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BBITGUMI2024-08-23 15:23:16
다시 부활한 코스믹 호러
- <에이리언 로물루스>(2024)
세상에 태어나 삶을 살아가는 것은 그 누구도 선택할 수 없다. 우리는 부모의 DNA를 이어받아 작은 존재로 태어나, 어쩔 수 없이 생존을 위한 길을 걷게 된다. 태어난 순간부터 먹고, 자라며, 배우고,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는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는다. 이 과정은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에게 적용된다. 학자들은 이것을 종족 유지라는 학문적 개념으로 설명하지만, 사실 삶을 살아가는 이유는 그 누구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 단지 살아가는 본능에 의해 우리는 존재하며, 계속해서 그 본능을 이어갈 뿐이다.
이러한 생명체의 본능적인 삶은 영화 <에이리언 로물루스>에서 더욱 극적으로 묘사된다. 이 영화는 단순한 SF 호러 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과 인조인간, 그리고 에이리언이라는 세 가지 다른 존재가 자신의 존재와 삶의 의미를 탐구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명확한 본능을 지닌 존재는 바로 에이리언이다. 그들은 태어나자마자 단순히 살아남기 위해 폭력적인 행동을 하며, 다른 이들을 해치고 자신을 지키려 한다. 이 점에서 그들의 삶은 극도로 본능적이며,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이들이 그저 생존을 위해 태어났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진다.
영화의 주인공은 10대 인간들이다. 그들은 새로운 식민 행성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 환경은 무척 열악하다. 부모들은 일하다 죽거나 병에 걸리며, 아이들은 희망 없는 삶 속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찾는다. 그 중심에는 레인(케일리 스패니)이 있다. 레인은 부모를 잃고 나서, 이 우울한 행성에서 벗어나 태양이 떠오르는 다른 행성으로 이주하기를 꿈꾼다. 이 여정에서 레인과 인조인간 동생 앤디(데이비드 존슨), 그리고 그들의 친구들은 버려진 회사의 함선을 타고 탈출을 시도한다. 하지만 그 함선에 숨어있던 에이리언들이 그들의 여정에 큰 위협으로 등장하면서 상황은 급격히 변화한다.
[첫 번째 감정] 인간 레인의 희망
레인은 직접 태양이 떠오르고 지는걸 보고 싶어한다. 종일 비가 내리는 식민행성에서는 꿈도 꾸지 못하는 장면이다. 부모의 죽음이후 열심히 일하는 시간을 채워 다른 행성 이주를 꿈꿨지만, 정부에서 그것조차 허가하지 않는다. 레인의 희망은 태양이다. 태양을 볼 수 있는 어딘가로 가는 것이 그에게 남아있는 작은 희망의 조각이다. 레인은 자신이 왜 태어나서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야하는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모든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고민일 것이다. 왜 살아가야하는가.
그 의문이 레인을 움직이게 만든다. 레인 뿐 아니라 그녀의 친구들도 그 암울한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버려진 함선에 가려고 한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지만 태어난 삶을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만드는 방법은 조금 위험한 일이라도 시도를 해보는 것이다. 레인 역시 고민하지만 그 일을 해보려고 한다. 태양을 꿈꾸는 그녀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고 그것을 실현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레인에겐 동생이 있다. 기능 오류로 버려져있었던 인조인간 앤디다. 레인에겐 정말 동생같이 챙겨줘야하는 존재이고, 레인이 힘들어보이면 시덥잖은 농담을 던지며 레인에게 위로를 준다. 인조인간 앤디 역시 자신이 왜 세상에 존재하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에겐 명확한 목표가 있다. 바로 레인을 위한 선택과 행동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감정] 인조인간 앤디의 미안함
앤디는 스스로를 인간과는 다른 존재로 인식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안함을 자주 느낀다. 그의 몸이 고장나고, 움직이지 못할 때마다 레인이 그를 리부트해 주는 장면이 반복되는데, 이는 앤디가 자신의 한계에 대해 느끼는 미안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영화 중반부에서 앤디는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로 더 강력한 인조인간이 되지만, 그 과정에서 인간적인 감정은 점차 사라진다. 앤디는 점차 기계적인 존재로 변해가지만, 그의 본질적인 존재 의미는 변하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레인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며, 그 목적이 그를 움직이게 만든다.
앤디의 이러한 존재는 <프로메테우스>와 <에이리언 커버넌트>에서 등장했던 인조인간 데이빗(마이클 패스벤더)의 철학적인 고민과도 닮아 있다. 데이빗은 자신이 왜 존재하는지, 그리고 인간과 인조인간의 경계가 어디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던 존재다. 앤디 역시 인간적인 감정과 기계적인 존재 사이에서 갈등하며, 자신이 왜 존재하는지를 탐구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의 미안함과 혼란은 단지 기계적 오류를 넘어서, 그가 가지는 존재의 이유에 대한 철학적 질문으로 확장된다.
앤디가 다시 원래의 고장난 앤디로 돌아왔을 때, 우리가 좀 더 친숙하게 느껴지는 건 거기서 발견할 수 있는 인간적인 느낌 때문일 것이다. 마치 가족처럼 레인을 생각하고 챙기는 그의 모습은 자신의 존재가 무엇이든, 자신이 태어난 그 자체가 바로 가족을 위해서라는 아주 단순한 결론에 도달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비록 인조인간이지만, 이 영화 안에서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존재다.
[세 번째 감정] 에이리언의 본능
이 영화에서 가장 순수한 본능을 가진 존재는 에이리언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단지 태어나자마자 본능적으로 다른 생명체를 공격하고,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싸운다. 에이리언들은 자신들이 왜 태어났는지,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그들의 목적은 단순하다. 살아남고, 더 많은 생명을 빼앗아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는 것. 그들은 극도로 폭력적이고 잔인한 존재지만, 그것은 그들의 본능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가 이 에이리언들을 바라볼 때, 그들의 폭력성에 경악할 수 있지만, 사실 그들 역시 생명체로서 자신을 지키고, 생존하기 위해 싸우는 존재다. 이 점에서 에이리언들의 존재는 인간과도 일맥상통한다. 인간 역시 생존을 위해 싸우고, 때로는 폭력을 행사하며,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 <에이리언 로물루스>는 이러한 본능적인 생존에 대해 인간과 에이리언의 경계를 허물며, 우리가 그들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지 고민하게 만든다.
에이리언들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지만, 그들이 가진 본능은 그 자체로 생존의 이유를 설명한다. 반면 인간은 그 존재를 넘어 더 위대한 존재가 되고자 하며, 때로는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 역시 결국에는 에이리언의 본능과 다를 바가 없을지도 모른다. 인간이 진화하고자 하는 욕망, 더 강력한 존재가 되려는 욕구는 결국 더 큰 생존을 위한 본능적인 시도에 불과할 수 있다.
성공적으로 돌아온 코스믹 호러
영화를 연출한 페데 알바레즈는 <맨 인더 다크>와 같은 작품을 통해 관객의 심리를 자극하는 스릴러와 호러 장르에서 뛰어난 감각을 보여준 감독이다. 이번 <에이리언 로물루스>에서도 그는 긴장감 넘치는 연출과 강렬한 비주얼로 에이리언 시리즈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알바레즈는 공포의 본질을 깊이 탐구하며, 단순한 시각적 충격을 넘어 심리적인 공포를 강조하는 연출을 통해 관객을 몰입시킨다. 그의 연출 스타일은 이번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로, 단순한 공포 영화에서 벗어나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깊이를 담고 있다.
<에이리언 로물루스>는 알바레즈가 기존의 에이리언 시리즈에 대한 존경을 담아, 그 설정들을 재구성하면서도 과도하게 사용하지 않는 점이 돋보인다. 그는 에이리언의 원초적인 공포를 유지하면서도, 우주적 공포와 인간의 존재에 대한 질문을 성공적으로 표현해냈다. 기존 시리즈의 코스믹 호러 요소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하며, 관객에게 새로움과 익숙함을 동시에 전달했다.
케일리 스패니가 연기한 레인은 단순한 생존을 넘어서, 자신의 삶의 의미와 희망을 찾아가는 여정을 보여준다. 그녀의 연기는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을 감성적으로 표현하며, 관객이 그녀의 여정을 함께 따라가도록 만든다. 인조인간 앤디를 연기한 데이비드 존슨 역시 기계적인 존재와 인간적인 감정을 동시에 표현하며, 그의 캐릭터에 깊이를 더했다. 이들의 연기는 영화의 긴장감을 유지하면서도,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에이리언 로물루스>는 단순한 생존 영화가 아니다. 인간과 인조인간, 그리고 에이리언의 대립을 통해 생존의 본질과 그 이상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영화다. 이 영화는 인간이 결코 에이리언의 위협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극악의 존재로부터 오는 공포를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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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를 만나기 위해 이 모든 일을 다시 겪으라면,
스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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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의 한계인지도 모르겠다.<엣지 오브 투모로우>와 <컨택트>, 그리고 장강명의 소설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제목이 너무 길어, 이하 '그믐'>을 나란히 놓고 보자.
인간이 외계생명체를 만나면 시간을 초월하는 초능력을 얻는다.
<컨택트>에서는 미래를 볼 수 있게 되고, <그믐>에서도 역시 그렇다.
외계인의 침공으로 멸망을 맞게 된 인류.
세계연합군 육군 소령 빌 케이지는 죽음을 맞이한다.
그런데 눈을 떠 보니 이등병으로 강등되어 있다.
재입대의 악몽이 현실이 된 것. 심지어 소령이 아닌 이등병으로.
장교 사칭 혐의와 탈영 혐의를 받는 그는 범죄자들이 득실한 J부대로 편성된다.
안전장치를 푸는 법도 배우지 못한 채 실전에 투입된 그는 어떻게든 해 보려 하지만, 가슴에 부상을 입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외계생명체의 체액을 뒤집어 쓴다.
죽은 줄 알았는데 또 이등병으로 강등되어 끌려 간다.
똑같은 상황이 반복된다. 또 죽는다. 그리고 또 태어난다.
전투 경험도 없던 그였지만, 죽었다 살았다를 반복하니 경험치가 쌓여 이제 언제 어디서 외계인이 나타나서 자신을 쥐어팰지 다 외워버렸다.
전장에서 병력을 해변에서 빼내기 위해 리타에게 접근하다가, 죽을 뻔한 리타를 구한다.
그것도 몇 차례 반복된다.
어느 순간 안 봐도 척척 위험 상황을 빠져 나가는 케이지를 보고, 리타는 자기를 찾아오라는 말을 남기고 죽는다.
지루한 죽음과 깨어남 끝에 리타를 찾아간 케이지.
리타는 어디 이등병 따위가 날 찾아왔냐는 눈빛으로 그를 본다.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리타는 자신도 그 능력이 있었고, 죽지 않고 살아남아 수혈을 받았더니 그 능력이 사라졌단다.
수없이 죽고 또 죽어 케이지는 점점 더 외계인의 정체에 가까이 간다. 시간을 조종하는 능력을 가진 '오메가'의 존재도 함께.
자신이 타임루프를 할 수 있는 이유은 외계인 중 고위 개체인 알파의 체액이 몸속으로 들어갔기 때문인 거다.
어차피 외계인들은 인간이 무슨 선택을 할지 다 알고 있다. 과거와 미래를 볼 수 있으니까.
인간에게만 시간은 순차적이지 4차원으로 한 차원만 올려도 시간은 왜곡되고 구부러진다.
우리는 4차원을 경험해 본 적이 없으니 감각적으로만 알 뿐이다.
아마 4차원의 나는 내가 이 글을 어떻게 쓰고 마무리할 것인지 다 알고 있을 터.
수많은 실험이 지루할 정도로 계속 반복된다.
매순간 죽었다 살아나야만 하는 케이지도 지루했을까.
이 영화 역시 무간지옥으로 빠지는 것만 같다. 죽지도 못하고 다시 살아나서 그 고통을 또 감내해야 한다.
무수한 시간을 반복하고 반복하다 방법을 찾은 그는 J분대를 이끌고 루브르박물관(오메가가 있는)으로 향한다.
분대원의 희생으로 리타와 둘만 살아남은 케이지.
수류탄과 함께 오메가 쪽으로 몸을 날린다. 참으로 헐리웃스러운 연출이다.
푸르른 액체가 케이지의 몸을 휘감고, 케이지는 죽는... 줄 알았지만 또 살아나, 다시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깬다.
자, 영화가 끝날 무렵의 톰 크루즈의 눈빛을 봐야만 하니 여기까지 이야기하도록 하자.
<컨택트>에서는 외계인의 문자를 해독할 수 있게 된 주인공이 미래를 내다볼 수 있게 된다.
있지도 않은 딸의 죽음. 그 고통은 주인공에서 현실인 것처럼 생생하다.
<그믐>에서는 이런 부분이 있다.
너 참 타이밍 기가 막히다. 여자가 겨우 웃으며 말했다. 이게 우연인 것 같지? 남자도 웃었다.
'우주알'이라는 게 소설 속 남자의 몸에 들어가는 바람에 남자는 시간을 넘나드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
"너를 만나기 위해 이 모든 일을 다시 겪으라면, 나는 그렇게 할 거야"라는 대사는 <엣지 오브 투모로우>를 떠올리게 한다.
인간이란 한없이 낭만적인 존재여서, 끝없는 타임루프 끝에도 한 사람을 사랑한다(그런 스토리가 사랑받는다).
그러고 보니 <어바웃 타임>과도 비슷하다.
어쩌면 우리는 언젠가 만났던 사람일지도 모른다.
당신을 만나기 위해 끝없이 죽고 다시 태어났는지도.
고작 사랑 때문에, 라고 말하지만, 지나고 나서 보면 한심하게도 거의 모든 일이 사랑 때문이었다.
그러나 끝이 없는 천국은 지옥과 다를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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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뻔한 영화’는 ‘나쁜 영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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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0★
솔직하게 인정하고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제라드 버틀러가 주연을 맡은 영화 〈분노의 추격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 뻔하다. 줄거리는 이렇다. 별거와 이혼 위기를 겪는 부부가 아내의 고향집으로 향하던 중 아내가 사라졌다. 어떻게든 아내의 마음을 되돌리고 싶은 남편은 다급한 마음에 경찰에 연락하지만 베테랑 수사관은 남편을 첫 번째 용의선상에 올린다. 아내에게도, 남편에게도 어딘가 구린 구석이 있는 듯 보이고 범죄 조직이 개입한 듯한 정황도 나온다. 남편과 경찰은 각자의 위치에서 제한된 정보를 바탕으로 진실을 좇고, 꽁꽁 감춰진 거대한 비밀은 영화가 끝날 때쯤 빗장 풀린 듯 쏟아져 모든 갈등을 해소한다.
사실 이런 유의 영화는 적당한 재미와 긴장을 선사하지만 전혀 새롭지는 않다. 〈300〉, 〈런던 해즈 폴른〉 〈지오스톰〉, 〈앤젤 해즈 폴른〉 등 극장에서든 영화 채널에서든 제라드 버틀러가 출연한 영화를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미 알고 있겠지만 말이다. 새로움, 전위성 등 예술적 가치에 초점을 맞췄을 때, 이 영화는 분명 낙제점이다.
그러나 새로움과 전위성만이 영화를 평가하는 기준인 것은 아니다. 때로는 ‘익숙한 쾌락’이 더 끌릴 때가 있는 법이다. 만약 내가 이 영화를 돈을 내고 극장에서 봤다면 솔직히 짜증이 났을 것이다. TV와 OTT에서 얼마든지 대체재를 찾을 수 있는데 왜 굳이 비싼 돈을 주고 극장에서 이 영화를 봤을까 하는 후회가 밀려왔을 것이다. 그러나 금요일 밤, 퇴근 후 지친 몸으로 맥주 한 잔 마시며 TV나 OTT에서 이 영화를 봤다면 꽤 만족했을 것이다. 새로움, 전위성을 가진 영화는 영화의 메시지와 기법을 직접 느끼고 소화하는 데 정신적‧신체적 에너지가 필요하지만, ‘익숙한 쾌감’을 제공하는 영화는 아무리 지친 상태라도 편안히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평론가들이 이런 유의 영화에 박한 것도, 관객들이 평론가들을 욕하며 영화와 자신의 감상 경험을 옹호하는 불만에도 모두 나름의 합리성이 있다. 이들은 영화를 평가하는 기준이 다를 뿐이다. 영화를 보는 단 하나의 기준 따위는 없다.
〈분노의 추격자〉는 모든 장면이 익숙하다. 하지만 이 말은 〈분노의 추격자〉가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을 능숙히 활용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만듦새도 매끄럽다. 즉 ‘익숙하고 편안한 쾌감’을 원하는 관객에게 이 영화는 그리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제라드 버틀러의 필모그래피의 관점에서 봤을 때도 흥미로운 점이 있다. 대체로 액션이나 스펙터클에 치중한 그의 전작과는 달리 이 영화는 심리 스릴러적인 요소가 제법 강하다(그렇다고 액션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의 필모그래피를 아끼는 관객이라면 〈분노의 추격자〉 역시 충분히 ‘새로울’ 것이다. 이제 선택은 당신의 몫이다.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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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좋으면 좋은 거 아니겠어?
말레피센트를 이은 여성 빌런 캐릭터를 디즈니에서 또다시 선보였다. 체감적 반응은 말레피센트보다 더 파급력이 큰 것 같다. 코로나로 인한 영화계 불황을 잠시나마 잊게 할만한 흥행과 대중의 평가가 인상적이다.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그저 패션을 앞세운 영화라고만 생각하겠지만 사실 이 영화는 상류층 사람들의 전유물이었던 예술을 대중적인 시각에서 다시 재해석한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대중문화의 등장을 화려한 옷을 매개로 자신의 욕망에 대해 솔직하게 표현하고자 하는 현대 여성들의 근원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패션은 시대정신의 반영
영화의 배경은 70년대, 영국 런던이다. 70년대의 영국을 가장 빨리 이해하려면, 한국에서 흥행한 영화 중 하나인 보헤미안 랩소디를 떠올리면 된다. 그 시절의 섹스 피스톨즈, 등 펑크 록 가수들이 영국 전역을 넘어 세계적인 인기를 구가하던 시기였다. 펑크 록이란 '누가나 할 수 있다'라는 평등주의적 "Do it yourself"라는 슬로건을 내밀며, 단순한 음악부터 다양한 음악적 시도를 했던 장르로 평가받는다. 미국에서의 펑크록은 새로운 시대, 새로운 음악을 상징하는 movement의 성격을 띄었다면, 영국에서의 펑크록은 자본가들과 노동자들 사이의 부의 차이를 견디지 못하고, 악화되고, 상류층에 대한 적대감, 계급 의식에 대한 적대감 등에 대한 표현이 적나라해졌던 상황을 고려해 영국의 상황을 비관하는 디스토피아적인 시선을 그린 음악 장르였다. 이런 펑크록의 정신은 패션에도 큰 변화를 일으키는데, 펑크록 신봉자들이 구현한 패션은 가히 모스트모던적인 패션으로 평가받을 만큼 극에 달한 자유와 그에 따른 난해함을 동반했다.
이런 영국의 시대적 상황에 따라 펑크 록이 등장했던 70년대의 영국에서는 크루엘라의 등장이 절실했는지도 모른다. 영화에서는 크루엘라와 바로네스 사이의 개인적인 서사가 존재하지만 사회적 관점에서 바로네스와 크루엘라의 대결은 상류층의 패션과 상류층을 비난하는 대중들이 구사한 포스트모던적인 패션의 대결에서 그 당시에는 포스트모던이 우위를 범하던 시기였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며, 크루엘라는 대중들이 원하는 예술을 보여준 펑크록의 정신과 맥을 같이 하는 상징적인 인물이었던 것이다. 상류층의 패션을 대변하는 바로네스를 파격적인 퍼포먼스로 골탕먹이는 크루엘라의 모습은 자유분방하게 상류층을 거리낌없이 골탕먹이고 싶은 그들의 마음을 대변한 일종의 혁명가였는지도 모른다.
빌런이 사랑받는 이유 그리고 사랑받는 빌런이란
크루엘라와 바로네스는 엄밀히 따지면 빌런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는 투명하게 착한, 신데렐라가 없다.
그렇다면, 크루엘라가 선한 쪽이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다. 바로네스와 크루엘라는 비슷한 듯 하지만 다른 인물이다. 자신의 목표를 위해서라면 나의 경쟁자를 끌어내려서라도 내 존재감을 빛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점이 그렇다. 이렇게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려면 착한 척은 내려놓아야 한다. 하지만 바로네스와 크루엘라의 차이점이 있다면, 바로네스는 정말 절대적으로 악하다못해 싸이코패스가 되어버렸지만 크루엘라는 일말의 양심은 간직하고 살아간다. 위험한 욕망을 실현하는 사람을 빌런이라고 가정한다면,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는 빌런은 인간다움을 간직한 빌런들이다. 나쁜 짓을 하고는 있지만 아직은 완벽하게 미치지 않아서 이 나쁜 짓의 근원적 이유가 이해가 가는 캐릭터들이다. 크루엘라가 그렇다. 아마도 죽은 자신의 엄마가 심어준 최소한의 사회성 덕분일 것이다. 바로네스와 크루엘라는 정말 많이 닮았지만 바로네스는 인간으로 태어나서 범해서는 안되는 선을 넘어가 몸만 인간으로 살아가는 괴물이 되었고, 크루엘라는 엄마의 존재, 친구들의 존재재만으로도 그녀에게는 큰 버팀목이 되었기 때문에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면서도 바로네스의 명성 외에는 그 어떤 해도 끼치지 않는 것으로 최소한의 양심은 지켜가면서 골탕먹인다. 그렇게 그녀가 가진 최소한의 양심은 관객들로 하여금 그녀의 위험한 욕망을 응원하게 만든다.
그녀의 삶을 통해 우리가 얻을 메시지는 뭘까. 착한 척은 버려두고, "내가 하고 싶다는데, 누가 말려"의 마인드로, 속된 말로, 개썅마이웨이로 살아가는 그녀가 항상 누군가의 눈치를 보면서, 남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유념하며 살아가는 대부분의 인간들에게 그녀의 발칙한 무례함은 오히려 시원함으로 다가왔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남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우리도 우리 자신의 소리에 귀기울이고, 자신의 욕심에 대해서 조금은 솔직해져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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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 내부를 관조하기에도 벅찼던 <지금 우리 학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느 때와 같이 평범하게 흘러가던 효산고등학교의 일상. '온조(박지후)', '청산(윤찬영)', '남라(조이현)', '수혁(로몬)'이 복잡한 애정전선을 형성하는 사이, 은지는 늘 그랬듯이 '귀남(유인수)'과 그 패거리에게 가혹하게 괴롭힘 당한다. 그러나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된 채 병찬의 과학 실험실에 감금되었던 '현주(정이서)'가 풀려나면서 효산고등학교의 일상은 파괴된다. 한 번 번지기 시작한 좀비 떼는 삽시간에 학교와 효산 시를 점령해 나가기 시작하고, 가까스로 좀비들의 공격을 피해 교실로 되돌아온 온조와 청산은 다른 친구들과 함께 좀비들로부터 안전해질 수 있는 방안을 찾는다. 그러나 '나연(이유미)'을 필두로 좀비보다 무서운 의심과 편견이 교실 내에 퍼지기 시작하면서 간신히 되찾은 안전마저 사라지기 시작한다.
좀비물은 기본적으로 사회비판적 요소를 갖는 장르다. 좀비들 사이에서 살아남으려는 인간들의 천태만상을 묘사하며 인간 본성에 대해 고민하고, 인간군상의 원인을 잘못된 사회적 시스템에서 찾아 비판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각각 한국에서 가장 성공한 좀비 영화, 드라마라 할 수 있는 <부산행>과 <킹덤> 역시 좀비의 출현 원인을 사회적 모순으로부터 포착한다. <부산행>은 주인공 석우(공유)가 다니는 증권회사가 수익에만 집착해 되살린 부실기업이 좀비 바이러스를 만들었다는 진실을 통해 성장 중심 사회를 비판했고, <킹덤>은 <아신전>을 통해 조선이라는 국가의 모순이 어떻게 좀비 아포칼립스로 되돌아왔는지를 묘사한다.
특히 좀비에 대한 설정이 어느 정도 확립된 이상 좀비에 관한 드라마 파트의 중요도는 더욱 크다. 바이러스 형태로 전파되고, 소리에 민감하며 인육을 탐닉하며 굉장히 빠른 속도로 움직일 수 있다는 식으로 최근 좀비 영화의 트렌드는 수렴해 가고 있다. 따라서 아주 새롭거나 획기적인 볼거리를 보여줄 수 없다면, 좀비물은 감정적 측면에서 관객 혹은 시청자를 흡입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동명의 웹툰 원작을 영상화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지금 우리 학교는> 안타깝게도 잠재력을 온전히 꽃 피우지 못한 유망주라고 할 수 있다. 학교라는 장소와 배경, 환경에 좀비물을 접합한 발상과 착안 자체는 (원작 웹툰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는) 흥미롭지만, 이를 풀어나가는 방법이 과하고 올드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학교는>이 학교와 좀비를 결합해 서스펜스를 조성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학교라는 공간 자체의 구조를 활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학교라는 공간 안에 벌어지는 이야기를 좀비와 인간의 싸움에 대입하는 것이다. 우선 드라마는 한국의 고등학교에서 접할 수 있는 다양한 일상적 풍경의 모습을 전환시켜 좀비 아포칼립스에서 기대할 수 있는 처절한 싸움을 만들어 낸다. 도서관, 과학실, 음악실, 강당 등 학교의 시설들을 이용해 펼쳐 보이는 액션은 <부산행>에서 KTX 속 액션신을 보는 듯 신선하게 다가온다. 초반 급식실에서의 대규모 감염이나 중반 이후 나오는 도서실 장면이 대표적이다.
다만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것은 한국 고등학교의 보편적인 구조를 활용한 연출이다. 현재까지도 한국의 많은 학교는 넓은 운동장과 그 주위를 ㄱ자 내지는 ㄷ자로 감싸는 직사각형 건물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학교 외부와 내부를 이어주는 문은 극히 드물며, 문을 제외하면 많은 경우에 울타리나 담벼락으로 둘러쳐진 형태를 띤다. 쉽게 말해서 한국의 고등학교는 근본적으로 군대 건물이나 교도소 건물과 다르지 않다. 즉 탈출하기에 가장 어려운 형태를 띠는 건축물 중 하나다. 그러다 보니 학교 내에 출연한 좀비는 탈출할 수 있는 경로가 제한된 학생들과 교직원들을 부지불식간에 습격할 수 있고, 이러한 연출은 좀비물로서 상당히 효과적인 결과를 내놓을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특히 학교 내부의 구조가 본질적으로 판옵티콘이라는 사실 역시 엄청난 공포감을 자아내는 데 기여한다. 판옵티콘은 감시자가 고개만 돌려도 모든 수형자들의 방을 볼 수 있는 구조의 감옥이다. 한쪽 벽면에 쏠려 있고, 복도 쪽에는 커다란 창문이 있는 교실로 가득한 학교는 복도에서 학생들을 감시하기에 최적화된 구조인 것이다. 이는 학교 내부에서 교실에 숨는 데 성공하더라도 언제든 들킬 수 있다는 급박함을 자아내며, 창문과 학교 외벽을 이용하는 등의 다채로운 액션을 가능케 한다.
또한 판옵티콘 형태의 학교 건물은 액션을 단순한 볼거리로 남겨두는 것이 아니라, 교육 시스템을 비판하는 메시지를 액션에 담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 판옵티콘 구조는 수형자가 언제 어디서든 감시당할 수 있다는 의식을 갖게 만들고, 감시의 시선을 내면화하여 스스로를 감시하게 만든다는 특징을 갖는다. 이는 첫 에피소드에서 학생들이 핸드폰을 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제출하는 범주 내에서 꼼수를 부리는 것, 학교과 학생들이 구조의 최우선 대상이 되지 못하고 방치되는 가운데 학생들이 학교를 탈출할지 말 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모습과도 오버랩된다. 따라서 학생들을 감시와 통제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학교 내에서 펼쳐지는 드라마 속 액션은 몇십 년째 변하지 않는 구시대적이고 근대적인 교육관에 기반한 학교 시스템 그 자체에 대한 저항이자 사투로 볼 수 있다. 단지 그 형태가 좀비와의 싸움일 뿐이다.
더 나아가 학교라는 건축물을 활용한 메시지는 학교라는 공간 속 학생들의 드라마와 더해지면서 그 강도가 더해지기도 한다. 학교는 지식 전달의 현장일 뿐만 아니라 사회화의 공간이기도 한데, <지금 우리 학교는> 속 좀비와 인간의 사투는 집단 괴롭힘을 비롯한 학생들 간의 갈등 및 충돌과 연계되어 과연 현재 우리 학교가 그 기능을 적절히 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작중 좀비 바이러스가 단순한 재난, 혹은 우연한 재앙이 아니라 왕따 피해자로부터 발생한 것만 보더라도 이 작품의 의도를 알아챌 수 있다. 또 일행 중 누군가가 좀비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경계심과 의심의 근간에 기초생활수급자의 준말인 '기생수'라는 단어로 대표되는 편견과 차별 심리가 깔려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학교로부터 그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아이를 낳아야 하는 '희수'도 유사한 맥락에서 등장한다고 볼 수 있다.
이때 드라마는 학교의 사회화 기능이 작동하지 않는 경우와 지식 전달이 더 강조되는 세태를 함께 지적한다. 그 중심에는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으나 좀비가 되지는 않은 이른바 '절비(절반만 좀비)' 은지, 귀남, 남라가 있다. 작중 좀비 바이러스는 사람들의 두려움으로부터 배양되는 모습을 보이지만, 이들은 좀비보다도 학교 자체에 더 큰 두려움을 지녔기에 좀비가 되지 않는다. 집단 괴롭힘의 피해자인 은지는 좀비들보다도 자신의 치부가 주위에 전파되는 것을 더 두려워한다. 또 좀비가 된 다른 학생들을 내려다볼 때 이번에도 자신은 따돌림을 당했다면서 좀비보다도 자신의 처지를 자조한다. 가해자인 귀남도 출몰하는 좀비보다 자신이 다른 일진들의 장기짝이나 다름없다는 열등감이 노출되는 상황을 두려워한다. 남라도 좀비보다 학교라는 공간을 더 싫어한다. 전교 1등이고 반장이지만 정작 같은 반 학생들과 소통할 줄도 모르는 남라에게 좀비는 오히려 친구를 만들 기회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드라마는 좀비를 이용해 좀비보다 더 끔찍할 수도 있는 학교 시스템을 역설적으로 비판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가까스로 학교를 탈출한 주인공들이 향하는 곳이 폐교도소에 마련된 임시 수용 시설인 것은 아이러니함을 배가한다. 좀비 떼보다도 끔찍한 학교라는 현실로부터 벗어난 주인공들이 다시금 학교와 다를 것 없는 공간에 갇히는 비극의 물레바퀴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결말의 모닥불에 담긴 메시지는 더욱 분명해진다. 수용소를 벗어나 폐허가 된 학교로 다시 향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학교라는 공간과 제도 자체가 사라질 수는 없는 현실을 보여준다. 다만 그 학교가 통제받고 감시당하고 사회로부터 묘하게 방치되며 서로를 불신하게 되는 좀비 아포칼립스 같은 학교여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효산고등학교 옥상에 피워진 모닥불에는 진정으로 친구를 만들고 서로를 이해하며 성장할 수 있는 공간을 달라는 외침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학교는>이 보여주고자 하고, 들려주고자 하는 학교 제도에 대한 다양하고도 중요한 목소리는 단발적인 아이디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듯 느껴진다. 드라마가 학교라는 염불보다 사회 풍자라는 잿밥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물론 앞서 말했듯이 좀비물은 사회 비판과 떨어질 수 없다. 그러나 이미 학교과 교육이라는 사회 시스템을 주된 타깃으로 설정한 상황에서 굳이 학교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들까지 스토리텔링에 끌어들이는 것은 그리 영리한 선택은 아니라고 보이는 것이다. 근래 재난 영화에서 빠지지 않는 렉카 유튜버나 개인방송 이야기를 삽입한 것이나 사회 지도층의 모순, 왜곡된 개신교 및 님비현상을 비판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물론 그 덕분에 전형적이고 진부한 캐릭터 클리셰를 파괴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체로 장점이 될 수는 있다. 자신의 잇속을 챙기면서도 진짜 시민을 생각하는 정치인,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하는 결정에 죄책감을 느끼는 군인처럼 기능적으로 소비되지 않는 입체적인 캐릭터는 분명 극에 신선함을 불어넣는다. 그러나 이는 각 부분을 조각으로 쪼개 볼 때의 장점일 수는 있어도, 전체적으로는 분량 및 비중 배분의 실패라고 볼 수 있다. 총 12개인 에피소드 개수를 절반 내지는 2/3 수준으로 줄일 수 있지 않을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 외에 아무리 고등학교가 배경이라고 해도 로맨스의 비중이 크고 삽입되는 타이밍이 다소 뜬금없게 느껴지는 점, 비록 해외에서는 한국 콘텐츠의 특징이자 신선한 점이라 평가받는 대목이라 해도 거의 매 회차마다 신파적인 요소가 등장하는 것 역시 완주를 힘들게 만든다.
<지금 우리 학교는>은 넷플릭스의 2022년 한국 콘텐츠 중 첫 스타트를 끊은 작품이자, <부산행>과 <킹덤>에서 촉발된 한국형 좀비물의 새로운 도전이었다. 실제로 설 연휴 직전에 공개된 후 플릭스 패트롤(FlixPatrol) 월드 랭킹에서 TV 쇼 부문 1위를 차지하는 등 뛰어난 흥행을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 다만 확실하게 갈리는 장단점을 고려하면, <지금 우리 학교는>의 성공에 있어서 잠재력을 충분히 발현하지 못한 작품의 내용 및 결과물의 역할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보기는 어려워 보인다.
P(Poor 형편없는)
선택과 집중의 실패. 학교 안에만 집중했으면 그래도 유의미할 뻔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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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FF 데일리] 기록과 해석의 순간
OVERVIEW
2018년 브라질, 우연히 손에 넣은 16mm 필름에 담겨 있던 낯익게 느껴지지만 먼 곳에서 온, 그리고 오래 전에 촬영된 기이한 이미지들에 충격을 받아 이 영상의 기원을 조사하기로 한다.
REVIEW
이 영화의 감독 자나이나 나가타는 오래된 16mm 영사기 점검을 위해 릴을 하나 구입했는데, 선물로 작은 필름 롤이 함께 들어 있었다. 이 롤에는 1960년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한 가족이 휴가를 보내는 19분 분량의 홈무비가 담겨 있었다. 감독은 이 발견의 순간부터 컴퓨터를 떠나지 않고 인터넷과 모든 도구를 동원해 이 휴양지 이미지의 실제 배경을 알아내는 조사에 착수한다. 무해한 필름 롤과 아마추어 이미지가 주는 정보로 단순한 인터넷 검색에서 끝날 줄 알았던 이 특별한 수사 스릴러 형식의 영화는 결국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시기 일어난 인종과 폭력에 관한 이야기를 드러낸다. (문성경)
"사적인 영화"는 감독이 영사기 점검용으로 "릴+사적인 영화"라는 제품을 온라인 구매하면서 시작된다. 릴과 함께 들어있던 19분 가량의 영상은 누가 봐도 가제 그 이상이 될 수 없을 것만 같은 제목의, 출처 불명의 무성 필름이었다. 그러나 누군가가 이미 편집한 영상이었다. 즉 어떤 의도가 이미 반영된 기록물이었다.
검은 화면에서 타이핑되는 글씨로 시작한다. 타각타각 소리와 함께 화면에 타이핑되는 속도대로, 관객은 감독이 겪은 정보를 고스란히 따라간다. 이 영화는 19분의 풋티지 영상, 그리고 영상 속 정보의 조각을 찾아 따라간 감독의 여정을 관객이 고스란히 따라가게 한다. 영화 <서치>에서 딸을 찾는 아빠의 탐색전을 흥미진진하게 본 사람이라면, 다음 장면을 궁금해 하며 이 영화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시작은 단순하게 크루거 국립공원이다. 얼핏 사파리에 가서 재미있었던 시간을 담은 기록으로도 보일 수 있지만, 감독이 설치한 음악이 고조되면서 계속 의문을 갖게 만든다. 끼긱끼긱 퉁겨지다 득득 긁히며 끊어질 듯 말 듯한 현, 퉁퉁 불규칙적으로 쏟아지는 타음이 불안을 고조시킨다. 기린이 걸어가거나 원숭이가 움직이고 가젤이 뛰고 물 안의 하마들이 지나가는 그 자연스러운 장면들조차 불안해 보인다. 그러면 궁금해진다. 누가 어떤 의도로 이 영상을 편집했을까? 코끼리의 걸음이 왜 반복되고 있을까? 앉아 있는 사자를 왜 재차 비출까? 사파리인데 조금도 경쾌하지 않다.
불안 안에서 궁금해하고 있노라면 전통 옷차림을 한 사람들의 춤이 나온다. 사파리에도 있던 백인 아이가 춤을 지켜보며 슬며시 화면을 지나간다. 불안한 예감은 어두운 냄새를 맡는다. 도시의 길거리와, 현란한 복장의 인력거꾼과, 놀이기구가 있는 해안 도로와, 푸르게 어두운 아쿠아리움, 잔디밭, 사람들, 부유한 옷차림의 백인들과, 들판의 오두막들... 영상이 나아갈수록 어둡고 불편한 감각이 느껴진다.
감독은 꼼꼼하고 성실하게, 차곡차곡 파고든다. 영리한 구성을 따라가다 보몀 어느새 불안은 경악이 된다. 생각지도 못한 얼굴과 이름들을 마주하게 된다. 평화로운 여행의 기록일까 싶었던, 아니 실제로 상당 부분 그랬을 이 영상에는 착취의 역사가 배어 있다. 타인의 피를 팔아 제 배를 불린 사람들의 기억이 스며 있다. “사적인 영화“는 역설적이게도 전혀 사적이지 않은, 역사 교과서에 길이 실릴 사건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보다 보면 궁금해진다. 사적인 기록은 정말 사적인가? 기록은 언제까지 "사적"일 수 있는가? <안네의 일기>가 그랬듯, 기록은 서랍 안에 있을 때만 사적일 수 있다. 누군가에게 읽히면서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고, 가끔은 작가가 상상도 하지 못한 의미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안네가 일기를 쓸 때 안네가 차마 미래를 상상할 수 없었을 것처럼, 19분의 영상을 촬영하고 편집한 이가 이 영화를 상상했을 리 없다. 그냥 값비싼 취미였는지도 모른다. 코끼리가 걷는 장면이 반복되는 게 단순히 재미있어서 별 생각 없이 했는지 모른다. 아이의 미소를 사랑해서 계속 담다 보니 모인 영상들인지 모른다.
그러나 어떤 의도였든, 영상엔 단순히 재미있고 사랑스러운 것만 담기지 않았다. 길 가다 불려와 쭈뼛거리며 카메라 앞에 선 여자의 얼굴에 어린 경계와 불안, 그 자리를 피해보려고 얼굴을 가리는 사람, 환하게 웃는 백인 아이 옆에서 현란한 옷을 입고 등짝보다도 커다란 모자를 쓰고 덩실덩실 춤을 추며 인력거를 끌어야 하는 사람. “좋은 이웃”이 되기 위해 분리되어야 한다고 허울 좋은 단어를 끄집어내면서도 착취의 순간에는 옆에 있는 걸 불편해 하지 않았던 누군가들의 얼굴. 영국 여왕처럼 차려입은 여자들과 말쑥한 정장을 한 남자들의 만찬, 연설.
마치 그 대조를 의도한 작품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치는데, 19분의 영상 바깥에서도 동일한 역사는 반복되고 있다. 감독은 영상이 촬영된 시점에서 서서히 현재까지 이야기를 끌어온다. 역사가 이 영상이 찍히던 시절의 남아공을 지독한 인종차별의 시절로 기록함에도, 어떤 이들은 해안도로와 수영장과 원색의 옷자락과 환한 미소에서 풍기는 부유한 기운을 잃어버린 천국으로 기억했다. 없던 추억까지 제조해 버리는 힘이 있는 밴 모리슨의 음악을 배경 삼아, "비티지"하고 "레트로"한 색감 속 반짝반짝 빛나는 아름다운 풍경으로.
그러나 모두에게 추억의 풍경일까? 다른 누군가에게도 천국이었을까? 영화는 희생을 담아내지 않고도 희생의 얼굴을 비춘다. 그렇게 누군가의 풍요롭고 여유로운 사적인 기록은 공적인 역사의 순간으로 읽힌다.
다큐멘터리가 역사적 순간을 말할 때, 한 축이 기록이라면 다른 한 축에는 해석이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영화는 해석을 통해 기록과 해석의 존재 의의를 동시에 비춘다. 기록을 읽어내는 과정에 관객을 흥미로운 방식으로 동참시키고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 우리를 내려놓고 묻는다. 1960년대의 일에서 지금 여기 우리는 과연 자유로운지. 여전히 허울 좋은 말에 가려진 차별과 격리로 누군가를 투명하게 만드는 시도들은 없는지. 그 현실을 기록하고 해석하는 눈은 어디에 있는지. 영리한 영화는 이렇게 존재 의의를 스스로 증명한다.
2023. 04. 28 19:30 메가박스 전주객사 9관 (172)
2023. 04. 30 14:00 메가박스 전주객사 9관 (338)
2023. 05. 05 17:00 메가박스 전주객사 10관 (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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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탁 하나를 마주한 두 개의 선
삶의 본질은 무엇일까. 묵직한 물음처럼 보이지만, 사실 삶만큼 단순한 게 있나 싶다. 우리 인간은 태어나 자라면서 자아를 만들어간다. '나'의 개념이 생긴다는 건 곧 '남'을 인지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종래엔 다른 이들이 모인 세상을 지각하게 된다. 성장하는 과정은 얼마나 바쁘던가? 보고 듣고 경험하는 일들의 투성이. 외부의 모든 일들에 자극하고 반응하다 보면 어느샌가 길을 잃기 십상이다.
어렴풋이 나는 나를 모른다는 사실을 느꼈다가 문득, 거대한 깨달음처럼 다가오는 때를 맞닥뜨린다. 나는 언제나 나였는데, 나는 나를 모르겠다. 내가 누구인지. 무얼 좋아하고, 어떤 걸 원하는 건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인데 내 삶은 나의 것이고, 그래서 내가 책임져야 하고, 내가 나를 끌어안아야 한다.
본래 중심이 반듯하게 잡힌 사람이라면, 혹은 '그래도 해야지 뭐' 같은 담담함으로 고민을 가벼이 넘길 수 있다면, 삶이 괴롭다 못해 무서운 느낌은 낯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글을 적고 있는 나는, 중심이 제대로 잡히지도 내가 나를 끌어안는 상황을 담담히 받아들이지도 못했다. 다만 느꼈을 뿐이다.
무겁다.
나는 나를 견디기가 너무 무거웠다.
얘가 너무 까탈스럽고 딱히 잘난 것도 없는데 어떻게 나는 나로 살아가면서 생을 견디라는 걸까. 두려움에 내몰린 존재가 가장 흔히 반응하는 건 분노를 표출하는 행위이다. 세상 모든 게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고쳐야 할 것들밖에 없는,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 그건 내가 바라보는 나의 표상이었다.
우리 각자는 평생 자기 스스로를 볼 수 없다지만, 거울처럼 간접적으로 인지할 방법은 많다. 나를 제외한 모든 것에 대한 나의 태도와 생각, 선입견, 느낌. 그 모든 게 나였다. 타인을 바라보는 태도, 유난히 거슬리는 상황이나 사람, 추구하는 방향, 원하는 세상.
그런데 여기서 한 겹 더 벗겨야 한다. 단순히 어떠한 태도, 물건, 상태 따위는 가지고 싶은 게 아니다. 그걸 가짐으로써 얻게 될 감정이나 시선, 느낌들을 얻고 싶은 거다. 무언가를 원한다는 건 결국 결핍에서 비롯된 행위이다. 없다고 생각하니까 갈망한다.
그러니까, 삶의 본질은 단순하다. 이 세상은 내가 보는 나의 투영이기에 내가 오늘 세상과 교류하며 반응한 모든 것들에 '왜?'를 묻다 보면 꽁꽁 숨겨둔 나의 갈망, 나의 결핍을 마주한다. 그걸 바꾸려고 애쓸 것도 없이, 그저 관망하면 된다. 그렇구나, 하면서. 무언가를 얻고 싶어 하는 건 부족함을 채우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이를 자연스럽게, 가능하다면 사랑스럽게 바라보다 보면 또 다른 것이 보이고. 그렇게 나를 들여다보는 게 삶이다.
새삼스럽게도 삶을 되돌아본 건 <두 사람을 위한 식탁>을 보고 온 후였다. 특정 갈래로 압축할 수 없는, 쉽게 말해 주제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영화.
'섭식장애'와 '모녀', '다큐'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는 이 영화를 표현할 순 있어도 정의할 수 없기 때문 아닐까. 사람을, 특히 사람 둘의 관계에 집중한 영화-그것도 실제인물이 주인공인-는 필연적으로 중구난방이다.
원래 그렇지 않은가. 삶은 계획하지 않은 일들로 가득하다. 대개 뜻밖의 일은 터닝포인트가 될 만큼 커다란 영향을 끼치므로, 굉장한 변화를 가져오기도 한다. 그런데 그 변화는 나 자신만 알 수 있고, 이를 언어로 발화하기란 쉽지 않다.
픽션이었다면 얘기가 달랐겠다. 캐릭터에게 서사를 부여하고, 그 서사의 논리구조가 맞게끔 보여줄 수 있다. 오히려 납득 가능한 말과 행동, 태도 따위를 보며 사람들은 공감하며 응원한다. 하지만 우리도 알지 않는가. 어떤 일은 아주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바람에 계기를 콕 집어 말할 수 없다. 그저 일이 벌어졌고, 그 안에서 변화했고, 결과로써 지금을, 동시에 과정으로써 앞으로의 삶을 이어간다.
그러니 영화에 관해서는 할 말이 없어진다. 내가 써오던 리뷰는 영화의 등장인물을 중심으로, 그와 타인과의 관계를 풀어내고 해석하고 의미를 덧대어 매듭짓는 행위였기에. 지금은 무엇도 설명하고 싶지 않다.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그저 바라게 된다. 칠흑 같은 영화관에 들어서, 앉고. 이야기를 보고 들으며 과거의 연이 떠올랐다면 그때에 잠시 잠겨있다가 다시 그들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왠지 모를 감정이 올라오면 흘려내고, 그렇게 90분을 머물러 보기를. 그 마음을 담아 끝으로 영화에서 가장 좋았던 장면을 시와 산문을 오가는 짤막한 글로 정리해 본다.
두 사람을 위한 식탁
두 사람을 위한 식탁에는 각자의 그릇과 숟가락, 젓가락이 놓였다. 혼자서는 너무 심심하거나 혹은 헛헛할까 봐 함께 나눌 반찬거리도 준비해 뒀다.
나란히 마주 앉은 두 사람. 영원히 하나가 될 일 없는 평행선. 이 얼마나 다행인가. 공유할 수 있는 것과 온전한 나만의 것 모두를 지녔다는 게. 원하는 만큼 원하는 때에, 원하는 대로 맞닿으면 된다. 가끔은 서로의 타이밍이 맞지 않아 삐걱대겠지. 어설프게도. 서로를 할퀴며 만든 생채기가 도리어 서로를 존중할 선을 만들어낸다.
완벽히 겹쳐지는 때. 거기엔 나도 너도 없다.
그러나 이건 다 지나간 이야기.
닿았던 순간도, 맞잡은 순간도, 떨어진 순간도, 결국 찰나의 일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고 있던 걸까? 가까웠다가도 금세 멀어져 각자의 길을 걷는 걸 보면. 그렇게 평행선은 계속된다. 손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가 서로의 존재가 콩알만큼 보였다가 아예 보이지 않았다가 다시 눈앞에, 빼꼼.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초청받아 관람 후 작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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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성 충돌이 임박했다. 《돈 룩 업》의 주인공은 무명의 두 천문학자. 혜성이 지구와 충돌할 거란 사실을 발견한 두 사람은 언론사를 있는 대로 찾아다니기 시작한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재앙을 온 인류에 경고하기 위해. 애덤 매케이 각본과 연출. 《돈 룩 업》, 올겨울 공개 예정. 오직 넷플릭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