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5-05-08 21:23:49
[JEONJU IFF 데일리] 영속하는 사랑의 힘
영화 <사라진 공화국> 리뷰
DIRECTOR. 에밀리 므크르티치안
CAST. 시라누시 사르크샨, 스베틀라나 하루투냔, 가야네 함바르줌얀, 소세 발라사냔
SYNOPSIS. <사라진 공화국>은 전쟁의 여파와 또 다른 위협에 직면해 있는 미승인 국가 아르차흐의 네 여성을 따라간다. 그들이 새로운 삶을 일구어 가던 중 다시 발발한 전쟁은 그들의 삶을 완전히 뒤바꿔놓는다. 이 영화는 그들의 생존과 회복력뿐 아니라 잃어버린 조국을 지키기 위한 스토리텔링의 영속적인 힘을 포착한다.

이 영화 제목을 처음 인지한 건 뉴스 기사를 통해서였다. 영화 상영을 중단하라는 메일이 수백 통씩 전주국제영화제로 날아들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대체 뭐길래? 프로그램 노트에 "아르메니아의 시각을 일방적으로 반영했다는 한계가 있긴 하지만"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던 영화였다. 다시 말해 이 영화를 보기 전후로 많은 조사와 공부가 필요하다는 의미였으므로, 한정된 시간 안에 볼 영화를 고르다 보니 일단 지나쳤던 영화였다.
두 번째로 인지한 건 이 영화를 보고 나온 지인들이 A4용지 한 장씩을 쥐고 착잡한 표정으로 다가왔을 때였다. 전주국제영화제 측은 (당연히) 상영을 중단하지 않았다. 민성욱 집행위원장의 말마따나 "팔레스타인의 관점에서 만든 영화를 상영한다고 이스라엘 국민들이 이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여러 분쟁 지역의 영화를 상영할 때도 상대국에서 이처럼 행동했던 적은 없었다". 아제르바이잔 대사관과 잘 조율하겠다는 말이 결국 입장문 한 장을 배부하는 선으로 결정된 모양이었다. 친구들이 보여준 A4용지에는 다소 묵직한 단어들이 적혀 있었다.
이 영화는 아제르바이잔의 영토 보존과 주권을 훼손하고 아르메니아의 영토적 주장을 지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음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아르차흐’라는 명칭으로 언급되는 아제르바이잔 영토에 대해 말하자면, 이는 국제법의 기본 규범과 원칙에 위배되며, 가라바흐 지역을 아제르바이잔의 불가분의 영토로 인식해 온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입장과도 맞지 않습니다. 이는 심지어 아르메니아에 의해 불법 점령되었던 시기에도 일관되었던 입장이었습니다.
더욱이 이 영화는 반 아제르바이잔에 대한 선전내용을 담고 있으며, 민족주의, 분리주의, 극단주의, 군국주의, 복수주의 등을 조장합니다.
대체 뭘 어떻게 하면 '민족주의, 분리주의, 극단주의, 군국주의, 복수주의'를 조장할 수 있나? 굉장한 영화다. 그래서 봤다. 알지도 못하는 국가의 이야기를 그렇게 보게 되었다. 1991년, 나와 같은 해에 태어나서 나보다 일찍 저물어 버린 나라. 그리고 거기 살아가는 놀라운 여자들의 이야기를.

감독은 처음 이 영화를 기획할 때 어떤 생각이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이 완성물과 꼭 같은 형태는 아니었을 것이다. 영화 촬영 도중에 전쟁이 터졌고 나라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촬영을 시작할 때만 해도 예상하지 못한 미래를 맞이하는 모습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극영화보다 더 극적인 현실이다.
영화는 여성 4명을 따라간다. 지뢰와 불발탄을 제거하는 NGO에서 일하면서 두 딸을 키우는 스베타. 시장 출마에 처음 도전하는 정치인 시라누쉬, 여성 센터를 운영하는 가야네, 올림픽 메달리스트를 꿈꾸는 유도선수 소세. 네 사람의 삶은 각자의 방식으로 분주하고 또 아름답다.
스베타는 비록 업무 현장에서 매일 죽음의 공포를 맞닥뜨리지만 (불발탄 제거 작업은 기계로 할 수 없다. 하나하나 수작업이다.) 딸들과 함께 농담을 하고 사진을 찍고 시간을 보낸다. 시라누쉬는 카메론 디아즈 닮은 미소를 환하게 지으며 선거 팸플릿을 나눠주고 사람들을 만나지만, 해당 선거에서 당선된 여성은 0명이다. 가야네는 의자 뺏기 게임으로 아이스브레이킹을 하고 있는 행사 현장에서도 심각한 내용의 여성 사례 상담 전화를 받고 있으며, 이따금 협박의 공포를 느끼기도 하지만 계속할 거냐는 물음에는 채 눈물도 못 닦은 얼굴로 '그럼요'라고 답한다. 줄줄이 달린 메달과 함께 슬플 때 꼭 함께한다는 인형을 보여주는 소세의 모습은 그의 굳건한 정신이 동시에 섬세하고 소소한 것들에도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들의 모습을 보면 괴로움과 불안이 섞여들어 있어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유영하는 강인함이 보인다. 강철 같은 강인함보다는 강물 같은 강인함이다. 하지만 이들의 그 강인한 일상은 전쟁으로 휘청인다.
아르차흐 공화국이라는 이름을,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들어본 적이 없는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해 정리해 보자. 아르차흐는 고대부터 아르메니아 왕국의 일부로 존재해 왔던 땅이다. 그러나 소련은 아르차흐를 아제르바이젠의 지방으로 편입해 버린다. 거대한 소련의 붕괴가 다가올 즈음, 그러니까 1988년부터 아르메니아계 주민들과 아제르바이젠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1991년 아르차흐 공화국은 독립을 선언했고 국제사회는 인정하지 않았다. 1994년 이제 더이상 소련이 아닌 러시아의 중재로 휴전이 되었으며, 이후 아르차흐 지역은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이 기를 쥔 지역이 되었다.
이들은 아르차흐 공화국을 선포했고, 정부, 군대, 선거 제도를 별도로 운영했다. 여기에는 아르메니아의 실질적 지원도 있었다. 그러다 이 영화가 촬영되던 중인 2020년, 또 다시 전쟁이 시작됐다. 아제르바이잔의 공격과 러시아 평화유지군의 주둔으로, 수많은 주민들이 아르메니아로 피난 길에 올랐다. 2022년 아제르바이잔은 수도를 봉쇄했고, 거의 1년에 가까운 봉쇄 끝에 2023년 9월 군사작전이 마무리되었다. 2024년 1월 1일을 기점으로 모든 헌법과 기관들이 해체된다는 선언이 나왔고, 2023년 아르차흐는 더이상 국가가 아니게 되었다.
많은 경우 분쟁의 씨앗은 당사자가 아닌 타의, 주로 거대한 힘에 의해 뿌려지는 듯하다. 이 경우에도 아르메니아 입장에서는 소련이 멋대로 그은 선에 당한 셈이고, 아제르바이잔도 한번 국경선에 들어온 지역을 포기할 의사가 없었다. 그러나 소련은 붕괴되었고 러시아는 여전히 전쟁을 벌이고 있다. 아르차흐는 현실 주체로서 힘을 잃었다.

삶과 사람과 도시를 사랑했던 여자들의 삶은 많이 바뀌었다. 죽음의 가능성을 가까이서 느꼈기에 소중한 이들을 잃을까봐 약해져 있던 스베타는 다시 딸들을 지키기 위해 직업을 찾고 있고, 시라누쉬는 대사관 앞에서 항의 집회를 하며 마이크를 들다가 이제는 기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집회에서 외치는 첫 마디가 전쟁 규탄이 아닌, 우리의 존재를 인지recognize하라는 명령인 것은 마음이 아프다.) 가야네는 여전히 여성 센터를 운영하지만, 상담 상대들의 반응은 달라졌다. 가정 내 차별과 여성의 권리에 대해 이야기하기보다, 내담자의 첫 문장이 "도시를 그렇게 잃어버리고 나서..."인 경우가 많아졌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가장 많이 달라진 건 소세의 삶이다. 인형과 메달을 가까이 하던 유도선수, 메달리스트를 꿈꾸던 여자는 이제 총을 가장 가까운 친구 삼은 군인이 되었다. 과거를 회상하던 얼굴에 눈물이 흐를 때, 감독은 소세를 깊이 끌어안는다. 그 모습은 마치 영화의 역할처럼 보였다. 아름다웠던 과거를 되돌려 보여주고, 우리가 갈 미래가 그 과거와 닮아 있길 바라며 길을 보여줄. 그렇게 끌어안아 위로해줄. 현실 주체의 힘은 약해져도 이야기는 영속한다. 여자들의 삶도 이야기 안에서 사랑의 빛을 덧입을 것이다.

그 사랑이 눈에 보이는 순간이 영화에 있었다. 노란 양초였다. 스베타가 착잡한 얼굴로 하나하나 불을 밝혀 컵에 넣던, 노랗고 길다란 양초. '더 이상 기도하고 싶지도 않고, 꿈도 없다'고 말하는 소세가 마침내 울음을 터뜨리던 장소에도 똑같은 양초가 불을 밝히고 있었다.
눈물처럼 흘러내리는 촛농과, 그럴 때마다 하나씩 더해지는 빛. 거기서 느껴지는 곡진한 사랑. 세상 곳곳에서 분쟁 소식이 매일 더해지는, 이 야만의 시대를 바라보는 우리의 자세는 어쩌면 더없이 촛불을 닮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 미친 세상에서 우리는 나날이 기억해야 한다. 파워게임의 주체가 아닌, 사랑이 담긴 이야기만이 영속한다는 사실을.
2025.05.02 메가박스 전주객사 5관
2025.05.03 CGV전주고사 8관
2025.05.07 CGV전주고사 8관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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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이 꼿꼿한 사람
SYNOPSIS.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가까운 미래의 일본. 청년층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정부는 75세 이상 국민의 죽음을 적극 지원하는 정책 '플랜 75'를 발표한다.
명예퇴직 후 '플랜 75' 신청을 고민하는 78세 여성 '미치'
가족의 신청서를 받은 '플랜 75' 담당 시청 직원 '히로무'
개인별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는 '플랜 75' 콜센터 직원 '요코'
'플랜 75' 이용자의 유품을 처리하는 이주노동자 '마리아''플랜 75'의 세상,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POINT.
✔️ 초고령화 사회, 인간성을 잃어가는 듯 느껴지는 뉴스가 쏟아지는 지금, 볼 가치가 있는 영화
✔️ 주인공 ‘미치’ 역의 배우 ‘바이쇼 치에코’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 소피 성우이기도 합니다. 극중에도 언급될 만큼 따뜻하고 다정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세요.
✔️ ‘미치’ 씨는요, 몸이 꼿꼿해요. (…) 난 이게 미치 씨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고 생각합니다.
✔️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눈여겨본 단편 감독의, 첫 장편 작품. 봉준호처럼 현실 인식이 서늘하고, 고레에다 히로카즈처럼 풀어가지만, 그보다 단단하고 무게중심이 낮은 느낌입니다. 차기작이 벌써 기대됩니다.
✔️ 칸영화제 황금카메라상 특별언급을 비롯해, 세계 각지에서 주목받은 작품
✔️ 2월 7일 개봉
오래 전 누군가에게 들은 적 있다.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 그러니까 처음 5-10분은 그 영화를 이끌어가는 내용이자, 나중에 돌아보면 그 부분만 봐도 영화를 다 본 거나 마찬가지라고. 그런 관점에서 이 영화를 본다면, 적극 동의하는 동시에 소름이 끼칠 것이다. 이 영화의 시놉시스가 되는 ‘플랜75’ 정책은 결국 오프닝 시퀀스에 나온 사건을 아주 천천히, 공적인 탈을 쓰고, 풀어서 진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권리인가? 이 질문은 결국 존엄사에 대한 논쟁으로 이어진다. 나는 이 논쟁이 언제나 편치 않았는데, 누군가에게는 ‘존엄’을 지킬 선택이겠지만, 적어도 이 사회에서는 ‘죽음을 선택할’ 자리까지 떠밀린 사람들에게 마지막 버튼을 눌러 주는 것이거나, 의료라는 흰 베일을 뒤집어쓴 살인이 훨씬 많으리라는 기분 나쁜 예상 때문이었다.
유독 인물들의 뒷모습을 많이 담아낸 이 영화 속에서, 나는 마치 서래를 본 해준처럼 생각했다. 미치 씨는요… 몸이 꼿꼿해요. 난 그게 미치 씨에 대해서 많은 걸 말해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꼿꼿한 등처럼 하루하루를 성실하고 바르게 살아온 사람이다. 꼼꼼하게 일하고, 퇴근해서 장 본 식재료를 정리하고, 베란다에 걸어 두었던 옷을 다시 들여놓는 사람. 퀴즈 쇼에 도전하고 상품을 노리는 사람들이 나오는 예능 프로그램을 틀어놓고도 그는 눈길 한 번 제대로 주지 않은 채 정갈한 식사를 한다. 호기로운 도전이나 일확천금을 노리는 마음 같은 것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단정하고 알뜰한 일상.
그러나 국가는 이러한 미치의 일상을 보지 않는다. 초고령화 사회에서 ‘예산 들어갈 곳’을 줄이기 위해 75세 이상의 노인을 대상으로 존엄사 신청을 받는 국가에게, 미치는 그저 75세를 넘은 노인일 뿐이다. 국가가 국민을 죽이는 방법으로 명맥을 유지하다니. 누군가의 미래를 짓밟아서 도달하는 곳을 우리가 감히 미래라 불러도 될까. 그렇다면 국가란 무엇인가. 미래는 무엇인가. 영화는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좋은 영화가 으레 그렇듯, 무거운 질문에 답안이 될 수 있을 여러 가지를 그저 보여준다.
#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부유하지는 않아도 자기 일과 머리 누울 집이 있던 미치에게서, 국가는 그의 세상을 하나씩 잘라내고 몰아낸다. 죽음이 아니면 선택할 수 없는 자리까지 사람을 몰아세우는 느낌마저 든다. 영화를 보는 내내, 노인의 가난을 단지 그의 개인적 문제로 치부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는 책 <가난의 문법>이 생각났다. 나아가 노인 빈곤율과 노인 자살률의 상관관계를 떠올리며, 노인 자살률이 OECD 압도적 1위라는 한국의 통계치 또한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과연 그러한 죽음은 ‘자’살인가? 미치를 끊임없이 몰아간 끝에, 라바콘 불빛이 경고등처럼 온통 붉게 번쩍거리는 어느 밤. 온통 빛이 번쩍번쩍하지만 온기는 없는 밤이 마치 이 사회 같았다.
온기 없이 휘황찬란한 세상에서, 미치는 계속해서 꼿꼿하게 걷고, 정갈하게 먹고, 조용히 배려하며, 더없이 예의 바른 언어를 구사한다. 그 중에서도 “신세(お世話)”라는 단어는 세 번 이상 쓴다. 이 단어는 사전에 “도와줌, 보살핌; 폐, 신세, 귀찮은 일”로 등장하데, 도움을 받으면서 폐를 끼치게 되어 송구한 마음을 담을 때 쓴다. 꽃다발을 받으며 명예 퇴직을 하게 되었을 때, “그 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의 의미로, 플랜75 상담원과의 첫 통화에서 “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통화에서 “마지막까지 신세 지게 되네요”로 차차 등장한다.
기초 일본어 회화에서 배우는 문장인데, 퇴직하면서 마지막으로 사물함을 깨끗이 닦고 감사 인사를 남기는 미치의 성격상 자연스러운 문장인데, 유독 귀에 툭 걸렸다. 생각해 보면 이 영화 속에서 스스로를 낮추는 단어들은 죄다 귀에 툭툭 걸렸다. 스스로에 대한 낮춤말이 존댓말 못지않게 발달한 일본어에서는 과히 이상할 게 없는 표현들인데, 왜 그 겸양의 표현들이 마음에 걸렸을까. 공적인 탈을 쓰고 무례한 죽음이 판을 치는 세상에 끝내 고개를 조아리는 모습이, 마음에 걸렸던 건 아닌지.
#우리는 얼마나 다를까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장애인에게도 이동권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문장만큼이나, 노인의 생명이 소중하다는 말 또한 당연한 소리다. 너무 당연해서 흰소리처럼 느껴져야 하는, 힘주어 말할 필요 없는 문장이어야 한다. 당연히 노인은 ‘우리’와 ‘그들’로 나뉘는 개념이 아니어야 하며, 사람이니까 당연히 다르지 않다. 그 모습이 무너진 세상을 표현하면서도, 오히려 그렇기에 자연스럽게 인간의 면면을 비춘다.
미치와 직장 친구들의 대화, 그들이 함께 보내는 시간을 보면 젊은 직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또한 이 영화 속 젊은이들과 노인들은 여러 차례 같은 자리에 선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길, 기차 차단봉 앞에 잠시 서는 것은 미치도 히로무도 마찬가지다.
그런가 하면 플랜75로 사망한 노인들의 짐을 정리하고 물건을 털어 보는 마리아와 동료의 모습에서는, 누구라도 아우슈비츠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이 영화 속 인물들은 서로서로, 그리고 현실의 어떤 면과 끊임없이 공명하며 우리에게 묻는다. 과연 우리는 얼마나 다르냐고.
비슷한 스토리라인을 담았던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단편 <황혼의 반란>에서 주인공 프레드가 남겼던 말, “너도 언젠가 노인이 될 게다”는 문장이 그렇게 이 영화에서도 우리에게 파고든다. 플랜75는 노인들에게는 죽음을 선사하지만, 히로무와 요코를 비롯한 젊은 세대에게는 더 큰 내상을 입히고 있음이 영화에 절절하게 드러난다.
이 영화 속 ‘플랜75’가 지향하는 것, 그리고 실제로 성과로 들이미는 것은 “경제적 파급 효과”다. 그건 정말 좋은 것일까? 어쩌면 그건 군더더기의 다른 표현일 수 있다. 어느 정도까지는 “부가 가치”라고 할 수 있겠지만, 밭에서 “농작물 가격을 잘 쳐주지 않다” 수확할수록 손해가 나서 농작물을 갈아엎는데, 마트에서는 너무 비싸서 못 사먹는 극단적인 상황까지 가면, 이 ‘부가’된 것은 가치일까 군더더기일까. 그 군더더기를 만들기 위해 진짜 중요한 가치들을 버린다면, 그걸 어떻게 부가 가치라고 부를 수 있을까.
팔을 베고 식탁에 엎드린 미치가 이내 응시하는 어둠. 낮잠에서 깨어난 마리아가 같은 자세로 팔을 베고 응시하는 어둠. 그 시선 끝에, 절대 자구책이 될 수 없는 군더더기가 구더기처럼 우글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등에 이야기를 매달고
친구에게 몇 번씩 걸어도 도저히 가 닿지 않던 미치의 전화는, 역설적으로 플랜75 상담원과 연결되면서 그제야 전화기의 기능을 하기 시작한다. 비록 마음 주고받는 일을 차단하기 위해 모든 상담에 타이머로 시간 제한을 걸고 있고, 우리가 아는 가치들에 붙었던 이름(예컨대 “용기”)을 뒤죽박죽 섞어 쓰며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연결이지만… 그 연결에서도 꽃은 피어난다. 귀여운 하이파이브가 있고, 멜론 소다 아니 크림 소다의 추억이 있고, 지나간 시간이 한 결씩 곱게 펼쳐지고 겹쳐진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소피 역할로 단단하고 따뜻한 목소리로 모든 등장인물을 품었던 바에쇼 치에코의 목소리로, 꼿꼿한 등으로 해주는 이야기들은 어쩐지 자꾸만 더 듣고 싶어지는 이야기들이었다. 히로무 삼촌의, 어쩐지 지친 듯한 등과 방에 놓인 물건들의 이야기도… 어쩐지 더 듣고 싶어서 슬퍼지는 기분이었다.
영화가 마지막에 가까워 갈수록, 어쩐지 나는 “생은 존엄이구나”라고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영화 속 ‘플랜75’ 광고에서는 “태어나는 건 선택할 수 없었지만, 죽는 순간은 선택할 수 있다”고 호기로운 광고를 하지만, 그 말이 오히려 깨달음을 준다. 태어남을 선택할 수 없었듯, 죽음도 선택할 수 없는 자리에 남겨두어야 맞겠구나. 누구나 한 번은 죽는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싶을 만큼 두려운 것이지만, 그것이 생의 본질이려니, 하고 받아들이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당신이 이 영화에서 무엇을 발견할지도 궁금하다. 하야카와 치에 감독의 말마따나, 계속해서 흑백의 명확한 답을 요구하는 세상이지만, 인간은 아주 복잡하고... 중요한 이야기들은 회색 지대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 '플랜75' 식이 아닌 답을 찾아내려면, 이 영화가 던진 무거운 질문에 우리 각자의 답을 하나하나 꽃다발처럼 풍성하게 엮어내는 편이 좋을 테니까. 내가 이 영화에서 엿본 것은, 정말 너무 무거워서 좀처럼 쓰고 싶지 않은 단어라고 생각하면서도, 생의 존엄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 삶이 바닥을 쳐도 생은 존엄하다는 것이다.
그래. 어쩌면 삶의 어느 순간, 결기 어린 눈빛 외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 때가 있을 것이다.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뜬다는 식의 부드럽고 달콤한 말로 로맨스 영화처럼 혹은 청춘 영화처럼 갈무리할 수 없는 엔딩이라 느껴지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꼿꼿한 등으로 서서, 나의 노래를 한 소절 부르고 또 발걸음을 옮기면 그저 그뿐이다. 이 생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꼿꼿한 등에 이야기와 노래를 매달고 걷는 것뿐이다. 여전히, 저는 그게 많은 걸 말해준다고 생각합니다.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초청받아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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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모가 되면 생기는 또 하나의 마음
부모가 된다는 것에 대해 이미 많은 애니메이션 영화들이 이야기해왔다. 예를 들어, <니모를 찾아서>에서는 아버지 물고기 말린이 위험을 무릅쓰고 바다를 누비며 아들 니모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부모로서의 사랑과 헌신을 그린다. <라이온 킹>에서는 무파사가 어린 심바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심바 역시 아버지의 가르침을 통해 성장하며 부모로서의 책임감을 배운다. 이처럼 부모가 자식을 키우는 이야기는 보편적이며 많은 사람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주제다. 그래서 어쩌면 이 주제는 새롭지 않다고 생각될 수도 있다.
하지만 드림웍스 스튜디오가 30주년 기념으로 내놓은 영화 <와일드 로봇>은 이 보편적인 이야기의 중심에 로봇을 배치해 색다른 접근을 시도한다. 로봇은 감정이 없고, 단지 입력된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가 아이를 향한 사랑을 느끼는 마음도, 따뜻함도, 고민도 없는 존재다. 이 로봇이 부모의 역할을 맡게 되면서 감정이 생기고 변해가는 과정이 매우 따뜻하게 그려진다. 이 영화는 로봇이라는 존재를 통해 부모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새로운 시각으로 보여주고 있다.
[첫 번째 감정] 로봇 로즈의 무감정
로즈(목소리: 루피타 뇽오)는 인간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서비스 로봇으로, 처음 등장할 때는 감정이 전혀 없는 기계적 존재로 묘사된다.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로즈는 정해진 프로그램에 따라 행동할 뿐, 자신의 존재에 대해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는다. 그는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며 동물들에게 여러 차례 도움을 주려 하지만, 동물들은 그를 경계하고 거부한다. 이 과정에서 로즈는 끊임없이 거절당하지만, 그에게서는 실망이나 슬픔 같은 감정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그저 명령을 따라 행동할 뿐인 로즈의 모습은 기계적으로 느껴지며, 감정이 결여된 그의 행동은 차갑게 보이기도 한다.
어느 날, 로즈는 부모를 잃은 아기 새의 알을 발견하고 그것을 돌보게 된다. 하지만 그때도 로즈에게는 아무런 감정이 없다. 단지 알을 보호하고 새끼 새를 키우는 것이 '임무'라고 생각할 뿐이다. 그의 행동에는 사랑이나 애정 같은 인간적인 감정이 개입되지 않으며, 로즈는 자신이 왜 아기 새를 돌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깊이 고민하지 않는다. 그저 입력된 지시와 학습된 내용을 바탕으로 행동할 뿐이다. 이 모습은 마치 우리가 부모가 되기 전, 아이에 대한 감정이 없는 상태와도 비슷하다. 아이를 돌보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아이에게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본 적 없는 상태에서 로즈는 그저 주어진 임무를 수행한다.
이런 로즈의 무감정은 영화 초반부에서 관객들에게 조금은 어색하고 낯설게 다가온다. 그는 자신이 왜 아기 새를 돌봐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며, 그저 기계적으로 행동한다. 하지만 이 무감정의 상태는 로즈가 점차 변해가는 과정을 더욱 극적으로 만들어준다. 관객들은 무감정의 로즈가 어떻게 변해갈지, 그리고 그가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될지를 지켜보게 된다.
[두 번째 감정] 아기 새 브라이트 빌의 따뜻함
아기 새 브라이트 빌(목소리: 키트 코너)은 로즈에게서 깨어난 뒤, 그를 엄마로 인식하게 된다. 이제 막 세상에 나온 아기 새의 입장에서 로즈는 세상의 전부였고, 자연스럽게 그를 따르게 된다. 브라이트 빌은 로즈에게 끊임없이 다가가며 얼굴을 맞대고, 그의 주변을 맴돌며 애정을 표현한다. 이런 아기 새의 행동은 로즈를 당황하게 만들고, 로즈는 왜 브라이트 빌이 자신을 따르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로즈에게는 애정이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브라이트 빌과 로즈 사이에는 추억이 쌓이기 시작한다. 브라이트 빌은 로즈에게 의지하며 성장하고, 로즈는 그런 브라이트 빌의 모습을 지켜보며 그의 성장 과정을 함께 한다. 이 과정에서 로즈는 비로소 브라이트 빌의 따뜻함을 느끼게 된다. 처음에는 그저 자신에게 따라오는 존재로만 여겼던 브라이트 빌이지만, 이제는 그의 존재가 로즈에게 중요한 의미가 되어간다. 브라이트 빌의 따뜻한 마음은 로즈를 변화시키고,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로즈에게 새로운 감정을 심어준다.
브라이트 빌과 로즈의 관계는 단순히 로봇과 아기 새의 관계를 넘어선다. 그들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어가며, 함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서로를 통해 성장해 나간다. 브라이트 빌의 따뜻함은 로즈에게 감정을 가르쳐주고, 로즈는 그 감정을 통해 진정한 부모로서의 역할을 배우게 된다. 이는 단순히 로봇과 새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부모와 아이가 함께 성장해 나가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세 번째 감정] 부모의 사랑
시간이 지나며 로즈는 브라이트 빌의 엄마로서의 역할을 완전히 받아들이게 된다. 그는 브라이트 빌에게 수영을 가르쳐주고, 나는 법을 알려주면서 점점 더 부모로서의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 브라이트 빌이 새로운 것을 시도할 때마다 로즈는 조마조마한 긴장감을 느끼고, 그가 다칠까 걱정하며 지켜본다. 하지만 브라이트 빌이 스스로 해내는 모습을 보면서 로즈는 큰 감동을 받게 된다. 이 순간, 로즈는 자신이 브라이트 빌을 얼마나 사랑하게 되었는지를 깨닫는다.
영화는 로봇인 로즈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이 생기는 과정을 매우 효과적으로 묘사한다. 로즈는 이제 단순히 입력된 명령을 따르는 기계가 아니라, 진정으로 브라이트 빌을 걱정하고 사랑하는 부모가 되었다. 로봇에게도 사랑이라는 감정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영화는 하나의 시스템이 추가된 것처럼 표현하며, 그 감정이 어떻게 로즈의 행동과 사고를 변화시키는지를 보여준다. 로즈에게 생긴 이 새로운 감정은 기억으로 남아 지워지지 않으며, 그의 마음속에 영원히 남아 있게 된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결국 이 이야기는 부모의 사랑과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로즈는 로봇으로서 감정이 없는 존재였지만, 브라이트 빌을 돌보며 사랑을 배우고, 부모로서 성장하게 된다. 이는 부모가 아이를 키우며 느끼는 감정의 변화와 성장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으며, 모든 부모가 공감할 수 있는 따뜻한 이야기이다.
부모가 되어가는 과정
<와일드 로봇>에서 로즈는 단순히 브라이트 빌을 돌보는 데 그치지 않고, 그의 행복과 안전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부모의 모습을 보여준다. 처음에는 단지 프로그램된 임무로서 브라이트 빌을 돌보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로즈는 브라이트 빌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할 줄 아는 존재로 변해간다. 브라이트 빌이 위험에 처할 때마다 로즈는 자신의 몸을 던져 그를 보호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 그의 안전을 지킨다. 로봇으로서의 본래 목적을 넘어, 로즈는 이제 브라이트 빌의 행복과 안전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준비가 된 부모가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로즈는 자신이 가진 에너지를 아낌없이 사용하고, 자신의 신체를 소모하면서까지 브라이트 빌을 보호하려 한다. 이는 부모가 아이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편안함과 안정을 포기하는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부모는 아이를 키우며 자신의 시간을, 에너지를, 그리고 때로는 자신의 꿈과 욕구까지도 희생하게 된다. 로즈가 보여주는 이러한 희생은 부모가 아이를 키우며 자연스럽게 가지게 되는 마음을 상징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결국, 부모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 것뿐만 아니라, 아이를 위해 자신의 일부를 희생할 줄 아는 존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로즈는 브라이트 빌을 위해 자신의 존재를 희생하며, 이를 통해 진정한 부모로서의 역할을 완성하게 된다. 이 영화는 로즈의 희생을 통해 부모가 되면서 얻게 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마음, 즉 아이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어줄 줄 아는 사랑을 깊이 있게 그려내고 있다. 이는 부모와 아이 사이의 관계가 얼마나 깊고 특별한지를 다시 한 번 상기시켜준다.
영화 <와일드 로봇>은 부모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작품이다. 영화 속에서 로즈는 브라이트 빌을 돌보며 다른 동물들과 함께 아이를 키워낸다. 이는 아이를 키울 때 부모뿐 아니라 주변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한 아이를 키우는 데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옛말처럼, 이 영화에서는 숲속에 사는 모든 동물들이 브라이트 빌의 성장과 독립을 위해 힘을 모은다. 그들은 브라이트 빌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고, 그의 성장 과정을 지켜보며 돕는다. 이러한 공동체적 지원은 아이를 키우는 데 있어서 중요한 요소이며, 영화는 이를 현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특히 로즈의 변화 과정은 우리가 부모가 되는 과정과 매우 흡사하다. 아이를 향한 마음, 조바심, 그리고 그 모든 행동들은 부모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장면들로 가득하다. 처음에는 감정이 없던 로즈가 브라이트 빌과 함께하면서 점차 감정을 배우고, 사랑을 느끼게 되는 과정은 매우 감동적이며, 관객들에게 큰 울림을 준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감동적이며, 부모와 아이 모두에게 큰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부모라면 아이와 함께 이 영화를 꼭 보기를 추천한다.
영화의 연출을 맡은 크리스 샌더스 감독은 이번 작품을 통해 로봇과 동물이라는 이질적인 존재들 간의 관계를 매우 따뜻하게 그려냈다. 루피타 뇽오와 키트 코너, 페드로 파스칼 등 배우들의 목소리 연기도 훌륭하여 캐릭터들에게 생동감을 불어넣었다. 이 영화는 드림웍스 스튜디오의 30주년 기념작으로, 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감동적이고 의미 있는 작품이다. 부모와 아이가 함께 관람하며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고, 성장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이 영화는 많은 가족들에게 추천할 만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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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이 구역 빌런이다.
이 글은 넷플릭스 [지금 우리 학교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한 좀비물의 특성상 첨부된 사진이 거북할 수 있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2000년대 초반까지 영화에 등장하는 괴생명체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뱀파이어였다.
그들은 영원불멸에 가까운 삶을 피를 통해 연명해야 했지만, 이성을 잃지 않고 인간에 섞여 존재하기를 택했다. 무의미할 정도로 무한정한 시간은 뱀파이어들에게는 부질없는 부를 축적하게 했고, 인간은 둘 중 하나도 얻지 못해 아등바등하는 삶을 가엾게 지켜보는 그들의 눈에는 언제나 가을바람 같은 쓸쓸함이 가득했다. 이 모든 생활이 진절머리 난 뱀파이어들에게 끝을 선사할 수 있는 존재는 오로지 자신들을 타들어가게 할 햇빛뿐이었다.
이들이 가진 고고함과 불사의 몸은 영화를 철학적으로도, 때론 스타일 있는 액션물로도 만들 수 있었지만. 영화는 조금 더 원초적이며 복잡하지 않은 크리처를 원했다. 이성이 있는 뱀파이어들은 넘어갈 수 없는 영역에 존재해 제작자들의 도덕적 부담을 조금은 덜어줄 법 한.
그렇게 좀비가 등장했다.
피에 대한 본능과 소리에 대한 감각만 남았을 뿐 그 어떤 생각도, 계획도 세우지 않은 채 앞뒤 재는 것 없이 뜀박질만 할 수 있는 괴력의 존재. 이렇게 단순하고 파괴적인 "좀비"는 생물과 무생물의 특성을 지닌 바이러스 마냥 빠르게 뱀파이어들을 쓰러뜨리고 영화계에서 무자비한 지배종의 자리를 틀어쥐게 되었다.
마치 오랫동안 일본과 중국에 가려져 저평가 받고, 때로는 주류의 문화가 아닌 것처럼 여겨지던 한국 문화가 넷플릭스의 노른자위 땅에 당당히 깃발을 꽂은 것처럼.
[지금 우리 학교는](이하 지우학)은 넷플릭스에서의 지배종 자리를 노리는 한국 콘텐츠의 저력을 시험하는 자리에 다시 한번 올라있다. [지옥], [오징어 게임]에 뒤지지 않는 명성을 이어 구독자들의 목덜미에 치명적인 이빨 자국을 남길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인가.
신선함 반 식상함 반;그리고 빌런의 중요성
사진출처:YTN STAR
[지우학]에 나오는 좀비들도 "좀비물"이라 불리는 영화에서 약속한 암묵적인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빛에는 그다지 민감하지 않다는 점과 감염이 전파되는 속도가 한국인의 성질머리만큼이나 빠르다는 것이 조금 도드라질 뿐이다.
널리 알려진 좀비의 특성상, 영화의 구성이 새로울 리가 없다. 전반부에 휘몰아치듯 벌어지는 추격전을 빙자한 살육전과 가까스로 살아남은 소수(Minor)의 생존자들이 한자리로 모이는 과정. 본능 외엔 껍데기뿐인 그들의 약점을 이용해 작은 탈출을 감행하는 데서 오는 카타르시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 필수 요소처럼 녹아있는 크고 작은 분열과 드러나는 비열한 인간의 본성들.
이미 한국 영화에서도 다섯 손가락을 넘길 만큼의 좀비물이 존재하고 있는 시점에, [지우학]이 레퍼런스로 참고한 작품은 놀랍게도 좀비물보다는 같은 넷플릭스 식구인 [지옥]이나 [돈 룩업]에 에 가깝다는 지점이 조금은 새롭다.
도륙에 가깝다시피 한 시각적 영화에서 머물기보다 최근의 트렌드인 사회적 풍자와 근원적인 고민에 대한 뉘앙스를 가미하는 것으로 비슷비슷한 좀비 영화"류"에서 벗어나고자 한 셈이다.
하지만 이 [지우학]이 다른 좀비물과 가장 차별화되는 시점은 아이러니하게도 요즘 트렌드를 따르지 않은데 있다. 바로 치가 떨리도록 무섭고 집요한 빌런 윤귀남(유인수)의 등장.
여태 봐 온 좀비 영화의 전형적인 빌런은 나연(이유미)에 가까운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 가뜩이나 급박한 상황에 짜증을 잔뜩 끌어올려 살아남은 자들의 신경을 있는 대로 긁어대다 잔인하게 죽고 만다. 보는 순간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영화 안에서는 일회용품에 지나지 않을법하다는 것을 관객들이 알아채기 쉽지만, 그러려니 하며 용인하고 넘어갈 만큼의 역할. 딱 그만큼에 머무르기 쉽다. 단지 그 악랄함의 차이 정도만 있을 뿐.
그러나 귀남의 경우는 다르다.
좀비의 특성을 가지고 있음과 동시에 이성도 잃지 않는다. 또한 시즌제를 관통하게 될지도 모르는 바이러스의 변이나 면역과 관련된 인물이라는 점 또한 이 최종 빌런의 중요도를 높여준다.
시리즈 자체가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지우학이 가진 매력을 배가 시키는 데는 귀남이 큰 역할을 하고 있음에는 이견이 없을 듯하다. 그리고 결국 이것이 시리즈를 살리는데 일조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왜 하필 학교인가?;그리고 왜 학생인가.
사진 출처:서울 경제
영화에는 안정적으로 보이는 공간인 학교 안에 있는 불안정한 존재인 학생들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지우학]에서 보여주는 학교는 학생을 전혀 보호해 주지 않는 곳임을 아이러니하게 드러낸다.
단지 좀비의 근원지라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학생들을 학교 폭력에서도. 빈부 격차에서 오는 차별에서도, 그 어떤 것에서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고 있다.
아이들에게는 가장 안전해야 할 공간이, 가장 지옥 같은 곳이 된 것이다. 그것도 매일매일 마주해야만 하는. 그들은 교복이라는 갑옷 단 하나로 스스로를 무장한 채 한숨 한 번 쉬며 교문 문턱을 넘어야만 했다.
작품이 학생들을 대하는 태도 또한 그들이 학교에서 어떤 대접을 받는지 알려준다.
수많은 학생들이 등장하지만. 그 누구도 처음부터 이름이 불리지 않는다. 명찰을 비추는 카메라 앵글로 대체되거나 누구누구의 친구 정도의 언급이나 존재감에 머무른다. 극중 남라(조이현)역시 자신이 맡은 반장이라는 역할에 가려져 이름이 무엇인지 친구들의 입에서조차 몇 번 듣지 못한다.
또한 목숨이 빛의 속도로 왔다 갔다 하는 와중에도 이들은 한때 선생님들이었던 어른들의 호통에 움찔할 수밖에 없다. 단지 자신보다 어린 학생이라는 존재의 정체성 만으로. 그들은 핍박받고 어리다고 무시당해야 한다.
가장 씁쓸한 부분은.
그 아무리 허울뿐인 학교라 해도, 학교의 담벼락을 넘는 순간 보호받아야 할 학생이 아닌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로 전락해버린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학교 밖으로 나갔을 때의 그들은 이 나라의 희망도 아니요, 보호해야 할 미성년자도 아니다. 그저 나보다 먼저 넘어져 나 대신 좀비의 밥이 될 수도 있는 후보군 들 중 한 명이거나 대충 소리치고 윽박질러 자신이 유리한 대로 이용할 수 있는 대상 중 하나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렇기에 생존자들은 학교에 갇혀 있는 시간을 필연적으로 갖게 된다. 아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어른도 아닌 희한한 존재가 가진 본질적인 두려움 때문에. 영화의 후반부에서 다른 학생들은 사복을 입지만, 남라는 여전히 교복 차림이라는 것에서도 이 차이를 잘 느낄 수 있다.
이 복잡한 존재들이 겪어야만 하는 현실 속에서도, 학생이라는 불완전한 생명체는 웃고 장난을 치며 무려 내일을 기약한다. 이 혼돈 속에서도 간직하고 있는 그들의 변하지 않은 정체성에 괜히 미안하고 고마울 뿐이다.
과연 좀비만이 무서울까.;방관자들이 큰소리치는 현실
영화는 많은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그것도 너무 가깝고 생생한 "지금"이라는 현실을 말이다. 점점 영화와 현실의 구분이 되어가지 않는 지금을 살고 있음이 이 작품을 통해서도 느껴진다.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는 헛소리를 침착하고 밝게 내뱉는 안내방송이나, 현재의 상황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데에만 급급한 높으신 분들, 왕따 피해자 학생들에게도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선생님들.
사실 학생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방관자에 가깝고, 이 방관자들의 헛소리 덕에 좀비 사태는 좀 더 빠르고 심각하게 퍼져나간다. 그 와중에 방관자들이 예측한 이 일의 심각성마저도 과소평가된 것이 문제를 더 악화시킨다.
마치 좀비라는 이름으로 대변되는 모든 사회적인 문제들이 심각해지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담고 있는 것만 같다. 좀비는 폭탄으로 끝낼 수 라도 있는 존재였겠지만. 방관자들의 의식 깊숙한 곳에 박혀 있는 이런 태도들은 효성시를 다 날려 버리는 것만으로는 모자랄 것이다.
마치 영화 [돈 룩업]이 보여준 것처럼, 최후의 1인마저 모두 좀비가 되어야만이 가능할지도 모르는 문제일 것이다. 죽은 자와 좀비 모두 그때가 되면 모두 말이 없을 것이기에.
마치면서
사실 [지우학]은 거슬리는 점 또한 꽤나 많은 영화이다.
선정성(을 암시하는 장면의 삽입)이나 폭력성 면에서도 그러하지만 시즌제를 염두에 둔 결말도 아쉽다. 6화를 넘어서면서 급격히 긴장감이 떨어지거나 형사 역을 맡은 이규형 배우의 뜬금없는 인류애도 완벽히 이해하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이 [지우학]의 다음 시즌을 기다리는 이유 중 하나는 이런 단점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장점을 더욱 잘 살렸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뭐니 뭐니 해도 다시 한번 박사 학위 있는 사람은 건드리면 안 된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 작품이었다(?)
[이 글의 TMI]
언제부터인가 식상하고 기본적이며 때론 인사치레처럼 여겨지던 모든 문장들을 달리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 안에 있는 진심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건강하라.
돈 아껴 써라.
자기를 먼저 챙겨라.
등등의 말에 무게가 실린다는 말은 그 말들에 대해 생각해 볼 계기가 많이 생기는 삶의 터전 속에서 내가 살고 있다는 뜻일 테니까.
내 글을 읽는 모든 사람들의 나이가 다르고 현재 상황이 다르겠지만. 내가 말하는 이 문장들의 단 하나의 단어 만이라도 그들의 마음에 있는 저울에 좀 더 진중한 무게를 올릴 수 있기를.
2022년 올해는 몸과 마음이 다치지 않는 선에서 이루고자 하시는 모든 일이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은 더 순조롭게 완료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결과보다는 과정 안에서 더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늘 감사합니다.
#지금우리학교는 #넷플릭스 #지우학 #영화추천 #넷플릭스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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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회로 최대치에 담겨있는 비밀
엑. 배가 왜 이렇게 아프지? 분명히 알약 네 알을 빼먹지 않았음에도 탈이 났다. 컨디션이 안 좋은 날인가? 그럼에도 책 읽기 게임하기 공부하기는 포기할 수 없어서 이 변명을 나 자신도 듣지 않을게 뻔하지만 오늘은 뭔가 이상했다. 버스를 탔는데, 갑자기 또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다행히 목적지와 집이 그렇게 멀지 않아서 금방 도착했다. 제주의 원도심 어느 곳에 내린 나. 근처 지하상가에 들어가 화장실을 찾는다. 자주 온 곳이라 어딘지 위치도 외워버렸다. 공중화장실에서 변기 커버를 아무거나 잡고 올렸다.
악! 비명을 질렀다. 누가 변기 물을 안 내렸다. 후다닥 질끈 눈을 감고 물을 내렸다. 그리고 바로 옆의 화장실에 들어갔다. 아악! 이 깔끔한 공중화장실 변기 한가운데에 휴지 몇 장이 둥둥 떠다닌다(그냥 휴지만 있었다). 오늘 운수가 왜 이래? 우연 치고는 뭔가 재수 옴 붙은 느낌이다. 근데 또 억울한 게 변기 물이 고장 났냐? 그건 또 아니다. 쭉쭉 잘 내려갔다. 다른 변기도 후다닥 물 내리고 약을 꺼내 먹은 다음 아픈 복통을 처리했다. 그렇게 지하상가를 나와 나의 대장은 왜 이따위인가? 자조하다 갑자기 느닷없이 '이 우연이 참 웃기기도 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병 때문에 화장실에 갔는데 그 변기 두 개가 물 안 내린 채로 있었다. 근데 그 변기 하나엔 어떤 못된 인간이 휴지만 둥둥 떠다니게 만들었다. 금세 나는 그런 적이 없었을까? 반추해본다. 다행히 내가 기억하는 선에서는 그랬던 적이 없다. 하지만 마음 한 편에서 '이런 우연도 벌어졌는데 다른 재미있는 일도 일어나면 안 될까?'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에잉. 이 무료한 사회복무요원 생활을 빨리 지나 우연같이 만난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생각했다. 누구는 차 운전 열심히 하던 때 세 명의 여자들은 각기 다른 우연에 맞이했다. <드라이브 마이 카>와 같이 제작됐었다는 하마구치 류스케의 신작 <우연과 상상>이다.
우연을 상상해서 만든 이야기
메이코는 모델이다. 사진 촬영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 집으로 가는 택시에서 동료 사진작가 츠쿠미와 남자 이야기를 하게 된다. 츠쿠미가 만난 남자는 나름의 매력이 있었다. 이야기가 잘 통해서 수다 만으로도 밤을 새웠다고 한다. 츠쿠미는 그 남자를 마법 같은 일로 기억하고 있다. 그렇게 잘 맞는 남자를 만날 수 있다는 게 신기했던 츠쿠미. 그렇게 메이코에게 자랑 아닌 자랑을 늘어놓았다. 근데 메이코의 반응은 영 탐탁지 않다. 혹시? 츠쿠미가 말하는 남자의 특성을 조합하면, 메이코의 전 남자 친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충분했다. 생각에 잠긴 메이코. 메이코의 전 남자 친구가 있는 사무실로 길을 돌린다.
사사키는 대학생이다. 그리고 그와 비밀스러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나오다. 사사키는 대학 교수 세가와가 진행하는 수업에 열심히 참여하는 학생이 아니었다. 세가와가 꼴 보기 싫었던 사사키. 유사 여자 친구였던 나오를 구슬려 세가와에게 망신을 주려고 한다. 나오는 사사키의 부탁을 거절했다가, 세가와 교수의 저서가 상을 받았던 것을 보고 한번 찾아가기로 마음을 먹는다. 나오는 사사키의 부탁대로 세가와 교수를 유혹을 시도하는데,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가 일어나게 된다.
중년의 여성 나츠코. 10대 때까지 사랑했던 연인을 찾기 위해 동창회에 참석한다. 그런데 그녀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아쉬운 나츠코. 속상한 마음을 뒤로하고 집으로 가는 기차역으로 향한다. 그때, 옛사랑과 비슷한 사람을 발견했다. 다시 달려가는 나츠코. 그 사람도 왠지 나츠코를 아는 것 같은 느낌이다. 나츠코는 확신에 찬다. 행인의 집으로 향하는 나츠코. 나츠코는 그곳에서 우연이 만든 기막힌 사실을 맞이하게 된다.
우연히 만나 상상하기
영화는 세 편의 우연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우연은 '내 친구가 어제 썸탄 남자가 내 전남친'이라는 우연이다. 두 번째 우연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변수였다. 세 번째 우연은 내 옛사랑을 길 지나가다 만났다는 우연이다. 영화는 세 가지 에피소드를 병렬로 배치시켜 우연의 속성에 탐구한다. 영화는 세 우연에 앞서 상상하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상상을 통해서 인물의 내면을 관찰하는 것이 영화의 주요 소재다.
잠깐 생각을 해 보면, '우연'이 뭘까? 인생은 거의 대부분 필연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우연이 일어나기 어렵다. 우연은 그러니까 상상과도 비슷한 맥락이다. 내가 지금 당장 이 카페에서 벗어나 만원을 주울 확률은 거의 상상력에 가깝다. 세상 사람들 모두 다 만원 돈이 아깝기 때문에 지갑에 넣고 다닌다. 그리고 또 요즘은 xx페이가 잘 되어 있어서 현찰 갖고 다니는 사람도 얼마 못 본 것 같다. 이 필연의 가능성이 하나, 둘 모여 우연을 없애버린다. 잠깐 상상했던 나의 우연이었다. 그런데 난 이 우연을 기다리고 있다. 또 이 우연을 맞이하면 대충 어떤 행동을 할 것 같은지도 예상이 간다. 사실 간단하다. 내가 이 우연을 상상했던 이유는 방금 초코라떼 하나를 주문하고 싶었는데 돈이 없어 못 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가 원하는 상상은 나에게 있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우선이었다. 역시 마찬가지로 인물들이 맞이하는 우연은 본연이 갖고 있는 욕망에 근거해서 벌어진다. 우연처럼 벌어진 일에 어떻게 행동할지 모를 것 같지만 그 진단에는 '나'라는 인물이 거진 다 스포일러를 하고 있다. 전남친과의 재회에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 교수를 만나서 들었던 이야기, 바라던 옛사랑과의 조우까지 이 우연을 대비하는 인물들의 태도는 내면에 갖고 있는 구멍과도 상충한다. 그리고 정확히 그 구멍의 크기만큼 인물이 행동한다. 영화는 이 인물이 갖고 있는 공허함과 미련을 우연이라는 상황을 접목시켜 가감 없이 드러낸다.
또 하마구치 류스케 월드
6개월 만에 돌아온 하마구치 류스케의 신작이다. 작년 <해피 아워>와 <드라이브 마이 카>가 국내에서 개봉했을 때가 생각난다. 전자는 후에 왓챠를 통해 봤고 후자는 극장에서 두 번 봤다. <드라이브 마이 카>가 주는 마력은 어마어마했다. 천천히 쌓아 올려 도착한 엔딩에 긴 여운이 남았다. 그리고 내 인생영화로 등극했다. 이는 비단 나에게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많은 분들의 인생영화가 된 두 작품.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지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음에도 우리나라 관객들에게 사랑을 받은 이유는 분명하다. 지루하지 않게 사람의 내면을 묘사하는 능력 때문이다. 이 하마구치 류스케가 가진 강점은 이 세 편의 옴니버스 영화에서도 잘 드러난다.
특히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 내면 묘사가 탁월하게 드러난다. 나츠코가 만난, 그러니까 행인에 해당하는 인물이 에피소드 3의 후반부에서 같은 장소를 와다다 달리는 신이 있다. 또 나츠코가 행인의 집에서 만나 하는 대화들을 잘 보면 글 쓰는 사람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자기 언어에 기반한 문장'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이 대사의 톤이 보편적인 톤으로 일관되면 연극 같은 느낌이 강할 것이다. 근데 하마구치 류스케 영화에서 말하는 대사들은 배우 고유가 갖고 있는 언어와 톤으로 전하는 형식이라 극이 갖고 있는 개성과 흡인력이 뛰어나다. 이는 실제로 <드라이브 마이 카>의 가후쿠가 대본 리딩을 한 방식(자주 대본 리딩 읽기)이 실제 하마구치 류스케가 쓰는 방법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사소한 부분 하나하나에 의도를 부여해서 연출자로서의 시그니쳐를 새긴 것이다.
근데 손님은 홍상수
이 영화에는 손님이 한 명 있다. 바로 홍상수다. 지금 당장 구글에 '하마구치 류스케 홍상수'라고 검색하면 작년 10월에 하마구치 류스케가 '나는 홍 감독의 팬'이라고 말한 부분이 있다. 영화의 형식이나 내용이 홍상수를 베꼈다(근데 그렇게 마음먹어도 못 베낄 듯..)는건 당연히 아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살짝 홍상수의 영화를 하마구치 류스케가 자기 식대로 소화한 느낌이 든다.
우선 자기화의 근거로는 '대화'를 사용한 방식이 떠오른다. 사건이 공개되기 전의 홍상수는 인간 존재에 대해 조롱하는 듯한 느낌이 강했다. 그리고 그 사건이 공개되고 난 후는 외로움이라는 정서가 영화를 이끄는 듯했다. 하마구치 류스케가 자기화시킨 부분은 전자다. 특히 <옥희의 영화> 생각이 난다. 우선 <우연과 상상>과 <옥희의 영화>의 차이점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일단 <옥희의 영화>에 '우연'이란 키워드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옴니버스 영화지만 주인공 역을 맡은 배우들이 같은 사람이 아니다(이선균, 정유미). <옥희의 영화>를 다시 보지 않아도 생각나는 차이점 키워드는 두 개다. 이는 하마구치 류스케가 뇌를 빼고 홍상수의 영화를 갖고 오지 않았다는 의미와 닿아있기도 하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해피 아워> <아사코>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타인과 나의 관계를 통해 바라보는 자아'를 중심으로 극본을 써온 사람이다. '인간의 욕망을 통해 웃긴 인간의 내면을 묘사한다'는, 전반기 홍상수의 영화적 테크닉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는 셈이다. 실제로 이를 보여주듯 '마음의 구멍'을 위시한 인간 내면 치유의 대사가 <우연과 상상> 곳곳에서 들린다는 것은 그 근거가 된다고 생각한다. 욕망의 발현이 아닌 하마구치 류스케의 방법론 제시라는 점에서 탁월한 연출력이 돋보이는 셈이다. 또한 주연 배우가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옥희의 영화>에서 주연 배우들은 다 똑같다. 근데 모두 같은 역할을 맡았는지는 모르는 일이다. 홍상수 감독님이 이 글을 읽고 '그냥 돈 없어서 그렇게 섭외했는데 히히'라고 하면 딱히 할 말 없을 것 같다. 그러나 글쓴이가 느끼기엔 네 편의 이야기가 한 가지 키워드로 읽히는 게 싫었던 것 같다. 영화의 구조보다 인물들이 공통적으로 느꼈던 정서, 그 정서를 공유하는 시간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으로 해석한다. 비슷한 이야기들을 묶어 네 에피소드의 공감대를 하나로 묶고 싶었던 것이다. 이 <우연과 상상>은 세 에피소드의 배우들이 다 다르다. 이러면 단편영화 세 편을 보는 듯한 느낌이 그대로 전해진다. 각기 다른 우연과 입장 차이지만 그 나름대로의 사연을 통해 웃기기도 하고 슬퍼지기도 하는 게 관객이 되는 셈이다. 당연히 뭐가 더 낫고 구리다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런데 하마구치 류스케는 적어도 홍상수가 그동안 갖고 있었던 전개 방식과는 다른 형식을 택한 건 확실한 셈이다.
그리고 이와 반대로 홍상수 영화에서 썼던 연출법이 곳곳에 보이기도 한다. 일단 배경음악을 잘 들어보면 홍상수의 감성이다. 음악의 ㅇ자도 모르는 나. 그냥 '클래식 비슷한 것'으로 홍상수의 OST를 기억하고 있다. 근데 또 이 홍상수란 사람의 취향이 일관돼서 일상 속의 상황에 튀지도 그렇지도 않은 음악들을 넣어 왠지 모르게 웃긴 느낌이다. 이 <우연과 상상>에서도 이런 연출 방식이 나타난다.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가후쿠와 다카츠키가 대화하는 신, 눈 묘지 앞에서 가후쿠와 미사키가 대화하는 신에서 조용한 배경으로 대사만 나왔던 것과 대비된다. 또 홍상수 특유의 매가리 없는 클로즈업이 영화에 제시된다. 뭐 클로즈업 기법 쓰는 거야 감독 맘이지만 각각의 쓰는 타이밍은 홍상수가 썼던 형식을 빌려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이 외에도 19금 코드를 사용한 것, 반복과 차이를 활용한 방법까지 우리나라의 영화 팬이라면 왠지 모르게 드는 기시감이 놀라울 것이다.
베를린의 이유 있는 선택
이 영화는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이에 이유를 증명하듯 영화에 마법을 부린 것 같다. 전부 다 일어날 가능성이 적은 우연인데, 왠지 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근데 그게 영화 보는 이유 아니겠어? 이미 벌어진 일이 아님에도 그 이야기에 귀 기울여 듣는 것. 또 그게 내 이야기일지도 모른다고 믿는 것. 우연 같은 좋은 이야기를 만나 행복한 미래를 상상하는 것이야 말로 사람에게 있어 영화의 역할일지도 모른다. 다들 알 거라 생각한다. 사람 사는 이야기 다 똑같다. 그런데 이 영화는 비슷한 궤를 향하는 것 같지만 좀 더 창의적이고 개성이 있다. 일본의 풍경과 감성이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녹아든 사랑스러운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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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월 셋째 주 극장 개봉 & 예정작 ?
"내 청춘은 모두 너와 연결되어 있어" 상견니를 좋아했던 분이라면 봐야할 우견니 , 완성도 높은극장판으로 호평을 얻고 있는 <귀멸의 칼날: 인연의 기적, 그리고 합동 강화 훈련으로> 까지, 이번주 개봉작 같이 만나보아요
우견니
Almost Love
ⓒ 네이버영화
개요: 멜로/로맨스 | 중국 | 110분
감독: 루오루오
출연: 서약함, 이문한 등
개봉: 2024.02.14.
배급: 오드 AUD
시놉시스
“내 청춘은 모두 너와 연결되어 있어” 친구들에게 놀림당하지만 늘 햇살처럼 밝은 ‘자오양’. 무뚝뚝한 엘리트 전학생 ‘저우찬’. 극과 극인 두 사람은 함께 꿈을 키워 나가며 점차 가까워지고, 단 한 번뿐인 서로의 청춘에 밝은 빛이 되어준다. “너는 내게 온 별이야” 가장 빛나는 시기에 만난 두 사람. 그렇게 시작된 너와 나의 빈틈없이 찬란한 인생 첫 로맨스!
CINE PICK!
‘너를 만나’라는 뜻의 <우견니>는 가장 빛나던 시기에 만난 두 청춘 남녀의 사랑의 이야기를 그립니다.
중국판 ‘프로듀스 101’의 첫 시즌 1위를 차지한 가장 핫한 가수이자 배우 이문한 배우와 성룡에게 발탁돼 연예계에 입문한 서약함 배우가 만나 잊고있던 첫사랑의 기억을 소환, 찬란한 청춘의 로맨스를 전할 예정입니다.
귀멸의 칼날: 인연의 기적, 그리고 합동 강화 훈련으로
Demon Slayer: Kimetsu No Yaiba - To the Hashira Training
ⓒ 네이버영화
개요: 애니메이션 | 일본 | 103분
감독: 소토자키 하루오
출연: -
개봉: 2024.02.14.
배급: CJ CGV
시놉시스
‘탄지로’와 상현 4 ‘한텐구’의 목숨을 건 혈투와, ‘무잔’과의 최종 국면을 앞둔 귀살대원들의 마지막 훈련을 그린 영화
CINE PICK!
2020년대 일본사회를 강타한 메가 히트작, 만화를 넘어 일본 대중문화를 통틀어 손꼽히는 인기를 선도하고 있는 <귀멸의 칼날>. 고퀄리티의 오리지널 장면들과 귀멸의 칼날 특유의 아련한 OST로 호평을 얻고있습니다.
DMZ 동물 특공대
ⓒ 네이버영화
개요: 애니메이션 | 한국 | 75분
감독: 홍인표
출연: -
개봉: 2024.02.14.
배급: 박수엔터테인먼트
시놉시스
“뭐? 인간들이 화해하면 우리 집이 사라진다고?!” 지구상에 단 하나뿐인 공간 DMZ에 살고 있는 ‘담비’와 귀요미 친구들에게 들려온 날벼락 같은 소문! 동물들의 유토피아 DMZ를 지키기 위해선 폭탄을 터뜨려 인간들의 평화를 막아야만 한다! ‘담비’, ‘쾡이’, ‘멧돼이먼’, ‘황박이’, ‘람쥐’까지 DMZ 동물 특공대 출동 준비 완료! 우리 집은 우리가 지킨다!
CINE PICK!
동물들의 유토피아를 지키기위해 족제비, 다람쥐, 박쥐, 맷돼지, 살쾡이 등 각기 다른 매력을 가진 동물 특공대의 활약과 이들의 목소리를 연기한 주연 성우진들에는 핑크퐁 극장판에 참여했던 인물들이 참여를 하며 기대를 불러모으고 있습니다.
에스파: 마이 퍼스트 페이지
aespa: MY First page
ⓒ 네이버영화
개요: 공연실황, 다큐멘터리 | 한국 | 110분
감독: 김지선, 조현정
출연: 에스파
개봉: 2024.02.14.
배급: 롯데컬처웍스㈜롯시플, ㈜영화사 그램
시놉시스
2020년 데뷔 이후 ‘블랙 맘바’, ‘넥스트 레벨’, ‘세비지, ‘걸스’ 등 매 앨범마다 전 세계적인 메가 히트를 기록하며 눈부신 성장을 이뤄낸 그룹 ‘에스파’. 그들의 새로운 음악 세계와 독보적인 공연 실황은 물론, 지금껏 공개되지 않은 멤버 4인의 진솔한 인터뷰, 2023 첫 단독 콘서트 ‘SYNK : HYPER LINE’의 백스테이지 비하인드까지. ‘에스파’의 찬란한 꿈의 기록. 그 첫 페이지가 스크린에서 펼쳐진다!
CINE PICK!
4세대 걸그룹의 시초격 그룹 중 하나로, aespa를 본격적으로 메이저 걸그룹으로 끌어올린 Next Level의 히트는 걸그룹 암흑기를 깨고 2020년대 초반 걸그룹 최전성기를 시작한 사건이기도 합니다. ‘에스파’의 찬란한 꿈의 기록. 그 첫 페이지가 스크린에서 펼쳐진다!
이렇게 극장 개봉 영화, 총 네 편의 영화를 소개해 드렸는데 어떠셨나요?
그럼 남은 한 주도 건강하게 보내시길 바라며, 지금까지 씨네랩 에디터 Amy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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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벨 퍼만의 최고를 향한 강박와 광기, 그리고 집착
쿠엔틴 타란티노의 ‘헤이트풀8’, 제임스 완의 ‘컨저링 2’, 마이클 베이의 ‘트랜스포머: 사라진 시대’, ‘잭 스나이더의 저스티스 리그’와 87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음향믹싱상을 포함해 3관왕을 기록한 ‘위플래쉬’까지 40여 편의 사운드 에디터로 참여하며 빛나는 필모그래피를 쌓아온 로런 해더웨이 감독의 첫 장편 영화 더 노비스 리뷰입니다. 대학 시절 조정 선수로 활동한 자신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연출, 각본, 편집까지 도맡아 스포츠의 매력을 기본으로,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극한의 상황들을 감각적인 촬영과 스타일리시한 음악 등의 다양한 요소를 활용해 표현합니다. 의도였겠지만, 성공과 우승의 과정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전달하는 기존의 스포츠 장르와는 달리, 완벽이라는 자학적 세상에 빠져버린 한 인간의 집착과 광기에 집중해 섬찟한 스릴러 느낌을 충실히 전달합니다. 살짝 어긋나는 부분도 존재하지만, 기존의 틀을 파괴하는 감각적이고 독창적인 신선함과 패기에 다음이 너무 기대되는 작품이었습니다. 아마 ‘블랙스완’을 좋아하신다면 재미있게 보시리라 생각되네요.
※ 최대한 자제하였으나 일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 부탁드립니다.
# 더 노비스 정보
난 수재가 아니라 노력파야
가장 못하는 과목인 물리학을 전공으로 택할 만큼 늘 최고를 갈망하는 웰링턴 대학 신입생 알렉스는 교내 조정부에 가입한 후 동급생이자, 체육 특기생으로 들어온 제이미에게 경쟁심을 느낍니다. 이미 고등학생 때부터 농구, 배구 등 학교 대표팀을 해왔던 제이미에 비하면 체력이나 자질 면에서 부족한 것이 확실한 상황, 그럼에도 알렉스는 조정부 1군에 들기 위해 피나는 훈련을 거듭하고, 스스로를 극한으로 내몰기 시작하죠. 그리고 강박에 가까운 심리적 압박과 한계에 다다른 육체를 넘어서려는 그의 행동들은 주변 부원들로부터 서서히 자신을 소외시키는 발단이 되어가는데...
예고편│ Trailer
원제 : THE NOVICE│감독·각본 : 로런 해더웨이│출연진 : 이사벨 퍼만, 에이미 포사이스, 딜론 외 多│장르 : 드라마, 스포츠, 스릴러│상영 시간 : 97분│개봉일 : 2022년 5월 25일│국가 : 미국│등급 : 15세 관람가│평점 : 기자·평론가 5.67, 로튼 토마토 신선도 93% 팝콘 74%, IMDB 6.5, 메타 스코어 85점│수상 내역 : 20회 트라이베카 필름 페스티벌(촬영상, 최우수여우주연상, 최우수장편영화상)│수입·배급 : 영화사 진진│시청 가능 서비스 : 현재 극장 상영 중
영상, 음향, 오리지널 스코어까지.. 현란합니다
# 더 노비스, 무엇 좋을까요?
주목받는 신예 제작진들의 조합
애플, 구글, 페이스북, 나이키, 보그 등 세계 최고 브랜드의 광고와 제이 지, 이기 팝, 라디오헤드, 제이 콜 등 유명 아티스트들의 뮤직비디오를 작업해온 촬영 감독 토드 마틴은 알렉스에게 초점을 맞춘 클로즈업과 접사, 강 위의 풍경과 함께 이어지는 롱샷 등 다양한 방법과 각도로 스타일리시한 영상을 보여주고 중심이 되는 캐릭터가 처한 극한의 상황과 심리를 효과적으로 보여줍니다. 더불어 조정이라는 스포츠의 호흡을 전달하는 빠른 시퀀스 편집은 극의 몰입과 긴장감을 배가시키죠. 여기에 입봉작이긴 하나 이미 화려한 이력을 자랑하는 로런 해더웨이의 능력이 빛을 발하며 보편적인 틀을 깨부순 획기적인 음악으로 역동성과 독창성을 부여합니다. 60년대 빈티지 팝을 사용해 조정에 빠져버린 알렉스를 표현하고 이후 광기와 집착에 빠져 주변 사람들에게 소외당하고 스스로 파묻혀가는 숨 막히는 완벽주의를 ‘페어웰’ OST의 알렉스 웨스턴이 맡아 고전 클래식의 섬세한 현악으로 이어가죠. 떠오르는 신예들이 뭉친 현란한 영상미와 독창적인 사운드가 부여하는 몰입감은 가장 큰 장점 중 하나일 것입니다.
강렬하다는 말로 부족할 만큼의 연기 고작 97년생...
이사벨 퍼만, 무섭도록 몰입한 연기
그리고 무섭도록 완벽주의에 매몰되어 있는 알렉스를 연기한 이사벨 퍼만의 소름 돋는 연기는 인간적인 야망으로 가득 찬 캐릭터에 빛을 불어넣습니다. 졸업까지 전액 장학생이라는 사실에도 가장 자신 없기에 물리학을 전공하고, 모든 시험을 세 번이나 풀며, 빈약한 체력 조건에도 조정부 경쟁자들의 기록을 하나 둘 깨부수며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 하죠. ‘오펀: 천사의 비밀’에서부터 남다른 떡잎을 보여줘서 어쩌면 당연한 결과겠지만, 한편으로는 그 모습이 너무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인물로 그려져 그런 행동에 대한 연민이나 동요보다는 1등에 사로잡혀있는 정체성 따윈 없는 좀비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맹목적으로 자기만족에 대한 광기 어린 집착과 강박은 음성이 파열되고 찢어지는 듯한 청각적 효과와 현실과 상상이 교차하는 예사롭지 않은 영상들이 가세해 더욱 인물에 빠져들게 만듭니다. 그리고 결말에 이르러 자신의 상처와 웃음을 보이며 퇴장하는 뒷모습이 묘한 여운을 남겨주니 주인공의 완벽함만큼이나 연기 또한 물샐틈없었다는 게 확실하죠.
넌 네가 잘하는 것만 계속하는 게 문제야
초보자라는 뜻의 원제처럼 그것이 단순히 대학 조정부의 이름이나 운동 경기에 한정되어 있다고 느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드라마가 끝을 향할수록 오늘날 우리들이 겪는 성취와 만족감, 이를 이루지 못했을 때 연결되는 삶과 죽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죠. 성공적인 미래와 행복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극한의 육체적, 정신적 한계에 미쳐가는 상태를 빗대어 점점 심해져 가는 이기주의와 빈익빈 부익부의 경제 구조를 느슨하게 연결한 것처럼 말입니다. 주인공처럼 정상이 아니면 아무 의미도, 어떤 관심도 받지 못한다는 완벽주의적 삶의 가치관, 무조건 1등을 해야 되는 세상이 낳은 폐해의 흔적이 아닐까 싶어집니다. 그래서 기록을 깨고 자기 자신을 이겼음에 웃으며 떠나는 모습이 더 쓸쓸하게 다가오는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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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메이트가 전하는 특별한 마법? 김환희X유선X이순재 전 세대 마음 울릴 호연! [안녕하세요] 메인 예고편 대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