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란2025-03-20 05:03:57
모두를 향한 아주 짧은 예고편, <파문>
정열적인 춤사위는 상복 안에 감춰진 붉은 드레스를 끄집어내고-
* 이 글에는 영화의 결말이 담겨 있습니다.
<파문> Ripples, 2025
감독: 오기가미 나오코
모두를 향한 아주 짧은 예고편, <파문>
<파문>은 다르다. 인물의 서사만으로 진한 감정적 파동을 일으키는 <강변의 무코리타>(2021)나 <카모메 식당>(2006)과 같으면서도 다른 보법을 가진다. 마음이 아픈 인물들을 치유하기 위해 모든 영화적 요소를 감독만의 색깔로 버무린 방식과 이들이 긴 고통에서 벗어나 진정한 평화를 얻게 된다는, 이미 완성된 이야기가 아닌 완성 ‘되어가는’ 이야기, 즉 결과보다는 과정을 더 음미하도록 유도한 연출은 같다. 하지만 따뜻함이 가득한 치유 과정에 집중했던 전작들과 달리 <파문>은 블랙코미디 가득한 해방 과정에 몰두한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주인공의 삶을 ‘이미지’란 형태로 바꿔 보여준다. 극을 이끄는 주체가, 가짜 평화로부터 진짜 평화를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주인공(요리코)이 아니라 그녀가 생산한 수많은 사진이란 점이다. 시각적 즐거움은 장면과 장면이 연결되는 그때, 의도적인 찰나의 멈춤으로 발생한다. 카메라 화면 구성과 편집점이 계획적으로 만든, 눈에 보이는 공백이라 요리코도 관여할 수 없다. 그 결과 요리코의 삶이 흐를수록 관객은 그녀와 그녀를 둘러싼 환경(일본 사회)을 사진으로 인식하는 낯설고도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출처: 영화 <파문> 스틸컷
요리코가 등장하는 첫 장면을 보자. 잠에서 깬 그녀를 반기는 건 남편의 발뒤꿈치와 그의 우렁찬 코골이다. 분명 흠칫할 상황이지만 그녀에겐 익숙한 아침 풍경이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자는 부부(한 컷)를 통해, 함께 하지만 부부관계는 이미 멀어졌음을 단번에 알 수 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아침마다 마트에 달려가 생수를 사고, 가족을 위한 밥은 생수로, 투병 중인 시아버지 밥은 오염된 수돗물로 하는 요리코나,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버거우면서 며느리에게 성추행을 계속 시도하는 시아버지, 마당(꽃밭)은 애지중지하면서 방사능 괴담엔 무력하기만 한 남편, 가족보다 망해가는 세상에 더 관심 있는 아들까지 감독은 각 인물의 첫 이미지만으로 요리코가 처한 상황을 빠르고 정확하게 보여준다. 일본 여성을 향한 가족 내의 암묵적 희생 강요와 사회와 개인의 삶에 전반적으로 짙게 깔린 (대지진과 원전 사고로 인한) 무기력과 자포자기도 자연스럽게 전달한다. 특히 두 요소는 참을 수 없는 웃음과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씁쓸함을 적재적소로 유발해, 블랙코미디의 맛과 이야기의 집중도를 끌어올린다.
요리코는 행복해 보이지 않지만, 딱히 불행해 보이지도 않는 기이한 평화에 갇혀 있다. 어찌할 수 없는 원전 사고와 다를 바 없는 ‘가족’ 덕이다. 세 사람은 요리코의 삶에 가족이란 이유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들은 열심히 뿜어대고 요리코는 기꺼이 흡수하는 식인데 그녀는 이 굴레에서 벗어날 생각이 조금도 없다. 심지어 남편의 가출(자발적 실종)과 시아버지의 죽음, 아들의 집 탈출로 혼자가 됐음에도 변함없다. 세 남자에게 치여 살다가, 사이비 종교(녹명회)가 만든 생명수(녹명수)를 믿으며 혼자 자유롭게 살게 된 삶은 당연히 전과 다르지만, 어디까지나 그녀의 착각일 뿐이다. 자기희생적 기질을 가진 요리코 마음에 사이비 종교가 가족을 대신해 들어온 것뿐이니까. <파문>은 이때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한다. 요리코가 남편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화면이 끊기고 ‘수면 위로 물방울이 똑 떨어지는 아주 짧은 영상’이 삽입된다. 공백이 그녀를 흔드는 사건이 일어나기 바로 직전, ‘단절’로 변주해 나타나는 것으로, 아주 짧은 예고편과 같다.
출처: 영화 <파문> 스틸컷
단절은 그녀에게 반갑지 않은 과정이다. 방사능이 무서워 가출해 놓고, 암에 걸려 돌아온 것도 기막힌데 비싼 항암 치료비까지 요구하는 남편과 연상의 청각장애인 여자친구를 연락도 없이 데려와 결혼을 통보하는 아들, 아들과 헤어져 달라는 부탁을 당당히 맞받아치는 예비 며느리, 거기에 멀쩡한 물건에 하자가 있다며 제값의 반값을 요구하는 마트 진상 손님까지, 단절 이후 벌어지는 상황이 죄다 그녀를 괴롭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할 수 없다. 단절로 인한 그녀의 혼란은, 진정한 해방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니까.
가족들이 수면 위에서 요리코에게 가시 박힌 말을 내뱉을 때마다 그들의 발밑(수면)에서 시작된 물결이 그녀에게 닿는다. 이 흑백 장면들은 <파문>에서 가장 주요한 순간 포착이다. 가족의 이기심이 요리코의 고통 원인이자 전부임을 반복적으로 설명하는 듯하지만, 자세히 보면 전혀 다른 얘길 하고 있다. 사실 그녀 또한 가족과 같은, 파문을 일으키는 자로 무수히 물결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피해자가 가해자였다는 얘기도, 가족이 더 괴로웠고 그녀가 덜 괴로웠다는 식의 결론도 아니다. 가족들 역시 그녀에게 영향을 준 만큼 그녀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상황 자체를 인지하는 일이다. 하지만 희생과 침묵이 당연한 삶을 살아온 그녀였기에, 요리코는 자신의 파문을 보지 못했다. 상처받은 원인을 들여다볼 생각 없이, 또 자신에게 철저히 무지한 채, 고통받는 나를 계속 억눌러 왔던 것이다. 요리코는 진작 ‘여러 일을 겪은 나’란 사람을 정확히 파악하고 보살폈어야 했다. 가족들의 이기적인 행보에 화가 났고, 슬펐으며, 한없이 무력했음을, 그래서 고통스러웠고 외로웠다고 표현했어야 했다. 돌아온 남편의 칫솔로 화장실 세면대를 몰래 청소할 게 아니라, 자신이 정말 원하는 바를 말하고 행동했어야 했다. 요리코가 진심으로 바랐던 건, 꽃밭을 없애고 만든 고산수식 정원도, 정원을 정성스럽게 가꾸며 영혼 정화와 영혼의 차원을 높이는 희망도 아니었으니까.
출처: 영화 <파문> 스틸컷
진전이 없는 요리코에 단절은 진짜 평화를 가진 듯한 새 친구, 마트 청소부 미즈키를 소개한다. 미즈키는 요리코가 버거워할 때마다 어느새 나타나 위로한다. 살다 보면 누구나 힘들 때가 있고, 누구나 궁지에 몰리면 이성을 잃을 때도 있다고 말이다. 남편이 암에 걸렸든 말든 쫓아내라고 대신 화내주거나, 마음이 힘들 땐 녹명수를 마시는 것보다 몸을 움직이는 게 좋다며, 자기가 하는 수영을 권하기도 한다. 현실적이면서 효과적이기까지 한 미즈키식 위로에 그녀는 반응한다. 그러나 미즈키 또한 내면이 곪을 대로 곪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어린 아들을 잃고 대지진으로 집이 엉망이 된 후 완전히 주저앉았다. 쓰레기장이 된 집에서 유일하게 깨끗한 건 수영복이었고, 유일하게 신경 쓰는 건 반려 거북이 한 쌍뿐이었다. 방식만 다를 뿐 두 사람은 서로 다를 바 없는 삶을, 몰래, 숨죽이며 살고 있던 것이다.
거북이를 돌봐주겠다고 약속한 요리코는 친구 집에 들어가자마자, 그동안 모른 척해 왔던 고통의 실체를 마주하고 오열한다. 자신에게 얼마나 무지했고 가혹했는지 깨달으며 그동안 삼켜왔던 울분을 토해낸다. 그리곤 미즈키가 먼저 손을 내밀어 준 것처럼, 그녀에게 손을 내밀고 집을 깨끗하게 치워주며, 힘들었던 자신을 함께 위로한다. 마침내, 요리코의 삶에, 서로에게 대가 없는 희생이 아닌, 대가 없는 치유가 발을 들인 것이다.
출처: 영화 <파문> 스틸컷
요리코는 거북이가 정원을 헤엄치는 걸 보며 그토록 염원했던 자유의 꿈틀거림을 느낀다. 처음으로 후련한 미소를 짓는 그녀만의 따뜻한 파문이 해방의 파도로 관객에게도 닿는 순간이다. 요리코의 깨달음 이후 단절은 사라진다. 여전히 아픈 남편과 살고 아들의 사랑도 말릴 수 없지만, 더는 그들의 파문에 힘겨워하는 요리코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더 귀한 녹명수를 권하는 교인에게 자기 발등을 내리찍는 눈물로, 숭배의 마침표를 찍는 그녀만 있을 뿐이다.
시간이 흐르고, 남편 시신이 담긴 관을 든 사람들이 그녀와 함께 집을 나온다. 가짜 평화의 축소판인 고산수식 정원을 망가트리지 않기 위해 아슬아슬하게 건너던 사람들은 결국 관을 떨어트리고 만다. 관 밖으로 나온 남편의 시신을 보며 모두가 당황한 그때, 요리코의 쾌활한 웃음이 울려 퍼진다. 당황한 아들의 눈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원에, 해방의 파도에 몸을 맡긴 남편을 보며 웃음을 멈추지 못하는 그녀‥. 요리코에게 해방은 무엇일까. 그녀에게도 이제 진짜 평화가 온 걸까. 요리코는 단절이 주는 절망이, 사실은 희망임을 받아들이면서 삶의 의미를 찾았다.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던 나에게서, 그들에게서 벗어났고, 동지를 얻었으며 함께 기쁨과 슬픔을 겪어내는 법도 배웠다. <파문>의 정체성이자 메시지 그 자체인 강렬한 포스터가 이를 증명한다.
출처: 영화 <파문> 스틸컷
상복을 입은 요리코가 비를 맞으며 해방의 파도를 휩쓸며 플라멩코를 추기 시작한다. 정열적인 춤사위는 상복 안에 감춰진 붉은 드레스를 끄집어내고, 대문을 나서면서도 계속된다. 그리고 마침내 들리는 활기찬, 감탄사 올레!! 하늘을 보고 활짝 이를 보이며 웃는 요리코가, 내면이 아픈 이들의 치유와 희망을 반드시 전하고 마는 감독이 우리에게 주는 마지막 예고편이다.
영화 <파문> 포스터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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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애프터 썬’을 보고] 널 진짜 사랑해, 잊지마
[영화 ‘애프터 썬’을 보고] 널 진짜 사랑해, 잊지마
'애프터 썬(After Sun)’이라는 영화와의 첫 만남은‘쓸쓸한 사랑 영화 추천 TOP 3' 이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게시물에 올려진 행복한 모습의 아빠와 딸의 포스터를 통해 이뤄졌다. ‘쓸쓸한 사랑’을 서로가 닿을 수 없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외로운 사랑이라고 여겼던 것과 달리 다정해보이는 부녀를 보며 이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해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들은 겉으로는 행복해보였지만 이 부녀 둘 사이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의 균열이 존재했다.
어렸던 딸은 아버지를 향해 깊은 애정을 느끼지만 우울증을 앓고 있던 아버지의 깊은 내면적 고통과 불안까진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영화는 성인이 된 딸이 아버지와 여행했던 시간을 되새기며 그때는 몰랐던 아버지의 고뇌와 감정을 조각처럼 짜 맞춰가는 모습을 담고 있다. 그러나 기억은 이미 희미해졌기에 사랑의 흔적을 따라가는 과정에서 영화는 더 이상 가까이 할 수 없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과 이해하려 해도 닿을 수 없는 현실에 대해 쓸쓸함을 남긴다.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는 아빠는 딸 소피에게 자신의 우울감이 전해지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하지만 그의 눈엔 이미 슬픔이 가득 차보였다. 그러나 어린 소피(Sophie)와 마찬가지로 나도 영화를 보는 동안 그가 우울증이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오히려 세상 무기력하고 게으른 아빠처럼 보였기에 그를 좋은 아빠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인생의 맥락을 단 몇 분으로 파악하려 했던 나의 판단이 오해였음을 깨닫게 된다. 소피 역시 그를 이해하기 위해 아빠와의 기억의 조각을 긁어모았지만 그의 속사정까지 깊이 이해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이렇듯 소피와 나는 아직 그의 아픔을 온전히 이해하기엔 힘든 어린 나이다. 그러나 아빠는 딸과 재밌게 놀아주기 위해 일찍 풀어버린 깁스와 혼자 남겨졌을 때만 눈물을 흘리는 등 그가 딸과 행복한 시간을 망치지 않기 위한 노력만큼은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이러한 아빠의 외로운 모습을 보며 갑자기 ‘혹시 우리 아빠도 그러지 않았을까?’라며 소피의 상황을 ‘나’에게 이입해 의식하기 시작했다. 아직까지도 완벽히 알 수 없지만 어린 시절에는 더욱 이해하지 못했던 아빠의 마음이 이제야 어렴풋이 느껴졌다. 가족 앞에선 늘 웃음을 잃지 않으려 애쓰고 혼자 있을 때만 슬픔을 흘렸을 아빠의 모습을 상상하니 가슴 한 편이 먹먹해졌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늘 힘든 감정을 삼켜내며 우리에게 기쁨만을 주고자 했던 가장의 무게는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다. 그가 웃을 때 그 안에 숨어있는 눈물은 오직 그와 가족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인간의 복잡한 내면과 그것을 마주하는 또 다른 한 인간의 애틋한 시선을 통해 사랑과 쓸쓸함이 공존하는 특별한 순간들을 포착해내는 이 영화는 내게 평생 슬픔과 쓸쓸함의 잔향을 남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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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브의 모든 것
이브의 모든 것
1950년 작품. 영화 형식으로 보면, 1945년 개봉한 영화 '밀회'와 매우 비슷하다. 영화의 시작과 끝이 같은 장면이며, 주인공과 주변 인물의 나레이션으로 스토리가 전개되고 있다.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이런 순환구조를 갖는 영화는 이후에도 가끔 등장한다.
이 영화도 '밀회'처럼 각종 영화상을 많이 받았을 뿐 아니라, 영화 자체가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미국 의회도서관과 미국 국립영화등기부에 등록되었다. 등장인물 역시 쟁쟁해서 주인공 베티 데이비스, 앤 박스터, 마릴린 먼로 등 당대 유명 배우들과 미래의 탑스타가 단역으로 출연하는 귀한 장면을 볼 수 있다.
마고 역의 베티 데이비스는 이 영화로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이브 역을 한 앤 박스터는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그리고 마릴린 먼로는 이 영화에서 단역으로 출연한다.
연극배우에게 주는 최고의 상을 받는 시상식장. 이브가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상을 받기 위해 앉아 있고, 앞쪽 테이블에는 마고와 그의 친구들이 앉아 있다. 나레이션이 시작되고, 이 시상식이 있기까지의 과정이 처음부터 시작된다.
연극배우로 탑스타인 마고(베티 데이비스)는 그가 출연하는 연극이 전부 흥행에 성공하고 남부러울 것 없는 스타의 삶을 살아간다. 마고 주변에는 연극연출가, 극작가, 비평가 등 수많은 남성들이 따르고, 그녀를 흠모한다.
하지만 마고 스스로는 이제 곧 마흔 살이 되고, 나이 드는 것에 대한 공포가 있으며, 자기를 사랑하고 아껴주는 연출가 빌이 연하의 남성이어서 다른 여자들이 넘본다는 의심을 끊이지 못하고 있다. 그날도 연극이 끝나고 무대 뒤 대기실에서 마고와 마고의 친구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마고의 가장 친한 친구인 캐런이 한 젊은 여성을 데리고 들어온다. 마고의 열성 팬이며, 마고가 등장한 연극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봤다는 이 젊은 여성은 이브(앤 박스터)였다. 이브는 공연장 후문에서 오래도록 누군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마침 마고의 친구 캐런이 나타나자 자신이 마고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마고의 공연을 보기 위해 멀리서 왔다는 것을 말한다. 캐런은 안쓰러운 마음에 대기실로 이브를 데리고 들어가 마고에게 소개한다.
이브는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일찍 결혼했고, 남편은 전쟁터에서 사망했으며, 돈을 훔쳐 대도시로 나와서 근근히 생활하지만 마고의 공연은 빠뜨리지 않고 다 봤다고 말한다. 그 사실에 살짝 감동한 마고가 자기 일을 도와줄 수 있겠냐고 묻고, 이브는 감격한다.
이브는 마고의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마고가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 마고의 생활, 연기에 필요한 보조 역할을 철저하게 해낸다. 이브는 마고 뿐 아니라 마고의 친구들에게도 더할 나위 없이 친절하고 완벽한 인물이었다. 마고의 스케줄 관리, 집안 정리, 정돈, 청소, 무대 의상 준비 등 마고가 미리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준비하는 이브를 보면서 마고는 이브를 더욱 신뢰한다.
이브는 연극 무대에 서기 위해 마고는 물론, 마고 주변의 지인들에게 접근해 마고의 대역으로 무대에 설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이 과정에서 이브는 의도적이든 아니든 끊임없이 거짓말을 한다. '리플리 증후군'에 해당하는 이브의 행동은 결국 이브가 원하는 방향으로 사람들을 움직이고, 이브는 마고가 맡아야 할 배역을 차지한다.
그 과정에서 이브가 사람들 사이에서 서로 다르게 말하고, 행동했던 과거가 드러나고, 이브가 처음에 마고와 그의 지인들을 만났을 때 했던 자신의 과거도 거짓임이 드러난다. 이브는 자기의 과거를 속였고, 가능한 동정을 받을 만한 내용으로 꾸며 거짓말을 했으며, 그렇게 톱스타의 동정과 안쓰러움을 바탕으로 경력을 쌓을 수 있었다.
이브는 당대 최고의 극작가 로이드의 작품으로 연극 무대에 올라 인상적인 연기를 보였고, 결국 상을 받게 된다. 영화는 자연스럽게 첫 시작점에서 이어진다. 그 자리에 참석한 마고와 그의 지인들은 이브가 화려하게 스타로 탄생하는 것을 지켜본다. 마고는 자신이 나이 들고, 젊은 애인을 질투했다는 걸 인정하고, 톱스타의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마고의 시대는 저물어 간다는 것을.
반면 이브는 과거 마고가 올랐던 그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 시상식이 끝나 대기실로 돌아오는데, 대기실에서 낯선 여성을 발견한다. 그 여성은 이브의 연기를 존경한다며, 자기도 이브처럼 되고 싶다고 말한다. 과거 이브가 마고에게 했던 말과 똑같이 말하며, 이브의 손과 발이 될 준비를 하는 것이다.
물결은 끊임없이 밀려들고, 앞선 물결은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이브는 지금 톱스타가 되었지만, 언젠가 자신도 마고처럼 가장 높은 곳에서 물러나게 될 것임을 보여주면서 영화는 끝난다.
이브는 연극계에서 성공하기 위해 인맥을 만든다. 최초에는 공연장 후문에서 무작정 기다리다 우연히 대스타 마고의 가장 친한 친구 캐런을 만나게 되지만, 이후 마고의 인맥들 가운데 마고의 애인이자 연출가인 빌, 희곡을 쓰는 로이드, 연극비평가 애디슨 등을 개별적으로 만나면서 연극 무대에 서고 싶다는 욕망을 서서히 드러낸다.
중요한 것은, 이브가 연기에 재능이 있고,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미인이고, 연기를 잘 하며, 사람들과 스스럼 없이 어울리며 좋은 인상을 준다. 그러면서 개별적으로 만나는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절박한 처지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해도, 결과는 주변 사람을 이용해 자신의 입지를 세우고, 자신의 출세에 사람들을 소모품으로 여기고 있는 태도가 문제인 것이다.
결국 이브는 자신이 원하는 무대에 서고, 훌륭한 연기로 상까지 받지만, 자기의 뒷조사를 완벽하게 한 평론가 애디슨에게 약점을 잡힌다. 이브는 거짓말을 하지만, 다른 사람들 역시 모두가 선량한 사람만은 아니라는 것이 드러난다. 물론 이들은 좋은 사람들이지만, 자기의 영역, 연출, 극본, 비평에서 이브를 이용해 보다 좋은 평판을 얻으려는 욕심을 보인다. 즉, 이들은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고 있으며, 그것을 최대한 보기 좋게 포장하려는 이중성을 보인다. 그것이 예술가의 한계라는 비판이기도 하고, 인간의 나약한 속성이라는 비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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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th BIFF 데일리] 현실에서는 절대 해서는 안 될 아주 위험한 남자의 취업전략
우리의 사정을 ‘어쩔수가없다’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있을까.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박찬욱 감독의 12번째 장편영화 <어쩔수가없다>가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BIFF)에서 선공개된 후, 오는 2025년 9월 24일 일반 관객을 만난다.
박찬욱 감독이 오랫동안 만들고 싶어 했던 원작 소설 <액스>를 영화화한 이번 작품은 고질적인 사회 문제를 되짚으며 여전히 반복되는 개인적·사회적 갈등을 그린다. 감독은 평생직장과 실업화, 경쟁과 생존 등 현대 사회의 현실적인 문제를 영화적 상상력과 풍자, 유머를 통해 화면에 담아냈다. 베니스 영화제를 비롯한 토론토 영화제에서 관객과 평단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아 더욱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어쩔수가없다>는 사회적 문제를 다루면서도 코미디와 스릴러적 요소를 동시에 담아낸 박찬욱 감독 특유의 스타일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영화는 해고된 만수가 극단적인 선택을 통해 자신만의 생존 전략을 모색하는 과정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어린 시절부터 지켜온 집과 가족을 위해 노력하며 평생을 바쳐온 만수는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게 되고, 그 과정에서 인간의 욕망과 합리화, 죄책감과 생존 본능이 교차한다. 그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때로는 극단적인 선택까지 감행하지만, 그 과정을 단순하게 범죄로 치부하지 않고 사회 구조와 인간 내면의 복합성을 보여준다. 또한 영화 속 인물들은 조명과 그림자, 햇빛과 인공조명 속에서 저마다의 ‘연기’를 한다. 사회적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인간의 민낯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 연기의 이유와 배경까지 함께 탐구한다. 곪은 문제를 제때 해결하지 않으면 큰 문제로 이어진다는 경고처럼, 영화는 사회 구조적 책임과 개인의 선택 사이의 긴장을 담아낸다. 박찬욱 감독은 풍자와 유머를 통해 평생직장과 실업화, 경쟁과 생존 등 현실적인 문제를 직시하게 만들며, 웃기면서도 섬뜩한 인간 군상의 모습을 그려낸다. 극 중 만수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이 보여주는 정당화와 합리화, 숨김과 폭로의 반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음’에 대한 묘한 공감과 불편함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상영 스케줄
09-17 18:00 영화의 전당 야외극장
09-18 09:00 CGV 센텀시티 IMAX관
09-19 11:30 영화의전당 중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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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Z 세대가 공감할 현실적인 스릴러'가 될 뻔했으나
이사 온 지 일주일
이 영화의 주인공은 건축사에서 근무하는 직장인 수현이다. 현장에 출근하는 수현. 화장실 쪽에 작업이 이상하게 되어있다. 바로 노동자들을 호출하는 수현. 삼촌 뻘의 직원들이지만 수현이에겐 보이는 게 없다. 원래 윗사람이라는 건 그런 것이다. 앞에 보이는 게 없는 건 수현의 직장상사 김 실장도 마찬가지다. 이상한 눈빛으로 수현이를 쳐다보는 김 실장. 이런 눈빛이 부담스럽다. 이 눈빛은 두 사람이 직접 대면할 때 더 부담스러워진다. 호칭이 변한다. ‘자기’라는 단어를 쓰기 시작하는 김 실장. 대충 눈치는 준다. 하지만 김 실장의 모습에 물러섬의 기색이란 없다. 애써 던지는 추파를 외면하는 수현. 아무튼 퇴근하면 집이 주인공을 기다리고 있다.
영화에서 발생한 큰 문제는 수현이가 퇴근한 이 집에서 일어난다. 세탁기가 고장 났다. 어디서 중고거래로 세탁기를 구하면 어떻겠냐는 직장동료의 말을 떠올린다. 무릎을 치는 수현. 어플을 켜서 세탁기를 검색한다. 적당한 매물을 찾은 수현. 뒤적뒤적 거려 더 나은 제품이 있을까 찾아본다. 없다. 횡재했다. 이 가격으로 물건을 데려온다는 것이 즐겁다. 며칠 지나 제품이 집에 도착한다. 세탁기를 구동해 보는 수현. 고장 났다. 화가 나는 수현. 판매자의 아이디를 추적해서 댓글에다 ‘이 사람 사기꾼이에요’라고 댓글을 단다. 여기서 수현이 직접 비극을 초래했다. 수현이가 타깃으로 설정됐다.
현실감의 공포
이 영화가 다루고자 했던 정서는 ‘공포’다. 이 영화에는 두 가지 공포가 산재해 있다. 첫째는 중고거래의 공포다. 중고거래를 어플을 통해 하려면 어플이 필요하다. 물건을 어플에 올리고 가격을 제시한 다음 전화번호를 기재한다. 이 과정에서 전화번호가 유출된다. 중고거래(내지는 인터넷거래)에서 개인정보를 올리는 건 양날의 검이다. 모르는 사람이 나에게 함부로 접근할 수 있다는 것과 거래의 신빙성이 달려있다는 점이 구매자에게 중요하다. 반대로 판매자와 구매자들이 연락을 주고받는다는 점에서 역시 연락처가 유출될 위험이 있다. 하지만 이 외에, 단지 중고거래 어플사이트만 구경하는 사람에겐 ‘개인정보 노다지’라는 의미다. 영화는 이 지점에서 겪을 수 있는 공포를 디테일하게 묘사한다.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는 나름 꼼꼼하게 살렸다.
다른 공포는 ‘혼자 사는 여성이 느낄 수 있는 공포’다. 한국사회에서 여성이 살아남는 데 있어 두려움을 느낄 만한 요소가 영화에서 큰 장치로 두 개가 삽입됐다. 하나는 주인공이 여성이기 때문에 약자의 입장에서 놓이는 경우가 몇 있다. 영화는 이 공포를 앞 문단에서 서술한 것과 병치시키며 중고거래 살인마만큼 무엇이 두려운지를 묘사한다. 또 영화 내적으로 묘사하는 ‘여성혐오가 만연한 한국사회’ 역시 최근의 대한민국을 연상케 하는 몇 요소가 있다. 리얼리티가 중요한 영화에서 현실이 연상되는 다양한 공포를 통해 승부수를 둔다.
무의미한 공포
이 영화가 선택한 큰 패착 중 하나는 서스펜스를 유발하는 방식이다. 영화에서 서스펜스를 유발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가령 <추격자> 같은 경우는 흑막이 누구인지 찾아가는 방식이 아닌 ‘이 사람의 악행을 막아라’였다. 실제로 <추격자>에서는 빌런이 누구인지 초반부에 다 보여준다. <곡성>은 양자택일을 통해 서스펜스를 만들었다. 이란 영화 동시에 이번주에 개봉했던 <한 남자>는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방식으로 서스펜스가 만들어졌다. 보통 영화를 보고 긴장감을 느끼는 건 관객이 이 ‘과정’에 감정적으로 동참하며 이뤄진다. <곡성>이 기존 호러영화의 클리셰를 뒤집어 신선한 장르 문법을 만들어 낸 것처럼 예술에서 감정이입은 굉장히 중요하다. 이 영화는 관객을 감정적으로 이입시키는데도 실패했지만 기본적으로 인물에 편승하고 있다.
그 이유는 악역 캐릭터의 기본 설정에 있다. 영화가 서스펜스를 만드는 방식이 ‘악역이 얼마나 미친 사람인가’ 혹은 ‘얼마나 끔찍한 일을 벌이는가’다. 인물이 ‘이 정도로 돌아이니까 무섭지?’라고 질문하는 게 영화가 견지하는 긴장감이다. 이야기에서 분기점 찍기 전까지 명확한 사건전개가 없다. 그냥 범죄자가 수현 캐릭터를 괴롭히고 덜덜 떠는 게 이야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영화적인 과장이 캐릭터의 전지전능하기 때문에 러닝타임 내내 가해지는 폭력이 불쾌하다. 이 설정에 대한 문제는 영화의 토대와도 관련이 있다. 이 영화에서 중고거래 판매자/구매자라는 설정은 중요할 수밖에 없다. 포스터에 ‘나는 살인자와 중고거래를 했다’라는 캐치프레이즈가 들어간 것 말고도 이야기의 거의 대부분이 이곳에 할당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가 이 디테일을 살릴 만큼 부지런하지 않다. 심지어 이 두 설정을 뒤바꾼다고 해도 이야기엔 큰 지장이 없다. 심지어 중고거래라는 세팅을 층간소음으로 바꾼다고 하더라고 이야기의 큰 틀은 유지된다.
조금만 더
영화 전체적으로 뒷심이 부족하다. 우선 사운드의 믹싱 상태는 영화의 가장 큰 단점이다. 대사가 안 들리는 건 차치하고 나서라도 소리가 먹힌 듯 깔끔하지 않다. 단적으로 영화에서 틈입하는 소리가 영화에서 중요하게 삽입되어 있다. 이 소리가 지나치게 크다. 이야기에서 새는 것들이 몇 보이기 때문에 이런 기술적인 문제가 아쉽게 느껴진다. 영화의 기본 설정 상 전자기기와 인터넷을 이용한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하다. 이 부분을 감독이 잘 이해하고 영화에서 묘사했는지 역시 영화에서 단점으로 작용한다.
캐릭터의 몇 설정에서 차마 빚지 못한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주인공 수현은 이러저러한 문제들이 벌어짐에도 불구하고 주체적인 판단을 하지 못한다. 수현이의 직장 묘사도 마찬가지다. 수현의 동료 두 캐릭터는 영화의 메시지를 조성하기 위해 희생된 감이 있다. 굉장히 과하거나 소극적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경찰 조직에 대한 묘사가 후반부에서 매가리가 없다. 초중반부에는 조직에 따라 행동하지만 후반부가 되고 나서는 경찰 구성원들이 자기 마음대로 행동한다. 빌런 캐릭터도 지나치다. 이 인물이 실질적으로 이런 일들이 가능할지가 리얼리티가 중요한 영화에서 용인될 수 있는지는 미지수다. 빌런 캐릭터의 열연이 오히려 이런 허점을 더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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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FF 데일리] 제 25회 전주국제영화제 시상식 취재
안녕하세요, 이번 제 25회 전주국제영화제에 씨네랩 소속 기자로 참여하게 된 YELM입니다!
씨네랩 구독자 분들께 어제(5/7) 개최된 시상식 현장을 보여드리기 위해, 시상식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시상식은 전북대학교 삼성문화회관에서 개최되었습니다.
레드카펫은 따로 없이, 배우/감독분들이 포토월을 지나 입장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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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식은 전국제 조직위원장이신 전주시 우범기시장님의 연설로 시작되었습니다.
" 독립영화의 최전선에 있는 작품들을 선보이는 전주국제영화제.
훌륭한 영화들이 많아 우열을 가려 심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영화를 향한 열정이 더욱 빛을 발하고, 영화인들이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길. "
시상식은 총 4개 부문으로 이루어져있었습니다.
<특별 부문>, <한국단편경쟁>, <한국경쟁>, <국제경쟁>
시상식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특별부문>
멕시코국립시네테카 개봉지원상: 통잠 김솔해, 이도진 감독
넷팩상: 펀치 드렁크 아벨타브리즈 감독
J비전상: 너에게 닿기를 오재욱 감독
다큐멘터리상: 목소리들 지혜원 감독
<한국단편경쟁>
심사위원 특별상: 땅거미 박세영 감독
감독상: 헨젤: 두 개의 교복치마 임지선 감독
대상: 작별 공선정 감독
<한국경쟁>
왓챠상: 힘을 낼 시간 남궁선 감독
CGV상: 언니 유정 정해일 감독
배급지원상: 담요를 입은 사람 박정미 감독
배우상:
은빛살구 나애진 배우
힘을 낼 시간 최서원 배우
대상: 힘을 낼 시간 남궁선 감독
<국제경쟁>
심사위원 특별상: 쓰레기장의 개 장 밥티스트 뒤랑 감독
작품상: 쿨리는 울지 않는다 팜응옥란 감독
대상: 메이저 톤으로 잉그리드 포크로펙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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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배우/감독분들의 소감을 들으며, 함께 감동받고 기뻐하는 행복한 축제의 현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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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이번 영화제에서 본 영화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장 밥티스트 뒤랑 감독의 "쓰레기장의 개"가 수상하여 기뻤습니다!
제 25회 전주국제영화제, 그 긴 여정을 달려오신 감독,배우님들을 축하하고 응원하는 시상식이란 자리에 함께 할 수 있어 매우 값진 기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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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틀남은 전주국제영화제, 남은기간 모든 분들이 알차게 즐기셨으면 좋겠습니다!
영화제 기간: 2024.05.01 - 2024.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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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립 투 그리스> 오디세우스의 두 발자국을 쫓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국 유명 배우 '스티브(스티브 쿠건)'와 '롭(롭 브라이든)'은 ‘옵저버’ 매거진의 제안으로 6일 동안의 그리스 여행에 나선다. 터키 아소스를 시작으로 이타카에 이르기까지 <오디세이아> 속 오디세우스의 발자취를 따르는 둘은 동시에 레스보스 섬에서는 레즈비언이라는 단어의 유래, 델포이 신전에서는 신탁을 받는 방법, 아테네 디오니소스 극장에서는 그리스 비극과 희극의 차이 등 온갖 주제로 인생과 예술, 사랑에 대해 토론과 농담을 나눈다. 이처럼 유쾌하던 여행은 스티브가 아들의 예상치 못한 전화를 받고 롭이 아내의 빈자리를 절실히 느끼는 찰나에 뭉클한 인생 여정으로 변모한다.
2010년 <트립 투 잉글랜드>를 시작으로 <트립 투 이탈리아>와 <트립 투 스페인>을 거쳐 2021년 <트립 투 그리스>로 이어지는 마이클 윈터바텀 감독의 '트립' 시리즈는 단순히 유명 관광지를 둘러보는 작품이 아니다. 마치 <꽃보다 청년> 시리즈를 영화관에서 보는 듯한 독특한 매력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을 대표하는 배우 스티브 쿠건과 롭 브라이든이 여러 도시를 여행하며 보는 풍광과 즐기는 음식,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영화는 때로는 극적으로, 때로는 그들 바로 옆에서 함께 여행을 즐기는 것처럼 사실적으로 전달한다.
시리즈의 네 번째 영화인 <트립 투 그리스>도 다르지 않다. 여름날 에게 해의 바다를 수영하는 행복, 다 무너져가는 델포이 신전에서 안개 낀 그리스의 산등성이를 바라보는 벅참과 허무함, 그리스의 자랑인 꿀술에 곁들인 다양한 해산물과 육류 요리의 향연은 당장 영화관을 박차고 그리스로 날아가고 싶은 욕구를 자극한다. 여행지에서의 로맨스와 예상치 못한 만남은 이 모든 경험을 더욱 화려하고 다채롭게 즐기도록 도와준다.
하지만 이 영화를 이국적인 도시와 매력적인 레스토랑, 맛있는 음식 뜨거운 태양과 푸른 바다의 향연만으로는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 <알쓸신잡> 마냥 영국의 시인 윌리엄 워스워즈, 낭만파 시인 바이런과 셸리, 세르반테스와 돈키호테와 같이 특정 인물을 발자취를 따라가며 그에 대한 깊은 대화를 나누었던 전작들처럼, <트립 투 그리스> 역시 터키 아소스에 위치한 트로이 유적지로부터 오디세우스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그리스를 대표할 수 있는 수많은 인물들과 영웅들 중 굳이 오디세우스를 여행의 나침반으로 선정한 것은 <트립 투 그리스>에서 가장 흥미로우면서도, 영화를 특별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자타공인 그리스 신화 최고의 영웅인 헤라클레스와 그리스의 수도인 아테네의 시조 테세우스를 비롯해 아르고 호의 원정을 이끈 이아손의 행적을 따라가더라도 영화에서 보여주는 대부분의 장소를 둘러보는 데 사실 아무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에 더욱 의미심장한 선택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두 주인공이 겪는 서로 다른 모습의 삶에 담겨 있다.
성공에 대한 야망이 가득해 유럽 곳곳을 돌아다니던 스티브는 어느새 성인이 된 아들로부터 할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접한다. 즐거운 여행과 로맨스를 즐기다가 갑작스러운 충격에 빠진 스티브에게 이제 그리스는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다. 그리스인들이 저승세계의 입구로 여겼다는 동굴 안에서 그는 자신이 마치 아버지 대신 스틱스 강의 뱃사공 카론이 모는 나룻배를 타는 듯한 불길한 느낌을 받고, 밤에는 영혼들이 영원히 떠돌아다닌다는 아스포델 들판에서 아버지를 만나는 악몽까지 꾼다. 결국 마지막 목적지인 이타카로 향하던 중 부고를 접한 스티브는 급히 아들이 있는, 20년 전에 이혼한 아내와 함께 살았던 집으로 돌아간다.
한편 편안한 여행을 추구하는 롭은 일주일 간 여행을 떠난 것에 불과한데도 끊임없이 가족을 그리워한다. 낮과 저녁을 가리지 않고 딸에게 영상통화를 거는 그는 자신만이 그리스의 미를 즐기는 것이 불편하고, 잠시 집을 떠난 사이 더욱 커지는 아내의 빈자리를 좀처럼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스티브가 영국으로 돌아간 후에도 그는 아내를 마지막 목적지였던 이타카로 불러 멋진 재회를 즐기고, 그녀와 함께 여행을 계속하며 그토록 바라던 소소하고 행복한 일상을 영위한다.
이러한 스티브와 롭의 이야기는 <오디세이아> 속 오디세우스를 구성하는 두 모티브를 각각 나누어 재해석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집으로 가고 싶은 지친 여행자이면서 호기심 가득한 열정적인 여행자라는 두 개의 모티브가 겹쳐진 영웅이고, 그래서 선역도 아니고 악역도 아니며 매우 입체적이고 인간적이기에 가능한 해석이다. 우선 오디세우스는 지친 여행자다. 단순히 트로이에서 10년을 보내고, 바다에서 10년을 떠돌았기 때문이 아니다. 세상 끝에 다다른 항해 중 잠시 들른 저승에서 어머니 안티클레이아의 혼을 만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깊은 슬픔에 빠지기 때문이며, 갓난아기 이후로 보지 못한 아들 텔레마코스가 자신을 대신해 가족을 지탱해야 했던 것에 죄책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작중 스티브는 이러한 오디세우스를 닮았다.
동시에 오디세우스는 열정적인 여행자다. 그는 키르케와 칼립소가 제안하는 안정적이고 죽지 않는 삶을 마다하고 바다로, 이타카로, 아내를 향해 끊임없이 항해한다. 어떤 괴물과 시련이 기다리고 있어도 그리워하던 아내 페넬로페를 만나고, 그녀를 괴롭히던 모든 구혼자들을 죽이고 행복을 누릴 때까지 결코 여행을 멈추지 않는다. 그의 여행은 새로운 세상을 탐구함과 동시에 집으로 돌아가는 과정이다. 이 오디세우스는 유머와 호기심으로 무장한 채 스티브의 여행까지 이어받은 롭의 모습으로 재탄생한다.
중요한 것은 스티브와 롭의 서사로 나뉜 오디세우스의 여정을 하나로 합쳐서 들여다볼 때, <트립 투 그리스> 속 주인공들이 오디세우스의 항해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드러난다는 사실이다. 이는 오디세우스가 그리스의 모든 영웅들과 가장 다른 삶을 추구한 영웅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는 그를 그리스인 중 최초의 현대인이라고 볼 수 있는 이유이고, 그렇기에 그가 현재를 사는 우리들의 삶을 일주일 간의 여행으로 축약시키는 이 영화가 본보기로 삼기에 가장 적합한 그리스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다.
그가 다른 그리스 영웅들과 목표가 다르다는 사실은 아킬레우스와의 만남과 이후 그의 행동에서 엿볼 수 있다. 오디세우스는 저승에서 만난 아킬레우스에게 살아생전에 가장 위대한 전사였고 그 이름은 죽은 후에도 세상에서 영원히 빛난다고 위로를 건넨다. 이에 아킬레우스는 "죽음에 대해 내게 그럴싸하게 말하지 마시오. 영광스런 오디세우스여! 나는 세상을 떠난 모든 사자들을 통치하느니 차라리 지상에서 머슴이 되어 농토도 없고 재산도 많지 않은 가난한 사람 밑에서 품이라도 팔고 싶소이다”라고 답한다. 이러한 아킬레우스의 한탄을 들은 후 오디세우스는 옛 전우의 말대로 살아간다. 칼립소와 함께 영원히 살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하며 인간으로서 자신의 유한함을 인정하고, 귀향하여 페넬로페와 함께 이승에서의 시간을 행복하고 값지게 살아나간다.
이때 '칼립소(kalupso)'라는 이름이 그리스어로 '감추는 자'라는 뜻임을 고려하면, 오디세우스가 영원히 살되 세상에서 잊히고 자신의 삶이 무의미해지는 것을 거부했음을, 대신 아킬레우스가 말한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으로의 복귀를 삶의 의미로 선택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삶을 포기하면서까지 불멸의 명성을 추구하던 그리스 영웅들과는 달리 지금 당장의 삶의 아름다움에 주목했고,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행복을 손에 넣기 위해 발버둥 친 영웅인 것이다. 그 결과 오디세우스는 완전무결해 보이는 신화 속 인물들과 달리 인간적이고 소박한 면모를 가졌고, 그 어떤 영웅들보다 현대인들의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다. 따라서 두 주인공이 오디세우스의 발자취를 따르는 건 최선의 선택일 수밖에 없다. 오디세우스는 그리스 여행 중 현재까지의 삶을 되돌아보고, 여행의 끝에서 일상의 소중함을 느끼며, 결국 각자의 삶으로 되돌아가는 여정을 가장 먼저 경험한 그리스인이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트립 투 그리스>는 오디세우스의 인간적인 삶을 답습하는 것을 벗어나서 그의 여행을 현실적인 범주로 확장시키기도 한다. 스티브가 영화 촬영 당시 자신을 도왔던 스태프를 만나 난민 캠프로 가는 시퀀스가 대표적이다.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머나먼 남의 땅에 와서 기약 없는 생활을 지속하고, 지중해 온갖 곳을 표류하며 집 없이 전전긍긍하며, 정착할 수 있는 집으로 가고 싶어 하는 난민들의 모습은 수천 년 전에 살았던 한 남자를 닮았다. 이때 대본 없이 실제로 운영하는 레스토랑에 들어가 현지 상황에 자연스럽게 녹아들면서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원터바텀 감독의 연출은 그리스의 현실을 자연스럽게 영화와 오디세우스의 이야기에 스며들도록 유도하면서 더 크고 짠한 울림을 남긴다.
물론 <트립 투 그리스>의 모든 점이 좋지는 않다. 차 안에서 서로 자신이 가성을 더 잘 쓴다면서 '그리스'의 테마곡 'Grease is the word'를 부르는 장면처럼 두 배우의 상황극이나 농담이 과하게 길어지는 순간에는 극본 없이 배우들의 역량을 믿는 윈터바텀 감독의 스타일이 성공과 실패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는 듯 보인다. 허구와 사실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영화에 생동감을 불어넣기는 하지만, 또 그렇기에 안정된 형식의 부재가 낳는 태생적 불안함을 떨치지 못하는 것이다. 이에 더해 그리스 신화나 비극, 역사 등을 비롯한 인문학 전반에 대한 관심의 차이에 따라 만족도가 널뛸 수 있는 작품이라는 점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단점들이 그리스 여행이라는 코스 요리를 즐기는 것 그 자체의 즐거움을 가리지는 못하기 때문에, 두 배우의 여행과 대화가 선사하는 낭만은 충분히 만족스럽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그리스 최초의 현대인을 따라 걷는 그리스의 과거와 현재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한 영화 <트립 투 그리스>의 시사회 관람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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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깡패? 때려잡으려고 '무운도장' 장풍? 단기속성 마스터 클래스 등록한 경찰? - 라떼극장 EP.12
영화 흥신소 - 라떼극장 EP.12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영화 "아라한 장풍대작전"를 보며 소중한 추억을 떠올려보자
허약체질 경찰 상환 강도를 잡다 우연히?? 도착한 '무운도장'
그곳에서 공중부양과 장풍을 일삼는 '7선'을 만나고
도에 눈을 뜨게 되는데...
이 영화속 장면에 영감을 받아 만든 방송 프로그램의 정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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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썸머 필름을 타고 - 무언가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러브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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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름엔 너희들의 청춘을 내가 좀 쓸게”
시대극 찐팬으로 영화 감독을 꿈꾸는 고교생 `맨발`.
영화 동아리에서 자신이 기획한 [무사의 청춘]이 탈락되자
직접 영화를 만들기 위해 절친 `킥보드`, `블루 하와이`와 드림팀을 결성한다.
우연히 극장에서 만난 미래에서 온 의문의 소년 `린타로`를 주인공으로 전격 캐스팅한 `맨발`은
꿈에 그리던 촬영을 시작하지만 예상치 못한 문제가 터지는데…
영화도, 꿈도, 사랑도 Ready Action!
올 여름 최고의 청춘+로맨스x시대극÷SF 걸작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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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미스트> 예고편
당신이 알던 세상은 안개 속으로 사라진다
평화로운 호숫가 마을 롱레이크, 어느 날 강력한 비바람이 몰아친 뒤, 기이한 안개가 몰려온다.
데이빗은 태풍으로 쓰러진 집을 수리하기 위해 읍내 그의 어린 아들 빌리와 옆집 변호사 노튼과 함께 다운타운의 마트로 향한다.
하지만 데이빗은 무언가 이상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마켓에서 물건을 고르는 도중 동네 노인이 피를 흘리면서 “안개 속에 무언가가 있다!!” 뛰쳐 들어왔다.마트 밖은 이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정체 불명의 안개로 뒤덮혔고, 정체불명 거대한 괴생물체의 공격을 받는다.
마트 안에는 주민들과 데이빗, 그의 아들 빌리가 고립되었고, 지금 밖으로 나간다면 모두 죽는다는 미친 예언자가 그곳을 더욱 절망스럽게 만든다.
몇 시간 뒤 그들은 믿을 수 없는 괴물들의 등장으로 목숨의 위협을 받고, 살기 위해 살아 남기 위해 싸우기로 결심한다.
과연 그들 앞에 펼쳐진 것들은 인류의 재앙일까?
그곳에서 그들은 살아나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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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버즈 라이트이어> 무한한 모험 예고편
디즈니·픽사가 선사하는 우주적 상상력? 우주 저 너머 운명을 건 미션이 시작된다 [버즈 라이트이어] 무한한 모험 예고편 확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