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2025-04-17 08:33:06
앳된 얼굴의 청년이 교도소의 왕이 되기까지
영화 〈예언자〉
8★/10★
어느 범죄자 소년이 감옥에서 ‘갱생’하며 '성장'하는 과정을 담은 느와르, 범죄 영화 〈예언자〉(2010)를 보며, 자크 오디아르가 영화적 재미와 정치적 메시지를 배합하는 데 정말 탁월한 능력을 가진 감독이라는 생각을 다시금 했다.
주인공 말리크는 부모가 없다. 어릴 때부터 감옥을 들락거렸다. 아랍계이긴 하나 민족적, 종교적 정체성은 거의 없다시피 하고 프랑스어와 아랍어 모두를 말할 줄 안다. 그러니까, 말리크의 정체성은 ‘혼종적 백지 상태’다. 그래서 감옥의 왕으로 군림하는 또 다른 수감자 세자르의 심부름을 하면서도 이너서클에는 들지 못하고, 아랍계 죄수들에게서는 동포를 팔아먹은 자라고 비난받는다.
그러나 양쪽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말리크의 정체성은 바꾸어 말하면 어디 한 곳에 속하지 않고 두 세계를 오고 갈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비록 완전한 ‘내부인’은 되지 못할지라도, 즉 확고한 정체성은 갖지 못할지라도 말이다. 말리크는 타고난 순발력과 대담함으로 이를 자신의 무기로 만들어 스승, 아버지, 교도관 등의 역할을 종합해 폭력적으로 군림하던 세자르를 잡아먹고 새로 왕좌에 오른다.
영화에는 세자르와 그 수하들이 감옥에 점차 아랍계 죄수가 많아지는 데 불만을 표하는 장면이 몇 번 나온다. 유럽계 간수들이 자기들 편이라 감옥을 장악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아랍계 죄수들을 자신들 통치하에 두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는 세자르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말리크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상황과 맞물린다. 동료들이 다른 감옥으로 이송되고, 아랍계 죄수들은 점점 늘어나면서 세자르는 서서히 몰락한다. 그리고 말리크는 ‘타고난’ 인종적 정체성으로 아랍계 죄수 무리에 스며들어 그들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활용한다. 지금까지도 프랑스에 횡행하는 인종주의적 극우의 공포 속에서 ‘백지’ 상태이던 말리크를 아랍계의 수장으로 만든 건 뭘까? 프랑스인을 우대하고 아랍계를 차별한 (감옥) 시스템 그 자체다. 말리크는 다른 모든 죄수와 마찬가지로 시스템 안에서 생존을 도모했고, 특출나게 성공해 왕좌를 대체했을 뿐이다.
앳된 얼굴의 청년 말리크가 몇 년의 수감 기간 중 ‘갱생’ 및 ‘교화’되는 과정, 그리고 마침내 ‘예언자’로 등극하는 과정은 어떠한가? 말리크는 수감되자마자 세자르의 강압적 요구로 아랍계 죄수 레예브를 살해한다. 이후 레예브의 유령과 말리크가 대화하거나 함께 있는 장면이 종종 나온다. 죄책감 때문일 것이다. 말리크의 성장은 그가 레예브의 환영을 ‘불태우고’ 자신의 모호한 정체성이라는 약점을 강점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이뤄진다. 혼란스러운 정체성에서 죄책감을 거쳐, 어디에도 안착하지 못하던 한 남자가 강력한 남성 주체로 우뚝 선다.
말리크의 성장은 극우와 인종주의를 둘러싼 감정 역학과 더불어 젠더 정치의 측면에서도 흥미롭다. 세자르가 그에게 레예브를 죽이라 했을 때, 말리크는 동성애자 레예브의 성기를 애무해주다 입안에 숨긴 면도칼로 그의 목을 공격하려 한다. 계획이 어그러져 그 방법으로 죽이진 못하지만, 세자르가 말리크에게 알려준 살인의 방법은 말리크가 남자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갓 입소한 말리크는 세자르가 아랍계 남성의 성기를 빨다 살해하라고 명령할 수 있는 존재, 즉 ‘호모’ 혹은 ‘여성’이었다. 말리크에게 규범적 의미의 남성성은 부재했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말리크는 죽은 동료 리야드의 아내, 아이와 함께 걷는다. 가장의 죽음으로 위기를 맞은 이성애 핵가족의 구원자로서 행진한다. 그리고 그 뒤로는 수많은 남자가 뒤따른다. ‘여성’이자 ‘호모’였던 그는 수컷 무리의 우두머리이자 한 가정을 책임질 수 있는 ‘남자’로 거듭난다. 〈예언자〉는 이처럼 여러 정치적 주제를 종횡무진 망라하며 장르의 재미를 구축한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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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호자이지 못하는 어른들
이 영화는 터키 영화 이며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추운 겨울 남자 기숙사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살아가는 남학생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 메모라는 학생이 차가운 물로 샤워를 하는 체벌을 당한 그 다음날 일어나지 못한다..
메모의 친구 유수프가 그의 곁을 지키면서 선생님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선생님들은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이야기이다.
이 영화에서 선생님들과 어른들은 서로의 탓이라고 우기기만 하고 결국 마지막에 유수프가 메모를 데리고 몰래 따듯한 물로 샤워를 하러 가다가 메모가 파이프를 머리에 맞았다는것을 알고는 안심하는 듯이 끝난다.
터키 기숙학교의 폭력성을 비판하고 무책임한 어른들의 모습을 마치 다큐 처럼 영화가 흘러간다. 이 영화의 배경이 고립된 시골에다가 겨울이어서 교도소와 비슷한 이미지 였다. 영화 초반부터 계속 창문이 깨지고 문이 덜렁 거리는 등 불안한 전개를 계속 암시한다. 또한 메모를 보건실에 거의 방치 해두고 선생님들이 보건실로 들어 올 때 어른들만 보건실의 문 앞에서 계속 미끄러진다. 정작 아이들은 미끄러지지 않고 제대로 걸어온다. 선생님들이 들어올 때 메모의 열을 재고 열은 안난다며 똑같은 말을 계속 반복한다. 이런 장면들이 부당한 관습과 폭력성이 반복 될 것을 의미한다. 유수프가 마지막에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친구가 아프다고 말 하지만 엄마 마저도 친구는 무시하라고 하며 전화를 끊는다. 이렇게 유수프에게 진정한 보호자는 존재 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유수프만 머리만 밀려있고 똑같은 샤워실, 초반이랑 똑같이 샤워를 하며 끝이 난다.
선생님들은 메모의 병에 대한 책임을 유수프에게 떠넘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책임에 대한 벌도 유수프만 받은 것이다. 유일하게 이 학교 상황을 메모의 사건으로 고발 할 수 있었던 기회가 있었지만 유수프의 책임으로 돌리면서 이 악습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영화가 끝나도 영화 속 아이들은 선생님에게 맞고 아파도 제대로된 보호 조차 받지 못한 채 살 것 같다. <보호자>라는 제목도 좋았었다. 메모의 진정한 보호자는 유수프 뿐이었다. 이 학교의 보호자인 어른들은 보호자의 의무와 책임조차 지지 않는다. 마지막 머리가 깎여 있는채로 샤워를 하고 있는 결말이 엄청 강렬했었다. 결국 잘못에 대한 죄를 받은 사람은 어린 유수프 단 한명 뿐이었다. 과연 메모가 아프게되어 병원에 실려가기 전까지 잘못한 사람은 어린 유수프 한명 뿐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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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나리 (2021)
* 이 리뷰는 영화 <미나리>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아카데미 6개 부문 노미네이션, <미나리>
지난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미나리>는 오늘 '크리틱스 초이스 어워즈'에서도 외국어영화상과 아역배우상 총 2관왕을 차지하며 오스카에 한 발짝 더 다가섰다. 그리고 마침내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 후보 공개날 여우조연상, 작품상, 감독상을 비롯하여 6개 부문에 노미네이션 되며 오스카 수상이 허황된 꿈이 아니었음을 보란듯이 증명해주었다. 연초부터 각종 비평가상과 영화제 수상을 휩쓸고 있는 화제작 <미나리>는 도대체 어떠한 이유로 이와 같은 돌풍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일까.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었던 한인 가정
1980년대, 미국 아칸소 농장의 트레일러로 이사를 온 '제이콥(스티븐 연)'과 '모니카(한예리)', 그리고 부부의 자녀 '앤(노엘 케이트 조)'과 '데이빗(앨런 킴)' 가족은 낯선 곳에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낡은 트레일러 집 대신 농사 지을 땅을 산 제이콥은 가장으로서 무언가를 해내겠다는 부푼 마음을 안고 있지만, 안정적인 주거생활이 보장되지 않은 환경 탓에 모니카는 앞으로의 현실이 막막하기만 하다. 하루는 집이 토네이도의 위협을 받아 모니카가 큰 불안을 느끼게 되고, 제이콥과 크게 부부싸움을 벌인 끝에 손자들을 돌봐주고 모니카에게 안정을 가져다줄 외할머니 '순자(윤여정)'을 아칸소로 모셔오기로 결정한다.
한국인이지만 미국에서의 삶이 더 익숙한 데이빗은 할머니와 잦은 갈등을 빗게 되고, 이웃 '폴'과 단둘이 농사를 짓는 제이콥의 수확도 녹록지 않다. 데이빗과 순자의 관계가 좋아질 무렵, 순자는 갑작스런 뇌졸중으로 몸을 가누기 힘들어지고 모니카가 견뎌내야 하는 삶의 무게는 더욱 무거워진다. 제이콥은 끝내 수확에 성공하지만, 제이콥의 농사, 데이빗의 심장병, 아이들의 양육, 어머니의 부양에 완전히 지쳐버린 모니카는 현실의 한계를 느끼고 제이콥에게 이별을 고한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사건이 발생하면서 가족의 관계는 다시 회복되게 되는데...
예상 가능한 플롯, 큰 재미는 없다
개인적으로 <미나리>라는 작품에 거는 기대가 컸다. 해외 영화제에서 수상 실적이 워낙 좋기도 했고, 극의 완성도와 배우들의 연기에 대한 호평이 자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직접 감상한 결과 생각만큼 인상이 진한 영화는 아니었다. 1980년대 미국의 한인 이민자 가정에서 발생하는 가족 간의 갈등, 낯선 곳에서 새 출발을 한다는 불안 등을 표현한 여타 비슷한 스토리 구조를 가진 작품들과 뚜렷한 차별점이 없었다. 드라이하게 가슴을 울린 좋은 영화임은 인정하지만, 이렇게까지 극찬을 받을만한 영화인지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미나리>에게 이어진 극찬들은 주로 해외 시상식에서 주어졌기 때문에 한인 이민자 가정을 바라보는 미국인들과 한국인들의 관점 차이에 따라 영화에 대한 평가가 갈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비움의 미학, 클리셰 탈피
<미나리>는 한국인 배우들이 출연하고, 한국어로 대사를 치지만 엄연히 미국영화다. 그렇기 때문에 내용 자체는 굉장히 한국적이지만, 그 스토리의 구조와 촬영 기법, 연출 방식은 상당히 미국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나리>는 굉장히 기이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적인 내용을 갖고도 영화가 진부하지 않게 보일 수 있던 이유는 작품이 추구하는 방향이 절제와 비움이었기 때문이다. <미나리>는 한국 가족영화 특유의 전형적인 전개 방식을 답습하지 않는데, 이 부분이 바로 영화가 호평을 이끌어낼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미나리>가 한국감독이 연출한 국내 영화였더라면, 뇌졸증에 걸린 '순자'의 죽음과 같은 신파적인 소재로 가족에게 깨달음을 주거나 성장을 이끌어내는 플롯을 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이삭 감독'이 만든 <미나리>는 할머니 캐릭터를 억지 눈물 짜내기 포지션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감동을 강제하지 않는데도, 드라이한 여운을 이끌어내고 관객들로 하여금 각자의 할머니에 대한 추억을 충분히 떠올릴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에 좋은 영화라는 칭호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인물 간의 갈등을 표현하는 부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미나리>의 극중 배경인 1980년대는 동양인에 대한 백인들의 원색적인 차별이 만연했던 시기다. 따라서 극에 제이콥의 가족을 괴롭히거나 인종차별적 행동을 가감없이 펼쳐줄 인물이 등장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그렇지만, <미나리>는 그러한 진부한 설정을 따르지 않는다. 교회에서 만난 백인들은 낯선 분위기 속에서 적응을 못하는 모니카에게 친절을 베풀고, 데이빗이 새로 사귄 백인 친구 역시 처음에 호기심 때문에 차별적인 언행을 했을 뿐 후에 친구로 함께 잘 지낸다. 즉, 제이콥의 가족을 제외한 인물 중 악인이라 칭할 법한 인물이 등장하지 않아서 쓸데없는 갈등 비중을 모두 배제하고, 오로지 미국이라는 낯선 공간 속 이방인들이 겪는 내적 갈등에만 주목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굉장히 사소한 설정 차이일 수 있지만, 이러한 미세한 부분에서 극의 전반적인 분위기 자체가 달라질 수 있다.
윤여정의 순자, 그녀에게 열광하는 이유
<미나리>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존재는 감독도, 영화도, 젊은 배우들도 아닌 배우 '윤여정'이다. 윤여정은 주인공들의 어머니이자 외할머니 '순자'를 연기하며 미국인들에게 낯설게 느껴질 'K-할머니'의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이 캐릭터가 해외에서는 매우 신선하게 받아들여졌던 것 같다. 사실 한국 드라마를 수백 편 봐 오고, 윤여정 배우가 등장한 수십 편의 작품들을 봐 온 시청자 혹은 관객의 입장에서는 '순자' 캐릭터에 왜 이렇게 이목이 쏠리는지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하지만, <미나리>가 제작된 미국이라는 국가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분명 우리가 보는 시선과 달리 보게 될 지점들이 있을 것이라고 느꼈다.
'순자'는 전형적인 할머니상에서 탈피한 인물이다. 데이빗이 불평하는 것처럼 손자들에게 맛있는 쿠키를 구워주고, 공부를 가르쳐주거나 책을 읽어주고, 다정하게 보살펴주는 일반적인 할머니들의 모습과는 제법 거리가 있다. 순자는 요리도 못하고, 손자들과 함께 화투를 즐기고, 교회에서 십일조를 훔치는 등 일명 날라리 할머니 같은 모습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자가 나쁜 할머니일까? 순자는 자신의 성격과 방식대로 힘든 처지에 있는 모니카의 가족을 위로하고, 자신과 끊임없이 갈등을 벌이는 손자 데이빗에게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준다. 이러한 뻔하지 않은 할머니의 캐릭터가 '윤여정'이라는 개성적인 연기파 배우와 만나게 되면서 정형화되어 있지 않은 '순자'라는 인물을 그려낼 수 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유수의 해외 영화제 여우조연상을 휩쓸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극의 중심이 되어주는 할머니
극의 중후반부까지 활약을 하다가 뇌졸증을 앓게 된다는 설정으로 비중이 작아지긴 하지만, 순자라는 인물은 극의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는 매우 중요한 캐릭터다. 죽음으로서 가족에게 깨달음을 준다는 신파적 장치의 인물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미 차별화가 되기는 했지만, 순자의 역할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순자는 우선적으로 모니카와 제이콥의 관계를 원만하게 중재해주는 인물이다. 토네이도가 들이닥쳤을 때, 부부싸움의 언성이 최고조에 달하며 관계가 험악해졌지만 순자가 등장하면서 부부관계는 차츰 완화된다. 순자는 모니카 부부뿐 아니라 손주인 앤과 데이빗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창고에 화재를 일으키고 망연자실한 채 허허벌판으로 걸어가던 순자를 잡기 위해 아픈 심장을 뒤로 하고 용기를 내어 뛰는 데이빗은 극 초반의 말 안 듣는 철부지 손자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아픈 심장 때문에 일찍 죽지는 않을까 걱정하던 데이빗에게 따스한 품을 빌려주며 희망을 불어넣어준 할머니로 인해 그가 조금은 변화하고 성장했다는 것을 보여준 대목이었다.
순자의 영향력은 극의 결말부까지도 발휘된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 탓에 쓰레기를 태우다 화재를 일으킨 사건은 제이콥의 전재산이라 할 수 있는 농작물들을 모조리 몰살시킨 대형사고였다. 하지만, 결별을 이야기할 정도로 파국의 단계에 들어섰던 제이콥과 모니카는 오히려 이 대형사고를 계기로 다시 뭉친다. 농사로 꿈을 이루겠다는 제이콥의 막연한 믿음이 무너졌을 때, 가족을 안정적으로 지키고자 하는 모니카의 마음은 더욱 커지고 이는 곧 가족이 흩어지지 않는 계기로 작용한다. 즉, 가족 간의 갈등을 봉합하고 이들이 서로를 의지하고, 믿을 수 있도록 중심을 잡아준 셈이다.
한예리의 돋보이는 존재감
순자가 극 안에서 내용의 중심을 잡아준 캐릭터였다면, 모니카 역을 맡은 배우 '한예리'는 극중 미국인에도, 한국인에도 그 어느 곳에도 제대로 섞여들지 못한 인물을 연기하며 극의 경계선을 조율하는 역할을 해준다. 즉, <미나리>는 엄연한 미국영화이지만, 한예리가 등장함으로써 이 작품이 완전히 미국영화로 보이지 않게끔 만들어준다. 미국인 감독이 만든 미국영화이지만, 한국인 배우가 등장하고, 한국인 가정의 이야기가 주된 스토리이기 때문에 그저 평범한 미국의 가족영화가 되는 것을 한예리가 끊임없이 경계해주는 셈이다.
적당한 만족감, 어쩔 수 없는 아쉬움
<미나리>는 그 어떠한 갈등이나 주된 사건전개보다 미국이라는 낯선 공간이 가져다주는 큰 불안과 이곳에서 새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 사이에서 발생하는 이방인들의 내적 갈등이 가장 큰 중심 소재다. 이러한 감정선을 처음부터 끝까지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모니카다. 극 후반부 제이콥에게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며 한계와 울분을 표출하는 한예리의 연기는 모니카라는 인물이 견뎠을 인고의 시간들이 얼마나 힘겨웠을지를 충분히 드러낸다. 많은 이들이 윤여정이나 아역배우에 연기에 좀 더 포커스를 두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한예리의 존재감이 가장 빛났다고 느낀다.
<미나리>는 한 이민자 가정의 삶이라는 굉장히 사소해보일 수 있는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었지만, 영화를 통해 이야기할 수 있는 내용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을 보면 분명 잘 만든 영화다. 비슷한 플롯의 작품들을 답습하지도 않았고, 한국영화와 미국영화의 경계선에 있는 듯한 오묘한 분위기를 매력적으로 담아냈으며 배우들의 연기 또한 훌륭하다. 하지만, 현재 <미나리>를 향해 쏟아지고 있는 극찬들에 진정으로 부합되는지는 영 의문이다. 개인적으로도 영화 감상을 마쳤을 때, '정말 잘 만든 영화다'라는 생각보다 '이렇게까지 극찬 받을 영화인가?'라는 생각이 앞섰다는 것은, <미나리>가 준수한 작품 이상의 무언가를 이끌어내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부한 노선을 탈피하긴 했지만, 그 이상의 신선함을 더하지는 못했다. 인물들의 행동이나 성격, 이민자 가정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 모든 게 예상 밖을 벗어나지 않는다. 드라이하다는 게 장점이 될 수도 있지만, 과연 <미나리>에게 걸었던 기대가 드라이한 만족 정도였을까. 호평일색인 평가들이 왠지 조금은 과하게 느껴진다.
- 씨네랩 크리에이터 popofil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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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FF 데일리] 침묵하지 않는 카메라는 마침내
SYNOPSIS.
어느 겨울밤, 주연은 아빠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받는다. 아빠는 술에 취해 혀가 꼬인 목소리로 주연에게 “고모처럼 되지 말라”는 말을 남긴다. 그날 40년 전 자살한 고모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주연은 가족의 수치스러운 비밀이 된 고모의 흔적을 추적한다. 주연은 그동안 역사 속에서 지워져 온 여성들을 기억하며, 애니메이션을 통해 고모의 잃어버린 목소리를 찾아간다.
PROGRAM NOTE.
양주연 감독의 <양양>은 가족사에 대한 고백으로 시작한다. 양 씨 집 안의 첫째 딸로 태어난 그녀는 남동생이 가족의 중심에 있는 것이 익숙한 만큼, 가족 안에서 자기 자리가 없다고 생각해 왔다. 여기까지는 우리나라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가족의 풍경’이다. 그런 어느 날 밤, 술에 취한 아버지는 처음으로 자신에게 누나가 있음을 고백했고, 그렇게 40년 전에 사라진 고모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다. 1975년, 대학교 4학년이었던 감독의 고모는 대학 졸업을 앞두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고, 할머니가 남겨 놓은 고모의 사진을 발견한 뒤, ‘두려움에 맞서기 위해’ 이 작품을 만들게 되었다. 고모가 자살한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고모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찾아 나서는 과정은 ’사라진 고모의 자리‘뿐 아니라, 가족 안에서 늘 한쪽으로 밀려나 있었던 ‘양주연 감독의 자리’를 찾는 과정이기도 하다. (전진수)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박형규 역, 문학동네 버전) 문학사 안팎에서 길이길이 회자되는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첫 문장이다. 처음 들을 땐 그렇지 뭐, 하며 고개를 끄덕였던 이 문장이 언제부터인가 내 안에서 부스스 일어난다. 과연 그러한가? 정말 그러한가?
세월을 머금은 색감의 홈 비디오에서 부드럽게, 고화질의 결혼식 영상으로 넘어가며 시작하는 이 영화 또한 그렇다. 내레이션 속 감독도 스스로 인정할 만큼 화목한 가정, 부족한 것 없이 딸과 아들을 길러낸 집. 90년대에 홈 비디오로 풍성한 일상을 담을 만큼, 그 영상 안에서 생일 파티를 즐기는 아이의 웃음만큼, 밝고 환해 보이는 집.
이런 집들만 보다 보니까 가정에 고민이 있는 사람들은 "왜 우리 집만 이렇지? 왜 나만 이렇지?"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오래 전, 누군가 지나가는 말로 남긴, 딱히 내게 던진 것도 아니었던 한 마디가 내겐 잊히지 않는다. "모든 가정에는 다 문제가 있어요. 문제 없는 집은 없고, 그러니까 상처 없는 가정도 없어요."
생각해 보면 지극히 당연한 문장인데 우리는 그 말을 잊고 산다. 슬픈 일은 가슴에 묻고, 남부끄러운 일은 적당히 묻어 두면서, 사랑하는 이들에게 주고 싶은 단란한 일상을 바지런히 꾸린다. 그러나 문제 없는 집도 없고 상처 없는 집도 없으니, 감독이 어느 날 알게 된 사실, 이미 오래 전 세상을 떠난 고모의 이야기도 그렇다.
감독은 고모 주변 사람들에게 고모의 이야기를 묻고, 고모의 죽음을 파헤친다. 그간 감독이 카메라에 담아 왔던, 보고 듣고 이야기해 온 것들이 고모의 이야기와 공명한다. 다만 이번에는 그 '고모 주변 사람들'에 감독의 어머니와 아버지도 포함될 뿐이다.
맞지 않는 옷처럼 어색하게, 하지만 자식의 작품 앞에 최선을 다해, 약간은 긴장된 얼굴로 카메라 앞에 앉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 마찬가지로 조금 어색한 듯 이런저런 이야기로 인터뷰를 시작하는 감독의 목소리. 어쩐지 사랑스러워서 조금 웃음도 나왔다. 그러나 이내 이야기가 나아가면서 감독의 목소리는 점차 진중해진다.
힘들다고 덮어둔 기억을 감독은 부감한다. 자기 가족의 일을, 극화하지도 않고 민낯 그대로 인터뷰를 하면서 말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카메라는 끝내 침묵하지 않는다. 이제 그만두라는 말에도 꿋꿋하게, 고모의 죽음을 따라간다. 그건 탐정의 자세나 경찰의 태도와도 다른 그 누군가,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는 누군가의 자세와 태도다.
기록도 남아있지 않은 죽음. 타살인지 자살인지도 불확실한 정황. 오래 전의 아픈 일에 대해 바래고 조각난 기억들. 그 안에서 감독은 사회에 끊임없이 익숙하게 찍히는 사건들의 발자취를 본다. 그리고 그 일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에서, 자신이 가족 안에서 겪어왔던 일들이나 익숙하게 들어왔던 말들도 길어 올린다. 아무 악의 없이 부드럽게 놓인 말들, 어쩌면 감독 스스로에게도 그다지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는 그런 말들. 그 스펙트럼은 매우 넓다. 일상의 작은 말 한 마디에서 누군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고모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을 명명백백하게 드러낼 수는 없다. 이 영화는 탐정이나 경찰이 아닌, 감독이 찍은 작품이니까. 고모의 죽음이 타살이었는지 자살이었는지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알 길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조각조각 드러난 진실 속에서도 보이는 것들이 있다. 나는 보면서 어쩌면 감독의 고모의 죽음과 아주 닮아 있었을 어떤 죽음들을 생각했다. 몇 시간에 하나 꼴로 새로운 기사가 뜨는 그런 사건들. 요즘 또 부쩍 많이 보이는 사건들. 피해자의 생명보다 가해자의 수능 점수 같은 것이나 주워섬기고 있는, 악의 없이도 충분히 악독해지는 얄팍한 담론들.
또 하나, 그저 사망한 존재로서만이 아닌, 삶을 영위하던 순간들의 고모를 감독은 그려낸다. 그렇게 단지 죽은 사람, 마음 아프니 덮어둘 사람만이 아닌, 살아 있었고 살아가고 있었던 존재로. 피해 대상으로서만 피해자를 묘사하는 것도 끔찍하지만 (예를 들어 피해자가 수능 만점의 의대생이었으니 그 죽음이 얼마나 아깝다는 식으로 말한다면 얼마나 끔찍할 것인가) 피해자로서도 지워지는 경우가 허다해 더 끔찍한, 그래서 가끔 어떤 유가족들이 사진을 공개한다는 선택지를 끄집어 들게 만드는 이 사회의 서술 방식을 생각한다.
이러한 사회의 서술 방식 앞에 감독의 말하는 방식은 경종을 울리는 바가 크다. 나직나직한 감독의 내레이션이 더 많은 상영관에서 울려퍼지면 좋겠다. 침묵하지 않고 계속해서 이야기되면 좋겠다. 이 감독의 시간이 쌓이고 또 쌓여, 더 많은 여성의 이야기들이 우리에게 전달되면 좋겠다. 침묵하지 않는 카메라는 마침내 부감에 성공하고 마니까. 더 많은 이야기가 그 부감의 시선에 밝히 드러나길.
어떤 죽음으로 떠나간 사람들, 어쩌면 나였을 수도 내 친구였을 수도 있는 그들의 명복을, 진심으로 빈다.
2024. 05. 03. 13:30 메가박스 전주객사 3관 (229)
2024. 05. 05. 10:00 메가박스 전주객사 3관 (411)
2024. 05. 07. 21:00 메가박스 전주객사 1관 (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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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FF 데일리] 성스럽지만 종교적이지 않은 죽음
막달라|Magdala
다미앙 매니블|Damien MANIVEL
France | 2022|78 min|DCP|Color|Fiction|15|Asian Premiere
시놉시스
예수의 죽음 이후 마리아 막달레나는 세상에서 자취를 감춘다. 마리아는 머리가 허옇게 센다. 열매를 따 먹고, 빗물을 마시고, 나무 사이에 누워 잠을 청한다. 그리고 숲 한가운데서 잃어버린 사랑을 떠올린다. 마리아는 그를 찾을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프로그램 노트
마리아 막달라는 예수의 죽음 후 동굴과 숲 속을 떠돌아다녔다고 한다. 이 영화는 은둔한 막달라의 마지막 순간을 감독의 상상력으로 재연했다. 연기자의 움직임을 담는 데 뛰어난 재능을 가진 다미앙 매니블 감독은 전작에서도 협업했던 배우이자 댄서인 엘사(Elsa Wolliaston)에게 인간 사회를 버리고 자연 속에서 홀로 된 막달라의 마음을 따라가게 했다. 영화는 어떤 극적인 이야기나 절망을 나타내기보다 매우 단순하게 막달라의 걸음을 함께하며 연기자가 진실되게 느끼는 공간의 에너지와 자연의 반응을 충실히 묘사한다. 유행을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빚는 젊은 작가 감독 다미앙 매니블은 이 영화로 다시 한번 자신의 재능을 입증한다. (문성경)
성녀(聖女) 막달라 이야기
마리아 막달라(막달레나). 그녀는 호칭이 많다. 예수의 제자. 기독교의 성인(聖人). 예수가 부활했을 때 빈 무덤을 처음으로 목격하고 다른 제자에게 알린 인물. 오해도 많다. 예수에게 향유를 부은 죄지은 여인. 회개한 창녀. 47년 간 광야에서 지낸 이집트의 성녀 마리아와 혼동되기도 했다. 필립보, 토마스, 마리아 복음서 등 몇몇 위경 내용에 근거해 그녀가 예수의 연인이었다는 근거 없는 주장도 널리 퍼졌다.
다미앙 매니블 감독의 <막달라>도 비슷하다. 위의 이미지가 전부 혼재한다. 막달라는 숲에서 고행 생활을 이어간다. 직접 만든 십자가를 놓지 않는 그녀는 환상 속에서 예수를 만난다. 십자가에 매달린 그의 발밑에서 우는 막달라. 예수와 몸을 섞는 막달라. 비가 오는 날 예수의 얼굴을 그리며 그리워하는 막달라. 스크린에 비친 그녀는 예수의 제자이자 연인이고 성녀(聖女)다.
인간 막달라의 죽음을 체험하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막달라의 외관이다. 일반적으로 막달라는 어리고, 환희에 찬 백인 여성이다. 교회가 만든 그림이나 조각 속 그녀는 같은 이미지에 갇혀 있다. 영화 속 막달라는 다르다. 그녀는 노년의 흑인 여성이다. 죽음이 임박한 걸 느낄 수 있을 정도다. 그래서일까? 영화는 통념에서 벗어난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이 든 막달라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살았는지를 전달한다.
물론 <막달라>는 자기 의도를 쉽게 보여주지 않는다. 영화는 느리다. 그녀가 이슬 한 방울을 마시는 순간을 10초가 넘도록 보여준다. 클로즈업도 극단적이다. 러닝타임 절반은 그녀 얼굴로 가득하다. 움직임도 거의 없다. 막달라가 한 걸음을 내딛기도 어려울 정도로 늙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덕분에 <막달라>는 전통적인 성녀 막달라의 이미지를 깰 수 있다. 답답할 정도로 정적인 영화는 관음적이다. 주인공 삶의 단편을 훔쳐본다는 영화의 본분에 충실하다. 실제로 관객은 의식주를 해결하는 막달라의 삶을 그저 따라갈 수밖에 없다. 그녀가 얼마나 예수를 그리워하고 사랑하는지 온전히 느낄 수 있다.
이 과정을 거치고 나면 막달라는 성녀가 아니다. 마지막 시퀀스가 대표적이다. 막달라는 동굴에 누워 죽음을 기다린다. 천사는 촛불을 든 채 그녀가 죽기를 기다린다. 카메라는 막달라, 천사, 촛불을 천천히 오간다. 초가 녹을수록 막달라의 숨은 약해진다. 긴 시간 동안 연인을 그리워하며 고행을 이어간 한 여성의 삶을 요약하듯이. 마지막 숨을 뱉은 그녀의 손에는 작은 십자가가 있다. 막달라는 사랑과 믿음을 지키기 위해 발버둥 친 인간일 뿐이다.
성스럽지만 종교적이지 않은 죽음
그래서 <막달라>는 이율배반적이다. 몇몇 요소는 '이 영화에 새로운 게 있나?' 싶은 의문을 자아낸다. 환상 속에 나타난 예수는 익숙하다. 다른 영화, 드라마, 그림 등에서 재현한 유대인 남성 그대로다. 임종을 지켜보는 천사도 마찬가지다. 기독교 전통에 충실하다. 순진한 얼굴을 가진 백인 소년. 성경 속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을 때 기대할 수 있는 모습대로다.
하지만 종교적인 인물을 묘사하되 결코 종교적이지 않다. 가톨릭 교회가 숨기려 하는 대목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신비주의적 묘사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예수와 행복한 한때를 보내는 젊은 막달라의 모습이 대표적이다. 그녀 얼굴은 희열로 가득하다. 그런데 신실한 성녀보다는 성적으로 흥분한 여성에 가깝다. 조각가 베르니니의 작품 "성녀 테레사의 법열(Ecstasy of St. Teresa)"처럼. 성적 오르가슴을 통해 종교적 신비경을 표현한다. 우연이 아니다. 신비주의적 전통에 따르면 신과 하나 되는 기쁨은 성적인 황홀경을 맛보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산 정상에 선 막달라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자기 심장을 도려내 하늘에 바치는 막달라. 예수가 죽은 뒤 한때 행복했던 기억만 간직한 채 숲 속을 헤매던 여성은 심장을 도려내는 고행 끝에 옛 연인을 만난다. 실제로 막달라는 죽은 뒤에야 예수를 만나러 승천할 수 있다. 즉, 영화는 한 번의 황홀경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한다. 신과 하나 되는 '합일' 경험을 다시 경험하려면 고통으로 가득한 수행을 견뎌야 하니까. 틀에서 벗어난 막달라의 죽음이 성스럽지만 종교적이지는 않은 이유다.
영화 <막달라> 상영시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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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포와 광기가 만든 지옥에서, 진짜 죄를 묻다.
지옥 (Hell Bound, 2021)
개봉일 : 2021.11.19. (넷플릭스 공개)
감독 : 연상호
출연 : 유아인, 김현주, 박정민, 원진아, 양익준, 김도윤, 김신록, 류경수, 이레
공포와 광기가 만든 지옥에서, 진짜 죄를 묻다.
인간들이 풀지 못한 미스터리한 존재들을 초월적인 존재 또는 인간 사회를 벗어난 초자연적인 존재라고 한다. 우리는 항상 인간 세계를 초월한 어딘가에 있을 존재와 우리의 힘으로는 풀 수 없는 현상들에 대해 궁금해하고 반복해서 묻는다. 과연 인간을 초월한 존재, 신은 존재하는지, 존재하고 있다면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지, 보고 있다면 어떤 눈빛으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을지 궁금하다. 맹목적으로 믿는 건 아니지만, 만일 존재한다면 그는 어떤 존재일까. 궁금할 뿐이다.
넷플릭스 시리즈 <지옥>은 신에 대한 궁금증 또는 불신을 품고 있는 인간들이 초자연적 현상을 마주하게 된 후 나타나는, 지독하고 다양한 인간 군상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인간들은 신의 심판이란 행위를 보며 고뇌한다. 신이 바라는 인간성이란 무엇인가. 이 초자연적인 현상은 신이 내린 심판이 맞는 건가. 신은 과연 옳은 심판자인가. 우리는 이 심판을 피해 가기 위해 어떻게 변화해야 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지옥>의 세계관 속 인간들은 맞설 수 없는 공포 아래 끊임없이 고민하고 변화하며 분해된다.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중심을 지키는 인물들을 무너트리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기에 이른다.
드디어 공개된 시즌 1, 더 넓어진 연상호 유니버스
시즌 1은 화당 50분대의 러닝타임, 총 6화로 이루어져 있어 주말 하루를 투자한다면 무리 없이 정주행 가능할 만큼의 분량이다. 주제 특성상 다소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장면들이 등장한다. 특히 반복되는 폭력과 이해할 수 없는 범위로 튀어나가는 인물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불쾌감이 쭉쭉 상승하는 느낌이었다. 주제에 맞는, 당연한 연출들이었지만 마음이 무거운 날에는 절대 정주행을 하지 않으리라 다짐할 정도였다. (개인적으론 1부에 해당하는 1-3화가 특히 적응하기 힘들었던 것 같다.)
<지옥>의 제작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겠다. 원작을 접했을 때 느꼈던 신선함과 충격을 영상을 통해 다시 마주할 수 있게 되다니, 거기에 박정민 배우님이 캐스팅되다니! 말 그대로 ‘지옥 공개까지 존버 모드’였다.
<지옥>의 원작자(스토리 작가)이자 연출을 맡은 연상호 감독님은 <돼지의 왕>, <창>, <사이비> 등의 애니메이션 영화와 첫 실사 영화 <부산행>을 통해 ‘연상호 유니버스’를 차근차근 쌓아왔다. 조금 슬프게도 최근에 발표한 <염력>, <반도> 같은 경우엔 호불호가 꽤 강하게 나뉘었던 기억이 있는데, <지옥>은 그 호불호를 절반 이상 뒤집어낼 수 있는 작품이 아닐까 생각한다.
유아인, 김현주, 박정민 배우 등 탄탄한 필모를 쌓아온 배우들과 원진아, 김신록, 류경수, 이레 배우 등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배우들로 구성된 라인업과 지옥의 사자들을 구현한 묵직한 CG, 그리고 신선한 스토리라인까지. 딱, 연상호 감독님이 담아내고 싶었던 것들을 욕심껏 밀어 넣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번 시즌의 엔딩을 보면서 웹툰의 스토리를 넘어 이 세계관을 더욱 크게 펼쳐나갈 시즌 2가 탄생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들었다. 지금 작품에 대한 반응도 뜨거우니 감독님이 더 욕심내서 시 즌2를.. 꼬옥 제작해서 ‘연상호 유니버스’를 더 넓혀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공포를 마주한 인간들의 군상과 믿음의 충돌
<지옥>은 신에 대한 궁금증을 따져 묻는 작품이라기보단 신이 행했을 거라 추정되는 초자연적 현상 앞에서 만들어지는 인간들의 여러 모습에 주목한다. 그리고 신이 행하는 심판의 기준, 공포 앞에서 가진 믿음의 무의미함, 집단이 만들어낸 그릇되고 폭력적인 믿음에 대해 반복해 질문하고 이야기한다.
이 반복되는 질문을 던지는 인물과 폭력적인 믿음을 가진 인물들이 충돌하며 여러 군상을 만들어내고, 시간이 지나 <지옥>속 세상은 인간들이 그토록 피하고 싶어 하는 지옥의 모습과 가까워진다. 몇몇 인물들은 신이 만든 세상이 아닌 이전과 같은 인간들의 세상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마침내 아주 작은 희망을 발견하게 된다.
누군가에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희망, 누군가에게는 단단히 쌓아올린 믿음을 무너트릴지도 모르는 걸림돌. 지켜보는 입장에서 누구를 응원해야 할지는 명확하다. 하지만 문득, 내가 <지옥>의 세계관 속에서 살아온 사람이라면 명확한 방향과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기기도 했다. 공포에 둘러싸인 채, 어딘지 그럴싸한 그들의 교리를 들으면서, “난 어찌됐든 속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자신이 없다. 당장 내가 시연을 당할지도 모르는 공포스러운 세상에서, 가장 먼저 신의 교리를 외치는 사이비에게 홀리지 않을 자신이라... 그래서 이 작품이 이토록 찝찝하고 공포스럽게 느껴진 걸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말하는 죄와 우리가 만든 심판 방식이 무조건 올바르다고, 잘못됐다고 말할 순 없다. 인간의 법 아래서 교묘하게 이득을 보는 나쁜 인간도 있고, 억울함에 피눈물을 흘리는 인간도 있고, 그에 도움을 받은 인간도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아주 혹여라도, 아주 적은 확률로라도 완전한 존재인 ‘신’이 질서를 잡는데 개입한다면 인간 세계에 무조건적인 선과 질서가 찾아올 수 있을까? 그것도 아닐 것이다. 선과 악, 그에 대한 심판에 대한 100% 올바른 답은 아직 찾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답을 찾기 위해 각자의 삶이 다할 때까지 끝없이 질문을 던지며 살아야 한다. 어느 날 무거운 발자국 소리를 울리며 나타날 신을 기다리는 것이 아닌, 스스로 고민하고 선에 가까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의무가 아닐까.
지옥 시놉시스
예고 없이 등장한 지옥의 사자들에게 사람들이 지옥행 선고를 받는 초자연적 현상이 발생하고, 이 혼란을 틈타 부흥한 종교단체 새진리회와 사건의 실체를 밝히려는 이들이 얽히면서 벌어지는 이야기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지옥> 1부, 지옥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담다.
지옥은 크게 1-3화에 해당하는 1부, 4-6화에 해당하는 2부로 나뉜다. 1부에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첫 시연이 일어나고, 새진리회의 1대 의장인 정진수가 세상을 향한 경고장을 날리며 시작된다. 20년 전에 받았던 고지를 숨기고, 마치 지옥에 떨어진 듯 공포스러운 시간을 보내던 정진수는 세상을 뒤집고 시연을 통해 죽음을 맞이한다.
1부의 주요 인물들은 정진수 의장, 이동욱(화살촉), 민혜진 변호사, 진경훈 형사와 그의 딸 희정, 박정자로 구성된다. 정진수 의장은 ‘죄를 지은 사람은 지옥의 시연을 받는다’, ‘인간들을 심판하기 위해 신이 나섰다.’는 교리를 펼치며 공포에 질린 사람들을 선동하기 시작한다. 그에 대립하는 인물은 민혜진이며 정진수의 교리에 아이러니를 더하는 인물이 진희정과 박정자다.
죄를 지은 사람에게 내려지는 심판은 과연 공정한가, 죄에 대한 심판은 누가 내릴 수 있는가
진경훈은 몇 년 전, 끔찍한 사건으로 아내를 잃고 자신만의 지옥에서 살아왔다. 진경훈과 그의 딸이 다스리기 힘들 만큼 큰 고통과 분노에 쌓여있을 동안, 아내를 잔인하게 살해한 범인은 심신미약 판정을 받고 6년을 복역해 사회로 돌아온다. 범인은 모든 걸 잊고, 속 편하게 소주 한 병을 비우면서 그렇게 하루를 살아간다. 인간들이 만든 법으로, 인간들이 내린 심판으로 그의 죗값을 치르기엔 턱없이 모자라 보이는 게 사실이다.
이 순간, 정진수는 그의 죄를 심판하는 신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정진수는 희정의 범인을 잡아 불에 태워 사자들의 시연과 비슷한 모습의 시체를 만든다. <지옥>속 세계에선 새진리회의 말이 법이고, 그 집단을 이끄는 정진수는 신과 같은 존재다.
새진리회가 말하는 교리의 아이러니
정진수는 죄를 지은 사람들만 받는다는 시연의 순간을 맞이한다. 신과 가장 가깝다고 믿었던, 가장 순결한 존재로 비치는 정진수 또한 새진리회의 믿음과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만약 이 사실이 외부로 퍼져나갔다면 새진리회의 교리는 순식간에 무너졌을 텐데, 다음 의장 정칠은 자신의 이득을 위해 이 사실을 꽁꽁 숨긴다.
새진리회는 ‘죄를 지은 사람을 다스리기 위해 신이 개입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조금만 파고들어가보면 그들은 맞는 말을 하는 게 아닌, 자신들의 말을 믿도록 상황을 꾸며내고 있을 뿐이다.
죄가 없는 박정자가 시연을 당할 때, 사람들은 시연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온갖 추측을 내놓으며 그것을 기정사실화 시켜버린다. 모든 방송매체가 죄 없는 죄인을 화면 가득 담아낸다. 진짜 죄를 저지른 살인범의 모습은 피해자의 가족인 희정도 모를 만큼 꽁꽁 숨겨놓고, 초자연적인 현상이 개입되었다는 이유로 죄 없는 박정자의 얼굴은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알 만큼 널리 퍼져나간다. 진짜 죄인은 정진수의 손에 죽고, 죄를 저지른 적 없는 박정자는 시연을 받는다. 그리고 2부에 들어선 영재와 소현의 죄 없는 아기마저 고지를 받는다. 새진리회가 말하는 신의 심판이란, 정말 타당한 심판이 맞는 것일까.
공포 앞에서 이리저리 휩쓸리는 인간들. 그들이 만든 지옥
새진리회는 시연이 시작되고 겁에 질린 대중들이 약해진 틈을 타 말도 안 되는 교리를 퍼트린다.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처음 겪는 현상 앞에서 사람들은 중심 없이 팔랑팔랑 흔들리게 된다. 그로 인해 광신도들이 생겨나고, 이들은 인간들이 앞서 정해둔 법의 선마저 가뿐하게 침범하지만 아무도 새진리회와 화살촉을 말리지 못한다. 그들이 가장 신에 가까운 존재들이고, 그와 동시에 미쳐버린 존재들이란 걸 알기 때문이다.
이 세상 존재들이 아닌 사자들에 대한 공포와 시연 대상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인간들을 ‘인간답게, 죄를 짓지 않고 살아야 한다.’는 방향으로 이끄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어느 날 억울하게 일어난 사고처럼, 이유도 모르고 고지를 받은 사람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밀고, 그들을 욕하고,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고 배척시킨다. 정진수가 휩쓸고 간 세상은 어느새 지옥의 모습을 하고 있다.
신의 심판이 어그러지는 순간
이 공포의 시연과 새진리회의 교리에 반하는 인물은 민혜진 변호사와 배영재 PD, 그리고 그의 아내 소현이다. 화살촉 때문에 어머니를 잃고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민혜진은 소도의 일원이 되어 새진리회의 교리로부터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1부엔 다소 약한 모습을 보이지만, 확 바뀐 모습으로 등장한 2부에선 이 영화의 액션과 흐름을 책임지는 큰 역할을 해낸다.
애초에 새진리회의 이야기를 믿지 않았던 배영재 PD는 선배의 죽음을 목격함과 동시에 자신의 아이가 고지를 받았다는 사실을 듣고, 소도와 민혜진에게 도움을 청한다. 신은 대체 무슨 이유로 갓 태어난 아이에게 죄가 있다고 하는 걸까. 원망과 분노에서 시작된 이들의 물음은 결국 지옥 같은 세상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눈을 틔우는 커다란 빛이 된다.
영재와 소현은 서로를 껴안고 아이를 시연으로부터 지켜낸다. 시연을 고지 받은 아이는 살아남고, 고지를 받지 않은 부모가 지옥으로 갔다. 이쯤 되면 신의 의도가 의심스럽다. 과연 시연이란 것이 ‘죄인을 골라내기 위한’ 심판의 순간이 맞는 걸까? 심판이라기보단 랜덤하게, 아무에게나 들이닥친 초자연적인 사건에 그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신은 실수하지 않는다는 절대성과 믿음이 깨져버리는 순간이다.
공포로 만들어낸 선
우리는 모두 선을 행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들 나름대로의 선과 악의 기준을 정해놓고 그에 맞춰 살기 위해 노력한다. (아닌 악인들도 많은 세상이지만..)
새진리회의 1대 의장 정진수는 20년 전 받은 고지를 통해 공포를 느꼈고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바르게 살았다고 말한다. 그는 신이라는 절대적인 공포가 있어야만 사람들이 선을 행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신의 심판인 시연이 시작된 인간들의 세상은 전보다 더한 지옥이 되어있었다. 무자비하게 사람을 폭행하는 화살촉, 사람의 죽음을 생중계하는 방송과 그 앞에서 시청률을 챙기며 웃고 있는 새진리회 사람들. 시연자 가족들에게 쏟아지는 시선을 피하기 위해 차라리 사고사와 자살을 선택하는 피해자들.
이것이 과연 정진수가 말하던 ‘선으로 가득 찬 세상’이란 말인가. 아니 이게 선으로 가득 찬 세상의 모습이라니. 말도 안 된다.
결국 심판을 내릴 자격은 그 누구에게도 없다.
새진리회는 자신들이 신의 말씀을 전하는 존재라 말하며 사람들을 홀린다. 실상은 있지도 않은 권한을 부여한다며 정수리를 연속으로 쳐대고, 말의 앞뒤조차 맞추지 못하는 집단이지만 인간들은 처음 겪는 공포 앞에서 이성을 잃는다.
자신들이 말하는 신의 의도와 전혀 관련 없는 시연은 숨기고, 또 사람들을 탄압하며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던 그들은 ‘신의 심판’을 증거 삼아 부정한 짓을 저지른다. 내가 만든 원칙이 있어야만 세상이 돌아간다고, 마치 자신들이 신인 것처럼 우기던 정칠의 모습에 치가 떨린다.
정칠과 새진리회가 주장하던 교리들은 결국 언젠간 탄로날 거짓말이었다. 사자들의 등장이 없었다면 아무도 믿지 않았을 하찮은 거짓말. 새진리회는 심판을 내릴 자격이 없다. 또, 시연을 하는 초월적인 존재들조차 인간에게 심판을 내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시연자가 지옥에 가야 하는 명확한 이유가 없으니까.
민혜진이 아이를 안고 올라탄 택시 기사의 한마디가 이 모든 상황을 정리한다.
“인간들의 세상은 인간들이 알아서 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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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3주 최신 개봉영화
2022년 11월 3주 개봉영화!
데시벨 Decibel , 2021
소음이 커지는 순간 폭발한다
영화 "데시벨"은 소음이 커지는 순간 폭발하는 특수 폭탄으로 도심을 점거하려는
폭탄 설계자와 그의 타깃이 된 전직 해군 부함장이 벌이는 사운드 테러 액션 영화입니다.
2022년 가장 독특한 소재와 장르로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데요
"데시벨" 속 '소음 반응 폭탄'은 주변의 소음이 일정 데시벨을 넘어가면 폭발까지 남은 시간이 절반으로 줄어들거나,
주변의 소음이 특정 데시벨을 넘으면 폭탄이 터지도록 설계되어있습니다.
여기에 소음을 통제할 수 없는 도심 한복판이라는 설정으로 재미가 배가됩니다.
김래원, 이종석, 정상훈, 박병은, 이상희, 조달환, 차은우 그리고 이민기까지!
극장을 압도할 다채로운 매력의 대체 불가 라인업!
이번주 추천영화 "데시벨" 입니다.
동감 Ditto , 2022
2022년 새로운 동감
영화 "동감"은 1999년의 '용'과 2022년의 '무늬'가 우연히 오래된 무전기를 통해 소통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청춘 로맨스입니다.
2000년 한국 로맨스 영화의 흥행을 주도한 동명 작품에 완전히 새로워진 감성을 더해
2022년 관객들을 찾아갈 예정인데요 시대적 배경과 인물들의 개성을 새롭게 탈바꿈하여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우리 시대의 이야기로 재탄생시켰습니다.
여진구, 조이현, 김혜윤, 나인우, 배인혁 등 20대를 대표하는 청춘 배우들의 찰떡 캐스팅으로 몰입도를 선사하고
1999년과 2022년의 시대적 포인트를 완벽하게 구현하면서 다양한 볼거리와 감성을 관객들에게 선사할 예정입니다.
한국 청춘 로맨스의 흥행을 주도한 '동감'의 2022년 버전!
이번주 추천영화 "동감" 입니다
폴: 600미터 The Fall , 2022
'47미터' 제작진의 초특급 프로젝트
영화 "폴: 600미터"는 내려갈 길이 끊겨버린 600미터 TV 타워 위에서 두 명의 친구가 살아남기 위해 펼치는 사상 최초의 고공 서바이벌 입니다.
지난 8월 12일 미국에서 개봉하며 화제를 모은데 이어 캐나다, 멕시코, 영국, 브라질, 홍콩, 호주, 대만, 싱가포르 등 전 세계 박스오피스를 강타하며
멕시코와 러시아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 흥행 신드롬을 일으킨 작품입니다.
'47미터', '미션 임파서블: 고스트 프로토콜',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 '레지던트 이블 2'까지
할리우드 베테랑 제작진들이 참여하고 '스티븐 킹'의 극찬까지 더해지며 관람 욕구를 높이고 있습니다.
전 세계를 강타한 사상 최초 고공 서바이벌!
이번주 추천영화 "폴: 600미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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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말결산 - 리뷰는 못 했지만 추천하는 독립영화 7작품 l 상 2편 ( #최선의 삶 #비밀의정원 #좋은빛좋은공기 # 십개월의미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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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이렇게, 제가 극장에서 관람은 했지만, 여러 이유로 리뷰를 남기지 못했던 작품들, 그 중에서 특히 추천드리고 싶던 국내 독립영화 7편(로그인 벨지움, 빛과 철, 혼자 사는 사람들, 비밀의 정원, 좋은 빛 좋은 공기, 최선의 삶, 십개월의 미래)에 대해서 알아보았는데요. 해당 작품들은 [로그인 벨지움]을 제외하고 유튜브를 포함한 VOD서비스를 통해서 만나보실 수 있고요. 다들 좋은 작품들이니 한번쯤 만나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영화등대 채널에서 준비한 2021년 독립영화 연말결산 [상1, 2]편 마무리 짓고요. 저는 다음번에 연말결산 중편으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다음번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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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탑> 메인 예고편
중년의 영화감독이 오랜만에 만난 그의 딸과 함께 인테리어 디자인하는 여자의 건물을 찾는다. 딸이 인테리어 디자인을 배우고 싶어 해서 그녀에게 도움을 얻기 위해서다. 디자이너는 직접 고친 그 4층 건물의 소유주이고, 자기가 어떻게 고쳤는지 보여주고 싶어 한 층씩 두 사람을 데리고 올라간다. 각층의 방을 다 열고 들어가 보는 세 사람. 그렇게 시작한 영화는 그리고 나서, 이제 다시 밑에서부터 한 층씩 올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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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최선의 삶> 티저 예고편
그때는 몰랐다 그게 우리의 최선이었다
열여덟 ‘강이’, ‘아람’, ‘소영’.
더 나아지기 위해서 기꺼이 더 나빠졌던 우리의
이상했고 무서웠고 좋아했던 그 시절의 드라마
최선의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