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2025-03-02 15:48:19
시선의 권력과 폭력성을 직면하다
영화 <시빌 워: 분열의 시대>를 보고
작품을 수입하여 부제를 붙이거나 새로운 제목을 붙이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제목은 작품의 얼굴이라고 생각하며, 어떤 선택은 작품을 오염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무척이나 어울리는 '분열의 시대'라는 부제를 달고, 한국의 극장에 도착했다. 그렇다면, 이 작품에는 어떤 ’분열‘이 벌어지고 있는가? 일차적으로는 ’내전‘으로 인한 분열이다. 한 나라의 국민임에도 갈라선 이들. 이들이 어떤 이념으로 인해 갈라서게 됐는지에 이 영화는 집중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한 인물이 기자인 주인공과 동료들을 향해 묻는 질문은 의미심장하다. “Which kind of American are you?”. 이 질문을 던진 뒤, 그의 총구는 아시아 출신 미국인들에게 먼저 향한다. 이차적으로는 ‘종군사진기자’들의 분열이다. 주인공인 이들은 내전 상황에서 내면의 분열을 겪으며, 이 작품은 후자에 초점을 둔다.
이들은 전쟁의 참혹함을 사진으로 다뤄내어 사람들의 의식을 고취시키겠다는 의지를 가진 인물들로 보인다. 그렇게 이들은 ’Great photo’를 찍기 위해 현장을 누빈다. 내전 상황 속에 펼쳐지는 수많은 이들의 죽음들. 그 순간 카메라를 들이밀어 극적인 순간을 담아내는 것이 그들의 일이다. 총탄이 오가고 피가 솟구치는 순간들이 화면에 연속적으로 보여진다. 전쟁 영화에 어울리지 않게 울려퍼지는 파티에서나 나올법한 음악은 우리의 의식을 혼란하게 만든다. 그 현장을 좋은 구도로 포착한 이들은 현장을 떠나며 말한다. ”아드레날린이 솟구친다”. 그러나 목숨을 내놓고 일하는 이들은 집단 내부에서 동료의 죽음을 맞이하자 온전히 다른 반응을 보인다. 쾌감 속에 익명의 인물들의 죽음을 담아내던 이들은 자신의 동료를 ‘그들’ 정도로 칭하자 그들도 이름을 가졌다며 분노를 표출한다. 게다가 집단의 정신적 지주격인 이의 죽음에는 절망하며 고함을 쏟아낸다. 이 순간, 이들의 음성은 음소거되어 이미지로만 비춰진다. 즉, ‘분열의 시대’라는 부제 속에 담긴 의미는 단순히 ‘내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분열의 시대‘는 이들 내부에서도 진행 중이다.
결정적인 순간은 찾아오고, 총과 카메라는 번갈아가며 보여진다. 그렇게 시선의 권력이 가진 폭력성은 상징적으로 재현된다. ’shoot’은 ‘총을 쏘다’라는 의미 뿐만 아니라, ‘사진을 촬영하다’라는 의미도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다시금 알려주는 순간이다. 그리고 찾아온 클라이막스의 이미지는 예상 가능함에도 충격적이다. 카르티에 브레송이 말했던 ‘결정적 순간’은 그순간 카메라에 담긴다.
카메라의 곁에 오랜 시간 머물러왔다. 그렇기에 그 ‘결정적 순간’을 포착했을 때의 쾌감을 안다. 불행이 만드는 스펙터클은 끔찍하며 아름답다. 그때 나도 이들과 같은 표정을 지었을까. 일찍이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폭력이나 잔혹함이 보여주는 이미지들로 뒤덮인 현대사회에서는 사람들이 타인의 고통을 일종의 스펙터클로 소비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스펙터클로 뒤덮인 사회에서 우리는 끝없이 폭력에 무뎌진다. 이는 온갖 매체들이 점점 더 폭력적인 이미지를 양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더이상 예전 같은 자극으로는 대중들은 만족하지 못한다.
이 작품의 특장점은 그러한 스펙터클을 끝없이 재현하는 것을 넘어, 그 스펙터클을 온힘을 다해 포착하는 인물들의 복잡한 심리를 여과없이 표현한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거룩한 뜻이 있다는 곳으로 나아가지 않고, 사실 우리는 스펙터클을 담아내는데 쾌감을 느낀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점이 이 작품의 장점이다. 충분히 교조적인 흐름일 될 수 있었을 것임에도, 시선의 권력과 폭력성에 대해 인정하고 직면하는 이 영화가 좋다. 그렇다면 보는 이이자 찍는 이로서 나는 어떤 스탠스를 취해야 하는가. 영원히 풀리지 않을 이 질문을 남긴 채 이 영화는 우리의 손을 떠난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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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스펙터클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2019년 4월 15일, 노트르담 대성당의 목재 지붕에 담배꽁초 하나가 떨어진다. 오래된 전선에서는 불꽃이 튀긴다. 불과 몇 시간 후, 860년 역사가 깃든 건물을 비롯해 가시면류관, 성 십자가, 십자가 못 등 가치를 헤아릴 수 없는 성유물까지 모두 불탈 위기에 처한다. 이에 상황을 파악한 파리 소방대가 노트르담 대성당으로 향한다. 그러나 교통 체증을 비롯해 여러 이유로 화재 진압은 뜻대로 진행되지 않고, 불은 점점 더 커진다.
노트르담 대성당이 불탔다
노트르담 대성당 화재 뉴스는 충격적이었다. 과장 조금 보태 천 년에 가까운 시간을 버텼던 웅장한 건물이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고, 그렇게 파리의 역사는 불탔다. 파리에서 약 9천 km 떨어진 곳에 사는 한국인도 이렇게 놀랐으니, 프랑스 사람들이 얼마나 경악했을지는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장 자크 루소 감독의 <노트르담 온 파이어>를 보면 의문이 어느 정도 해소된다. 화재 발생부터 종료 시점까지 훑으면서 노트르담 대성당 화재의 의미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특히 루소 감독의 접근법이 흥미롭다. 화재 사고 당시에는 인명 피해가 없었다. 따라서 통상적인 재난 영화처럼 특정 인물의 시점을 따라가는 드라마틱한 전개는 기대하기 어렵다.
이에 <노트르담 온 파이어>는 정면 승부를 건다. 사고 자체를 주인공으로 삼고 화재를 두 관점에서 풀어나간다. 불을 끄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소방관 이야기는 영화의 스펙터클과 장르적 쾌감을 맡는다. 노트르담 대성당 관계자와 파리 시민의 반응은 사고의 의미와 직결된다. 하지만 만족스러운 결과를 만들지는 못했다. 아쉽지만 두 마리 토끼 중 하나만 잡았다.
스펙터클은 잡았다
재난 영화의 재미를 볼거리에서 찾는다면 <노트르담 온 파이어>은 분명 성공적이다. 제48회 세자르 영화상 시각효과상 수상작다운 스펙터클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자연스러운 상황 재현이 돋보인다. 소실된 성당의 상부 부분을 CG로 만들어 낸 결과 '혹시 성당이 불에 안 탔나?' 혹은 '벌써 복원이 다 됐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뉴스 자료나 SNS 화면 등도 적극적으로 활용해 사실성을 더했다.
특정 영웅을 치켜세우는 대신 사투를 펼친 소방대원들의 모습을 세심히 묘사한 대목도 인상적이다. 계단과 발걸음 수를 세면서 검은 연기와 유독 가스로 가득한 성당에 진입하는 소방관. 호스가 꼬이고 수도관이 터져서 화재 진압에 어려움을 겪는 모습. 값어치를 매길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한 유물을 구하기 위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성당 안에서 작업하는 소방관까지. 당시의 긴박감을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한다.
적절한 강약 조절도 눈에 띈다. 파리의 악명 높은 교통 체증을 묘사한 대목이 대표적이다. 차가 움직일 줄 모르는 거리 상황 때문에 소방차는 제때 성당에 도착하기 못한다. 탄식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다. 이는 화면을 분할해서 불타는 성당과 성당을 향해 달려가는 소방대의 모습을 교차하기에 더 효과적이다. 화재를 막지 못하는 결말을 알고 있는데도, 소방대원의 답답함이 스크린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다.
노트르담, 파리, 그리고 프랑스
반면에 재난 영화의 다른 미덕에 주목할 경우 <노트르담 온 파이어>는 실패에 가깝다. 많은 재난 영화는 재난을 스펙터클로 활용하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스펙터클을 오락의 영역에 남겨두는 경우는 많지 않다. 대신 사회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메신저로 활용한다. 가상의 재난을 스크린에 투사해 공동체가 겪은 실제 재난을 마주하게 만들고, 그 과정에서 공통의 아픔과 상실을 보듬는다. 실제 재난을 다룬 영화라면 두말할 필요 없다.
<노트르담 온 파이어>는 프랑스 사람들에게, 특히 파리 시민에게 노트르담 대성당이 갖는 의미를 바탕으로 재난의 사회적 의미를 풀어나간다. 그래서 영화는 오프닝 시퀀스에서 관광 가이드의 입을 빌려 노트르담 대성당과 관련된 설명을 들려준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잔 다르크의 명예 회복 재판이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황제 대관식 등 역사적인 사건의 현장이다. 또 존재 자체로 파리의 중심이자 상징이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파리의 시테 섬 동쪽에 위치해 있는데, 시떼 섬은 파리의 발상지로 여겨지는 장소이기 때문. 실제로 시테 섬은 옛 법원 청사이자 마리 앙투아네트가 투옥됐던 교도소인 콩시에르주리(Conciergerie), 생트 샤펠(Sainte Chapelle) 성당, 헌법 재판소(Palais de Justice) 등 역사적으로 중요한 건축물로 가득하다.
노트르담 대성당의 역사와 상징성은 화재 당시 프랑스 사회의 난맥상과 겹쳐진다. 당시 프랑스는 사회적 갈등이 극심했다. 경제 상황이 악화되고 빈부격차가 심해지는 가운데 마크롱 대통령이 친기업 정책을 펼치자 프랑스 대다수 시민은 노란 조끼 시위에 참여해 반발했다. 실제로 초반부에는 시위 관련 뉴스가 삽입되어 있다.
영화는 이처럼 혼란스러운 프랑스 사회를 은연중에 불타는 노트르담 대성당에 빗댄다. 그러면서 화재 진압에 의미를 부여한다. 단순히 문화재를 지켜낸 것이 아니라 프랑스라는 공동체의 정신적 유산을 구했다고. 한 층 더 격정적인 이야기로 포장하면서 화재 사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의도는 좋았다
그런데 정작 영화는 이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정보를 알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초반부에 노트르담 대성당에 대한 지식을 알려주기는 하나 단편적이다. 종교적 맥락에 대한 설명은 부재하다. 그 결과 배경 지식이 풍부하거나 천주교 교리에 익숙한 경우가 아니라면 클라이맥스의 의미와 감흥을 온전히 이해하고 즐기기 어렵다.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파리 시민들이 노트르담 대성당 주변에 모여서 함께 성모송을 바치는 순간이다. 마지막 화재 진압 작전이 시도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때 파리 사람들이 하필이면 성모송을 외우는 데는 이유가 있다. 본래 프랑스어로 노트르담(Notre-Dame)은 성모 마리아를 뜻한다. 즉, 노트르담 대성당은 그 자체로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건축물이다. 또 승천한 성모 마리아는 프랑스의 수호성인 중 하나다.
따라서 파리 시민들이 성모송을 바치는 것은 간절함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하늘에 있을 마리아가 도와주길, 그들과 같은 마음으로 신에게 기도해 주길 바라는 것이다. 마지막 작전에 나선 소방관들이 감동에 가득 찬 표정을 짓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한국 관객은 이 감정과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어렵다. 작중 성모 마리아와 성당의 관계가 전혀 설명되지 않은 까닭이다.
그나마 있는 몇 안 되는 장면도 재난 영화의 클리셰에 가까워서 악효과를 낸다. 불을 끄기 위해 뿌린 물이 성모상에 떨어지자 그 물을 마치 성모의 눈물처럼 묘사한다. 또 어린아이가 성모상 앞에 바친 촛불이 끝내 꺼지지 않았다고 강조하기도 한다. 설명 없이 보면 그저 '신에게 기도하니 천운이 따랐다' 정도로 해석되기 충분한 대목이다.
극 영화가 아닌 다큐멘터리?
이처럼 사실적인 스펙터클과 사회적 의미 사이에서 균형을 못 잡다 보니 부차적인 문제도 생긴다. 사건 자체를 주인공으로 삼은 나머지 인물이 소외된다. 스토리를 이끄는 몇몇 인물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가 제대로 풀리지는 않는다. 단지 화재를 진압하는 과정을 투영할 도구로 활용될 뿐이다.
처음 화재에 투입된 신참 소방관 둘의 썸, 의견 차이로 갈등을 빚다가도 마지막 작전에 함께 자원하는 소방대 중사와 중령의 신뢰도 볼 수 있다. 정치인과 언론, 화재 진압 작전을 각각 나눠 책임지는 소방대 소장과 중장의 우정도 엿보인다. 모두 드라마 한 편을 충분히 만들 재료지만, 끝내 스케치에 머무른다. 그 결과 <노트르담 온 파이어>는 철저한 예방 조치만이 화재를 막을 수 있다고 말하는 평범한 다큐멘터리 같기도 하다.
따라서 <노트르담 온 파이어>는 반응이 갈릴 이유가 충분하다. 킬링 타임용 재난 블록버스터를 기대하면 나름대로 만족할 수도 있다. 노트르담 대성당 화재 사고의 다양한 비하인드를 현지인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재미도 있다. 반대로 사회성에 초점을 맞춘 진중한 재난 영화를 기대한다면 실망스러울 수도 있다.
다만 어떤 의미에서든 장 자크 아노라는 이름값에 미치지 못한 것은 분명하다. 그는 <색깔 속의 흑백>으로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불을 찾아서>로 세자르 영화상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다소 평범한 필모그래피를 이어가는 중이다. <노트르담 온 파이어>는 그 필모에 한 줄을 추가하는 듯 보인다.
Poor 형편없음
실제 사건의 무게에 압도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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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의 알몸 동영상의 유포자를 찾는 어느 한 남자의 이야기
도유빈은 친구인 공상범의 꼬드김으로 클럽에 가게 된다. 클럽은 VIP 고객으로 마련된 자리였고 술을 따라주는 여자 2명이 있었는데 술을 마신 도유빈은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집까지 도착한다. 그런데 도유빈의 알몸이 자신을 맞이했던 여자 2명에게 동영상으로 찍히고 유포가 되기 시작한다. 한편 집에서 일어난 도유빈은 자신의 약혼자인 선애가 유럽에서 돌아오자 자신이 여러 여성과 바람을 피웠다는 것을 숨기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알몸 노출 사건은 이제 시작일 뿐인데... 과연 자신에게 왜 이런 일들이 벌어졌을까? 그리고 도유빈의 과거가 어떤 사람이었길래 수치심을 느끼고 있었을까?
도유빈은 과거에 자신이 사귄 여자들과 성관계하는 동영상을 찍어서 인터넷에 배포했다.
과거에 했었던 잘못이 지금에도 계속된다면?
도유빈은 서울의 예술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자 집안 좋은 여자를 만나 잘 살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알몸 노출이 동영상으로 유포되자 그 범인을 찾게 된다. 그 범인은 수화기로 전화하며 도유빈에게 3400만원을 갖고 오라는 협박을 한다. 자신이 온갖 방법을 다 써도 범인이 잡히지 않자 경찰을 불러 조사를 하게 만들고 자신이 과거에 했었던 연인과의 성관계 동영상을 유포했다는 것을 밝힌다. 또한 그가 지나가는 여자들을 몰카로 찍은 전교 1등 학생과 자신의 조카를 매로 때리며 혼냈지만 자신에게는 늘 떳떳하지 않았고 숨겨진 성적 사생활을 약혼자인 선애에게 알리지 않는다. 그러다가 자신의 인생을 잘못된 방식으로 끌고 가는 도유빈은 결국 모든 수단을 다해 유포자를 찾는다. 그리고 이 영화는 자신의 잘못을 그저 돈으로만 해결하려고 하는 도유빈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피해자에 대한 진정한 사과가 없는 가해자의 태도를 비판한다. 약간 무거운 주제를 다루어서 그런지 심각한 스토리를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몰카 범죄에 엄격한 경고를 내리는
영화!
※씨네랩의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초대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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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좋으면 좋은 거 아니겠어?
말레피센트를 이은 여성 빌런 캐릭터를 디즈니에서 또다시 선보였다. 체감적 반응은 말레피센트보다 더 파급력이 큰 것 같다. 코로나로 인한 영화계 불황을 잠시나마 잊게 할만한 흥행과 대중의 평가가 인상적이다.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그저 패션을 앞세운 영화라고만 생각하겠지만 사실 이 영화는 상류층 사람들의 전유물이었던 예술을 대중적인 시각에서 다시 재해석한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대중문화의 등장을 화려한 옷을 매개로 자신의 욕망에 대해 솔직하게 표현하고자 하는 현대 여성들의 근원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패션은 시대정신의 반영
영화의 배경은 70년대, 영국 런던이다. 70년대의 영국을 가장 빨리 이해하려면, 한국에서 흥행한 영화 중 하나인 보헤미안 랩소디를 떠올리면 된다. 그 시절의 섹스 피스톨즈, 등 펑크 록 가수들이 영국 전역을 넘어 세계적인 인기를 구가하던 시기였다. 펑크 록이란 '누가나 할 수 있다'라는 평등주의적 "Do it yourself"라는 슬로건을 내밀며, 단순한 음악부터 다양한 음악적 시도를 했던 장르로 평가받는다. 미국에서의 펑크록은 새로운 시대, 새로운 음악을 상징하는 movement의 성격을 띄었다면, 영국에서의 펑크록은 자본가들과 노동자들 사이의 부의 차이를 견디지 못하고, 악화되고, 상류층에 대한 적대감, 계급 의식에 대한 적대감 등에 대한 표현이 적나라해졌던 상황을 고려해 영국의 상황을 비관하는 디스토피아적인 시선을 그린 음악 장르였다. 이런 펑크록의 정신은 패션에도 큰 변화를 일으키는데, 펑크록 신봉자들이 구현한 패션은 가히 모스트모던적인 패션으로 평가받을 만큼 극에 달한 자유와 그에 따른 난해함을 동반했다.
이런 영국의 시대적 상황에 따라 펑크 록이 등장했던 70년대의 영국에서는 크루엘라의 등장이 절실했는지도 모른다. 영화에서는 크루엘라와 바로네스 사이의 개인적인 서사가 존재하지만 사회적 관점에서 바로네스와 크루엘라의 대결은 상류층의 패션과 상류층을 비난하는 대중들이 구사한 포스트모던적인 패션의 대결에서 그 당시에는 포스트모던이 우위를 범하던 시기였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며, 크루엘라는 대중들이 원하는 예술을 보여준 펑크록의 정신과 맥을 같이 하는 상징적인 인물이었던 것이다. 상류층의 패션을 대변하는 바로네스를 파격적인 퍼포먼스로 골탕먹이는 크루엘라의 모습은 자유분방하게 상류층을 거리낌없이 골탕먹이고 싶은 그들의 마음을 대변한 일종의 혁명가였는지도 모른다.
빌런이 사랑받는 이유 그리고 사랑받는 빌런이란
크루엘라와 바로네스는 엄밀히 따지면 빌런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는 투명하게 착한, 신데렐라가 없다.
그렇다면, 크루엘라가 선한 쪽이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다. 바로네스와 크루엘라는 비슷한 듯 하지만 다른 인물이다. 자신의 목표를 위해서라면 나의 경쟁자를 끌어내려서라도 내 존재감을 빛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점이 그렇다. 이렇게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려면 착한 척은 내려놓아야 한다. 하지만 바로네스와 크루엘라의 차이점이 있다면, 바로네스는 정말 절대적으로 악하다못해 싸이코패스가 되어버렸지만 크루엘라는 일말의 양심은 간직하고 살아간다. 위험한 욕망을 실현하는 사람을 빌런이라고 가정한다면,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는 빌런은 인간다움을 간직한 빌런들이다. 나쁜 짓을 하고는 있지만 아직은 완벽하게 미치지 않아서 이 나쁜 짓의 근원적 이유가 이해가 가는 캐릭터들이다. 크루엘라가 그렇다. 아마도 죽은 자신의 엄마가 심어준 최소한의 사회성 덕분일 것이다. 바로네스와 크루엘라는 정말 많이 닮았지만 바로네스는 인간으로 태어나서 범해서는 안되는 선을 넘어가 몸만 인간으로 살아가는 괴물이 되었고, 크루엘라는 엄마의 존재, 친구들의 존재재만으로도 그녀에게는 큰 버팀목이 되었기 때문에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면서도 바로네스의 명성 외에는 그 어떤 해도 끼치지 않는 것으로 최소한의 양심은 지켜가면서 골탕먹인다. 그렇게 그녀가 가진 최소한의 양심은 관객들로 하여금 그녀의 위험한 욕망을 응원하게 만든다.
그녀의 삶을 통해 우리가 얻을 메시지는 뭘까. 착한 척은 버려두고, "내가 하고 싶다는데, 누가 말려"의 마인드로, 속된 말로, 개썅마이웨이로 살아가는 그녀가 항상 누군가의 눈치를 보면서, 남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유념하며 살아가는 대부분의 인간들에게 그녀의 발칙한 무례함은 오히려 시원함으로 다가왔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남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우리도 우리 자신의 소리에 귀기울이고, 자신의 욕심에 대해서 조금은 솔직해져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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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스와 보낸 여름> - ‘마지막으로 남은 공룡은 외로웠을까?’
테스와 보낸 여름
(My Extraordinary Summer with Tess)
개봉일 : 2020.09.10. (한국 기준)
감독 : 스티븐 바우터루드
출연 : 소니 코프스 판 우테렌, 조세핀 아렌센, 트에보 게리츠마, 제니퍼 호프만
‘마지막으로 남은 공룡은 외로웠을까?’
“혼자 남겨지면 어떤 기분이 들까?” 여느 때처럼 찾아온 뜨거운 여름이 끝나갈 때쯤, 소년은 한가지 걱정이 생겼다. 모든 동물과 인간은 언젠간 죽는다. 강아지도, 저기 바닷물 안에서 펄떡이고 있는 물고기도, 나도, 사랑하는 가족들도 결국 언젠간 죽을 것이다. 소년은 해변가에 구덩이를 파고 누워 언젠가 닥쳐올 이별과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소년은 몇 가지 고민을 거쳐 언젠가 다가올 외로움에 익숙해지는 연습을 하기로 결심한다. 외로움에 익숙해지면 혼자 남겨졌을 때 보다 잘 적응할 수 있을 테니까.
<테스와 보낸 여름>의 주인공인 소년 샘은 자신이 ‘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공룡’과 같은 운명이 되지 않을까 걱정하며 다른 사람에게 너무 마음을 주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가족들과 함께 온 여름휴가지만 샘은 외로움에 적응하겠다며 매일같이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 가족들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이별 후에 닥쳐올 상실감을 예방하기 위해서 말이다. 필요 이상의 마음을 주지 말자고 다짐한 소년의 마음을 단박에 이끈 건 섬에 살고 있는 소녀 ‘테스’였다.
처음 만난 소년 샘에게 다짜고짜 살사를 함께 배우자며 울타리를 열어주던 소녀는 엄마 몰래 비밀스러운 계획을 실행한다. 서로를 엉뚱하다고 말하는 샘과 테스는 의외로 쿵짝이 잘 맞는다. 둘은 어른들은 모르는 비밀을 나누며 샘의 여름휴가가 끝나기 전, 비밀의 주인공에게 모든 걸 고백하기로 한다.
샘이 테스를 만난 그 해 여름은 유난히 이상했고, 행복했고, 새로웠다. 매해 찾아오는 여름이지만 테스를 처음 만난 그 해는 샘에게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다른 향을 가진 다음 여름이, 또 다른 색을 가진 또 다음 여름이 샘과 테스에게 찾아올 것이다. 둘에게, 우리 모두에게 앞으로 더 행복한 여름만이 찾아왔으면 좋겠다. 외로움에 대해 고민할 틈조차 없는 그런 행복한 여름말이다.
테스와 보낸 여름 시놉시스
엉뚱한 소년 ‘샘’은 가족과 함께 떠난 바닷가 휴양지에서도 죽음에 대해 고민하는 중이다. 지구에 남은 마지막 공룡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상상하던 ‘샘’은 언젠가 혼자 남겨질 경우를 대비해 ‘외로움 적응 훈련’에 돌입한다.
그런데 섬에서 만난 소녀 ‘테스’로 인해 계획에 차질이 생기기 시작한다. 첫 만남에 다짜고짜 살사 춤을 추자고 하는 더 엉뚱한 소녀 ‘테스’는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행동으로 ‘샘’을 놀라게 한다. 그러던 중 어른들은 모르는 ‘테스’의 비밀스러운 계획을 알게 된 ‘샘’은 이에 동참하게 되는데… 얼마 남지 않은 여름의 끝, 그전에 미션을 수행해야 한다!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너 살사 출 줄 알아?”
여름휴가 첫날, 샘은 해변에 구덩이를 파고 누워 언젠가 닥쳐올 가족들의 죽음과 남겨질 자신의 외로움에 대해 생각한다. 고민을 거듭하며 잡히지 않을 연을 향해 손을 뻗던 샘은 밝게 자신을 부르는 아빠의 목소리에 몸을 일으킨다. 좀 전까지 무거운 고민을 했지만 아이는 아이인 건지, 금방 아빠, 형과 어울려 해변을 뛰어다닌다. 한참 재밌어지려는 찰나, 형 요러가 샘이 누워있던 구덩이에 빠져 발목을 다친다.
요러는 샘 때문에 다쳤다고 짜증을 내고 샘은 구덩이를 못 본 형이 잘못이라며 티격태격한다. 병원에 도착한 세 부자는 진찰을 기다린다. 아빠는 툭하면 투닥이는 두 아들을 잠시 떼어놓기 위해 샘을 밖으로 내보낸다. 샘은 자신이 좋아하는 생선튀김을 사고 아빠와 형을 기다리며 목적지 없이 이리저리 걷고 있다.
마을을 구경하며 걷던 중 우연히 눈을 마주친 소녀 테스는 처음 본 샘에게 살사를 출 줄 아냐고 묻더니, 함께 배우자며 울타리를 열고 샘을 마당 안으로 이끈다. 뜬금없이 ‘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았던 공룡의 외로움’에 대해 고민하던 샘도 엉뚱하지만, 갑자기 함께 살사를 배우자며 처음 본 소년을 마당으로 끌고 들어오는 테스도 보통 엉뚱한 아이는 아닌듯하다.
“나중에 혼자 남겨지면 어떤 기분이 들까?”
샘은 테스를 만난 순간, 좀 전까지 고민했던 ‘마지막 공룡의 외로움’은 완전히 잊어버린다. 엉뚱하지만 밝은 소녀와 영상을 보며 살사를 추는 시간이 그저 즐겁다. 하지만 테스가 샘을 길가에 내려둔 채 홀로 쌩-가버린 저녁, 샘은 다시 외로움에 대해 생각한다. 저녁까지 함께 살사를 배워야 한다고 해놓고, 손님과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쌩하니 가버리다니. 샘은 테스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다가 한순간에 혼자가 돼버린 저녁. 샘은 외롭지 않기 위해 외로움 적응 훈련을 시작한다.
여행객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 조용한 해변, 파도에 쓸려온 물건들을 주워 만든 샘만의 훈련 장소가 만들어진다. 대화를 나눌 사람도 없고, 지나가는 사람도 없다. 샘은 완전한 외로움을 느끼며 그것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한다. 눈앞에서 갑자기 사라져버린 테스와 언젠가 사라질 가족들을 생각하면서 2시간을 견딘다. 2시간, 4시간, 6시간, 8시간, 10시간. 샘은 이번 여름휴가가 끝날 때쯤 외로움에 익숙해지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듯하다. 샘은 소중한 사람들과의 추억을 저-멀리 밀어놓고 조금씩 벽을 쌓아가고 있었다.
‘외로움에 익숙해지기!’라는 샘의 여름휴가 목표가 바뀌게 된 건 테스의 비밀 계획을 알고 나서부터였다. 테스가 피크닉을 준비한 날, 샘은 테스가 자신이 아닌 휘호와 피크닉을 가고 싶어 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테스와 다른 방향의 길을 타고 숙소로 돌아온다. ‘나는 테스를 좋아하지만, 테스는 내가 아닌 휘호를 좋아하고 있다.’고 단단히 오해하고 있던 샘에게 테스가 먼저 다가온다. “휘호는 우리 아빠야.” 테스가 숨겨왔던 비밀을 고백하던 날, 샘의 아지트는 사라졌고, 여름휴가의 목표도 바뀌게 된다.
엄마의 여행수첩에 남은 이름을 단서 삼아 아빠 휘호를 찾아낸 테스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빠가 어떤 인물인지 알아내기 위해 휘호와 앨리서를 별장으로 초대한다. 샘과 테스는 휘호에 대해 알기 위해 퀴즈게임을 준비하고, 두 사람의 반응을 살핀다. 테스는 처음으로 아빠와 이야기를 나누고, 어깨동무를 해본다.
5752일(11년)의 시간. 테스는 아빠와 함께 만든 추억이 없었다. 그에 반해 샘은 네 가족이 함께 살았기에 자연스레 아빠, 엄마, 형과의 추억을 쌓아온 아이였다. 그래서인지 샘은 자신이 겪어보지 못한 ‘외로움’에 대해 걱정하고, 어쩌면 테스가 아빠를 모르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아빠’라는 소중한 사람이 생기면 그 이후에 따라올 슬픔과 외로움을 한 번 더 견뎌야 하니까.
“아이가 없어서 다행이다”라는 휘호의 말에 충격을 받은 테스가 집으로 뛰어가고 여름휴가의 마지막 날이 온다. 샘은 엄마 아빠의 걱정과 꾸지람을 뒤로하고 다시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 갯벌에 발을 묻고 외로움에 대해 한참을 생각하던 샘은 자신의 발이 뻘에 깊이 묻혔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해 위험한 순간을 맞이한다.
“현재는 미래를 준비하는 시간이다.”
“현재는 미래를 준비하는 시간이다.” 병원 벽에 걸려있던 그림에 적혀있던 문장이다. 마지막으로 남을 미래와 외로움을 걱정하던 샘은 가장 소중한 현재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현재를 소중히 여기며 미래를 준비하기보단, 언젠가 닥쳐올 외로움에 면역력을 키우기 위해 현재의 외로움을 택한 것이다.
현재를 소중히 여기지 못하고 있던 샘에게 새로운 가르침을 준 건 힐러 할아버지였다. 뻘에 발이 묻힌 샘을 구해준 할아버지는 샘에게 이별과 인생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심어준다. 이별 또한 우리들의 삶이며 인생이고, 혼자 남겨지는 것을 걱정하기보단 소중한 사람들과의 추억을 모으라는 할아버지의 말. 가장 사랑하는 존재인 아내와 이별을 겪은 그의 말엔 홀로 남겨진 슬픔과 추억을 되짚는 사람의 웃음이 함께 담겨있는 듯하다.
“최대한 많은 추억을 모으거라”
힐러 할아버지가 샘에게 건넨 한마디가 이 이야기의 중심을 한순간에 관통한다. 스티븐 바우터루드 감독은 힐러 할아버지를 통해 이 영화를 보고 있는 수많은 관객들에게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있는 현재의 소중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새로운 추억 만드는 건 어떠세요?”
휘호에게는 딸이, 테스에게는 아빠가 생겼다. 5752일이라는 시간 동안 서로를 모르고 있었던 아빠와 딸은 이제 새로운 추억을 쌓기 시작한다. 샘은 홀로 살고 있는 힐러 할아버지를 파티에 초대해 함께 새로운 추억을 만든다. 샘의 그 해 여름휴가는 가장 이상한 최고의 일주일이었다. 미래를 걱정하며 현재의 소중함과 추억을 놓치고 있던 소년은 이제 걱정 없이 추억을 쌓기 시작한다.
사랑스러운 빛깔로 물든 샘의 그 해 여름 위에 다음 여름의 추억이, 또 다른 계절이 쌓이고 그 추억들은 언젠가 다가올 외로움과 슬픔을 이길 수 있는 힘이 되어줄 것이다. 순수하고 엉뚱한 소년 소녀의 상상과 계획으로 가득했던 여름의 끝자락 이야기 <테스와 보낸 여름>. 정말 한없이 사랑스럽고 무해한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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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먹고 마시고 떠나라…하나가 될 테니
왓챠 오리지널 예능 <조인 마이 테이블>(6부작)에는 만나서 주로 먹고 마시고 구경하고 이야기 나누는 장면이 이어진다. 그게 전부인데 예사롭지 않다. 그 발걸음을 하나씩 따라가다 보면 깨닫게 된다. 우리 사회에 가려져 있는 다양한 국가의 이웃과 가족들이 대한민국 곳곳에 뿌리를 깊게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바로 이주민들의 이야기이다.
이주민들은 대한민국의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그들은 왜 한국에 정착하게 됐을까. 대학 사제 간인 이금희 아나운서와 <대도시의 사랑법> <1차원이 되고 싶어> 등의 책을 쓴 박상영 작가가 진행자이자 관찰자로 나섰다. 이주민들이 각자 한국에 오게 된 사연, 자신들의 인생 음식을 담은 초대장을 받은 둘은 해당 이주민이 사는 지역을 여행하고 음식을 맛본다.
1화는 예멘 난민으로 2018년 제주에 정착한 이스마일씨가 주인공. 그는 이주민가정지원센터에서 난민을 돕는 일을 하고 있다. 고향의 맛이 그리울 때는 예멘 식당에서 파흐샤(양고기와 야채가 들어간 찌개)를 먹는다. 이스마일의 초대장을 받은 둘은 제주 무사책방에서 만나 여행을 시작한다.
그저 걷고 보는 여행이 아니다. 둘은 방문한 지역의 역사성을 짚어내며 동시에 이주민의 고향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나눈다. 커피하우스에서 예멘 커피를 마시면서 2018년 자국 내전 때문에 500여 명의 예멘 난민들이 제주에 온 이야기를 꺼낸다. 박 작가가 "(예멘이) 단지 아랍국가라는 정보만 있으니까… 특히 예멘에 대해 사람들이 격렬했던 반응은 잘 몰라서, 우리가 아랍에 가진 선입견이나 알지 못하는 무지에서 오는 공포가 컸던 것 같다"고 하자 이 아나운서는 "두렵기 때문에 배타적으로, 인간의 최우선적 목표는 생명과 안전이기 때문에…"라고 말한다.
당시 예멘 난민에 대해 환영하는 의견도 컸지만 받아들일 수 없다는 배타적인 시선도 많이 있었다. 둘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또 당시 예멘인들이 스마트폰을 소지하고 있었던 것이 논란이 된 일을 박 작가는 "난민에게 정보만큼 중요한 게 없다. 무전기처럼 생명줄인 것"이라고 잡아준다. 팩트체킹인 셈이다.
온평리 포구를 거닐면서는 제주 고, 양, 부씨의 시조인 삼신과 바다 너머 벽랑국에서 온 세 공주의 혼인 실화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 이 아나운서가 "국제결혼의 시초?"라고 하자 박 작가는 "사실은 이미 우리 가정들이 다문화 가정"이라며 "(자신의) 충청도 어머니와 경상도 아버지가 다문화가정을 이루고 있다. (둘은) 같은 문화권이라고 볼 수 없다"라며 웃는다.
바로 여기에 <조인 마이 테이블>이 지향하는 시선이 담겨 있다. 태초에 인류가 탄생했을 때부터 수 없는 교류를 하고 만남을 주고받은 우리들이 결국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국가와 피부색과 언어와 생각은 다르더라도 우린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라는 것을. 그렇기에 국가 경계 너머의 누군가를 단순한 몇 갈래의 시선과 선으로 감히 나눌 수 없다는 것을. 진짜 중요한 건 서로 존중해야 하는 인간의 존엄성과 포용력이라는 것을 이 예능은 조용히 역설한다. 그동안 여러 매체에서 몇 가지의 뉴스와 사건들로만 비쳤을 이주민들의 진짜 이야기가 이 예능을 통해 빛을 낸다.
2화에서는 박 작가가 국내 최대 이주민 밀집 지역인 안산에서 다양한 외국어 간판이 가득한 거리를 걸으며 "글로벌에 와 있네요"라고 말한다. 3화에서는 이 아나운서가 BTS(방탄소년단)가 미국에서 상을 받으며 수상소감을 한국어로 한 사실을 전하며 "미국 본토잖아. 미국 사람들이 주로 (방송을) 보는 건데 자연스럽게 한국어로 이야기하는 거야. 이제는 그런 시대인 거지"라고 한다. 세심한 관찰로 하나하나 살펴볼수록 우리는 오래전부터 이미 섞여 있었다.자칫 다큐멘터리처럼만 흘러갈 수 있었던 이 예능의 균형을 잡아주는 건 맛있는 음식 덕택이다. 보글보글 뚝배기에서 끓는 파흐샤, 프라이팬 기름에 척척 볶아진 나시고랭(동남아식 볶음밥), 활활 타오르는 불 속에서 몇 시간이나 푹 구워진 바비큐의 탐나는 비주얼과 침 고이게 하는 사운드는 이 예능을 보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1화에서 파흐샤를 먹던 이 아나운서는 방송 끝에 이렇게 말한다. "평화는 다른 게 아니고 음식이고 사랑이야. 음식하고 사랑만 있으면 평화야" 딱 한 마디로 정리해주는, 모두에게 필요한 감수성이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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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적 장치를 빌린 인간의 이중성을 다룬 영화 <도그빌>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가장 눈에 띄었던 점은 세트 였다. 항상 영화를 볼 때 장소가 바뀌고 실제 현실 에 있는 장소 같은 세트의 영화만 보다가 연극처럼 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이 영화 속에서 진행 되기 때문에 어색하기도 했다. 영화 초반부에서는 이 공간이 어색해서 뒷부분에 이 곳을 빠져나와서 다른 장소가 나오길 기대하기도 했다. 근데 영화를 보다 보니 이 세트에 익숙해져 갔고 영화의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공간 마다 경계를 나누는 벽이 없어서 감시 하는 느낌이 들기도 하였고 앞 뒤가 다 막혀 있어서 답답한 느낌을 극대화 한 것 처럼 보였다.
그레이스가 자신이 속해 있던 갱을 떠나 착하게 살기 위해 혹은 평화로움을 꿈꾸고 도그빌로 도망쳐왔지만 도그빌도 겉으로는 평화로우면 모든걸 회의로 정하는 민주적인 마을 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서의 다시 약자와 강자가 나뉘어지고 젊은 여성은 또 눈요기거리가 되고 만다. 착하고 고분고분한 그레이스가 어느 순간 무시를 당하는 존재로 전락 하게 된다.이런 그레이스가 불쌍해보이기도 하였고, 왜 반발을 하지 않는지 답답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또 누구나 자신보다 만만해 보이는 상대가 있으면 우위를 점할려고 하고 항상 새로운 약자를 찾아 자신의 우월감을 채우려는 것이 추한 인간들의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그레이스가 성폭행을 당하고 누워있는 장면이 특히 이 세트의 특성이 잘 보였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그레이스는 도그빌 주민에게 성폭행을 당하는데 옆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지나 다닌다. 천장에서 이 세트를 비추었을 때, 그레이스가 굉장히 작고 약자처럼 보였다. 도그빌 주민들의 입장에선 방이 다 나누어져 있어서 보이지 않는 공간이겠지만 내가 보는 입장에서는 한쪽은 성범죄를 당하고 있고 한쪽은 아무렇지 않게 할 일을 하고 있는게 소름이 끼치기도 했다. 이 마을 주민들의 이중성을 보여주었다고 느껴졌다.
도그빌 주민 중에서 가장 오만하다고 느껴진 캐릭터는 톰이었다. 자신이 철학자,지식인인 척하고 그레이스를 위해 도와줄 것 행동 하더니 배신을 때린다. 그리고 마지막 죽기 전까지 소설 에다가 써도 되지? 라고 하는 모습이 허울뿐인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줬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에 그레이스가 톰을 쏘는 장면이 가장 통쾌하기도 하였지만, 그레이스가 다시 갱으로 들어가서 어떤 삶을 살게 될지 걱정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왜 제목이 계속 도그빌일까 궁금 했는데 마지막에 개와 같이 목줄을 찬 그레이스와 유일한 동물인 ‘모세’만 살아 남은 것과 마지막에 개만 살아남은 것을 보고 도그빌이라고 이름을 지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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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안나라수마나라> 티저 예고편
“당신… 마술을 믿습니까?” 미스터리 마술사의 환상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판타지 뮤직 드라마 《안나라수마나라》 5월 6일 오직 넷플릭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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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웨이브 <더 써드 데이> 공식 예고편
샘이 위험에 처한 여자아이를 구한 후, 아이를 데려다주기 위해 어딘지 불길한 오시 섬으로 들어가게 된다. 오시 섬의 주민들은 마을 축제를 준비 중이고, 샘은 이곳에서 빠져나가는 것에 어려움을 겪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