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블러2025-02-15 19:13:56
가능성의 우주 속 현대인의 우울, 그리고 자기혐오
다니엘 쉐이너트, 다니엘 콴의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Ⅰ. 모든 것이 가능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2022년 개봉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은 모든 것이 가능한 세상 속에서 무력감을 느끼는 현대인의 모습을 다중우주라는 SF적 요소를 통해 환상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전세계에서 제작비의 4배가 넘는 1억 달러 이상을 벌어 들이면서, 명실상부 올해 ‘예술영화’계의 다크호스로 부상했다. 주·조연 배우 모두 동양인으로 가득 채운 신인 감독의, 난해하다면 다소 난해한 SF 영화가 이다지도 평론과 대중의 눈길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 ‘모든 것이 가능한’ 에블린과 조부 투파키가 겪는 멜랑콜리가 세대와 성별, 국적을 가로질러 신자유주의 시대를 사는 관객의 마음을 관통했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차별이 철폐된 건 아니지만, 신자유주의의 물결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라도 ‘모든 것이 가능한’ 세상을 상정한다. 성별에 따라, 인종에 따라, 계급에 따라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명확히 구분되었던 과거와 달리, 현대인들은 ‘노력과 의지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있다. 하지만 이 가능성의 우주 속에서 사람들은 오히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휩싸이곤 한다. 이들에겐 세탁기 속 옷처럼 소용돌이치는 세상에서 중심을 잡아줄 그 어떤 대책도, 계획도, 보호 장치도 없기 때문이다. 한병철 교수는 이러한 가능성의 사회를 ‘피로사회’ 규정하면서, 현대인들이 흔히 겪는 무력감, 자기 소진 등을 “긍정성의 과잉에서 비롯된 병리적 상태”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긍정의 세계는 부정의 변증법, 즉 적대성을 전제하지는 않지만, 대신 ‘내재성의 테러’라는 눈에 띄지 않는 방식으로 사회를 좀먹는 새로운 폭력을 양산한다. 달리 말해, “긍정성의 과잉 상태에 아무런 대책도 없이 무력하게 내던져져 있는 새로운 인간형은 아무런 주권도 지니지 못한 채, 자발적으로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따라서, 면역학적 도식 바깥에 존재하는 우울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하다.
웨이먼드를 따라가면 연을 끊겠다는 아버지의 불호령을 무시하고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미국에 온 지도 벌써 수십 년째건만, 오프닝 시퀀스 속 에블린의 삶은 여전히 고난의 연속이다. 철저히 관찰자 시점에서 카메라는 국세청 세무 조사를 위해 책상을 모두 덮을 만큼 쌓인 영수증과 자꾸 대화를 보채는 남편, 아픈 아버지와 여자친구를 데려온 딸, 세탁소 손님들의 각종 요구를 응대해야 하는 에블린의 일상을 훑는다. 각박한 에블린의 삶은 젊었을 적 꿈꿨던 아메리칸 드림과는 멀어도 한참 멀지만, 에블린은 아버지에게 조이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애써 숨기고, 남편의 대화 요청을 무시하면서 꾸역꾸역 자신의 환상 속 정상 가족을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러나 이미 삐걱거리는 에블린의 가족상은 에블린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다시 돌아가기’ 쉽지 않다. 이것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유예하는 피로사회의 모습과도 닮아있지만, 동시에 ‘잔혹한 낙관주의’의 결과이기도 하다.
로랜 벌랜트는 “실현 불가능하여 순전히 환상에 불과하거나, 혹은 너무나 가능하여 중독성 있는 타협된 가능성의 조건에 대한 애착 관계”를 ‘잔혹한 낙관주의’라 명명하면서 애착 대상이 “심지어 자신의 안녕을 위협할 때조차 대상의 상실을 견디지 못한다는 점에서 잔혹하다”라고 설명한다. 에블린의 애착 대상은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끊임없이 광고하는 신자유주의적 ‘아메리칸드림’이다. 에블린을 여태껏 버티게 한 이 환상은 아직 상실되지 않았지만, 상실한다는 상상만으로도 에블린의 삶 자체를 무너뜨릴 만한 강한 정동을 유발하기에 에블린은 ‘가능성’의 조건에 집착한다. 언젠가는 자신의 환상이 성취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현실의 고통을 인내하지만, 세상은 에블린이 원했던 성취의 결과를 가져다주지 않는다. 오히려, 아메리칸드림 -그리고 정상 가족-에 대한 에블린의 집착은 남편과 대화를 거부하게 만들고, 딸의 여자친구를 아버지에게 소개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가족의 균열을 심화시킬 뿐이다.
벌랜트는 잔혹한 낙관주의가 ‘정치적 우울’을 유발한다면서, 잔혹한 낙관주의로 인한 정치적 우울은 “다루기 힘든 세상의 난관에 대한 냉담, 냉소, 무관심 등의 정동적 판단 속에 집요하게 남아있다” 라고 설명한다. 영화의 초반부 에블린이 모든 사람에게 무뚝뚝하고 불친절해 보이는 것은 견디기 힘든 난관을 헤쳐나가는 에블린 나름의 방어 기제이자, 잔혹한 낙관주의가 유발하는 우울이 초래한 것이다. 우울증은 이렇듯 개인에게 부과되는 원칙적인 제약이 없을 때만 발병한다.
계급, 인종, 성별에 따라 차등적인 가능성을 부여받았던 과거와 달리, 현대인은 법적으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이러한 가능성을 다중우주라는 과학적 개념을 통해 극단적으로 확장한다. 영화 속 등장인물은 ‘버스 점프’ 라는 기술을 이용해 다중우주, 그러니까 드넓은 ‘가능성’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데, 이 다중 우주는 수천, 수만 명의 에블린 중 최악의 삶을 사는 중인 우리의 에블린에겐 기회의 땅이지만, 조부 투파키에겐 긍정성의 과잉이 초래한 병리적 허무주의의 세계에 불과하다.
SF가 과학적 외삽을 통해 현재의 사회 규범을 재고하도록 유도하는 것처럼, 버스 점프 기술은 에블린의 삶을 중지시키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버스 점프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했던 세무 조사를 한순간에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고, 그 누구보다 가깝다고 여겼던 가족과의 관계를, 더 나아가 나라는 사람이 현존하는 시공간 자체를 낯설게 만든다. 영화는 에블린의 시점 쇼트를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숏-역숏 기법을 사용할 때도 늘에블린의 뒷모습을 프레임에 넣으면서 관객이 에블린과 동일시하는 것을 방해한다. 이렇듯 버스 점프라는 기술이 촉발한 중지의 사유는 관객이 철저히 에블린의 삶을 ‘관찰’함으로써 관객자신의 일상에 ‘노붐 Novoum’을 가져오는 효과를 낳는다.
타자의 이미지를 통해 나 자신을 성찰한다는 관점에서, 영화 속 거울 이미지는 라깡의 거울 단계를 떠올리게 한다. 거울 속 나의 이미지는 외형적으로 ‘나’와 닮았지만, 현존재로서 ‘나’와는 다르다. 거울 단계를 거치면서 아이는 사실 타자적 이미지인 거울 이미지를 진정한 자신으로 착각하며 살아간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첫 장면은 함께 행복한 웃음을 터뜨리는 에블린 가족의 거울 이미지로 시작한다. 에블린은 이 거울 이미지, 그러니까 정상 가족이라는 자신의 환상이 투사된 이미지를 현실이라고 믿지만, 불이 켜지고 반사된 이미지 속엔 가득 쌓인 영수증을 정리하는 고단한 에블린만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내, 진짜 남편인 웨이먼드와 알파버스의 웨이먼드가 거울 속에서 불쑥 나타나 에블린을 부른다. 거울 이미지는 에블린의 현실이 아니라고, 그래서 이제는 잔혹한 낙관주의로부터 깨어나야 한다고. 그러므로 에블린과 관객 사이의 동일시를 방해하는 미묘한 어긋남은 거울 이미지가 사실 환상에 불과함을 폭로하는 장치이다. 영화가 선사하는 중지의 미학은 ‘모든 것 everything’의 세상에서 중심을 잃고 방황하는 관객에게도 경종을 울린다.
Ⅱ. 상실이 유발하는 자기 혐오적 멜랑콜리
프로이트는 우울을 사랑하는 사람, 또는 사랑하는 사람 대신 들어선 어떤 추상적인 무언가의 상실에 대한 반응으로 규정한다. 흔히 우울을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느끼는 감정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우울은 사람뿐만 아니라 사물, 심지어는 실존하지 않는 추상적인 무언가를 잃었을 때도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삶은 필연적으로 상실을 수반한다. 어쩌면 삶 자체가 무언가를 상실해가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 속 모든 등장인 물은 무언가를 상실하고, 그래서 슬퍼한다. 커다란 모자 속에 너구리를 숨기고 함께 요리하던 요리사는 너구리를 뺏기고, 국세청 직원은 남편과 이혼하며, 손이 소시지로 변해버린 평행 우주 속 에블린은 연인과 이별한다. 가족에게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받을 수 없는 조이는 정체성을, 그 모든 평행 우주 속 가능성 속에서 조부 투파키는 삶의 목적을 상실한다.
사람은 누구나 상실을 겪지만, 누구나 우울한 것은 아니다. 프로이트는 슬픔과 우울의 유일한 차이점을 자애심(自愛心)의 추락으로 설명한다. 슬픔을 느끼는 사람에게는 ‘세상’이 빈곤하고 공허해지지만, 우울증에 걸린 사람에게는 “자아가 빈곤해지고 공허”해진다. “쓸모없고, 무능력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자아. 그래서 “비난하고 처벌하고, 추방”해야 하는 자아. 영화속 등장인물들을 불안, 분노, 좌절과 같은 다른 부정적 감정이 아닌 ‘우울’로 설명하는 것은 바로 이런 자기 혐오적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들은 “상실의 리비도를 자아에 통합하고 결국에는 자기 자신을 공격” 한다는 점에서 ‘우울’하다.
국세청 직원은 욕을 섞어가면서까지 자신이 받은 상을 과시하고, 과도할 정도로 깐깐하게 세무 조사를 진행한다. 하지만 과시는 결핍이라고 했던가.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지 떠들어대는 인물의 내면에는 자기 자신을 향한 혐오가 자리한다. 조부 투파키는 가능성의 우주 속에서 비난의 화살을 자기 자신에게로 돌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할 줄 아는 인물이다. 4655번째 평행 우주에서 국세청 직원은 조부 투파키의 열렬한 신자로, 에블린을 찾아 죽이려고 한다. 그녀의 이마엔 방금 ‘진짜’ 에블린의 세상에서 영수증에 싸인 펜으로 그린 원이 그대로 그려져 있다. 4655번째 평행 우주의 에블린을 때려눕힌 국세청 직원은 조부 투파키가 “사람들의 본질과 그들의 자존감(self worth)이 얼마나 취약한지 알고 있다”라고 말한다. 모든 것을 알고 어디에도 있을 수 있는 전지전능함 앞에서, 쓰러진 에블린 앞에 인질로 잡힌 직원들은 나약한 ‘찰나의 순간’에 불과하다. 조부 투파키는 자신이 선택할 수 있었던 모든 가능성 앞에서 한 개인의 무력함을, 자기 자신의 쓸모없음을 이해해 줄 단 한 명의 에블린을 찾아 수많은 사람을 학살한다.
미친 사람처럼 우주를 누비며 학살을 일삼는 조부 투파키는 단순히 자신을 이렇게 만든 에블린에게 화가 난 것도, 이 세상에 절망한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이 무인 세계로 돌아가려는 조부 투파키의 자기 파괴적 ‘열광’은 가능성의 세계 속에서 삶의 목적을 잃어버린 우울증 환자의 조증과도 같다. 조부 투파키는 마치 구원을 원하는 듯이 자신의 우울을 이해할 수 있는단 한 사람, 에블린을 애타게 찾아다닌다. 그리고는 마침내 찾은 ‘그’ 에블린에게 자기와 함께 베이글 속으로 들어가자고 말한다. 세상을 호령할 수 있음에도 무의 세계로 자멸하려는 조부 투파키의 모습은 무엇이든 할 수 있음에도 오히려 무기력증에 빠지고 마는 현대인과 닮아있다. 그의 멜랑콜리는 평행 우주 속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무엇이든 ‘될’ 수는 없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진화 과정에서 인류의 손가락이 소시지가 될지언정, 어떤 평행 우주에서도 ‘나’는 그저 나일 뿐이다. 가능성의 우주에서조차 나는 ‘고작’ 내가 될 수밖에 없다는, 자기혐오. 조부 투파키는 자기의 삶이 거대한 세상 속 찰나의 순간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허무나 좌절의 외침이 아니다. “어디든 갈 수 있잖아. 그냥 가 버려. 딸이 ‘이것’보다는 더 나은 세계로.” 모든 것이 가능해서, 바로 그 이유로 우리는 상실을 경험할 때마다 세상을 탓하는 대신, 자기 자신을 비난한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특별함은 엄마를 영웅으로, 딸을 빌런으로 내세운 줄거리에서 모성애의 아름다움이나 애증의 모녀 관계를 넘어, 현대인의 고질적인 자기 혐오적 멜랑콜리를 그려냈다는 데 있다. 그러나 영화의 클라이맥스 장면에서 ‘이것’보다는 딸을 찾아 떠나라고 외치는 조부 투파키의 멜랑콜리는 조이의 문화적 우울과 겹쳐 새로운 정동의 물결을 만들어낸다. 버틀러는 젠더 이상과 현실적인 젠더 사이의 차이에서 젠더 규범을 전복할 수 있는 저항성을 찾아냈지만, 동시에 그런 저항은 우울증의 형태로 드러나게 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상실의 내면화는 상실의 부인이 되고, 상실의 거부는 우울증이 된다. 만약 상실의 대상이 동성애라면, 동성애적 리비도 집중은 죄의식을 수반한다. 이렇듯 우울증적 주체는 상실의 대상이 무의식화되어 있으므로 드러내는 애도를 통해 상실을 ‘해소’할 수 없다.
할아버지에게 여자친구를 ‘좋은 친구’라고 설명하는 에블린에게 화가 난 조이는 차를 타고 세탁소를 떠나려고 한다. 에블린은 조이를 불러 세우지만, 옴싹달싹 움직인 입에서 내뱉은 말이라곤 ‘살 좀 빼’라는 핀잔뿐이다. 조이는 평생을 중국에서 살아온 할아버지에게 거리낌 없이 자신의 동성애 성향을 드러냄으로써 이성애 중심의 ‘정상 가족’에 끊임없이 저항한다. 그러나 버틀러의 지적처럼, 고착화된 젠더 규범에 균열을 내려는 시도는 자기혐오적 멜랑콜리를 수반 한다. 에블린의 아버지에게 에블린은 늘 ‘무엇 하나 제대로 끝내지 못하는 변변찮은 딸’이었 고, 따라서 퀴어라는 정체성은 에블린에게 있어 숨겨야만 하는, 수치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이 다. “나르시시즘과 죄책감, 수치심”을 동반하는 자기혐오는 오랜 시간 “성적 타자로서 차별적 배제와 억압적 대우를 받은 결과”이다.
조이의 문화적 우울과 성적 타자로서 자기혐오는 조부 투파키의 자기혐오와는 분명 다르다. 조부 투파키는 가능성의 세계에 속해 있지만, 조이는 주체의 세계에서 배제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이 둘의 우울을 한 장면에 겹쳐 놓는다. 데칼코마니처럼 수미상관을 이루는 두 장면은 차 문을 열고 떠나려는 조이를 에블린이 붙잡는 구도로 촬영되었다. 파란 옷과 붉은 옷, 대낮과 한밤, 우울과 열광. 동전의 양면처럼 조부 투파키와 조이는 이어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똑같은 경험을 겪지 않고도 소외되고 차별받고 배제되는 타자에게 먼저 손내밀 수 있다. 그들이 느끼는 우울과 자기혐오의 감정을 우리도 충분히 느끼고 있으므로. 상대방이 우울하다는 사실, 그 자체를 온몸으로 맞이할 때, 비로소 타자를 향한 손짓이 시작될수 있다.
Ⅲ. 우연의 접촉이 만들어낸 정동의 이행
영화는 말한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 혐오적 우울에 찌들어 있다고. 그래서 어떻다는 말인가?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현대인의 멜랑콜리를 드러내는 데 그쳤다면 이렇게 호평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3부 ‘올 앳 원스’는 모든 것, 모든 곳에서 너와 내가 만나는 찰나의 순간이 소중함을 설파하면서, 몸과 몸의 ‘접촉’을 통해 자기혐오로부터 타인을 구원하는 몸짓을 선보인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몸짓’은 언어로는 포착될 수 없다. ‘손가락이 소시 지인 인간이 발로 피아노를 치는 장면’이라는 설명은 엽기 코믹 영화를 소개하는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사실은 영화의 가장 감동적인 장면 중 하나이다. 이는 영화가 서사 매체로서 앞뒤 문맥에 따라 관객이 느끼는 감정적 반응과는 별개로, 언어적 묘사나 대사 사이를 빠져나가는 정동적 ‘잉여’가 존재함을 의미한다.
스피노자와 들뢰즈에서 기원한 정동은 세 가지 다른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첫째는 전이 로서의, 그리고 우리가 휘말리게 되는 비인격적, 또는 전인격적(pre-personal) 힘의 운동으로, ‘인간이 인간 아닌 모든 것과 공유하는 것의 한계 표현, 즉 사물에 자신을 포함하도록 하는 것’으로서 정동이다. 두 번째는 좀 더 인격적인 정동으로, 정동적 강도들이 신경계로 들어와 종국에는 인지하게 되는, 즉 인격체의 표상으로서 정동이다. 세 번째로 정동은 “정동을 촉발하고, 정동이 촉발될 수 있는 능력”이다. 이때 정동은 끊임없는 변주 속에서 “전이”하며 고정된 상태가 아닌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정동은 무엇보다, 몸과 몸의 마주침을 통해 촉발되는 강도 또는 힘을 의미한다.
조부 투파키가 보여준 베이글과 마주한 에블린은 자신의 인생이 빙빙 도는 무의미한 하루에 불과함을 깨닫는다. 사소한 선택이 쌓여 만들어진 인생의 궤적은 어느 우주에서는 중요하게 느껴지지만, 다른 우주에서는 ‘바다에 휩쓸릴’ 모래 알갱이일 뿐이다. 에블린은 베이글이 촉발한 이 모든 우울과 공허함, 자기혐오의 감정을 타인에게 쏟아낸다. 모든 것이 무상한 세상에 서는 타인의 의견과 감정 모두 무가치한 것이 된다. 그래서 에블린은 이혼 서류에 서명하고, 너구리를 고발하고, 웨이먼드를 유리 조각으로 찌르고, 세탁소를 부수고 결국엔 돌이 되기를 택한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세상 모든 것이 무의미함을 깨달은 자의 첫 발걸음이 고작 타인을 향한 공격이라는 게? 인생의 경로를 마구잡이로 활주하는 조부 투파키와 달리, 우리가 고작 '이따위’로 살게 된 데엔 차마 인간의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전인격적 정동이 작용한다. 운명과도 같은 전인격적인 힘에 계속해서 부딪히면서, 인간은 또한 언어로 굳어진 감정을 인지한다. 아마 에블린은 베이글을 보면서 좌절과 혼란과 절망과 분노와 환희를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차마 언어로 포착될 수 없는 이 영화처럼, 몸과 몸의 우연한 접촉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어떤 힘의 연속체이기도 하다. 세탁소를 압류하러 찾아온 국세청 직원은 웨이먼드와 몇 마디 나눈 후, 난동을 피운 에블린을 풀어주라고 말한다. 에블린이 어떻게 했냐고 묻자, 웨이먼드는 그냥 얘기했을 뿐이라고 답한다. 조부 투파키는 갑작스러운 인생의 흐름이 단지 확률적 결과일 뿐이라고 주장하지만, 웨이먼드의 울음기 어린 눈망울에서, 지친 듯 떠나는 국세청 직원의 발걸음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에블린이 깨뜨린 유리 조각을 치우며 웨이먼드가 부르는 노래에서 에블린은 운명의 장난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지금 이 순간이, 곧 있으면 휩쓸릴 모래 알갱이에 불과한 찰나의 순간이 소중한 이유를 발견한다.
세상은 전례 없이 넓어졌다. 버스 점프라는 기술 없이도 누구든지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삶을 엿볼 수 있게 되었고, 역경을 딛고 성공한 사람의 사례는 매일같이 SNS와 인터넷을 떠돈다. 에블린이 겪는 우울과 절망은 타인의 삶을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게 된 우리가 느끼는 우울과 절망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같이 싸우고, 욕한 뒤, “이 모든 것이 내 잘못인 것처럼” 느낀다. “친절해야 한다”라는 웨이먼드의 외침은 알파버스의 웨이먼드가 거울 속에서 에블린을 부름으로써 촉발했던 중지의 사유가 관객의 삶을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보게 했던 것처럼, 내가 혼란스럽다는 이유로 남을 공격하는 이상한 작태를 성찰하게 한다. 그러나 이 ‘친절’은 표면적인 다정함이나 기계적인 배려를 의미하지 않는다. 웨이먼드의 친절은 조부 투파키의 자기혐오적 우울까지 모두 끌어안을 수 있을 만큼 당신을 사랑한다는 표현이자,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몸짓이다. 영화 속에서 웨이먼드가 국세청 직원에게 정확히 무슨 뭐라고 말했는지는 묘사되지 않지만, 타인을 존중하는 웨이먼드의 태도가 잔혹한 낙관주의의 냉소를 끊어낼 만큼 강력하다는 사실만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베이글을 마주한 조부 투파키와 그의 추종자, 그리고 에블린은 모두 우울의 정동에 속박되어 있다. 무엇을 상실했는지도 모른 채 욕망하기를 포기하고 자기 파괴의 충동으로 나아가는 조부 투파키는 이 모든 가능성 속에서 인간은 한낱 미물에 불과하다고 외친다. 그러나 이는 달리 말하면 그 모든 가능성 속에서 우연히도 너와 내가 지금, 바로 여기에서 마주하고 있음을 경탄하는 표현이다. ‘모든 가능성’은 행복을 줄 수 없다. 전지전능한 조부 투파키는 불행하지만, 현재에 집중하는 웨이먼드는 행복하다. 괴롭다는 이유로 타인을 공격하는 조부 투파키는 불행하지만, 괴로워도 타인에게 다가설 줄 아는 웨이먼드는 행복하다. 그게 웨이먼드가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온 방식이다.
조부 투파키와 거의 비슷할 정도로 전지전능한 힘을 가진 에블린은 웨이먼드에게 부와 명예, 권력을 주는 대신, 웨이먼드를 안아준다. 몸과 몸의 접촉. 그 사이를 흐르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떤 힘. 변주하고 흐르고 이행하는 정동의 물결. 혼란스럽고 무서운 세상에서 벗어나 차라리 돌이 되기를 택한 에블린처럼, 우연의 접촉이 행복을 향한 열쇠였음에도 우리는 꿋꿋하게 거리 두기를 고집해 온 것은 아닐까? 단지 포옹 한 번이면 해결될 일을 애써 말로, 문자로 표현하려고 했던 건 아닐까? 몸과 몸의 접촉만큼이나 타인을 향한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 또 있을까. 에블린은 영화가 시작한 지 장장 두 시간 만에, 처음으로 미소 짓는다. 에블린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행복은, 조부 투파키가 그토록 갈구하던 삶의 의미는 타인과의 우연한 접촉에 있다.
조부 투파키는 그 접촉마저도 금방 사라질 것이라며 비웃는다. 에블린은 공격을 멈추고 ‘이 멍청한 세상에서도 언제나 사랑할 존재가 있다’라며 모든 우주의 국세청 직원을 껴안는다. 총알은 곧 철없는 남편이 세탁소 곳곳에 붙여 두던 눈알 스티커로 변하고, 에블린 자신의 이마와 조부 투파키의 추종자에게 스티커를 쏜다. 생채기를 내거나 박히지 않고 찐득하게 들러붙는 스티커의 감촉은 웨이먼드의 친절함과 맞닿아 있다. 타인이 접촉을 거부하는 그 순간에도 타인을 향해 나아가는 접촉의 몸짓. 영화는 그제야 에블린의 시점에서 조부 투파키의 추종자들을 훑는다. 그러나 이 시점은 에블린의 두 눈이 아닌 멍청함으로 가득한 찰나의 순간에도 사랑을 찾을 줄 아는 ‘스티커’의 시점이다.
이마 한가운데 눈알 스티커를 붙인 에블린은 자신을 공격하는 추종자들과의 신체적 접촉, 즉 몸과 몸의 마주침을 통해 긍정의 감정을 이행(移行, passage)한다. 이 장면에서 접촉은 그것이 키스이든, 골절된 뼈의 접합이든, 향수의 감각이든 간에 신체의 오감을 포함하는 감각의 이행으로 확장된다. 에블린과 접촉한 사람들은 싸우려는 의지를 잃고 일종의 환각 상태에 빠지는데, 이때 그들이 느끼는 정동은 손으로 움켜쥔 모래처럼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 사이로 빠져나간다. 영화 속 등장인물만 에블린의 정동을 경험하는 건 아니다. “우리는 영화를 단지 눈으로만 보지 않는다”라는 비비안 섭책의 말처럼, 관객은 배우의 표정과 음악, 조명, 미쟝센, 촬영, 편집, 그리고 이 모든 게 뒤섞인 영화의 쇼트를 “자신의 몸을 통해 직접적으로 경험한다.”
Ⅳ. 모든 것이 가능해도 변하지 않는
세탁기 안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옷가지와 영수증 위에 어지럽게 그려 놓은 동그라미, 그리고 조부 투파키의 베이글까지. 1부 ‘모든 것 Everything’을 상징하는 ‘원’은 영화의 형식과 내용을 관통한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수미상관을 이루는 결말은 처음과 끝이 이어져 있는 원과 같다. 잔혹한 낙관주의에 빠졌던 에블린은 여전히 낙관주의에 골몰한다. 그러나 에블린이 낙관적으로 붙잡고 있는 대상은 에블린이 손을 놓으면 언제든 깨져버릴 유약한 환상이 아니다. 에블린의 아빠는 “너는 내 딸이 아니”라며 에블린을 무시하지만, 에블린은 아빠가 자신을 자랑스러워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한다. 에블린 스스로 마침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에블린은 조이가 자신처럼 자기혐오의 늪에 빠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빠가 했던 것처럼 조이를 에블린의 시선에서 재단하고 ‘정상’과 ‘행복’의 범주에 끼워 맞추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에블린은 자신의 전지전능한 힘 대신, ‘끌어안음’을 통해 조부 투파키를 베이글로부터 구원한다. 조부 투파키/조이는 이 마지막 접촉조차 거부하지만, 에블린은 그런 조부 투파 키/조이에게 다가가 조이에게 ‘살 좀 빼’라고 잔소리를 퍼붓는다. 에블린이 미치광이 같은 조부 투파키의 눈에서 ‘나를 구원해 달라는’ 외침을 읽은 것은 에블린 역시 똑같은 상처를 아버지에게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무한히 반복하는 우리의 일상처럼, 처음과 끝이 이어져 있다. 그러나 똑같아 보이는 원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곳엔 울퉁불퉁한 굴곡이 있다. 의미 없이 반복되는 원에 티끌 같은 점이라 해도, 우연의 접촉이 낳은 에블린과 조이의 관계는 특별하다. 에블린이 그 티끌 같은 순간을 소중히 간직하겠다고 말하자, 허무주의의 베이글 속에서 손을 뻗는다. 손과 손, 눈빛과 눈빛, 사과와 사과, 돌과 돌, 행성과 행성. 때로 몸과 몸의 접촉은 지옥과도 같은 끔찍한 형상이지만, 이 끔찍한 세상을 살아가게 해주는 강력한 힘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삶의 조건은 변하지 않았고, 여전히 쌓여 있는 영수증을 제출해야 하며, 에블린은 잔소리를 퍼붓고, 조이는 여자친구를 사귄다. 원처럼 다시 돌아온 시작점에서 영화는 모든 것이 가능해도 변하지 않는 무언가를 노래한다. 그것은 에블린의 잔소리처럼 쌉싸름하고, 웨이먼드와의 키스처럼 달콤하며, 국세청 직원의 핀잔처럼 짜다. 그 무언가는 모든 가능성의 확률을 뚫고 지금, 바로 여기에서 너와 내가 만났기에 가능한 기적이다. 붉은 옷 대신 푸른 옷을 입고 다시 돌아온 국세청 사무실에서, 에블린은 다시 한 번 묻는다. “죄송해요. 방금 뭐라고 하셨죠?”
Relative contents
-
- 영화 산업의 침체의 이유
관객들은 더 이상 당하고만 있지 않는다. 과거의 흥행 공식에 매달려 진부해지는 작품은 관객들에게 혼쭐이 난다. '흥행 실패'라는 결과를 만들어준다. OTT 서비스의 확대가 그 흐름을 만들어준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개인화되는 시대에 관객의 '특정' 취향에 맞지 않는, 그야말로 대중이라는 거시적인 관점만을 노리는 작품들은 이제 쉽게 흥행의 문턱을 넘지 못하기 때문이다.
<브릭레이어>는 해외에서 먼저 개봉했다. 그 성과 또한 해외에서 먼저 나타났다. 놀랍지 않다. 흥행에 실패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영화를 검색하면 바로 나오는 시놉시스의 몇 글자만 본더래도 독자들도 느낄 수 있을 거다. 이 영화는 몹시 '진부'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말이다. 언제 적 CIA인가? 언제 적 비밀 요원인가? 그리고 언제 적 은퇴한 요원의 복귀를 그리는 이야기인가.
놀랍게도 이 작품은 '할리우드식 액션'의 정형화된 공식을 보여준다. 그게 사실이다. '이 장면 다음에는 이런 장면이 나오겠다'라는 생각을 한다면, 바로 그대로 이루어진다.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말보다 더 잘 이루어진다. 꿈보다 이 영화가 미래의 확신을 준다.
은퇴한 CIA 요원은 아주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 아주 평범한 직업을 갖고 있다. 무려 '벽돌공'이다. '브릭레이어'라는 영화 제목은 말 그대로, 단순하게 벽돌공을 뜻하는 영어 단어를 사용한 거다. 평범한 벽돌공이 힘을 숨긴 이야기라니. 평상시에는 벽돌을 쌓는 사람이 알고 보니 CIA 요원이었던 놀라운 이야기다. 세상에 어느 곳에서 이런 특별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아마도 어디서든.
세계 질서를 어지럽히고, CIA의 세계적 신용도를 떨어뜨림으로써 혼란을 야기하려는 어떠한 세력이 등장한다. 그 세력의 중심에는 수상한 누군가가 있다. 그 누군가는 아마도 주인공의 한때 돈독하던 친구다. 한때 CIA 요원으로서 함께했고, 미래가 유망하던 둘이었다. 이제는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서게 된 둘은 다른 지향점을 두고 치열하게 싸운다. 목숨을 걸고.
어디선가 들어본 이야기 아닌가. 분명 <브릭레이어>의 이야기는 아닐 텐데 어디서 볼 법한 내용이다. 그렇다는 것은 즉, 흔한 이야기라는 거다. 흔한 이야기를 전하려면 그 방식이 특별해야 하지는 않을까. 그런데 그 방식 또한 그리 특별하지 않다. 말 그대로 이 영화는 '정형화'되어 있으니까.
은퇴한 요원은 그 비뚤어진 친구를 응징하기 위해 CIA에 돌아온다. 응징하기만 하면 된다면서 말이다. "내가 제일 잘 아니까 내가 해결하겠다"라는 웅장한 마음가짐은 덤. 이런 땀내 나는 이야기에 여성 배역이 빠지면 섭섭하다. 아름다워야 하고, 주인공을 더 돋보이게 하는 매력이 있어야 한다. 그게 정형화된 흥행 공식이니까.
당연히 둘은 서로 투덜대야 한다. 그렇지만 증오해서는 안된다. 언제든지 서로 사랑인 듯 사랑 아닌 묘한 케미스트리를 보여주어야 한다. 왜냐면 그게 정형화된 공식이다. 마초이즘의 둔탁하고 거친 느낌을 다소 완화해 줄 완충재가 필요하다는 것이고, 그것이 이런 장르의 여주인공 존재 이유가 된다.
시대에 뒤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냐고 묻는 이가 있을 수 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어쩔 수 없다. 이게 흥행하기 위해서라면 필요하다는데 어찌할 도리가 있나. 그렇다. 올바른 지적이다. 그 흥행 공식은 이제 없다는 거다. 이 영화는 그래서 어떠한 관점에서 보면 2010년대 영화 같다. 이미 지나버린 과거의 영광을 누리고 싶어 하는 영화처럼 보인다. 마치 남자 주인공이 요원직에서 은퇴했지만 이번만큼은 비밀 작전에 나서는 것처럼.
서로 챙기고, 돕는다. 한쪽이 위기에 처하면 귀신같이 나타나서 돕는다. '하이, 큐!' 사인이 떨어지면 준비됐다는 듯 카메라 바깥에서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는 '인위적인' 움직임이다. 과거에는 통쾌했을지도 모른다.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했을 수도 있다. 긴장감을 한 순간에 풀어주면서 쾌감을 느끼게 했을 거다.
안타깝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지금 그렇게 하겠다' 싶으면 어디선가 여자 주인공이 차를 끌고 온다. 어디선가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을 살리러 온다. 서로의 케미스트리를 보여주기 위한 "명대사" 한 두줄은 필수다. 이런 정형화된 공식은 플롯에서 관객을 이탈하게 만드는 요소일 뿐이다. 갑자기 영화에서 빠져나와 관객이 '감독'이 된다. '지금 입장해!' '지금 도망쳐!' 관객이 만든 이야기도 아닌데, 적재적소에 예측하는 대로 이야기가 착착 진행된다.
위험은 언제 어디서나 도사린다. 서스펜스를 만드는 연출은 필수이며, 영화가 끝나기 전까지는 절대 죽지 않는 빌런도 있다. 그 빌런이 눈을 감기 전까지 주인공도 어디서나, 어떤 고난에서든 살아남는다. 전형적인 위기-극복 서사다. 극복 서사가 당연해지니 주인공에게 어떤 위험이 닥치든지 관객은 서스펜스를 느끼지 못한다. 어차피, 극복할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 주인공은 당연하다는 듯 살아 돌아온다. 예상 가능한 이야기를 누가 다 알면서도 보고 싶어 하겠는가.
그런 점에서 해외에서 <브릭레이어>가 흥행에 실패한 것은 예측 가능한 일이었다. 해외 관객은 우리나라 관객과 다르지 않다. 마찬가지로 국내 관객도 해외 관객과 수준이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브릭레이어>가 국내에서 흥행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을 우리는 가질 수 있겠는가. <브릭레이어>의 국내 흥행 실패도 예견된 수순으로 흘러가지 않을까.
국내 영화 산업이 침체기를 겪는 상황에서 여러 곳이 그 돌파구를 제시하며 기존의 것들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놓고 있다. 소위 '중박'용 영화 생산을 멈추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실험 정신, 도전 정신은 온데간데 없고 '이익을 위한 영화'만 생산되고 그친다는 문제점을 지적한다.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영화는 당연히 흔해빠진 구성과 이야기를 담아내는 데 급급해진다. 그런 문제점들은 관객들의 외면을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그들의 소비 인식마저 높인다. '충분히 검증되지 않으면 관람하지 않겠다'라는 의지가 생긴다. 그 선례가 <서브스턴스>, <해피엔드>다. 입소문이 나거나, 충분히 볼 가치가 있어야 하는 작품만 살아남고 있다. 지금까지는 해외 영화들이 그런 점에서 선전하고 있다.
<브릭레이어>는 그런 점에서 해외 영화임에도 국내 영화 특유의 문제점을 수반해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일종의 오답 노트가 되어주고 있다. 당연히 미국 영화 산업도 침체를 맞으며 내부적으로 여러 대안들이 제시되고 있다. <브릭레이어>가 흥행에 실패한 이유를, 이제는 정말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사람도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걸 지나치게 드러내면 다른 이들에게 반감을 사기 쉽다. 노골적인 의도를 가지는 영화들은 이제 그만 나올 때가 됐다.
* 이 글은 씨네랩 크리에이터 자격으로 시사회에 다녀온 뒤 작성한 것입니다.
-
- 우리말이 있다는 행복과 이를 지키기 위한 노력
영화 <말모이>의 배경이 일제강점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조선어학회의 사전만들기 과정이라는 사실 역시 알고 있어서 약간 흔히 말하는 국뽕의 노선을 타거나 신파로 흐르면 어쩌나 굉장히 걱정했으나, 평론가들의 ’착한 영화‘라는 평답게 그런 요소들은 잘 걷어낸 작품이었다.
영화 <말모이> 시놉시스
까막눈 판수, 우리말에 눈뜨다! vs 조선어학회 대표 정환, ‘우리’의 소중함에 눈뜨다!
우리말이 금지된 시대, 말과 마음이 모여 사전이 되다.
1940년대 우리말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경성. 극장에서 해고된 후 아들 학비 때문에 가방을 훔치다 실패한 판수. 하필 면접 보러 간 조선어학회 대표가 가방 주인 정환이다.
사전 만드는데 전과자에다 까막눈이라니! 그러나 판수를 반기는 회원들에 밀려 정환은 읽고 쓰기를 떼는 조건으로 그를 받아들인다. 돈도 아닌 말을 대체 왜 모으나 싶었던 판수는 난생처음 글을 읽으며 우리말의 소중함에 눈뜨고, 정환 또한 전국의 말을 모으는 ‘말모이’에 힘을 보태는 판수를 통해 ‘우리’의 소중함에 눈뜬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바짝 조여오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말모이’를 끝내야 한다.
*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말모이>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글을 읽는 즐거움을 표현하다
글을 읽고 쓸 줄 몰랐던 판수는 조선어학회의 일원이 되면서 글을 배우게 된다. 처음에 이걸 왜 하나 싶으면서도 우선은 아들의 학교 회비를 내기 위해 꾸역꾸역 공부를 이어나간다. 억지로 시작한 공부였지만 조금 익힌 글자만으로도 길거리의 간판을 읽으며 신나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린아이들이 차를 타고 갈 때마다 간판을 읽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떠올라 내가 가르친 것도 아닌데 괜한 뿌듯함이 들었다.그리고 <운수좋은날> 소설을 읽으면서 펑펑 우는데, 정말 슬픈 소설을 읽으며 펑펑 우는 판수를 보면서 되려 웃음코드로 이용하는 하는 모습을 보면서 연출의 센스에 박수를 쳤다. 그만큼 글을 읽는 즐거움이 무엇인지 판수를 통해서 너무나도 잘 표현한 작품이었다.
우리의 가치
영화 <말모이>는 초반 엘리트주의적인 조선어학회의 수장인 정환의 모습을 많이 보여준다. 민중보다는 전문지식인의 말을 더 귀기울이는 편이다. 엘리트들의 참여가 더디게 흐르자 판수는 자신의 지인을 통해 정환에게 큰 도움을 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환은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의 의미를 확신하고, 판수와 함께 사전 편찬에 몰두한다.
사투리를 몹기 어려울 때 판수의 도움을 받으면서 잘난 것 없는 민중의 도움이 얼마나 큰지, 그리고 잡지의 광고물을 보고 쌈짓돈과 단어의 풀이를 편지로 보낸 수많은 조선 사람들을 보면서 백성의 힘이 얼마나 큰지 ’우리의 가치‘를 잘 보여준 작품이었다.
식민지배를 받은 나라 중 거의 유일하게 자국어를 회복한 나라
사실 몰랐다. 영화 마지막 크레딧이 올라가면서 우리나라는 식민지배를 받은 나라 중 거의 유일하게 자국어를 회복한 나라라는 글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사실 한국어를 쓰고 있으니 다른 식민지배를 당한 국가들도 자연스럽게 자국어를 회복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거의 없었다. 필리핀의 공식언어는 영어고, 인도 역시 공용어는 영어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도 각각 지배를 받았던 포르투갈어과 스페인어를 사용한다.
그래서 뭉클하면서도 뿌듯했달까? 영화의 마지막 글가지 이렇게 잔잔한 감동을 선사할 줄 몰랐다. 지금 쓰고 있는 한글을 당연하게 생각해썼는데 일제 지배 기간 동안 사라졌던 언어였고, 그걸 회복하기 위해 지키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던 선조들이 있었음을 깨닫게 해줘서 이 영화를 착한 영화라 모두들 평하지 않았나 싶다.
영화 <말모이>는 잔잔한 감동과 뿌듯한 자긍심을 느끼게 해주었던 작품이었다.
-
- <모비우스> 피로 쓴 안티 히어로의 조악한 탄생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희귀 혈액병을 앓고 있는 생화학자 ‘마이클 모비우스(자레드 레토)'.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 인공 혈액을 포함한 다양한 연구를 진행한 끝에 그는 흡혈 박쥐의 DNA에 치료제 개발의 힌트가 숨어 있음을 발견한다. 모비우스는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친구이자 후원자인 ‘마일로(맷 스미스)'가 준비해준 배에서 동료 ‘마르틴(아드리아 아르호나)'과 함께 불법적인 실험을 진행하고, 마침내 치료제 개발에 성공한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임상 실험을 진행한 후 그는 새 치료제가 강력한 힘과 능력을 줌과 동시에 인간의 피를 마셔야만 해소되는 갈증도 선사함을 깨닫는다. 이에 모비우스는 FBI 요원 '사이먼(타이리스 깁슨)'으로부터 치료제 개발 사실을 숨기려 한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치료제를 맞은 마일로는 모비우스와 같은 힘을 갖게 되고, 모비우스는 새로운 힘에 도취된 친구 앞을 가로막는다.
SSU의 딜레마
자레드 레토, 맷 스미스, 타이리스 깁슨 등이 출연한 <모비우스>는 소니의 슈퍼 빌런 세계관인 '소니 스파이더맨 유니버스(Sony's Spider-Man Universe, SSU)'의 세 번째 작품으로,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의 폭발적인 흥행 이후 많은 관심을 받아왔다. <베놈>으로 포문을 연 SSU는 현재 스파이더맨의 빌런들이 모인 팀인 '시니스터 식스(Sinister Six)'를 선보이기 위한 과정을 밟아나가고 있으며, <모비우스> 역시 그 준비 작업의 일환이기 때문이다.
이때 SSU는 흥미롭게도, 또 필연적으로 한 가지 딜레마를 마주할 수밖에 없다. 스파이더맨의 빌런들이 모인 세계관이기에 SSU는 관객들을 주인공들에게 공감시킴과 동시에 그들이 명백한 악인이라는 점을 보여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베놈>에서 실패자와 패배자로 낙인찍힌 베놈과 에디 브룩이 의기투합하여 자신들의 존재감과 필요성을 각인시키는 이야기는 감정적으로 어필하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동시에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그들은 살인과 식인처럼 위법적인 수단을 거침없이 활용하면서 안티 히어로 혹은 빌런으로서의 정체성도 버리지 않는다.
<모비우스>도 예외는 아니다. 시니스터 식스의 멤버가 될 것을 암시한 만큼, 모비우스 역시 자신이 단순한 슈퍼히어로가 아닌 빌런의 면모를 지니고 있음을 입증해야 한다. 이때 <모비우스>는 '피'와 '아버지'라는 지극히 고전적인 수단을 통해 새로운 주인공의 정체성을 확립한다.
선과 악의 경계선, 피
애초에 캐릭터의 모티브가 흡혈귀인 만큼, <모비우스>에서는 피라는 소재가 거듭 등장한다. 당장 흡혈 박쥐를 잡으러 간 영화의 첫 장면에서 모비우스는 스스로의 손에 상처를 내 그 피로 박쥐들을 유인한다. 어린 모비우스와 마일로도 그들이 매일같이 하루 세 번 혈액 투석을 해야 하는 병을 앓는다는 공통점 덕분에 친구가 된다. 그래서 모비우스는 그 치료 과정을 단축시키기 위한 인공 혈액을 발명하고, 아예 치료제를 만들기 위해 외부의 피를 먹어도 문제가 없는 흡혈 박쥐를 연구한다.
특히 모비우스의 실험이 부작용을 낳은 후에 피는 더욱 중요한 소재가 된다. 박쥐로부터 얻어낸 혈청 덕분에 폭발적인 힘과 새로운 몸을 얻게 된 그는 사람의 피를 마시지 않는 한 능력을 유지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이에 그는 자신이 개발한 인공혈액으로 갈증을 달래려 한다. 이미 변신 직후 실험을 진행하던 배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그들의 피를 마신 것에 극심한 죄책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공 혈액이 갈증을 늦출 뿐 완전히 없애지는 못하는 관계로, 모비우스에게 사람의 피는 최후의 기준점이 되어버린다. 본능에 굴복해서 세상을 파괴할 힘을 갖거나, 욕구를 따르지 않고 세상을 구원할 존재가 되는 기로에 선 것이다. 따라서 모비우스에게 피는 선과 악, 히어로와 빌런을 가르는 일종의 경계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모비우스와 그의 친구이자 후원자인 마일로를 대조시킬 경우 더욱 두드러진다. 친구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모비우스가 개발한 혈청을 주사한 마일로. 그는 혈청을 맞은 후 자행한 살인에 괴로워하고 이를 억제하려고 하는 친구와 대비되는 정반대의 행보를 보여준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힘을 거리낌 없이 활용해 폭력을 행사하고, 경찰을 포함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다닌다. 또한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못한 채 자신이 저지른 악행과 범죄를 회상하며 즐거워하고 춤을 추기까지 한다. 이때 두 친구 사이에 차이점은 오직 하나다. 본능을 따라 사람의 피를 마시느냐, 그렇지 않느냐다.
피와 아버지로 확립하는 안티 히어로/빌런의 정체성
이에 더해 영화는 모비우스와 마일로, 그리고 에밀이라는 유사 부자 관계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끌어들여 감정적 요소를 더하고, 선과 악의 차이를 더욱 구체화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 무의식에는 파괴적 욕동(타나토스)과 사랑의 욕동(에로스)이 존재한다. 그래서 아들은 아버지를 두려워하고 증오하다가도 그 증오를 선망으로 바꾸어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양가적 감정에 휩싸인다. 이때 양가적 감정을 이겨내지 못하는 아들은 아버지를 살해하지만, 그로 인해 죄책감에 휩싸이며, 죄책감은 아들로 하여금 아버지로 상징되는 규율과 규칙을 내재화하게 만든다. 그 규칙에는 기독교와 같이 강력한 규율을 지닌 종교를 포함해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인 윤리, 도덕, 법 등이 있다.
그래서 아버지나 다름없는 에밀의 밑에서 함께 자란 두 박쥐 인간의 차이점은 흥미롭다. 실제로 마일로는 에밀이 언제나 모비우스를 우선시했고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다면서 에밀에게 증오를 표하지만, 모비우스는 자신의 재능을 알아봐 준 에밀을 선망하며 그를 롤모델로 여긴다. 따라서 마일로가 아버지의 존재를 파괴하는 것은 그가 사회 질서를 파괴하는 빌런이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반면 아버지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마일로를 막고자 하는 모비우스의 모습은 그가 히어로가 될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한다. 또한 이는 앞서 본 선과 악의 기준인 피와도 연관된다. 두 친구에게 피를 마시는 것은 본능적인 욕구에 굴복하는 일이다. 따라서 마일로가 피를 마시는 행위는 욕동을 이기지 못해 아버지를 죽이고 사회질서를 파괴하는 악행이다. 그가 괜히 경찰들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다. 반면에 모비우스가 인공 혈액을 마시는 것은 욕동을 억누르며 선의 길을 걸으려는 의지의 표명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피와 아버지라는 소재는 역설적으로 모비우스가 결코 히어로가 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장치로 기능한다. 수감되었을 때나, 또 클라이맥스에서 펼쳐지는 대결을 앞두고 모비우스 역시 끝내 사람의 피를 마셔서 힘을 얻기 때문이다. 폭주하는 마일로를 막은 결과는 좋았을지 모르나, 그 역시 본능과 욕구를 이겨내지 못했다. 또 그 과정에서 사적 제재를 가함으로써 작중 FBI 요원 사이먼으로 대변되며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이 낳은 사회적 질서에 심대한 피해를 끼치고 만다. 그렇게 베놈의 뒤를 이어 피로 쓴 안티 히어로이자 빌런인 모비우스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야기의 매력을 가리는 설득력 없는 화법
문제는 엉성한 각본과 조악한 편집으로 인해 모비우스의 탄생기가 지닌 차별성과 매력이 명확히 전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선 <모비우스>의 시나리오는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모비우스와 마일로 간의 관계를 명확히 묘사하는 데 실패한다. 철저히 두 친구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정작 친구 관계의 시작점인 유년 시절을 보여주는 분량이 상당히 적기 때문에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들의 공통분모인 에밀과의 관계를 설명해주는 대목이 부족하다 보니 둘의 갈등과 대립이 선명히 그려지지 않기도 한다.
또한 2시간이 채 되지 않는 러닝 타임에 무리하게 여러 이야기를 풀어낸 결과, 급 전개되는 로맨스처럼 여러 사건들은 설명되지 않은 채 그저 발생하는 데 그친다. 덩달아 모비우스의 조력자인 마르틴, 모비우스와 마일로를 쫓는 FBI 요원 사이먼 같은 캐릭터들도 무의미하게 소비된다. 자레드 레토와 맷 스미스의 연기가 눈을 사로잡는 데는 두 주인공 외에 뚜렷한 개성을 지닌 캐릭터가 없는 것도 큰 몫을 맡는 것이다.
히어로 영화, 액션 영화에 기대할 만한 볼거리의 질이 낮은 것도 치명적인 단점이다. 사실 <모비우스> 속 액션의 콘셉트는 분명 나쁘지 않다. 박쥐의 상징성에 주목한 <더 배트맨>과 달리, 박쥐의 원초적 습성에 주목해 박쥐의 능력을 직관적으로 활용하는 아이디어는 인상적이다. 또 배나 병원처럼 한정된 장소에서 고전적인 호러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초반부 액션은 그 자체로도 눈길을 사로잡을 뿐 아니라 서스펜스를 조성하는 데도 효과적이다. 하지만 액션의 규모가 커지려는 중후반부에서 단점이 모습을 드러낸다. 밤거리와 지하 동굴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액션 시퀀스는 피아식별을 어렵게 하며, 알아보기 힘든 액션은 클라이맥스에서 긴장감을 최대치로 고조시키는 데도 무용하다.
여기에 새로 만든 연구실을 놔두고 굳이 기존 연구실을 찾아가서 무기를 만드는 장면처럼 바로 앞뒤 장면의 연결조차 매끄럽지 못한 편집이 더해지면 문제는 더욱 악화된다. 그간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2>부터 <베놈>, <베놈 2>에 이르는 소니의 히어로 영화들은 어수선한 편집으로 인해 필요한 분량이 대거 생략되고 완성도가 하락한 공통점이 있었는데, <모비우스>도 고질병을 피하지 못한 셈이다.
과거 마블의 수장인 케빈 파이기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구축하는 비법을 묻는 언론의 질문에 대해 "세계관을 걱정하지 마라. 영화를 걱정하라( don't worry about the universe. Worry about the movie")"라고 답한 바 있다. 이 말은 2개의 쿠키 영상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SSU의 거대하고 야심한 미래에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우는 듯하다. 스스로의 매력과 잠재력조차 온전히 살려내지 못한 <모비우스>는 케빈 파이기의 조언과 정확히 반대에 위치한 작품으로, 현재 SSU의 다음 타자로 예정된 <크레이븐 더 헌터>를 향한 기대감을 전혀 키우지 못한 채 막을 내리기 때문이다.
D(Dreadful, 끔찍한)
시작은 그럴싸하나 끝은 미약한 흡혈귀 빌런의 데뷔
-
- 내가 다니고 싶은 학교는?
다들 개학, 개강 잘 맞이하셨나요?
비대면 수업이 대면으로 전환되면서,
거리에 학생들이 많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친구를 봐서 반갑기도 하고,
또 새로운 친구를 사귀면서 설렘 가득한 시간을 보내고 계실 것 같아요.
그래서 개학, 개강을 맞이해 학교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를 추천해 드리려고 합니다.
그럼 지금부터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클래식
(The Classic, 2003)
synopsis
엄마의 젊은 시절 편지와 일기장을 발견했다.
읽어갈수록 엄마의 옛사랑과 나의 지금 사랑이 닮았다고 느끼는 건 착각일까.
아련한 첫사랑의 기억 속으로, 함께 떠나볼까요?
cine pick!
제목처럼 한국 로맨스의 '클래식'인 영화.
소중히 간직하고 싶은 이야기와 너무 예쁜 주인공,
그리고 듣기만 해도 설레고 아련한 OST까지...!!
Streaming Service
넷플릭스, 티빙, 왓챠, 쿠팡플레이
퀸카로 살아남는 법
(Mean Girls, 2004)
synopsis
케이디는 전학 간 고등학교에서 퀸카 집단에 들어가지만,
퀸카들의 리더의 전 남자친구가 케이디에게 호감을 느끼면서 전쟁이 시작된다.
cine pick!
하이틴의 정석 영화이자 가볍게 볼 수 있는 팝콘 무비입니다.
린제이 로한, 레이첼 맥아담스, 아만다 사이프리드
세 배우의 리즈 시절을 볼 수 있는 영화!
Streaming Service
넷플릭스, 웨이브, 왓챠, 쿠팡플레이
말할 수 없는 비밀
(Secret, 2007)
synopsis
예고로 전학 온 첫날, 교정에서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이 들린다.
소리에 이끌려 문을 연 음악실. 거기 한 여학생이 있다.
첫눈에 사랑에 빠지지만 그녀는 홀연히 사라진다.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그녀. 그녀에게 더 다가가고 싶다.
cine pick!
영화를 안 본 사람도 알 정도로 유명한 피아노 배틀 장면.
영화를 보고 나면 영화, 주연 배우, OST에 빠질 수밖에 없다.
몇 번을 봐도 똑같이 감동을 주는 영화입니다.
Streaming Service
넷플릭스, 웨이브, 티빙, 왓챠, 쿠팡플레이
건축학개론
(Architecture 101, 2012)
synopsis
서연과 승민은 건축학개론 수업에서 만나 사랑에 빠졌었다.
서연이 승민을 찾아와 꿈에 그리던 집을 지어 달라 하고
둘 사이엔 다시 사랑이 싹튼다.
cine pick!
아련하고 풋풋했던 첫사랑의 기억을 떠오르게 하는 영화.
조정석 배우의 인생 캐릭터 '납득이'가 탄생하고,
수지 배우에게 '국민 첫사랑'이라는 수식어를 만들어낸 영화!
Streaming Service
넷플릭스, 웨이브, 티빙, 왓챠, 쿠팡플레이
나의 소녀시대
(Our Times, 2015)
synopsis
1994년 대책 없이 용감했던 고등학생 시절, 유덕화 마누라가 꿈인 평범한 소녀 ‘린전신’과
학교를 주름잡는 비범한 소년 ‘쉬타이위’의 첫사랑 밀어주기 작전
cine pick!
사랑할 수밖에 없는 대만 청춘 영화.
유치하면서도 순수한, 그리고 사랑스러운 주인공의
매력의 흠뻑 빠져들게 될 것이다.
Streaming Service
넷플릭스, 왓챠
히로인 실격
(Heroine Disqualified, 2015)
synopsis
하토리는 자신과 소꿉친구 리타를 사랑의 '히로인’과 '히어로'라 여기며
언젠가는 연인이 될 것이라 굳게 믿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리타에게 여자친구가 생긴다.
cine pick!
코다 모모코의 만화 '헤로인 실격'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유쾌하고, 통통 튀고, 사랑스러움으로 가득한 영화입니다.
많은 이들의 사카구치 켄타로 입덕작이기도 합니다.
Streaming Service
웨이브, 티빙, 왓챠
싱 스트리트
(Sing Street, 2016)
synopsis
전학 간 학교에서 만난 라피나에게 첫눈에 반한 코너. 잘
보이고 싶어서 밴드를 하고 있다는 거짓말을 한 코너는 덜컥 라피나를 뮤직비디오에 섭외하고,
그날부터 코너는 급하게 밴드 멤버를 모으기 시작한다.
cine pick!
영화를 다 보면, 영화 OST를 찾아
플레이리스트에 담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OST도, 배우도, 메시지도 너무 좋은 영화입니다.
Streaming Service
웨이브
여름날 우리
(My love, 2021)
synopsis
너에게 풍덩 빠져버렸던 17살의 여름.
너를 두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21살의 여름.
그리고 몇 번의 여름이 지나고 다시 만난 너, 이젠 놓치지 않을 거야.
cine pick!
싱그러운 청춘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원작과는 또 다른 매력을 보여주었다.
두 배우의 감정선이 돋보이고, 케미가 좋은 영화.
Streaming Service
웨이브, 티빙
씨네랩 에디터 Hizy
-
- <자산어보> 믿고 보는 이준익, 사극, 흑백의 조화
정조의 총애를 받던 '정약전(설경구)'은 그가 죽고 터진 신유박해와 황서영 백서 사건으로 인해 외딴섬, 흑산도로 유배된다. '동생 정약용(류승룡)'과 이별한 슬픔에 빠진 그의 눈에 문득 글공부를 하는 청년 어부 '창대(변요한)'가 들어온다. 어류와 조개류, 해초류와 바닷새들에 이르기까지 줄줄이 꿰뚫고 있는 그를 보면서 약전은 오랜만에 호기심이 샘솟는다. 이에 그는 창대에게 서로의 지식을 거래하자고 제안하고, 죄인을 도울 수 없다던 창대도 못 이기는 척 동의한다. 갈등을 빚다가도 좋은 추억을 쌓으면서 사제의 연을 맺는 둘. 그러나 서로 추구하는 공부와 학문의 길과 목표가 다르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확인한 뒤 창대는 약전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흑산도 밖으로 나가기로 결심한다.
이준익 감독은 한국사를 영화화하는 데 특출난 능력이 있다. 그의 영화는 통념을 벗어나는 이야기를 한다. 예를 들어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생존을 위해 전쟁을 펼치는 장면을 담은 <황산벌>, 무정부주의자와 일본인의 독립운동을 다룬 <박열>은 민족주의적 시각을 배제한다. 또 그의 영화는 주로 조명되지 않았던 개인들의 이야기와 관계를 스크린으로 불러온다. <왕의 남자>에서는 연산군, 장생, 공길의 미묘한 애정, <사도>에서는 정치투쟁과 권력 다툼 기저에 깔린 애증의 부자관계를 들여다본다.
<자산어보>에서도 그의 능력은 빛난다. 우선 사극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세상 물정 모르고 이상향을 꿈꾸는 양반(혹은 귀족) 주인공과 현실의 냉혹함을 일갈하는 백성의 구도를 탈피한다. 약전이 조선 사회의 한계를 체감하고 현실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것에 비해 창대는 정약용이 쓴 목민심서의 가르침을 직접 실천하려는 이상주의적 태도를 보여준다. 자연주의적, 경험주의적 관점에서 실학을 추구하는 약전과 달리 창대는 인문학적 관점에서 인간의 존재와 의미를 탐구하는 추상적인 성리학을 추구한다. 이는 입에 '상놈'이라는 표현이 붙어버린 양반과 물고기만 잡던 상민의 만남으로부터 흔히 기대할만한 구도는 아니다.
또한 신유박해, 황사영 백서 사건, 세도 정치와 같은 굵직한 사건은 철저히 배경으로 밀려난다. 대신 흑산도로 시선을 돌려 정약용이라는 동생의 이름에 가려진 정약전과 신분의 벽에 막혀 역사에 몇 줄 남기지 못한 창대의 이야기에 주목한다. 영화는 이들의 서사를 정반대로 흐르는 물결 위에 띄어 놓는다. 약전은 뛰어난 학식을 지녔으나 천주교를 믿었던 과거가 빌미가 되어 신유박해와 황사영 백서 사건의 가담자로 몰려 옥고를 치르고 유배를 떠나 흑산도로 향한다. 반대로 창대는 흑산도에서 육지로 나가 뛰어난 학식을 인정받고 꿈에 그리던 벼슬길에 나가지만 이내 옥고를 치른다. 이처럼 상반된 인생이 흑산도에서 조우한 결과, 둘이 우여곡절 끝에 사제 간의 연을 맺는 과정과 끝은 행복, 뿌듯함, 연민, 안타까움 등을 자아낸다.
이때 영화 전반에 걸친 백과 흑의 조화는 상반된 태도 사이에서 스승과 제자가 공유하는 접점을 강조한다. 흰색은 둘이 맛본 실패의 경험을 함축한다. 흰 옷이 대표적인 예시다. 함께 자산어보를 완성하자는 스승의 제안을 무시하고 뭍으로 나간 창대는 유달리 새하얀 옷을 입은 채 백성을 우선하고 부패를 근절하려는 목민관의 이상향을 실현하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지방관과 아전들의 탐욕과 부패를 막으려던 그는 이내 상관의 심기를 거슬러 옥에 갇히고, 그의 옷은 더럽혀진다. 그렇게 더럽혀진 그의 흰 옷은 만민이 평등하게 사는 세상을 꿈꿨지만 실현시키는 못한 약전이 흑산도에 첫 발을 내딛을 때 입은 옷과 겹쳐 보인다. 창대가 직접 생선의 배를 갈라서 연구하는 약전에게 흰 옷을 더럽히면서까지 양반이 왜 그런 짓을 하느냐고 물었던 것과 이어 보면 묘한 울림을 주며, 조선의 지배층이라는 집단에 대한 실망을 표한다.
한편 흑은 현실의 벽에 막힌 두 사람의 이상적인 시도를 실패로 규정하지 않는다. 시대라는 파도를 타는 개인의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드러내며, 한걸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경험으로 승화한다. 약전은 창대가 자신처럼 이미 부패한 관료제를 개혁하지 못할 것임을 안다. 창대가 끝까지 신뢰의 끈을 놓지 못한 성리학이 더 이상 한 국가의 이데올로기로서 역할을 할 수 없다는 사실도 뼈저리게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오징어) 먹물을 취하여 글씨를 쓰면 색이 매우 윤기가 있다. 그러나 오래되면 벗겨져서 흔적이 없어진다. 바닷물에 넣으면 먹의 흔적이 다시 살아난다고 한다. 그 뼈는 곧잘 상처를 아물게 하고 새 살이 나게 한다"면서 제자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마음으로 그가 자신에게 전해준 지식을 목숨을 다해 책으로 묶는다. 이는 "학처럼 사는 것도 좋으나 구정물 흙탕물 다 묻어도 마다하지 않는 자산 같은 검은색 무명천으로 사는 것도 뜻있지 않겠느냐"는 스승의 유언을 본 창대의 눈물 속에 담긴 참회, 후회, 반성이 더욱 뼈저리게 느껴지는 이유다.
흥미로운 것은 흑백영화인 이 작품에 순간적으로 색채가 드러나는 대목이 있다는 사실이다. 스크린에는 파란색이 순간적으로 세 번 등장한다. 한 번은 별이 비치는 밤하늘이 검푸른 빛을 띠고, 또 한 번은 성게를 비롯해 새조개, 누비 조개, 새꼬막 등에서 새끼 새가 나온다는 약전의 내레이션과 함께 작은 파랑새가 등장한다. 마지막으로 푸른 바다에 자리 잡은 흑산도의 풍경이 스크린을 가득 채우며 영화를 끝낸다.
이때 가장 눈길이 가는 존재는 파랑새다. '자산어보'가 철저한 관찰과 자료 조사를 통해 집필된 책인 만큼, 바다 생물이 새로 변한다는 설명은 생뚱맞기도 하고 과학적이라기보다는 신화적인 상상력에 가깝게 느껴진다. 하지만 신화가 현실의 대안으로써 사람들 사이에서 생명력을 유지해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파랑새에는 창대와 약전의 꿈과 바람이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자신을 구속하는 바닷일이라는 현실의 벽을 넘어서고자 하는 한 청년의 의지와 희망, 과거의 자신과 같은 꿈을 꾼 청년에게 전하는 앞 세대의 격려와 응원이 파랑새로 태어나는 것이다.
이 맥락에서 보면 첫 장면은 창대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되찾는 순간이며, 마지막 장면은 두 사람의 꿈과 희망이 단지 과거의 기록에 머물지 않고 지금의 현실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파란색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관객에게 전달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술의 서'를 쓴 중세 화가 첸니노 첸니니가 "다른 모든 색을 뛰어넘는 빛나고 아름답고 완벽"하며 "여전히 독보적으로 뛰어난" 색이라고 평가한 파란색의 진가가 흑백을 뚫고 드러난다. 이렇게 <자산어보>는 백색에 담긴 실패와 비관, 흑색에 담긴 낙관과 깨달음을 거름 삼아 파란색을 통해 희망을 노래하며 창대와 같은 이에게 힘을 보탠다.
<자산어보>를 보다 보면 감독의 필모그래피 중 특히 <동주>가 뇌리를 스치는 순간이 적지 않다. 단지 흑백영화라서가 아니다. 모순된 시대를 서로 달리 바라보는 정약전과 창대의 사제관계는 독립운동에 대해 가치관의 차이를 보여줬던 윤동주와 송몽규의 우정을 보는 듯하다. 이에 더해 윤동주의 시인의 시가 흑백의 필름을 수놓으면서 마치 시집을 영상으로 보는 듯한 느낌을 주었던 것처럼, <자산어보>도 정약용과 정약전, 그리고 창대의 한시가 어우러지며 한 편의 수묵화가 살아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이 수묵화는 <동주>와 또 다른 멋이 있다. 배우들의 표정, 제스처, 연기는 물론 영화 속 배경이 되는 공간으로부터도 뿜어져 나오는 힘까지 흑백 필름과 찰나의 파란색에 오롯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안개로 뒤덮인 섬으로 향하는 정약전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씁쓸함과 고독함, 검은 하늘에 홀로 떠 있는 달을 바라보며 서로를 그리워하는 형제의 우애, 약전에게 학문을 배우려는 절실함과 열정을 증명하려는 창대를 괴롭히는 거친 바다가 담겨 있다. 이처럼 역사에 희미하게 남은 스승과 제자의 이야기가 스크린 위에 담백하게 펼쳐지자 그들의 고동소리는 현재를 사는 이들에게 크고 감동적인 울림을 선사한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시대에 가려진 개개인의 아픔과 희망을 흑, 백, 청 삼색에 담다
-
- <삼토반>으로 보는 1995년 vs 2020년 세대 공감 직장 생활!
1995년 을지로, 회사 토익반을 같이 듣는 말단 세 친구가 힘을 합쳐 회사 비리를 파헤치는 과정에서 그들의 우정과 연대 속 뿌듯한 성장을 공감과 재미, 감동으로 그려낸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 배우들의 기대 이상의 만점 케미로 호평을 자아내고 있다.
일주일 연속 1위를 기록하며 꾸준한 관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을 통해 1995년을 살아간 직장인과, 2020년을 살고 있는 직장인들이 모두 공감할 수 있는 "찐" 직장 생활을 탐구해보자.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직장 생활!
입사 8년차 말단 사원인 세 친구가 거대 기업에 맞서 싸워가는 과정을 유쾌하게 그린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 90년대 그 시절에 볼 수 있었던 회사 생활을 리얼하게 담아내 1995년을 기억하는 관객들에게는 뜨거운 공감을, 2020년 현실 청춘들에게는 새로운 볼거리를 선사한다.
‘삼진그룹’의 말단 사원 세 친구, 자영(고아성), 유나(이솜), 보람(박혜수)은 회사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일단 뭉친다. 자신들만의 아지트인 옥상에 올라가 과자를 먹으며 함께 수다를 떨기도 하고, 퇴근 후에는 회사 근처 호프집에서 치킨을 먹고 맥주를 마시며 회사에서 받았던 스트레스를 푼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속 세 친구의 스트레스 극복 방법은 2020년 직장인들에게도 현실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믿고 의지하는 친구, 동료들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수다를 떠는 것이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직장 스트레스 해소 방법 중 하나다.
그땐 그랬지~! 이젠 볼 수 없는 직장 생활!
한편, 2020년에는 볼 수 없었던 1995년 회사 생활의 모습도 눈길을 끈다. 먼저, 1995년에는 실내에서 흡연이 가능했다. 사무실이나 회의실 테이블 위에 담배와 재떨이가 필수품처럼 비치되어 있었던 90년대를 그대로 재현해낸 ‘삼진그룹’ 사무실은 실내에서 흡연이 가능했던 시대적 분위기를 살려냈다. 마케팅부 회의 중 담배를 피우는 반은경(배해선) 부장과 페놀 유출 사건으로 ‘삼진그룹’을 취조하는 검사(김태훈) 등 실내에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은 현재의 우리에게 꽤 낯설다. 담배의 유해성과 간접흡연의 심각성이 커지면서 2012년부터 공중이용시설의 흡연이 전면 금지되어, 지금은 보지 못하는 풍경이 되었다.
두 번째로 90년대에는 팀원들의 커피를 타는 일을 누군가 전담하는 것이 당연했다. ‘삼진그룹’ 말단 사원들은 상사와 팀원들의 취향에 맞게 알아서 탁탁 커피를 타는 일이 출근해서 아침에 하는 중요한 업무이다. 유니폼을 입은, 전 부서의 말단 직원들이 탕비실에 모여 커피, 설탕, 프림을 비율에 맞게 타는 모습은 1995년 직장 생활을 경험한 관객들에게 격한 공감을 모으고 있다. 특히, 자영이 각자의 취향에 맞게 커피 10잔을 12초 만에 타내는 신기록 보유자인 만큼 얼마나 많은 커피를 탔을지 짐작하게 한다. 오늘날 점심 식사 후 카페에서 커피를 사 마시고, 캡슐 커피나 믹스 커피를 취향별로 각자 알아서 마시는 요즘 상식으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불과 20여 년 전의 회사 풍경과 문화다.
세번째, 90년대 말단 사원들은 상사의 지시라면 뭐든 해내야만 했다. ‘삼진그룹’ 말단 사원들은 구두닦이 배달, 담배 심부름, 재떨이 비우기, 짐 옮기기 등 회사 내 온갖 잡무를 도맡아 한다. 전날 야근하며 부원들이 먹었던 야식을 치우고, 담배까지 사서 책상 위에 놓는 말단 사원들은 언젠가 진짜 내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며 버틴다. 직급과 무관하게 누군가의 서포트를 넘어, 각자의 고유한 업무를 하는 현실 청춘들과는 다른 낯선 모습을 보인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서로 달라 더 눈에 띄는 개성과 매력. 그리고 탄탄한 연기력으로 뭉친 고아성, 이솜, 박혜수가 입사 8년차 말단 사원들이자 회사와 맞짱 뜨는 세 친구로 분해 전 세대, 남녀노소 관객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며 N차 관람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
-
- 강동원, 이종석의 "설계자" / 잘생김이 연기되지 못한 빛바랜 비주얼 / 반전과 결론은 볼만
영화직관하는남자 홍큐의 "설계자"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은 없습니다~
-
- 영화 <괴기맨숀> 티저 예고편
공포 웹툰 작가 지우는 아이디어를 찾아 괴기맨숀이라 불리는 허름한 아파트에 도착한다.
표정을 알 수 없는 중년의 관리인은
이 아파트에서 일어났던 기묘한 사건들에 대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내고,
504호, 708호… 지우는 사연을 들을수록 홀리기라도 한 듯 괴기맨숀에 점점 집착하게 되는데...!
미스터리한 맨숀! 5개의 에피소드! 괴이하고 섬뜩한 현실 공포가 온다!
-
- 영화 <켈리 갱> 30초 예고편
폭력과 부패로 가득했던 시대
온갖 범죄로 세상을 더럽히는 무법자 ‘해리’와 부패경찰 ‘알렉스’에 맞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악인들을 단죄한
전설적 영웅이자 세상이 버린 위대한 범죄자
‘네드 켈리’의 이야기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