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2025-03-24 13:5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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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계시록] 리뷰
이 글은 넷플릭스 작품 [계시록]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분명 메뚜기 탈을 쓰고 춤추는 사람이었던 그가, 스무 번째 대상을 타는 모습을 지켜본 날이 있었다. 내가 키운 것도 아닌데 그가 여태껏 거쳐온 징검다리들과 절벽들이 내 머릿속에서 스쳐가면서 벅차올랐다. 한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관의 형성에 있어서 정점을, 혹은 또 다른 순간의 환희를 기록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
이렇듯 누군가의 세계관이 차곡차곡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동시대를 살아야만 지켜볼 수 있는 일이기에, 영광스럽기도 하고 동시에 실망스럽거나 의아할 때도 많다. 그 안에 속해 있는 모든 블록들이 마음에 들면 금상첨화겠지만. 쏟아지는 정보의 사회의 소비자로서는. 단 하나의 조각만 마음에 든다 해도 꽤 건진 게 많다는 뿌듯함도 느낄 수 있을 것만 같다.
사진출처:다음 영화
그런 측면에서 봤을 때. 넷플릭스의 [계시록]은 내게 한 번쯤은 앞에 서서 셔터를 누르게 만드는 가로수처럼 느껴지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연상호 감독 유니버스의 큰 두 갈래 중[지옥]에서 파생된 쪽에 가까운 작품이고, 또 다른 세계관을 차지하는 좀비 떼가 나오는 영화들에 비해 어둡고.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성격이 강하다.
아포페니아(참고 1)적 사고를 가진 목사 성민찬(류준열)의 모습은 [지옥]의 정진수의 모습과 참 닮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미 몇십 년에(?) 걸쳐 내재되어 있어 차마 들여다볼 수 없었던 그의 분노와 변화를 이번 작품에서는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고해성사라 볼 수도 있는 비밀이 밝혀지거나 감정이 격해지는 무대도 늘 폐허라는 것도 일치한다. [지옥]에서 쌓아 올린 악마적인 이미지의 재현이 자연스러운 것 역시 덤이라면 덤이다. 물방울만으로 권양래(신민재)를 악마로 만든 모습에서는 고개마저 제법 끄덕여졌다.
그렇다.
이 작품은 [지옥]의 "파생"이지 완벽하게 새로운 작품은 아니다. 분명히 기시감으로 가득하지만, 작품의 절반 가량을 할애해 인물의 상황을 만들어가는 솜씨는 꽤 괜찮았기에. 초반부에서 느꼈던 강렬함은 마치 지옥을 처음 봤을 때와 비슷하지만. 꽤 새로웠다.
사진출처:다음 영화
이 작품의 장기였던 치밀한 맛은, 유괴범이 유괴(?)되는 과정부터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 부분부터 메시지를 주려는 의도까지 겹쳐져서 작품의 성격이 급격하게 바뀌는 듯한 기분이 든다. 마치 [살인자 O 난감] 같은 작품에서 [암수 살인]으로 노선이 변경되고. 그 위에 프로파일링과 치유를 급격히 끼얹어 얼레벌레 마무리해버리려는 것만 같다.
또한 연희(신현빈)가 환영을 보는 장면에서의 카메라 촬영 기법은, 새로운 시도였는지는 몰라도 내게는 아이폰 손떨림 방지 광고영상 보다도 못하게 보였다. 어두운 데다 귀신까지(?) 등장하는 이 장면을 더 들여다보다가는 내가 환영을 연희보다 자주 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불쾌함이 느껴졌다.
분명 기억에 남아 길이길이 되새김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나무였건만. 훗날 사진첩을 돌아봤을 때 그날의 추억만 생각날 뿐 그때 느낀 아름다움을 오롯이 기억해 낼 수는 없을 것만 같은. 의미가 많이 사라진 가로수가 된 것만 같은 작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작품을 사진첩에 남기게 될 것이다. 그의 세계관이 맘에 들고 아니고의 문제는 확실히 별개이지만. 이번 세계관이 나에게 어느 정도 전달되었다는 점에서는 동의하기 때문이다.
참고 1
아포페니아:연결성, 연관성이 없는 정보들 사이에서 일정한 규칙, 의미를 찾는 것.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는 속담을 작품에서도 인용하는데. 이런 사람들의 경우는 배가 떨어지면 기어코 까마귀를 만들어 낸다고 묘사됨.
[이 글의 TMI]
1. 마라탕에 꿔바로우 최고!
2. 그리고 난 월요일부터 하체 피티 받는 최후를 맞이함.
3. 요새 자꾸 꿈을 꾸는데... 로또를 살까(?)
#계시록 #연상호 #신현빈 #류준열 #신민재 #한국영화 #지옥 #넷플릭스 #영화추천 #최신영화 #영화리뷰어 #영화해석 #결말해석 #영화감상평 #개봉영화 #영화보고글쓰기 #Munalogi #브런치작가 #네이버영화인플루언서 #내일은파란안경 #메가박스 #영화꼰대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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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릿마리 여기 있다(Britt-Marie Was Here/2019/스웨덴)
- (이미지 출처: 네이버이미지)<카오스와의 조우>63세의 여성 브릿마리. 영화는 그녀가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뒷모습에서 시작한다. 그녀의 뒷모습은 마치 정지된 듯 활기가 없다. 어쩐지 행복과는 거리가 먼 분위기이다.빨래, 청소, 장보기, 요리... 브릿마리의 일상은 단순하고 규칙적이다. 그녀는 정리와 정돈, 요리를 즐기며 주변이 그녀가 정한대로 되어 있지 않거나 흐트러져 있는 것을 몹시 싫어한다. 남편과 둘만 살고 있고 남편은 아직도 일을 하고 있어 하루의 대부분을 혼자 집에서 지내는 브릿마리를 방해하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그녀는 그럭저럭 불만이 없어 보인다.그런데 어느날, 한 통의 전화가 그녀의 질서정연했던 삶을 혼돈의 세계로 몰아넣고 만다. 남편 켄트가 심장마비로 병원에 입원했다며 보호자를 찾는 전화를 받고 달려간 병실에는 카밀라라는 여성이 먼저 와 있었기 때문이다. 남편의 셔츠를 빨며 맡았던 향수 냄새가 그녀의 냄새였음을 직접 확인한 순간 부부가 각자의 역할을 분담하며 질서있게 함께 지내던 집은 그녀에게 혼란을 일으키는 곳이 되어 버린다. 그녀는 그것을 견딜 수 없어 모아둔 비상금을 챙겨 가방 하나에 짐을 꾸려넣고 그날로 집을 떠난다.다음날, 그녀가 찾은 고용센터에서 추천한 유일한 직업은 '보르그'라는마을에 위치한 청소년센터의 청소년 지도사 겸 유소년 축구팀 코치.장거리 버스를 한참 타고 저녁 늦게 도착한 '보르그'라는 작은 마을의 청소년센터는 관리가 안 되어 폐가 같았다. 그녀가 그토록 싫어하던 카오스의 공간이었지만 달리 갈 곳이 없는 브릿마리는 그녀 인생만큼이나 엉망진창인 센터의 소파에서 지친 몸과 마음으로 잠을 청한다.이튿날 아침, 창문을 깨고 날아들어온 축구공 때문에 잠에서 깬 브릿마리는 축구팀원들과 대면한다. 그녀나 아이들이나 낯설고 한심하기는 마찬가지. 한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축구를 가르쳐야 할 브릿마리는 맞닥뜨린 생생한 현실이 두렵고 새로 온 코치가 평범한 할머니라는 것을 안 아이들은 그만 힘이 빠진다.거처로 삼았던 청소년센터에 쥐가 출몰하자 브릿마리는 그녀에게 호감을 보이는 동네 경찰관 스벤의 도움으로 뱅크라는 여성의 집에 방을 얻는다. 뱅크는 한때 유망한 프로 축구선수였고 갑자기 사망한 전임 축구코치 팝스의 딸인데 지금은 시력을 잃어 자포자기한 상태였다. 같이 지내게 된 브릿마리에게도 퉁명스럽게 대할 뿐.브릿마리는 뱅크의 집에서 발견한 축구 지도서로 공부를 하며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이끈다. 아이들도 다른 방법이 없자 차츰 마음을 열고 그녀를 따른다.축구팀원 중 소녀 베가는 왜 축구를 하느냐는 브릿마리의 질문에 우리도 축구팀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며 축구는 베가의 전부라고 덧붙인다.제대로 된 놀이 시설도, 일자리도 별로 없는 작은 마을에서 축구를 하고 싶어하는 아이들의 간절함을 알게 된 브릿마리는 아이들을 도우며 웃음을 찾게된다.그런데 문제가 발생한다. 복지센터 공무원이 나타나 청소년센터를 닫을 계획이며 코치에게 자격증이 없으면 팀은 대회에 참가할 수 없다고 통보를 한 것이다.브릿마리 인생도, 축구대회에서 뛰고 싶은 아이들의 꿈도 장애물에 꽉 막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이웃들이 나선다.축구를 좋아하지만 어려운 환경 때문에 지금은 축구를 하지 못하고 있는, 그러나 언젠가 다시 시작할 꿈을 지닌 청년 사미는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며 힘을 실어준다. 아버지는 가출하고 어머니는 사망하여 사미가 돌보아 주고 있는 형편이지만 축구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베가는 브릿마리에게도 꿈이 있을 것이 아니냐며 그 꿈을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힘주어 이야기한다. 결정적으로 축구코치 자격증이 있는 뱅크가 부코치를 자처하며 나섬에따라 축구팀은 대회에 참가할 수 있게 된다.깨진 창문을 수리하려 해도 칼투나라는 큰 도시에 유리 주문을 하고 오래 기다려야 하는 보르그 마을의 어린이 축구팀이 드디어 그 칼투나의 축구팀과 경기하는 날. 두 시즌 내내 칼투나 어린이 축구팀에 한 점도 내지 못했던 보르그 축구팀은 14대0으로 패하다가 후반전에 베가가 상대편 골문을 열어 기록을 깬다. 비록 14대1로 경기에는 졌지만 골을 넣어 당당하게 축구팀임을 증명함으로써 베가는 그녀의 꿈을 이루었다.브릿마리의 꿈은 무엇이냐는 베가의 질문을 곰곰 생각하다가 그녀의 꿈이 프랑스 파리를 여행하는 것이었음을 깨달은 그녀는 파리로 떠나 50년만에 꿈을 성취하고 보르그 청소년 축구팀들에게 드디어 축구장이 생겼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 듣는다. 그녀의 미소짓는 얼굴이 행복해 보인다.<브릿마리 여기 있다>는 불행하지도 행복하지도 않지만 안정적으로 지내던 40년의 결혼생활에 던져진 문제를 통해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예측 불가능한 일들을 겪으며 비로소 주체적인 삶으로 한 걸음 내딛는 한 여성의 성장 영화이다.별로 변화가 없어 예측 가능했고 질서정연했던 환경을 떠나자마자 브릿마리에게 연속적으로 다가온 상황은 혼돈 그 자체였다. 청소년센터는 청소와 정돈이 되어 있지 않아 끔찍했고 어린이들은 제멋대로였다. 브릿마리는 그녀가 그토록 싫어했던 카오스를 이겨내야만 생존할 수 있었다. 매일 '그저 오늘을 살자, 브릿마리.'라고 주문처럼 외워야 용기를 낼 수 있었다.그리고 그녀는 그 어려움 가운데 성장하게 된다. 익숙하고 편했던 집에서는 습관처럼 하루하루를 보내느라 생각하지 않고 지냈던 그녀의 꿈과 그녀 삶의 문제가 낯선 환경과 낯선 사람들 가운데에서 하나씩 깨달아진 것이다.절대로 원하지 않았고 의도하지 않았던 불편하고 낯선 상황에 떨어지면 우리는 그것을 '시련'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어쩌면 예측할 수 없어 혼란스럽고 무질서한 상태인 '카오스'도 '시련'이라고 할 수 있겠다. 둘의 공통점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예측 불가능하여 통제할 수 없는 것에서 인간이라면 보통 공포를 느끼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 두려움에 지지 않는다면, 브릿마리처럼 매일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용감하게 앞으로 조금씩 전진한다면, 그리고 상냥하고 진실한 이웃들이 함께 해 준다면 우리도 그녀처럼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63세의 평범한 여성 브릿마리의 성장이 부럽고 기쁘다. 그녀가 난관에 부닥쳤을 때 두려움을 극복하고 성장할 수 있었다면 나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용기가 생긴다. 이 영화의 미덕은 이것이다(©2020.최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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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 알콜, 약물중독에서 벗어난 배우들, 추천영화 3편
"이 끔찍해 보이는 문제들을 극복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어려운 것은 결정하는 것이다."
감옥에 갈 정도로 구제 불능의 중독자였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어린 시절 아버지인 배우 로버트 다우니 시니어가 마리화나를 피워보라고 권하면서 처음 마약을 접했다고 합니다.
중독되는건 순식간이지만 벗어나는건 오랜 시간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해야만 벗어날 수 있는데요. 오늘은 약물, 알콜중독에서 벗어난 배우들의 말과 함께 알콜중독을 다루고 있는 영화 세편을 준비해 보았습니다.
[알콜중독을 다룬 영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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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우리들>, 우리들이 살아남은 역학관계
*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사회생활이란 말은 직장생활부터를 뜻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이미 사회생활에서만큼은 초짜가 아니다. 어린이집, 유치원, 초중고등학교, 대학교(동아리, 군대 등 포함)를 지나 그리고 직장으로 발을 들여놓기 때문이다. 물론 경험이 많다고 능숙하다는 건 아니다.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 사춘기니까 예민할 수 있지 정도가 변두리에 있는 어른들이 할 수 있는 말이다.
영화 <우리들>을 보면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의 지난 '사회생활'이 떠올랐다. 친구들이 생각보다 잔인하다는 생각은 많이 했다. 우리들은 약점이나 빈틈을 마구잡이로 헤집을 수 있었다. 딱히 어른처럼 지켜야 할 선이나 체면이 명확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뭐든지 금방 습득했다. 초등학교를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친구들이 싸우는 걸 본 적이 있었다. '넌 키가 작잖아'하면서 놀리는 말에 할 말이 떨어진 친구가 "넌 아빠 없잖아, 아빠 없는 애잖아"라는 말을 하면서 승리에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 아니지. 그건 아니었다. 아빠가 있고 없는 게 자랑하거나 폄하받을 일인가. 그 말을 듣고 일그러진 얼굴이 머리채를 잡으면서 제대로 몸싸움이 시작됐다. 그때, 처음 사람이 무서웠다.
알지 알지 저 표정
<우리들>에 나온 친구들을 보면 어디서 다 많이 본 광경이다. 무리를 짓고, 이간질을 하고, 약점을 공유한다. 친구와 친하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혼란스럽다. 영화에서 승자를 굳이 가리자면 보라 하나다. 선과 지아를 패처럼 들었다 놨다 한다. 보라는 1등을 놓치면서 약간의 데미지는 입었을지언정 여전히 교실의 중심이다. 아이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입맛에 맞게 떠들고 다니면서 선은 거지로, 지아는 도둑으로 추락시켰다. 보라의 코는 마음에 안 드는 사람에겐 나지도 않는 퀘퀘한 냄새를 맡는다. 주변에 시녀처럼 떠받드는 친구들이 맞장구를 친다.
선과 지아는 뭔가 잘못된 줄 알면서도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한다. 전학생인 지아가 선이와 절친이 되었다. 심지어 지아는 선이네 집에서 꽤 오래 먹고 자고 했다. 지아가 개학날 냉담할 줄 선이는 몰랐겠지만 관객들은 예감했을 것이다. 보라와 팔짱을 끼고 가는 그 순간부터. 친구 사이란 게 때론 연인 사이보다 무섭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고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면 보라와 같이 다니는 게 그렇게까지 큰 의미가 없다는 걸 알게 되겠지만 지금에 둘에겐 중요한 문제다. 보라의 눈밖에 나는 건 왕따가 되는 지름길이니까. 왕따를 당해봤기 때문에 둘도 어쩔 수 없이 침묵하거나 동조한 순간이 있으리란 건 짐작할 수 있다. 혼자가 되는 건 말도 안 되는 비아냥거림마저 도움 없이 견뎌야 하는 괴로운 일이다. 그게 싫어서 견디게 된다. 조금 치사하고 찜찜하더라도 보라가 원하는 대로 맞췄던 것이다.
같은 공간에서 의무적으로 시간을 보내는 학교는 우리에겐 정글과 다를 게 없다. 인싸와 아싸, 순화하면 주류와 비주류에 대한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 누군가는 관심의 중심에 있고 싶어 하고 그 사이에 자리를 잡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다. 사이좋게 친하게 지내라고 말하기보다 온전히 살아남으라고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몸싸움은 나면 차라리 티라도 나지만 그 외의 것들은 선생님에게 말씀드리기도 어렵다. 선생님마저도 소외된 학생이 없도록 교실을 이끌기 힘들다. 교실은 결국 혼자 살아남아야 하는 곳이다.
물론 학교 밖이라고 전혀 상관없는 건 아니다. 경제적인 상황이 친구를 제약하기도 한다. 어떤 부모님들은 급이 맞는 친구들과 지내라고 아이들에게 조언을 한다. 어떤 아이들은 "너희 집은 전세야, 자가야?" 같은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물어본다. 지아에게 선은 조금은 같이 다니기 쪽팔린 친구였을지도 모른다. 좁은 집에 에어콘도 없고, 핸드폰도 없고 학원을 다니기는커녕 색연필을 사거나 같이 놀기에도 돈을 걱정하는 친구였다. 집이 부유하지 않은 것도 약점이 된다.
나 역시 초등학교 친구들의 생일파티에 가지 않았고 친구네 집에 놀러 가지 않았다. 물론 우리 집에서 생일파티를 하거나 집에 초대하지 않았다. 우리 집과 비교 대상을 머리에 남기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멋모르고 친구네 생일파티에 한 번 갔더니 불편했다. 주택인 우리 집과 달리 아파트였다. 그네가 있는 놀이터, 소파가 있는 넓은 거실, 내 방이 있는 친구들의 집. 생일이라고 맛있는 과자며, 치킨과 피자를 시켜놓고 친구들을 불러 선물을 나눠갖는 모습에 이질감이 들었다. 배배 꼬였는지 몰라도 자랑처럼 느껴졌다. 친구 자랑, 집 자랑. 나에게는 없는 것. 내가 부모님에게 요구할 수 없는 것. 게다가 생일에 초대받는다고 꼭 절친하다는 의미도 아니고. 학교에서만 친하게 지내도 되는 건 아닌가 싶고.
지금은 돌직구를 툭툭 던지곤 하지만 영화 속 선이와 초등학교 때 내가 무척 비슷했다. "아니, 그게 아니고......" 하면서 할 말은 못 하고 나중에 집에 와서 받아치지 못한 게 바보 같았다. 학교에서의 힘은 단순하다. 친구가 많거나 공부를 잘하거나, 재밌거나, 예쁘고 잘생겨서 인기 있거나. 시험에서 1등을 놓친 보라가 지아가 받는 박수와 칭찬에 아쉬워하며 혼자 우는 걸 보니 그랬다. 교실엔 수많은 학생이 있지만 1-2등 사이는 경마 시합처럼 경쟁을 부추긴다. 친구가 많고 매력이 넘치는 친구들이 내심 부러웠지만 티를 내진 않았다. 가끔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대못을 박고 가면 눈물을 참느라고 고생했다. 속상하고 억울하면 눈물부터 차올랐던 건지. 몸이 말을 듣지 않아서 더 속상했다. 화장실에 있던 낙서, 냉랭한 걸 넘어 심지어 역겨워하는 듯한 표정. 재수가 없다거나 말이 많다거나 표정이 이상하다거나? 이유가 뭐가 됐든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지금도 여전히 상처는 받겠지만 어느 정도 내려놓았다.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할 수는 없는 거다. 내 탓만 할 필요는 없다. 특히 나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세상에 그런 사람만 있는 것도 아니다.
사람 때문에 한 번 쓸쓸함을 느끼고 나면 쓸쓸해 보이는 사람이 저절로 눈에 들어오게 된다. 선이 자신에게 까칠하게 구는 지아가 계속 눈에 들어온 건 비슷한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혼자 뻘쭘해하거나 겉돌고 있는 모습이 마음에 걸린다. 그 모습을 보면 확신이 생긴다. 왕따를 당하는 이유가 있다고들 하지만 완전히 동의할 수만은 없다. 이유 없는 왕따도 분명히 있으니까. 누군가를 괴롭히거나 자기 자신을 과시하고 다니는 사람 말고 아무런 잘못 없이도 왕따를 겪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기 때문이다. 조용하고 혼자라서 만만하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하다.
남보기에는 평범하고 내가 겪기엔 다사다난한 초등학교 시절을 보내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출제자의 의도와는 관계없는 순도 100% 진심을 담은 글을 제출했다. 학교폭력을 예방하는 글짓기 대회에서 '파'가 생기는 걸 조심하자고 썼다. 여러 명이 몰려다니는 친구들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대표가 있다. 그 친구의 이름을 따서 '00파'라고 이름 붙였다. 우리는 파를 이끌거나, 파에 속하거나, 어느 파에도 속하지 않은 주변인이 되거나 셋 중에 하나다. 파끼리 갈등이 생기기도 하고, 파에서 주도권을 가진 친구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대체로 소외된 친구)을 괴롭힐 수 있는 가능성을 지적하는 글이었다. 상도 타지 못했고 어떤 선생님이 그 글을 읽고 흥미로웠다고 얘기를 눈앞에서 듣고선 민망함에 도망쳤다. 머릿속을 그대로 보여준 기분이었다.
10여 년이 지나도 여전히 내 생각은 비슷하다. 몸싸움만이 폭력이 아니고 눈에 잘 띄지 않은 말이나 행동 역시 폭력이다. 약간의 아쉬움이라면 조직폭력배같이 00 파라고 설명했던 점. '또래집단 간의 역학관계'로 바꿔서 말했으면 좀 전문성이 있었을까. 역학관계가 불균형해졌을 때 폭력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으니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나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애초에 학교폭력 예방에 선생님들이 기대하던 답이 무엇이었을까?
초등학교가 끝날 무렵 나에게도 희한한 일이 생겼다. 5-6명과 함께 다니는 친구가 있었다.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밝고 친구도 많았다. 어느 날 갑자기 우리 모임에 들어오지 않겠냐고 제안을 하더라. 좋으니 논의해보고 얘기해달라고 답했다. 그런 제안을 받은 게 신기했다. 같이 다니면 좋고 아니면 말고 식의 마음이었다. 그래서 논의 결과를 듣자 하니 한 사람이 반대해서 아쉽지만 들어오지 못하게 되었다는 거다. 그런가 보다 했는데 지나고 나니 궁금했다. 들어오라고 제안을 한 친구나, 반대를 한 친구나 무슨 의미로 그랬을까 하고. 아쉽지 않았다. 어쩌면 나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평가 내리진 않았을까 그런 상상이 들어서였던 것 같다. 마음에 안 든다든지, 같이 다니면 불편하다든지 등의 이유로 말이다. 만약 그랬다면, 내가 생각하던 친구와는 거리가 멀었을 것이다.
(윤 눈두덩이에 멍 발견)
"윤아, 너 왜 계속 연호랑 놀아."
"응?"
"아니, 연호가 계속 너 다치게 하잖아. 맨날 상처 내고 때리고, 장난도 너무 심하고."
"이번에 나도 같이 때렸는데."
"그래?"
"응, 연호가 나 때려서 나도 쫓아가서 연호(머리) 확 때렸어"
"그래서?"
"그래서? 연호가 일어나면서 여기를(눈)을 확 때렸어"
"그래서?"
"그래서 같이 놀았어."
"... 놀았다고?"
"어, 보물찾기 하러 나갔는데."
"야, 이 윤, 너 바보야? 그러고 같이 놀면 어떻게 해?"
"그럼 어떡해?"
"다시 때렸어야지"
"또?"
"그래. 걔가 다시 때렸다면 또 때렸어야지. "
"... 그럼 언제 놀아?"
"...... 어?"
"연호가 때리고 나도 때리고 연호가 때리고 그럼 언제 놀아? 나 그냥 놀고 싶은데"
-영화 <우리들> 중
선의 마음을 돌린 건 이 대화가 유력했다고 본다. 순수하게 서로에게 잘해주고 솔직했던 때와 다르게 지금 지아와 선이의 관계는 상처투성이에 정도를 한참 지나쳤다. 아무리 그래도 건드릴 게 따로 있지, 싸울 때 최대 약점이나 가족은 건드리지 말라는 메뉴얼이 있었으면 좋겠다. 지아는 보라와 지내려고 왕따인 선을 무시한다. 반면 자신이 소외되니까 선의 아버지가 알콜중독자라며 자극적인 거짓 정보를 털어놓고 왕따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선 역시 이판사판으로 지아가 전에 왕따 당한 경험이 있고 어머니가 영국에 있다며 거짓말한 것들을 떠벌린다. 어른의 입장으로도 관계를 유지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심각한 사이가 됐다.
하지만 그럼에도 선이는 지아와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남았다. 지아와 함께 들였던 봉숭아 물도, 보라에게 빌려 바른 매니큐어도 다 지워진 손톱에는 봉숭아 물이 아주 약간 남아있다. 딱 그만큼의 마음만큼 지아와 함께 지내고 싶었을 것이다. 분명 둘만 있었을 때는 즐거웠던 시간이었고 이 모든 건 학교에서 보라를 사이에 두고 시작된 것이니까. 나 역시 선이처럼 맞으면 또 때려야 하는 건 물론이고 2-3배는 더 때리자는 주의였는데 윤이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선이는 지아에게 상처받으면서도 여전히 지아를 놓지 않았다. 상처를 받았다고 언제까지 얼마나 돌려줘야 하는 걸까. 그 길로 다른 친구와 놀든지, 아니면 때리는 손을 멈추고 그 친구와 다시 화해하고 놀든지. 윤이에게 배웠다.
선이에게도 선택권이 생겼다. 영화의 마지막. 피구 시합에서 팀을 짜느라 한 사람씩 골라간다. 아, 저 기분 뭔지 알지. 내가 '매력적인 선택지'가 아니라 입이 탄다. 최후의 1인이 되면 아무도 원하지 않는 사람이란 걸 확인하고야 마니 마지막만 아니었으면 좋겠는 심정. 지아가 바로 그 찌끄레기가 된다. 찌끄레기에겐 사람들이 함부로 대한다. 선을 밟았으니 나가라며 고집을 피우고 아무도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 영화 초반 선이 당했던 상황 그대로다. 여태까지 선에게 했던 걸 생각하면 지아가 그 꼴을 당하고 있어도 선이 역시 침묵해도 상관없었다. 선이 말고 다른 사람들도 입이 있지만 아무 말 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선이는 목소리를 내어서 지아가 선을 밟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우리가 살아남은 역학관계에서는 단 한 사람의 목소리가, 단 한 사람이 내 편이 되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꼭 주류에 속하는 게 아니라, 꼭 많은 사람을 알고 지내지 않아도 된다. 지아 역시 깨달았을 것이다. 가장 내가 보잘것없고 도움이 필요할 때 도움을 준 선이야말로 진짜 친구라는 걸. 고마움이라도 담았는지 두 손 모아 쭈뼛쭈뼛 서있는 지아와 전보단 당당해 보이는 선의 모습을 보면 앞으로의 일은 모른다. 둘이 이 지경까지 온 건 보라 때문이란 걸 깨닫고 보라에게 벗어나려고 할지는 확실하지 않다. 선이 지아를 위해 목소리를 냈을 때처럼 지아가 그렇게 해줄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선과 지아가 보라를 부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 부러워할 필요가 없단 건 쉽게 알 수 있다. 근처에 있는 친구들은 언제든지 보라를 떠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필요해서 곁에 있는 거니까. 보라보다 더 공부를 잘하고 집안이 넉넉한 친구가 생기면 바로 갈아타고도 남을 것이다. 둘이 그렇다고 보라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보라가 했던 일을 증명하기는 어렵다. 가장 쉬운 방법은 가만히 지켜보는 것이다. 놀랍게도 그런 사이는 누가 알아서 망가뜨리지 않아도 스스로 끝난다. 세 사람 중 한 사람만 자리를 떠나도 그 사람을 욕을 맛깔나게 하다가 들킨다든지. 어떻게 아냐고? 직접 봤으니까. 그런 싸움은 팝콘이나 먹으면서 지켜보면 된다.
그러니 선이 아버지처럼 "애들이 고민이 뭐가 있어, 학교나 가고 공부나 하면 됐지"하시는 말씀은 참 속상한 이야기다. 공부할 땐 초등학교가 평생을 좌우한다고도 하는데 사회생활은 평생 좌우하지 못하리란 법도 없다. 어떤 학창 시절도 쉽지 않았다. 학교 가고, 공부하고, 친구와 교실에서 지내는 매일이 보이지 않는 힘 사이에서 우리가 비틀거리며 고민하던 시간이었다. 잔인하고도 한편으로는 즐거웠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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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에겐 익숙한데, 걔네들에겐 낯선가 보네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의 성적을 살펴보자!
$411,331,607의 북미 수익과 해외 수익까지 합친 총 수익 $955,775,804은 현재(22년 9월 7일 기준), 전 세계 박스오피스 3위이다. - 북미 수익은 2위이다!
그렇다면, 영화 <블랙폰>은 어떨까?
$89,610,100의 북미 수익과 합친 총 수익 $158,206,100으로 현재(22년 9월 7일 기준), 전 세계 박스오피스 21위이다.
근데, 이 두 영화를 왜, 연결 지었을까? - 그건,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의 감독에서 하차하고서 만든 작품이 <블랙폰>이기 때문이다.흥행만 본다면, 진한 아쉬움이 남겠지만 반응은 오히려, <블랙폰>이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보다 더 좋았다. -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는 전문가 74%와 관객 86%, <블랙폰>은 전문가 84%와 관객 90%로 더 높다.
영화는 "그래버"에게 납치된 "피니"가 방 안에 전화기를 통해, 희생당한 아이들의 도움을 받아 이곳을 탈출하는 내용이다.1. 우리에겐 익숙한데, 걔네들에겐 낯선가 보네
근데, 북미 호평과 다르게 국내에서 관람하는 <블랙폰>은 김이 빠질 수도 있다.
이런 이유에는 해당 작품에서 보여주는 "피니"의 조력자 아이들에게 친근하고 익숙한 국내 귀신의 모습이 겹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컨저링 시리즈, 2013-21>만 보더라도, "귀신"은 대상자들을 정하는 데에는 불특정 대다수로 원인 없이 결정되어 "악(惡)"으로만 바라본다.
그에 비해서, 국내 귀신은 '한(恨)'이라는 정서를 통해 "원인 - 결과"로 이야기를 만든다.어찌 보면, 지난 북미에서 <블랙폰>이 많은 사랑을 받은 이유에는 고착화된 이미지를 탈피했다는 것이 클 것이다! - 퇴마(退魔)와 성불(成佛)의 차이?
그렇기에 더더욱 "스티븐 킹"의 <그것, 2017-19>시리즈와 겹치기까지 한다.
아이들의 두려움으로 탄생한 "페니 와이즈"로부터 성장담을 보여줬던 양화 <그것>처럼 해당 작품 <블랙폰> 역시, 알코올 중독에 빠진 아버지와 귀신을 보지만 자신과 달리 적극적인 여동생 "그웬" 등을 배치하며, 궤를 같이 가려 한다.2. 마동석이라면, 달랐을까?
그렇기에 악당을 맡은 "그래버"의 "에단 호크"는 그야말로, 미친 연기를 선보이나 단순한 "싸이코"에 그친다.
이런 이유에는 "페니 와이즈"가 각 아이들의 두려움으로 변했던 설정과 서사에서 나왔던 것과 달리, 이야기가 없다.
앞서 "하우스 호러의 클리셰를 깨부쉈다"라는 말이 머쓱할 정도로 "그래버"는 지고지순하게 "정도(正度)"에 벗어나지 않는다.
이외에도 영화 <블랙폰>의 이야기 전개에 아쉬움이 생긴다.이야기에서도 말했듯이 귀신을 볼 수 있는 "그웬"과 죽은 아이들과 통화할 수 있는 전화기는 극의 긴장감을 현저하게 줄인다.
결국, 찾아낼 수 있을 것이고 해답 또한 준비되었으니 문밖에 무서운 "그래버"가 있다 한들, 극의 서스펜스를 느끼기에 어려움이 많다.
무엇보다 마지막에 도움을 주는 아이의 모습은 <샤먼킹, 1998-2004>과 <블리치, 2001-16>같이 "혼령"이 나오는 만화도 연상시켜 "공포 영화"가 아니라 "엔터테이닝 영화"로 봐야겠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tmi. 1 - 원작자 "조 힐"은 가능한다면, 실사화를 "스콧 데릭슨"을 선택했지만 당시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의 촬영으로 무산될 뻔했으나, 하차함과 동시에 "러브콜"을 보냈다고 합니다.
· tmi. 2 - 이후 "스콧 데릭슨"이 승낙하자 제작사 "블룸 하우스"는 그의 자택 지하실에 똑같이 전화기를 설치해 캐스팅 소식을 알려줬다고 한다. (감독님, 정말 무서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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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면 붙잡을 지푸라기는
<머터리얼리스트(Materialists)>(2025, 셀린 송)
* 작품의 장면과 결말 포함
<패스트 라이브즈>에는 24년 만에 재회한 노라와 해성이 결혼에 관해 대화하는 장면이 있다. 해성은 현재 연인과 조건이 맞지 않아 결혼하기 어렵고, 때문에 잠깐 떨어져 있는 상태라고 말한다. 노라와 아서의 결혼은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젊은 예술가 지원 프로그램에서 처음 만나 연애를 시작했고, 노라의 그린카드를 위해 예정보다 이르게 결혼했다. 아서는 그들의 이야기가 ‘지루하다’고 평했지만, 현실에서 노라와 아서의 서사는 가장 낭만적인 축에 속하지 않을까. 노라에게 있어 해성이 한국, 과거의 추억을 대표하는 존재였다면 해성에게 있어 노라는 환경과 조건을 따질 필요 없이 서로를 좋아하는 마음만이 중요했던 시절의 상징이었는지 모른다. 물리적 거리라는 환경이 그들을 멀어지게 했음에도 말이다.
<머터리얼리스트>, 커플매니저 루시의 고객들 중 노라나 아서처럼 가난한 작가는 아마 없을 것 같다. 결혼을 위해 누군갈 고용할 만한 형편이 되는, ‘내세울 만한’ 직업과 연봉, ‘봐 줄 만한’ 외모를 지녔고, 적당히 화목한 환경에서 성장한 이들이 매치컴퍼니의 주 고객층으로 보인다. 그 가운데에서 루시는 각자 내건 조건들을 바탕으로 ‘박스 체킹’을 하고 ‘리스크’를 고려해 두 사람을 엮는다. <패스트 라이브즈>의 삼각형이 노라와 과거-서울, 현재-뉴욕의 관계가 이루는 것이었다면, <머터리얼리스트>의 삼각형은 루시와 물질 기반 연애, 그리고 사랑을 잇는다. 영화가 블랙코미디의 톤으로 훑어내리는 ‘결혼 전제 연애’들을 살피다 보면, 단 하나의 공감대로 데이트가 가능한 <더 랍스터>(2015) 속 암울한 호텔이 오히려 낭만적이라는 생각마저 든다(농담이다). 셀린 송 감독이 한 인터뷰에서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언급하기도 했듯[Indiewire], 이같은 ‘결혼 시장’은 현대에 더 상업화/조직화 되긴 했으나 오래 전부터 존재했다. 때문에 영화는 원시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했던 것일 테다. 오로지 ‘너’와 ‘나’, 꽃다발만이 함께하는 결혼을 묘사하는-아마 루시의 상상일- 오프닝 시퀀스는 다소 순진해 보이긴 해도,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선명하게 짚는다.
여기에 이질적인 뉴욕의 풍경과 출근 전 공들여 스타일링하는 루시의 모습이 뒤따른다. 잠재적 연애 상대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라기보단 무의식적 환상을 심어 고객을 늘리기 위해서로 보인다. (실제로 루시가 자신을 대놓고 훑어보는, 정장을 빼입은 키 큰 남자에게 매치컴퍼니 명함을 건네는 장면이 있다. 그는 후에 ‘20대 초반 여성과는 세대 차이가 나고 30대는 부담스러우니 27세의 여성과 매치해달라’고 요구하는 고객으로 재등장한다.) 연인들을 이어주는 게 일이면서 정작 자신은 연애에 회의적이다. 누군가의 결혼이 성사될 때마다 환호하며 파티하는 매치컴퍼니 직원들, 화면 한켠에는 정서적으로 동떨어진 루시가 있다.
이런 루시에게 영화같은(영화가 맞다) 우연이 찾아온다. 그는 짝지어준 커플의 결혼식에서 두 남자와 조우한다. 신랑의 형제 해리와 전 연인 존. 해리는 그야말로 완벽하다. 큰 키에 준수한 외모, 안정적이고 전문적인 직업, 상속받은 경제적/심리적 여유. 웨이터로 일하던 중인 존의 조건은 루시가 익히 아는 그대로다. 좁은 아파트에 룸메이트와 살며 연기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해 생계를 유지하기 바쁘다. 다른 영화였다면 루시는 마법처럼 해리에게 이끌리고 존은 이들을 방해하는 찌질한 전남친 포지션으로 강등됐을수도 있다. 허나 주인공 여성과 사랑에 빠진 남자가 편리하게도 부유한 ‘유니콘’인 로맨틱코미디의 법칙을 <머터리얼리스트>는 거부한다. 영화가 그리려는 건 짜릿한 삼각관계의 긴장이나 만족스러운 판타지가 아니다. 루시는 선택을 해야만 한다. 결혼을 ‘비즈니스’로 여기는 관점에서는 해리가 ‘객관적으로 좋은 옵션’이다. 사람을 보면 자동으로 조건을 따져 평가하곤 하는 루시가 해리를 붙잡으려 애쓰지 않는 게 의아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사실 루시의 잣대는 본인에게 더 엄격하다. 해리와 데이트하며 끊임없이 ‘당신은 나보다 더 어리고 잘난 여자를 만날 수 있다’고 말하고, 존과 대화하는 와중엔 속물적이라며 스스로를 깎아내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만이 루시가 망설이는 이유는 아니다. 여기 통제되지 않는 변수가 있다. 루시와 존이 아직 서로를 사랑한다는 점이다.
해리는 돈 많은 나쁜 남자가 아니다. 존이 마냥 상냥하고 착한 남자인 것도 아니고. 해리는 자상하다. 도덕적 결함도 없다. 자기 소유 고급 맨션에서 혼자 사는 그는 대개 여유로운 아침을 맞이하고, 그 여유는 곁에 있는 루시에게로 흘러넘친다. 낡은 아파트를 룸메이트와 공유하는 존의 아침은 매번 다급하고 신경질적이다. 루시와 존은 과거에 25달러 때문에 꽉 막힌 도로에서 언성을 높인 적이 있다. 해리가 ‘길에서 싸우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고 루시가 ‘나는 길에서 싸우는 사람’이라고 답하는 대화는 상징적이다. 루시의 말대로 우리는 자주, ‘부모가 싸우는 방식을 물려받는다’. 경제적/문화적 자본이 넉넉하다 해서 꼭 해리처럼 우아한 남자로 성장하리란 법도 없다. 나이, 신장, 연봉, 직업 따위 물질적 조건은 마크가 범죄자라는 걸 말해주지 않았다. 소피가 그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걸 알게 된 루시는 수첩에 적어둔 고객 정보 리스트를 읽으며, 그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건 사실 아무것도 없었음을 깨닫는다.
이런 것들을 고려하고 언급하며 보기보다 순진하지 않은 태도로, <머터리얼리스트>는 결국 붙잡을 만한 지푸라기는 사랑일지도 모른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루시가 청혼을 받아들이는 까닭은 결혼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상대가 존이라서다. 그가 ‘낡은 차가 고장날 때까지 너와 함께 드라이브해도 좋겠다’고 느끼는 순간- 거기에 영화는 희망을 심는다. 생각해 보면 ‘내가 그를 사랑하고 그도 나를 사랑한다’는 건 얼마나 운좋은 일인가. 왜 선뜻 사랑을 택하면 안되나, 왜 스스로를 경멸하면서까지 물질적인 조건을 따져야 하나. 이를 뒤집어, 사랑하지 않는데 굳이 결혼할 필요가 있느냐는 질문으로 바꿔 볼 수도 있다. 영화는 (다분히 이성애 규범적인) ‘성공적인’ 결혼이 오랫동안 행복 서사의 필수 요소였던 세상에서, 인간의 연애와 결혼에 대한 본질적 물음을 던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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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의 음모를 말하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씨스피라시>
- 씨스피라시 (Seaspiracy, 2021)
감독 : 알리 타브리지 │ 각본 : 킵 앤더슨
제작 : 영국, 다큐멘터리 │ 러닝타임 : 1시간 30분육식에 대해 맨 처음 생각해보게 된 건, 조너선 샤프란 포어의 책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를 읽었을 때였다. 채식에 대한 이해가 풍성해진 요즘에 와서는 다소 뻔한 이야기다. 동물이 우리 식탁으로 오기까지 어떤 과정을 겪으며, 얼마나 고통받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 그때 나는, 잠시나마 내가 내 식습을 조절할 수 있을 거라는 오만으로 채식을 실천해보기도 했었다. 물론 얼마 가지 못했다.
그 이후로 채식을 해 본 기억은 없다. 살면서 영원히 고기·생선을 안 먹을 자신이 없었다. 물론 내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내가 먹는 동물들이 피를 뿜고 절단되고 있다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었지만, 알면서도 고기를 끊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꽤 오랜 시간 그게 나 스스로의 절제력이 부족한 탓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근에 넷플릭스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는 다큐멘터리 영화 <씨스피라시>를 보고 난 이후, 나는 내가 품고 있던 생각 세 가지가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첫째는, 인간이 동물을 먹는다는 것이 비단 동물보호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환경 문제로까지 연결된다는 점. 둘째는, 이런 문제를 알고도 채식을 하지 못하는 것이 단지 ‘개인의 절제력’ 문제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는 점. 셋째는, 우리가 채식을 이야기할 때 주로 포커싱하는 육지동물만큼이나 해양동물들도 고통받고 있다는 점이었다.
영화의 제목 ‘씨스피라시(Seaspiracy)’는 ‘바다(sea)’와 ‘음모(conspirac)’를 합쳐 만든 말이다. 바다의 음모. 우리가 오해하고 있던, 우리를 오해하게 만들었던 그 부분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고발성 다큐멘터리로 제작한 사람은, 감독 ‘알리 타브리지’다. 알리는 어린 시절 돌고래와 바다를 좋아했고, 그래서 바다에 대한 작품을 만들려다가 우연히 이 ‘바다의 음모’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는 바다를 사랑하는 의식 있는 사람답게, 바다를 더럽히는 플라스틱을 줍고 다녔다. 이는 우리도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우리가 버린 플라스틱 쓰레기가 태평양에 모여 섬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 빨대가 바다거북이의 콧구멍을 찔러 죽이고 있다는 사실들 말이다. 그래서 플라스틱 빨대를 종이로 바꾸고 커피 매장에서 유리컵 사용량을 늘리면, 다시 바다가 회복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며 우리 모두 힘쓰고 있지 않았는가. 그런데 그게 바로, 음모였던 것이다.
우선 이 다큐멘터리가, 감독 자신이 직면한 사실들에 너무 충격받은 나머지 흥분을 하여, 몇 가지 통계적 오류와 극적인 편집으로 논란을 빚은 바 있다는 걸 밝히고 싶다. 하지만 몇 가지 오류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대단히 주목받고 있는 이유는 분명 방향성 때문일 테다. ‘어류 섭취’와 ‘해양 보호’에 대해 우리가 까마득하게 모르던 뒷면이 이 다큐를 통해 처음 세상에 드러났으니까.
문제는, 빨대도 미세 플라스틱도 아니었다. 물론 그것들도 해양생태에 문제를 야기한다. 하지만 더 광범위하고 중요한 건 ‘상업적 어획’에서 오는 문제들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아마도, 자신이 먹는 고등어를 잡기 위해 바다사자나 돌고래가 그물에 함께 걸려 죽는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 모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 ‘부수어획’에 의해 죽는 해양생물들이 엄청나다고 한다. 고등어를 잡기 위해 걸린 거북이, 상어, 돌고래, 바다사자 등등 대다수의 부수어획 생물들은, 원래 잡으려던 대상이 아님에도 그물에서 올려지면서 죽는다고 한다. A를 먹기 위해 B, C까지 포획하게 되는 것이 바로 어업의 실상이었던 것이다.
또 한 가지 충격적이었던 건, 바다를 오염시키는 주범이라고 알고 있던 플라스틱에 ‘어구’가 포함되어있다는 점이었다. 그물을 포함한 이 어구들은 모두 플라스틱이며, 매해 엄청난 양의 어구들이 바다에 버려지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바다거북이를 떠올리며 사용을 자제하는 플라스틱 빨대에 비해 상상도 할 수 없는 양이다. 하지만 그간 어디에서도 바다를 오염시키는 플라스틱의 상당수가 ‘어구’라는 것을 말해준 적 없었다. 바다의 음모가 아니면 무엇일까.
나는 단지 이 영화가, 인류가 생선을 너무 먹어대서 고갈되고 있다는 이야기쯤으로 기대했었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어류 섭취가 생각보다 복잡한 많은 문제들을 야기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어 놀랐다. 무분별한 포획으로 인한 어류 개체수 감소는 물론이고, 부수어획으로 걸려드는 다른 생물들의 불필요한 죽음, 바다에 버려지는 어마어마한 플라스틱 어구, 어류 감소로 인해 바다의 산소배출량이 줄어드는 점, 그게 지구의 온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점까지.
이 영화를 보고 나면 필연적으로 이런 생각에 도달하게 된다. 지구는 정말로 하나의 유기체이고, 우리 인류가 전적으로 지구를 망치고 있다는 생각 말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든다. 이 커다란 지구를 보호하는 데에 개개인에게 그 무거운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고. 인류의 숫자는 자그마치 70억이다. 그 많은 숫자로 빚어진 인류는 이를 통제해 줄 시스템의 영향 아래에 있다. 위에서의 강력한 통제 없이, 개개인의 어류 섭취 중지를 요구하는 것은 과연 합리적인 방향일까. 지구가 고통받고 있으니 당장 채식해!라고 하는 건 너무 무책임한 발상이 아닐까.
이 영화를 본 환경단체 ‘그린피스’의 말을 몇 마디 인용해보겠다. 「해산물을 더 이상 소비하지 않는다면 좋겠지만, 진정한 힘은 우리 모두가 함께 노력할 때 빛을 발합니다. 상황이 더 악화되기 전에 변화를 일으키려면 세계 여러 국가 정부에 압박을 넣어야 합니다. 바다를 위한 정책과 규제를 만들 수 있도록 말이죠. 바다에게는 지구의 모든 사람들이 채식주의자가 될 때까지 기다릴 시간이 없습니다. 」
내 생각도 그렇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에게 고등어 한 마리를 구워주고 싶었을 엄마, 부모님에게 참치회를 사드린 여느 자식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만이 환경을 개선하는 방법이 아니라고 느낀다. 조금 더 조직적인 힘, 시스템의 강력한 변화 등을 통한 ‘위에서 아래로’의 개선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나는 인류가 고기와 생선의 단백질 섭취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종족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온 세상 사람들이 지구를 위해 채식을 감행하는 날이 올 리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부 차원에서 어류 섭취 제한에 대한 정치적 제도를 마련한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질 수 있다.
월화수목금 살 수 있던 생선을 월수금만 살 수 있다면, 까다롭고 투명하게 포획된 어류만이 우리의 식탁에 오를 수 있다면, 어업종사자들이 플라스틱 어구를 모두 친환경 어구로 바꾸어야만 바다로 나갈 수 있다면. 툴툴대더라도 사람들은 점진적으로 그 궤도를 결국 따라가게 되지 않을까. 우리는 그렇게 개고기 시장을 없앴고, 미세 플라스틱 제조를 금지했으며, 플라스틱 빨대와 컵 사용량을 줄여왔으니까.
환경도 채식도 페미니즘도 모두 그렇게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인의 무지만 탓해서는 아무것도 바뀔 수 없다. 진정한 의미의 운동은, 올바른 사회 시스템에 개인의 의식이 더해져야 완성될 수 있다고 믿는다. 바다를 지키는 일도 분명히 그 선상에서 이루어지리라 믿는다.
그러나 이 거대한 문제들 속에서도 지금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하나가 있다면, 그건 바로 ‘샥스핀’을 먹지 않는 것이다. 지느러미만 잘린 채 바다 밑을 동동 굴러다니다 죽어가는 상어의 모습을 검색해보시라. 우리가 참치는 당장 못 끊어도, 상어 지느러미를 소비하지 않는 것쯤이야 지킬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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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재 감독의 헌트, 올 여름 가장 재미있는 영화
?Rabbitgumi 입니다!
올 여름 그동안 개봉하지 못했던 큰 영화들이 극장에 공개되었는데요.
이정재 감독의 헌트는 그 리스트의 맨 마지막에 위치한 작품이었습니다.
이정재 배우가 감독으로서 첫 연출을 맡은 작품이기도 했죠.
25년 지기 친구 정우성과 같이 공동 주연을 맡았는데요.
이 영화 흥미진진한 액션 스릴러입니다.
첩보 장르의 특성도 잘 담겨 있구요.
이 영화가 어땠을지 좀더 자세히 알려드릴게요! :)
자세한 리뷰는 영상을 참고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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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백설공주> 티저 예고편
디즈니의 모든 이야기가 시작된 바로 그곳으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모두가 기다린 환상적인 이야기, [백설공주] 🍎 2025년 3월 극장 대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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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더 그레이트 샤크> 메인 예고편
행복한 휴가를 떠난 5명의 여행객.
그러나 우연히 상어에 의해 훼손된 시체를 발견하고
그들의 여행은 순식간에 공포에 휩싸인다.
높아지는 불안감 속에 급히 수상 비행기에 오르지만
굶주린 상어 떼의 습격으로 망망대해에 조난 당하고 만다.
가까스로 구명보트에 올라탔지만
그들 주위를 맴도는 식인 상어 떼로 인해
점점 두려움이 극한으로 치닫는데…
극한의 공포를 견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