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바다2025-04-16 23:04:23
존재의 가치를 투영할 수 있는 창(窓), 공감과 교감
영화 <타인의 삶> 리뷰
타인의 삶 (Das Leben Der Anderen, The Lives Of Others, 2006)
'공감이 불러일으킨 변화에의 욕망'
★★★★
사람은 정말 본질적으로 변하기 어려운 것일까?
‘누군가를 바꿀 수 있다는 믿음
우리는 평생 믿어왔던 인생의 가치가 흔들릴 때,
가끔 폭군 또는 성군이 되어가는 자신을 뒤늦게 발견하고 깜짝 놀랄 때가 있다.
이를 두고 다른 사람들은 변했다 하고, 나는 숨겨져 있던 자아를 찾았다고 한다.
주인공 비즐리는 변한 것일까 아니면 자아를 찾은 것일까?
타인의 삶에 깊이 동화되어 자신의 인생을 바꾸어야 할 만큼
발견한 중요한 가치는 무엇이었을까?
영화는 이런 질문을 끊임없이 쏟아내고 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5년전 1984년.
동독 비밀경찰(슈타지)인 주인공 비즐리는 당시 최고의 극작가인 드라이만과
그의 연인이자 유명 여배우인 크리스타의 반체제 활동을 감시하는 중대한 임무를 맡는다.
※ 슈타지는 1950년부터 1990년까지 존재했던 동독의 정보기관, 국가보안부의 약칭이다. 반체제 인사 감시 및 탄압, 국경경비, 해외정보수집, 대외 공작 등을 주 임무로 활동한 기관이다.
당시 10만명에 달하는 직원과 20만명의 정보원(비밀경찰)이 있었다고 한다
비즐리는 경찰학교에서 범인을 심문하고 취조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교수였다.
그만큼 철저히 뼛속까지 사회주의자이고, 그 신념에 충성하고자 하는 사람이다.
<타인의 삶> 스틸컷 / 상관(문화부 장관)으로 부터 감시를 지시받는 비즐리
그는 드라이만과 크리스타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 몰래 잠입하여
도청장치를 설치하고 24시간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
# 내밀한 대화 하나 까지도 놓치지 않고 도청하는 비즐리
그들이 연극계 동료들을 초대하여 파티를 열었던 어느 날,
비즐리가 기록지에 쓴 관찰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후 11시 04분,
두 사람은 선물 포장을 뜯어 보았음.
그런 다음, 육체관계로 예상되는 행위를 했음'
# 감시대상인 극작가 드라이만과 여배우 크리스타
누군가에 대해 ‘앎’을 표현하는 영어단어 ‘이해한다(Understand)’는
‘Under(아래)’와 ‘Stand(선다)’로 구성된다.
어찌보면 비즐리는 다락방에서 그들이 집 구조까지 그려가며
그들을 내려다보는 관찰자로서의 ‘앎’(Upperstand)의 상태로 발전해 간다.
영화 <타인의 삶> 스틸컷
그렇게 감시 업무를 충실히 하던 어느 날,
본인의 감시가 상관(문화부 장관)의 사적 음욕에 의한 것임을 알게 되면서
비즐리의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타인의 삶에 대조되는 나의 ‘결핍’이 불러일으킨 변화에의 욕망
국가라는 절대적 가치를 단숨에 무너뜨린 비도덕적 권력에 대한 실망감과
그동안 이에 충성하며 복무해 왔던 자신의 인생에 대한 상실감이 커져가던 상황에서,
드라이만과 크리스타의 삶 속에서 전해지는 사랑, 위로, 신뢰와 연민 등
인간적인 모습에 동화되어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타인의 삶과 비교되는 자신의 ‘외로움’과 ‘결핍’은
자신의 자아를 찾고자 하는 욕망을 자극하는 촉매제가 된다.
그래서,
드라이만과 크리스타가 집을 비운 사이
<브레히트> 시집을 훔쳐와서 읽으며
그들이 느꼈을 감흥에 공감하기도 하고,
푸른 9월의 어느날
싱그러운 자두나무 아래에서
난 그곳에서 창백한 내 사랑
그녀를 품안에 안았다
활홀한 꿈에서 처럼
우리들 위에는 아름다운
여름 하늘이 펼쳐져 있었고
한무리의 구름을 보았을 때
구름 무리는 매우 하얗고
무척이나 높이 있었다
그리고 구름에서 눈을 떼었을 때
그곳에 아무도 없었다.
(브레히트 시집에서)
두 사람의 사랑의 속삭임에 흥분하여
난생 처음으로 매춘부를 집으로 불러 욕망을 해결하기도 하고,
'어때 좋았어요?
'제발 좀 더 있어 줘'
(비즐리가 매춘부에게 한 말)
드라이만이 스승에게 받은
<아름다운 영혼을 위한 소나타>(베토벤 열정 소나타)
악보를 보며 피아노 치는 장면에서는
가슴 깊이 공감의 눈물을 흘리기까지 한다.
레닌이 '열정 소나타'에 대해 한말 생각해봤어
‘내가 그것을 계속 들었다면
혁명을 완수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 음악을 들었던 사람이라면
진정으로 들었던 사람이라면
나쁜 사람으로 남아 있을 수 있을까?’
(드라이만이 자살한 선배가 선물했던 베토벤의 열정소나타를 치며 한 말)
이 순간 비즐리는
'그들처럼' 혹은 '그들만큼'은 살고 싶은 욕망,
누군가에 의해 통제 받고 통제 하는 삶에서 벗어나고 싶은
끊임없이 분열하는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
그렇기에 지금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다.
가슴이 미어터질 듯 저려오는 것을 막을 수 없다.
# 무엇이 그를 이리도 애절하게 만든 것일까?
영화 <타인의 삶> 스틸컷
난 당신을 잘 알고 있어요. 전 ‘관객’이거든요.
어느덧 그들의 전지적 작가 시점의 ‘관객’으로 자리잡은 비즐리는
공감의 경계를 뛰어넘어 그들의 인생에 개입하여 교감하고픈 욕심이 생긴다.
우연히 펍에서 마주친 크리스타에게 말을 걸고
누군가가 그녀를 응원하고 있음을 전하고 싶다.
영화 <타인의 삶> 스틸컷
'우리가 아는 사이 던가요?' (크리스타)
'당신은 절 모르지만 전 당신을 잘 압니다.' (비즐리)
'내가 누군지 안다는 거군요’ (크리스타)
'당신은 저를 모르겠지만 저는 당신을 잘 알고 있어요...
전 '당신의 관객' 이거든요’ (비즐리)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사랑해요. 왜냐면 당신은 당신 그 자체니까..’ (비즐리)
비즐리는 크리스타가 지금의 상황에(문화부 장관의 요구) 타협하지 않고
사랑을 지켜내면서도 이루고 싶은 꿈을 향해 자신 있게 나아가도록
지지하고 싶은 것이다.
비즐리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들의 삶에 더욱 깊숙이 개입하기 시작한다.
감시와 통제가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동독치하에서
사랑과 연민, 그리고 공감과 지지로 연결된 주인공들의 삶에
어떤 일들이 일어난 것일까?
상호 작용으로 얽힌 타인의 삶 – 나는 또 다른 사람의 타인
세월이 지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나서야
드라이만은 비밀경찰(슈타지)이 오랫동안 자신을 철저히 감시해 왔고,
자신의 인생의 어려운 순간에 개입해서 도와주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그 비밀경찰이 누구인지 정체를 알 길이 없다.
왜냐하면 비밀경찰(슈타지) 기록보관소에 비즐리는
암호명 ‘HGW XX/7’으로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영화 마지막 장면,
드라이만이 그간의 삶을 엮어 <아름다운 영혼을 위한 소나타>라는 책을 출간한다.
그 책의 서문에 다음과 같은 감사의 문구를 남긴다.
영화 <타인의 삶> 스틸컷
‘감사한 마음을 담아 HGW XX/7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HGW XX/7 gewidmet, in Dankbarkeit.)
우연히 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한 비즐리,
그 만이 암호명 ‘HGW XX/7’이 자신임을 알고 있을 터.
지금까지 단 한번도 볼 수 없었던 그의 얼굴에는 엷은 미소가 지어진다.
이 책을 선물로 포장할거냐?는 서점 점원의 물음에
비즐리는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아니요, 이 책은 저를 위한 겁니다.(Nein, das ist fuer mich.)”
# 드라이만의 책 <아름다운 영혼을 위한 소나타> 서문에서 발견한 자신의 암호명
영화 <타인의 삶> 스틸컷
이 영화에서 다루고 있는,
나와 타인과의 관계의 변화를 도식화해 보면 다음과 같다.
# 주인공 비즐리는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변화가 일어나기 전 비즐리는
타인을 감시하는 권력자로서 탁월한 비밀경찰로 묘사되지만
그 또한 국가권력으로부터 통제와 감시를 받는 자유롭지 못한 존재이다.
따라서 항상 자신을 감시하는 자의 시선을 의식하게 되고
끊임없는 갈등과 분열 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타인의 삶 속에서 발견한 자유, 사랑, 연민의 감정들은
그를 국가 통제 권력의 시선으로부터 독립을 갈망하게 한다.
이처럼 공감과 교감의 관계가 형성된 타인의 삶은
나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투영할 수 있는 창(窓)이 된다.
그렇기에,
영화는 내내 이런 질문을 계속 던지는 것 같다.
나는 누구를 바라보고 있는가?
나는 무엇을 갈망하고 있는가?
# 영화 포스터
영화 <타인의 삶>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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