건 아니다. “우리는 영화를 단지 눈으로만 보지 않는다”라는 비비안 섭책의 말처럼, 관객은 배우의 표정과 음악, 조명, 미쟝센, 촬영, 편집, 그리고 이 모든 게 뒤섞인 영화의 쇼트를 “자신의 몸을 통해 직접적으로 경험한다.”
Ⅳ. 모든 것이 가능해도 변하지 않는
세탁기 안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옷가지와 영수증 위에 어지럽게 그려 놓은 동그라미, 그리고 조부 투파키의 베이글까지. 1부 ‘모든 것 Everything’을 상징하는 ‘원’은 영화의 형식과 내용을 관통한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수미상관을 이루는 결말은 처음과 끝이 이어져 있는 원과 같다. 잔혹한 낙관주의에 빠졌던 에블린은 여전히 낙관주의에 골몰한다. 그러나 에블린이 낙관적으로 붙잡고 있는 대상은 에블린이 손을 놓으면 언제든 깨져버릴 유약한 환상이 아니다. 에블린의 아빠는 “너는 내 딸이 아니”라며 에블린을 무시하지만, 에블린은 아빠가 자신을 자랑스러워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한다. 에블린 스스로 마침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에블린은 조이가 자신처럼 자기혐오의 늪에 빠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빠가 했던 것처럼 조이를 에블린의 시선에서 재단하고 ‘정상’과 ‘행복’의 범주에 끼워 맞추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에블린은 자신의 전지전능한 힘 대신, ‘끌어안음’을 통해 조부 투파키를 베이글로부터 구원한다. 조부 투파키/조이는 이 마지막 접촉조차 거부하지만, 에블린은 그런 조부 투파 키/조이에게 다가가 조이에게 ‘살 좀 빼’라고 잔소리를 퍼붓는다. 에블린이 미치광이 같은 조부 투파키의 눈에서 ‘나를 구원해 달라는’ 외침을 읽은 것은 에블린 역시 똑같은 상처를 아버지에게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무한히 반복하는 우리의 일상처럼, 처음과 끝이 이어져 있다. 그러나 똑같아 보이는 원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곳엔 울퉁불퉁한 굴곡이 있다. 의미 없이 반복되는 원에 티끌 같은 점이라 해도, 우연의 접촉이 낳은 에블린과 조이의 관계는 특별하다. 에블린이 그 티끌 같은 순간을 소중히 간직하겠다고 말하자, 허무주의의 베이글 속에서 손을 뻗는다. 손과 손, 눈빛과 눈빛, 사과와 사과, 돌과 돌, 행성과 행성. 때로 몸과 몸의 접촉은 지옥과도 같은 끔찍한 형상이지만, 이 끔찍한 세상을 살아가게 해주는 강력한 힘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삶의 조건은 변하지 않았고, 여전히 쌓여 있는 영수증을 제출해야 하며, 에블린은 잔소리를 퍼붓고, 조이는 여자친구를 사귄다. 원처럼 다시 돌아온 시작점에서 영화는 모든 것이 가능해도 변하지 않는 무언가를 노래한다. 그것은 에블린의 잔소리처럼 쌉싸름하고, 웨이먼드와의 키스처럼 달콤하며, 국세청 직원의 핀잔처럼 짜다. 그 무언가는 모든 가능성의 확률을 뚫고 지금, 바로 여기에서 너와 내가 만났기에 가능한 기적이다. 붉은 옷 대신 푸른 옷을 입고 다시 돌아온 국세청 사무실에서, 에블린은 다시 한 번 묻는다. “죄송해요. 방금 뭐라고 하셨죠?”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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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4주 차, 최신 씨네 뉴스
<라라랜드>, <위플래쉬>를 연출한 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차기작이 정해졌습니다.
그가 직접 각본을 쓴 교도소를 배경으로 한 스릴러 영화며,현재 킬리언 머피와 다니엘 크레이그가 주연으로 출연을 조율 중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출연진이 확정 지어진다면, 올해 안에 촬영을 돌입할 예정입니다.
당초 차기작으로 알려졌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의 ‘이블 니벨’의 전기영화는제작사와 협상이 결렬되며 취소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박찬욱 감독, 서울국제도서전에서 만난다
오는 6월 18일부터 22일까지 열리는 서울국제도서전에서 박찬욱 감독을 만날 수 있다는 소식입니다.
6월 20일에 ‘박찬욱 감독의 믿을 구석’이라는 제목으로 연사를 진행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을유문화사가 함께하며, 신형철 문학평론가가 사회를 맡은 이 프로그램은 독서광으로 알려진 박찬욱 감독이 소설의 어떤 점에 매료되었는지,그의 소설 원작 작품들과 영감을 받은 책들을 통해 이야기를 나눌 예정이라고 합니다.
드웨인 존슨, A24 심리 스릴러 신작 출연 확정
드웨인 존슨이 A24 심리 스릴러 신작 <Breakthrough> 출연을 확정지었습니다.
2000년대 초반 남부 캘리포니아를 배경으로, 냉소적인 청년이 매혹적인 구루의 어두운 세계에 빠져드는 이야기며,그는 카리스마 넘치는 자기계발 구루 역할을 맡을 예정입니다.
감독과 주연 배우는 미정이지만, 최근 베니 사프디, 마틴 스콜세지 감독과 협업과더불어 또다시 비상업적 작품을 선택하고 있는 그의 행보로 인해 더욱 주목받고 있습니다.
새롭게 돌아온 미쟝센단편영화제, 섹션명 변경했다
4년 만에 다시 개최되는 미쟝센단편영화제가 기존 섹션명을 전면 개편하여 새로운 섹션명을 공개했습니다.
변경된 섹션명은 영화제의 정체성을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시대적 감각을 반영하고자 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사회적 관점을 다룬 드라마 영화들이 상영되는 ‘비정성시’는 ‘고양이를 부탁해’로,멜로 영화 섹션인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은 ‘질투는 나의 힘’으로, 코미디 영화 섹션인 ‘희극지왕’은 ‘품행제로’로,
공포, 판타지 섹션인 ‘절대악몽’은 ‘기담’으로, 액션, 스릴러 섹션인 ‘4만번의 구타’는 ‘인정사정 볼 것 없다’로 변경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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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크린 접수에 나선 연기돌
독보적인 여성 캐릭터의 탄생, f(x) 크리스탈
파격적인 이미지 변신, EXID 하니
인생 캐릭터 만남 예고, 카라 한승연<애비규환>, 정수정
드라마, 코미디 | 한국 | 108분 | 2020.11.12 개봉
감독 : 최하나 | 출연 : 크리스탈, 장혜진, 최덕문
아이돌 그룹 f(x)로 데뷔해 Hot Summer 등 수많은 명곡을 탄생시킨 '크리스탈'(정수정)은 가수 활동은 물론 [볼수록 애교만점],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 [슬기로운 감빵생활], [써치] 등 다양한 시트콤과 드라마에서 활약해왔는데요. 음반시장에 이어 브라운관까지 접수한 그녀는 지난해 <애비규환>을 통해 똑 부러진 성격과 어디서도 주눅들지 않는 용기를 지닌 위풍당당한 '토일' 역을 맡아 첫 스크린 연기에 도전했습니다. 특히 정수정은 <애비규환>을 통해 스물 두 살 대학생이자 임산부라는 쉽지 않은 캐릭터를 완벽히 소화해내며, 백상예술대상 여자신인상 후보에 오르는 등 탄탄한 연기력을 인정받았죠.<어른들은 몰라요>, 안희연
드라마 | 한국 | 127분 | 2021.04.15 개봉
감독 : 이환 | 출연 : 이유미, 하니, 신햇빛
아이돌 그룹 EXID로 데뷔해 "위아래"로 역주행 신화를 썼던 '하니'는 예능과 웹드라마 등 다방면에서 활발하게 활동해왔는데요. '하니'라는 독보적인 캐릭터 대신 본명 '안희연'을 활동명으로 하여, 올해 초 <어른들은 몰라요>를 통해 성공적인 스크린 데뷔를 마쳤습니다. <어른들은 몰라요>는 <박화영>을 연출한 이환 감독의 두 번째 문제작인데요. 안희연은 극중에서 18세 임산부 '세진'의 유산 프로젝트를 돕는 가출 4년차 동갑내기 '주영' 역으로 분해 흡연과 거친 욕설 등을 서슴지 않는 파격적인 캐릭터로 그 동안 본적 없던 새로운 이미지 변신을 선보였습니다.<쇼미더고스트>, 한승연
코미디, 공포 | 한국 | 83분 | 2021.09.09 개봉
감독 : 김은경 | 출연 : 한승연, 김현목, 홍승범
인기 아이돌 그룹 카라의 멤버에서 MC 및 연기자로 활동 영역을 확장해 다양한 모습을 보여온 한승연 또한, 올 9월 스크린 데뷔를 앞두고 있는데요. 그녀의 장편 데뷔작 <쇼미더고스트>는 산뜻하고 유쾌한 올해의 독립영화 화제작으로, 한승연은 극중 자취방 보증금마저 주식으로 날려버린 만년 취준생 '예지' 역을 맡았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 [청춘시대] '예은' 역에 이은 인생 캐릭터의 탄생을 예고했다고 하는데요. 특히 <쇼미더고스트>를 통해 이 시대 청춘들의 불안함과 성장의 과정을 섬세하게 연기한 한승연은 개봉에 앞서 제25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첫 장편 데뷔작임에도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 배우"라는 평과 함께 코리안 판타스틱 장편 부문 배우상 심사위원 특별언급에 지명되는 쾌거를 이뤘다고 합니다.
씨네랩 에디터 Camm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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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둘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엘리멘탈> 일일관객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하는데요 !! 역주행에 성공하며 300만 돌파를 한 엘리멘탈 !
유료시사회를 진행하면서 출격준비를 마친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 PART ONE> 까지
그 외에도 극장가를 꽉채운 해외 영화들 7월 2주차의 박스오피스 다함께 알아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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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내 주말 박스오피스
7월 둘째 주, 1위를 차지한 <엘리멘탈>! 엘리멘탈이 개봉 4주 차에 더욱 치솟은 관객수로 3주 연속 주말 박스오피스 1위를 달성했습니다. 4주 차에 들어섰음에도, 가장 높은 일일 관객수를 보여주고 있으며 꾸준한 역주행의 상승선을 그리고 있습니다 한편 <범죄도시 3>는 누적 관객수가 지난 1일 오전 8시를 기해 1000만 명을 넘었다고 발표했습니다. 역대 국내 개봉작 중에서는 30번째 1000만 돌파입니다.
1. <엘리멘탈>
주말 관객수 80만 명을 넘기면서 전주보다 높은 주말 관객수를 기록하였고 첫 주 42만, 둘째 주 49만, 3주 차에는 68만을 기록하면서 역주행 성공신화를 그리며 300만 돌파에 성공했습니다. <엘리멘탈>의 연출을 맡은 손 감독은 한 해외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관객들이 엘리멘탈을 통해 감정이 어디에서 오는지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감정의 시적점에 대한 이해는 우리를 연결시키게 만들어 서로의 감정에 공감을 일으킨다”라고 밝혔습니다.
2. <범죄도시3>
영화 <범죄도시> 시리즈의 전체 누적 관객 수가 3천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한국 영화 시리즈 가운데 누적 관객 수가 3천만 명을 넘어선 건 <범죄도시>가 역대 처음입니다.
마동석은 이로써 5000만 배우 타이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3.<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 PART ONE>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은> PART ONE'이 오는 12일 개봉을 앞두고 유료 시사회를 진행하면서 개봉 전부터 주말 박스오피스 3위에 랭크되어 기대를 높이고 있습니다. 톰 크루즈 주연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는 인류를 위협할 새로운 무기가 못된 자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추적하던 에단 헌트와 (톰크루즈)와 IMF팀이 미스터리하고 강력한 적을 만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4. <인디아나 존스: 운명의 다이얼>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는 15년 만에 다시 한번 관객을 찾았습니다. 마케팅 비용을 빼고도 2억 9500만 달러를 쏟아부은 역대급 고 예산영화라는 걸 감안하면 전 세계 박스오피스 1억 3000만 달러는 대단한 성과는 아닙니다.
한국에서도 박스오피스 4 위대에 머무르며 아쉬운 성적을 보이고 있습니다.
5.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스파이더맨 주말 관객수 12만 명을 기록하며 점차 순위에서 밀려나는 추세로 현재까지 총 관객 80만 명을 기록했습니다.
(2) 북미 주말 박스오피스
북미 박스오피스 7월 둘째 주 <인시디어스: 빨간 문>이 <인디아나 존스: 운명의 다이얼>을 제치고 북미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습니다. 아동 성노예예와 구출 이야기를 다룬 <Sound of Freedom> 3위, <엘리멘탈>이 4위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가 5위를 기록했습니다. <인시디어스: 빨간 문>은 2012년 시작된 '인시디어스' 시리즈 5번째 작품으로 2013년에 나온 두 번째 영화 <인시디어스:두번째 집>에 이어 램버트 가족이 다시 한번 악몽을 겪는 이야기입니다. 한국은 7월 19일 개봉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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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픽의 7월 둘째 주 박스오피스 분석 콘텐츠는 여기까지입니다.
이번 주도 건강한 한 주가 되기를 바라며 씨네픽은 다음 주 월요일 유익한 콘텐츠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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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최고의 크리스마스 영화!
올해 최고의 크리스마스 영화다! 진부하고, 광고성 카피처럼 느껴지겠지만,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표현할 적확한 문장은 없을 듯하다. 클레어 키건의 동명 베스트셀러를 영화화한 영화는 주인공 빌의 이타적 행동을 통해 유독 춥고, 우울한 우리 사회에 잊고 지냈던 온기를 전한다. 그 온기를 전하기 위해서는 작지만 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한다.
1985년 아일랜드의 한 소도시. 빌(킬리언 머피)은 작은 석탄 가게를 운영하며 아내, 다섯 딸과 오붓하게 살고 있다. 힘든 세상 속에서도 그는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살아간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유년 시절의 겪은 트라우마로 힘겹게 살아간다. 어느 날 수녀원에 석탄 배달을 갔다가 창고에 홀로 갇혀 있었던 소녀를 발견한 빌은 화들짝 놀란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게 해달라는 요청에 머뭇거린다. 결국, 그가 소녀를 데려다준 곳은 수녀원 내부. 이 도시는 수녀원의 권력 아래 돌아가는 곳이기에 빌 역시 원장 수녀의 말에 따르긴 한다. 그러나 마음 한 켠에 남긴 죄책감과 부채감에 시달린 그는 크리스마스 날 저녁 집이 아닌 수녀원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과연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관객에게 이 질문을 던진다. 너무나 힘든 세상 에서 타인을 도와줄 수 있는지에 대한 이 물음은 영화의 핵심이자, 관객을 이토록 사소한 이야기에 집중하게 만드는 요소다.
극 중 빌은 자기 가족을 지키는 것도 버거운 세상에서 굶주린 아이들을 위해, 수녀원에 감금당해 노동 착취를 당하는 소녀들을 위해 손 한번 쉽게 내밀지 못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수녀원의 눈 밖에 나기 때문이다. 시쳇말로 원장 수녀에게 잘못 걸리면, 그동안 쌓은 평화는 살얼음처럼 쉽게 깨져버린다. 하루아침에 일도 없어지고, 돈이 없어 생활도 못 하며, 아이들의 교육도 중지된다.(빌의 딸들은 수녀원이 운영하는 학교에 다니고 있다.) 이를 알기에 빌의 고뇌를 아는 아내는 우리와 상관없는 일이고, (소녀를 포함한 가난에 허덕이는 아이들) 그 아이들은 우리 자식이 아니라고 말한다.
아내의 이런 말이 나쁘게 들릴 수 있겠지만, 밑바닥부터 시작해 누구보다 열심히 살며 이 가정을 꾸린 남편의 노고와 지금의 평화가 한순간 깨질 수 있다는 불안은 충분히 이해된다. 아내의 선택적 회피는 어쩌면 온 마을 사람들의 마음처럼 보인다. 추운 겨울, 자신이 어렵게 지킨 온기를 나눠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이런 심리를 조장하는 것처럼 매일 아침 울리는 수녀원의 종소리는 명확하게 그리고 공포스럽게 들린다.
이런 상황에서 빌은 용기를 낸다. 그 이유는 자신도 어려운 환경에 놓였었기 때문이다. 하나밖에 없는 엄마가 죽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어른들이 보살펴 준 유년 시절의 기억은 자신과 비슷한 곤경에 처한 이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만든다. 마치 자신을 위로하듯 그의 시선은 어려운 이들로 향하고, 비록 석탄으로 얼룩졌지만 기꺼이 손을 내민다.영화는 빌의 용기를 담담하고 묵묵하게 그린다. 행복한 순간을 연료 삼아 자신의 마음에 불을 지펴도, 그 온기가 퍼질 때쯤 약속이나 한 듯 꺼져버리는 그의 공허함은 영화 전반에 깔린다. 다른 이들에게 석탄을 배달할지언정 정작 자신에겐 불쏘시개 하나 담지 못하는 그의 삶에 수녀원의 소녀는 자신을 구원할 횃불처럼 보인다. 어려운 이를 구하는 동시에 자신을 구하는 선택, 그리고 용기는 점점 그 의미를 잃어가고 있는 현 사회에 큰 울림을 전한다.
앞서 소개했듯이 영화는 클레어 키컨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한다. 동명 소설의 중요 소재는 바로 아일랜드에서 벌어졌던 막달레나 세탁소 사건이다. 1922년부터 1996년까지 약 74년간 종교시설 내에서 벌어진 인권 유린 사건으로, 지난 2004년 <막달레나 시스터즈>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된 바 있다. 영화는 제2의 <막달레나 시스터즈>보단 한 인물을 통해 이처럼 인권이 유린당하고 이를 타파할 기력조차 없는 세상 속에서 ‘용기’를 갖기가 얼마나 힘겨운지, 그만큼 우리 세상에 얼마나 소중한 빛인지를 알려준다. 이는 동명 소설과도 그 궤를 같이한다. 참고로 영화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비유하자면 <화려한 휴가> 보단 <택시운전사>에 가깝다.
원작을 읽은 분들이라면 알겠지만, 클레어 키건의 이 책은 한 번 잡으면 놓지를 못한다. 몇 번씩 읽어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단어와 문장이 빼곡한 이 작품은 두께가 얇아서 쉽게 도전했다가 호되게 혼나는 책 중 하나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영화로 만들어진다고 했을 때 기대를 모았던 건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 사이에 놓인 여백 때문. 책을 읽었을 때 독자의 상상력으로 채워졌던 이 부분을 영화는 영상으로 어떻게 표현했을까하는 궁금증이 든다. 원작을 읽은 이들에게 영화를 보고 싶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다.
팀 밀란츠 감독은 영화적 특성을 살리기 위해 노력한다. 차갑고 무거운 겨울 풍경과 온도로 분위기를 잡고, 수녀원 종소리 등 빌을 포함한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심어줄 음향에 신경을 많이 쓴 듯하다. 여기에 창문을 소재로 각 공간과 그 안에 있는 이들의 성격과 감정을 잘 표현한다. 창을 통해 밖이 잘 보이는지, 피사체만 보이는지, 아예 보이지 않는지를 공간적으로 비교해 봐도 좋을 듯싶다.빌의 여정을 담은 영화이기에 이 인물을 연기한 킬리언 머피의 모습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게 된다. 이를 아는 듯 그는 대사보단 표정과 눈빛으로 자신 안에서 벌어지는 내적 갈등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특히 수녀원 소녀를 도와주지 못한 일 이후, 초점 없이 공허한 눈빛으로 일관하는 그의 모습은 죄책감은 물론, 가족을 위한 자기 합리화를 거쳐 그럼에도 참된 어른이 되지 못한 미안함이 느껴진다. 그의 연기는 책임감도 느껴지는데, 아일랜드 출신인 그는 자국의 아픔이자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을 알리고자 주연은 물론, 제작에도 참여했다.
<이처 사소한 것들>은 개봉 전 부터 평단의 사랑을 받았다. 제74회 베를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었고, 극 중 수녀원의 보스 메리 수녀 역을 맡은 에밀리 왓슨이 은곰상 조연상을 받았다. 영화제에서 이 작품을 초청하고 지지한 건 1980년대나 지금이나 작품이 담고자 하는 그 용기가 절실한 세상이기 때문이다. 작든 크든 한 개인이 가진 선한 영향력이 무엇보다 필요한 시점. 어느 때보다 내적, 외적 강추위가 예상되는 이번 연말, 고용하고 거룩한 밤을 밝힐 작은 용기를 꺼내어 빛을 내어보자.
덧붙이는말: 쿠키는 없지만,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자리를 지키길 바란다. 엔딩크레딧이 시작되면 귀를 휘감는 수녀원의 종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우리가 봐왔던 빌의 여정을 소리로 들려준다. 그리고 다시 수녀원의 종소리가 들린다. 개인차는 있겠지만, 그의 용기를 마주한 관객이라면 처음들은 종소리와 마지막의 종소리가 다르게 들릴 것이다. 아니, 다르게 들렸으면 좋겠다. 그래야 빌의 용기가 빛을 내는 거니까 말이다.
사진 제공: 그린나래미디어
평점: 4.0 / 5.0
한줄평: 고요하고 거룩한 밤, 밝게 빛나는 선한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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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FF 데일리] <세 얼간이> 이후 인도 영화를 고르라면
시놉시스
2001년 인도의 어느 시골을 배경으로 한<뒤바뀐 신부들>은 같은 기차에서 길을 잃은 두 어린 신부의 모험을 그린다.
재미와 감동을 선사하는 사건들과 예상치 못한 일들을 통해 두 사람은 자신과 여성성, 인생 자체에 대해 엄청난 발견을 한다.
EDITOR AMY
인도의 국민 배우이자 감독으로도 활동하는 아미르 칸이 제작하여 화제를 모은 <뒤바뀐 신부들> .
결혼식을 마치고 풀과 디팍은 발디딜 틈도 없는기차에 오른다.
기차에서 졸던 디팍은 도착지에 도착한걸 알게 되자 베일에 쌓인 신부를 깨우고 황급히 내린다.
하지만 신부는 폴이 아닌 다른 신부임을 깨닫는데..기차에 남겨진 신부 풀, 비밀을 숨기는듯한 또다른 신부 자야.
폭력적인 자야의 남편과 애타게 풀을 찾는 풀의 남편 디팍까지, 인도의 전통적인 문화를 유쾌한 코미디로 풀어낸다!
인도문화
‘인도의 결혼식’이 주 내용인 만큼 영화는 인동의 전통적인 문화와 특성을 녹여냈다.
인도의 사회적, 종교적 특성을 보여주는데 카스트제도는 물론, Pativrata라 하여 결혼한 여성은 남편에 복종하고 정절을
지킬 것을 중요한 덕목으로 요구하는 힌두교 도덕관, 결혼을 할때 신부측에서 과도한 지참금을 마련해야하는 악습,
인도의 가부장적 가족제도에서 가정폭력 등 듣기만 해도 구시대적이고 무거운 내용들이지 않은가?
영화는 사회고발을 택하는 대신, 블랙 코미디를 활용하여 뒤트는 방식을 선택했다.
부패한 경찰들은 최선을 다해 돈을 뜯고, 이제 막 결혼한 커플의 남자에게 어른들은
지참금을 얼마나 받았냐며 대놓고 조롱한다. 이런 당당한 태도들이 관객을 더 웃음짓게 만든다.
과거와 현재의 여성
뒤바뀐 두 여성 풀과 자야. 그 둘은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소극적이며 행복한 결혼생활을 꿈꾸는 풀은 본인이 살던 주소는 물론 시댁 주소도 모르는 멍청한(?) 면모를 보인다.
지식은 조금 모자랄지 몰라도 생활면에서 야무진 모습을 보이고, 반대로 금기시 되는 남편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것
뿐만 아니라, 명문 대학교에 갈 정도로 비상한 머리를 지니고 있는 자야는 결혼한 남편에게 벗어나기 위해
홀로 탈출 계획을 세운다. 전통적인 여성, 현대에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주체적인 여성을 제시한다.
폴과 자야, 최선책을 택해야만 할까?
두 여성은 자신이 선택한 삶에 최선을 다한다.
폴은 그토록 바래왔던 남편과 재회에 성공하고, 자야는 사람들의 오해와 의심의 눈초리를 벗겨내어
폭력적인 남편에게서 벗어나 꿈꿔왔던 대학교로 향한다. 영화는 전통과 현대 둘 중 한편에 발을 올리지
않고 공존을 택한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이 질문은 한국에도 대입을 해 볼 수 있다.
한국에서도 비혼이 급증하면서 결혼과 비혼에 관한 토론이 뜨겁다.
서로가 맞다며 기혼자는 비혼자를 비난하고 기혼자는 비혼자를 비난해야만 하는걸까?
스스로 택한 삶이 얼마나 귀한지 생각해봐야한다.
어떤 선택을 하던 폴과 자야처럼 우리가 행복할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그게 최선책이 아닐까.
EDITOR A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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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짠내나는 철수들의 분데스리가
이 글은 영화 [선데이 리그]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글을 인용하거나 퍼가는 경우 출처를 반드시 표시해주세요.
사진출처:다음 영화
준일(이성욱)은 자신의 인생이 우성에게 태클당한 그 순간부터 곤두박질쳤다고 생각했다. 축구와 자신의 인생은 늘 하나였으니까.
그러니 내일모레 마흔인 나이까지도 대기선수처럼, 늘 벤치에만 있는 삶을 살았다. 가능성은 대기하는 인생의 길이와 반비례해 쑥쑥 줄어가고. 남들은 젊다며 부추겨 세울 법한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그의 인생에는 소복하게 먼지가 쌓여있었다.
축구 경기뿐만 아니라 인생에서도 피할 수 없었던 그 태클에서 영원히 넘어져 있는 준일이니. 가족이라는 팀 안에서의 역할에 있어서도 잘 해낼 리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혼이라는 선수는 준일의 코 앞에서 입김을 내뿜으며 자신을 밀착 마크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혼만큼이나 더 압박감을 주며 저 멀리서부터 놀라운 속도로 다가오는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실직이었다. 외통수도 이런 외통수가 어디 있을까.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고 스스로에게 주문처럼 외우던 말이었지만. 이 오합지졸을 너머 콩가루라 불러도 아무 이질감 없을 “철수 축구단”을 궤도에 올려놓아야 하는 일에서 만큼은 제아무리 가오가 육체를 지배한 준일이라 해도 피할 수 없었다. 여기서마저도 객기를 부렸다가는 정말 남은 건 레드카드 밖엔 없었으니까.
이름 짓는 센스도 참. 철수 축구단. 이라니. 무언가가 어디서 물러난다를 뜻임과 동시에 평범하기로 따진다면 홍길동만큼이나 흔해빠진 이름이 아닌가. 영희는 오징어 게임에 나와서 유명해지기라도 했지.(?) 철수라니.
사진출처:다음 영화
그러나 이 시답잖은 네이밍 센스에 그 어떤 반격도 할 수 없었던 이유는. 자신의 인생이 그 두 가지 의미를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했다. 더 이상은 정말 물러설 수 없었고. 그 물러서지 못하는 전장에서 겨우 지켜내야 하는 것이라고는 평범해빠진 스스로의 삶이었으니.
그들의 삶은 철수 풋살팀의 훈련과정과 같았다. 시뮬레이션 속의 자신들이 벌이는 모의 시합은 완벽하다 못해 당장이라도 실현 가능할 것 같았지만. 현실은 오버헤드킥을 하려다 금쪽같은 득점 기회를 날려버리는 것에 가까운. 마치 될 것만 같았던 매주의 로또 결과와 눈앞까지 아른거렸던 국가 대표 자리처럼. 가능성은 잔뜩 묻어있지만 현실과 이상의 간극만을 매번 알게 해주는 것만 같은 삶.
이름만큼이나 특출 날 곳 없는 신생 풋살팀이 경기에서 단번에 승리할 리가 없었다. 패배에 익숙한 삶을 잘도 눅눅하게 쌓인 먼지로 숨겨왔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물리적으로 맞닿은 패배는 그렇게나 시리고도 아팠다.
평소 같았으면 욕 몇 번 들어먹을 각오로 손 놓고 잠수를 타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루트였다. 그러나 소갈머리를 휘날리며 되지도 않은 상대를 악착같이 버텨내던 철수들은 준일의 마음에도 달라붙어, 그들을 향한 관심마저 완전히 철수할 수는 없게 만들었다.
벼랑 끝에 몰려 있는 처지의 정도는 다를지언정. 다들 마음속의 그 무언가를 해소하는 창구인 이 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만큼은 어렴풋이 다들 알고 있었으니까.
사진출처:다음 영화
MOM(Man of Melona 아니고 Man of Match)이었던 박 씨의 부상은 코치이면서 동시에 또 다른 철수이기도 했던 준일을 기어코 그라운드로 복귀시켰다. 도망가고 싶고 외면하고 싶었지만. 엉망진창 실력으로도 재미있다며 웃던 박 씨의 얼굴이 떠올라 준일은 결국 박 씨의 축구화를 신었다. 자신의 인생처럼 발에 전혀 맞지 않는 축구화를.
도망가지 않아서 잘했다고 생각한 순간은 아마도 그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물론 결과는 패배였고 예전 같지 않은 체력 덕에 그라운드 위에 널브러져 있어야 했지만. 준일은 자신의 모든 인생을 걸려 넘어진 채 머물러 있던 그 순간에서 다시 일어섰음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부상 이후 처음으로 아무 걸리는 것 없이 후련하게 웃었다는 것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현실과 꿈의 거리는, 이혼한 부인과 아들이 사는 집 사이의 거리인 딱 두 정거장의 거리 같았다. 제일 움직이기 귀찮은 거리이면서. 코 앞에 있다는 것을 알기에 마음을 놓고 있느라 더 가기 힘든 곳처럼.
하지만 이제 준일은 조금은 달라졌음을 스스로도 느낀다. 축구를 향한 재미를 찾은 것처럼. 인생을 향한 애착도 조금은 되찾은 것 같다. 상대팀을 밀착 마크하던 철수들이 마치 자신의 인생에 남은 장애물도 대신 막아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여전히 땀을 뻘뻘 흘리고 표정을 잔뜩 찌푸린 채로. 이 지긋지긋한 동네 박지성들이 생각나 준일은 이사도 뒤로 미룬 채 핸들을 꺾었을 테지. 이젠 꽤나 자연스럽게 웃으면서.
마치면서
나는 늘 작은 영화들이 미네랄과 같은 요소라고 생각했다. 3대 영양소인 탄단지만큼 자주 거론되지는 않지만. 무시한다면 결국 거대한 몸도 쓰러뜨리고야 마는. 거대한 탄단지가 메울 수도, 볼 수도 없는 틈 사이를 단단히 메워주는 마지막 실리콘 역할을 한다고 말이다.
이 영화는 그만큼 소중하기도 하고, 마침 내게 정확하게 필요한 영화이기도 했다.
요새 나는 “모든 게 재미없음” 증후군에 시달리고 있었고. 그 어떤 것에도 웃을 수 없어 조금은 단조로운 삶에서 튕겨 나가지 않기 위해 아등바등 거리는 기분이 들곤 했다. 그것도 너무 자주.
그러나 화려한 중고 신인(?) 준일의 복귀를 보며. 그리고 자연스럽게 웃고 있는 인물들을 보며 내게도 그런 초심이 있었음을 조금은 더듬어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준 것 같았다. 이렇게 현실적인 연기를 할 줄 아는 배우분들이 없었다면.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도 애초에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재미.
어쩌면 뜬구름 잡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결국 마음속에서 나를 설레게 해 여기까지 이끌게 한 북두칠성을 다시 한번 어디 있는지 쳐다보게 해 준 영화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스스로에게 다시 질문을 던져야 할 시점이 되어준 영화이기도 하다. 내가 좋아했던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찾을 때까지. 혹은 다시 확신을 찾기 까지. 어쩌면 영화 리뷰어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이 글의 TMI]
1.사랑니 진짜 카운트 다운 중. 짱구 됨.ㅠ
2. 너무 웃겨서 몇 번이고 터짐. 진짜 연기의 신들임.
3. 영화 시간이 짧은데 딱 좋음. 딱 축구 전반 후반 같음.
4. 과카몰리 먹고 싶어서 아보카도 1Kg산 나란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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