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드레2022-10-21 14:43:43
나를 사랑하는 것만큼 당신을 사랑했더라면.
영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리뷰
나를 사랑하는 것만큼 당신을 사랑했더라면 사랑이라는 단어가 최악의 다른 말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수많은 선택 속에서도 또 다른 선택을 하는 율리에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그의 이상향과 사랑은 빠져들었다고 생각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이루어진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에는 많은 문제에도 포기하지 않는 성격과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실제가 아닌 정신과 감정을 좇던 율리에는 사람 자체를 담는 일을 선택하게 되고 그와 동시에 사랑에 빠진다. 무엇이든 해내며 끊임없이 변화를 마주하는 율리에 와 그를 아우르고 있는 사랑이라는 감정은 그로 하여금 최악의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에 큰 힘을 싣는다. 좀 더 나은 무언가를 위해 기다리고 있는 한 여자와 그에게 없어서는 안 될 사랑은 왜 그에게 있어서 최악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율리에는 정착하지 못한 채 지나간 시간 앞에서 더욱 혼란스러워한다. 편안함 앞에서 족쇄를 느끼기도 하고 낯섦에서 자유를 느끼며 또 다른 선택을 한다. 율리에는 현재의 감정과 지금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감정으로 남겨두어야 하는 것들을 남겨둔 채 세상이 멈춘 것처럼 끊임없이 달린다. 그렇게 도착한 사람과 사랑 앞에서 망설이지 않고 나아가는 모습이 놀라우면서 동시에 부러웠다. 도저히 쉽지 않은 그 선택은 자신을 위해, 자신에 의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인생에서 겪을 수 있는 것 중에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 얼마 없기에 더더욱 그랬다. 현실을 생각하면 과거와 현재를 제쳐두며 현재에 집중하는 삶을 선택할 수 없었을 텐데 그는 온몸으로 혼란에 부딪힌다.
그가 지나쳤던 것들에 의해 다시 배우기도 하고 끊임없이 질문하며 나아가고 생각으로 그치지 않는 행동은 일련의 과정들을 거쳐 자신의 본질을 찾아간다. 받아들이는 의연함과 현재에서 비롯된 미래를 잃었을 때, 찾아오는 감정이 내가 사라지면 내가 기억하는 너도 사라질 거라는 말로 남는다는 것도 그가 했던 만남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가 했던 선택이 결코 쓸모없는 행위가 아녔음을 방증한다. 수많은 사람이 사랑하고 후회하면서도 끊임없이 사랑하는 이유인가 보다.하지만 그 사랑에도 끝은 존재한다. 영원할 것 같았던 사람들이 흩어져 사라지고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순간을 마주한다. 사랑할 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고 최악이었던 내가 보였다. 사랑할 땐 최악이 되었던 '나'는 '나'를 사랑하기에 더 최악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수많은 챕터를 넘기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가 했던 선택과 사랑은 그저 치기 어린 것에 불과했을지도 모르나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는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겐 욕심, 누군가에겐 상처였던 율리에의 사랑은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가며 진정으로 원하던 사랑을 맞이한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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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드리 감독의 세상만사 솔루션 4
공드리 감독이 제시하는 세상만사 솔루션을 소개합니다.
기발한 상상력으로세계가 인정한 천재 감독과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감독을 동시에 해내는 주인공 ‘마크’를 통해
미셸 공드리의 창작 노트를 엿볼 수 있는 작품
<공드리의 솔루션북>이 오늘 개봉했습니다
극장에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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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액션 영화의 공식을 담았다. 감상 끝
그리스에서 한 기자가 살해되었다.
언론은 이 일을 CIA가 벌인 일로 몰아가고 있었고, 현장 증거도 꽤나 그럴싸해 CIA가 범인으로 되어가고 있었다.
위기를 느낀 CIA는 그들이 버린 카드인 전직 요원 스티브 베일을 다시 기용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는 CIA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것도 달가워하지 않으면서도 이 일을 받는다.
함께 임무를 수행할 케이트도 함께 동행하지만 이 남자, 뭔가 감추는 것 같고, 수상하다.
그를 향한 케이트의 의심은 커져 가는데.....
1. 이 리뷰는 액션에 대한 리뷰가 아닙니다.
고백하자면 나는 액션영화를 보고 액션이 좋았는지를 이야기할 수 없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액션 영화를 보려 가서 액션 장면은 전부 눈 감거나 다른 곳을 보면서 허공을 응시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아무리 픽션일지언정 유혈사태를 보고 정신이 온전할 자신이 없다.
그런 사람이 액션 영화에 대한 리뷰를 한다니, 어불성설이긴 하지만
그래서 이번 리뷰에는 액션에 대한 어떠한 상세한 리뷰도 없다.
정말 죄송하다.
그래서 이번 리뷰는 다분히 캐릭터들에 대한 이야기뿐일 것이다.
2. 전형적인 미국 친화적인 영웅의 등장
순전히 나의 의견이긴 하지만 다분히 미국적인 히어로물의 몇 가지 공식이 있다고 생각한다.
1. 과묵하고 마이웨이 성향이긴 하지만 임무 하나는 끝내주게 하는 굉장한 남성성을 소유한 요원 (아무래도 첩보요원이니 남성성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해주자)
2. 생각보다 낭만을 꽤나 중요하게 여겨서 자신만의 문화적인 취미가 하나씩은 있다.
3. 꽤나 로맨티시스트인 경우가 많다. (언제나 굳이? 라고 생각이 드는 부분이다. 주절주절)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헐리웃 영화의 히어로들은 대충 이 요소들 하나는 해당되지 않을까.
'브릭레이어' 속 스티브 베일도 전형적인 이런 요소들을 모두 갖춘 캐릭터이다. 내가 없으면 일이 되지 않는다는 근거없는 자신감 하며, 또 그 말을 제대로 이행하는 상남자적 바이브 하며, 그 와중에 음악을 사랑하는 낭만도 놓치지 않는 그런 사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메인 빌런인 라덱과의 유대가 있었던 것이 중간중간 보이는 것으로 보아
그가 라덱의 죽음 혹은 실종에 아주 중요한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었다. 그냥 대충 봐도 그건 알 수 있게 된다.
다분히 공식에 충실해서 캐릭터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느껴진다.
그런데 문제가 없는 것이 문제다.
그런데 액션물은 히어로가 얼마나 멋있는지, 그에 따라 소위 뻑이 가게 되는지에 승패가 갈린다고 생각하는데, 베일은 충분히 멋있지만 그 정도 멋있는 영웅들은 충분히 많이 생각이 나는 것을 보아 다른 영웅들과의 차별화에는 어떤 것이 있을지는 아직 나의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것이 없다.
예를 들어, 데드풀의 경우 앞의 모든 요소들을 충족하지만 단 한 가지를 위배했는데, 과묵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입을 그렇게 잘 놀릴 수가 없었다.
토니 스타크 또한 그도 그렇게 과묵하진 않았었다. TMI가 많았던 히어로라고나 할까.
이 공식들에 하나는 위배되어야 사람들이 캐릭터적으로 신선하다고 느낄 텐데, 이 베일 양반은 클리셰 영웅이셨던 것 같다.
분명히 멋있고, 액션도 시원한 편인 것 같은데 그 다음의 장면들이 예상 가능하다.
분명히 멋있는데, 어떤 사람들이 계속 생각난다. 예를 들면 토니 스타크... 예를 들면 슈퍼맨 기타등등...
3. 여성 캐릭터들의 클리셰
이 영화들에 나오는 여성 캐릭터들도 굉장히 예상 가능한 캐릭터들이다.
CIA 중 믿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와중에 그리스 지부장은 믿는 것을 보며 '아, 이 분은 전여친이구나'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처음에 케이트와는 혐관인 것을 보면서 '아, 케이트와는 로맨스가 생기겠구나'라는 느낌이 오게 된다.
그리고 이런 나의 예상은 대체로 맞아 떨어졌다. 여성 캐릭터들을 주인공의 조력자이기도 하지만 로맨스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존재로 그려내어 아쉽다.
액션 영화와 로맨스 영화는 만드는 데 있어 참 어려운 장르라고 생각한다.
액션 장르 또한 워낙 명작도 많고 하다보니 차별화를 둘 수 있는 지점이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의 눈도 많이 높아져 웬만큼의 멋있음과 액션 그리고 캐릭터성만으로는 대중들을 사로잡긴 힘들어져 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만드는 사람들의 고충도 깊어지겠지.
쓰다가 딴 길로 새긴 하는데, 그런 점에서 참 액션의 퀄이 다소 촌스러울 수는 있으나
서사나 캐릭터성으로 봤을 때에는 00년대의 감성을 현 시대 액션 영화들이 따라잡지 못하는 것 같다고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미스터 앤 미세스 스미스도 그렇고, 원티드도 그렇고.....
그 시절의 액션 영화들이 훨씬 센세이션했었던 것만 같다. 그래서 여러 국가에서 양산되는 새로운 액션 영화를 볼 바에는 이런 과거의 액션들을 내용을 다 알면서도 계속 N차 관람하는 것이 더 재밌는 것 같다.
4. 반가운 배우와의 만남
뭔가 전부 다 디스만 한 것 같은데
오래간만에 반가운 배우를 만나서 그저 반가웠다.
물론 새로운 배우를 알아가는 것도 흥미로운 과정이지만
이미 알고 있지만 소식을 잘 모르던 배우가 아직 건재하다는 사실을 다시 알게 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아론 에크하트 배우는 나에게 있어 '다크나이트'에서 깊은 인상을 주었던 배우이고
어렸을 때 몇 가지 영화를 통해 활발히 활동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던 배우인데
간만에 보게 되는 것도 반갑지만 무려 적지 않은 나이일 텐데 중후한 액션 스타의 모습으로 보니 더 반가웠던 것 같다.
추억의 배우가 아직도 활발히 활동하는 것을 보면서 내심 기뻤던 것 같다.
그가 나의 가족도 아니고 그렇게 덕질하던 배우도 아니면서 유난인가 싶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의 활동을 응원한다.
이 영화는 그렇게 잘 못 만들었다고 할 만한 영화까지는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인생 영화가 될만큼
잘 만든 액션 서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액션 자체에 대해서는 내가 할 말이 없어 액션 서사라고 표현해본다.) 나는 액션 영화를 너무 좋아한다 싶은 분들이 있다면 킬링타임용으로는 나쁘지 않을 것 같다.
*해당 시사회는 씨네랩 크리에이터 자격으로 참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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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한 시선으로 특별하지 않음을 말하다.
<디어 에반 한센(Dear Evan Hansen)>, <나, 다니엘 브레이크>, <말아톤>, <7번방의 선물>과 같이 장애를 겪고 있는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 영화는 비록 상업영화에 비해 현저히 적은 수이기는 하지만, 국내외 영화계에 꾸준히 등장하고 있다. 앞서 예시를 든 영화들처럼, 장애와 같은 사회적 약자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들은 흔히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 놓인 인물을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해당 인물이 어려움과 고난을 겪게 되는 모습을 통해 ‘사회적 약자인 주인공의 고난→ 조력자 혹은 특정 사건과 만남→ 주인공의 극복/ 희망’과 같은 클리셰를 사용해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러한 영화의 전개는 관객에게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혹은 상상해보지 못한 상황을 이해하고, 몰입해볼 기회를 제공하며, 영화에서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인물에 대한 이해와 통찰을 강화한다. 그러나 이러한 진행방식은 영화의 전반을 중심인물을 중심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어, 때로는 영화의 중심인물이 아닌 주변 인물들이나 그들이 겪는 사건, 영화 전반에 걸쳐 숨겨져 있는 의도와 영화의 주제에 대한 이해도와 관심도를 하락시킨다는 단점을 보이기도 하며 ‘주인공의 고난과 극복’이라는 전형적이고 반복적인 클리셰에 관객이 흥미를 잃게 될 가능성 또한 있다. 이런 ‘사회적 약자’라는 같은 소재를 가진 영화들의 어떤 공통적인 이야기 전개 방식 속에서 영화 <나는 보리>가 갖는 시선은 특별하다. <나는 보리>는 농인을 바라본다. 소수가 아닌 다수로서, 장애인 가족이 아닌, 비장애인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한 가족으로서,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소통하는 존재로서, 그리고 농인과 청인을 다르지 않은 시선에서 말이다.
1. 경계를 허무는 시선
‘코다(CODA:Child Of Deaf Adult)’는 농인인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난 청인 자녀를 뜻하는 용어로, 2020년에 개봉한 김진유 감독의 <나는 보리>는 ‘코다(CODA)’인 소녀 ‘보리’의 일상과 그런 보리를 통해 바라보는 세상을 담은 영화이다. 김진유 감독은 실제 농인인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난 ‘코다(CODA)’로, 영화<나는 보리>는 김진유 감독의 유년기를 바탕으로 한 자전적인 이야기로부터 시작되었다. 때문에 <나는 보리>의 주인공이자, ‘코다(CODA)’인 소녀 보리는 김진유 감독의 어린 시절이 투영되어있는 인물이라고도 볼 수 있다. <나는 보리>의 주인공인 11살 ‘보리’는 어린 시절 김진유 감독처럼 농인인 부모님을 대신해 은행 업무를 보고, 음식을 주문하고, 물건을 구매하는 등 주로 가정 내에서 아이보다는 어른들이 하게 되는 일들을 도맡아 한다. 영화 속 “나는 누나 귀 안 들리는 거 싫어. 치킨 못 먹어.”라는 농인 동생 정우의 대사를 통해서, 아침에 혼자 알람을 듣고 일어나 가족들을 깨우고 등교하는 보리의 모습을 통해서, 보리가 “내일 할아버지 집에 갈거야.”라는 갑작스러운 엄마의 말에도 따라나서 엄마와 동생의 몫까지 기차표를 구매하고, 택시 앞자리에 탑승해 길을 안내하고, 수어를 사용하지 못하는 할아버지와 농인인 엄마 사이에서 수화를 통역해주는 장면을 통해서 보리의 가족들이 생활의 얼마나 많은 부분을 보리에게 맡기고 의지하고 있으며, 보리가 가족들 사이에서 어떠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을지 짐작해볼 수 있다. 그렇지만 영화는 보리가 이러한 책임들을 도맡음으로써 결코 불행하다거나 힘겹다거나, 가족들이 보리에게 과도하게 의존하여 보리가 없이는 아예 생활이 불가능하다는 식으로 묘사하지는 않는다. 분명히 불리하고 힘든 요소를 지니고 있음에도 영화에서 보리네 가족은 따스함과 서로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넘치는 화목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어떻게 보면 가족 구성원 내에 농인이 없는 일반 가정보다 더욱 화목한 모습으로 말이다. 이는 은정이가 자신의 부모님은 항상 바쁘고 매번 걸려오는 전화와 부모님의 심부름은 다 자신의 몫이라고 투덜대며 보리를 부러워하는 장면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이렇게 화목하고 따뜻한 가족의 묘사는 농인인 부모님과 청인인 자녀로 구성되었지만, 보통의 가족들처럼 따뜻하고 화목했던 김진유 감독의 가정환경이 반영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렇게 화목한 가족 내에서도 왠지 모르는 소외감을 느끼는 인물이 있는데, 바로 ‘보리’이다. 들리지 않는 부모님 혹은 동생 정우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다수에 속하는 청인 ‘보리’ 말이다. 이러한 설정은 <나는 보리>가 농인의 문화와 세상을 특별하지 않게 바라봄으로써 가지는 미덕을 돋보이게 해준다. 보리는 가족들 사이에서 생활하며 느끼는 알 수 없는 소외감에 매일 아침, 자신도 부모님과 동생처럼 소리를 듣지 못하게 해달라는 소원을 빌기도 하며, 심지어는 소리를 잃기 위해 MP3를 최대 음량으로 키워 이어폰을 귀에 바짝 꽂은 채 음악을 듣거나 물에 귀를 자주 담그면 청력이 감퇴한다는 TV 속 해녀의 인터뷰를 보고 직접 바다에 뛰어들기도 한다. 이러한 보리의 행동과 소외감은 일반 청인 관객들이 보기에 이질적이고 쉽게 공감할 수 없으며 한편으로는 충격적이라는 평가도 받는다. 그러나 이런 보리의 심리와 행동, 영화의 설정이 <나는 보리>의 진정한 가치를 드러낸다.
가족 내 유일하게 들을 수 있는 존재로서, 사회적으로 우리가 흔히 다수라 말하는 청인에 속함에도 보리가 농인으로 사는 삶을 원하는 모습을 통해 <나는 보리>는 장애인은 약자, 청인은 일반인이라고 흔히 우리가 말하는 이분법적 사고와 농인의 삶을 남다르게 바라보고 불편할 것이라 섣불리 동정하는 우리의 선입견을 깨트려주기 때문이다. <나는 보리>에는 농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특별하지 않기를 바라는, 있는 그대로의 농인을 보여주고 싶은 감독의 의도가 그대로 드러난다. 앞서 말했듯, 보리는 물품을 구매하고, 음식을 주문하고, 은행 업무를 보는 등 흔히 보호자가 해줄 법한 일들을 모두 맡아 하는데, 이렇게 가족들의 생활편의를 도울 뿐 아니라 보리는 사회로부터 가족들을 보호하기도 한다. 이는 보리가 동생 정우의 축구경기 출전과 엄마와 함께 옷을 사는 장면을 통해 알 수 있다. 동생 정우 역시 농인인데, 정우는 축구 실력이 뛰어남에도 귀가 들리지 않아 경기 수행이 어려울 것이라는 이유로 출전선수가 아닌 후보 선수로 지목된다. 이에 정우가 후보선수라는 것을 알게 된 보리는 이장님인 아버지를 둔 친구 은정이를 통해 정우가 축구경기에 출전할 수 있도록 돕는다. 또한, 보리가 엄마와 단둘이 옷가게를 방문한 장면에서 보리는 옷가게의 직원들이 자신과 엄마가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이유로 무시와 비하를 서슴지 않고, 옷 가격 또한 원가보다 높게 책정해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이후 보리는 잘못된 거스름돈을 점원에게 돌려주며 엄마에게 부당한 대우를 하는 모습을 목격했고, 자신은 들리지 않는 척하고 있었을 뿐 사실은 우리에게 어떤 행동과 말을 했는지 다 보고 들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표현한다. 이렇게 보리는 가족의 도우미와 더불어 보호자의 역할도 소화한다.
그렇다면 청인인 보리는 다른 이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을까? 가족들의 도움 없이도 모두 스스로 잘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보리가 가족을 돕듯, 보리 또한 가족의 도움과 관심, 사랑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은 영화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보리는 불꽃놀이를 보러 가족과 함께 시장에 나가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중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부모님의 손을 놓친다. 안내방송을 해도, 전화를 걸어도 들을 수 없는 부모님과 동생이기에 이들을 찾을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 보리는 막막하기만 하다. 이 순간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내내 밝고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던 보리는 처음으로 11살 제 나이 또래처럼 어린아이 같은 울음을 터뜨린다. 영화는 이렇게 가족 내에서 보호자의 역할을 하는 보리 또한 가족들의 보살핌과 도움이 필요하며, 우리가 사회적 약자라고 생각하는 농인도 도움을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큰 힘과 도움이 되어 주는 존재라는 걸 알려준다. 다음 소주제에서 더 언급하겠지만, <나는 보리>와 유사한 작품으로 미국에서 개봉한 <코다>라는 음악 영화가 있는데, 이 작품에서도 ‘코다(CODA)’인 주인공 소녀가 “지금까지 가족 없이 뭘 해본 적이 없어요.”라며 망설이는 모습을 통해 <나는 보리>와 마찬가지로 평소에는 자신이 가족들을 도와야 하지만 역으로 자신도 가족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걸 보여준다. 이렇게 영화 속에서는 청인과 농인이 모두 도움이 필요한 존재이기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만큼 강한 존재이기도 함을 보여주는데, 결국 <나는 보리>가 이야기하는 바는 이러한 영화의 장면들과 보리의 아빠가 보리에게 반복해서 뱉는 말을 통해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들리든, 들리지 않든 우린 똑같아.” <나는 보리>가 바라보는 청인과 농인은 연약한 존재이자 때론 강한 존재로서 장애의 유무와 관계없이 그저 똑같은 한 사람일 뿐이다.
2. 다르고도 같은 소녀들– 영화 <코다>의 루비, <나는 보리>의 보리
<나는 보리>의 보리와 유사하게 ‘코다(CODA)’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를 그린 영화가 있는데, 바로 2021년 미국에서 개봉한 <코다>이다.
두 영화의 주인공 보리와 루비는 모두 코다 중에서도 가족 내에서 유일하게 소리가 들리는 자녀 'OHCODA’이자, 미성년자 코다 ‘KODA’에 속한다는 점, 그리고 영화가 청인과 농인의 화합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나, 두 영화 속 소녀의 가정 환경이나 농인의 세계를 묘사하는 방식, 그리고 인물의 선택에서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나는 보리>에서 보리의 관심이 가족들과 보내는 크고 작은 이야기들과 학교, 친구들과의 관계에 집중되어 있다면, <코다>의 루비는 졸업과 성인을 앞둔 나이로 진학과 가족의 생계 등 자신의 삶과 가족으로부터의 독립을 고민하는 데에 몰두한다. 두 영화에서 내가 가장 주목했던 차이는 보리는 가족들과 동일시 되어 자신도 소속감을 느끼기를 바라는 반면, 루비는 가족의 품에서 벗어나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가기를 원한다는 점이었는데, 이는 단순히 졸업 학년과 11살이라는 인물의 나이 차이 때문에 나타난 차이 만은 아닐 것이며, 두 소녀의 가정 환경과 제작자(감독)의 배경과 우리 사회에 깊게 자리 잡은 문화적 배경 또한 영화의 관점과 주인공의 선택에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루비의 가족은 아빠와 오빠가 운양하는 어선으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해 가는데, 일정치 않은 수입과 틈만 나면 중간에서 이익을 떼가는 중개업자들 때문에 루비의 진학비용 걱정은 물론, 늘 생활비 걱정을 안고 지낸다. 또한, 루비의 가족은 가족 내의 강한 유대와 결속을 강조한다. 예를 들어, 루비의 엄마가 식사할 때 다른 행동을 하지 못하게 이야기하는 장면이나 가족의 일에는 꼭 모두가 함께 자리하게 하는 장면을 통해 루비의 엄마가 가족의 소통과 결속을 강조하는 인물로 그려지는데, “그거 알아? 엄마도 세상 밖으로 나와야 해.”라는 루비의 대사와 “들리는 년들은 나랑 말 안 해.”라는 엄마의 대사에서 유추해볼 수 있듯, 사실 엄마의 이러한 행동은 청인과의 교류는 두려워하며 피하고, 농인에 공감할 수 있는 가족 내에서 소속감과 안정감을 유지하려는 엄마의 방어기제이다. 그리고 이렇게 가족 내의 유대를 강조하는 엄마의 행동과 자신도 부양의 대상이라는 인식이 저절로 심어지게 되는 루비네 가정의 분위기와 환경은, 루비가 가족에게서 벗어나 세상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열망을 더욱 부추겼을 것이다. 반면, 보리의 가족은 루비네 가족과 같은 입장으로, 농인으로서 겪는 불편함과 어려움이 분명 있음에도 따뜻하고 화목한 가정의 본보기라고 표현해도 어색함이 없을 정도로 따뜻한 모습을 보인다. 오히려 <나는 보리>에서 보리의 부모님은 큰 부담이 될 수 있는 수술비조차도 전혀 상관없다며 정우와 보리의 귀를 위해선 큰 비용지출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이고, <코다>에서는 가족의 생계수단이던 낚시도 <나는 보리>에서는 보리 아빠의 오랜 취미이자, 어린시절부터 아빠의 유일한 친구가 되어 준 존재, 아빠와 보리가 속마음을 교감하게 되는 시간과 배경으로 나타난다. <코다>는 미국에서 제작된 영화이며 원작 영화인 <미라클 벨리에>는 프랑스에서 제작되었고, <나는 보리>는 우리나라의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국내에서 제작되었다. 이에 루비와 보리의 선택 차이에는 우리나라보다 비교적 이른 나이의 면허취득과 독립을 맞이하는 서양의 문화와 개인주의, 그리고 한국의 가족공동체 정신과 협동, 한국의 ‘정’이라는 이데올로기 또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가정과 사회에 대한 루비와 보리의 관점과 선택에서는 차이를 보이지만, 두 영화 모두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농인과 청인의 경계를 허물고, 화합과 이해에 도달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점은 같다. <코다>의 경우 영화의 후반부. 음악 영화답게 음악을 통해 주제를 드러낸다. 루비의 오디션과 대학 진학을 내내 반대하던 루비의 부모님은, 교내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루비의 모습과 루비의 노래에 환호하는 관객의 모습, 그리고 그 누구보다 노래를 사랑하는 듯한 루비의 태도를 보고 오디션 당일 아침, 직접 운전을 해 오디션장까지 함께 간다. 오디션장에서 루비가 부르는 노래는 “Both sids now”. 앞서 말했듯, 영화의 메인 사운드 트랙이자 주제를 나타내고 있기도 한 이 루비의 오디션 곡은 “하려던 일들이 많았지만 구름이 내 앞을 막았지. 이제 구름을 양쪽에서 보게됐어. 위와 아래에서”, “이제 사랑을 양쪽에서 보게 됐어. 주는 쪽과 받는 쪽에서”, “이제 인생을 양쪽에서 보게 됐어. 이기는 쪽과 지는 쪽에서”와 같이 성장하며 주변에 있던 것들에 대해 달라진 이해와 시선에 대한 가사를 담은 곡으로, 루비가 ‘코다(CODA)’로서 살아가며 때로는 농인인 가족이 자신의 인생의 장애물이라고 생각했던, 때로는 농인 가족 속에 속한 유일한 청인이 자신이 소외된 존재인 것처럼 느껴졌던, 때로는 다른 가족들과 다른 자신의 가족이 부끄럽고 이해할 수 없었던 루비가 이제는 농인과 청인의 입장 양쪽 모두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으며 가족을 이해하게 되었음을 노래한다. 그뿐만 아니라, 오디션 현장에 몰래 들어온 가족들을 위해 루비는 노래를 부름과 동시에 가사에 맞추어 수화를 하는데, 이 장면을 통해 영화 <코다>는 루비의 성장과 이해, 농인과 청인의 교류와 화합을 완벽히 실현시킨다.
<코다>가 서로 다르다고 생각했던 이들의 이해와 화합에 중심을 두었다면 <나는 보리>는 서로 간의 이해와 더불어 ‘코다(CODA)’로서 살아가는 보리의 자아정체성 확립과 농인과 청인과의 경계를 허무는 것을 중점적으로 다루며, 농인도 청인과 다를 것 없는 평범한 한 사람이라는 점을 더 강조해 말한다. <나는 보리>의 미덕은 바로 이렇게 농인 가족이 등장하지만, 비장애인 가족과 다르지 않은 보편적 정서를 다룬다는 점에 있다. 다름보다는 같음을 느끼게 하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허물게 한다. 실제로 나는 보리의 김진유 감독은 “처음부터 장애를 어떻게 다루겠다는 거창한 목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보리의 감정에 집중했고, 그 감정선을 따라 보리 가족의 모습을 묘사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기존의 장애를 다룬 영화와 차별점을 갖게 된 것 같다.”라며 특별한 의도를 담기보단 오히려 그저 농인을 향한 시선이 특별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을 뿐이라고 인터뷰에서 말한 적이 있다. 영화 <나는 보리>의 후반부에서, 보리는 시장에서 구매했던 부적인 ‘악마의 눈’을 바다에 던지는데, 이러한 보리의 행동을 통해 일시적이지만 농인의 입장을 직접 체험해보고 사회의 차별적인 시선을 경험해본 보리가 더 이상 가족에 대한 타인의 차별적인 시선이나 편견을 의식하지 않게 되었으며 ‘코다(CODA)’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하고, 타인의 시선이 어떻든, 자신에게는 그 누구보다 평범하고 소중한 가족의 의미를 확립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나는 보리>는 보리가 도로와 바다 사이 좁은 방호벽 같은 길 위를 양팔을 벌린 채 균형을 잡으며 걸어가는 모습이 배우들의 이름과 함께 등장하며 마무리되는데, 도로도 바닷가도 아닌 사이 도로 방호벽 위를 조심조심 걸어가는 보리의 모습을 통해 농인과 청인 사이에 놓여있는 ‘코다(CODA)’ 보리의 정체성과 농인과 청인의 경계를 허무는 시도를 완성한다.
3. 보리가 보여주는 농인의 세상
<나는 보리>에서 보리는 가족들과 같아지고 싶다는 마음에 농인이 되기 위한 노력 중 하나로, 물에 귀를 자주 담그면 잘 들리지 않는다는 TV 속 해녀의 말에 직접 바다에 뛰어들며, 이상 없이 무사히 구조되었음에도 보리는 이후로 계속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된 척, 자신도 농인이 된 척 행동하는데, 이렇게 농인으로서 생활하는 동안 보리는 농인을 향한 사회의 시선을, 가족들이 농인으로서 겪었을 어려움과 외부에서 받았을 차별들을 경험하게 된다. 앞서 <나는 보리>의 미덕은 농인 가족이 등장함에도 비장애인 가족과 전혀 다른 바 없이 느껴지는 보편적인 정서를 다룬다는 점이라고 하였는데, 이렇게 영화 전반에 걸쳐 경계를 허물고, 보편적인 정서를 다루지만, 보리가 직접 농인의 입장으로 살아가는 생활들을 담음으로써 일상 속에서 농인이 겪게 되는 불평등한 차별과 시선 또한 짧은 내에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 또한 <나는 보리>의 또 다른 미덕이라고 볼 수 있다.
보리가 가족들처럼 농인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친구들은 학교에서 이전과 확연히 다른 태도를 보인다. 보리와는 상의 없이 보리에게 화장실 청소 당번임을 통보한다던가, 은정이와 보리가 나란히 앉아있는 모습을 보았음에도 보리를 투명인간처럼 쏙 빼놓고 은정이에게만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식으로 말이다. 학교와 또래 친구들 내에서뿐만 아니라 보리는 주변 어른들에게서도 평소에는 보지 못했던 모습들을 보게 되는데, 부모님 대신 정우와 농인이 된 척하는 보리를 데리고 병원에 간 고모가 ‘착한 거짓말’이라는 명분으로 병원에 다녀온 후 엄마, 아빠에게 수술하게 되면 정우가 앞으로 축구를 하지 못할 것이라는 의사의 말을 전하지 않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또한, 엄마가 함께 간 옷가게에서는 보리와 엄마가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이유로 몰래 점원들끼리 상의하여 더 높은 가격으로 옷을 판매하는 것을 보게 되며, 지나가는 보리를 본 동네 어른들이 “어린 것이 딱해서 어떡해.”라며 들리지 않게 된 보리를 안타까워하며 안쓰러운 시선으로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을 바라보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렇게 보리가 농인인 체를 하며 겪게 되는 주변의 변화와 상황들은 우리가 영화 밖 현실사회에서 농인을 바라보는 태도를 잘 반영하고 있다. 모두가 그렇다고 말할 순 없겠지만, 우리 사회는 흔히 장애를 섣불리 안타깝다는 식으로 바라보거나 ‘힘들겠다’라는 식으로 동정 같은 공감을 한다. 작은 시선, 별 의미 없는 말 한마디일 수 있지만, 때로는 이렇게 무의식적으로 툭툭 나오는 시선과 말들은 당사자의 마음에 꽂히기도 한다. 이렇게 영화 속에서 11살 소녀가 특별히 큰일 없이 지나가는 소소한 일상 속에서 차별을 경험하도록 한 것에도 농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특별하지 않았으면 하는 김진유 감독의 바람과 유년 시절 감독이 겪었던 감정, 그리고 그의 자전적인 이야기들이 바탕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김진유 감독은 “제가 만났던 농인 부모 중 60% 정도가 자녀가 농인으로 태어나길 바랐다. 농인이라는 것 자체가 불편하지 않고,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인터뷰한 바 있는데, 이를 통해 사회에서 우리가 농인을 볼 때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경향이 개입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감독이 영화에서 보리가 직접 농인을 체험하게 함으로써 농인이 일상 속에서 빈번하거나 흔하게 겪게 되는 어려움을 보여주고, 그 어떤 가정보다 따뜻하고, 온전하고, 화목한 가정의 분위기를 그림으로써 현실에서의 농인을 향한 특별한 시선을 제거하고자 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4. <나는 보리>에 대한 글을 마치며
영화 <나는 보리>는 농인의 삶을 이야기함과 동시에 ‘코다(CODA)’라는 익숙하지 않은 용어와 존재를 알리고, 이런 ‘코다(CODA)’ 소녀를 주인공으로 설정함으로써 단순히 농인의 생활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 농인과 청인,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구분하는 경계를 허물고 농인 가족이 특별하지 않은 보통의 가족임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또한, 보리가 농인이 되고 싶어 하는 바람을 통해 관객들에게 보편적인 사고에서 전환된 시각과 관점을 제공한다는 점에서도 큰 의의를 지닌다.
<나는 보리>의 김진유 감독은, “장애인 가족도 비장애인과 다르지 않다는 식의 묘사도 하고 싶지 않았고,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농인 가족의 평범한 일상과 자신이 살았던 모습만을 보여줘도, 대중이 농인을 조금 더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라고 인터뷰에서 생각을 밝힌 바 있다. 이러한 감독의 애정 어린 시선이 영화 <나는 보리>와 그것을 보는 관객에게도 통한 것일까. <나는 보리>의 보리네 가족은 보는 사람의 마음도 더불어 따뜻해질 정도로 그 누구보다 화목하고 행복해 보이며, 영화를 통해 그들의 삶과 ‘코다(CODA)’로서 살아가는 보리의 삶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들을 더 이해하고, 그들과 더 가까워지고 싶다는 마음이 저절로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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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대무패 9단계의 최고 단계가 어쩌면 '패배하기'는 아니었을까?
"성공은 실패의 어머니." 필자가 다소 꼬인 사람이라 그런지 몰라도 토마스 에디슨의 본 명언을 필자는 좋아하지 않는다. 아직 실패가 너무 무섭다. 작다면 작은 실패와 고난을 반복해가며 만들어진 두려움은 당분간 도전을 선뜻 선택하지 못하게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성공은 실패의 어머니'라는 말은 필자에게 있어 '흥. 웃기고 있네'라는 멸시의 대상이면서 역설적이게도 동경의 대상이기도 하다. 나보다 많은 것들을 먼저 경험한 분들의 말씀, '지금 너가 겪은 것들은 모두 예고편에 불과해'와 같은 직언은 닥쳐올 실패들을 앞서서 걱정하게 해, 이 모든 역경들을 이겨낸 그분들을, 역경들을 떨쳐내고 성공을 해 명언을 남긴 토마스 에디슨을 존경하게 한다. 본 작품을 모두 관람한 이 시점에 질문을 하나 해보자. 실패를 하고 있는 난 패배자이고, 토마스 에디슨은 승리자인가? 토마스 에디슨이 과연 전구를 발명하고 축음기를 발명하기 전까지도 늘 그는 승리자였는가? 명언을 깨닫고, 내뱉기 전까지는 그도 어쩌면 수 많은 패배자들 중 하나였지 않았을까? 승리자와 패배자를 구분 짓는 기준이 무엇인가.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은 승리자와 패배자로 이루어진 이분법의 재판장에서 패배자의 손을 들어 세상 모든 패배자들을 위로하고 따스히 안아준다. 재밌는 건 영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과연 그 구분이 실재하는 것인가 묻기도 한다는 점이다.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의 중반부, 주인공 가족인 후버 가족의 가장 별종, "드웨인"의 절규가 이어졌던 배경 속 뒤 표지판엔 흥미로운 구절이 보인다. '뭉치면 산다.' 군대나 전쟁과 어울릴 법한 구절이 가족 오락 드라마에 사용된 데엔 어쩌면 이는 의도적인 설정으로 영화의 전체적인 이야기를 내포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이런 관점에서 작품을 바라본다면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은 산개와 화합의 과정을 담은 작품으로 보여진다. 특히 이를 주 배경이 되는 장소의 구분을 통해 표현한다.
우린 흔히 '혈연으로 이어진 인간 공동체'를 '가족' 내지는 '가정'이라고 부르는데, 두 단어의 앞 글자가 모두 '집 가(家)'라는 데엔 '가족=집'이라는 걸 의미하는 지 모른다. 가족의 정신과 마음이 모두 담긴 집을 공간적 배경으로 삼는 영화의 초반부 씬을 보면 화합과 결집과는 어울리지 않는 불안한 가정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대화가 긴밀히 오가는 식사 씬에선 쇼트와 역쇼트를 빈번히 사용하여 영화의 호흡을 빠르게 가져가지만 인물들이 집의 복도 내지는 공간을 누비는 장면에선 롱테이크로 촬영한 점이 인상적이다. 대화 씬의 속도와 걷는 씬의 속도가 다른 데엔 빠른 대사와 박자감을 통해 갈등의 흥미진진한 진행을 표현하고자 함과 상대적으로 천천히 이동함으로서 집 안에 만연하게 존재하는 가족 간 미묘한 거리감을 표현하고자 했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그러던 와중 불안과 불합치만이 존재하던 집안의 분위기를 바꿔주는 하나의 사건이 벌어지는데, 이것이 바로 영화의 본격적인 사건의 중심인 막내 "올리버"의 '미스 리틀 선샤인' 진출을 위한 캘리포니아 행 여행이다.
필자의 관점에서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흥미로웠던 장면은 바로 여행 중 차량 클러치가 고장 나 모두가 차를 밀면서 한 명씩 탑승하는 장면이다. 본 씬과 영화의 전 후 서사를 비교해보면, 본 씬을 기준으로 인물들의 분위기와 표정 등이 변하게 됨을 눈치 챌 수 있다. 공군 사관학교에 가고자 했던, 니체를 극심하게 믿어 침묵의 서약을 했던 아들 "드웨인"의 늘 무표정이던 얼굴이 입체적으로 변해 절규도 하고 웃기도 했으며 작품의 진 주인공으로 보여지는 삼촌이자 잘 나가는 학자였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몰락해버린 "프랭크"가 무한의 우울함에서 벗어나 웃고, 떠들고, 위로하고, 도전하기 시작한 계기도 바로 본 장면을 기준으로 한 후였다. 영화의 종반부 이러한 행동이 똑같이 반복된다는 점은 본 씬의 중요도를 영화가 의도적으로 일러주는 것 같으면서 인물들의 행동이 워낙 재밌다 보니 중반부 이후 차를 출발시키려는 씬들이 등장할 때면 이번엔 어떻게 가려나 하는 흥미로운 생각마저 하게 해 영화에 크나큰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아이스크림, 운, 신, 미스 리틀 선샤인. 본 작품을 본 분들이라면 모두 인상깊다고 생각할 만한 영화의 소재들이다. 영화는 우리가 흔히 행복의 존재라고 생각하는 보통의 사물과 존재들에게 아이러니를 더한 대사와 연출들을 보여준다. 이런 아이러니함의 중심엔 항상 아빠 주인공인 "리처드"가 서 있다. 달달한 맛과 시원한 온도감으로 우리에게 행복을 선사하는 아이스크림에겐 '미인대회에서 떨어지기 위해 먹는 패배자들을 위한 음식'이라는 칭호를 딸 앞에서 서슴치 않게 씌웠고, 삼촌 "프랭크"가 "올리버"에게 운을 빈다고 했을 때 "운 따위는 나약한 패배자들이나 의지하는 것"이라 말하면서 운을 비운의 존재로 전락시켰다. 인상깊은 점은 바로 이런 "리처드"가 승리자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해 도착한 미스 리틀 선샤인 대회장에서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에 딸을 만류하기 위해 내뱉은 첫 마디가 바로 "너의 운을 빌어."라는 것이다.
패배자와 승리자를 항상 구분 짓고 '절대무패 9단계'라는 본인만의 잣대로 비교하던 "리처드"의 영화 속 삶을 생각한다면 과연 그는 승리자였느가 하는 의문이 들게 되고, 이는 아이러니함의 시작점이다. 절대무패 9단계라는 본인만의 학설을 자랑스럽게, 마치 승리자인 것처럼 강연하지만 협소한 공간에서 몇 안 되는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아이러니, 몰락한 학자인 "프랭크"를 패배자라고 멸시하지만 본인도 다른 사람의 확실치 않은 말 한마디에 설레발치며 사업을 확장시켜 결국 파산 직전에 다다르게 되었다는 아이러니는 "리처드"를 마치 똥 묻은 개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것과 같은 역설로 보이게 한다.
작품의 재밌는 지점은 운과 아이스크림의 존재 뿐만 아니라 신의 등장 타이밍과 미스 리틀 선샤인의 존재에도 있다.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 속 'GOD'이라는 단어가 실제 대사로서 등장하는 때를 생각해본다면 할아버지가 마약 하는 씬이나 미스 리틀 선샤인에서 "리처드"가 이상함을 느끼던 때이다. 물론 영어 대사나 영문화권 사람들의 평상시 말에도 GOD이라는 단어는 굉장히 흔히 사용되는 단어이고, 관용어와 같이 각종 상황에서 사용되지만, 단어의 뜻과 같이 실제 신의 은총이나 신의 손길이 필요치 않은 장면에서 유독 'GOD'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온다는 건 영화가 의도적으로 단어와 대사를 통해 역설적인 상황을 연출하고자 한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미국의 최고 미인을 선정하는 대회인 미스 아메리카 그리고 아동계의 미스 아메리카인 미스 리틀 선샤인을 영화가 연출한 방법도 이러한 의도가 담겨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영화를 본 관람객마다 생각은 모두 다르겠지만 필자의 관점에선 영화가 미스 리틀 선샤인과 미스 아메리카에 선정된 인물이나 출연한 인물들 심지어 행사 자체를 그리 아름답게 담지도, 좋은 의미로 담기 위해 노력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게 옳은 것인가?'라는 생각을 관객이 자연스럽게 할 수 있게끔 여지를 남겨놓은 것처럼 보여졌다. 미스 리틀 선샤인과 미스 아메리카. 어쩌면 모두 승리자를 뽑기 위한 행사이고, 선발된 인원들 또한 모두 승리자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영화가 승리자를 예찬하고, 승리자를 위한 작품이었다면 두 존재를 더욱 매력적으로 그리지 않았을까?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은 모든 루저들, 모든 패배자들을 위하는 영화이다. 스스로 패배자이면서 패배자임을 인정하기 싫은 가정이 승리자가 되기 위한 여행을 떠났고, 그 끝엔 스스로를 패배자라고 인정하는 것으로 그 막을 내린다. 그렇다면 영화는 그런 패배자들을 처절하고, 비참하게 그렸을까? 승리자라고 스스로를 추대했던 초반부의 처연한 분위기와 패배자임을 인정하고 승리자와 패배자를 구분짓는 행위마저 모두 의미 없음을 드러낸 종반부의 행복한 분위기의 차이는 그 반대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은 모두 패배자이고 그저 인정만 하면 된다고 단정 짓는 작품일까? 물론 그렇지도 않다. 영화 속 승리자로 보여지는 사람들의 외양, 이미지, 풍기는 분위기 모두에서 과연 그들이 어떠한 면에서 승리자인 것인지 의심하게 만들고 오히려 패배자로 보여지는 후버 가족의 이미지와 풍겨지는 분위기를 더욱 빛내는 것처럼 연출했다.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은 패배자를 낙담시키지도 그렇다고 우대하지도 않는다. 우리 모두가 패배자이자 승리자임을, 패배자와 승리자를 구분지어 평가하는 게 모두 덧 없음을, 승리자와 패배자를 구분짓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건 바로 화합 그리고 사랑이란 걸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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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 / The King's Man, 2020
일명, "냉장고 털기"는 바깥에서 음식을 사 먹는 것이 아니라 집에 있는 재료들을 가지고 밥을 먹는 것을 말하는데요.
그런 점에서 "디즈니"의 "폭스 털기(?)"는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언더 워터>를 시작으로 <콜 오브 와일드>, 그리고 <뉴 뮤턴트>까지 개봉이 연기되었던 대작들을 차례로 개봉했으나 결과가 하나같이 좋지 않았는데요.
여기에 <우먼 인 윈도>는 "넷플릭스"에서 공개되었고, "코로나19"로 인한 축소된 극장은 점점 냉장고를 털어먹기 힘들게 만드는데요.
이런 가운데,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도 "코로나19"로 1년이나 개봉일을 연기하고 이제서야 겨우 관객들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과연, 어떤 작품이었는지?' - 영화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의 감상을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자신의 눈앞에서 아내를 떠나보낸 "옥스퍼드"는 죽어가는 아내에게서 아들 "콘래드를 꼭 지켜달라"라는 말을 전해 듣고 이를 맹세하게 됩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어느덧 장성한 "콘래드"는 아버지와의 입대 문제로 갈등을 빚게 됩니다.
시간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막 시작되려던 참이고 이에 이득을 취하려는 집단이 있다는 첩보를 얻은 "옥스퍼드"는 아들 "콘래드"와 함께 몸을 일으키는데...그들의 첫 모습, 어땠을까?
1. 의외로, 깊이가 있다?
영화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는 "첫 번째"를 뜻하는 부제가 버젓이 있으나 엄연히, 시리즈에 속하며 전작이 존재하는 작품입니다.
그렇기에 시리즈와의 비교들은 피할 수가 없는데, 그런 점에서 '<킹스맨>이 어떤 작품인지?'에 설명이 필요할 겁니다.
먼저, 해당 작품에 설명하기 앞서 "영국"이라는 나라를 알아봐야 합니다.
"워킹 클래스(노동자 계급)"라는 단어가 따로 있을 만큼 영국 사회에는 아직도 은연중에 차별이 존재하는데요.
그런 점에서 1편 <시크릿 에이전트>에서 "에그시(워킹 클래스)"와 "해리(귀족)"의 결합은 많은 것들을 시사하는 것이죠.단순한 재미가 아니잖아!
그리고, 다수의 위에 군림하는 소수의 엘리트들에 대한 냉소를 잊지 말고 보여주었는데요.
극 중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라는 장면만 두고 본다면, 귀족이 아래 것(?)들을 가리켜 드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결국, 그들도 다를 것이 없다'라는 보상심리와 같은 장면으로 "뇌꽃놀이"가 응수하는데요.
그 방법이 과격하기는 하나 확실하게 전달되니 <킹스맨>시리즈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영화는 강아지 "JB"의 이름에 "제임스 본드 - 제이슨 본 - 잭 바우어" 등의 첩보 영화 캐릭터들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며 그들의 패러디를 자처합니다.2. 전작보다 퇴행?
여타 영화들에서 나온 악당들처럼 해당 시리즈에 나온 빌런들의 목적지는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공짜 와이파이가 제공되는 유심(1편)과 마약 합법화(2편)로 소재에 있어 차별을 두어 과장된 느낌을 주고 의족 대신 칼을 달아두는 악당이 나타나는 등 앞서 언급한 여타 첩보 영화들을 생각하면, 현실성은 극히 떨어지는 모습이죠.
특히, 이를 보여주는 액션도 '브레이크 댄스'로 보여주니 특유의 이런 액션이 <킹스맨>스러운 모습이기도 합니다.거룩했던 창사 이념에 따라서...
본론부터 말하면, 영화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는 "시리즈"의 정체성을 찾아볼 수가 없는 작품입니다.
물론, 극 중 "옥스퍼드"가 아들 "콘래드"에게 "신사도"에 대한 자조적인 말을 내뱉으며 앞서 언급한 사회 구조의 냉소를 잃지 않으려 합니다.
하지만, 이를 "에그시(워킹 클래스)"와 "해리(귀족)"의 콤비로 결합했던 전작들과 다르게 이번 <퍼스트 에이전트>에서는 "솔라"와 "폴리"를 끝까지 영외로 두며, "영국"의 "스코틀랜드 탄압"같은 말에는 회피하는 아쉬움을 만들어냅니다.3. 시도가 평범함에 그친다면...
무엇보다 전작들이 "첩보 영화"였으며, "청소년 관람불가"에 맞는 시원시원한 액션들을 선보였다면, 이번 <퍼스트 에이전트>는 "전쟁 영화"로의 탈바꿈을 선언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이념" 혹은 "민족주의" 등의 명분으로 나섰다는 것이 있지만, 제1차 세계대전은 각 나라 간의 이익 문제가 가장 컸습니다.
"아프리카 횡단정책"만 보더라도, 아프리카를 "프랑스"와 "영국"이 서로 양분했으니 감독이 '왜, 1차 세계대전을 가져왔는지?'라는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비추는 "콘래드"의 모습은 상당히 나쁘지 않아 그 의도가 더 빛나기까지 합니다.요즘 전쟁 영화들이라면, 이 모습이 익숙하지.
자원입대를 하려는 "콘래드"는 "국가를 위한 죽음은 영예롭다"라는 말을 하는데, 이는 앞서 1차 세계대전의 의도를 안다면 음흉하기 짝이 없는 말로 들리는데요.
결국, 최전선에서 전투를 한 "콘래드"가 깊은 후회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것으로 해당 에피소드는 마무리됩니다.
결과부터 말하면, 그 이상을 보여주진 못해도 전쟁영화로서의 때깔부터 메시지까지 기본에 충실하며 성공합니다.
문제는 이후 "옥스퍼드"의 행동에서 앞서 말한 안타까운 궤변들이 새어 나온다는 것이죠.4. 어떻게 된 겁니까...
결과적으로 <퍼스트 에이전트>는 극의 시간상 먼저 나온 영화이나 개봉순으로는 가장 늦게 나왔음에도 퇴행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아쉬움이 많지만, 그럼에도 칭찬하는 시퀀스를 선택하라면 예고편에서도 나왔듯이 "라스푸틴"과의 대결입니다.
예고편에서는 동명의 제목으로 보여주나 정작, 영화에서는 다른 클래식을 틀어주며 댄스 배틀로 선보이는데요.
노래는 달라도 보여주는 액션의 퀄이 좋아 관객들의 인상을 심어주는데 부족함은 없었습니다.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하지만, 전작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에서 "쿠바 미사일 위기"라는 실존 사건을 가지고 이야기의 현실성을 부여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번 "라스푸틴"의 쓰임새처럼 짧게 끊어가는 역사적 인물들과 사건의 활용은 아쉬울 따름입니다.
이런 이유에는 무엇보다 다채로운 이미지였던 <엑스맨>들과 다르게, 이번 <킹스맨>에서의 캐릭터들은 평범하게 그려졌기 때문입니다.
단적인 예시로 "라스푸틴"부터 미친놈에 그치며, 미국 대통령은 켕기는 것이 있어 참전을 꺼려 하니 단순하게 놀리는 어조이니 더더욱 언급된 인물들과 사건이 아까울 뿐입니다.※ 쿠키 영상에서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등장하긴 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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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일을 위한 고군분투
* 이 글은 씨네랩으로부터 초청 받아 참석한 영화 <팜 스프링스>의 시사회 관람 후기입니다.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니, 이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만 사는 것 같다'는 술어가 있다. 이 말은 내일 일은 생각하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제가 할 일에 돌진하는 사람들에게 흔히 붙는 수식어이다. 이러한 수식어는 특히 요즘 젊은 세대 사이에서 빈번하게 쓰인다. 전세계적으로 불황이 휩쓸고, 당장 내일의 일을 기약할 수 없는 세계의 젊은이들에게 '오늘'을 사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해 보인다. 새롭게 생겨나는 '욜로(You Only Live Once)'라든가,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단어들은 이러한 불안정한 상황에 처한 젊은이들의 사정이 반영된 결과이리라.
<팜 스프링스>의 두 주인공, 나일스와 세라 역시 이러한 현실에서 크게 유리되어 있지 않다. 자, 이제 그들의 이야기를 들여다 보자.
1. 오늘만 사는 남자와 오늘이 끝나기를 바라는 여자
나일스는 오늘만 사는 남자이다. 말 그대로, '모종의 사건'을 계기로 오늘에 갇혀 버리고 만 그는 그렇게 수천 번의 오늘을 살면서 정말이지 '안 해 본 일이 없다.' 무한히 반복되는 오늘을 벗어나기 위해 죽음까지 불사했으나, 시간이 지나면 거짓말처럼 돌아오는 '오늘'의 아침에 나일스는 굴복하고 만다.
반면 세라는 오늘이 얼른 지나가버리고 내일이 오기를 바라는 여인이다. 남 모를 비밀을 품고 있는 그녀에게 현실은 지나치게 고통스럽고, 그녀는 그것을 죄 잊어버리려는 것처럼 술을 들이킨다.
이러한 둘은 어떠한 사건을 계기로 나란히 '오늘'에 갇혀버리고 만다. 이 반복되는 시간의 섬에서, 단 둘이!
"소용 없어요, 세라. 다 해봤다고요."
'오늘'을 벗어나려는 세라에게 타임 루프 선배인 나일스는 말한다. 운명에 저항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고, 나는 당신과 있는 것이 좋으니 함께 즐거운 '오늘'을 보내자고. 세라 역시 수 많은 '오늘'을 그와 보내며 그를 사랑하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그녀에게는 '오늘'을 벗어나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녀의 '오늘'에는 그녀가 저지른 과오가 남아있고, 그 과오를 바로잡으려면 내일이 와야했으므로.
2. 내일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이 영화는 흔한 타임 루프 클리셰의 유쾌한 점을 따라가면서도 재치있게 비튼다.
특히 인상적인 점은 타임 루프를 깨고 나가기 위한 열쇠는 두 남녀의 회개 혹은 개심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혹은 선량함도 아니다.
그것은 지극히 실험적이고 과학적이며 인간적인 노력에 의해 성취된다. 여주는 그 수많은 오늘을 활용해 양자 역학 따위를 통달해버리고, 마침내 '오늘'을 벗어나는 방법을 깨닫는다.
내일로 나아가기 위한 열쇠는, 내일로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가짐과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일련의 노력인 셈이다.
그리하여 '내일이 오기를 두려워하던' 남자와 '오늘이 제발 지나가기를 바라던' 여자는 '오늘'을 벗어난다.
두 사람은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될까?
서로가 있어 행복할 거라는 동화적인 이야기는 꺼내지 않겠다. 이 영화는 그러기엔 지극히 현실적이다. 그러나 관객들은 예상할 수 있다. 남녀간의 사랑이 아니더라도, 이들은 성공적으로 오늘을 살고, 어제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내일로 나아갈 것이라는 것을. 그들은 이제 실수를 바로잡고 원하는 것을 위해 나설 줄 아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전반적으로 가벼운 킬링타임용 영화라는 인상이 든다. 성행위나 폭력에 대한 묘사가 가볍게 다루어진다는 점에 미성년자들에게 그렇게 권장할 만한 영화는 아닐 거 같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싫지 않은 이유는 그 특유의 유쾌함에 있다. 클리셰를 적절히 비트는 재치와 삶에 대한 나름대로의 심도 있는 고찰은 관객들을 어렵지 않게 그들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이 영화를 보며 나를 포함한 오늘날의 많은 젊은이들의 삶에 대해 생각했다.
우리의 어제의 실수를 부끄러워하고, 오늘의 과오를 외면하거나, 내일 있을 일로부터 회피하곤 한다. 우리는 그럴 만한 사회를 살고 있으니까. 그러나 생각해보면 실수와 과오는 바로 잡으면 되고, 내일은 거창하게 생각할 것 없이 그저 나아가면 된다. 작은 것부터, 우리 눈 앞에서 우리가 가장 원하는 것을 차근차근 해내면서.
자, 우리도 내일을 살아보는 것은 어떨까?
한 발짝씩 나아가다보면 내일은 어느새 오늘이 되어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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