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to2025-02-17 16:14:23
애프터썬: 당신의 뒷모습을 안아줄 수 있더라면
애프터썬 리뷰
애프터썬: 당신의 뒷모습을 안아줄 수 있더라면
기억의 파편으로 시작된 사적인 이야기
영화 애프터썬은 11살 소피가 아빠와 함께 떠났던 튀르키예 여행의 기록을 31살이 된 현재의 시점에서 되돌아보는 방식으로 시작된다. 캠코더 속 아빠의 모습은 생생하지만, 현실에서는 더 이상 곁에 없는 인물이다. 영화는 이러한 부재의 감각 위에서 기억과 애도의 과정을 섬세하게 응시한다.
소피와 아빠 캘럼은 오랜만의 만남 속에서 서툴지만, 서로에게 다가가려 노력한다. 초반부는 햇살 가득한 휴양지의 풍경과 함께 한 소녀의 성장 서사처럼 보이지만, 영화가 쌓아가는 감정의 결은 단순한 유년의 추억이 아니다. 마지막 10분, 그제야 영화가 품고 있던 깊은 공허와 아득한 슬픔을 또렷이 인식하게 된다.
보이지 않았던 것들, 혹은 보려 하지 않았던 것들
빛나는 햇살 아래에서도, 영화는 지속적으로 불안과 긴장감을 은은하게 유지한다. 초반부터 어딘가 모호한 분위기가 깔려 있으며, 장면 곳곳에서 캘럼의 감정적 균열이 드러난다. 명상과 태극권에 몰두하는 모습, 자신이 11살이었을 때 생일을 별로 축하받지 못했다는 고백, 친구와의 사업이 실패했음을 암시하는 대화. 이 모든 조각들은 그가 감내해야 했던 삶의 무게를 암시하는 복선이다.
캘럼은 딸 앞에서는 최선을 다해 밝은 모습을 유지하려 하지만, 문득문득 그늘이 드리운다. 소피가 없는 순간, 그는 깊은 우울과 피로에 잠긴다. 영화는 이러한 단서들을 흩뿌려놓지만, 어느 하나도 확정적인 결론을 내리진 않는다. 이는 감독 샬롯 웰스가 자신의 사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했기에 더욱 직관적이며, 열린 해석을 가능하게 만든다.
기억의 공간에서 춤추는 한 사람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소피의 꿈속에서 11살의 아빠가 격렬하게 춤을 추는 순간이다. 이는 단순한 춤이 아니라, 감정을 분출하는 몸짓이자 외로운 내면의 울림처럼 보인다. 마지막 날의 춤과 연결되며 더욱 강렬한 울림을 남긴다.
소피는 31살이 되고, 과거를 되돌아볼 때, 그때의 아빠를 다시금 이해한다. 캠코더 속의 장면들을 되새기며, 어린 시절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어렴풋이 감각하며, 어린 나의 세상에서 미쳐 보지 못했던 고독했던 아버지의 표정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되돌릴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캘럼은 끝까지 소피에게 자신의 우울과 무너짐을 보이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시간은 냉정하게 흘러갔고, 소피가 그 감정을 헤아릴 수 있었을 때 아빠는 이미 그곳에 없다. 영화는 관객에게 직접적인 답을 주지 않지만, 남겨진 이가 가지는 후회와 애도의 감정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따라서, <애프터썬> 잃어버린 시간을 향한 깊은 애도이자, 존재했지만 이해하지 못했던 한 사람을 향한 애틋한 포옹을 담은 영화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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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시작점을 다시 쓴다는 것
- 겨울이면 떠오르는 영화가 있는가? 누군가에겐 <이터널 선샤인(2004)>일 수도, <러브레터(1995)>나 <당신이 잠든 사이에(1995)>일 수도 있겠다만 내 대답은 <윤희에게(2019)>이다. 왜일까. 푹푹 내린 눈으로 뒤덮인 흰 풍경 속에서 검은 코트를 입고 선 윤희(김희애)가 막막한 세상의 단독자처럼 보여서일까. 혹은 스무 살을 앞둔 딸을 키우는 중년 여성 윤희가, 외면했지만 여전히 여린 상처를 보듬고 나아가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기 때문일까. 아니라면, 찬 겨울의 중심부에서 찾아낸 이야기의 절단면을 어루만지며 그 시절의 선명했던 감정을 담담히 긍정하는 모습이 찬연했던 탓일지도. 아무튼 2023년 1월의 끝물에 나는 다시 <윤희에게>를 보았다. 권태로운 일상을 벗어나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고 싶다는 열망에서 비롯된 선택이었다.영화 <윤희에게>는 과거와 바다, 꿈의 경계를 횡단한 편지로부터 출발한 이야기다. 조금 더 풀어내자면 이렇다. 지금은 일본에 사는 윤희의 20여 년 전 첫사랑 쥰(나카무라 유코)이 쓴 고백이 예산에서 지극히 수동적인 자세로 일상을 견디는 윤희에게 도착한다. 정확히는, 윤희의 딸 새봄(김소혜)에게. 새봄은 몰래 편지를 읽고서 엄마에게 일본 오타루 여행을 제안하고, 오타루에선 쥰의 편지를 몰래 보낸 장본인 마사코(키노 하나)와 합심해 두 사람의 재회를 이끈다.여느 영화가 그렇듯 <윤희에게>를 읽어내는 방법은 무수하기 그지없다. 우선 젠더가 가장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윤희를 억압했던 한국의 가부장적 사회에 집중할 수도 있을 것이고, 영화의 구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다. 또한 표류하던 개인의 성장 서사로 이해할 수도 있을 테고, 윤희와 새봄의 관계에 대해서도 다뤄봄직하다. 당연하지만 쥰에게 초점을 맞출 수도 있다. 그중에서 내가 집중하고 싶은 건 윤희 개인의 내면적 성장 – 그러니까, 스스로가 다시 쓰는 개인의 역사에 관한 것이다. (퀴어라는 주제를 깊게 다루지 않는 까닭은 그러한 소수자성이 없는 내가 함부로 꺼내도 괜찮은 지에 대해 여전히 의문을 품고 있기 때문으로, 어쩌면 내 부족함을 유야무야 덮어버리는 회피인지도 모른다.)영화 초입에서 우리가 만나는 윤희는 공허하다. 공장으로 향하는 봉고차에 탄 눈빛엔 힘이 없고, 식당 배급을 하는 그의 일상은 지겨운 굴레처럼 보인다. 심지어 담배를 피우는 가로등 옆의 건물마저 곧 무너질 듯 초라하다. 인생이 그를 어찌나 가혹하게 휘둘렀던지, 이따금 윤희는 자신의 목을 일찌감치 내놓은 연약한 초식 동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그의 이미지를 극대화시키는 것은 윤희가 자아내는 고독이다. 윤희는 대화가 불편하게 느껴질 때마다 단절하는 쪽을 택하며, 타인과의 관계에선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기다리고 관찰하기만 한다. 오죽하면 딸인 새봄이 윤희의 태도를 비꼬아 “나 자꾸 신세 지게 만들지 마, 그거 다 빚이야.”라고 말했을까. 그러하니 전 남편인 인호(유재명)가 윤희는 사람을 외롭게 만드는 사람이라고 한 평가가 완전히 틀리진 않았으리라. 하지만 이러한 윤희의 안전거리 확보는 자신을 돌보기 위한 방편이다.윤희가 과거 사랑을 통해 배운 것 중 하나는 분명 참담한 배반이었다. 쥰을 사랑한 윤희가 도달한 곳은 정신병원이었다. 가족이 윤희를 사랑한다는 미명 하에 내어준 선택지는 ‘괜찮은 남자’와의 이른 결혼이었으며, 윤희를 사랑했다던 전 남편은 술에 취해 윤희의 집에 돌아오는 불편한 폭력을 거듭한다. 어디 그뿐인가. 가족은 사진을 향한 윤희의 애정을 알았지만 대학교 사진학과에 진학한 이는 윤희가 아니라 윤희의 오빠였다. 자신을 둘러싼 사회가 그를 억압할 때, 숨죽여 삶을 이어가야 하는 개인이 가장 먼저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은 결코 전복일 수 없다. 전복엔 적지 않은 용기와 지지가 필요하다.이러한 윤희에게 용기를 더해준 사람은 두 명이다. 쥰이 부치지 않은 편지를 한국에 전한 쥰의 고모 마사코와, 편지를 읽고 대담한 여행 계획을 세운 딸 새봄. 쥰의 고모가 없었더라면 쥰의 편지는 윤희에게 닿지 않았을 것이며, 새봄이 없었더라면 윤희는 오타루로 향하지 않았을 터다. <윤희에게>의 쥰은 의도적으로 편지를 부치지 않았다. 자신은 흘러넘친 마음으로 버거워하면서도 수신인이어야 했을 윤희를 배려한 셈이다. 어쩌면 전윤호 시인의 시구처럼, 쥰이 “때를 놓친 마음은 재난일 뿐”이라는 사실을 너무도 절절하게 이해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쥰의 고모는 그의 편지를 우체통에 넣었다. 그런데 쥰의 편지는 윤희에게 닿기 전, 새봄에게 먼저 도착한다. 잘못 도착한 것일까? 아니, 결코 아니었다.봄은 그 자체로도 새로움의 상징인데 굳이 새롭다는 의미가 더해진 이름을 가진 윤희의 딸 새봄은, 어린 윤희를 많이 닮았다고 소개된다. 사진에 재능이 있고, 엄마와의 첫 번째 해외여행에 남자친구까지 비밀리에 불러내는 걸 계획할 만큼 배짱이 두둑한 그를 통해 관객은 윤희의 어린 시절을 엿보게 된다. 쥰이 동경했을 사람, 보수적인 한국 사회에서 여자 친구와 연애한다고 밝혔을 소녀를 스크린 너머로 상상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새봄은 윤희의 후세대인 만큼, 그와 완전히 동일시되지는 않는다. 새봄은 새롭게 쓰이는 과거인 동시에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찬란한 미래인지라, 언뜻 막막해 보이는 윤희의 길을 명랑하게 안내하는 데에 성공한다.이러하니 마사코와 새봄 두 사람의 존재는 일상 속에서 눈치채지 못했지만, 항상 우리 곁에 있었기에 낯설지 않은 희망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또한 두 사람은 사랑으로 인해 큰 대가를 치른 윤희와 쥰에게 다시금 사랑의 미덕이 무엇인지를 되돌려주는 이들이다. 마사코와 쥰이 포옹하는 씬이나, 일순 새봄이 윤희를 사진에 담아내는 순간은 너무나도 짧은 찰나이고 거창한 수식어도 거대한 감정의 해일도 없지만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삶 앞에서 휘청이는 개인을 버티게 하고 나아가게 하는 건 그런 마음들의 합집합이라는 걸, 또한 알게 된다.잿빛에 가까운 일상에 금이 간다. 금 간 곳엔 항상 빛이 들어온다고 누군가 말했듯, 계기를 획득한 윤희는 공장 조리사로 일하던 기존의 삶을 정리한다. 삭막해 보이는 아스팔트 길을 해방된 얼굴로 걸어가던 그에게 이윽고 새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삿포로 근방에 있다는 오타루는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쓴 『설국』의 첫 문장을 연상시킨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하얗게 쌓인 눈은 모든 소리를 잡아먹을 듯하다. 보내지지 않았던 고백이 편지로 켜켜이 쌓인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희고 고요한 오타루에서 검은 코트를 입은 윤희가 남긴 매 순간의 궤적조차 자신의 온 마음이 담긴 편지였으리라.그럼에도 한 번 훼손되었던 마음은 손쉽게 발화되지 않는다. 같은 땅에 있음에도 윤희는 쥰을 먼발치에서 바라보기만 한다. 반면 쥰의 고모와 새봄은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 끊어진 시간을 잇는다. 애타는 마음으로 꿈에서만 만나던 두 사람이 현실에서 만난다. 동경으로 싹을 틔웠던 마음이 사랑을 거쳐 막연한 그리움으로 변한 시점의 재회였다. 눈 내리는 도시에서 20여 년간 녹색 숲(綠の林)이라는 동물 병원을 운영한 쥰이 새봄이라는 딸과 도착한 윤희를 만난 건 어떤 의미였을까. 나는 존 버거의 책 『A가 X에게』를 부분 인용하고 싶다. “(…) 나의 하루는 당신의 부재로 시작하지 않거든요. 그건, 우리가 하고 있는 이 일을 하기로 했던, 우리가 함께 내렸던 그 결정으로 시작해요.” 모든 걸 견딜 수 없는 순간, 꾹꾹 닫아 두었던 마음의 둑이 터지는 순간조차 부칠 수 없는 편지의 글귀로 남겨두는 두 사람에게 선택지가 다시금 돌아온다. 어떻게 매일을 시작할 것인지, 어떻게 개인의 역사를 써 내려갈 것인지.쥰과 윤희가 숨겨두어 먼지 쌓였을 기억과 마음을 현재로 가져오는 데에 성공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이 이야기는 치유 과정에 대한 이야기이지 궁극적으로 사랑이 실현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사랑이란 감정은 인생의 모든 것처럼 착각되는 강력한 순간을 우리에게 종종 부여하지만, 궁극적으로 삶의 전부로 치환되기는 어렵다는 걸 고려한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다만, 자의적으로 마무리하지 못했을 그 시절의 감정에 제대로 된 결말을 부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은 두 사람에게 크나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라 감히 단언한다. 여행을 끝마친 윤희는 예산을 떠나 이력서를 적는다. 고졸이라는 짧은 단어에 햇살이 드리우고 윤희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언젠가 직접 식당을 운영하겠다는 꿈은 윤희의 미소와 새봄의 사진 속에 남는다. 그는 더 이상 삶을 멀찍이에서 두려워하지 않으며, 변화 앞에서 움츠려들지 않는다. 지난한 현실의 고달픔은 여행 전과 후가 크게 다르지 않을지 모르나 그가 가진 삶의 이력만큼은 더 이상 남루하지 않으므로.윤희와 마찬가지로 쥰 역시, 어머니가 한국인이라는 태생조차 숨기며 살아야 했던 시간에 종막을 고할 수 있으리라 나는 믿는다. 자신의 취약했던 한 시절과 화해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라면, 새로운 출발을 도모하지 못할 리 없다. 다리 위에서 윤희를 불렀던 만큼의 용기가 있다면, 내가 꾸는 꿈이 실은 상대방도 꾸는 꿈인 세상을 사는 게 어째서 두렵고 힘들기만 하겠나.한병철은 자신의 저서 『리추얼의 종말』을 통해 "예술의 본질은 삶에 지속성(멈춤 가능성)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한 바 있다. 그의 말대로라면, 나에게 <윤희에게>는 그 본질을 너무도 명징하게 실천한 영화일 터다. 무언가를 시작하기 전, 무언가를 꿈꾸기 전, 내가 쓰려는 이야기의 시작점이 어디인지를 돌이키게 만드니까. 나를 멈추게 만드는 이 영화의 후유증이 반갑다. 깊은 호흡을 몇 번 한다.그리고 발견한다. 세상에, 나는 이 영화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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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FF 데일리] 마음을 혹독한 겨울에서 따뜻한 봄으로 옮겨심는 일.
감독 및 출연진 감독 장준영 출연 장선 양말복 양나영 정미형 시놉시스 어디서나 애매한 나이의 평범한 서른 중반의 한 여자, ’연’. 그녀에게 다가오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
리뷰
한 사람으로, 어른으로 성장해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겨울나기>.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의 슬로건인 ‘우리는 늘 선을 넘지’라는 문구와 일맥상통하는 영화로실제 상영작이 공개되고 나서 기대되어 꼭 봐야겠다고 생각했던 작품 중 하나였다.뭔가를 극복하고 성장해 나가는 모습은 누구에게나 꼭 필요한 것이다.이 영화는 조금씩 성장해 나가는 과정을 담았으며 인물들의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다.또, ‘겨울나기’라는 제목을 통해 등장인물을 따뜻하게 바라보고 있는 영화이다.연에게 있어서 겨울은 극복이 아닌 견뎌내야 하는 고난과 역경의 연속이었다.
특히 가족이라는 존재는 마음껏 애정을 담을 수 있지만 그만큼 미워하게 만든다.
자신이 바라는 이상적인 가족관과는 거리가 있었으며 그 생각은 연의 결혼관 마저 뒤집어 버린다.
가족에게도, 애인에게도 부담스럽다는 말을 듣게 되며 유독 연에게 혹독했던 겨울이 더욱 싸늘해진다.
하지만 뒤이어 나오는 장면을 생각해 보면 겨울이 유독 연에게 혹독했던 것이 아니라 연이 주위를 둘러볼 여력이 없어
주변 사람들의 ‘겨울’을 둘러보지 못했던 것 같다.
모두가 이 혹독한 겨울을 견뎌내며 ’ 겨울나기‘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알았다면 겨울나기가 훨씬 수월했을지도 모른다. 나이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애매한 ‘나’를 생각하면 우울감이 파도처럼 밀려오곤 한다.
주변의 속도에 맞춰나가지 못한다는 생각과 나는 나의 길을 가겠다는 생각이 부딪혀 상상이상의 혼란을 불러온다.
그래서인지 어느샌가부터 나에 대한 부정적인 모습보다는 긍정적인 모습을 부각하곤 한다.
하지만 싫은 모습이든 좋은 모습이든 모두 나의 일부나 마찬가지이다.
<겨울나기>는 자기혐오를 넘어서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담은 따뜻한 영화이다.
나도 알지 못했던 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지, 당신에게 다가온 겨울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무엇보다 이야기의 중점이 되는 ’엄마의 치매‘는 보는 내내 마음을 울멍이게 만들었다.주변인이나 당사자에게 있어서 더욱 가혹했던 치매라는 병은 어떤 것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어서 더욱 힘겹기 때문이다.사랑하지만 미워할 수밖에 없는 대상이 눈물 날 만큼 가여워지는 순간을 견딜 수 없었다.그럼에도, 과거에 엄마가 선택을 했듯이 현재의 연이 선택을 해야 했다.떠나가는 세대들과 나아가는 세대라는 어떤 순환은 어떤 것보다 가슴 아프게 다가오지만 당연히 거쳐야 할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아름답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좋은 작별’ 앞에 놓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또 다른 미래를 생각할 수 있게 만든다.한국 사회의 ‘현재‘는 전통적 가치와 현대적 가치가 충돌하며 다양한 갈등의 양상으로 펼쳐진다.그 상황에서 발생하는 갈등은 우리 사회의 자잘한 충돌을 담아내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하지만 약간의 격차 후 거리를 좁혀가는 모습에 희망을 느낄 수 있었다.타인의 감정을 단언하는 것은 좋지 않지만 드러나지 않는 감정을 다 알 수는 없다.그래서 사람 간의 소통이 중요하다는 것이다.정체되어 있던 연은 불꽃을 기점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어떤 두려움 때문에 건네지 못했던 말들과 어떤 감정들이 희미해지던 중 연의 시간이 명확해지는 순간을 지켜볼 수 있어 좋았다.어떤 위치에 서있을지 몰라 용기를 내지 못했고 그래서 ‘부담’스럽게 굴었던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는 시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상처를 마침내 용기 내어 말하고 진짜 자신의 이름을 밝히며 진정한 겨울나기를 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샘솟았다.영화제 기간 2024.05.01 - 2024.05.10 겨울나기 상영 시간 2024.05.02 13:30 2024.05.05 17:30 2024.05.08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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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실이 될 뻔한 두 개의 거짓
호주의 한 시골 마을. 극심한 가뭄이 들어 324일째 비가 내리지 않고 있다. 개울은 말라붙었고, 드넓은 땅은 쩍쩍 갈라졌다. 물이 부족해 샤워하기도 어려울 지경이다. 화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듯한 건조함이 전해진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메말라가는 건 땅과 냇가뿐만이 아니다. 마을 사람들의 마음도 타들어가고 있다. 마을에서 끔찍한 살인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두 아이를 둔 가장 루크가 아내와 아이를 총으로 쏜 후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인간관계가 촘촘히 엮인 작은 시골 마을에서 감당하기에는 너무 끔찍한 사건이다. 마을 사람들은 피해자와 가해자, 삶과 죽음이 뒤섞인 이 사건으로 인해 큰 혼돈에 빠진다.
능력 있는 경찰인 에런이 마을로 돌아온 건 이때다. 어린 시절에 루크를 비롯해 엘리, 캐더린과 함께 어울렸던 그가 엘리를 사망케 한 용의자라는 의심을 받아 마을을 떠난 지 20년 만에 루크의 장례식에 참여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에런은 루크 사건을 다시 살펴봐달라는 루크 부모님의 간절한 부탁으로 마을에 머무르게 된다.
보통은 출세한 청년이 오랜만에 고향 마을로 돌아오면 환대받기 마련이다. 하지만 에런은 그렇지 못하다. 에런은 마을 사람들로부터 여전히 20년 전 사망한 엘리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는 의심을 받고 있는데, 여론이 좋지 않은 루크의 사건을 재조사한다는 소문까지 나며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에런이 마을을 떠나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다. 일차적으로는 루크 부모님의 간절한 부탁이 그를 붙잡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그에게 엘리의 죽음에 관한 트라우마가 여전히 남아 있다는 데 있다. 사랑했던 여자가 죽었는데, 심지어 그 범인으로까지 몰린 상처가 루크 사건의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이어진 것이다.
영화가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며 두 죽음에 관한 진실에 접근해나가는 과정은 빼어나다. 숨이 막힐 듯한 건조함, 20년을 거스른 두 번의 죽음, 가려진 진실에 냉철하게(그러나 동시에 간절하게) 접근해나가는 에런의 캐릭터는 훌륭한 앙상블을 이룬다.
하지만 잘 쌓아 올린 영화의 긴장감은 다소 맥없이 밝혀지는 진실과 함께 무너져버린다. 영화는 내내 두 사건 모두가 작은 시골 마을이라 가능했을 끈적거리는 인간관계에서 기인한 비밀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암시를 준다. 엘리를 사랑한 에런, 다소 거친 성격으로 친구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루크, 그리고 20년 후 에런에게 호감을 보이는 캐더린까지. 과거와 현재를 오고 가는 영화의 연출은, 늘 함께였으나 완전한 하나이지는 못한 채 관계의 미묘한 균열을 겪으며 성장한 네 청소년의 감정에 깃든 비밀이 무엇일지에 관한 관객의 궁금증을 증폭시킨다. 완성도 높게 쌓아 올린 두 사건의 비밀이 정작 엉뚱한 곳에서 해소되자 김이 빠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미스터리 추리극에서 예상을 빗나가는 결말은 재미를 위한 당연한 장치다. 하지만 작품이 쌓아온 서스펜스와는 별 관련이 없는 곳에서, 예측 불가능성만 강조한 사건 해결은 오히려 영화의 완성도를 헤치는 법이다. 네 주인공의 감정 엇갈림을 밀도 높게 영상화한 영화의 성취가 못내 아쉽다. 그렇게 평범하고 통속적인 방식으로 진실을 밝힐 것이었다면, 애초에 기대하게 만들지 않는 게 나을 뻔했다.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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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퍼석한 사막 위에 찍어낸, 묵직한 첫 발자국
듄 (DUNE, 2021)
개봉일 : 2021.10.20. (한국 기준)
감독 : 드니 빌뇌브
출연 : 티모시 샬라메, 레베카 퍼거슨, 오스카 아이삭, 제이슨 모모아, 조슈 브롤린, 하비에르 바르뎀, 젠데이아 콜먼, 스텔란 스카스가드
퍼석한 사막 위에 찍어낸, 묵직한 첫 발자국
<듄>이 개봉하기 전, 이런 카피가 정말 많이 보였다. “반지의 제왕을 이을 시리즈의 탄생”이라고. <반지의 제왕>을 이을 작품? 대체 어떤 세계관을 갖고, 어떤 영화를 만들어냈길래 이렇게 야심만만한 카피를 내놓을 수 있는 걸까?
애정 하는 배우 티모시 샬라메의 출연과 드니 빌뇌브 감독이 작품을 연출한다는 소식, 그리고 영화의 원작 소설 <듄>이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SF의 오래된 뿌리이자 대작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와 동시에 티모시 샬라메의 해변 스틸컷 한 장을 보는 순간 이 영화를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어떤 비주얼의 영화가 나올지 쉽게 상상 되지 않았다.
<듄>이 개봉 전부터 폭발적인 관심을 끌며, 용광로처럼 펄펄 끓는 티켓 파워를 보여주는 바람에 아이맥스로 예매하기도 참 어려웠다. 꼭 큰 화면, 아이맥스로 보라는 말에 “이 영화의 1회차는 무조건 아이맥스다!”하고 뛰어들었는데 모두가 같은 생각이었나 보다. 이 영화는 아이맥스 또는 돌비관에서 봐야 한다고 말이다.
여차여차 아주 어렵게 개봉 당일에 만난 <듄>은 말 그대로 나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었다. 방대한 원작의 세계관의 아주 일부에 해당하는 분량이었지만 그럼에도 그토록 압도적일 수가 없었다.
이번에 개봉한 Part1에서는 묵직한 사건과 반전 같은 것 없이 꽤나 친절하게 세계관을 설명하고, 이제 막 주인공이 새로운 길을 찾으려는 찰나의 순간을 담아냈다. 오프닝을 이렇게 엄청나게 찍어버리면 다음 편은 어떤 영화가 될지, 벌써부터 심장이 떨린다.
긴 호흡으로 나뉘는 호불호
SF 시리즈라는 타이틀 때문인지 <스타워즈> 시리즈와 비슷한 느낌을 기대할 수 있으나 두 작품은 결이 조금 다르다. 우선 주 배경이 되는 환경이 드넓은 우주와 삭막한 사막 행성으로 다소 차이가 있고, 스타워즈가 화려한 색감을 뽐내는 우주 활극이 주가 되는 느낌이라면, 듄은 삭막한 우주 행성에서 살아가는 인간들 사이에 여전히 존재하는 위계질서와 지배욕. 그리고 두려움에 맞서 길을 찾는 주인공의 성장 담을 지켜보는 게 주가 되는 느낌이다. 물론 <듄>이라는 영화도 시각적으로도 상당히 훌륭한 영화긴 하지만 말이다.
재빠르고 역동적인 SF를 선호하거나, <듄>에 그것을 기대했다면 영화가 주는 러닝타임의 압박감과 느긋함에 쉽게 눌려버릴지도 모르겠다. 이 부분에서 호불호가 좀 많이 나뉘는 것 같다.
드니 빌뇌브 감독님의 전작을 보며 그의 영화는 호흡이 다소 긴 편이라고 느꼈던 순간들이 있는데, <듄> 또한 드니 빌뇌브 감독 특유의 긴 호흡이 제대로 담긴 영화라는 느낌을 받았다.
개인적으론 지루할 틈 없이 본, 마음을 뒤흔드는 대작이라고 생각했지만! 드니 빌뇌브 감독의 호흡이 취향에 맞지 않거나, 하나의 사건을 중심으로 1편이 깔끔히 마무리되는 걸 원했던 관객이라면 충분히 지루하다, 진행된 것 없이 이야기가 끊긴다. 같은 불호평을 이야기할만하다고 생각한다.
웅장한 세계관의 시작
하지만 이 이야기는 제목처럼 Part.1. 챠니의 대사처럼 이야기는 “이제 시작일뿐”이다. 영화를 통해 이 웅장한 세계관을 어떻게 담아낼지 기대된다.
연료로 쓰이는 귀한 재료 스파이스와 명예, 부. 그리고 아라키스 행성을 두고 이어지는 아트레이데스, 하코덴 가문. 프레멘들의 대립 속에서 가문과 자신을 위해 두려움에 맞서야 하는 소년 폴의 성장과, 복잡한 이해관계로 얽힌 세계관을 어떻게 풀어갈 것인지. 그리고 폴은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이며 그가 정말 운명을 바꿀 선택받은 자인지. 이 세계를 관통하는 답이 과연 존재하는 것인지. Part.1을 보고 궁금한 것이 정말 많아졌다.
사실 <듄> Part.1이 개봉하기 전, 원작을 꼭 읽어보리라 다짐했는데 1편의 두께에 압도되는 바람에 개봉 전에 원작을 읽는데 실패했다. 하지만 Part.1을 보고 나니 꼭 원작을 완독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편이 나오기 전에 꼭 원작을 완독하리라!
드니 빌뇌브 감독님은 2편에선 더 발전된 액션들이 많이 나올 것이라 언급했는데, Part.1에서 다소 아쉽게 느껴졌던 ‘액션의 부재’가 보완된, 시작 그 이상의 작품이라니. 기대감에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이런 영화는 최소 2-3편까지 찍어놓고 순차 개봉해야 하는, 그런 법이라도 만들어야 하는 게 아닐지.
작품 속 세계, 새로운 행성에 빠져들다.
퍼석한 사막의 모래와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내 날카롭게 식어버리는 공기. 휘몰아치는 모래의 입체적인 질감과 모든 장면들에 역동적인 숨을 불어넣는 한스짐머의 음악들. <듄>은 시각과 청각을 완벽히 빼앗으며 영화 속 인물들이 서있는 10191년, 아라키스 행성으로 관객들을 이끈다. 극장에서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경험, 새로운 세계와의 황홀한 만남이 이 영화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 시리즈는 드니 빌뇌브 감독의 역작이 될 것이며 티모시 샬라메의 <콜미 바이 유어 네임>을 이길 대표작이 될것이라 믿어의심치 않는다. 마치 다니엘 레드클리프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해리포터를 가장 먼저 떠올리듯, 시즌 2,3을 거친 후 티모시 샬라메하면 듄이 먼저 떠오를 때가 올 거라 생각한다.
SF 대작인 <스타워즈> 시리즈를 처음부터 제날짜에 맞춰 극장에서 관람한 세대들을 부러워했었는데, 나도 이제 같이 나이 먹어갈 SF 시리즈가 생겼다는 것에 벅찰 만큼 기쁜 순간이다. 나중에 “나는 듄 1편부터 개봉 당일 아이맥스로 봤다 이거야~” 하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순간이 오겠지?
듄 시놉시스
10191년, 아트레이데스 가문의 후계자인 폴(티모시 샬라메)은 시공을 초월한 존재이자 전 우주를 구원할 예지된 자의 운명을 타고났다. 그리고 어떤 계시처럼 매일 꿈에서 아라키스 행성에 있는 한 여인을 만난다. 모래언덕을 뜻하는 '듄'이라 불리는 아라키스는 물 한 방울 없는 사막이지만 우주에서 가장 비싼 물질인 신성한 환각제 스파이스의 유일한 생산지로 이를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 치열하다. 황제의 명령으로 폴과 아트레이데스 가문은 죽음이 기다리는 아라키스로 향하는데… 위대한 자는 부름에 응답한다, 두려움에 맞서라, 이것은 위대한 시작이다.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아트레이데스 가문과 하코덴 가문
아라키스 행성을 오래 지배하던 하코덴 가문은 모래 위 스파이스를 쓸어 담으며 아라키스의 원주민인 프레멘들을 억압한다. 프레멘들은 그들을 잔혹한 외지인이라 칭했으며, 하코덴 가문은 아라키스 행성이 가진 스파이스에 눈이 멀어 배려와 양심 따위는 멀리 집어던지고 탐욕스레 스파이스를 긁어낸다.
그러던 어느 날, 계략을 세운 황제가 아트레이데스 가문에게 아라키스의 관리를 맡기게 된다. 소식을 들은 하코덴 가문은 우리가 다 일궈 논, 우리의 행성이라며 이를 갈다 제국과 협력해 아트레이데스 가문을 공격한다.
아트레이데스와 하코덴은 사촌 사이지만 지향하는 바가 좀 다르다. 하코덴은 아라키스 행성을 완전히 지배하는 것이 목적이고, 아트레이데스는 프레멘들과 협력해 그들의 힘을 빌리는 것이 목적이다. 결국 자신의 이익을 위한 선택인 것은 맞지만, 이익을 위해 협력을 부탁하는 것과 무조건적인 지배를 원하는 건 꽤 큰 차이가 있다.
하코덴 가문과 달리 아트레이데스 가문은 프레멘과의 소통을 시도하고, 스파이스 수확기 안의 인부를 구하려 보호막 장치를 내버리는 결단을 내린다. 던컨은 프레멘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그들을 뛰어난 전사라 칭하기도 한다.
아트레이데스 가문은 제국과 하코덴 가문이 원했던 지배와 피지배층의 관계가 아닌 서로를 존중하는, 평등한 위치의 관계를 지향한다. 폴은 이러한 아버지의 뜻을 따라 프레멘들의 힘을 빌리기 위해 그들의 마을로 합류한다.
Part1.에선 프레멘, 제국+하코넨 , 아트레이데스의 삼각구도였다면, 다음 시리즈는 프레멘+아트레이데스, 제국+하코넨(추가적인 대가문들?)의 구도가 되지 않을까?
레토 공작이 남긴 것
새로운 체계를 정비해 가던 중, 첩자와 하코덴 가문의 습격을 받은 아트레이데스 가문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만다. 레토 공작은 하코덴 남작을 앞에 두고 비장하게 죽음을 맞이하며 말한다.
“나 여기 있노라. 여기 남겠노라.”
그는 아트레이데스의 인장 반지를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우여곡절 끝에 사막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한 폴과 어머니 제시카는 레토 공작이 남긴 반지를 보며 그의 죽음을 알게 된다. 기세를 몰아 하코덴 가문은 다시 아라키스를 점령하기 시작했고, 이제 하코덴 가문에게서 이 행성을 구할 희망은 이 두 사람뿐이다.
폴은 실제 전투 경험이 전무한 상태다. 그는 기초적인 군사훈련을 받았고, 필름을 통해 익힌 풍부한 생존 지식을 갖고 있지만, 아직 한 번도 사람을 찔러본 적 없으며, 미지의 세계에 대한 궁금증과 두려움을 동시에 안고 있는 어린 소년이다.
하지만 폴은 아버지의 죽음과 동시에 아트레이데스 가문과 아라키스 행성의 운명을 짊어지게 된다. “내가 과연 선택받은 자일까?” 반문하고 있을 틈이 없다. 폴은 두려움에 맞서 아버지가 원했던 바른길을 찾고, 자신이 힘없는 어린애가 아님을 증명해야 한다. 아주 작은 사막 쥐 한 마리도 자신만의 길을 찾아 이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고 있는데, 이 소년이라고 못할 것이 있겠는가.
“두려움은 소멸을 가져오는 작은 죽음이다.
두려움이 지나가면 마음의 눈으로 그 길을 보리라.
그 길을 지나면 나만 남으리.”
프레멘 마을을 찾아 떠나는 길, 폴은 폭풍을 피하지 않고, 비행체의 방향을 바꿔 폭풍 속으로 들어간다. 두려움을 피하기보단 직접 부딪히고 경험해야 두려움을 이겨내고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있다는 제시카의 오래된 가르침을 직접 행하는 첫 순간이다.
“제 길은 사막에 있어요.”
폴은 가문의 반지를 끼고, 아버지가 원했던 이 행성의 힘을 찾기 위해 사막에 남기로 결정한다. 길이라곤 보이지 않고, 날카로운 모래폭풍만이 불어오고 있지만 그 사이 어딘가엔 아버지가, 우리가 바라던 답이 있을 것이라 믿으면서.
과연 폴은 하코덴 가문과 제국의 검은 속내를 쓸어내고, 닥쳐올 전쟁을 막을 수 있을까? 나의 편의와 이득을 위해 싸우고, 지배하고. 끝없는 이기심을 뿜어내는 존재들을 이겨내고 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예리하게 변하는 폴의 눈빛에서 짙은 결연함이 느껴진다. 이 소년의 이야기는 이제 시작일뿐이다. “내가 선택받은 자가 맞을까?” 두려워하고 고민할 시간이 없다. 두려움에 사로잡히기 전에 두려움과 그것을 만들어내는 존재들에 맞서 싸워야 한다. 두려움에 묻혀버린 진짜 나의 길과 답을 찾기 위해서.
친절히 세계관을 설명하는데 꽤나 긴 시간을 할애한 파트다 보니 영화 자체의 긴장감이나 속도감이 강하게 느껴지진 않았지만, 나에겐 충분히 차고 넘치는 영화였다. 오래 기다린 보람이 있다. 진심으로.. 다음 편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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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개봉한 영화가 맞나 싶은 <야차>
영화 <야차>
※ 스포일러가 많아요! ※
스파이들의 진짜 전쟁 영화라고 기대를 잔뜩하게 한 영화 <야차>가 지난 4월 8일 넷플릭스에 공개되었다. 영화가 말도 안되는 지점이 정말 많은데 가장 말이 안되는 점이 바로 이 부분이다. 이 영화가 2022년 4월 8일에 개봉했다는 점... 2000년 4월 8일에 개봉한 것이 아니라니... <야차>는 명백한 장르 영화로 액션 첩보물과 버디 무비의 특성이 존재한다. 대표적인 상업영화의 장르물이기 때문에 영화는 관객에게 장르물에서 보여줄 최소한의 만족감을 '반드시' 선사해야한다. '반드시'라는 말이 붙는 이유는 이 영화가 엄청난 메시지를 가지고 뭐 사회 이데올로기의 핵심을 관통한다거나 엄청난 미장센이나 연출로 영화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릴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애초에 영화 제작 목적이 '재미 = 많은 관객 = 돈'이다. 이 영화를 혹평하는 이유가 바로 이 점에 있다. 장르 영화의 매력을 찾을 수 없다.
첩보, 액션물에서 장르적 재미를 선사하는 방식은 여러가지가 있다. 속이 뻥 뚫리는 멋진 총격신, 스파이들의 상상할 수 없는 작전과 계획, 서로를 속고 속이는 관계 등 말이다. <야차>는 이런 요소를 단 하나도 갖추지 못 한다. 주인공 설경구가 맡은 지강인은 상대방이 자동 소총을 들고 있는 와중에 무슨 이유인지 권총만 고집한다.(방탄복 착용도 솔직히 말도 안되는데 이는 작품 내에서 나름 핵심 요소로 활용되니.. 영화적 장치라고 이해라도 해본다...) 그러고는 50M 이상의 표적을 한 손파지법으로 모두 맞추는데 그러면서 자신은 단 한 발도 안 맞는다. 상대방이 단순히 아마추어 용병도 아니고 (아마추어 용병이라 해도 자동 소총을 가지고 권총을 상대 못 하는 것은...) 다 제대로 훈련 받은 정예 부원들인데 아무리 지강인과 블랙팀이 최청예라고 한들 모든 전투에서 절대적으로 압승하는 것은 영화적 허용도 정도가 있다.. 명색이 액션 첩보물인데 기본적인 총기 상식은 조금 지켜줘야하지 않을까 싶다... 아니면 차라리 블랙팀과 지강인에게 지상 최대의 요원이라는 서사라도 부여하였으면 억지로라도 이해했을 것이다.
다음으로 설경구의 블랙팀이 최정예 요원이라 단 한 명도 죽지 않고 모든 작전을 수행한다는 점도 영화적 허용으로 넘어가겠는데 그들이 수행하는 작전을 보면.. 전술이라곤 없다. 그냥 뭐 기존 첩보물에서 그럴듯한 작전 몇개 빼서 섞은 느낌이다. 옥상에 쥐를 푸는 거나, 땅굴로 들어가는 거나.. 솔직히 억지스럽다. 쥐 하나 풀었다고 뚫리는 경비 시스템이나, 그렇게 세상 모든 정보 가진 것 처럼 행동하면서 인질을 감금한 지하에 길이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나 조금만 생각하면 말도 안된다. 이 모든 사건이 지금 우연의 일치로 서사가 진행된다. 쥐를 푸는 것이 100% 경비를 뚫을 수 있는 필승 작전이라고 하기엔 변수가 너무나 많고, 지하에 땅굴은 없었더라면 애초에 인질을 구할 수 조차 없었다. 전래동화 마냥 극본이 우연과 운으로 얼렁뚱땅 넘어가 버린다.
첩보물에 꽃인 스파이들의 관계 묘사가 기가막히는 것도 아닌게 비슷한 영화 3편만 봐도 누가 이중 첩자일지 대충 보인다. (농담 안하고 영화 보면서 뒤통수 때릴 것 같은데? 싶은 인물이 모두 그런 인물이었다..) '배신'이란 요소가 첩보물에서 클리셰지만 몇번이고 꼬아서 관객을 속이려고 노력하는 다른 영화들과는 달리 너무나 정직하고 우직하게 '두더지'(영화 내 이중 첩자를 부르는 말)가 예상되니 그냥 의무적으로 장르 영화에 있어야할 장치이니 넣은 느낌이다. 양동근 배우가 두더지가 아니었어도 영화 진행에 전혀 문제가 없고, 애초에 그 장면 자체가 통으로 빠져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첩보물의 매력이 없다면 버디 무비의 매력은 보이는가? 그것도 아니다. 기존 액션 첩보물의 남성 주인공의 모습인 젠틀하고 정의감 있는 모습과 달리 지강인(설경구)은 거침 없고 폭력적이다. 이런 지강인과 반대되는 인물은 한지훈(박해수)으로 원리 원칙이 최우선인 정의감 넘치는 검사 역할이다. 이 둘의 대립과 화합은 영화 <야차>가 가진 메시지의 전부이다. '정의는 어떤식으로든 지켜져야 한다.'는 점 말이다. 버디무비 특징 상 우정을 다룬 만큼 둘의 정의에 대한 사상의 차이는 충분한 캐릭터들의 대립과 화해를 통해 좁혀지고 종장에는 하나로 맞춰져야 하는데 그런 점이 전혀 없다. 어떤 부분에서 정서적 교감이 이루어지는지 대충은 알겠으나 설득력이 없다. 애초에 박해수가 맡은 한지훈이 너무나 수동적인 캐릭터로 나오기 때문에 캐릭터 매력이 너무 딸리는데 그마저도 설경구가 맡은 지강인 캐릭터가 거의 원톱으로 영화를 이끌어 가니 말 다했다..
? 액션 영화라고 하기엔 조약한 연출과 10년은 지난 유행의 전투 장면, 첩보 영화라 하기엔 전략도 전술도 긴장감도 없는 작전과 대립 관계, 메시지 마저도 이렇다 하게 정답을 내놓은게 아닌 정치적 프로파간다 수준의 영화 <야차>.. 극장에 안나오고 넷플릭스 개봉인 것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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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키 17>, 미래일까 현재일까, 상상일까 현실일까
‘봉 감독이 돌아왔다.’ 그가 새로운 작품과 함께 돌아온다는 것만으로 얼마나 설레었던가. 회갈색 빛으로 표현할 수 있을 듯한 봉준호 감독의 영화는 관객들의 마음에 찝찝함을 더하고 현실에 대한 의문과 미래에 대한 고민을 품게 만든다. 그러면서도 중간중간 재치를 던져줌으로써 자칫하면 질척 질척 무겁기만 할 수도 있는 영화의 분위기를 유하게 이끌어간다. 그렇게 우리는 그가 창조해 낸 이야기를 통해 현실을 바라보고, 우리가 애써 모른 척 해왔던 무언가와 눈을 맞춘다.
그런 봉준호 감독이 로버트 패틴슨과 만났다. <트와일라잇>으로 한국 대중에게 익숙할 로버트 패틴슨은 사실 그간 다양한 캐릭터를 통해 변화하고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 그의 다채로운 연기 스펙트럼으로 그를 눈여겨보고 있던 봉준호 감독은 <미키 17>을 구상하며 주인공 역으로 바로 로버트 패틴슨을 떠올렸다고 한다. 그리고 이번 <미키 17>을 통해 자신의 연기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가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영화를 본 박찬욱 감독은 ‘아카데미 위원회는 로버트 패틴슨에게 주연상과 조연상 두 개를 주어라!’라는 평까지 남겼으니 말이다.
오랜만의 봉준호 감독의 작품이 돌아다는 소식에 설레며 개봉일만을 기다려왔다. 그렇게 개봉일 아침 바로 극장으로 달려가 마주한 그의 작품은 우리에게 미래와 사회에 대한 고찰을 하게끔 만들고 있었다.
<미키 17> 한국판 포스터와 주인공 미키(로버트 패틴슨 역) (C) Warner Bros Korea
영화 <미키 17>은 2050년, 미래와 우주를 배경으로 한 공상과학 영화다. 지구에서 사채 빚으로 인해 목숨을 위협당하는 미키(로버트 패틴슨 역)가 새로운 행성의 개척 프로젝트에 지원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아무 기술도 능력도 없던 미키가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위해 지원할 수 있던 유일한 직군은 ‘익스펜더블 expendable.’ ‘소모용’이라는 의미를 지닌 이 직군에 지원하기 전 미키는 지원서의 세부사항을 자세히 읽었어야 했다. 왜냐하면 그 직군의 주요 업무는 수많은 죽음을 겪으며 복제당하고 또 죽음을 겪는 실험체 역할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죽음을 피하기 위해 반복되는 죽음으로 뛰어든 미키는 어느 날은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귀환한다. 그런데 힘겹게 몸을 누인 자신의 침대에는 또 다른 미키가 있었다. 둘의 미키가 존재해서는 안 되는 세계에서, 그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를 <미키 17>은 그린다.
이번 영화는 봉준호 감독의 첫 우주 공상과학 영화, 우주 SF 영화다. 미래와 우주를 배경으로 해서일까, <미키 17>에서는 지구가 미래 직면하게 될 모습과 과도하게 발전하는 기술이 마주할 이슈 등을 그린다. 복제 인간 미키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들 또한 바로 그 이슈 중 하나고 말이다. 하지만 이런 독창성은 원작소설 《미키 7》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봉준호 감독은 원작소설에 그만의 각색을 더해 <미키 17>을 완성해 냈다. 원작이 과학적인 요소를 많이 담고 있다면, 봉 감독은 각색을 통해 인간냄새나는 SF 영화를 탄생시켰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각색 포인트는 바로 원작에서보다 주인공 미키를 10번이나 더 죽였다는 점이
“미키는 불쌍하고 찌질하면서도 사랑스러운 캐릭터입니다.”- 봉준호 감독 -그럼 영화에 대한 소개는 여기까지 간략하게 하고, 이제는 영화 속 세계를 고민하고 성찰하게 만들 포인트들을 함께 나누어보고자 한다. 부디 여기서부터 등장할 내용을 읽기 전 영화를 만나고 왔기를 바라며 말이다.
*본 게시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죽어도 복사할 수 있는 미키는 '죽어도 또 만들면 그만'인 존재로 취급당한다. (C) Warner Bros Korea
무뎌지는 인간성에 대한 고찰
미키는 실험을 위해 반복해서 복제되는 존재다. 그의 몸은 가장 처음 실험을 위해 스캔해 둔 몸을 복제하여 만들어지고, 그의 기억은 가장 마지막 기억을 데이터로 불러와 새로운 몸에 심으며 이어지게 된다. 그렇게 복제를 통해 죽음과 삶을 반복하는 미키를 대하는 주변인들의 모습은 다양하다. 그를 두고 무생물체보다 못한 취급을 하기도 하며, 인류사를 위한다는 명목 아래 그를 불필요하게 죽음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주변인들의 모습을 통해 봉준호 감독은 발전하는 기술 앞에 점차 무뎌지는 인간성을 그린다. 영화 속 미키는 ‘실험 인간’이다. 주인공인 그의 역할과 감정에 이입하여 영화를 보게 되는 관객들은 자연스레 반복되는 실험의 잔혹함과 상실되어 가는 인간성의 더러움을 느낀다. 그러나 우리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인간’이 대상이고 그 실험이 ‘카메라 앞’에 비쳐 우리에게 영화라는 ‘가상의 이야기’로 공개되었다는 점만 다를 뿐, 이러한 실험은 과거와 현재에 존재해 왔다. 물론 그 시간과 장소에는 미키의 곁을 지켜준 나샤 같은 따뜻한 인간 또한 있었으리라. 하지만 정말 이처럼 무뎌지는 인간성은 그저 공상과학 영화, 가상의 이야기 속 상상에 불과하다 할 수 있을까.
지난 날의 '나'가 눈 앞에 있다면, 부끄러울까 안타까울까 자랑스러울까 사랑스러울까 (C) Warner Bros Korea
미키, 같은 듯 다른 나와 나
미키는 같은 형태의 몸으로 복제되지만, 그 기억은 데이터로서 백업되어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렇기에 처음과 같은 미키가 복제되는 게 아닌 지난 미키에서의 죽음을 품은 다음 세대의 미키가 태어난다. 그래서일까 모든 미키는 조금씩 달랐다. 미키 A는 소심했고, 미키 B는 멍청했다. 미키 17은 순한 맛이었으며, 미키 18은 매운맛이었다. <미키 17>에서 주로 등장하는 미키 17과 미키 18은 더 큰 차이를 보여준다. 특히 이 둘은 번갈아 가며 전혀 다른 특성의 대화를 던지는 모습이 마치 천사와 악마를 보여주는 듯하다.
그러나 모든 미키는 미키였다. 단지 경험한 죽음과 기억이 조금씩 달라 그 시점의 행동이 조금씩 다르게 드러났을 뿐, 모두가 미키였다. “I hate you. 나는 네가 싫어.” 화가 많고 반골 기질이 강한 미키 18은 모든 걸 좋게 받아들이고 넘어가려는 유순한 미키 17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자신에게 자신이 싫다고 하는 미키의 모습은 꽤나 잔혹하다. 마치 거울 속의 자신에게 말을 걸듯, 과거의 자신을 두고 미래의 자신이 싫다고 하는 미키의 모습은 그가 지난 시간 받은 상처와 자신의 스스로에 대한 연민과 답답함의 표출이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결말에 다다라 미키 17이 미키 18처럼 생각하고 던지는 대사가 있다. 거기서 볼 수 있듯, 미키 18은 기존의 미키들과 완전히 다른 새로운 미키가 아니었다. 미키 17이 살다 보면 마주했을 미래의 미키였다. 사람이 살다 보면 특정 사건을 계기로 책에서 챕터를 넘어가듯 인생의 다음 장으로 넘어간다는 표현을 하지 않는가. 미키는 그렇게 ‘죽음’이라는 다소 강제적인 요소를 통해 자신의 삶에서의 챕터를 넘겨왔다. 물론 그렇게 넘어간 다음 장이 과거보다 나을지, 혹은 많은 걸 포기하거나 놓은 상태로 과거보다 더 못한 미래였을지는 미키만 알 테다. 과거의 자신을 바로 두 눈앞에 두고 자신을 되돌아보는 경험 또한 미키만 할 수 있을 테고 말이다.
감옥 같은 우주선 속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독재자의 모습은 공상과학일까 현실일까 (C) Warner Bros Korea
다른 모습으로 반복되는 과거
봉준호 감독의 영화를 논하며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사회에 대해서 또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의 주요 배경 사회는 지구를 떠나 새로운 행성에서 새로운 인류 공동체를 키우려 하는 우주선 속이다. 이러한 사회를 주도하는 이는 지구에서 정치 활동에 실패한 정치인, 케네스 마샬(마크 러팔로 역)이다. 그가 이끄는 우주선 속 사회에는 그를 쫓아온 열렬한 지지자들과 함께 일자리를 찾아온 사람, 지구를 떠나고 싶어 도망 온 사람 등이 섞여 있다. 그들은 모두 ‘인류 번영을 위한 신 행성 개척’이라는 마샬로 인해 주어진 사명 아래 철저히 통제된 생활을 이어간다. 음식은 칼로리를 채워 살기 위해 주어지는 연료 따위의 수준이며, 조금만 실수해도 심한 질책을 당하며, 우주선 속 환경은 감옥을 연상시킨다.
우주선의 리더 케네스 마샬은 가히 독재자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자신은 호화로운 생활을 이어나가지만, 일꾼이자 우주선 속 사회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복지와 행동은 철저히 통제된다. 그의 주장과 연설은 허술하고 허황하기 짝이 없으며, 자신의 아내와 비서에게 휘둘리는 허수아비의 모습을 보여준다. 마샬 역의 마크 러팔로 배우는 자신의 캐릭터를 두고 “봉준호 감독에게 처음 대본을 받았을 때 도대체 왜 이런 악역을 나에게 주는 걸까, 내가 뭔가 잘못했나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전했다. 또한 마샬을 두고 세계 각국의 인터뷰에서 각 나라의 특정 독재자가 떠오른다는 평이 많았다. 이에 관해 특정 인물이 모티브가 되었냐는 질문에 봉준호 감독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마샬은 과거 독재자들의 모습을 따와서 만든 캐릭터입니다.역사는 반복되기 때문에 현재의 누군가를 지칭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봉준호 감독 -영화 속 우주선은 행성 개척을 위한 탐사선이기도, 일터이기도, 감옥이기도 해. 그치, 미키? (C) Warner Bros Korea
봉준호 감독의 <미키 17>에 관해서는 물론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을 듯하다. 영화의 서사가 되새기게끔 하는 식민지화의 잔혹함과 독립의 이야기는 한국인 혹은 식민 지배의 경험이 있는 나라 국민이라면 자연스레 떠올렸을 것이다. 죽음을 피해 반복되는 죽음으로 뛰어든 미키의 모습은 많은 이들로 하여금 삶에서의 선택을 되돌아보게끔 했을 것이다. 슈베르트의 마왕을 떠올리게 하는 OST에 미키를 쫓아오는 보이지 않는 마왕은 무엇일까 고민하는 이도 있었을 것이며, <미키 17>을 보며 봉준호 감독의 전작 <옥자>, <괴물>, <설국열차> 등을 떠올리는 이도 있었으리라. 물론 SF 영화라는 점에서 비슷한 요소를 지닌 다른 영화 혹은 소설이 떠오르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점에서 우리는 또 깨닫는다. ‘봉 감독이 돌아왔다.’ 그의 짙은 회갈색 빛 거울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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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vielog #27] 물회와 함께 펼쳐지는 남녀의 느와르- 낙원의 밤
신세계, 마녀의 박훈정 감독이 신작 낙원의 밤을 들고 돌아왔습니다.
엄태구와 전여빈, 차승원 배우와 함께 돌아왔는데요.
극장 개봉을 하지 않고 넷플릭스에서 단독 공개가 되었어요.
박훈정 감독의 신작을 기대하시는 분들이 많았을텐데, 영화는 다소 아쉬움이 남습니다.
엄태구 배우나 전여빈 배우의 연기는 좋은데, 이야기를 보면서 관객들에게 주인공들의 감정들이 잘 전달되지 않았던 것 같고 중얼거리는 대사가 잘 들리지 않아 불편했어요.
느와르 장르의 색깔은 들어가 있지만 일단 어색하게 만나서 연대의 끈이 생기는 남녀의 드라마가 중점적으로 이어집니다.
영화에 대한 자세한 평은 영상을 참고하세요!^^Rabbitgumi 채널 구독과 좋아요도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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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 4주 최신 개봉영화(해피뉴이어, 노웨어 스페셜, 램, 메모리 조작살인, 긴 하루)
[WEEKEND CHOICE MOVIE] 2021년 12월 4주차 #개봉영화
#최신영화#영화추천 #영화예고편
#해피뉴이어 #노웨어스페셜 #램 #메모리조작살인 #긴하루
영화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https://blog.naver.com/rainb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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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캔디맨> 메인 예고편
들어봤니? 미지의 존재 캔디맨
비주얼 아티스트 '안소니'는 새 작품 구상을 위해 어릴 적 살던 도시로 돌아가고, 그곳에서 오래 전부터 떠돈 괴담을 듣고 매혹되면서 '캔디맨'에 대한 충격적인 비밀을 알게되는데...
불러봤니? 죽음을 부르는 남자 캔디맨
세상을 뒤흔든 미지의 존재 캔디맨,캔디맨,캔디맨,캔디맨,,,
한 번만 더 부르면 그가 나타나게 되는데..
용기가 있다면 그의 이름을 불러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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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사상> 30초 예고편
끊임없이 착취가 벌어진 성희와 수영의 '삶'과 '몸'.
자본이 숨기려고 했던 노동과 지우려고 했던 존재들.
그들을 품고 있는 ‘사상’.
자본이 할퀴고 간 흔적이 고스란히 배인 사상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이 풍경처럼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