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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수2025-03-23 23:47:03

응시하는 카메라를 내려놓기

<마이 제너레이션>(2004)

카메라를 내려놓기 영화 <마이제너레이션>(2004) 

 

 

 

영화는 병석이 촬영한 영상으로 시작한다. 카메라를 들고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담던 병석은 버려진 수첩을 줍는다. “내가 보지 못한 것은 없는 것이다.” 수첩의 주인이 쓴 것으로 추정되는 글이 병석의 목소리로 발화될 때, 그것은 카메라를 든 병석의 욕망이자 선언으로 들린다. 보고자 하는 욕망. 본 것을 기록하고자 하는 욕망. 그렇게 영화는 시작부터 병석을 보는사람이자 기록하는 사람으로 규정한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까지, 촬영한 곳까지가 그의 세상이다. 병석에게 카메라는 돈이나 재산 이상인 동시에 세상을 바라보는 틀이고, ‘보기는 세상과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원리이다. 하지만 자칫 숭고하기까지 한 카메라는 정작 병석의 현실에서 너무도 무기력하다. 병석의 영상은 별다른 맥락 없는 주변 사물의 나열에 그치고, 불안하게 흔들리는 화면과 조악하게 사용된 줌에는 아무런 규칙도 없는 듯하다. 그가 카메라를 다루는 방식, 세상을 보는 방식은 다소 투박하고 미숙하게 느껴진다. 게다가 병석은 돈이 없다. 통장엔 잔고가 없고 카드엔 빚이 있다. 아버지와는 따로 살고, 어머니는 어떤 정보도 없이 서사에서 완전히 지워져 있다. 친형은 병석의 이름을 훔쳐 빚을 내고 달아났다. 무력한 현실과 무용한 카메라. 회색뿐인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컬러를 담아내는 순간이 병석이 촬영한 화면이라는 이유로 그의 카메라에서 희망을 읽어내는 것은, 어쩌면 오만한 기만일지도 모른다. (흑백영화인 <마이 제너레이션>은 병석이 그의 카메라로 촬영한 화면만을 컬러로 보여준다.)

 

<마이 제너레이션>은 카메라를 든 병석이 그것을 내려놓기(버리기)까지의 과정이고, 현실에 짙게 깔린 어둠과 무기력함을 들여다 보는 영화이다. 그렇기에 진정 흥미로운 건 그 안에, 혹은 그 다음에 미약하게나마 느껴지는 온기, 희미한 가능성이다. 카메라를 내려놓은 다음에야 발견되는 또 다른 가능성. 그것을 이야기하기 위해 긴 우울을 지나야 한다. 아니다. 긴 터널을 지나서라도 반드시 그 빛을 이야기해야 한다.

 

 

 

한 선배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영상을 찍고 다닌다는 병석을 한가하다고 비웃고 일거리를 제안한다. 차가 쌩쌩 내달리는 도로에서 성인용품을 판매하는 일. 병석은 너무 춥다고 선배에게 말하지만, 홀로 운전석에 앉아 딴짓하던 그는 창문을 내리곤 넌 고생 좀 해봐야한다고 욕을 섞어가며 핀잔한다. 병석은 결혼식 비디오 촬영 아르바이트도 하지만, (업체)사장은 뮤직비디오 마냥 왔다리갔다리 쌩쇼하는 병석의 카메라를 못마땅해 한다. 그에게 병석의 카메라는 병석이 갚아야 할 카드빚일 뿐이고, 그는 그 빚을 핑계로 본격적으로 자신의 일을 돕기를 권유한다. 제안과 권유. 혹은 은근한 강요. 선배와 사장은 자신들의 기준에 쓸모없어 보이는 병석의 카메라, 즉 세상-보기 방식을 버릴 것을 요구하고 그보다 더 생산적인, 돈으로 환산되는 노동을 요구한다. <마이 제너레이션>이라는 제목이 부르는 세대에 대한 감각. ‘나의 세대라는 명명에는 다른 세대와의 구분이 뒤따른다. 선배와 사장, 친형으로 대표되는 윗세대는 병석(과 그의 방식)을 내버려 두지 않는다. 어쩌면 병석의 처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그들은 보다 먼저 자본의 논리에 적응했다는 특권으로 아랫세대에 자신들과 똑같아질 것을 요구한다. 병석을 있는 그대로 봐주는 이는 같은 세대라 할 수 있는 그의 애인 재경뿐이다. 하지만재경 역시 상황은 마찬가지다. 가족은 보이지 않고, 힘들게 얻은 직장에서는 하루 만에 해고당한다. 재경은 해고에 불복하지 않고, 할 수도 없다. 대신 자신의 얼굴이 우울해 보이냐고 묻는다. 직장에서 잘리기 전 사장의 우울해 보인다는 말이 재경의 마음에 남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재경은 숱하게 당한 해고보다 자신의 얼굴에 그늘진 우울을 더욱 받아들이기 힘들어 하는 것 같다.

 

보기를 대신하는 재경의 방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 장면. 재경은 배가 먹고 싶다는 병석을 위해 남의 밭에 쪼그려 앉아 배가 떨어지기를 기다린다. 직접 손을 대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기다리면 언젠가 배가 떨어질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믿기 때문에. 남의 배 대신 자신의 배()를 문지르며 빨리 떨어지라 주문을 외워도 보지만 결국 얼마간 기다림 끝에 둘은 발길을 돌린다. 그래, 그게 언제 떨어질지 알고 기다리겠어. 하지만 바보 같던 재경의 믿음은 틀리지 않았다. 멀어지는 두 사람의 등 뒤로 배가 떨어진다. 배는 떨어지지만 그들은 보지 못한다. 아니다. 그들은 보지 못했지만 배는 떨어졌다. 아무것도 모른 채 걸어가는 재경과 병석의 뒷모습이 마냥 슬퍼 보이지만은 않는다. 먹고 싶던 배는 먹지 못했지만 곧바로 이어지는 장면이 둘의 단촐한 식사 장면이라는 점은 분명 우리에게 위로를 준다. ‘보기대신 보이진 않아도괜찮다는 감각. 직접 눈으로 보진 못해도 믿음과 희망으로 견뎌낼 힘이 여기 있다고, 이 장면은 말하는 것 같다. 또 다시 이어지는 재경의 대사. 재경은 병석에게 착하게 살자고 말한다. 그 뻔하고 단순한, 순진한 구호 또는 다짐이 이 숏들을 통해 우리에게 비()응시의 희망을 전언한다.

 

 

 

안타깝게도 이렇게 반대되는 두 사람의 방식은 단번에 융합되지 않는다. 병석은 재경의 우울한 얼굴을 촬영하고자 한다. 문제는 재경이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 병석이 말 없는 재경의 얼굴에 카메라를 들이밀 때 그 불안하고 미숙한 프레임은 폭력에 가깝게 느껴진다. 재경이 자신의 우울한 얼굴을 마주하는 대신 부정 혹은 유예를 택했다면, 병석은 재경의 우울을 정확히 응시하고 기어코 카메라에 담아내길 욕망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재경의 대답. “왜 항상 네 방식으로만 모든걸 봐?” 오프닝 내레이션(“나는 장님이다. 아무것도 없다... 그럼 뭐가 있는 거지?”)이 다시 환기되는 건 이때다. 자신이 본 것까지를 존재함으로 명명하던 병석은 정작 가장 가까이 있는 재경 앞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된다. 또 한 번의 기회.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 공교롭게도 오늘은 그가 카메라를 들 수 있는 마지막 날. 재경은 쇼핑몰 다단계까지 당하고, 결국 병석은 둘의 빚을 조금이라도 갚기 위해 카메라를 팔기로 했다. (병석의) 화면 속 재경의 얼굴이 더욱 시리게 다가오는 이유는 지금을 마지막으로 병석이 카메라를 내려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병석은 변하지 않았다. 그의 프레임을 꽉 채우는 재경의 얼굴. 병석은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두 번이나) 묻고, 기어코 재경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찍는다. 우리가 정말로 견디기 힘든 건 어쩌면 영화 내내 이어지는 두 청춘의 끝없는 실패와 좌절, 무기력함 보다도 재경을 향한 병석의 집요한 응시와 그로 인한 두 사람의 소통 불가능성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놀라운 건 이 마지막 장면이 끝나는 순간, 처절함이 극에 달하는 그 때 카메라 끄면 말할게라는 재경의 대사 뒤로 병석의 카메라가 꺼짐과 함께 영화 또한 끝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병석의 카메라와 <마이 제너레이션>의 카메라가 동시에 꺼지며 열리는 다른 차원. 세상-보기 방식으로의 카메라를 버리기를 내내 요구받았던 병석이 끝내 카메라를 내려놓게 되는 건 자본주의의 힘 때문도, 그것을 이용한 윗세대의 강요 때문도 아니라 재경의 요청 때문이다. 병석은 재경의 요청으로 카메라를 내려놓음과 동시에 새로운 방식을 얻는다. 재경의 우울을 응시할 수 없음을, 그것을 카메라에 담을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것은 병석의 깨달음인 동시에 <마이 제너레이션>의 감독 노동석이 깨달음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병석은 카메라를 버리고 일어서야 한다. 그러니까 <마이 제너레이션>은 그 순간 끝마쳐야 한다. 이제 그들은 다른 방식으로 재경을, 세상을 마주할 것이다.

 

 

 

 

 

 

 

 

또 한 가지 덧붙여보고 싶은 이야기. 동생(병석)을 이용해 빚을 진 형(병석의 친형)이 퇴장한 뒤에야 등장하는 또 다른 동생(요한). 형은 어느 날 병석의 집을 찾아 오고, “한 대만 때리자는 병석의 말에 형은 맞을 준비를 갖춘다. 병석은 이게 형제냐고 따져 묻고 한 대 때리기 대신 형을 껴안아버리기를 선택한 뒤, 마찬가지로 자신과 제대로 된 형제 관계를 형성하지 못한 동생 요한을 찾아간다. 병석은 어린 동생이 자신을 알아보는지 확인하고 싶다. 동생에게 아버지의 안부를 묻는 듯 싶지만 병석이 실제로 묻는 건 아버지가 잘 계신지가 아니라 그가 동생을 잘 놀아주는지, 다시 말해 동생이 (아마 병석은 받지 못했을) 아버지의 보살핌 아래 잘 지내는지의 여부이다. 형제는 물론 부모와의 관계도 온전하지 않은 병석이 교류 없던 어린 동생을 찾아간 이유는 무엇일까. “로 시작해 요한아로 이동한 짧은 대화. 존댓말이 아닌 형제끼리의 반말(“다음부터는 존댓말 하지마. 형제끼리는 반말하는 거야. 알았지?”)을 요청하는 대화. 그것은 요원하고 불완전한 동생과의 관계를 접합하려는 시도이자, ‘다음 세대로 기약되는 희망을 붙잡으려는 마음이다. 나는 그 마음이 병석과 재경에 각자의 방식대로 옅게 녹아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쩌면 이들이 우리에게 짙게 남긴 흔적 또한, 영화 전반에 깔려 있는 무력한 현실과 차가운 자본의 논리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이 미약한 온기에 기인한다고 믿는다. 영화로 확인할 수 없는, 카메라를 내려놓은 병석과 재경의 대화, 그리고 동생 요한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작성자 . 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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