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BBITGUMI2025-05-14 14:19:01
바이러스처럼 스며들고, 사라지는 사랑
– 영화 <바이러스>(2025)
사랑은 언제 오는 걸까. 사랑은 어떤 방식으로 왔다가 가는 걸까.그건 정말 ‘온다’고 말할 수 있는 종류의 감정일까. 우린 이 감정이 어떤 식으로 찾아오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이 없어져 버린 순간, 어딘가에서 사라져버린 사랑이 왜 그렇게 가버렸는지도 알지 못한다. 어쩌면 사랑은 그렇게 조용히 우리 안에 들어왔다가, 어느 날 낯선 표정으로 우리를 갑자기 떠나가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그게 사랑이었다는 걸 우리는 항상, 너무 늦은 이후에야 알게 된다.
이 영화는 그런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의학적 의미의 바이러스와 인간이 느끼는 감정을 바이러스처럼 겹쳐 놓는다. 한 사람의 감정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이었을까, 그리고 그것은 진짜였을까? 진짜였다면, 그게 진짜라는 걸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영화 <바이러스>는 그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우리가 느끼는 모든 감정은 결국 다 지나가지만, 다 지나갔다는 걸 먼저 아는 쪽이 더 외로워진다. 더 외로워지는 사람이 사랑의 바이러스의 희생자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 사랑은 올 때도, 갈 때도 질문을 던진다.
[첫 번째 감정] 택선의 우울
택선(배두나)은 꽤나 부정적이고 우울한 사람이었다. 사랑 바이러스 감염 이전의 그녀는 무표정하고 삶의 의지가 전혀 없어 보였다. 모든 것이 귀찮은 듯한 그 모습은 마치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하다. 회의적이고, 냉소적이며, 따뜻한 말을 건네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사람. 누군가가 그녀에게 “괜찮아?” 하고 물어도, 선뜻 대답할 수 없는, 어딘가 무너져 있는 표정의 택선은 생기가 없는 사람이었다. 세상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건 이제 없다고 믿는 사람만이 가지는 눈빛이 있었다.
번역가로 생계를 이어가는 그녀는 주로 컴퓨터 앞에 앉아 일을 한다. 건조한 일상을 보내던 중, 동생이 주선한 소개팅 자리에 나간 그녀의 얼굴은 처음부터 짜증으로 가득하다. 소개팅에 늦었지만 사과조차 없는 남자, 수필(손석구)에게 전혀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그녀는 빨리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그리고 이내 일 때문에 먼저 자리를 뜨고, 자신의 우산까지 가져가버린 별종을 바라보며 더 큰 우울감에 빠진다. 원래 우울함을 가지고 있던 택선은 수필을 만나도 오히려 우울이 증폭되어 버린다.
전반부에 등장하는 택선에게는 사랑 따윈 없을 것만 같았다. 영화는 행복 바이러스를 연구하는 수필이 자신이 만든 바이러스에 감염되면서 택선에게 사랑을 고백하게 되는 설정을 따른다. 이후 수필은 택선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 감정은 어느새 그녀에게도 전염된다. 그렇게 택선은 강제적으로 ‘행복’ 혹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된다. 택선이 느낀 건 정말 바이러스 때문만이었을까. 아니면 택선의 마음속에 원래 자리하고 있던 몽글몽글한 감정이 튀어나온 것일까.
[두 번째 감정] 택선의 사랑
그녀는 감염되고 나서도 처음엔 자신이 달라졌다는 걸 몰랐다. 하지만 택선의 얼굴은 붉어졌고, 시선은 부드러워졌다. 스스로는 알지 못한 채, 행복과 사랑이라는 감정을 온몸으로 티내기 시작했다. 치사율 100%의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는 사실은 머리로는 이해되었지만, 몸은 자꾸만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다. 긍정적인 생각이 쉴 새 없이 올라오고, 왠지 모든 게 다 잘될 거라는 희망이 그녀를 이끌었다.
택선이 경험했던 모든 감정이야말로, 그게 진짜 사랑이었다는 증거 아닐까.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바이러스의 치료제를 만들 수 있는 이균 박사(김윤석)와 가까워지며 그녀는 다시 사랑에 빠진다. 이균은 그것이 감염 때문이라고 단정하며 택선을 밀어내지만, 서로를 향한 호감은 부정할 수 없다. 이 영화가 재난 영화의 공식을 따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후반부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바이러스보다 두 사람의 감정 변화다. 이 사랑이 진짜인지, 아니면 병적인 착각인지, 우리는 끊임없이 의심하면서도 응원하게 된다.
그건 진짜 사랑이었을까? 아니면 감염된 신경전달물질의 결과였을까?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밝은 모습으로 웃던 택선의 얼굴이 잊히지 않는다. 온전히 긍정의 세계에 몸을 맡기던 택선. 그 모습은 정말 행복해 보였다. 아마도 그게 진짜 택선의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 우울했던 택선이나, 공허했던 택선보다 더 자신을 드러내고, 타인에게 다가가려 했던 그 모습이 가장 택선답게 느껴지니까.
[세 번째 감정] 택선의 공허함
치료가 끝났을 때, 그녀의 표정은 무표정이었다. 아니, 무표정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감정 자체가 사라진 얼굴이었다. 그것은 이상하게도, 처음보다 더 고요하고 더 슬펐다. 감정이 없어졌다는 것은, 감정이 있었다는 걸 기억하지 못한다는 뜻일 수도 있다. 그 모습은 이별을 하고 얼마간 시간이 지난 사람의 얼굴과 닮아 있었다. 약간의 외로움과 공허함이 공존하는 시간. 택선은 잠시나마 사랑을 느끼게 해줬던 수필을 추모하며, 그가 있던 장소를 다시 찾는다.
그곳에서 이균 박사를 다시 만난 택선은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는다. 이균 박사는 조용히 되묻는다. “정말 감정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요?” 그 질문은 그녀가 대답하지 않아도 되는 말이었다. 택선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표정이 살짝 달라진다. 조금 밝아진 그 표정은 관객의 머릿속에 오래 남는다. 아마도 택선은 자신이 느꼈던 사랑의 감정을 다시 떠올렸던 게 아닐까.
공허는 사랑보다 더 오래 남는다. 무언가를 격렬히 사랑하고, 그 감정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단순한 허무가 아니다. 그것은 감정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견디는 일, 그 자체다. 이 영화는 마지막 순간까지 택선의 감정을 쉽게 단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 애틋하다.
6년 동안 창고에 있던 영화, 빛을 보다
<바이러스>는 장르적으로 정의하기 애매한 영화다. 예고편을 보고 기대했던 감정적 파국은 초반 10분에서 정점을 찍고, 이후에는 한없이 조용하고 모호한 분위기가 이어진다. 로맨스도 아니고, 재난도 아니며, 스릴러도 되지 않는다. 어쩌면 6년간 창고에 잠들어 있었던 이유가 그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배두나만큼은 이 역할을 정확히 이해한 듯하다. 사랑에 빠진 얼굴이 너무도 사랑스럽다가도, 금세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눈빛으로 돌아간다. 그녀의 연기가 아니었다면 이 영화는 끝까지 버티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김윤석은 묵직하게 감정을 던지는 역할을 맡았고, 장기하는 첫 연기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안정적인 연기를 보여준다. 손석구는 짧은 출연이지만 분명한 인상을 남긴다.
강이관 감독은 차갑고 낯선 정서를 아주 천천히 펼쳐 보인다. 하지만 이 영화는 아쉽게도 그 정서를 끝까지 관객에게 전이시키지 못한다. 감정은 있고, 질문도 있지만, 답이 없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는 그게 미지근함이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깊은 여운이 될지도 모른다.
영화는 묻는다. 사랑이란 감정은 단지 호르몬의 장난일 뿐일까? 전체 이야기를 다 보고 나면, 사랑은 단지 호르몬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감정은 생화학적인 반응에서 출발할 수는 있다. 도파민, 옥시토신, 세로토닌 같은 물질들이 감정의 방향을 잠시 바꾸긴 한다. 하지만 그 감정을 받아들이고, 이어가고, 견디는 건 결국 사람의 마음이다. 감염이 만들어낸 사랑이었다 해도, 그 안에 진심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사랑은 ‘계산’이 아니라 ‘반응’이기 때문이다. 택선이 웃고, 두근거리고, 외로워했던 시간들은 모두 그녀가 만들어낸 것들이다. 그건 진짜였다. 단지 시작이 바이러스였을 뿐. 감정이란 건 그렇게 만들어진다. 원인을 따져 물어선 결코 닿을 수 없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방식으로. 영화가 던지는 사랑에 대한 질문이 궁금하다면, 지금 극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2gV4P7Oz35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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