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란2025-04-30 19:02:12
비극의 원인은 어디에 누구에게 있는가?<레이디 맥베스>
그녀가 변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또 아닌 이유에 대해
* 본 리뷰는 영화의 반전과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레이디 맥베스 Lady Macbeth, 2016
영국 | 드라마 | 2017.08.03 개봉 | 청소년 관람불가 | 89분
감독: 윌리엄 올드로이드
비극의 원인은 어디에, 누구에게 있는가? <레이디 맥베스>
경건하게 울리는 찬송가와 고풍이 흘러넘치는 교회 안. 그런데 어린 신부의 얼굴엔 당황스러움이 가득하다. 자신의 결혼식임에도 불구하고 눈치 보기 바쁜 신부 캐서린. 세상 모든 이에게 축하받아야 할 결혼식장에서는 따뜻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4면이 돌로 세워진 교회 안에서 캐서린이 느낄 수 있는 건 차디찬 냉기와 어딘가 모르게 공포스러운 바람소리뿐이다. 그래서 캐서린은 자꾸 주변을 돌아보며 자신에게 일어난 상황을 이해하려 애쓴다. 두 눈을 열심히 굴려가며 상황을 관찰하지만, 그녀의 마음을 알아줄 이는 없다. 오히려 자신에게 눈길도 주지 않는 남편의 옆모습에 철저한 무관심을 느끼고, 아무 감정 없이 입을 벌려가며 찬송가를 부르는 시아버지와 목사에게서 어떠한 인간적인 면도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이 결혼 생활 내내 자신의 숨통을 쥐고 흔들 것임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만다.
이 단 한 장면에서 <레이디 맥베스>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결정되어 버린다. 인물들의 비열하고 저속한 속내는 어김없이 카메라 사각틀에 드러나고, 진행될 사건들의 진실은 중요하지 않을 것이란 강한 확신과 함께. 따라서 한동안 허공을 맴돌던 신부의 시선이 최종적으로 남편에게로 향할 때, 우린 단번에 이 이야기가 비극으로 끝날 것임을 예상한다.
출처: 영화 <레이디 맥베스> 스틸컷
남편의 무관심은 결혼식 첫날밤을 기점으로 경멸과 조롱으로 얼룩진다. 한 침대에 몸을 뉘어 함께 자지만, 그들은 부부가 아닌 남으로 결혼 생활을 시작한다. 남편은 아버지의 강압적인 교육방식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고, 캐서린에게 그대로 자신의 분노를 지배로 치환해 행사한다. 캐서린과 함께 사는 이유는 딱 하니다. 아내를 아버지가 돈 주고 사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캐서린에게 바라는 것도 딱 하나다. 조용히 집 안에서 기생하면서 아내의 본분을 지키는 것. 여기서 말하는 아내의 본분은 '본인 아버지가 말하는 아내의 본분'을 말한다. 결국 남편에게 캐서린은 처음부터 존재 가치가 없는 존재였으며, 버릴 수 없어 마지못해 세워두는 마네킹이었다.
집 안에서 하녀(애나)의 시중을 받으며, 완벽하게 외면을 치장하고, 보기 좋은 인형으로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하는 캐서린. 그런 그녀 앞에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 세바스찬이 등장한다. 창고 안에서 애나를 위에 매달아 놓고 성추행을 일삼는 세바스찬을 보고 캐서린은 욕망을 가감 없이 분출하는 그에게 성적 매력을 느낀다. 몸에 잔뜩 묻은 흙도 꾀죄죄한 얼굴도 땀 냄새도 전부 비극적인 운명을 살아야 하는 그녀에겐 금기를 깨버릴 수 있는 아주 좋은 수단으로 이용된다. 그것을 캐서린은 '진정한 사랑'이라 스스로 칭하며 세바스찬에게 "내 마음을 의심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라고 얘기한다. 그러나 그녀가 말하는 사랑은 억압과 무관심, 조롱에서 벗어나는 수단일 뿐이다. 자신의 공허한 마음을 채우고 답답한 현실에서 탈출하는, 자유를 품은 아름다운 관계로 인식했을지 모르나, 사실 캐서린의 행위는 오직 피지배자를 향한 잔인한 지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출처: 영화 <레이디 맥베스> 스틸컷
<레이디 맥베스>의 긴장감과 재미는 캐서린의 살인보다도 그들을 조용히 따르는 두 하인, 애나와 세바스찬에게서 찾을 수 있다. 애나는 자신을 짐승 취급한 주인(캐서린의 시아버지)이 캐서린이 쓴 독으로 죽어가는 것을 방관한다. 명백한 살인임을 알면서도 두려움에 떨 뿐, 주인을 구하지 않는다. 사실 애나 역시 하인의 본분을 다하라는 주인의 강압적 명령에 세뇌된 사람이었고, 당연히 인간적 대접은 받아 본 적 없었으며 그 결과 쌓이는 울분을 한 번도 속 시원하게 털어내지 못했다. 마치, 캐서린처럼 말이다. 따라서 그녀는 이후 일어나는 2건의 살인사건의 범인을 알고 있으면서도, 침묵한다. 주인이 죽은 충격으로 말을 하지 못하게 되었지만, 충분히 증언할 수 있었음에도, 심지어 자기 목숨이 달린 일이었음에도 애나는 역시 침묵한다.
밧줄에 묶인 채 짐승처럼 대저택에서 쫓겨나는 애나와 살려고 발버둥 치는 캐서린의 차이는 신분만 있지 않다. 그 신분을 받아들이는, 태도와 결정적 마음이 애나의 결말을 비극으로 만들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의 본질까지 가장 낮은 신분으로 취급했다. 반항과 의심, 자기주장과 자기 결정을 할 수 있는 존재는 캐서린뿐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이는 세바스찬 역시 다르지 않다. 그는 캐서린의 지위와 권력에 눈이 먼 하인일 뿐이다. 입어보지 못한 옷과 앉아보지 못한 의자와, 먹어보지 못한 음식에 흥분한 하인. 캐서린을 통제할 수 있을 거라 자부했으나, 어림도 없었던 까닭이다. 그는 캐서린이 남편의 머리를 가차 없이 막대기로 내려친 후, 혼자 주인의 시신을 땅에 묻는다. 자기를 죽이려 했던 주인을, 사랑하는 애인이 대신 죽였을 때 느꼈던 희열과 평생 실종된 주인 자리에서 대신 부를 누리며 살 설렘에 사로잡힌 채 말이다. 살인을 방조하고, 오히려 범죄를 덮는 일을 도우면서, 죄책감과 죄의식에 괴로워하지 않은 이유는 뭘까. 그도 자신을 하찮은 하인으로만 여겼기 때문이다. 주인의 명령에 복종해 따르는 일은 당연하다는 인식과 믿음이 본인의 순수하고도 귀한 인간성마저 훼손한 것이다. 영화는 애나와 세바스찬의 결정을, 캐서린의 결정과 붙여 의도적으로 더 대비해 보여준다. 마치, 무엇이 더 잔인하고 아픈지 결정하라는 듯, 세 사람의 결정이 담인 얼굴을 계속 클로즈업한다.
출처: 영화 <레이디 맥베스> 스틸컷
세바스찬의 설렘은 예상치 못한 변수의 등장으로 끝이 난다. 캐서린 남편의 혼외자(어린 아들)가 순식간에 대저택의 주인이 되자, 그는 자신이 누린 부가 원래 제 것이었던 것처럼 캐서린을 닦달한다. 닦달에서 끝나지 않고 사랑을 빌미로 그녀를 밀어낸다. 이에 캐서린은 자기 사랑을 지키기 위해 아이까지 죽여버리고 세바스찬과 사랑을 다시금 확인한다. 자, 그녀는 총 3번의 살인을 저질렀다. 자신을 억압하고 지배한 집 안에서, 자신을 억누를 위치에 있는 남성들의 목숨을 전부 단번에 끊었다. 첫 살인부터 계획적이었고, 일방적이었다. 애나는 첫 번째 살인을 함께했고 세바스찬은 나머지 2건의 살인을 동조했다. 그렇다면, 이 비극의 원인은 누구에게 있을까?
살인을 한 3명은 모두 살인 동기가 있었다. 하지만 살아남는 인물은 오직 캐서린뿐이다.
사랑을 확인했으나, 끝까지 자기 죄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세바스찬은 캐서린과 함께 살인을 했음을 사람들에게 고백한다.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부에 선택받지 못한 인물이었다. 평생 누더기 옷을 입고, 괄시와 무시가 당연한 하인이었기에 세바스찬의 고백은 아무런 힘을 갖지 못하고 지배자들의 발아래로 추락해 철저히 무시당한다. 잠시 잊고 있었던 캐서린의 지위가 불쑥 튀어나온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그녀는 자기 지위가 가진 힘을 또 한 번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세바스찬의 배신에 악에 받친 눈으로 일말의 고민도 없이 애나와 세바스찬의 살인 공조로 사건을 종결 내버린다. 실어증에 걸린 애나에게서 어떠한 반전도 일어나지 않음을 확신한 채 말이다. 모두 시아버지와 남편이 말한 '가진 자의 본분'을 너무나 잘 습득한 덕이었다.
출처: 영화 <레이디 맥베스> 스틸컷
<레이비 맥베스>의 희한한 매력은 영화 내내 캐서린만 관객을 불편하게 한다는 점이다. 특히 애나와 세바스찬의 선택과 행동에 이상하리만큼 엄청난 답답함을 느끼지 않는 점은 꼭 생각해 봐야 한다. 세 사람은 모두 대저택 주인들에게서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오직 캐서린만 홀로 반항하고 반기를 들었고 살아남았다. 그녀만 비인간적인 상황들에 순응하지 않았고 깊은 어둠 속에서 자신이 가진 권력을 아주 요긴하게 사용했다. 그렇게 비극의 원인인 남성 우월주의 사회를 무너트렸다. 그것도 아주 소름 끼치고 잔인한 방식으로 말이다. 알몸으로 세워두고 홀로 잠을 자던 남편의 조롱과 사고파는 물건으로 취급했던 시아버지의 경멸적 태도가 캐서린을 끔찍한 괴물로 만들었고, 몰상식하고 비인간적인 상류층에게서 배운 괴기스럽고 소름 끼치는 지배력이, 그녀를 살인을 일삼아도 괜찮은 특권의식을 가진 괴물로 탄생시켰다.
<레이디 맥베스>가 처음부터 끝까지 비극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세 인물들이 전부 본인의 위치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은 채 자기 삶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나란 인간이 가진 고귀한 마음과 도덕적, 윤리적 아름다움이 사회에서 갖는 위치로 모두 파괴되는 순간을 맥없이 지켜보기만 했던 인물들. 따라서 소파에 앉아 가만히 관객을 응시하는 캐서린의 마지막 행보는 잊을 수 없다. 하인들마저 다 떠난 대저택에서 홀로 남아, 어떠한 후회도, 절망도 하고 있지 않음을 관객들에게까지 확인시키는 차갑고 매서운 그 표정.
그렇다. 그녀는 더 이상 남편을 힐끗대던, 두려움에 떠는 열일곱 소녀가 아니다.
앞으로도, 아닐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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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더 체어 (2021)
* 본 리뷰는 <더 체어>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더 체어 (2021)
출연: 산드라 오, 제이 듀플라스, 홀런드 테일러 등
장르: 코미디, 드라마
공개일: 2021.08.20
방송 횟수: 6부작
유색인종 최초의 여성 학과장 '지윤'
미국의 명문 펨브로크 대학교의 영문학과 최초의 유색인종 여성 학과장이 된 '지윤(산드라 오)'. 부푼 마음을 껴안고 승진해 높은 자리에 앉았으나 그녀가 학과장이 된 것은 사실상 독이 든 성배를 손에 쥔 것과 다름 없었다. 영문학과는 수강생이 날이 갈수록 줄어든다는 위기 상황에 직면해 있었고, 학장은 노년의 교수들을 잘라 비용 삭감을 하기 위해 지윤을 학과장 자리에 앉힌 것이다.
지윤이 학과장이 된 직후부터 마치 예고했다는 듯이 사건사고가 시한폭탄처럼 터진다. 연인과 친구 사이를 애매하게 유지하는 동료 '빌(제이 듀플라스)'는 학생들의 영상 조작으로 인해 나치 신봉자가 되어 학교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지윤이 한때 존경했던 노교수 '조앤(홀런드 테일러)'은 쫓겨나듯 학교 지하로 연구실을 강제로 옮기게 되면서 학교에 울분을 터뜨린다. 이와 같은 다양한 갈등의 요소들은 모두 지윤을 향해 화살을 돌리고, 학과장으로서 적응할 시간조차 없었던 지윤은 이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기 벅찬 상태다. 학과장이 된 '지윤'의 소소한 교내 에피소드와 승승장구 스토리가 이어질 줄 알았지만, 실상은 거지 같은 유리절벽을 마주한 그가 고군분투하며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해나가는 긴박한 과정을 그린다.
독이 든 성배, 유리절벽에 내몰리다
명문대 최초의 유색인종 여성 학과장, 에밀리 디킨슨을 가르치는 영문학과의 한국계 미국인 교수. 한국인이라면 쉽게 끌릴 수밖에 없는 소재다. 인물의 신선한 설정을 통해 구태의연하고 낡아빠진 학과를 뜯어 고치는 개혁가의 모습을 그릴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그 누가 오더라도 살릴 수 없을 정도로 기피 학과가 되어버린 영문학과의 문제를 모두 떠안기기 위해 유색인종 여성을 앉혔다는 점에서 <더 체어>는 '유리절벽'에 대한 이야기를 써내려간다.
사실 학과장이라는 자리는 비백인 여성 교수로서 커리어를 쌓기 위해 혹할 수 밖에 없는 제안이고, 대학 입장에서는 이를 빌미 삼아 학과의 문제를 쉽게 떠넘길 수 있다. 지윤이 학과장이 된 이후 중요한 책임은 모두 그에게 물으면서 학과장의 자율적인 권한은 학교 측에서 통제하려는 모습에서 그를 학과장에 발탁한 의도가 다분히 드러난다. 1화에서 지윤이 학과장실 의자에 앉자마자 의자가 부서진 것은 곧 학과장으로서의 그의 앞날이 순탄치 않을 것을 예고하는 사건이며 지윤을 벼랑 끝으로 모는 사건들이 연달아 찾아오며 그의 자리를 위태롭게 만든다. 유색인종 여성 교수의 성공사를 그린 것이 아닌 현실적인 고난을 담아냈다는 점에서 지윤의 모습들은 특히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무려 K-돌잔치 문화까지 등장, 한국인만 느낄 수 있는 재미
주인공을 맡은 '산드라 오'는 극중 한국계 미국인 역할로 등장하는데, 배역명이 '김지윤'이라 캐릭터가 더욱이 한국적으로 느껴진다. 미국 드라마에서 한국의 문화를 표현하는 경우는 최근 들어 적잖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지만, 미국인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스테레오타입에 가까운 모습일 뿐 한국의 제대로 된 문화를 담아낸 작품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간간이 한국어를 쓰는 '산드라 오'부터 아예 한국말로만 대화하는 그의 아버지 '하비', 그리고 미드에 등장할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던 K-돌잔치 문화와 한국인 아주머니들 특유의 뒷담화까지. 한국인과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면, 만들어낼 수 없었을 디테일한 요소까지 반영하였다. 타 국가의 문화를 최대한 자연스럽게 극에 녹여내면서 현실 고증에도 충분한 신경을 기울였다는 게 다른 작품들과의 차별점으로 느껴져서 인상적이었다. '산드라 오'가 직접 제작에도 참여한 작품이기 때문에 한국 문화을 담은 각본에도 추가적인 검증을 세세하게 거쳤을 것이라 본다.
몰락해가는 순수문학 학과의 현실
유색인종 여성 교수의 역경과 극복이 일차적으로 중요한 스토리라면, 주인공 지윤을 비롯한 그의 주변 인물들, 즉 영문학과에 속한 교수들에 관한 이야기에 이차적으로 주목해볼만 하다. 영문학과의 위기는 다름 아닌 IT 기술의 중요성이 팽배해져 가는 시대에 순수문학 학과가 겪고 있는 몰락의 상황으로 해석할 수 있다. '문송합니다'로 알려져 있는 문과생들의 취업난은 이미 현실이 된 지 오래이고, 당연히 이들은 순수문학을 학문적으로 이해하고 접근하는데 큰 관심이 없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은 노년의 교수와 젊은 교수들 간의 강의 방식에 차이를 일으키고 , 학문을 향해 상이한 견해를 가지게 됨으로써 또 한 번의 갈등 관계를 만든다. <더 체어>는 이와 같은 순수문학을 다루는 학과 앞에 닥친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과정을 그리기보다는 해당 교수진들의 고민과 갈등들을 현실적으로 제시하는 정도로 마무리한다. 주인공의 이야기뿐 아니라 다양한 접근법을 통해 작품을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 셈.
간결하고 빠른 호흡, 적절한 유머
<더 체어>는 한 회당 30분 정도 되는 분량이 6회차까지 이어지는 드라마인데, 호흡이 짧고 전개가 빠르며 사건의 발단과 갈등의 심화까지의 과정들이 휙휙 지나간다. 사회적으로 꽤나 심각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음에도 시트콤적인 연출과 이색적인 한국식 유머를 더하며 무겁지 않게 해당 소재들을 담았다. '산드라 오' 특유의 단단하고 고혹적인 저음 보이스는 학과장 역할과 상성을 일으키며 티격태격하는 딸 '주주'와의 관계도 사랑스럽게 그려진다. 그리고 다양한 갈등이 오가는 속에 백인 노교수 '조앤', 젊은 흑인 교수 '야즈', 그리고 동양인 학과장 '지윤' 세 사람만큼은 서로를 존중하고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는 점에서 여성들의 끈끈한 유대감 또한 느껴진다. 짧은 분량의 작품에 많은 내용을 담으려다 보니 결말이 갑작스럽게 느껴질 수는 있지만, 메이저한 소재의 작품이 아님에도 가볍고 쉽게 감상할 수 있는 작품이다.
- 씨네랩 크리에이터 popofil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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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FF 데일리] 남겨진 자들의 안녕을 빌며
- 아직도 생생한 그날이 벌써 10년 전이 되었습니다.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는 그날의 아픔을 기리는 세월호 참사 10주기 특별전을 열었는데요. 그중에서도 <목화솜 피는 날>은 세월호 참사를 소재로 제작된 극영화입니다. 단순히 세월호를 연상케 하는 영화가 아니라, '안산', '단원고등학교', '세월호' 등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는 직접적인 영화죠. 참사 이후 남겨진 사람들의 삶을 극의 요소를 통해 그려내는 영화 <목화솜 피는 날>을 전주에서 만났습니다.목화솜 피는 날When We Bloom AgainSummary'병호'와 '수현'은 꽤 괜찮은 부부 사이였다. 그러나 10년 전에 참혹한 사고로 둘째 딸을 잃고, 각자의 고통을 견디느라 서로를 외면해 왔다. 그러던 사이, 딸의 죽음을 감당할 수 없었던 '병호'는 점차 기억을 잃어간다. '수현' 역시, 무기력함만 커진다. 그런 '수현'은 첫째 딸의 참아왔던 두려움을 듣게 된다. "아빠마저 잃을까 봐 두려워." 무기력에 갇혀있던 '수현', 그런 그녀에게 남편인 '병호'를 찾아야만 하는 이유가 생긴다. (출처: 전주국제영화제)Cast감독: 신경수출연: 박원상, 우미화, 최덕문, 조희봉 외그들의 비상등이 꺼질 때까지<목화솜 피는 날>은 남겨진 자들의 이야기입니다. 남겨진 자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갑작스럽게 찾아온 이별을 견뎌냅니다. 누군가는 이별의 원인에 집착하고, 누군가는 이별 자체를 회피합니다. 누군가에겐 몰아치듯 밀려오는 슬픔이 누군가에겐 서서히 차오릅니다.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의 눈에는 그 방식이 과격해 보이기도, 무심해 보이기도 합니다.집착과 회피, 과격함과 무심함. 우리는 이것이 정상 범주의 반응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현재 비상등을 켠 자동차와 같다는 것을요. 비상등은 정상 주행에 어려움이 있음을 안내하는 표시입니다. 비상등을 끌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동차에 탄 사람뿐입니다. 자동차 밖의 사람은 비상등을 켠 이유도, 비상등을 끄지 않은 이유도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저 운전자가 비상등을 끌 때까지, 거리를 유지하며 주행할 수밖에 없습니다.그러나 현실의 우리는 비상등의 불빛을 종종 외면합니다. 아무 문제가 없어도 살기 퍽퍽한 것이 삶이라지요. 그래서인지 감히 그들의 고통을 평가 절하하는 일들이 벌어지곤 합니다. 정상 주행에 방해된다며 얼른 비상등을 끄라고 강요하고, 이제는 비상등을 끌 때가 되었다고 종용합니다. 버젓이 비상등을 켜고 있는데도, 정상 주행을 하지 않는다며 나무라는 사람도 있습니다.<목화솜 피는 날>은 각자만의 방식으로 비상등을 켜고 달리는 사람들을 비춥니다. 섣부른 강요와 종용 대신 인내와 배려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기다려야 합니다. 그들이 스스로 비상등을 눌러 끌 때까지, 다시 정상 주행을 할 수 있을 때까지.⊙ ⊙ ⊙"그날을 기억하시나요?"얼마 전, 세월호 10주기를 추모하는 의미로 마련된 영화 모임에서 이런 질문이 나왔습니다. 단 한 명도 빠짐없이 그날을 온전히 기억하고 있었죠. 우리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일상에서 그날의 충격과 마주했습니다. '전원 구조' 뉴스에 한시름 놓았던 것도, 믿기지 않은 오보 소식을 접했던 것도, 수면 아래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던 선체의 모습이 뇌리에 박힌 것도, 모두 같았습니다.역대 최악의 오보였던 '전원 구조' 뉴스 화면이 등장하는 장면은 저를 2014년의 그날로 데려다 놓았습니다. 틈날 때마다 뉴스 화면을 새로고침했던 그날, 창문에 매달린 아이들을 생중계로 지켜봐야 했던 그날, 배를 버리고 팬티 바람으로 도망치던 선장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그날. 심장이 쿵쾅거리고, 머리가 멍해지고, 자꾸만 소름이 끼쳤습니다. 영화 속에서 다시 재생되고 있는 10년 전 그날이 너무 말이 되지 않아서, 너무 허탈해서, 너무 무력해서.엔딩 크레딧에는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304명의 이름이 나옵니다. 단원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의 이름은 한 반에 열댓 명씩 빼곡히 적혀 있습니다. 널따란 갑판, 좁고 기다란 복도, 출렁이는 파도, 배 안에서 했던 불꽃놀이, 만약을 대비해 착용한 구명조끼까지. 그날의 일은 사고가 발생했다는 사실만 빼면 제 고등학교 2학년 수학여행 때와 같습니다. 부모님은 잘 다녀오라며 배웅해 주셨고, 저는 설레는 마음으로 제주도행 여객선에 올랐죠. 그날의 사고는 어쩌면 저에게 벌어졌을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자꾸만 소름이 끼쳤던 건, 살아서 이 영화를 보고 있는 것이 정말로 '운'이었다는 걸 계속 실감했기 때문이었습니다.<목화솜 피는 날>의 에필로그에서 '병호'는 세월호를 견학하러 온 학생들에게 사고의 원인으로 꼽히는 문제들을 하나씩 읊어줍니다. 듣다 보면, 머릿속에서 '고작'이라는 단어가 끊임없이 맴돕니다. 고작 그런 문제 때문에, 고작 그런 말 때문에, 고작 그런 결정 때문에…. 세월호 참사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었지만, 절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20년 후에도, 30년 후에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 ⊙10년이 지났지만, 세월호 참사를 극영화로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아물지 않은 상처이고, 해결되지 않은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영화에서도 나오듯이, 유가족 당사자도 아닌 사람들이 감히 세월호를 상업적으로 사용하는 것에 거부감을 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목화솜 피는 날>은 극영화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법으로 세월호를 다룹니다. 세월호 참사를 단순한 소재로서 어물쩍 이용하지 않고, 유가족, 자원봉사자, 진도 어민 등 참사 이후 남겨진 다양한 사람들을 비춥니다.종종 '이 장면은 유가족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까?' 걱정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영화 속에는 세월호 유가족이 꾸린 4.16가족극단 노란리본의 배우들도 보였고, 제작 및 촬영에 참여한 '2학년 O반 OO 아버지', '2학년 O반 OO 어머니'도 있었습니다. <목화솜 피는 날>만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유가족들과 충분한 논의가 이뤄졌음을 유추할 수 있었죠. 어쩌면 더 많은 사람에게 그날을 잊지 않게 하는 이러한 접근이야말로 비상등을 켜고 천천히 주행하고 있는 사람들 곁에 있어 주는 행동이 아닐지 생각해 봅니다.잊지 않겠습니다.One-Liner꽃이 진 후에도 솜이라는 두 번째 꽃을 틔우는 목화를 떠올리며, 부디 안녕들 하시기를.Schedule in JIFF2024.05.02(목) CGV전주고사 8관 17:002024.05.04(토) 메가박스 전주객사 5관 20:302024.05.08(수) 메가박스 전주객사 10관 20:30전주국제영화제 기간 : 05월 01일 - 05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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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찰스 3세가 배워야 할 여왕의 고뇌
6★/10★
〈더 퀸〉은 2022년 개봉한 〈스펜서〉와 함께 보면 좋을 영화다. 〈스펜서〉가 영국 왕실의 전통과 권위, 가족들의 냉대로 고통받던 왕세자비 다이애나 스펜서에게 초점을 맞췄다면, 〈더 퀸〉은 다이애나 스펜서가 그토록 탈주하고 싶어 하던 왕실의 상징 엘리자베스 2세에게 초점을 맞춘다.
1997년, 엘리자베스는 여러모로 커다란 변화에 직면한 상태다. 먼저 국내 정치다. 토니 블레어가 대표인 노동당이 18년 만에 집권했다. 그가 추후 실제로 펼친 정책과 행보는 별개로 하더라도, 토니 블레어는 분명 변화를 요구하는 국민 염원의 극적인 표출이었다. 그리고 새로움을 향한 욕망은 늘 오래된 것의 폐지 요구와 함께 부상한다. 국민 네 명 중 한 명이 군주제에 반대한다는 여론조사가 보여주듯이 말이다. 토니 블레어는 그저 엘리자베스 2세가 여왕으로 재임하던 중 선출된 수많은 총리 중 한 명일 뿐이었지만, 그의 당선을 둘러싼 대내외적 상황은 엘리자베스 2세가 압박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며느리이자 왕실의 ‘골칫거리’였던 다이애나의 부고가 도착한 것은 바로 이때다. 찰스 왕세자와 이혼한 후 활발히 자선 활동을 벌이며 이집트 재벌과 연애 중이던 그녀는 끈질기게 따라붙는 파파라치 때문에 교통사고를 당했고, 그대로 숨을 거뒀다. 왕실이 고상함, 비밀스러움의 이미지였다면, 다이애나는 다정함, 활력, 봉사활동 등을 상징하며 전 세계적으로 큰 사랑을 받았다. 때문에 다이애나의 죽음이 영국 국민에게 준 충격의 크기는 어마어마했다. 토니 블레어의 집권에 이어 영국 왕실이 실의에 빠진 국민을 보듬어야 하는 연이은 도전을 마주한 것이다. 왕실이 상징하던 고루함을 향한 대중의 막연한 불만이 구체적 분노로 촉발되기 위한 모든 여건이 완벽하게 마련된 셈이다.
영국 왕실은 다이애나가 찰스와 이혼했다는 이유로 별다른 조의를 표하지도 않고, 마땅한 예우를 다하지도 않았다. 반면 왕실과 다이애나가 서로를 불편해했다는 사실을 잘 아는 영국인들은 근위대의 교대식이 어려울 만큼 많은 꽃다발을 버킹엄궁 앞에 쌓아 다이애나를 추모했다. 언론은 왕실의 무대응을 두고 날 선 비판을 연일 쏟아냈고, 총리 역시 공손하지만 단호한 태도로 여왕이 국민의 슬픔을 달래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압박했다. 이제 모든 건 엘리자베스의 몫이다. 전통의 엄격한 적용을 고수하여 왕실의 권위를 유지할 것인가, 왕실의 태도 변화를 촉구하는 국민적 열망에 맞춰 다이애나를 추모할 것인가.
주지하다시피, 엘리자베스 2세는 후자를 택했다. 그리고 〈더 퀸〉은 여왕의 생각이 바뀌는 과정을 충실히 좇으며 그녀 내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인다. 왕실 일부 구성원들의 강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가 다이애나 추모사를 발표한 데에는 전통과 변화 열망을 조화하여 왕실의 역할을 이어가겠다는 그녀의 결연한 다짐이 담겼다. 입헌군주제에 대한 정치적 입장은 차치하더라도, 국가의 상징적 구심점 역할을 한 엘리자베스 2세가 어떻게 왕실의 품위와 국민의 존경을 동시에 지켜나가고자 했는지에 초점을 맞춘다면 영화를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스펜서〉의 다이애나가 한 여성으로서 오롯이 거듭나 자기 세계를 펼치고자 했듯, 〈더 퀸〉의 엘리자베스 역시 온 힘을 다해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지켰다. 적어도 이 두 영화에서만큼은 두 여성의 고군분투가 먼저고, 그것이 야기한 정치적 효과에 대한 언급은 나중이다.
*이 영화는 시리즈온, 티빙, 웨이브에서 다시 볼 수 있습니다(글 작성일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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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력 대신 음식으로 인간의 상실을 따뜻하게 케어해 준다
상실감을 잊기 위한 폭력 대신 이해와 포용, 과거는 과거일 뿐
모든 인간은 본인이 원하건 원치 않건 자신의 무언가를 상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상실이 인간에게 남긴 상처는 몸속에서도 가장 깊숙한 부위에 위치해 있어 쉽게 낫지도 않습니다. 상처가 주는 고통 또한 만만치 않기에 이 고통을 피하고 회피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그러다 그 고통에 잠식되어, 어딘가 뒤틀린 모습을 보여주기까지 합니다. 이때 상실로 인한 고통을 앓고 있는 이들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이해하지 못할까요? 상실을 다루고 있는 많은 영화들 중에서, 어떤 영화들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주먹질을 비롯한 폭력으로 그 고통을 잊으려는 듯한 모습을 비추기도 합니다. 하지만 <피그>는 상실을 경험한 자가 또 다른 상실을 경험한 자에 대해 이해와 더불어 위로를 건네며, 깊은 부위에 숨어 있는 상처를 드러내게 하여 그 고통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영화입니다.
1시간 30분이란 짧은 시간의 러닝타임을 가지고 있는 영화 <피그>는 등장인물들에 대해 많은 설명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영화의 시작부터 등장인물이 어떠한 인물인지 알 수 있게 해 주는 나레이션이나 대사는 일절 등장하지 않습니다. 대신 여러 은유가 담긴 영상을 통해 어렴풋이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마치 힘겹게 걸린 시동과 함께 잠깐 움직이고 퍼져버린 낡은 트럭과 동일한 듯하게, 롭을 녹슬어버린 존재로 묘사하고 있는 연출이 그 예 중에 하나입니다. 이처럼 좋은 의미로 불친절한 인물 묘사가 이어짐으로써 롭이 과거에 범상치 않은 존재였음을 관객들이 짐작할 수 있지만, <피그>는 과거의 인간관계가 어떠했는지가 중요한 영화가 아닙니다. 상실이란 공통된 공감대를 중심으로 롭과 아미르, 그리고 그의 아버지와의 현재 관계를, 그로 인해 변화하는 본인의 감정을 다루고 있는 영화입니다.
상실에 대한 따뜻한 우화, <피그>
불친절하지만, 은유로 가득한 캐릭터 소개
상실이 만든 상처와 고통을 안고 가는 법, 이 또한 자신의 일부일 뿐
세 인물 간의 관계 중에서 가장 비중이 큰 롭과 아미르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 만남을 비출 때, 오직 아미르만이 대화를 이어나가고 롭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했습니다. 더불어 롭이 자신의 납치된 돼지를 찾으러 아미르의 도움을 받아 도시로 이동할 때에도 그는 아미르의 차 안에서 틀어놓은 클래식을 꺼버리는 등 무례한 행동을 합니다.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에게 할 수 있으리라고 상상하기 힘든 기행을 벌이는 롭, 마치 세상과 담을 쌓고 마음을 닫은 느낌을 줍니다. 하지만 돼지를 찾는 여정을 거치면서 그들 간에 오가는 대화가 점점 길어지고 많아지는, 소통이 오간다는 변화가 발생했습니다. 롭은 아미르에게 자신의 잘못에 대한 사과를 건네며, 요리도 가르쳐 주기까지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마지막에 이르러 롭은 돼지를 찾기 위한 출발점이었던 식당에서 헤어질 때, 처음과 달리 아미르의 도움 없이 스스로 자신의 오두막으로 복귀하며, 아미르는 본인이 직접 클래식을 꺼버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즉, 이 여행을 통해 둘 사이의 관계가 개선되고 상실이란 공통된 상처로 공감대를 형성했으며, 이를 극복하는 성장 이야기를 유기적으로 엮어냈습니다.
두 번째로 롭과 아미르의 아버지 사이의 관계를 살펴보겠습니다. 오두막에서 지내면서, 자신의 식사보다 돼지의 식사를 정성스럽게 준비하는 만큼 롭에게 있어서 돼지는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존재입니다. 도시의 모든 이들과 연을 끊었음에도 소중한 돼지를 납치한 자를 찾기 위해 그 도시로 다시 발을 들이게 됩니다. 돼지의 소재를 수소문한 끝에, 납치한 장본인은 포틀랜드에서 트러플 사업을 크게 벌이고 있는 롭의 아버지였습니다. 롭의 돼지를 별거 아닌 듯이 말하며 은연중에, 아니 대놓고 그를 무시하는 듯한 언행은 그의 화를 돋우고도 남을 법 합니다. 하지만 롭은 말없이 그의 집을 나오고 아미르와 함께 무언가를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그와 아내에 관한 과거를 아미르를 통해 들었기 때문입니다. 롭 역시 사랑하는 자를 잃은 고통을 피하고 싶은 동질감을 느끼고 있음을 오두막에서 끝까지 재생하지 못하고 중단시켜버리는 씬을 통해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롭은 자신의 소중한 것을 빼앗아 간 자에 대해 폭력 대신, 그와 아내 사이의 소중한 추억을 장식했던 음식을 통해 따뜻한 위로를 건넵니다. 마치 자신 또한 그와 유사한 경험을 하였으며, 소중한 존재를 잃어버린 상실감이 주는 아픔이 어떠한 것인지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말입니다. 더불어, 아미르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와의 관계를 통해 롭 또한 자신의 상처를 스스로 바라보며, 그 고통을 안고 가는 듯한 성장한 모습을 마무리에서 보여줍니다. 초반에는 끝까지 재생하지 못했던, 아내의 목소리가 담긴 카세트테이프를 끝까지 재생하는 씬을 통해서 말입니다.
영화는 크게 세 챕터로 나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세 챕터의 제목은 모두 음식의 이름으로 붙여졌습니다. '시골식 버섯 타르트', '엄마표 프렌치토스트와 해체주의 가리비 요리', '병, 새, 그리고 소금 바게트'와 같이 특이한 음식의 이름들은 각 챕터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음식들이기도 합니다. 마치 음식에 이야기를 담아내어 그 이야기를 관객들에게 들려주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으로는 음식을 주제로 하는 일반적인 영화들과 달리, <피그>는 음식을 요리하고 식사하는 과정을 의도적으로 비추지 않고, 비추더라도 흐릿하게 비추기만 할 뿐입니다. 마치 이 영화는 음식을 보여주고 그 음식을 즐기는 게 주가 아닌 영화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피그>는 인간관계에 관해, 그리고 상실감을 극복하는 방법에 관해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저 한 인물이 치유받는 과정을 멀리서 보여주기만 할 뿐입니다. 이러한 영화의 분위기와 어울리는, 음식을 주로 하지만 음식이 주가 아니라고 말하는 연출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부자를 통한 한 인물의 성장 이야기
그리고 이를 멀리서 바라보기만 할 뿐 각자의 이야기는 각자가 써나가는 법
어두운 기운 가득한 배경과 아쉬운 촬영, 그리고 니콜라스 케이지의 부활
영화 <피그>의 배경이 되는 숲과 포틀랜드는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특히 어두운 강물과 광활한 숲을 비추는 오프닝 시퀀스는 평화로운 분위기라기보다는 긴장감이 역력해 있습니다. 영화의 포스터와 첫 시퀀스를 보면 마치 이 영화 역시 피비린내 풍기는 복수극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럽습니다. 물론 극이 진행되면서 복수와는 거리가 먼 영화임을 깨닫게 되지만, 그래도 어두운 분위기는 좀체 가시지 않습니다. 상실이 주는 고통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 여전히 그 상처는 몸에 남아있으며 결코 희망차게 마무리되는 이야기가 아님을 명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이야기가 담고 있는 치유와 성장의 힘이 그 어두움 속에 따뜻함을 담아내었습니다. 이처럼 모두 모두 행복하게 살게 되었답니다 식의 밝은 분위기가 아닌, 어두움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발견하는 듯한 분위기를 형성하는 배경을 영화의 주로 삼고 있는 부분이 무척 마음에 들었습니다.
더불어, <피그>는 니콜라스 케이지의 연기력 역시 녹슬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과거 그가 출연했던 영화들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그의 명품 연기의 가치를 알고 있었기에, 최근 파산 위기에 몰려 필모그래피를 신경 쓰지 않는 다작으로 인한 평판의 추락이 무척 안타깝게 느껴졌고 다시 재기할 날이 오기만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피그>는 그 재기의 발판이 되어준 영화였습니다. 많은 등장인물이 등장하지 않고, 모든 이야기가 롭을 중심으로 따라가고 있는 만큼 배우의 역할이 아주 중요한 인물입니다. 상실과 슬픔에 빠진, 회한 가득한 눈빛을 중심으로 니콜라스 케이지가 보여주는 연기는 오랜만에 과거 전성기 시절의 그를 보는 것만 같았습니다!
다만, <피그>에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카메라 워킹과 관련된 부분이 많이 아쉬웠습니다. <피그>에서는 유독 핸드헬드로 촬영한 씬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특정 장르의 영화에서 생동감을 주기 위해 자주 사용되는 카메라 기법이 정적이고 가볍지 않은 영화에서 사용되었는지 이해가 잘 가지 않습니다. 이 영화에서 핸드헬드가 어울리는 특정 씬에서 사용되는 경우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영화의 여백을 관객들이 체감하고 채워나갈 수 있도록 가만히 비춰주어야 함에도 화면을 고정시키지 않고 핸드헬드로 느리지만 끊임없이 흔들어대어 집중을 할 수 없게 만듭니다. 한두 번 그런 거라면 차라리 이해라도 하겠다만, 이러한 촬영이 몇 번이고 반복되다 보니 이해를 넘어 짜증을 불러일으키까지 하였습니다. 정말 이러한 촬영 의도가 무엇인지 질문을 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가지게 만들었습니다.
니콜라스 케이지의 과거 전성기를 맛볼 수 있는 훌륭한 연기의 재림
어둡지만 따뜻함이 숨어 있는 배경, 그리고 그 배경이 가지고 있는 여백을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끔찍한 핸드헬드
마이클 사노스키 감독의 <피그>는 여러모로 이전에 리뷰했던 영화 <애플>을 떠오르게 합니다. 두 작품 모두 감독의 첫 장편 데뷔작이며, 상실이라는 고통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애플>이 가지고 있는 불합리함을 <피그>는 가지고 있지 않고 오히려 따뜻한 마음을 가지게 해 주며, 처음 보는 배우들보다는 좋아했던 배우의 등장이 더 반갑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아무래도 <피그>에 더 후한 평가를 하고 싶었습니다. 첫 장편 영화 치고는 정말 나쁘지 않았고 흥미로웠던 작품을 탄생시킨 마이클 사노스키, 앞으로의 행보가 무척 궁금합니다. <콰이어트 플레이스 프랜차이즈>를 마무리하고 어떤 신선한 작품을 관객들에게 선보일지 기다려집니다 :)
당신이 늘 하고 싶다던 가게가 뭐였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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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자 환경에 맞는 삶의 속도란
사실 시놉시스만 보고 완전히 일본 작품이라고 생각했는데, 영화 시작 무렵 제작지원 항목에 너무나도 익숙한 한국기관의 이름들이 나와서 한국 기업이 일본 영화에 투자를 한 것인가 했다가 감독 이름이 박혁지! 한국이름이어서 굉장히 당황한 채로 영화를 보기 시작한 영화 <행복의 속도>. 순간 다른 영화의 시놉시스를 잘못 보고 들어온 것인가 혼란스러웠지만 아름다운 오제와 봇카에 대해 이야기가 바로 시작되어서 감독만 한국 사람이었구나 속으로 잘못 본게 아니구나 안도하며 다큐멘터리를 보기 시작했다.
영화 <행복의 속도> 시놉시스
지금, 당신은 어느 길 위에 있나요?
꽃, 바람, 새 그리고 나뭇길... 해발 1,500미터 천상의 화원 ‘오제’. ‘이가라시’와 ‘이시타카’는산장까지 짐을 배달하는 ‘봇카’다. 70~80kg의 짐을 지고 같은 길을 걷지만 매 순간 ‘오제’의 길 위에서 자신의 시간을 채워가는 '이가라시'. 반면 '봇카'를 널리 알리고 싶은 '이시타카’. 닮은 듯 다른 두 사람이 건네는 이야기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행복의 속도>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
아름다운 오제의 현장을 담아내다
영화 <행복의 속도>를 보면 정말 어느 누구라도 감탄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4K가 얼마나 풍경을 잘 담아내는지 그 위용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오제의 광활한 풍경에서부터 조그마한 잎사귀와 꽃, 나비까지. 그 모든 자연을 하나하나 포착해서 담아낸 영화 <행복의 속도>는 사계절을 느낄 수 있는 환경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작년까지는 계절의 변화와 그 계절의 아름다움에 대해 크게 감흥이 없었는데 유달리 올해 들어서 바뀌는 계절이 굉장히 예쁘고 사진찍는게 행복한 한 해였다. 그런 1년을 보내는 시기에 만난 영화 <행복의 속도>에서 바뀌는 계절의 색감을 너무나도 찬란하게 비춰주고 있어서 오제로 여행을 가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아날로그의 삶을 살아가는 오제일본에 있는 오제라는 국립공원은 디지털은 잘 찾아볼 수 없는 공간이었다. 대부분의 정산은 수기로 이뤄지고 택배 시스템도 차량이 아니라 사람이 직접 걸어서 산장에 필요한 물품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봇카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매일 70-80kg이나 되는 짐을 이고지고 산장으로 옮긴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걸을 때 스마트폰을 보거나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걷는다. 그리고 사람들을 만나면 세상에 대한 가십거리나 사회문제 혹은 오늘 회사에서 있었던 일들을 주로 이야기한다. 하지만 오제에 사는 사람들과 봇카는 조금 달랐다. 평소보다 꽃이 빨리 시들었고, 어떤 식물이 예쁘게 피었으며, 누에고치가 언제 나비가 될 것인지 등 온통 자연에 대한 이야기로 대화가 이뤄지고 있었다.
처음 이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솔직히 어색했다. 어딜가서 올해 꽃이 일찍 폈어! 이 얘기로 상대방과 이야기의 물꼬를 트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만큼 자연의 변화에 무심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빠른 사회에 선사하는 느린 영화
모든 것이 빠르게 지나가는 현대사회와 완전히 대치되는 영화라고 볼 수 있는 영화 <행복의 속도>. 요즘 영화들도 빠른 컷전환과 화려함을 보여주고 있다면 영화 <행복의 속도>에서는 느린 화면 전환과 아름다운 자연을 다양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대체하고 있었다. 그리고 빠르게 물건을 이송할 수 있는 헬기에 주목하기보다 몇시간이 걸리더라도 본인의 일을 묵묵히 하는 봇카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속도에 대한 질문을 넌지시 던지고 있었다.
과연 빠르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일까?
물론 오제와 같은 자연환경이 아닌 빌딩숲에 둘러쌓이고 월급을 받는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말고 자신의 속도에 맞춰서 살아가라는 조언은 얼토당토하지 않다. 환경과 사회 자체가 다르니 말이다. 하지만 회사가 아닌, 개인의 삶 자체에는 그 이야기가 다르다고 생각한다. 본인의 일상을 유지하는 방식이 회사와 사무를 처리하듯 정신없이 빠르게 지나치기 보다는 그 순간 떨어지는 낙엽을 보고, 지하철을 타며 노을지는 한강을 바라보며, 밤하늘에 떠있는 달을 보며, 나의 속도대로 일상을 지켜내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영화 <행복의 속도>는 꼭 봇카들처럼, 오제에 사는 사람들처럼 디지털을 다 버리고 아날로그의 세상으로 돌아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 나름의 속도를, 자신의 페이스를 찾으라고 전달해주고 있어서 잔잔한 울림을 주었던 것 같다.
영화 <행복의 속도>는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개개인의 행복의 속도에 대해 넌지시 알려주었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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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EONJU IFF 데일리] 기억의 파편을 통한 연대와 마음
여름의 카메라 Summer's Camera
Korea | 2024 | 83min | Fiction | 전체관람가 | Asian Premiere
▶Director
성스러운 Divine SUNG
▶Cast
김시아 이은솔 유가은 배영란 곽민규
▶시놉시스
아빠를 따라 사진을 찍던 여름은 아빠가 세상을 떠난 후, 카메라에서 손을 놓게 된다. 그런 여름이 축구부 에이스인 연우에게 첫눈에 반해 고등학교 때 아빠가 쓰던 카메라로 홀린 듯 사진을 찍는다. 필름을 현상하자 그 속에는 고등학교 시절 아빠가 찍은 것으로 보이는 사진들이 있다. 여름은 사진들 속에서 아빠의 비밀을 보게 된다. 과연 여름은 첫사랑을 이루고 아빠의 비밀을 파헤칠 수 있을까?
#기억의 파편을 통한 연결
사진은 찰나의 순간을 포착하는 기억의 파편이자 그중에서도 필름은 직접 감각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보이지 않는 기억을 전달할 수 있는 물질이다. <여름의 카메라>는 그런 기억의 파편을, 어느 ‘여름’의 기억을 순수하고도 아름다운 청춘의 한 장면으로 보여준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필름 카메라를 이어서 사용하는 여름은 현상을 통해 그동안 알지 못했던 아빠의 시선을 마주하게 된다. 여름의 사랑은, 그리고 여름이 마주하는 아빠의 사랑은 필름과 참 닮아있다. 여름이 마주하게 되는 아빠의 사랑은 뜨거웠던 그의 계절 중 일부일 뿐이고, 그 사랑의 주인인 아빠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기억처럼 더 이상 마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기억의 파편은 이제 필름이라는 물질을 통해 딸 여름에게 전해져 그녀의 관점에서 새로이 감각되고, 재생될 뿐이다.
기억의 파편, 감각되는 물질을 통한 이러한 연결은 <여름의 카메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재일조선인이나 조선인과 같은 디아스포라의 기억이나 홀로코스트의 기억처럼 역사적 기억이 후세대로 전승되는 과정에서 중요히 언급되고 있다. 시간이 지나 기억의 당사자, 체험의 당사자가 사라졌을 때 그 기억은 어떻게 기억될 수 있을까? <여름의 카메라>와 함께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 중인 임흥순 감독의 <기억 샤워 바다>에서는 ‘옷’을 통해 디아스포라로서의 한 사람의 삶이 후대로 전승되고 있고, 작년에 국내에서 개봉한 <클로즈 유어 아이즈>에서는 영화 필름이 과거 단절된 영화와 인물을 이어주고 있다. 그리고 <여름의 카메라>에서 여름은 필름을 통해 아빠와 이어지고, 새로운 인연과 연결된다. 그렇게 아빠가 쓰던 여름의 카메라는 하나의 매개로서 여름을 곳곳으로 연결하고 그녀의 일상에 스며든다.
#매개체로서의 필름과 여름의 연대
<여름의 카메라> 속 인물들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며 끈끈하게 연대하는데, 그들이 서로에게 다가가고자 애썼다기 보다 그들의 첫 만남은 모두 의도치 않은 우연함으로 시작된다. 여름은 우연히 축구부 연우를 만나 셔터 소리가 들리는 듯한 설레는 감정을 느끼고, 필름을 현상하여 의도치 않게 보게 된 사진에 의해 아빠의 과거 기억과 마주하게 되며, 그 기억을 따라가다가 마루를 만난다. 그리고 이런 우연한 만남은 따뜻한 연대로 이어진다. 이때 여름의 중요한 매개체는 ‘필름 카메라로, 여름이 사진을 찍어주고 현상하고, 그 실물을 다시 누군가와 나누는 과정을 직접 실천하며 인물들과 그녀의 관계는 점점 가까워진다.
<여름의 카메라>에서 필름이 인물들 사이를 연결하고, 단절된 무언가와 이어주는 매개체로 작용하고 있는 것처럼, 여름의 커밍아웃과 정체성 또한 작품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인물들 간의 관계를 더욱 끈끈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여름이 가장 가까운 절친인 민정에게 자신이 여자를 좋아한다고 고백할 때, 민정은 이미 그에 대해 알고 있다고 답하며, 여름의 정체성을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녀의 존재 자체를 존중하고 지지하는 모습을 보인다. 한편, 현상된 사진 덕에 마루에게는 의도치 않게 첫 만남부터 연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밝히게 되는데, 이것은 당혹스럽거나 난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루와 공통분모를 형성함으로써 그와 더욱 가까워지고 친밀해지는 계기가 되고, 여름 자신 또한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수용함으로써 연우와 마음을 트고 가까워지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여름의 카메라>에서 여름의 정체성은 인물들 간의 연대를 더욱 견고하고 단단히, 친밀하게 만드는 것이 되고, 그들은 서로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지지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들은 때로는 함께 성장하는 친구가, 때로는 유일하게 고민을 나눌 수 있는 동지가 되며 다양한 형태로 연대하고, 함께 성장하며 순수하고도 뜨거운 계절을 함께 보낸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연대의 가능성과 다양한 형태의 연결을 꿈꾸게 한다.
감독은, 5/5일 진행된 <여름의 카메라> GV에서 ‘밝은 퀴어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한 점에서 <여름의 카메라>는 감독님이 목표하신 바에 아주 부합하는 영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영화의 푸르른 배경과 따스한 색감은 주인공들의 통통 튀는 말투와 어우러져 햇살 같은 그들의 청춘을 돋보이게 하고, 인물들이 내뱉는 툭툭 내뱉는 진솔한 마음들은 숨기거나 걱정하고, 끙끙 앓아야 할 것이 아니라 가까운 이와 나눌 수 있는 것, 해결될 수 있는 것으로 제시됨으로써 인물의 성장과 미래를 향한 여정에 기여한다. 여름의 사진처럼 그들의 사랑과 아픔, 청춘과 우정은 이내 지나가 붙잡을 수 없겠지만, 그들이 나눈 설렘과 기억은 이 영화를 통해 그들에게, 그리고 관객들에게 오래도록 남을 것이라 생각한다.
▶제 26회 전주국제영화제
2025. 4. 30. ~ 2025. 5. 9.
▶상영일정
2025. 05. 03 (토) 메가박스 전주객사 3관 17:00 (GV)
2025. 05. 05 (월) 메가박스 전주객사 3관 14:00 (GV)
2025. 05. 06 (화) 메가박스 전주객사 3관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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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올드보이 속 대사로 알아보는 복수의 섬뜩한 의미
뒤늦게 올드보이를 감상한 후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올드보이가 도대체 왜 명작인지 모르겠다고. 그래서 만들었습니다.
복수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구원이란 어디에서 오는지,
오대수와 오이디푸스는 어떻게 닮아있는지,
오늘은 영화 속 대사와 오이디푸스 신화를 빌려 올드보이를 이야기합니다.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있습니다.
엔딩 BGM : https://youtu.be/KlVcvBkk-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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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이라곤 없는 평화로운 뉴 라쿤 시티. 이곳에서 생사를 건 싸움이 시작된다. 전설적인 프랜차이즈 《바이오하자드: 더 시리즈》의 생존 투쟁이 넷플릭스를 찾아온다. 곧 공개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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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빅 피쉬> 런칭 예고편
“때로는 초라한 진실보다 환상적인 거짓이 더 나을 수도 있단다.
더구나 그것이 사랑에 의한 것이라면!”
운명을 보는 마녀, 집채만 한 거인, 시간이 멈춘 유령마을까지…
믿을 수 없는 모험으로 가득한 에드워드 블룸의 이야기. 당신도 믿나요?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고향을 찾은 윌.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다 큰 아들에게 허풍 가득한 무용담을 늘어놓는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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