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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목필2025-02-16 11:24:34

빛은 단 하루도 같은 날이 없었음을

영화 <퍼펙트 데이즈> 리뷰

 

 

"다음은 다음이고, 지금은 지금!"

 


그럼 어제는? 영화를 보다가 무의식적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과거도 그냥 과거일까? 그렇다기엔 현재와 미래보다는 영향력이 큰 것 같다. 지금도 다음도 필연적으로 과거가 되니까 말이다.

도쿄에서 화장실 청소부로 일하는 히라야마(야쿠쇼 코지)의 일상은 굉장히 규칙적이고 단조롭다. 이웃의 빗자루질 소리는 그의 알람이다. 매일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전날 밤에 읽었던 책 페이지를 확인하고, 양치하고, 키우는 식물들에게 물을 주고 현관 앞 선반에 습관처럼 올려둔 짐들을 챙겨 출근을 한다. 문을 열자마자 매일 조금씩 다른 아침 하늘이 보인다. 그걸 보며 히라야마는 개운한 숨을 내뱉는다. 익숙하게 자판기에서 뽑은 캔커피를 마시고 올드팝을 들으며 출근한다. 정해진 화장실을 순회하며 깨끗하게 청소하고, 공원으로 가 사온 점심을 먹는다. 주머니에서 작은 필름 카메라를 꺼내 렌즈를 위로 향하게 꺾어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찍는다. 뷰파인더는 볼 필요 없다. 그의 시야를 꽉 채우는 나무는 흑백의 과거로 남는다.

퇴근하면 일상복으로 갈아입고 대중목욕탕에 가 깨끗하게 씻는다. 적적하지 않게 지하철 식당가에서 저녁을 해결한다. 주말에는 밀린 빨래를 하고 사진을 인화한 뒤 새 필름을 구매한다. 다 감긴 카스트테이프는 익숙하게 연필을 꽂아 다시 원래 대로 돌려놓고, 자주 가는 중고서점에 가서 책을 고른 후 단골 술집을 찾는다. 은근히 자신을 더 신경 쓰는 여사장에 옅은 고양감을 느끼며 기분이 좋아진다. 그렇게 몸에 익은 나른한 시간들이 흐른다.



히라야마의 일상을 보면 그가 꽤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화장실 청소는 단순 노동처럼 보이지만 제시간에 끝내기 위해서는 순서가 중요하다. 안에 손님이 이용 중이신지 확인도 해야 하고, 놓치지 쉬운 곳이 많아 거울로 꼼꼼하게 확인해야 한다. 또한, 화장실은 생리 현상을 해결하는 곳이니 청소를 한다고 이용객들에게 기다리라고 할 수도 없다. 늘 기다리는 건 히라야마다. 홀대하는 시선마저도 익숙한 모습을 보며, 우리는 그가 지금의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을지 자연스럽게 가늠할 수 있다. 일찍 퇴근해서 여유롭게 밥을 먹거나 목욕탕에 가는 것도 제시간에 일을 끝내야 가능하니 말이다. 히라야마의 일상에는 정제된 규칙과 순서가 있다. 그것들을 지켜야 사랑하는 책과 올드팝을 계속 곁에 둘 수 있다.

그러나 히라야마의 일상은 마냥 평탄하지만은 않다. 같이 일하는 후배 다카시(에모토 토키오)는 말도 많고 제멋대로에 일도 대충 한다. 곁에서 징징거리는 탓에 남은 돈을 다 빌려줬더니 저녁을 사 먹을 돈이 부족해진 히라야마는 꽤 값이 나간다는 올드팝 카세트테이프를 들며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집에서 대충 컵라면을 끓여 먹는 것으로 자신과 합의를 본다. 이 소동에 의외의 즐거움도 있었다. 시니컬해 보이는 후배의 여자친구 아야(야마다 아오이)는 히라야마의 올드팝 카세트테이프를 꽤 좋아한다. 물론 말도 없이 가져가긴 했지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듣고 싶다는 아야의 부탁으로 둘은 차 안에서 함께 노래를 듣는다. 울적해 보이던 아야는 자신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는 히라야마의 볼에 짧게 키스하고 사라진다.



생각지도 못한 손님이 찾아오기도 한다. 훌쩍 커버린 조카 니코(나카노 아리사)의 방문으로 히라야마의 고정된 일상은 미세한 변화를 맞이한다. 타카시와 함께 할 때와 달리 조카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자신에겐 너무 익숙해진 풍경을 제삼자인 니코의 시선으로 보게 된다. 어쩐지 10대인 니코는 히라야마의 조용한 일상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책이나 카세트테이프에 관심을 갖는 조카에 기쁜 마음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에 작은 진동이 생긴다.







‘테라핀’에 나오는 빅터라는 남자애 꼭 나 같아. 얘 기분 완전 알겠어.





책이 마음에 든다며 조잘거리는 니코에 이미 책의 내용을 알고 있는 히라야마의 표정은 약간 복잡해진다. 이후 니코의 어머니이자 그의 동생인 케이코(이누야마 이누코)와 몇 년 만에 재회한다. 딱 봐도 부유해 보이는 케이코의 모습과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니코의 반응으로 우리는 히라야마의 과거를 조금이나마 짐작한다.





빅터처럼 될지도 몰라.



안 돼. 그런 말 하지 마.





니코가 말한 <11>이라는 단편집 속 <테라핀>에서 어머니에게 학대당하는 소년 빅터가 어머니가 사 온 식용 자라와 친구가 되는 이야기다. 어머니는 결국 자라를 먹기 위해 끓이고, 그 모습을 본 빅터는 어머니를 살해한다. 케이코를 꼭 끌어안은 히라야마는 차가 떠나자 참지 못하고 눈물을 터뜨린다. 이 영화에서 가장 감정적인 신이다. 복합적인 감정에 휩싸여 평소처럼 책도 읽지 못하고 잔뜩 충혈된 눈으로, 그는 규칙적이고 정제된 일상을 통해 멀어지고자 했던 과거와 고독을 생각한다.



히라야마는 굉장히 신사적이지만 다른 의미로는 어딘가 벽이 느껴진다. 근무태만에 자신에게 매달려 돈타령을 하는 다카시를 향해 쓴소리를 할 법도 하지만 말없이 지갑을 연다. 그러나 그 모습이 젊은이를 이해해 주는 참된 어른의 넓은 아량으로만 보이진 않는다. 히라야마의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는 어쩐지 방어적이다. 사람이 많은 장소를 찾긴 하지만 그들과 간단한 대화만 나누고 가게 문이 닫혀 있어도 굳이 새로운 것을 찾지 않는다. 자기만의 단골집을 만드는 이유는 소박한 취향을 가진 탓도 있지만 동시에 삶의 변화를 줄이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작은 것들을 일상에 촘촘히 박음질 함으로써 그는 과거와 상처로부터 자신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히라야마가 선택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꿈’이다. 필름 카메라를 여러 장 겹친 듯 보이는 그의 꿈은 가까운 과거를 비추기도 하고, 아주 먼 기억을 꺼내 그를 흔들어 놓기도 한다. 지금과 다음을 만든 과거. 셔터를 누르는 찰나의 순간처럼 과거가 되어버리는 지금. 히라야마는 언제나 ‘다음’과 ‘지금’을 말하지만 꿈을 꾸지 않으면 내일은 오지 않는다. 과거는 내일로 가기 위해 필연적인 것이다.



아무리 담백하다 한들, 삶이라는 것은 그리 계획대로 되지 않고 영원한 건 없다. 결국 다카시는 전화만 한 통 남기고 일을 그만둬 일을 독박으로 혼자 다 해야 했고, 평소보다 늦게 문을 연 술집에서는 여사장이 어떤 남자와 포옹을 하고 있는 것을 목격한다. 좌절한 그는 술과 담배를 사 강가로 간다. 히라야마에게 다가온 남자는 자신이 7년 전 여사장과 이혼하였으며, 암에 걸렸다고 설명한다. 모르는 것이 너무 많은데, 이렇게 죽을 수는 없는데.





그림자는 겹치면 더 어두워질까요?





남자가 지나가듯 툭 던진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히라야마는 처음으로 타인에게 무언가를 제안한다. 그리고 그림자를 만들기 위해서 가장 환한 빛 아래에 선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꿈과 사진을 닮은 그림자. 히라야마는 남자와 천진난만하게 그림자밟기 놀이를 한다. 그림자를 피하겠다고 자신의 삶에 들어오는 환한 빛을 더는 피하지 않는다. 그렇게 같지만 전혀 다른 아침을 맞이하며 비로소 자신이 선택한 삶을 온전히 만끽한다. 그리고 깨닫는다. 이 고요한 삶조차 살아냄이라고. 그러나 나의 선택이니 만큼, 이번에는 후회는 없을 거라고. 그러니까 지금 이 기분은,





‘Feeling Good.’

작성자 . 최목필

출처 . https://brunch.co.kr/@choiboin/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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