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다2025-04-06 18:48:34
[스크린 너머 세계 속으로… 프랑스] 옥상 위의 민들레, 프랑스의 아스팔트 휴머니티
마카담 스토리
엘리베이터 수리비를 내시겠습니까?
스테른코비츠는 아파트 2층에 살기 때문에 엘리베이터 수리비를 내고 싶지 않다. 그는 엘리베이터 수리비를 내지 않는 대신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그는 사고로 휠체어를 타야하는 신세가 되고, 매일 밤 몰래 엘리베이터를 타고 외출한다. 그렇게 만난 야간 근무 중인 간호사. 포토그래퍼인 척하며 그녀의 호감을 사려 한다.
영화 볼래요?
옆집에 한물 간 여배우 잔이 이사 왔다. 그녀가 궁금한 샬리. 그녀의 영화를 함께 보기로 약속한다.
Can you speak English?
프랑스에 불시착한 미국 우주비행사 존. 프랑스어를 할 줄 모르는 그는 영어를 할 줄 모르는 하미다의 도움이 필요하다.
아파트 옥상 위에서 피어난 민들레처럼, 인간이 사라진 도시에서 인간의 정이 피어난다.
공동체를 위한 선택(엘리베이터 설치)에서 자신의 현재 이익을 고려한 선택(비용 내지 않기)를 하는 사람도 누군가를 사랑한다. 옆집에 이사 온 사람이 누군지 몰라도 말을 걸어본다. 상대의 말을 알아 들을 지 몰라도 함께 이야기하자며 음식을 건넨다. 낯선 사람과의 우연한 만남을 흘려 보내지 않고, 두 팔 벌려 환영한다. 프랑스식 환대인가 보다.
영화 내내 끼익 거리는 소리가 울린다. 공포영화였으면 결말의 거대한 암시로, 사랑영화였으면 애인의 심장박동으로 여겨졌을 테다. 이 영화에서 이 소리는 화제로 역할한다. 무득 들려오는 소리는 때로 귀신 소리가 되기도, 호랑이 소리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실체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우리가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교집합 없는 두 사람 사이에 교집합을 만든다.
영화의 결말에서 드러나는 소리의 정체는 자연과 인문의 기이하면서도 허무한 조합이다. 사실, 그것의 정체가 그리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애써 돋보기를 들이미는 김에 현미경까지 들이밀어 보자면, 이건 삭막하다는 아스팔트에 섬세한 스토리를 입히는 듯하다. 정확한 정체는 영화로 확인하길.
스토리는 러브의 다른 말. 해보지 않은 이야기를 애써 해본 척 하는 일. 본 적 없는 영화를 괜스레 같이 보는 일. 소리낸 적 없는 언어를 괜히 따라하는일. 그리고 다시 보자고 약속하는 일. 이게 현대인의 인간성이다. 내가 모르는 것을 네가 알기에 환영하는 일이 프랑스의 아스팔트 휴머니티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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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욱 강력한 귀여움으로 무장한 이 영화
어젯밤의 나로 시간을 돌린다. 김승옥의 <생명연습>을 읽다 책장을 닫았다. 10시에 약속이 있었다. 정확히 2시에 잤다. 새롭게 글을 쓰려고 했는데 뭔가가 생각나지 않아 노트북의 키보드를 치는 게 어려웠다. 화면을 켜놓고 정신 말짱한 채로 두 시간쯤 누워있었다. 웃긴 유투버의 영상을 보며 또 의미 없는 시간을 보냈다. 근데 생산적인 뭔가를 또 한다기엔 한국사 공부가 머리 안으로 안 들어왔으니 그럴 법도 했다. 아무튼 늦게 잤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내일(그러니까 오늘) 약속이 있으니 일찍 일어나야 했다. 6시간 넘게 좀 자서 8시 30분에 일어났다. 아침에 힘겹게 일어나 머리를 감아서 버스에 탔다. 식사는 어제 사놓은 빵으로 대체했다.
10시 약속인데 10시 10분가량에 도착했다. 일행 둘에게 미안하단 말을 해야 한다. 2주 전에는 글을 안 쓰고 왔는데 이번엔 지각까지 했다. 발바닥이 다쳐서 후다닥 뛰지를 못해 답답했다. 이 덕에 최대한 종종걸음으로 걸었다. 그렇게 느린 듯 빠른 속도로 스타벅스에 들어가니 아무도 없었다. 단톡방을 확인했다. 아무 말도 없다. 어? 일단 자리에 앉아서 부랴부랴 노트북을 켰다. 10시 20분이 됐다. 이상했다. 왜 아무말도 없고 아무도 없지? 톡방에 메시지를 남겼다. '이거 오늘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로. 친구들에게 답장이 왔다. '바보야 다음 주 12일이잖아'라고 한다. 하. 나의 정신머리에 통탄을 금치 못했다. 오랜만에 없는 이런 정신 빠짐은 늘 느껴도 새롭다. 그렇게 뭐하지 싶다가, 어제 밤에 읽던 김승옥의 소설집을 꺼내 <건>을 읽던 도중에 갑자기 생각났다. 김형은 꿈틀거리는 것을 사랑하시오? 나의 일상도 그런 꿈틀거림의 연속이었다. 이런 바보 같은 일상도 어떤 관점에선 꿈틀거린 것 중 하나겠지. 집에서 잉여롭게 과자나 먹으면서 시간 보내는 게 싫어서 이 아침에 밖에 나온 것 아닌가? 그렇게 머릿속을 둥둥 떠나는 생각을 흘려보내니 습관이 된 글쓰기에 이 영화를 다루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찌 보면 심심하고 외로운 나의 단면이겠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지극히 나스러운 시트콤 에피소드이기도 하다. 감독 웨스 앤더슨이 더욱 업그레이드된 덕후력(?)으로 작년에 신작을 발표했다. 자기만의 시각을 오롯이 다룬 채로 말이다. 제주는 상영관이 없어 디즈니 플러스로밖에 볼 수 없어 씁쓸했다. 그래도 ott에 풀리는 기간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좋은 작품이었다. 비행기로 13시간 걸리는 프랑스로 날아가자. 이번엔 가상의 도시 앙뉘다.
1. 어떤 것에 관한 영화인가요?
영화는 한 기자의 부고로 시작한다. 그 기자는 미국인 기자 아서였다. 미국에 살던 기사 아서는 프랑스의 도시 앙뉘에서 50년 전에 회사를 설립했는데, 그 잡지사의 이름은 '프렌치 디스패치'다. 좋은 필진들과 함께 다양한 콘텐츠를 만드는 아서. 50년 동안 열심히 잡지를 운영해왔지만 당연한 끝을 마주하게 된다.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난 아서. 아서는 유언으로 신문사를 폐업하라는 말을 남겨놓는다. 이에 대한 결과로 마지막 최종본 인쇄본 발간만을 남겨놓고 있는 <프렌치 디스패치>. 이를 위해 에디터들이 모여 자기가 잡은 소재거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는 것이 영화의 내용이다. 그러니까 다른 말로 하면 자기가 어떻게 세상에 대해 조사해온 바를 어떻게 창작자들이 자기만의 코드로 소화해냈는지에 대한 영화라는 뜻이다. 더 쉽게 이야기해보자면 영화의 명대사 같은 영화다. 당연히 명대사가 시네마의 속성 전부인 건 아니다. 뭐 연출력도 있고 개연성도 있고 이런저런 부분에서 좋은 작품을 각자가 판단하는 기준은 다양할 것이다. 근데 대사를 잘 못쓰면 각자가 생각하는 중요한 가치들을 예술가가 어떻게 해석하는지를 잘 못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그렇게 대사와 같이 인물과 감독이 어떻게 세상을 극화시키는지를 소재로 삼는다.
다른 지점은 감독의 전작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과 공통점을 갖는다. 이는 지나간 것에 대한 그리움이다. 기사를 쓴다는 것은 전적으로 과거의 어떤 것을 바탕으로 하지 않나. 이 잡지사에서 어떤 것에 대해 기사를 쓰는 것은 과거의 사건을 기자가 쓰고 싶은 방식으로 내용을 만들었다는 뜻이다. 근데 그 기사를 쓰는 소재는 전적으로 저널리스트들에 따라 달려있다. 이 뿐인가? 어떻게 전달하는지도 창작자에 따라 달라진다. 기삿거리로 삼을 수 있는 몇몇 에피소드는 가슴이 아플 수도 있다. 가령 첫 번째 일화에서 화가는 자살하기 싫어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다. 그런데 만약 기사를 '이 화가는 매일 어두운 생각만 하는 범죄자'라는 기사가 나왔다고 가정해보자. 딱히 틀린 말은 없다. 그게 사실이니까. 근데 이 영화의 첫 번째 에피소드처럼 말을 전달한다면 약간 다른 뉘앙스로 접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이렇게 창작자, 예술자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나름대로의 세상을 보여준다. 때에 따라서는 그게 사랑스럽고 귀여울 수도 있다. 감독은 이 부분을 노렸다. 세 에피소드의 변용에 자기의 최대 장점을 활용하며 아름답게 이야기를 극화시킨 것이다. 그러면 알게 된다. 웨스 앤더슨이 지나간 것을 어떻게 보고 있으며, 정말 지나간 시간들이 아름답기 때문에 그게 멋진 걸까?라는 의문을 던진다는 걸.
2. 어떤 영화로 정의할 수 있을까요?
이야기하는 사람에 대한 영화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예시로 영화의 연출 방식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은 스포일러가 아니라서 말할 수 있지만- 영화는 컬러와 흑백 연출을 통해 말하는 이와 극의 주인공들을 별개로 구분해놨다. 이때 컬러로 처리한 사람들의 공통점을 보면 웨스 앤더슨이 어느 쪽에 중점을 더 두고 있는지, 또 세상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또 다음 두 번째는 창작자의 결과물이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어떤 효과를 줄 수 있는가?를 다룬다고 생각한다. <프렌치 디스패치>는 잡지사 아닌가? 이 잡지사의 직원들이 취재한 걸 기사 쓰는 것 역시 창작의 일종이라고 생각한다. 자기가 아는 이야기를 사실에 근거해서 독자들에게 알기 쉽게 전달한다. 또 나머지 두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화가/요리사다. 이 둘도 창작을 업으로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화가는 재료로 그림을 만들고 누구는 음식으로 행복을 준다. 기자와 같이 이 세 직업군은 어떤 것을 만드는 일을 한다. 근데 이게 나는 ~~ 다라고 말하면 독자들이, 소비자들이 그렇게 곧이곧대로 해석하나? 당연히 아니지. '그 어떻게 세상과 다른 해석을 보여주는가?' 역시도 보여준다는 것이다.
3. 이 영화의 장점은 무엇인가요?
미장센. 끝. 이 글을 읽는 몇몇 독자분들 중에 그라운드 시소라는 곳에서 열렸던 <우연히 웨스 앤더슨>이란 전시관에 가본 적이 있는 분 있을 거라 생각한다. 나는 제주에 살아서 이 전시관에 가지 못했다. 검색해보니 <그란드 부다페스트 호텔>이나 <문라이즈 킹덤>에서 나올법한 영감을 전시관에 전시했다고 나와있다. 이렇게 관련한 전시관도 열릴 정도로 웨스 앤더슨은 현대미술의 대명사(?)로 불리는 것 같다. 물론 나도 그에게 따라오는 이런 칭찬을 동의하는 바다. <문라이즈 킹덤>에서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연출했어서 웃음이 나왔지만 이 <프렌치 디스패치>는 아름다운 색감과 귀여운 유머가 재밌다. 어떤 느낌이냐면. 극에서 등장하는 도시 앙뉘는 그렇게 살기 좋은 곳은 아닌 것 같다. 일주일에 사체가 8.25구나 발견되고 지하철은 쥐가 많으며 아이들에게 노인공경 같은 건 없다고 초입부에 나온다. 딱히 영화로 삼을만한 곳이 아닐 수도 있다. 일단 나라면 거기서 안 산다. 근데 영화의 미장센과 장면 하나하나마다 있는 소소한 유머로 마을이 아름답게 보이기까지 한다. 이렇게 하나하나 신경 쓴 비율에 색감 덕에 영화를 보는 게 지루하지 않다.
4. 난이도가 있는 영화인가요?
막 엄청난 비유를 쓴다거나 그런 것은 없다. 근데 어렵긴 하다. 후술할 6번에서 알 수 있다.
5. 배우들의 연기는 어떠한가요?
티모시 샬라메. 프랜시스 맥도먼드. 레아 세이두, 에드리언 브로디, 빌 머레이 등등..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처럼 호화 출연진이 총 줄 동했다. 유명한 배우가 나온다고 해서 극의 연기 퀄리티가 확 올라가는 건 당연히 아니다. 그런데 이 배우들이 좋은 배우라는 것은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다. 특유의 웨스 앤더슨의 귀여운 세계관을 배우들의 다른 작품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녹여낸다. 분명 <듄>과 <노매드랜드>, <007 : 노타임 투 다이>에서 본 사람들인데 그냥 어딘가에서 데리고 온 다큐멘터리 같다. 난 영화언어에 놀랐다.
6. 영화를 보기 전에 알아야 할 사실이 있나요?
네. 있다. 이거 이 부분 모르고 가면 보는데 지장 있을 수도 있다. 대사량이 엄청 많다. 그래서 난 극장보다 디즈니+로 보는 게 나을 것이라 생각한다.
7. 어떤 사람에게 이 영화를 추천하고 싶나요?
그러니까 나 같은 사람들 있지 않나? 소소하게 귀여운거 좋아하는 사람. 지치는 경쟁에서 벗어나 사랑스러운 에너지를 받고 싶은 사람들은 이 영화가 좋을 것이다. 또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위시한 웨스 앤더슨의 팬이라면 무. 조. 건. 필견이다. 나는 이 작품이 이 감독의 최고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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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낭비할수록 채워지는 이상한 마법을 손끝으로 느껴본다면
※영화 〈시티 라이트〉의 주요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여기 도시를 떠돌아다니는 한 남자가 있다. 가진 것이라고는 낡고 펑퍼짐한 양복과 맞지 않는 모자, 지팡이뿐인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길모퉁이에서 꽃을 팔고 있는 한 소녀가 있었다. 그에게 부토니에를 사려했을 때 남자는 알게 되었다. 소녀의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잠깐의 만남 이후 그는 길 위의 삶을 그만두기로 한다. 대신 자신을 위해 웃어주는 한 사람을 위해 살기로 마음먹는다.
20세기 문화예술을 말할 때 빼놓아서는 안 되는 최고의 예술가이자 감독, 제작자 찰리 채플린의 영화 〈시티 라이트〉는 사랑에 빠진 눈먼 소녀를 지키기 위해 가난한 남자가 벌이는 고군분투를 그린 로맨틱 코미디다. 로맨스 장르에는 언제나 두 사람의 사랑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존재한다. 이는 중세 기사도 문학인 ‘로망스’부터 시작되었다. 기사와 귀부인이라는 계급과 신분의 차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플라토닉 사랑을 자아낸다. 닿지 못하는 사랑의 결실은 곧 귀족 사회의 도덕적 가치를 수호하는 매뉴얼이 된다. 명예와 품위를 잃지 않으면서도 겸손하고 금욕적인 기사도의 원형은 당대의 사회 질서를 지배했다. 이후 로망스가 로맨스 소설로 변화하면서 ‘낭만적 사랑’의 서사가 등장하고, 현대에 와서는 사라진 신분과 계급 대신 다양한 심리적, 물질적 장애물로 세분된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을 가로막은 집안과 신분을 지난 현대의 작가는 사장과 평직원, 북한의 장교와 남한의 유명 배우, 심지어는 도깨비와 인간 사이의 장애물까지 만들어낸다. 독자, 시청자, 또는 관객은 이 미끄러지는 위치와 관계에서 발생하는 정보의 격차로 발생하는 오해와 편견, 이별과 재회에 이목을 집중한다. 하지만 로맨스 장르의 또 다른 특징은 독자의 바람을 충족시키는 해피 엔딩으로 끝난다는 점이다. 사랑과 이별에 갈등하고 위기를 맞는 이들은 결국 절대적인 사랑의 힘이라는 우연 혹은 필연으로 재회하고, 행복한 결말을 이룬다. 롤러코스터처럼 종잡을 수 없는 갈등의 연속에도 이미 독자는 이 바람 잘 날 없는 사랑이 이뤄질 것이라는 기대를 은연중에 품는다. 독자는 로맨스 안에서 현실과 다른 환상적 사랑의 결실을 바라기 때문이다.
과거의 로맨스는 주로 우월적 지위의 완벽한 남성이, 그보다 낮은 지위의 선량하지만 수동적인 여자 주인공을 구원하고 해방하는 드라마였다. 이는 현대의 로맨스 장르에서도 여전히 통용되는 법칙이다. 다만 그 안에서 여러 설정과 관계성의 변주를 준다. 앞서 언급했던 도깨비와 인간의 사랑처럼 믿을 수 없는 능력의 탈인간을 남자 주인공으로 설정하거나, 여성의 지위가 낮았던 근대의 조선 양반집 여성과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한국계 미국인 남성을 주인공으로 설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대 로맨스 장르에서 특징 중 하나는 한쪽의 일방적 관계가 아니라 두 사람의 결핍이 서로 마주하며 성장해 동등한 지위를 만든다는 점이다. 이는 시대의 변화에 영향을 더 많이 받은 여성 캐릭터의 성장과 맞닿아 있다. 이제 로맨스의 여성은 과거의 인습에 따라 ‘도덕적 미덕’을 구현하는 존재로 남아있지 않다. 자신의 욕망과 목표를 정확히 인식하고 주체적 실현을 위해 노력한다. 무조건 선량하거나 씩씩한 캐릭터도 아니다. 좌절과 절망, 탐욕과 부정을 숨기지 않기도 하며,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거침없이 행동한다. 과거 남성과 여성의 구도가 전복되기도 하며 미스터리, 공포, 판타지 등 다양한 장르와 결합해 확장된 장르의 변용과 해체도 이루어진다. 완벽한 사람은 없다는 현실적 인식과 다양성의 확장이 맞물린 로맨스의 두 사람은 서로의 부족함을 깨닫고 연대와 성장의 길로 함께 들어서는 관계가 된다.
〈시티 라이트〉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마법에 빠진 것처럼 다른 사람을 돕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영화를 관통하는 이 무조건적 선의와 환대의 가치는 유성 영화의 시대에 들어선 1930년대를 마주 선 찰리 채플린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 연결된다. 찰리 채플린이 연기하는 남자는 거리를 떠돌아다니며 생활하는 단벌 신사다. 평소처럼 길을 걷다 첫눈에 반한 소녀는 소리만 듣고 우연히도 고급 자동차에서 나오는 부유한 남자와 그를 착각한다. 남자는 당황하지만 소녀의 사정을 이해하고 그를 돕기로 마음먹는다. 하지만 집도 절도 없는 사정은 본인도 마찬가지기에 여느 때처럼 방황하며 고민을 하던 중 강가에서 극단적 선택을 하려던 한 남성을 구한다. 그는 이 도시의 백만장자였고, 목숨을 살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준 찰리 채플린을 금세 친구로 사귀고 집으로 초대한다. 감정 기복이 심하고 술을 즐기는 이 백만장자는 찰리의 여러 사정을 묻지 않고 통 크게 그를 환대한다. 소녀를 돕기 위해 돈을 건네주기도 하고, 잠자리도 제공해 주는 등 선의를 베풀어 준다. 불의의 사고로 그와의 기억을 잃기 전까지는 말이다.
무성영화의 시대가 저물어 가는 1930년대 음향 기술의 도입에 반기를 들었던 그는 사회의 부조리에도 말없이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부의 불평등과 인간의 가치 하락을 꼬집는 블랙 코미디로써 영화는 사회의 약자들에게 가닿을 수 없는 도시의 불빛에 휘청거리는 소시민을 연기한다. 소녀의 집세와 개안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돈을 얻으려 했던 그의 노력은 안타까움 속에 담긴 익살스러운 슬랩스틱에 담겨 웃음과 함께 복잡한 감정을 자아낸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 보려는 노력은 번번이 실패한다. 결국 경찰에 쫓기는 범죄자 신세가 되어서야 소녀에게 돈을 쥐여줄 수 있던 그의 마음은 오로지 한 곳으로 향한다. 자신도 변변치 않은 현실에도 소녀가 세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고군분투하는 남자의 일대기는 뒤안길로 사라질 위기의 무성영화가 주는 그 울림과 가치를 고집스럽게 지켜내려는 감독 찰리 채플린의 심정과 닮았다.
이 영화를 말할 때 헬렌 켈러라는 인물을 빼놓을 수 없다. 찰리 채플린과 그의 짧은 만남은 영화의 스토리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었다. 찰리 채플린과 헬렌 켈러는 국가의 억압과 독선에 당당히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지금이야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내가 어릴 적만 하더라도 대중과 미디어에 비치는 헬렌 켈러는 ‘불굴의 의지로 장애를 딛고 삶을 이어 온 투혼의 인물’ 정도였다. 모두가 행복한 동화 속 헬렌 켈러의 삶은 그의 스승 설리번 선생님과의 유대관계와 우정, 박애와 사랑의 성녀, 그 정도뿐이다. 정말 그가 어떤 일을 했는지는 철저히 가려지고 윤색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헬렌 켈러는 서른 살까지의 인생까지다. 알려지지 않은 그는 공산주의 사회운동가이자 페미니스트였고, 1900년대 초반 미국 사회당에 입당해 여성과 노동자, 유색인종의 권리와 평등을 위해 싸웠다. 여러 신문의 칼럼과 저서로 부정의한 사회로부터 투쟁해 온 헬렌을 보며 사람들은 그가 장애인과 사회복지 운동 외의 다른 운동에 투신하는 것을 싫어했다. 대중이 정해놓은 성스러운 이미지로 ‘숭배’ 해야 하는 ‘천사’가 정치 세력에 옮아 ‘불순한’ 사회운동을 하다니. 견디지 못한 언론은 그를 향해 십자포화를 날렸다. 장애인이라는 그의 정체성을 과거에는 ‘삼중 장애의 역경을 딛고 세상에 나온 영웅’으로 추앙했지만 비난의 대상이 된 이후 ‘세상 물정 모르는 장애 여성의 치기’로 격하한 언론의 이중성은 극에 달했다. 장애를 단지 극복해야 할 비정상적 양태로 바라본 편협한 시각은 등을 돌렸을 때 더욱 모진 차별과 비난의 무기로 활용되었다.
찰리 채플린도 같은 곤경에 처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어두운 면과 빈곤의 굴레를 풍자와 해학으로 표현한 그의 영화는 냉전 시대의 광풍 앞에 ‘공산주의적 선동’으로 몰린다. 소아성애자라는 근거 없는 가짜 뉴스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그는 결국 미국을 떠나 이민을 간다. 여성이자 장애인으로 사회의 진보를 위해 투신했던 헬렌의 삶에 감명을 받은 찰리는 〈시티 라이트〉에서 도시의 불빛을 볼 수 없던, 아니 도시의 따가운 시선에 가려진 한 소녀가 선한 의지와 노력으로 결국 주체적인 인물로 성장하는 이야기를 만든다.
이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는 영화사적으로 손꼽히는 명장면이다. 영화 줄곧 원경에서 시민들의 군상, 그 안의 찰리 채플린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담았던 카메라는 눈을 뜬 소녀가 그의 얼굴이 아닌 손끝으로 남자를 알아보는 장면에서 또렷이 서로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관객은 무조건적 희생과 사랑의 연대라는, 자본주의와 거리가 멀어 보이던 가치를 묵묵히 이어나간 끝에 마침내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게 되는 두 사람의 표정을 만난다. 고난 끝에 찾아온 행복이 현실이 되기 바라는 감독의 간절함은 참고 참다 마지막에 드디어 시선을 가까이 두는 탁월한 완급조절로 드러난다. 설명을 듣기 전에는 그 의미를 전혀 알 수도 없는 ‘평화와 번영’ 동상 위에서 대범하게 잠을 청하는 유쾌하고 날카로운 찰리 채플린의 시선은 이렇듯 정말 필요한 순간에는 마음을 울리는 직접적인 메시지로 표출한다.
우리는 사랑과 연대가 가진 힘을 알고 있다. 저 큰 도시 한 구석에 평화와 번영을 바라는 동상 하나 세운다고 그 가치는 실현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는 별것 아닌 몸부림이겠지만, 자신의 곤궁함을 받아들이면서 한 인간의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그의 몸이 오히려 가장 시대의 변화를 추동하는 상징으로 내세울 만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동상이 아닌 행동이다. 우리의 진가는 사회에 겉돌고 외면받는 사람들을 포용하고 같은 인간으로 바라보는 시선이다. 지난달부터 우리는 서아시아의 한 나라가 무너지는 장면을 바라봤다. 한순간에 억압의 과거로 퇴보하는 장면을 실시간으로 바라보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타인을 포용할 만큼 충분히 밝은 도시의 불빛에 비해 비좁은 시민들의 인식은 여러 이유를 들어 세상의 불의와 고통을 애써 외면하고 만다. 사회에 내 집 하나 없이 무시당하는 역할을 맡았지만 해학을 담아 웃음과 눈물을 만든 찰리 채플린은 영화 내내 웃지도 않고 전 세계의 관객을 웃겼다. 어쩌면 우리는 난민과 이주민을 카메라 뒤편에서 남의 일처럼 바라보고 있지는 않았는지 반성해야 한다. 닫힌 우리의 마음을 바꿀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기꺼이 카메라를 들고 가까이 줌을 당겨 그들을 만나고 손을 잡는 것이다. 다정함은 세상을 구한다. 그래야 절망 앞에 웃을 수 있고, 선의지를 담은 표정으로 타인을 반길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속 마침내 행복을 찾은 남자의 이름은 리틀 트램프, 작은 방랑자이다.
※ 이 글은 파랑달의 브런치에서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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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싱> 삼중의 경계선을 넘어서는 두 여성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20년대 뉴욕, 남달리 밝은 피부색을 가진 '아이린(테사 톰슨)'은 이를 활용해 백인 전용 호텔이나 헤어숍을 드나드는 패싱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더위에 지쳐 들어선 한 호텔에서 어린 시절 친구였던 '클레어(루스 네가)'를 만난다. 자신처럼 밝은 피부색을 지녔고 이를 이용해 백인 남편 '존(알렉산더 스카스가드)'과 결혼한 후 흑인이지만 백인으로 살아가며 경제적으로도 어린 시절의 가난에서 벗어나 부유한 삶을 누리고 있었던 클레어. 그런 클레어를 보면서 아이린은 알 수 없는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히고, 클레어 역시 아이린을 보면서 마음만큼은 편했던 흑인으로서의 활기찬 삶을 그리워하기 시작하며 두 여인의 삶은 송두리째 흔들리기 시작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인 <패싱>은 1929년에 발간된 넬라 라슨의 소설 <패싱>을 영상화한 작품이다. <아이언맨 3>, <트랜센던스>, <고질라 VS. 콩> 등으로 얼굴을 알린 배우 레베카 홀의 연출 데뷔작이기도 한 <패싱>은 선댄스 영화제에서 큰 화제를 모았고,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도 초청받은 바 있다. 이처럼 <패싱>이 많은 주목을 받은 것은 아무래도 제목의 의미를 전달하는 데 충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흔히 '패싱'(passing)은 흑인이 자신의 인종적 정체성을 숨기고 백인 행세를 하는 행위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 영화는 패싱을 원래 자신의 소속과 다른 사회집단의 구성원인 양 행동하는 일이라는 보다 넓은 의미로 이해하며, 정체성을 구분하는 경계들과 그 경계를 넘어설 때 발생하는 불안감을 차분하게 펼쳐 보인다.
실제로 영화는 크게 인종, 성별, 그리고 계급이라는 세 가지 경계를 오가는 패싱을 카메라에 담아내고 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포스터만 봐도 짐작할 수 있는 흑인과 백인의 인종적 경계를 넘어서는 패싱이다. 작중 흑인에서 백인으로의 자아 변화를 경험하는 인물, 곧 백인으로 패싱 가능한 중산층 흑인 여성의 이미지를 재현하는 인물은 아이린과 클레어 두 명뿐이다. 흥미롭게도 <패싱>은 단 둘 밖에 없는 여성을 여러 측면에서 대조하며, 그것만으로도 98분 동안 극을 전개할 원동력을 이끌어낸다.
우선 아이린을 보자. 중산층의 흑인 남편과 결혼한 아이린은 시내에 나갈 때처럼 필요한 경우에는 백인으로 패싱하지만, 흑인의 정체성을 스스로 받아들인다. 그러면서도 완전히 백인으로 행세하는 클레어 같은 이들이 자신들의 출신과 인종에 대한 자부심이 없다고 비판하는 기만적인 이중성을 보여준다. 이는 그녀가 패싱을 할 수 있는 조건이 됨에도 불구하고 당시 사회적으로 통용되던 인종의 구분과 차별을 내면화하고, 그 틀 내에서 안정된 삶을 누리려는 보수적인 인물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 아이들의 선물을 사러 간 서점이나 더위 때문에 잠시 들린 호텔 카페, 심지어 길가에서까지 항상 자신이 사실 백인이 아닌 흑인임을 들킬까 전전긍긍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반면에 남편과 함께 있거나 무도회에서 춤출 때 성적인 매력을 숨길 생각이 없고, 금주법이 있는 시대에 술을 언제 어디든 갖고 다니는 클레어는 아이린과 정반대인 이국적인 이미지를 보여준다. 또한 그녀는 과거사를 꾸며내고 모든 사람과의 인연을 절단한 후 백인으로 살아왔지만, 공허한 삶에 지쳐 다시 흑인 사회에 편입되려는 욕망을 거침없이 드러내면서 흑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기도 한다. 즉, 본인도 패싱을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백인과 흑인의 이분법적 구분을 떨치지 못한 아이린과 달리 클레어는 정해진 인종이라는 틀에 스스로를 국한시키지 않으며 그 틀까지도 극복하려 한다.
그러다 보니 아이린에게 자신을 감싸고 있는 사회적 기준을 전복하고 교란될 수 있는 클레어의 유동적인 정체성은 다양한 감정 안에서 인식된다. 분명 클레어는 호텔 카페와 스위트 룸, 그리고 아이린이 주최한 무도회 등에서 주변인의 정체성을 위협하고 그들의 삶을 혼란에 빠뜨리는 위험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아이린은 같은 조건 속에서도 전혀 다른 삶을 사는 클레어를 보면서 부러움과 질투심, 또 앞서 본 것처럼 경멸감에 이르기까지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히고 불편해진다. 영화는 이처럼 패싱을 두고 비슷한 듯 서로 전혀 다른 삶의 방식과 태도를 보이는 이들의 차이로부터 부각되는 미묘한 긴장감과 감정선을 다양한 형태로 변화시키면서 이야기에 깊이를 더한다.
이에 더해 아이린의 복합적인 감정선은 성적인 기제와 계급적인 차원이라는 두 가지 방향으로 뻗어나가면서 이야기를 층층이 쌓는다. 클레어와 아이린이 서로를 대하는 태도에서는 동성애적 감정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 남편인 '브라이언(안드레 홀란드)'에게 클레어를 설명할 때 아이린은 그녀와의 관계를 모호하게 얼버무리며, 남편이 그녀를 멀리 하라고 눈치를 줘도 식사나 무도회에 계속해서 초대며 클레어의 존재를 쉽사리 삶의 울타리 밖으로 내치지 못한다. 남편이 클레어와 친해지는 것을 경계하는 것, 가정부와 클레어가 따로 대화하는 시간을 갖자 굳이 가정부를 다시 일하도록 시키는 것 역시 클레어에 대한 애정이 단순한 우정 이상의 성적 매료 내지는 욕망으로 읽힐 수 있다. 클레어도 마찬가지다. 아이린에게 보낸 연애편지에 가까운 내용으로 가득한 편지를 보내거나, 그 편지에 답장하지 않는 아이린을 갑자기 방문해 속상한 마음을 토로하는데 이 대목 역시 상당한 성적인 긴장감을 유발한다.
또한 영화는 계급적 차원에서의 패싱도 간과하지 않으며 특히 계급 이동의 열망이 인종적, 성적 정체성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잘 보여준다. 예를 들어 마을의 한 흑인이 백인들에게 맞아 죽었고 시체가 훼손되었다는 소문이 돌자 브라이언은 아이들에게 흑인으로서 1920년대 미국에서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려 한다. 반면에 아이린은 철저히 그 현실을 아이들로부터 감추고자 한다. 흑인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듯 보이면서도 필요에 따라 백인이 될 수 있기에 그녀에게는 흑백의 구분보다도 안정된 중산층으로서의 삶을 유지하는 것이 더 시급한 것이다. 본인이 비난하던 클레어조차 흑인의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상황에서 흑인으로서의 정신적 유산을 상실한 아이린의 이러한 패싱은 이 작품이 단순히 피부색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 않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덕분에 자칫 100여 년 전을 살았던 두 여성의 이야기에 그칠 뻔했던 영화는 더욱 현대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작중 삼중의 패싱은 인종 정체성의 경계를 허물고, 기존의 성과 계층적 정체성의 구분을 가로지르면서 아이린과 클레어가 확신하고 있던 자아 정체성을 뿌리째 뒤흔든다. 곧 스스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나라는 존재의 정의를 의심하게 만들고, 그 정의와 정체성을 결정해 온 기존의 사고방식에까지 의문을 던진다.
특히 영화의 결말은 그 질문을 형상화한 듯 보인다. 클레어를 향한 아이린의 감정이 어떤 의미로든 나날이 강렬해지고 격화되는 가운데, 영화는 끝내 흑인 사회로 편입되지 못한 채 끝나버린 클레어의 비극이 누구의 탓인지 명확히 보여주지 않는다. 클레어에 대한 어떤 진실도 명료히 규명하지 않는다. 대신 그저 추측만 가능하도록 심증이 될 법한 장면들을 열거하고, 하얀 눈이 내리는 뉴욕이 내려다 보이는 가운데 눈송이가 화면을 가득 채워 온전히 하얗게 만들면서 끝난다. 마치 인종, 젠더, 계급과 그 외의 경계선이 없는 완전히 새로운 도화지에서 개인의 온전하고 진정한 정체성을 그려보라는 듯이.
따라서 영화 <패싱>은 사회적 차원에서 정의된 획일적이고 안정된 자아개념을 부정함과 동시에 그로부터 해방되고, 더 나아가 고정되지 않은 유동적인 다중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시도하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 나날이 한 개인을 규정하고 그에게 덧입혀지는 정체성이 계속해서 늘어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문제제기와 메시지는 꼭 흑인이나 여성이 아니더라도 <패싱>을 곱씹어 볼만한 이유가 된다.
<패싱>의 이야기는 이 작품이 그 미묘한 긴장감을 보여주는 방식 덕분에 더욱 인상적으로 느껴진다. 우선 일반적인 상업영화에서 잘 사용되지 않는 1.33:1 비율을 선택한 것이 눈에 띈다. 이 화면 비율은 배우들의 얼굴과 표정을 오롯이, 또 집중적으로 가득 담아내면서 그들의 내적 혼란을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다. 또한 테사 톰슨과 루스 네가의 절제되어 있지만 깊이 있는 퍼포먼스가 유달리 빛나는 배경도 되어준다.
흑과 백을 외에 그 어떤 색채도 더하지 않은 연출도 1920년대 미국을 살아가는 흑인의 삶을 효과적으로 환기시킨다. 조명의 위치와 광원의 종류에 따라 필요한 순간마다 두 여성의 피부색을 조정하면서 패싱이라는 행위가 한 명의 개인에게나 사회적 차원에서 갖는 의미를 시각적으로 표현해낸다. 단순히 피부색을 조정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극명히 대비되는 명암의 효과를 활용해 아이린과 클레어의 빛과 그림자로 가득한 심정을 끄집어 내 보여주기까지 한다.
사실 <패싱>을 오락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재밌다고 할 수 있는 영화는 아니다. <위대한 개츠비>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와 경제 대공황 사이의 미국 역사, 사회, 경제에 대해 알아야 하듯이, <패싱> 역시도 대략적인 사전 정보를 요구하기에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드라마틱한 전개 대신 일상의 모습을 담는 구성도 한몫하며, 설명보다는 관조가 주를 이루는 화법은 영화를 루즈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언급한 영화 기법이 주는 인상과 영향에 시선을 맡기다 보면 <패싱>의 매력에 빠져드는 것은 어렵지 않다. 두 여성의 일상을 자연스럽게 따라가며 그들의 급변하는 심정을 고스란히 느끼고 공감하면서 스스로의 모습까지 돌아보게 되기 때문이다.
A(Acceptable, 무난함)
고전적인 작법과 시대를 타지 않는 메시지의 조화로 되살려낸 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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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FAN 데일리] 책 한 권이 촉발한 사회적 패닉
사탄의 부름(Satan Wants You)
메리 고 라운드 부문
숀 홀러, 스티브 J. 아담스 감독
Canada/2023/90min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80년. 미국에서 《미셸은 기억한다(Michelle Remembers)》라는 책이 출간되었다.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미셸이라는 이름의 여성이 어린 시절사탄 숭배자들에게서 14개월간 학대되었다는 게 요지였다. 동물을 잔인하게 도살하는 장면을 강제로 목격하게 하고, 죽은 태아를 숭배 의식에 활용하는 등 미셸의 폭로는 끔찍한 내용으로 가득했다. 책은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다. 미셸은 그녀의 상담가이자 책을 함께 쓴 로런스와 투어를 다니며 사람들에게 자신의 기억을 들려줬다. 아버지의 폭력과 방치에 지친 어머니가 사탄 숭배자였고, 미셸을 단체에 넘겼다는 사실은 이 사건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더욱 증폭시켰다.
그러나 미셸의 폭로와 ‘성공’을 다루던 영화 〈사탄의 부름〉은 이내 방향을 튼다. 주지하다시피, 지금은 누구도 당시 미 전역을 들썩였던 사탄 숭배자를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다. 도대체 그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사탄 숭배 범죄는 실재했을까? 〈사탄의 부름〉을 따라가 보자.
미셸과 로런스가 화제가 되자 자신도 미셸과 같은 사탄 숭배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줄을 이었다. 심지어 한해 200만 명의 아동이 사탄 숭배자들에게 납치되어 희생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사탄 숭배 집단은 그만큼 핫한 이슈였다. 그러자 일부 상담가와 정신 건강 전문가들이 지금이 기회라는 듯 자신이야말로 사탄 숭배 전문가라고 나섰다. 사탄을 판별하는 ‘자격증’까지 생겨났다. 일부 경찰은 ‘주님의 경찰’을 자처하며 사탄 숭배 범죄를 소탕하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즉, 사탄 숭배 퇴치는 거대한 시장, 문화적 현상이 되어 공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끼쳤다. 요컨대 미셸과 로런스의 ‘사탄 공포’ 장사는 ‘대박’을 쳤다.
사탄 몰이는 무고한 피해자를 양산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사탄 숭배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을 별 의심 없이 낙인찍었고, 사법체계 역시 이들을 재빠르게 처벌했다. 아동 학대 사건의 두터운 사회적 맥락은 소거된 채 모든 것이 사탄 숭배자 탓으로만 단순화됐다. 사탄 숭배자들의 범죄 증언에 조금이라도 비판적 시각을 보이는 사람은 ‘사탄 숭배자’가 아니냐며 추궁받았다. 사탄 숭배라는 압도적 진실은 그 어떤 의심도 허용하지 않았다.
도대체 이 모든 일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영화는 《미셸은 기억한다》 신드롬이 환자의 취약성과 상담사의 야심이 결탁한 결과, 그리고 이를 선정적으로 소비한 사회의 합작품이라고 말한다. 로런스는 그저 그런 평범한 의사로만 남을 수는 없다고 고민하던 찰나 영화 〈악몽(Sybil)〉을 봤다. 어릴 적 끔찍한 학대의 경험으로 악몽을 꾸는 인물이 주인공인 영화였다. 그러던 중 정신적 문제로 고통을 겪은 미셸을 소개받는다. 로런스의 머리가 번득인다. 로런스는 미셸의 고통과 자신의 야심을 교묘히 결탁해나간다. 미셸의 고통에 자신의 상상력을 덧씌워 이를 ‘사실’로 만들고자 한 것이다.
미셸 역시 여기에 적극 동참한다. 정신적, 심리적 문제를 가진 환자에게는 의사의 관심과 흥미가 보상이다. 자신의 아픔을 인정받고 공감받고 싶은 환자는 의사들이 유도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기억을 왜곡할 수 있다. 둘 사이의 로맨스는 이 현상을 더 가속화했다. 이렇게 로런스와 미셸은 각각 유명해지고 싶다는 욕망과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을 교환해 시대를 풍미한 스캔들의 계기를 마련했다. 여기까지가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초래한 사건의 전모다.
〈사탄의 부름〉은 1980년대 미국에서 있었던 일을 다룬다. 하지만 권한, 영향력, 돈을 갈망하는 사회적 관심 끌기의 문제는 당시 미국의 일만이 아니다. 《미셸은 기억한다》 유의 스캔들은 지금까지도 다른 형태로 수없이 반복되어왔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사람들의 감정이 어떻게 뭉치고 흩어지는지, 그 감정의 흐름이 기존의 권력 구조와 만났을 때 어떤 파괴적 효과를 자아내는지에 관한 흥미로운 통찰로 가득하다. 가톨릭교회는 이 사건을 사람들이 더는 신을 믿지 않는 시대에 경종을 울리는 계기로 활용하고자 했고, 언론은 그저 신이 나서 ‘사탄 숭배’ 보도를 이어갔으며, 공권력과 사법 체계는 극도로 무능하기만 했다. 사탄 숭배 비난이 보수적 도덕의 강화로 이어졌음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단순히 과거의 흥밋거리를 다루는 것을 넘어 감정의 사회, 문화, 정치적 효과를 고민하게끔 하는 영화다.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을 통해 기자로 초청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제27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는 6월 29일부터 7월 9일까지 온오프라인에서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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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후변화, 일본스러움, 혹시... 나도?
* 이 리뷰는 큰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 지금은 기후위기라고 쓰지만 그 당시에는 기후변화가 더 익숙했기에 기후변화라고 씁니다.
나는 중학생 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스스로를 '외계인'이라고 지칭했다. 나의 영감 노트는 'Inspiration of Alien(외계인의 영감)'였고, 고등학교 때 선생님은 출석을 부를 때 공식적으로 외계인이라고 한 적도 있다. 그리고 재밌게도 나의 장래 직업에 꽤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 천문학자였다.
사실 이 영화는 알고 본 영화가 아니었다. 원래는 영화를 보기 전에 그래도 사전 탐색을 좀 하는 편인데 이 영화는 책(영화의 원작을 쓴 작가의 다른 책)을 구매하면서 쓴 기대평이 당첨되면서 보게 되었다. 그래도 조금 찾아보긴 했다.
감독이 지금 한국에 들어와 있다는 것, 원작에 핵에 관련된 것을 기후변화로 변경했다는 것 정도, 작가의 다른 책인 '목숨을 팝니다'를 읽어본 바로는 이 영화도 좀 난해할 수도 있겠다 싶었던 것 정도였다.
시사회였지만 시사회 같지 않게 아무런 설명도 없이 영화는 시작되었다. 아무런 광고도 없이 시작되었다. 그런 시작은 처음이었다. 왜 청소년 관람불가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청소년 관람불가라고 할 만한 장면은 한 장면뿐이었데 잘라내도 무관한 장면이어서 오히려 잘라내고 등급을 낮추는 게 흥행에는 도움이 될 것으로 보였다. 잘라내고 많은 사람들이 보면 좋겠다 싶었다.
일본식 유머 코드가 잔뜩 배어 있으면서 끝으로 가면서 그 웃음기가 사라져 버리는 그런 영화다.
아빠는 화성인, 엄마는 지구인, 아들은 수성인, 딸은 금성인.
진짜인지 아닌지 끝까지 애매하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서 책을 읽어보고 싶은 느낌이었다. 근데 아마 책을 읽어도 비슷했을 거다. 목숨을 팝니다의 결말도 비슷했으니까 말이다.
사람들이 많이 봤으면 하는 생각은 다른 곳에서 왔다.
지난 환경의날에 환경영화를 본다고 <킹 오브 썸머>라는 영화랑 <판도라>를 봤다. 그런데 환경영화제에서 상영을 했다던 <킹 오브 썸머>보다 이 영화가 기후변화와 환경에 대해 더 잘 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구인은 지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부터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후변화에 대한 고민, 그 다양한 고민들을 영화 속에 모두 담고 있었다. 사실 그게 재미있다.
기후변화는 인간에 의해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원래 지구가 가지는 속성(간빙기)에 의해서 나타난 것이라는 주장(나는 사실 이것도 아니라고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을 수성인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외운 것이 아니니까 정확한 워딩은 아니다.
"지구인은 오만하다. 지구를 자기들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처럼 자기들 때문에 그렇게 된 것처럼 생각한다.
자신들이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화성인인 아빠는 모든 것(직장, 가족)을 포기하면서 지구인들이 변해야만 지구를 지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주 연합이었던가!?
위에서도 언급했듯 원작은 기후변화 대신 원자력발전소와 핵전쟁에 대한 이야기로 되어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 책도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마 가까운 시일에 누군가 나에게 환경영화를 추천해 달라고 하면 나는 주저 없이 '아름다운 별'을 추천해 줄 것 같다.덧 1. 하지만 일본식 개그가 재미없다면 재미없을지도 모른다.
덧 2. 은근 유명한 배우들 많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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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브 투 헤븐 : 나는 유품정리사입니다> - '전하지 못한 퍼즐 조각을 맞춰가다.'
무브 투 헤븐 : 나는 유품정리사입니다
개봉일 : 2021.05.14 (넷플릭스 공개)
감독 : 김성호
출연 : 이제훈, 탕준상, 홍승희, 정석용, 정영주, 임원희, 지진희
전하지 못한 퍼즐 조각을 맞춰가다.
가장 인간답기에 가장 아프면서도 따뜻한 이야기를 담은 <무브 투 헤븐>은 특별한 시선을 가진 유품 정리사 나무와 그의 후견인 상구가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마지막 이사를 도우며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조금씩 받아들이고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 드라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인생을 살아가고 본인의 이야기와 흔적들을 남긴다. 각자 다른 형태의 죽음, 다른 인생, 다른 이야기들을 한 아름 담은 노란 유품 상자의 무게가 꽤나 묵직하게 느껴진다. 유품 정리사인 나무는 그 무게감을 끌어안고 오늘도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노력한다.
살아있는 것들은 언젠가 죽는다. 인생과 죽음의 과정은 공평하지 않을지언정 죽음이란 결과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다가온다. <무브 투 헤븐>은 시청자들이 누군가의 죽음과 마주하게 만들며 삶과 죽음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한다. 나는 <무브 투 헤븐>을 보며 몇 년 전 내가 처음으로 마주했던 죽음과 작년 여름쯤에 읽었던 김완 작가의 <죽은 자의 집 청소>라는 책을 함께 떠올렸다.
난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꽤 많은 반려동물들과 함께하고 그 친구들을 보내며 ‘반려동물의 죽음’을 겪어봤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23살의 나이가 되어서야 처음 겪어보았다. (동물과 인간의 죽음의 무게를 나누려는 의도를 가진 표현은 아니다. 동물이든 사람이든 죽음과 생은 고귀한 것이라는 것을 잘 안다.) 어린애를 굳이 상갓집에 데려갈 필요는 없다는 부모님의 신조 아래 자란 나는 먼 친척들이 돌아가셔도 상갓집에 가보지 못했다. 사실 정말 어릴 때 한두 번 본 사이라 얼굴도 기억 안 나는 어른들이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지만, “누가 돌아가셨단다.”라는 엄마의 말에 나는 별다른 감정을 느낀 적도 없었다. 내 눈앞에, 마음에 그의 죽음이란 것이 와닿지 않았으니까.
내 주변엔 어린 나이에 가족의 죽음을 겪은 친구들이 꽤 있었다. 중학교 때 함께 어울렸던 친구는 초등학생 때 산업재해로 아버지와 이별했고, 고등학교 때 함께 어울렸던 친구는 나와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때쯤 할아버지와 이별을 했다. 친구들은 나에게 간혹 아물지 않은 이별의 상처를 털어놓기도 했는데, 나는 그저 “네 마음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진짜 힘들겠구나.”와 같은 내 감정에 충실한 반응을 뱉어내기만 했다. 그땐 나름 진심을 담아 이야기했지만, 돌이켜보니 그 친구들에게 미안할 만큼 영양가 없는 한마디였던 것 같다.
그렇게 ‘죽음’이 무엇인지 티끌만큼도 가늠하지 못한 채 나는 20살을 넘겨 성인이 되었고 23살이 되던 해, 처음으로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그제서야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만난 <무브 투 헤븐>은 그때의 기억과 고민들을 다시 떠오르게 만들었다.
<무브 투 헤븐>은 세상을 떠난 이들의 목소리를 전함과 동시에 억울한 죽음, 외로운 죽음,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죽음 등 여러 인물들의 죽음에 담긴 사회적 문제들을 따끔하게 꼬집는다. 산업 재해 사망사건을 돈 몇 푼으로 해결하려 하는 회사, 노인이 된 어머니를 방치하고 돈만 챙기려는 아들, 데이트 폭력으로 사망한 피해자, 차가운 사회의 시선에 내몰린 연인과 노부부, 무책임한 부모들에게 버려져 해외 입양된 아이의 외로운 인생까지. 각 화마다 새롭게 등장하는 인물들의 인생 이야기를 함께 더듬다 보면 그들이 겪어야 했던 차가운 시간들과 고질병처럼 고쳐지지 않는 문제의 까끌함이 마음속에 깊이 스며든다. 정말 힘들지 않고, 아프지 않은 인생이 하나도 없다.
그들이 떠난 자리엔 유품 한 박스와 슬픔, 후회가 가득하다. 슬픔과 후회는 그들을 지키지 못한 남은 이들의 몫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이 외롭고 억울한 죽음을 겪지 않도록 문제를 해결해나가야 하는 것 또한 남은 이들의 몫이다.
사람은 죽어서 자신의 이름과 몇 개의 흔적을 남긴다. <무브 투 헤븐>의 주인공 그루는 비정형적으로 흩어진 흔적을 정리하며 그들이 남긴 마지막 말들의 조각을 맞춰간다. 고인들의 자리에 남은 단출한 짐들은 그들의 인생을 말해주고 그 몇 마디가 남긴 무게감은 그루의 어깨에 내려앉는다. 그루는 진심이 담긴 고인들의 마지막 말들을 마음으로 품어내며 조금씩 성장한다. 아빠(정우)와 헤어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던 아이가 아빠의 빈자리를 받아들이고 그 자리를 슬픔이 아닌 아빠가 남겨준 사랑으로 채워가는 모습을 보며 마음 한구석이 저릿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더불어 형(정우)에 대한 오해로 인해 그를 미워했던 상구가 형이 오래도록 쌓아두었던 마음과 마주하며 변화하는 과정 또한 꽤나 감동적이다. 본인도 어리면서 더 연약한 동생을 위해 모든 마음을 내주고도 후회하고 미안해했던 정우의 마음이 두텁게 쌓인 캐비닛 문을 열었을 때, 상구의 세상은 정우가 남긴 사랑으로 가득 찬다.
그루는 사랑하는 동생과 아들을 위해, 못다 한 말을 남기고 떠난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마음과 사랑을 모두 내바쳤던 아빠 정우의 길을 그대로 따라 걷는다. 아빠가 남긴 사랑과 마음가짐을 연료 삼아 아주 천천히, 하지만 아주 바른 걸음걸이로 말이다. 그리고 그 옆엔 그루의 삼촌, 상구가 있다.
그루가 들고 있는 유품 박스의 색깔은 노란색이다. 봄이란 계절과 희망을 담은 듯이 아주 예쁜 노란색. 어쩌면 죽음은 끝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죽음이란 새로운 생이, 새로운 시간이 시작되는 지점이 될 수도 있으며 떠난 이가 남긴 말과 흔적들은 새로운 희망이 되어 이 세상을 바꿔놓을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그루의 품에 안긴 노란 유품 박스가 슬픔이 아닌 희망과 그들의 아름다운 추억들로 가득 차는 날이 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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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깡패? 때려잡으려고 '무운도장' 장풍? 단기속성 마스터 클래스 등록한 경찰? - 라떼극장 EP.12
영화 흥신소 - 라떼극장 EP.12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영화 "아라한 장풍대작전"를 보며 소중한 추억을 떠올려보자
허약체질 경찰 상환 강도를 잡다 우연히?? 도착한 '무운도장'
그곳에서 공중부양과 장풍을 일삼는 '7선'을 만나고
도에 눈을 뜨게 되는데...
이 영화속 장면에 영감을 받아 만든 방송 프로그램의 정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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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흥신소] 15세기 미모왕 더 킹: 헨리 5세
흥해라 이 영화
더 킹 헨리 5세
- 노는 게 제일 좋을 나이에 왕이 된 헨리 5세 내부의 적과 외부의 적 모두를 마주하게 되는데...
왕권을 둘러싼 물리적 정신적 싸움을 리얼하게 그린 이 영화 흥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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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화란> 메인 예고편
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옥이 되다 올가을 가장 깊고 강렬한 느와르 드라마? [화란] 메인 예고편 공개 10월 11일 극장 대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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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로그 인 벨지움> 메인 예고편
팬데믹 선포로 벨기에 앤트워프 낯선 호텔에 고립된 배우 유태오,
영화라는 감수성이 통한 가상의 세계에서 찾은
진짜 유태오의 오프 더 레코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