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2025-04-21 07:35:14
‘따뜻한 혁명’과 공공재의 우화
영화 〈곤돌라〉
이 ‘조용하고’ 따뜻한 로맨스 혹은 우화에서 곤돌라는 사랑의 장소이자 우정의 장소, 연대의 장소, 전유의 장소, 연결의 장소다. 영화에는 대사가 없다. 그래서 자막도 없다. 우리는 외화를 보고 있지만, 시선은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그 자유로움의 틈새로 동화 같은 어느 유럽 시골 마을의 풍경이 들어온다. 아니, 곤돌라를 타고 스크린에서 관객에게로 도달한다.
이바는 마을의 유일한 교통수단인 곤돌라의 새로운 승무원으로 일한다. 곤돌라에서 일한다는 건, 마을의 모든 연결망의 중심에 선다는 의미다. 곤돌라가 없다면 윗마을과 아랫마을의 교류는 없다. 곤돌라를 타고 내려가는 관을 올려다보는 사람들이 조의를 표할 수 있는 건, 곤돌라가 가능케 한 위와 아래의 연결 덕분이다.
이바가 곤돌라를 타고 내려오거나 올라갈 때, 가운데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이 있다. 또 다른 승무원 니노다. 두 사람이 곤돌라의 승무원으로 일하는 한, 이 마주침은 강제된 것이다. 피할 길이 없다. 몇 번의 수줍은 혹은 어색한 교차 이후 두 사람은 이 무료한 반복을 조금씩 다르게 채워나가기 시작한다.
두 사람은 체스를 둔다. 체스판은 곤돌라의 위쪽 정류장에 있다. 곤돌라가 한 바퀴 돌아야 이바와 니노가 말을 움직일 수 있으므로, 체스 게임은 한없이 길어진다. 두 사람의 체스를 매개로 연결된 시간도 그만큼 길어진다. 체스를 하며 두 사람은 무료하기만 한 곤돌라에서 다음 수를, 서로의 얼굴을 떠올리기 시작한다. 곤돌라의 ‘강제된’ 마주침이 설렘으로 변한다.
곤돌라에는 아이들이 탄다. 농부와 마을 주민이 탄다. 가축과 와인도 실어 나른다. 이 다채로운 승객들은 이바와 니노가 맺은 관계성을 더욱 확장한다. 차가운 기계일 뿐이던 곤돌라가 인간의 온기를 품는다.
이 변화가 싫은 사람도 있다. 곤돌라를 운영하는 남자는 곤돌라의 목적이 변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에게 곤돌라는 이윤을 안겨주는 생산수단이어야만 한다. 돈을 낼 수 없는 사람은 당연히 승차가 거부된다. 사장은 이바와 니노가 곤돌라로 온 마을을 연결하는 게 불만이다. 그래서 체스판을 발로 차버린다. 또 하나의 불만이 있다. 사장은 이바에게 고백했다가 거절당한다. 그래서 날로 친밀해져가는 두 사람과 마을 사람들이 더 눈꼴사납다. 이바와 니노의 곤돌라는 이윤 축적과 이성애 욕망 충족의 두 영역 모두에서 곤돌라의 ‘소유주’를 배반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바와 니노의 관계는 점점 깊어진다. 온갖 상상력을 발휘해 반복되는 일상에 차이를 기입하고, 서로를 즐겁게 해주기 위한 사소한 행동들에서 깊은 친밀감이 피어난다. 니노가 남몰래 항공사 승무원이 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 위기를 맞기도 한다. 이바가 배신감을 느끼는 이유는 니노의 비밀이 두 사람이 곤돌라에서 차근히 형성한 친밀한 관계의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곤돌라의 반복되는 회전 속에서 만들어온 두 사람의 관계성은 그새 위기를 넘길 만큼 충분히 단단해져 있었다. 서로를 향한 분명한 마음을 확인한 이바와 니노는 사장에게서 곤돌라를 탈취, 전유해 이를 오롯이 두 사람을 위한 것, 나아가 온 마을을 위한 공공재로 바꿀 계획을 꾸민다. 두 사람을 비롯한 온 마을 사람이 함께한 이 작전에서, 마침내 이바와 니노의 친밀성은 결실을 이루고 곤돌라는 자본주의적 용도를 박탈당한 채 공공의 것이 된다. 〈곤돌라〉는 기계의 차가운 속성에 다채로운 정치적 상상력을 곁들인다. 그리하여 의미 없는 반복에 지친 사람들에게 일상의 공허함을 잠시나마 잊게 해줄, 혁명의 따뜻함을 품은 산뜻한 공공재의 우화로 거듭난다. ‘따뜻한 혁명’이라는 형용모순은, 적어도 이 영화에서만큼은 현실성을 잃지 않는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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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가 환상적인 섬에 다다를 그 날
나태주 시인의 <풀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 너도 그렇다'는 짧은 전문(全文). 순하고 다정하게 마음에 쏙 들어오는 시구지만, 의미를 들여다보면 문득 이 얼마나 이르기 어려운 경지인가 생각하게 된다. 누군가를 자세히 보고 오래 본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세상 아주 많은 것들은, 어쩌면 모든 것들은 찬찬히 들여다보아야 그 진의를 드러낸다. 자세히 보아야 어여쁜 것은 풀꽃만이 아니다.
영화 <우리, 둘> 인물에 대해서 얼핏 들으면 어쩐지 풀꽃처럼 은은한 관계를 연상하게 된다. 짧은 아파트 복도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이웃집에 사는 '20년째 연인' 니나와 마도. 은퇴한 후에는 두 사람이 사랑하는 도시 로마로 떠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영화의 배경 또한 한국이 아니라 프랑스니까, 조금은 편안하고 안정적인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영화는 "노년 여성, 오랜 연인의 사랑"이라는 데서 떠올린 나의 편견 어린 기대를 장렬히 부순다. 영화가 니나와 마도의 공간을 비출 때, 일상적인 물건들이 클로즈업되고 일상의 소리들이 증폭될 때, 그 안에서 아른거리는 것은 무엇인가.
두 사람은 남들이 보기엔 평범한 이웃이다. 마도의 자식들은 니나의 성씨를 깍듯이 붙여 '돈 부인'이라고 부른다. 니나 또한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마도를 부를 때 처음에는 '지라르 부인'으로, 절친한 이웃 사이였음을 강조한 후에는 '마들렌'이라는 본명 그대로 부른다. '마도'는 마들렌의 애칭이니까.
평범한 이웃의 깍듯한 호칭 뒤에 연인의 애칭이 가려져 있다. 거실에서 추억 어린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고, 로마의 아파트를 사기 위해 돈을 세고, 함께 옷을 사러 가서 안 어울릴 것 같다고 갸웃대는 옷에 "날 믿고 입어보라"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사랑과 신뢰로 서로를 꼭 붙은 연인이다. 강산이 두 번은 바뀔 20년 동안 서로를 연인이라 불러온 사이. 둘은 이제 은퇴 후 로마의 아파트로 떠날 준비를 한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거침없는 성정을 가졌을 뿐 아니라 딸린 가족이 없는 니나와 달리, 한 번 실패한 결혼생활의 기억뿐 아니라 자식들까지 있고 심지어 남편과의 소원했던 관계에 대해 아들의 원망을 받고 있는 마도는 떠나겠다는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다.
어려운 마음으로 지내던 중, 예기치 못한 병마가 갑작스레 마도를 찾아온다. 뇌졸중으로 말마저 잃은 마도를, 자식들은 최선을 다해 돌본다. 간병인을 들이고, 딸이 수시로 드나들며 살핀다. 표면적으로 단지 이웃일 뿐이었던 니나는 마도에게서 자연스럽게 실은 갑작스럽게 차단당한다. 니나는 본인 성격대로 거침없이, 그리고 무엇 하나 자유롭지 못한 일상 속에서 마도를 되찾기 위한 액션을 취하기 시작한다.
일면 거칠고 비상식적인, 파격적으로 보이는 니나의 행동들은 사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지극히 상식적인 마음을 기반으로 한다. 오랜 연인을 아끼고 걱정하는 마음, 함께 있고 싶은 마음, 불안해져 버린 연인의 뇌리에 가장 깊이 박힌 기억들을 재차 들이대서 어떻게든 그를 돌이키고 싶은 절박한 마음.
반면 영화 속에 놓인 지극히 일상적인 것들은 낯설게 비친다. 두 사람의 아파트 곳곳에 놓인 오브제를 클로즈업해서 여러 차례 보여주는데,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것들을 다시 보게 된다. 무난한 장식물들이었는데 원래 저렇게 소름 돋게, 마치 누군가를 비웃는 것처럼 생겼던가. 사무적이고 능숙한 간병인의 둥근 눈이, 엄마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딸의 눈이, 그토록 평이한 눈빛들이 왜 스릴러 영화의 그것처럼 심장을 옥죄어 올까.
영화를 보기 전에 이미 눈물을 왈칵 쏟아내게 만들었던, 선우정아의 <도망가자>와 콜라보 뮤직비디오소리들도 마찬가지다. 소녀의 목소리를 삼키고 울리는 까마귀 소리, 불안하게 맴도는 연기와 함께 프라이팬이 타오르는 소리. 유리창처럼 얇고 투명한 거짓을 부술 기세로 맹렬하게 돌아가는 세탁기 소리. 평범한 매일의 소리들이 증폭되어, 어쩐지 멈추지 않고 계속 들려올 때 덜컥 불안해진다. 의식하지 않고 들으면 편안한 소리들이, 의식하고 듣는 순간 서스펜스의 요건이 된다.
이런 서스펜스가 곳곳에서 도사리고 있는, 누군가가 위협적으로 문을 두드리는 일상을 과연 평범한 일상이라 부를 수 있을까. 2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고 속속들이 알게 되었고 이제 바라는 건 행복했던 기억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행복을 누리며 살겠다는 것뿐인데 그게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
그 기본적인 것도 어려운 이곳, 우리가 일상이라 믿는 곳은 정말 일상이 맞는지? 영화는 큰 소리 내지 않고 울림을 건넨다. 편견과 혐오의 소리는 일상에 깊이 뿌리 박혀 있어, 우리는 이따금 물속의 물고기처럼 느끼지 못하곤 한다는 것을. 누군가가 같은 물 안에서 익사하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는 사실을.
우리의 상식이란 뭘까. 어떤 상식들이 스릴러가 되는 모습을 보는데, 한편에서 그를 성큼성큼 뛰어넘는 마음이 있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오래도록 아낀 마음은 마치 햇볕과 파도에 맨질맨질해진 조약돌 같아서, 부드럽고 따뜻하게 손안에 착 감겨드는 것만 같다. 눈빛만으로도 전해진 두 사람의 사랑은, 육체의 병과 사회의 제약을 뛰어넘어 서로에게 닿으려는 두 사람의 몸짓은 그 모든 서스펜스적인 요소들을 뛰어넘는다.
사랑은 그렇게 모든 것을 유유히 뛰어넘어 흐른다. 눈빛 속에서 흘러나와 무너지는 것들 너머까지 흘러간다. 이 사랑이 스릴러 없는 일상을 살 수 있는 날, 두 사람이 소중하게 들으며 춤추는 노래 가사 속의 그 날이 아닐까. 상식과 일상을 넘어서서 언젠가 환상적인 섬에 다다를 그 날.
Se verrai con me
sul mio carro tra le nuvole
più avanti del caldo del sol
sull’ultima stella lassù
se verrai
당신이 나와 함께 가준다면
내 마차에 올라 구름을 지나
태양의 열기 바로 앞으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별 위로
당신이 가준다면
Tu vivrai con me in un’isola fantastica
e un mondo vedrai di lassù
un mondo nascosto nel blu
tutto nuovo per te
당신은 환상적인 섬에서 나와 함께 살 거예요
높은 곳에서 세상을 볼 거예요
푸른 하늘에 숨겨진 세상을
당신에게는 모든 게 새롭겠죠
La terra, la terra, la terra sarà senza frontiere
la terra, la terra ci porterà fortuna
la luna, la luna per noi sarà il domani
se m’ami, se m’ami
이 세상의 대지에는 경계가 없어질 것이고
대지는 우리에게 기회를 가져다주겠죠
달, 저 달은 우리의 미래가 될 거예요
당신이 날 사랑한다면, 당신이 날 사랑한다면*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의 초대로 시사회에 참석하여 감상하고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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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향과 유년기에 관한 보편적 호소
온 동네 사람들이 친밀하게 엮인 정다운 마을에 폭동이 일어난다. 폭동을 주동한 자들은 개신교 민병대로, 그들은 마을에 있는 가톨릭교도들과 그들의 집을 마구잡이로 공격한다. 화염병, 자동차 폭발 등이 일어나 마을은 쑥대밭이 되고 사람들은 겁에 질린다. 골목 입구에는 바리케이드가 생기고 총을 든 군인이 수시로 마을을 순찰한다. 이곳은 1969년 북아일랜드의 벨파스트, 9살 소년 버디가 사는 마을이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종교를 앞세워 갱단처럼 행패 부리는 사람들로부터 가족의 안전을 보장하는 일이지만, 그 외에도 문제는 산적해 있다. 북아일랜드는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실업률로 고생 중이고, 경제 위기의 여파는 벨파스트를 비껴가지 않았다. 세금 문제와 수입 감소로 골머리를 썩는 버디 부모님의 갈등이 잦아지는 이유다. 아빠는 미래를 위해 벨파스트를 떠나자 하지만, 엄마는 삶의 모든 것이었던 벨파스트를 떠나고 싶지 않다. 감당하기 벅찬 여러 문제를 동시에 마주한 버디네 가족은 위기에 처해 있다.
하지만 아이들은 조금 다르다. 가톨릭교도와 개신교도를 구분할 줄 모르는 이들은 눈이 뒤집힌 채 폭력을 휘두르는 어른들을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조금은 무섭고 긴장도 되지만 늘 그랬듯이 친구들과 어울리고, 말썽을 부리는 일상을 이어간다. 버디는 따뜻한 말과 사랑을 주고받는 조부모님의 보살핌을 받고, 엉뚱한 방식으로 마음에 둔 여학생과 가까워지기도 한다. 버디는 벨파스트가 오래도록 쌓아온 아름다운 관계의 성취를 듬뿍 만끽하며 성장하는 중이다.
어른의 세계와 아이의 세계가 멀어질수록 영화의 긴장감은 커진다. 어른들의 혼란과 아이들의 천진함이 동시에 포개진 벨파스트라는 모순은 점점 첨예해지며, 따로 존재하는 게 좋았을 두 세계를 결국 부딪히게 하고 만다. 동네 친구와 비밀서클을 만들어 놀던 버디가 얼떨결에 가톨릭교도를 응징하러 가는 개신교도 무리에 합류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는 약탈하듯 상점을 헤집어놓는 사람들 사이에서 엄마에게 선물할 세제를 챙긴다.
그러나 일은 버디의 기대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버디의 엄마는 기뻐하기는커녕 크게 화를 내며 다그치고, 물건을 제자리에 놓자며 상점으로 버디를 데리고 간다. 그런데 문제는 점점 꼬여만 간다. 폭도들이 왜 가톨릭교도에 이로운 짓을 하냐며 버디 모자를 다그치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개신교도임에도 평소 자신들에게 거리를 두던 버디 가족을 인질로 잡아 군인들과 인질극을 벌이기까지 한다. 엄마를 위한다는 순진한 동심이 어른들의 혼탁한 세계와 만나 엉뚱한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다행히도 버디가 일으킨 소동은 파국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다만, 이 사건을 계기로 버디 가족은 오랫동안 망설였던 영국으로의 이주를 결정한다. 떠나는 버디네 가족을 보며 할머니가 당부하듯 혼잣말로 건네는 말을 들어보자. “가거라. 지금 가거라. 뒤도 돌아보지 말고. 사랑한다(Go. Go now. Don’t look back. I love you so).” 할머니는 이제 벨파스트가 더 이상 자식들을 위한 최선의 선택지가 아님을 안다. 평생을 함께한 동반자인 남편이 얼마 전 세상을 떠났기에 버디 가족마저 떠난다면 지독히 외로울 테지만, 자신의 외로움을 볼모로 자식들을 붙잡을 수 없는 그녀는 슬픔이 깃든 결연한 표정으로 벨파스트를 떠나는 자식들을 배웅한다.
이것이 〈벨파스트〉가 고향과 유년기를 그려내는 방식이다. 과잉 낭만으로 고향과 유년기를 그려내는 영화의 방식에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었지만, 〈벨파스트〉는 다소 성급하고 단조로운 방법으로나마 우리가 지나온 것에 대한 보편적 호소를 만들어낸다. 모든 고향과 유년기에는 고유한 색채가 있다. 지역, 시대, 성별 등에 따라 그 색채는 무한히 다양할 것이다. 그럼에도 어떤 식으로든 그 시기를 거쳐왔고, 지금을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에겐 공통점이 있다. 버디가 벨파스트를 폭력이 난무하던 곳으로 기억할지, 정情이 넘치는 따뜻한 곳으로 기억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어떤 곳이었든 벨파스트가 그의 원점임은 영원히 바뀌지 않는 사실로 남는다. 종교와 경제, 폭력과 온정이 들끓으며 뒤섞였던 1969년의 '벨파스트 출신 버디'가 자식들을 멀리 보내는 할머니의 쓸쓸하면서도 따뜻한 마음과 연결되기를, 그가 언젠가 다시 벨파스트로 돌아와 할머니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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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FF 데일리] ‘올란도’로부터 시작되는 트랜스젠더 계보
올란도, 나의 정치적 자서전/Orlando, My Political Biography
폴 B. 프레시아도/France/2023/98min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올란도》*는 어느 날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별이 바뀐 올란도가 수백 년의 시간을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다. 울프가 사랑했던 여성 비타 색빌 웨스트가 모델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즉 《올란도》의 설정과 작품이 쓰인 배경을 결합하면, 이 소설이 트랜스 여성을 향한 동성애적 욕망에 기반한 이야기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소설이 쓰인 게 1928년. 출간 100주년을 앞둔 지금, 폴 B. 프레시아도 감독은 〈올란도, 나의 정치적 자서전〉에서 《올란도》를 다시 읽는다. 그럼으로써 올란도로부터 이어져오는 트랜스 계보를 써내려가고자 한다.
《올란도》는 프레시아도 감독에게 경외와 분노를 동시에 자아낸다. 트랜스 서사의 ‘원형’으로 삼을 만한 이야기라는 점에서는 경외를, 모든 트랜스젠더의 자서전은 《올란도》를 능가할 수 없다는 점 그리고 동시대의 수많은 트랜스가 귀족이자 시인이었던 올란도가 누린 특권에서 이질감을 느낀다는 데서는 분노를 느끼는 것이다. 즉, 〈올란도, 나의 정치적 자서전〉은 《올란도》에 대한 헌사이자 이를 비판적으로 넘어서기 위한 시도다.
영화에는 동시대의 수많은 올란도‘들’이 등장한다. 젠더 이분법이 포섭하지 못하는 모든 존재는 ‘올란도’다. 영화에서는 8세부터 70세까지의 트랜스젠더/논바이너리(non-binary, 자신을 성별 이분법으로 분류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일컬음) 26명이 《올란도》와 자기 서사를 오가며 ‘원형’을 변주한다. 동시대의 올란도들은 현대의 젠더 이분법보다 버지니아 울프가 백여 년 전 그려낸 세계에 더 편안함을 느낀다. 물론 시간이 흐르는 동안 변한 것도 많기에 최초의 올란도와 그 후예는 완전히 같지 않다. 《올란도》의 시적 아름다움이 가능케 하는 자유를 노래하다가도 정신병원, ‘남성’과 ‘여성’뿐인 신분증이 야기하는 불안, 트랜스젠더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법의 문제 등을 수시로 소환하는 동시대 올란도들의 이야기를 보라. 요컨대, 이들은 ‘최초의 올란도’를 재연하는 동시에 이를 자기 나름대로 재구성한다. 어디까지가 ‘원형’이고 어디부터가 ‘변형(trans)’인지 모를 이야기는 우리를 성별 이분법의 기나긴 역사와 이 폭력적인 체제가 양산한 트랜스젠더의 경험, 감정의 궤적으로 인도한다. 패러디와 유머를 활용해 기어이 폭력적인 규범 속에서 자신들만의 공간을 만들어낸 올란도들의 이야기는 쾌감을 자아내기도 한다.
올란도 이후에도 수많은 트랜스젠더 아이콘이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가 올란도와 마찬가지로 그 후예들이 동일시하는 대상이 되었다. 미국에서 최초로 성전환 수술을 받은 것으로 유명한 크리스틴 조겐슨이 대표적이다. 수잔 스트라이커가 쓴 《트랜스젠더의 역사》를 보면, 조겐슨의 유명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 수 있다. 사람들이 그녀에게 편지를 하도 많이 보내서 미국 어디에서든 주소 없이 ‘크리스틴 조겐슨’이라고만 써서 편지를 붙여도 그녀의 집에 배송되었다고 한다. 올란도의 후예들이 동일시하는 건 대중에게 트랜스젠더의 존재를 가시화한 인물뿐만이 아니다. 모든 특권에 반대하며 혁명을 주창한 급진적 트랜스젠더 활동가들도 동일시의 대상이다. 동시대의 올란도들은 여러 번의 동일시를 통해 젠더 이분법이 누더기로 만든 트랜스젠더 계보를 복원한다.
영화의 마지막, 인상적인 세 장면이 연달아 나온다. 첫 번째는 의사가 《올란도》를 수술대 위에 올려놓고 수술하는 장면이다. 의사는 “폭력뿐이었다(Violence was all)”는 구절을 오려내고, 책에 실린 올란도의 얼굴을 동시대 올란도들의 얼굴로 교체한다. ‘정신병자’로 낙인찍혀 의료 조치의 대상이 되어야 할 존재는 트랜스젠더가 아닌 그들을 주변화한 젠더 이분법이라는 점을 ‘수술’이라는 트랜스젠더에게 각별한 의미를 갖는 의료 행위로 패러디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당당히 스스로가 트랜스젠더라고 말하는 어린이들의 ‘올란도 선언’이다. 아이의 이미지는 대개 이성애 규범적인 핵가족의 미래를 상징하는 보수적 상징으로 활용되지만, 〈올란도, 나의 정치적 자서전〉에서는 그렇지 않다. 트랜스젠더임에도 우울하지 않은 아이들의 얼굴은 올란도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앞으로도 다채롭게 변주되어 이어질 것임을 분명하게 암시한다.
마지막은 《올란도》 출간 100주년인 2028년을 맞아, 《올란도》로부터 권위를 부여받은 판사가 체제의 폭력에 시달려온 존재들에게 논바이너리 국가의 시민권을 부여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최초의 올란도(그리고 버지니아 울프)가 미처 자각하지 못했던 식민주의‧제국주의의 관성을 거부하고 배제된 자들을 위한 국가와 권리를 선포하는 장면, 즉 권력을 전유하는 장면으로 독해할 수 있다.
이 진지하고 감동적이면서도 풍자 정신이 충만한 블랙/코미디가 최종적으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간단하다. 버지니아 울프의 시적 세계에서만 가능했던 트랜스젠더의 자유를 현실로 가져오라는 것. 〈올란도, 나의 정치적 자서전〉은 퀴어가 나오는 작품의 문학성은 예찬하면서도 정작 현실의 문제에는 눈감는 사람, 독특한 상상력으로 우리를 속박하는 규범의 경계를 넘어보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할 만한 독창적‧실험적 영화다.
*국내에는 ‘올랜도’로 번역된 것이 더 많으나 영화의 제목에 맞춰 편의상 ‘올란도’로 표기한다.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 초청으로 제24회전주국제영화제에 기자로 참석해 작성한 글입니다.
★이 영화는 제 24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4월 30일 13시, 5월 3일 17시 30분, 5월 4일 16시 30분에 상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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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거 하나 없었던,,, 다만 박정민만 존재했던 영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액션 영화 장르였기 때문에 잔인할 것은 예상했지만 그래도 영화 홍보를 할 당시에 뻔한 액션 장르물은 아니라고 대대적인 홍보를 하기에 은근히 기대했던 작품이었다. 하지만 그 은근한 기대는 하지 않는 편이 좋았다. 왜 제목은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였을까... 필자를 악으로 보내버린 작품이었다^^
영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시놉시스
태국에서 충격적인 납치사건이 발생하고, 마지막 청부살인 미션을 끝낸 암살자 인남은 그것이 자신과 관계된 것임을 알게 된다. 인남은 곧바로 태국으로 향하고, 조력자 유이를 만나 사건을 쫓기 시작한다.
한편, 자신의 형제가 인남에게 암살당한 것을 알게 된 레이. 무자비한 복수를 계획한 레이는 인남을 추격하기 위해 태국으로 향한다. 처절한 암살자 VS 무자비한 추격자. 멈출 수 없는 두 남자의 지독한 추격이 시작된다.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오마주도 패러디도 아닌 그 경계 어딘가
액션영화의 문법이라고 봐야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왜 항상 다른 액션이라고 홍보하면서 같은 것일까? 스토리라인이 다 한 번씩을 봤던 내용이었다. ‘테이큰’, ‘아저씨’가 떠오르지 않는다면 이상할 정도로 아주 빼다 박아놓았다. 테이큰과 아저씨가 엄청난 걸작이어서 이 작품들을 생각나게 만들려는 오마주였던 것일까?, 나 이장면 어디서 봤는데!! 하며 재미있게 풀어내려는 패러디였던 것일까? 아니면 원본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아주지 않길 바라는 표절인 것일까? 이 세 가지의 줄타기를 한 작품이었다.
줄타기를 잘했다고 칭찬을 해줘야하는 것인지 아주 의문스러운 작품이었다. 영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만의 특색이 있다기 보다는 어디서 다 한 번씩 본 장면과 스토리라인들이 얼기설기 짜여진 채로 그 엉성함을 화려한 액션으로 무마하는 것처럼 보여서 아쉬웠다. 뭐 그래도 액션을 훌륭했다.
갑자기 부성애?
작품을 보는 내내 굉장히 불편했던 이유는 납치에 대한 이야기를 다뤘기 때문인데요. 납치를 하지 않으면 액션 영화는 진행이 되지 않나 봅니다. 그리고 한 번도 본적 없던 딸이 납치가 됐다고 해서 저렇게 갑자기 부성애가 발현해서 스토리라인이 생성된다는 것이 이 어쩜 머리 하나 안 굴린 스토리인가 싶었다.
보는 내내 아가는 얼마나 연기하면서 힘들었을까? 이런 감정이 들다가도 아니 도대체 왜 납치를 스토리라인에 넣었을까? 마지막 대사도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니? 몰라,,, 기억이 안나,,,”라는 대사를 넣을 거였으면 그저 폭력이 일상이 되고 폭력이 없는 세상에서 살기 힘든 악의 존재들을 보여주면서 그 싸움을 벌일 수 있는 소재를 좀 다르게 찾아도 좋았을텐데,,, 굉장히 아쉬웠던 선택이었다.
그래도 박정민이 있었다
그래도 박정민 덕분에 영화를 끝까지 볼 수 있었다. 아직 트렌스젠더 수술을 하지 못한 남성이지만 여성이 되고 싶은 유이 역할을 너무나도 잘 소화해냈다. 입 벌리고 감탄했던 것 같다. 눈 질끈 감고 보다가 박정민만 나오면 눈이 떠졌달까?
극 속에서 유일한 개그캐였고, 극의 분위기가 무겁게만 흘러가지 않도록 도와주는 역할이자 결과적으로 박정민이 없으면 영화의 결론이 나지 않는 굉장히 중요한 역할이었다. 정말 영화를 다 편집하고 박정민이 나온 부분만 살려서 다시 제작했으면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데 솔직히 박정민이 나오는 영상만 봐도 영화의 흐름과 주제는 완벽히 파악할 수 있다. 그 말은 영화 스토리라인이 정말 단순하고 오로지 액션을 위한 작품이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영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는 스토리 건개에 상관 없이 그저 죽고 죽이는 추적 영화를 좋아한다면 추천하지만 개연성과 연결 흐름이 중요한 관객들에게는 그닥 추천하지 않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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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편난 기억 너머에서 마주한 아름다운 것들
애프터 양 (AFTER YANG, 2021)
"파편난 기억 너머에서 마주한 아름다운 것들"
등급 : 전체 관람가
장르 : 드라마, SF
러닝타임 : 96분
감독 : 코고나다
출연 : 콜린 파렐, 조디 터너 스미스, 저스틴 H. 민
개인적인 평점 : 4.5/5
쿠키 영상 : 없음
애프터 양 줄거리
함께 살던 안드로이드 인간 ‘양’이 어느 날 작동을 멈추자 제이크 가족은 그를 수리할 방법을 찾는다. 그러던 중, ‘양’에게서 특별한 메모리 뱅크를 발견하고 그의 기억을 탐험하기 시작하는데… 무엇을 남기고 싶었어,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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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화제가 됐던 애플 TV <파친코(1,2,3,7편)>의 연출을 맡은 것으로 알려져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끌게 된 코고나다 감독의 신작 <애프터 양>이 전주 국제영화제를 거쳐 국내에 정식 개봉한다. 제23회 전주 국제영화제의 개봉작으로 선정된 <애프터 양>은 매 상영마다 전석 매진을 기록하며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애프터 양>은 알렉산더 와인스틴의 단편 소설 [양과의 안녕]을 각색한 작품으로, 테크노 사피엔스라 불리는 안드로이드가 각 가정에 보급된, 언젠가 다가올 미래를 배경으로 한 SF영화다. 주인공 제이크 가족은 입양한 딸 미카의 고향인 중국에 대해 알려주기 위해 안드로이드 양을 구매한다. 양은 미카에게 선생님이 되어주기도 하고, 하나뿐인 형제가 되어주기도 한다. 미카 또한 양을 오빠라 부르며 그에게 의지하고 함께 마음을 나눈다.
어느 날, 수명이 다된 것인지 양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되자 제이크는 공식 서비스 센터와 사설 센터를 오가며 양을 고치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어딜 가든 양은 다시 움직이지 못할 거라는 부정적인 답만 돌아올 뿐이다. 제이크는 양을 차 뒷좌석에 앉힌 채 이곳저곳을 헤매다 마지막 보루로 테크노 사피엔스를 연구하고 보존하는 박물관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양의 중심부에 저장되어 있던 그의 기억 조각들을 마주하게 된다.
<애프터 양>은 안드로이드 양의 짧은 추억들을 함께 되짚으며 우리를 가장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감정인 사랑과 행복했던 기억, 소중한 것의 상실과 회복, 나의 뿌리(정체성)와 인생을 찾아가는 여정에 대해 이야기한다.
단 하나의 아쉬웠던 점? 취향의 차이
개인적으로 <애프터 양>은 상당히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사심이 가득해서 더 좋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솔직히, 미리 말하자면 이번 리뷰에선 영화의 장단점을 비슷한 비율로 다루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나에겐 이 영화가 상당히 만족스러웠기 때문이다. 전주 국제영화제에서 첫 상영을 마친 후, 남아있는 감정에 푹 젖어있다가 다음 상영을 바로 예매했을 만큼 이 영화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아마 이 글의 90%는 영화의 장점과 내가 느꼈던 영화의 메시지들로 채워질 예정이라 아주 작은 아쉬웠던 점 하나를 먼저 던지고 가려고 한다.
<애프터 양>은 느린 속도를 좋아하지 않는 관객들에겐 추천하지 않는 영화다. 오프닝 신을 제외하면 스피드가 느껴지는 신이 거의 없고, 양의 기억이 짧게 파편 난 채로 재생되기 때문에 그에 대한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다. 영화 전체가 마치 아름다운 비디오 일기처럼 흘러가는 느낌이 있고 모든 등장인물들이 외적으로 감정을 많이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다이나믹한 감정선을 기대한다면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또 SF영화라 하여 상상력으로 가득한 세상을 기대하는 관객에게도 비추! 조용한 영화기 때문에 피곤한 상태로 관람하는 것 또한 비추다.
객관적으로 본 아쉬운 점은 이 정도가 있겠고..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단점도 아니고 그냥 취향 차이 정도가 아닐까? 오히려 난 이 천천히 흘러가는 화면들이 좋았다. 빠르지 않은 속도 덕분에 푸른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 연하게 느껴지는 바람 같은, 그 순간에 담긴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으니까.
오늘부터 나의 최애 주머니에 담긴 저스틴 H. 민 배우
이 영화에 처음 띠용-했던 건 코고나다 감독의 이름 때문이었고, 죽어도 꼭 봐야겠다!! 고 생각하게 된 이유는 '저스틴 H. 민’이라는 배우 때문이었다. 올해 초, 나는 뒤늦게 <엄브렐러 아카데미>를 통해 이 배우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고, <애프터 양>을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려왔다.
해사한 미소와 조곤조곤한 말투, 밝은 성격과 내 취향을 저격하는 매력적인 외모. 거기에 <엄브렐러 아카데미>에서 보여준 발랄함과 따스함이 뚝뚝 떨어지는 연기까지… 저스틴 H. 민은 내 눈에 쏙 들어오는 매력적인 배우였다. 그리고 나는 <애프터 양>을 보자마자 한치의 망설임 없이 저스틴 H. 민을 최애 주머니에 담아버렸다.
저스틴 H. 민 배우는 <엄브렐러 아카데미>에서 보여줬던 모습과 사뭇 다른 모습으로 '양’이 되어 스크린에 나타났다. 그는 언젠가는 로봇처럼 딱딱하고 어색하게, 언젠가는 따스한 오빠처럼, 언젠가는 든든한 부모님처럼, 또 다정한 연인처럼 느껴지는 여러 결의 눈빛을 흘리며 나의 마음을 완벽히 홀리는 데 성공했다. 사실 저스틴 H. 민 배우는 단편 영화들을 제외하면 아직은 필모그래피가 많지 않은 배우인지라, 다양한 연기를 보지 못했었는데 <애프터 양>을 통해 새로운 모습을 만날 수 있어 정말 기뻤다. 나는 섬세하고 정갈한 그의 호흡에 속절없이 빨려 들었고 '이 배우는 지금도 엄청난 스타지만… 앞으로 더 잘될 배우가 확실하다!’고 외치며 그에게 뼈를 묻기로 다짐했다.
세련된 연출
<애프터 양>은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영화다. 정확히 몇 년인진 알 수 없어도 왠지 멀지 않을 것 같은 미래로 보인다. 코고나다 감독은 익숙한 현재의 모습에 미래의 모습을 자연스레 녹여낸다. SF영화라 하면 정말 상상 속에만 존재할 것 같은 배경을 떠올릴 수도 있는데, 이 영화는 정말 곧 다가올 것 같은 미래의 모습을 담았다. 안경과 닮은 판독기, 낯설지 않은 차의 구조, 지금도 찾아볼 수 있는 익숙한 카메라와 집, 가구들. 그래서인지 정말 이런 가족이 어딘가에 존재하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들어 더욱 몰입이 됐던 것 같다.
그리고 인물들의 의복이나 음식, 차를 우려먹는 문화를 통해 영화 곳곳에 동양적인 요소들을 가미함과 동시에 깔끔한 갤러리를 연상시키는 건축물과 가구들을 배치함으로써 흠잡을 곳 없는 깔끔하고 안정적인 화면을 보여준다. 더불어 이 영화의 세련됨은 오프닝에서 제대로 느낄 수 있는데, 이 부분은 먼저 얘기하면 장면의 재미를 반감시킬 수 있으니 자세히 언급하진 않겠다.
코고나다 감독과 저스틴 H. 민 배우의 만남.
그들이 던지는 "~다운 건 무엇일까?" 하는 질문코고나다 감독과 저스틴 H. 민 배우. 각자 떨어뜨려 놓아도 충분히 이슈를 몰고 다니는 인물이자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공통된 정체성이 있는 두 사람이 만난 작품이라니. 어찌 궁금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영화에서 양과 가까운 사이였던 에이다는 양이 교육용 안드로이드로서 미카를 가르치기 위해 중국의 문화와 아시아인다운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했다고 말한다. 양은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아시아인의 조건은 무엇일까?"
프로그램에 정보가 입력되어 있기 때문에 중국의 역사, 문화를 해박하게 알고 있지만 사실 중국에서 살아본 ㄴ적이 없는, 그에 대한 기억이 하나도 없는 양은 미카를 가르치면서도 아시아인다운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제이크와 차를 마실 때도 그렇다. 차의 기원과 종류는 다 알고 있지만, 양은 차 한잔을 온전히 즐기지 못한다. 그것이 어떤 맛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는 몇 번이고 같은 질문을 던진다. "~다운 것이란 무엇일까?"
하나 더 예를 들자면 제이크의 찻집이 있다. 제이크는 잎이 그대로 살아있는 차를 판매한다. 영화의 첫 장면, 제이크의 찻집에 들어온 손님은 가루로 된 차가 없냐고 묻더니 "차 가루가 없는 찻집도 있냐"고 말하며 찻집을 나간다. 차 가루가 없는 찻집은 찻집답지 못한 걸까? 찻집 다움의 기준은 누가 정하는 걸까? 제이크는 손님의 말을 마음에 담아뒀는지 차 가루를 내 양과 함께 차 한잔을 마셔보지만 가루로 된 차가 주는 맛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시아인의 조건은 무엇일까?", "차를 즐긴다는 건 무엇일까?", "안드로이드다운 것은, 인간다운 것은 무엇일까?", "가족이란 건 무엇일까?" <애프터 양>은 무언가의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한다.
<애프터 양>을 만나기 전, 저스틴 H. 민 배우의 <애프터 양>이란 영화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인터뷰를 읽고 가서인진 몰라도 코고나다 감독과 저스틴 H. 민 배우가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며 끊임없이 던져야 했을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온전히 느껴지는 듯했다.
차에 대한 기억이 없고 지식만 있어도 나는 차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인가?, 중국에 대한 기억이 없고 역사에 대한 지식만 있어도 나는 아시아인이 되는 것인가?
저스틴 H. 민 배우는 자신 또한 이런 비슷한 고민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분명 나는 한글을 배웠고, 한인 교회에 갔고, 한국에 대해 알고 있지만 그것이 나를 한국인답게 만들 수 있는 걸까?"하는 고민 말이다. 코고나다 감독 또한 이 영화를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들어간 영화라고 언급했다.
저스틴 H. 민은 양을 닮았고, 양은 저스틴 H. 민과 닮았다. 나는 과연 누구이고, 어떤 인생을 살아가야 나다운 것인가. 저스틴 H. 민 배우는 끊임없이 질문을 하고 '나’의 뿌리를 찾아가는 양의 여정이 곧 자신의 여정이기도 하다고 언급했다.
양의 이름 + 뿌리와 정체성에 대하여
Yang이라는 이름은 코고나다 감독과 저스틴 H. 민이 항상 고민했던 '이민자(한국계 미국인)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그대로 드러나는 매개체다. 우리는 Yang을 양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영화 속 제이크의 가족은 Yang을 양이 아닌 '얭’에 가까운 발음으로 부른다.
저스틴 H. 민 배우는 한 인터뷰에서 이에 대해 코고나다 감독과 양의 이름에 대해 함께 고민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두 사람은 양의 발음을 실제 버전(양)으로 할지 미국화 된 발음(얭)으로 할지 신중히 고려해 '얭’으로 결정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서양인 부모들이 "Yang을 원래 발음에 가깝게 발음하기 위해 크게 노력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코고나다 감독은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아시아와 서양이라는 두 개의 문화의 중간에서 정체성과 소속감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모습을 양의 잘못 발음되는 이름을 통해 은유적으로 나타냈다고 한다. 아마 서양, 아시아의 문화 사이에서 정확히 자리를 잡지 못한 채 고민하고 있는 이민자들의 모습을, 서양 부모들에 의해 '양’이 아닌 대충 '얭’으로 발음되는 그의 이름으로 비유했다고 생각하면 될듯하다.
다양성에 대하여
위에서 언급한 "~다운 것은 무엇일까?"하는 질문은 다양성에 대한 이야기로 자연스레 이어진다. 주인공인 제이크의 가족만 봐도 알 수 있듯, 이 영화엔 다양한 모습을 한 가족들이 나온다. 제이크의 가족은 백인 남성, 흑인 여성, 아시아인인 딸, 안드로이드로 구성되어있고 그의 옆집엔 복제 인간 아내와 아이를 둔 이웃이 살고 있다. 오프닝 신에 나오는 가족 댄스 대회의 참여 가족들 또한 피부색, 성별, 인간/복제 인간/안드로이드의 구분 없이 다양한 형태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가족이란 같은 인종인 부부가 이루는 것인가?, 또는 사회 통념상 정해진 보통의 연인들이 이루는 것인가? 아니면 같은 핏줄을 가진 사람들끼리만 이룰 수 있는 것인가? 그 무엇도 정답이 될 수 없다. "~ 다운 것"은 타인이 함부로 정할 수 없는 개인의 정체성 문제이고, 그 답을 찾고, 정의하는 것은 온전히 개인의 몫인것이다.
댄스 대회를 하면서 제이크의 가족들은 "우리가 한 팀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말대로 이들은 하나의 온전한 가족이 되어 서로를 사랑하고 아끼며 한 팀이 되어 살아간다. 백인 아빠와 흑인 엄마, 입양된 아시아인 딸, 딸의 오빠 역할을 하고 있는 안드로이드. 혹시 이들을 감히 '가족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만약 있다면 내가 아주 조금만 혼내주려고 하니 어디 한번 그렇게 말해보길 바란다…)
새로운 안드로이드
나는 지금껏 안드로이드, 로봇들이 바라보는 세상은 사뭇 건조할 것이라 생각했고 안드로이드는 인간이 될 수 없다는 한계를 깨닫는 순간, 높은 확률로 슬퍼하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양은 달랐다. 그는 제이크의 가족에게 심어진 곁가지가 아닌 든든한 뿌리였고, 인간이 아닌 자신의 인생을 슬퍼하지도 않았으며, 건조한 표정을 하고 있는 진짜 인간들보다 더욱 인간다운 삶을 살아온 존재였다.
영화의 초반, 인간들의 눈으로 본 양은 딱딱한 로봇 같은 모습이다. 그는 미카와 대화를 나눌 때도 눈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고, 어딘가 어색한 모습으로 비친다. 하지만 양의 기억 속 양의 모습과 양이 느낀 감정들은 어떤 등장인물보다도 더 '인간다웠다'. 옆에 있는 가족들의 모습을 소중히 간직하는 따뜻한 마음, 사랑한 사람을 잊지 않고 그의 주변을 맴도는 지고지순함, 거울을 보며 빙긋 웃어보는 모습까지. 수많은 기억을 저장하며 순수하게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양의 모습은 아름다운 인간 그 자체였다.
여담으로 저스틴 H. 민 배우는 GV를 통해 양의 기억을 언급하며 양은 일상의 순간들을 아름답게 기억하고 있다며, 관객분들도 일상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잃지 않길 바란다고 전했다. 생각해보니 내 일상을 단조로운 것이 아닌 매일 다른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해본 날이, 일상에서 내 인생의 의미를 찾아본 날이 언제였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처음엔 왜 양이 주인공인지, 왜 그가 이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지 알 수 없었으나 양의 기억을 여는 순간 확실히 알게 됐다. 이 영화의 제목이 왜 <애프터 양>인지. 그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옅은 흔들림과 여전히 반짝이고 있는 기억들은 나에게 복합적인 감정을 선물했다. 이런 사랑스럽고 복잡한 안드로이드 같으니…
양의 소중한 기억 속을 함께 유영하며 다양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던 96분. 이 시간의 일부는 나의 '아름다웠던 순간' 중 하나로 고이 저장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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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담했던 영화 그러나 임팩트있던 작품
애초 넷플릭스용으로 만들어졌던 영화 '승부'는 2년여 만에 스크린에 걸렸다. 출연 배우에 관한 이슈에서부터 실화라는 점까지 관객들이 관심을 가져볼 만한 포인트가 여럿 있던 작품이다.
어쩌면 영화보다 당시 상황이 더 극적일 수 있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봐야 할 이유는 있었다.
승부는 조훈현 9단이 제자 이창호를 기르는 과정과 둘 간의 대결을 그리고 있다. 조훈현 9단은 우리나라 바둑계에 한 획을 그은 자로서 넘사벽의 수준이었지만, 그의 모든 것을 배워간 제자 이창호는 청출어람의 정수를 보여준다.
스승은 제자의 수준을 '이 정도'라고 가늠했지만, 숨죽인 잠용은 그보다 몇 수 더 나아가 있었다. 비록 스승이라 할지라도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
너는 나의 자부심이었다는 말.
네 바둑을 두라는 말.
내 자식처럼 키워온 제자를 그렇게 스승은 세워준다.
누군가는 그러한 스승을 두고 제자를 주눅 들게 만들었다고도 비난하지만, 결국 제자는 스승을 능가하는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며 그 누구도 스승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자리에 올려놓는다.
그것이 스승에게 배운 제자의 마땅한 도리일 터.
입단만 시킬 마음으로 데려온 게 아니라는 말은 스승은 제자에게서 수많은 것을 보았다는 뜻일 거다.
그것이 스승이 제자에게 거는 기대이며, 그것까지 만들어주는 것이 스승일 거다.
내게 있어 이 작품의 감상 포인트는 스승과 제자였다.
스승은 자신의 스타일로 가르치지만, 제자가 그 모든 것을 빨아들인 뒤 자신의 스타일에 맞게 가져가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러한 바램과 달리 혹여나 제자가 잘못 가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마음으로도 바라보게 된다.
그것은 모두 자신이 키운 제자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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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중기 스타일의 액션 / 반전이 돋보이는 작품 / 보고타: 기회의 땅 / 권해효, 이희준의 물오른 연기
영화직관하는남자 홍큐의 "보고타: 기회의 땅"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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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로키 앤 키 시즌2> 티저 예고편
곧 공개 예정인 《로크 앤 키》 시즌 2의 공식 티저 예고편. 아버지가 살해된 후, 가족의 옛날 집으로 이사한 세 남매. 엄청난 힘과 능력을 주는 마법의 열쇠가 이 집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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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이터널스> 30초 예고편
마블 스튜디오의 <이터널스>는 수 천년에 걸쳐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살아온 불멸의 히어로들이 <어벤져스: 엔드게임> 이후 인류의 가장 오래된 적 '데비안츠'에 맞서기 위해 다시 힘을 합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