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2025-05-29 14:02:11
형식을 박차고 나오는 메시지
영화 [씨너스;죄인들] 리뷰
이 글은 영화 [씨너스;죄인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분명, 등장인물들 뒤에는 얼음처럼 시원한 맥주와 와인 같은 매력적인 이야기보따리들이 가득 쌓여 있다. 어쩌면 상상하는 것보다 그 실체는 초라하거나 소소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까치발을 들고 목을 쭈욱 뽑아서 사방팔방 고개를 틀어가며 보아야 겨우 보이는 그 이야기들의 끄트머리 덕에, 더욱더 애가 타서 발을 동동 굴러본다. 그렇게라도 해서 그들이 감춰놓은 이야기들을 들여다보고 싶어서.
인물들이 가진 이야기를 이토록 들어보고 싶었던 적이 없었건만, 참으로 불친절하기 짝이 없게도 영화는 이 모든 것을 대놓고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어깨너머 들은 풍문처럼, 그들의 인생이 가진 언덕과 절벽을 슬그머니 암시하게 할 뿐.
화면 양쪽 가득 끝없이 뻗은 목화밭이 자신들의 뒤로 스쳐 지나가도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달리는 차에 몸을 실은 채 현실을 외면하고 있는 것처럼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인물들을 보면서. 눈에 가득 들어차는 화면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면서도 아주 작은 응어리가 마음 한편에 쌓이는 것 같은 불쾌함을 느낄 때 즈음. 이 작품은 모든 것을 털어낼 법한 소통의 방법을 끄집어낸다.
입 밖으로 꺼내어 말하지는 못했지만. 영화의 중심부에 흐르던 차별과 그로 인한 울분은 흑인들의 이념과 정신이 가득 담긴 블루스로 주크 조인트를 가득 메우다 못해 터져 나간다. 진심과 현실을 담아 노래를 부르는 그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해방감을 주었지만, 동시에 살려달라는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아 묘한 감정이 마음을 가득 메웠다. 이 밤이 지나면 다시 현실로 돌아가야 함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는 자들의 부르짖음을 들으며, 영화가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에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참석한 사람들에게 그날의 밤은 파티였을지도 모르지만. 파티에 초대받지 못한 나의 입장에서는(모르는데 어떻게 가요) 그들이 보내는 뜨거운 그 시간이 마치 굿판처럼 보였다. 들을 사람이 있어야 하지만 또 동시에 있어서는 안 되는. 호객은 했지만(?) 금지되어 있어서 더 강렬하게 느껴지던 그 파티는 결국 가장 뜨거운 지점에 다다랐을 때 여지없이 혼(사탄)을 불러내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렇게 나타난 뱀파이어(혹은 사탄)가 세력을 늘려가는 순서도 참 흥미로웠다. 불시착한 사탄이 가장 먼저 자신의 편으로 만든 것이 인종차별주의자 백인인 것에서도. 그리고 유색인종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인 다음에야 수세에 몰린 흑인들을 마지막으로 습격(?) 한 것도. 마치 자신의 세계에 끌어들이는 순서를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주요 인물들이 클럽에 갇힌 형태로 영화가 끝을 향해 달려간다는 점 또한 이 상태에 처한 현실 속의 그들이 느꼈을 공포를 표현하는 것 같아 한결 더 서늘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또 나의 상상력은 변주를 틀었다. 분명 시공간을 초월한 존재의 등장이라 했지만. 어쩐지 내 눈에는 인물들 스스로가 가진 죄, 혹은 죄책감들이 육신의 형태를 쓴 채 나타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바로 마음만 먹으면 클럽을 박살을 낼 수 있을 것만 같은 뱀파이어들이 아직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들을 향해 "허락"을 구한다는 점이었다.
마치 다 놓고 죄를 저질러 버리면 그것이 인종의 문제이건 성별의 문제이건. 혹은 이해관계의 문제이건 평등한 하나(한통속이라 부르는 게 더 맞을 것 같다)가 되지만. 스스로가 그래 이 문지방을 넘겠어.라는 마음이 없다면 절대 같은 죄인이 되어 킬킬거리며 조롱의 노래를 부를 수 없는 것처럼. 죄악의 유혹들 앞에서 무릎을 꿇겠느냐.라는 물음에 스스로의 의지가 죄악들에게는 장애물이, 스스로에게는 마지막 믿음의 항목으로 남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끝까지 사람으로 존재한 채 뱀파이어의 습격에서 살아남은 두 사람은, 상반된 선택을 한다. 스모크(마이클 B조던)는 복수를. 그리고 새미(마일즈 케이턴)는 진실된 삶을 위한 먼 여행을.
어쩌면 이 둘의 끝은 그날 밤의 끝자락에 이미 결정되었을 것만 같았다. 결국 스모크는 자신의 분신이자 전부였던 스택을 죽이지 못했고. 마음속에 남아 있던 분노도 함께 끊어내지 못한 채 자신의 목숨과 함께 총알을 모조리 KKK를 옹호하는 백인들의 육체에 박아 넣었으니까. 그러나 그의 울분이 느껴지는 총질 앞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스모크가 새미의 삶을 위해 마련해 둔 마지막 장치 덕에. 새미는 얼굴과 마음 가득 남은 상처를 가지고도 이제 자신의 남은 여생이 그날 밤에 생긴 상처만큼이나 희미하게 남았을 무렵까지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앞에 다시 한번 사탄들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비로소 새미는 깨달았을 것이다. 자신이 여태 연주했던 음악들은 모두 진혼곡이었음을. 그리고 그저 복수로만 생각했을 스모크의 그 행동도 결국은 상실을 위로하는 다른 형태의 표현이었다는 것도. 우리 모두의 삶도 어쩌면 그런 상처를 달래며 살고 있다는 것도.
형식을 찢고 비죽비죽 모습을 드러내는 메시지를 삼키느라. 쿠키 영상속에 등장하는 어린 새미의 노랫소리가 유독 더 공허하고 슬프게만 들렸다.
[이 글의 TMI]
1. 인간적으로 델리만쥬는 영화관에 들고 오지 말자. 부럽잖아(?)
2. 영화 시간이 너무 애매해서 놓칠 뻔 했다 정말.ㅠ
#씨너스죄인들 #라이언쿠글러 #마이클B조던 #헤일리스테인펠드 #잭오코넬 #헐리우드영화 #공포장르 #영화추천 #최신영화 #영화리뷰어 #영화해석 #결말해석 #영화감상평 #개봉영화 #영화보고글쓰기 #Munalogi #브런치작가 #네이버영화인플루언서 #내일은파란안경 #메가박스 #영화꼰대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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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전 명작 영화 모음.zip
안녕하세요! 씨네랩입니다.
오늘은 1900년대에 개봉한 고전 명작 영화를 소개해볼까 하는데요.
몇십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관객들의 마음 속에 남아있는 영화
총 디섯 편을 추천드릴까 합니다.
그럼, 지금부터 씨네랩이 추천하는 고전 명작 영화 모음집!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٩( ᐛ )و
12명의 성난 사람들
ⓒ 네이버 영화
synopsis
18세 소년이 자신의 친아버지를 잔인하게 살해한다. 법정은 12명의 배심원에게 만장일치로
소년의 유무죄를 가려 달라 요청하고, 배심원 8만이 유일하게 소년의 무죄를 주장하며 사건을
되짚어본다.
cine pick!
미국영화연구소(AFI)가 선정한 역대 법정 드라마 2위에 오른 <12명의 성난 사람들>이자,
제 7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 황금곰상 수상작, 제30회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 감독상,
각색상 후보작이다.
로마의 휴일
ⓒ 네이버 영화
synopsis
앤 공주는 왕실의 지루한 행사에 지쳐 몰래 거리로 뛰쳐나간다. 길거리에서 잠이 든 공주는
우연히 신문 기자 조와 만나고, 특종을 노린 조는 공주를 따라 로마 거리를 누비기 시작한다.
cine pick!
로맨스 코미디의 고전으로 유명한 <로마의 휴일>은 미국영화연구소(AFI) 선정한 역사상 최고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 4위에 올라서기도 하였다. 흑백 영화지만 컬러 영화처럼 다채로운 색을
보여준 영화이다.
택시 드라이버
ⓒ 네이버 영화
synopsis
사회악과 부조리를 욕하며, 일상에 적응하지 못 하는 택시운전사 트래비스. 그는 우연히
12살의 어린 성매매 여성 아이리스를 만나고 그녀를 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다.
cine pick!
베트남 전쟁 종전 직후의 미국을 배경으로 한 영화 <택시 드라이버>는 퇴역 군인의 방황과
혼란을 담아냈다. 영화는 제29회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으며,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최고작으로 꼽히는 명작 중 하나이다.
작은 아씨들
ⓒ 네이버 영화
synopsis
마치 가의 네 자매 메그, 조, 베스, 에이미는 어머니와 함께 고된 겨울 생활을 꾸려나가면서
남북전쟁에 참전 중인 아버지의 안전을 기원하고 주위의 어려운 사람들까지 돕는다.
cine pick!
당시 호화로운 캐스팅으로 화제를 모았던 1994년 작품 <작은 아씨들>은 원작의 스토리를
최대한 반영하여 제작하였다. 특히 영화의 OST가 당시 호평을 많이 얻었다.
카사블랑카
ⓒ 네이버 영화
synopsis
2차 대전으로 어수선한 프랑스령 모로코, 미국인인 릭은 암시장과 도박이 판치는 카사블랑카에서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어느 날 미국으로 가기 위해 비자를 기다리는 피난민들 틈에 섞여
레지스탕스 리더인 라즐로와 아내 일리자 릭의 카페를 찾는다. 라즐로는 릭에게 미국으로 갈 수
있는 통행증을 부탁하지만 아직도 일리자를 잊지 못하는 릭은 선뜻 라즐로의 청을 들어주지
못한다. 경찰서장 르노와 독일군 소령 스트라세는 라즐로를 쫓아 릭의 카페를 찾고, 결국
릭은 라즐로와 함께 일리자를 떠나보내는데...
cine pick!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카사블랑카를 배경으로 한 <카사블랑카>는 1943년 아카데미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색상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 받은 작품이다.
씨네랩 에디터 Hiz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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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흩어진 마음에 더 이상 차가운 비가 내리지 않도록 펼치는 우산
어두운 밤, 비가 내리고 어떤 여자의 뒷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그는 베이비 박스가 아닌 그 앞에 아기를 놓고 사라지고 이를 지켜봤던 수진이 아이를 베이비 박스 안에 넣어둔다. 베이비 박스 안에 들어온 아기를 확인하던 상현과 동수가 아기를 몰래 데려가고, 다음 날에 엄마인 소영이 아기를 찾으러 돌아온다. 아기가 사라진 것을 안 소영이 경찰에 신고하려 하지만 그들의 내막을 알게 된 소영이 그들을 따라나선다. 계속 열리는 트렁크, 세차하면서 열리는 문으로 인해 축축하지만 따뜻한 햇볕과 시원한 바람 덕에 금방 마르는 옷은 지금과는 조금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끼얹는다. 하지만 우성이의 새 부모를 찾아준다는 명목하에 이루어진 상습적 영아 납치와 인신매매는 어두운 만큼 긍정적이지는 않다.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은 떳떳하지 않은 이들에게 적중한다.
아이를 낳자마자 모성애가 생기는 것이 아닌 것처럼 아이를 키우는 일을 혼자서는 쉽게 할 수 없다. “아이 하나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라는 말처럼 아이를 키우는 일이 모두 개인의 책임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 공동체의 노력과 책임을 통해 이루어진다. 가족이 아닌 사람들이 모여 “태어나줘서 고마워.”라는 말을 가족이 건네는 것처럼 건넨다. 작위적인 대사들과 직접 개입함에도 명확하지 않은 의미들이 극명한 불호를 만들어 내지만 아이를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써 활용되는 ‘박스’의 활용이 영화의 의미를 조심스레 매듭짓는 듯하다.
미화시키지 않기 위해서 누군가의 사정을 드러내지 않은 걸까? 베이비 박스에 대한 여러 시선이 충돌하지만 그를 바로 잡는 정답은 나오지 않는다. 베이비 박스에 대한 존치 여부에 대해서도 정확히 다루는 것 같지도 않다. 의문을 품은 채, 이 복잡한 여정 속에서 드러나는 인물들은 서로 다른 가치관으로 한 가족이 되어간다. 책임감 있으면서도 무책임한 모순을 펼치며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는 이들에게서 왠지 <어느 가족>이 겹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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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카> - ‘걱정을 뒤로하고 가고 싶은 곳으로 발을 내디뎌!’
루카 (Luca)
개봉일 : 2021.06.17 (한국 기준)
감독 :엔리코 카사로사
출연 : 제이콥 트렘블레이, 잭 딜런 그레이저, 엠마 버만
걱정을 뒤로하고 가고 싶은 곳으로 발을 내디뎌!
픽사의 새로운 영화 <루카>가 싱그러운 이탈리아의 여름을 들고 찾아왔다. 분명히 이 영화관으로 이동하는 내내 내 팔은 강한 햇빛에 따갑다고 소리를 질렀는데 영화 속 여름은 너무도 싱그럽고 활력이 넘쳐서 또다시 여름에 대한 기억 조작을 한판 당하고 나왔다. 톡톡 튀는 귀여운 주인공들과 평화로운 항구 마을, 넘치는 가족애와 아이의 호기심, 그리고 차별 없는 부드러운 시선으로 가득찬 루카와 친구들의 여름이 그 어느 여름 하늘보다 맑게 빛났다.
“수면 근처엔 얼씬도 하지 마!” 엄마가 호기심 많은 아들 루카를 다그친다. 바다와 육지로 나뉜 세상. 바다와 육지에 사는 생물들은 서로를 바다괴물과 육지 괴물이라고 부른다. 조업을 하는 사람들은 이 바다에선 바다괴물이 나온다고 말하며 꼬리를 가진 바다괴물의 실루엣을 보자마자 무섭고 흉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 바다괴물의 정체는 루카와 가족들, 간단하게 말하자면 루카의 종족들이다. 바닷속에 사는 그들은 육지에 나가면 비늘이 사라지고 육지에 사는 사람들과 같은 모습으로 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하지만 물에 닿아 비늘이 솟아나는 순간 바다괴물이라 인식되며 배척을 받고, 심하면 사냥의 대상이 된다.
어느 날 호기심 많은 소년 루카는 배에서 떨어진 육지 사람들의 물건을 보게 된다. 알람시계, 카드, 유리잔, 축음기. 처음 보는 물건들은 루카의 육지에 대한 궁금증을 증폭시킨다. 또 엄마가 안된다 하지 마라 가까이 가면 안된다. 라고 말하면 더 궁금해지는 게 아이의 심리가 아닌가. 루카는 육지 사람들에 대해 잘 안다는 알베르토의 감언이설에 이끌려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 두려움을 떨쳐내고 육지에 올라가는데 성공한다.
원래 육지에 살던 존재가 아닌 바다 괴물, 또는 다른 생물, 별종으로 취급되는 루카와 알베르토, 그리고 마을에서 만난 첫 번째 친구 줄리아. 루카와 알베르토는 줄리아를 통해 자전거 타는 법, 파스타 먹는 법, 하늘을 보는 법 등을 배우고 줄리아는 항상 혼자 참여했던 대회의 든든한 지원군을 얻게 된다. 밝은 햇볕이 내리쬐는 여름, 세 친구는 각자가 바라던 더 큰 세상으로의 여행, 목표를 위해 노력한다. 루카와 알베르토가 육지로 나오고, 줄리아가 끝없이 대회에 출전하는 건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노력이자 누군가가 갖고 있는 편견에 대한 도전이었다.
줄리아는 루카와 알베르토가 어디서 왔는지,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 자전거를 잘 타는지, 포크질을 잘 하는지 같은 조건을 크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같은 목표가 있고, 자신과 비슷한 ‘별종’으로 불리는 루카와 알베르토를 자연스레 친구로 받아들였을 뿐이다. 이 순수한 우정을 보며 많은 걸 계량하고 나누던 나의 날카로운 시선을 반성하게 되었고, 씩씩하고 밝은 아이들의 모습에 크게 감동받은 순간이었다.
루카 시놉시스
이탈리아 리비에라의 아름다운 해변 마을, 바다 밖 세상이 궁금하지만, 두렵기도 한 호기심 많은 소년 '루카' 자칭 인간세상 전문가 ‘알베르토’와 함께 모험을 감행하지만, 물만 닿으면 바다 괴물로 변신하는 비밀 때문에 아슬아슬하기만 하다. 새로운 친구 ‘줄리아’와 함께 젤라또와 파스타를 실컷 먹고 스쿠터 여행을 꿈꾸는 여름은 그저 즐겁기만 한데… 과연 이들은 언제까지 비밀을 감출 수 있을까? 함께라서 행복한 여름, 우리들의 잊지 못할 모험이 시작된다!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살렌치오 브루노!
루카는 육지 세상이 궁금하지만 물 위로 올라가는 걸 두려워한다. 밖에는 어떤 것이 있을지, 사람들이 자신을 해하진 않을지... 온갖 궁금증과 걱정이 뒤섞이고 있을 때, 잠수복을 입은 자칭 육지 전문가 알베르토를 만나게 된다. 알베르토는 고민하고 있는 루카를 망설임 없이 물 위로 올려치고 루카에게 걷는 법을 알려준다.
가고 싶은 곳으로 발을 내딛고, 쓰러지기 전에 다른 발을 내디뎌!
알베르토의 응원과 코치 덕분에 루카는 육지에 빠르게 적응하게 된다. 하늘, 구름, 태양, 중력, 공기, 사람들의 물건으로 가득한 육지. 모든 게 새롭고 즐겁다. 지금껏 접하지 못한 세상은 두려움보다는 새롭고 궁금한 것으로 가득하다. 물에서 나와 해변 땅을 밟으니 하늘에 보이는 것이 궁금해지고, 육지 괴물이라 칭하는 육지 사람들의 생활이 궁금해진다. 특히 육지 사람들이 만든 ‘베스파’는 알베르토와 루카에게 더 큰 세상에 대한 꿈을 갖게 만든다.
알베르토는 베스파를 타고 더 넓은 세상을 여행하자며 루카에게 함께 항구 마을로 가지 않겠냐고 묻는다. 루카는 한 번도 접해본 적 없는 ‘육지 괴물’들의 마을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지만 베스파를 갖고 싶은 마음과 호기심에 알베르토의 제안을 수락한다.
“머릿속 브루노를 물리쳐야 해!”, “살렌치오, 브루노!”
처음으로 가본 육지 사람들의 마을엔 두려운 것이 가득했다. 바다괴물 또는 바다 생물들을 잡는 그림이 그려진 벽, 바다괴물을 사냥한다는 줄리아의 아빠. 모르는 물건들 투성이인 가게들. 그리고 혹여나 물이 닿아 피부가 변하지 않을까, 사람들이 나를 공격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새로 만난 세상과 새로운 도전 앞에서 루카가 작은 두려움을 느낄 때마다 알베르토는 이렇게 말한다. “머릿속 브루노를 물리쳐야해!”, “살렌치오, 브루노!”.
알베르토는 루카의 머릿속엔 걱정을 하게 만드는 존재 ‘브루노’가 있다고 말한다. 자전거를 타고 하늘로 날아오를 때, 가파른 내리막을 내려가야 할 때, 항구 마을로 모험을 떠날 때 등등. 루카는 여러 순간에 고민과 갈등을 반복하고 알베르토는 그 모든 걸 깨야 새로운 세상으로의 모험을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루카는 알베르토의 말에 “살렌치오, 브루노!”를 외치며 더 힘차게 페달을 밟는다.
내가 원하는 건 학교에 가는 거야.
새로운 육지 세상, 새로운 친구 줄리아, 높은 하늘에서 빛나고 있는 수많은 별들. 루카는 엄마가 항상 위험하다고만 말했던 육지에 나와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되고 줄리아처럼 학교에 가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된다. 깊은 바다에서 그냥 생각만 하면서 사는 심해어 큰 아빠 같은 삶이 아닌 더 넓은 곳으로 나아가 더 많은 걸 배우고 싶다는 꿈. 근데, 육지 사람들이 ‘바다괴물 루카’를 받아줄까? 알베르토와 루카는 루카의 새로운 꿈을 중심에 두고 갈등을 일으킨다.
육지에서 알베르토와 루카, 줄리아는 별종이다. 평범한 사람이 아닌 바다괴물인 알베르토와 루카, 그리고 이 마을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평가받는 줄리아. 루카의 부모님은 루카가 별종으로 취급받는 육지에 올라가지 않길 바라고 알베르토는 루카가 학교에 갈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줄리아의 아빠는 매번 경기에 홀로 출전하는 줄리아를 걱정한다. 아이의 꿈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디선가 별종으로 취급받고 배척당할지도 모르는 환경에 놓이지 않을까 싶어 걱정스러웠던 게 아닐까.
루카와 알베르토, 줄리아는 어른들의 걱정 어린 시선을 뒤로하고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경기에서 우승해 나도 이 마을에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다는 줄리아와 나도 육지 사람들과 다르지 않음을, 더 큰 세상을 여행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다는 루카와 알베르토. 아이들을 만류하던 부모님들은 어느새 아이들의 꿈을 인정하고 힘을 실어준다. 루카의 엄마는 다른 아이들 사이에 섞여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루카를 멍하니 보며 “엄청 빠르다”라고 말하고 아이들이 우승을 했을 때 누구보다 자랑스럽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인다. 줄리아의 아빠는 줄리아의 부탁에 경기 참여 비용을 마련해 주고 파스타 먹기 연습을 위해 여러 파스타를 준비해 준다. 그리고 루카와 알베르토를 바다 괴물이 아닌 줄리아의 친구, 자신의 새로운 아이로 받아들인다.
제가 잘 알죠. 이 아이들은 루카, 알베르토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바다 괴물이라 칭하는 존재들을 잘 모르고 있었음에도 바다에 산다는 이유로, 비늘을 가졌다는 이유로 괴물이라 말하고 배척해야 하는 존재로 생각한다. 그들이 큰 해를 끼치거나 잘못한 일이 없음에도 우리와 모습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다른게 아닌 틀린, 없애야 하는 존재라고 인식한다. 육지와 바다의 명확한 선은 바다 사람들을 더 깊은 바닷속으로 숨게 만들었으며 육지와 바다의 사이를 더 멀게 만들었다.
루카와 알베르토, 줄리아는 그 진한 선을 뛰어넘고 친구가 되어 함께 손을 잡고 결승선을 통과한다. 그 모습은 구석에 숨어있던 바다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었고, 용기를 내 드러낸 바다 사람들의 진짜 모습은 육지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육지, 바다 사람들은 드디어 편견 없이 서로의 진짜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잘못된 존재가 아닌 조금 다른 존재임을 받아들인다.
“거긴 위험한 곳이야”, “너는 달라서 받아주지 않을 거야.” 같은 편견, 미리 집어먹은 걱정과 고민 앞에서 주저앉기보다 같은 꿈을 가진 친구의 손을 잡고 달려가는 아이들의 모습이 큰 감동으로 다가왔던 영화 <루카>. 더운 여름날, 특히 흰 구름이 하늘 가득 떠있는 날 이 영화를 보게 된다면 틀림없이 지금보다 한 뼘쯤 더 행복해질 거라 말하고 싶다.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새로운 세상으로의 도전을 앞두고 고민과 갈등, 두려움이 가득한 사람이라면 이 영화가 분명 힘이 될 것이다. 머리에 가득 찬 두려움을, 브루노를 떨치고 새로운 꿈을 꾸자. “살렌치오, 브루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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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협화음이 간간히 들린 채로 광폭하게 '파묘'
LA에 사는 '그냥 부자'
이 영화의 주인공은 무당 화림(김고은)이다. 비행기 안. 화림은 누구에게 향하고 있다. 누구? 바로 클라이언트다. 화림에게 일을 의뢰한 사람이 현재 미국에 살고 있기 때문에 직접 만나러 간다. 외국인으로 바글바글한 비행기. 지금 당장 '내가 어디 사람인가요?'라고 물으면 사람들 다 대답 못할 것 같았다. 아무튼 의뢰인의 집에 도착한 화림. 고객은 미국에 사는 한국계 남자 박지용(김재철)이었다. 박지용이 가진 문제는 간단했다. 아이가 아픈데 원인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이유가 뭘까. 찾아보는 화림. 화림은 몇 번 아이를 들여다보더니 '묫자리가 잘못됐다'라는 결론을 내린다. "한국에 묫자리 있죠? 그 묫자리에 들어가 있는 분 중 하나가 자기 너무 힘들다고 꺼내달라는 거예요. 그거 옮기죠."라고 말하는 화림. 고객 박지용은 당황한다. 하지만 곧 "그렇게 하기로 하죠"라며 가족과 이야기한다. 파묘를 결정한 박지용. 그렇다고 해서 뭐 OK가 나와도 혼자서 이 일을 할 수는 없다. 아는 아저씨 둘을 부르는 화림. 그 아저씨 둘은 한국 최고의 장의사 중 하나 영근(유해진)과 업계의 베테랑 풍수지리사 상덕(최민식)이다. 친구이자 동료인 봉길(이도현)과 함께 네 명은 지용의 가족과 관련이 있는 비밀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하지만 주인공 4명과 지용은 몰랐다. 파헤쳐서 나온 것이 보지 말았어야 했던 험한 것이라는 걸.
오컬트 외길인생
이 영화는 개봉 전부터 굉장한 관심을 받았다. 그 이유는 이 영화를 만든 장재현 감독이 오컬트라는 장르를 깊게 팠기 때문이다. 한국은 오컬트 불모지와도 같기 때문에 이런 외길 인생은 높게 평가받을 만 하다. 장재현 감독이 이 장르를 깊게 팠다는 의미는 이 오컬트 영화에서 중요한 것들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의미기도 하다. 장재현 감독은 전작 <사바하>에서 이 승부수들을 나름 잘 갖췄다. 장르에 대한 이해도를 보여준 것이다. 가령 영화에서 박 목사(이정재)가 추적하는 사이비 종교의 실체를 좇아갈 때 그 과정을 철저하게 만들어 놓은 장재현 감독의 주도면밀함은 <사바하>의 강점이다. 이 주도면밀함이 오컬트/호러라는 장르영화로의 특성으로만 이뤄지지 않았다. <사바하>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있는데, 이 핵심과도 이어지면서 영화가 던지는 질문이 와닿지 않을 수는 있어도 이야기가 날림으로 만들었다고는 보기 어렵다. 이 <파묘>에서도 같은 강점이 그대로 이어진다. 이 영화에서 ‘묘를 파헤친다’라는 디테일과 오컬트라는 장르적인 특성은 안성맞춤이다. 혹시 이 글을 읽는 여러분 중에 ‘묘를 파헤친다’라는 경험이 있는 사람? 글쓴이는 20여 년을 살면서 처음 본다. 이 자체가 일반적으로 볼 수 없어 기괴하다. 죽은 사람을 파헤친다? 이는 곧 유령, 귀신과 친구가 될 수도 있다는 의미다. 소재가 오컬트 향을 풍기기에 충분한 것이다. 근데 이 오컬트라는 장르적인 특성과도 가까이 있나? 그거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 <파묘>는 무덤을 파헤친다라는 모티브를 영화 곳곳에 새겨놓는다. 영화 내내 강조되는 질문이 파묘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염두하고 본다면 이야기의 팽팽함을 느끼실 수 있을 것 같다.
강력한 디테일
윗 문단의 연장선상에서 <파묘>가 유지한 디테일이 흥미롭다. 이 영화는 세 가지 직업이 핵심이다. 첫째는 풍수지리사, 둘째는 무당, 셋째는 장의사다. 이 캐릭터의 직업적인 특징이 이야기를 이끄는 하나의 원동력이 된다. 풍수지리사 상덕은 우리 현대인으로 치면 퇴임 5분 전의 인물이다. 그만큼 이력이 많이 쌓이면 그 나름의 경험이 있겠지? 영화 곳곳에서 이 경험치를 바탕으로 사건을 해석하는 상덕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무당 화림은 직업인으로서 가진 특징을 영화 안에서 모두 활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신선한 방식으로 표현된다. 당연히 무당은 하나의 인간이다. 이 무당의 인간미를 어떻게 표현할까? 아마 장재현 감독은 주변 지인의 이미지를 그대로 가져온 것 같다. 솔직히 무당이 아니라 마트 캐셔라고 해도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은 묘사였고 그 점이 신선했다. 장의사 영길 역시 인물 개인의 입체적인 특성이 풍수사 상덕과의 연대와도 이어진다. 앞에서 서술한 바를 종합하면 '<파묘>는 직업인의 영화?'라고 읽을 수 있다. 이것도 당연하지만 이 디테일은 다른 측면으로도 작동한다. 무엇으로? 바로 이 이야기의 핵심과도 이어진다. 파묘는 묘를 파헤친다는 의미이다. 왜 파해칠까? 이를 구체적으로 뭐다!라고 말하면 바로 스포일러와 직결되기 때문에 감상에 김이 새겠지? 다만 쓸 수 있는 건 영화의 첫 장면부터 이 영화는 모티브를 새겨 놓았다는 점이다.
이 외에도 장르적인 디테일도 눈에 들어온다. 글쓴이가 이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건 촬영과 조명, 그리고 시각화다. 우선 촬영에서 화면비를 일반적인 영화와는 다르게 설정했다. 이는 이 영화가 다루고자 하는 핵심 모티브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촬영의 형태로 구현한 듯하다. 가령 후반부 상덕과 관련된 장면들은 이를 그대로 반영한 연출이다. 또 영화가 조명을 이용해서 빛과 어둠을 통해 대상을 형상화한 방식도 흥미롭다. 전작 <사바하>가 진짜 있을 법한 소재들을 갖고 와서 장르적인 몰입감을 높인 것의 연장선상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장재현 감독이 진짜 힘을 줬을 것 같은 건 시각화다. 영화에서 시각화는 중요하다. 핵심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시각화를 짠하고 보여줘야 이야기에 몰입도가 커진다. 보통 이런 오컬트물이나 판타지요소가 들어간 영화에서 CG의 이질감이 영화의 몰입도를 깨는 경우가 종종 있다(작년 추석 빅 4가 생각난다). 장재현 감독이 여기에 분명히 힘을 준 것 같은데, 아마 할리우드의 일부 감독들이 만드는 방식을 가져온 것 같다. 디테일한 묘사가 영화의 원동력이 된 좋은 사례를 <파묘>에서 찾을 수 있다.
장르 이어 붙이기
이 <파묘>가 흥미로운 점은 이야기의 흐름이다. 이 영화를 호의적으로 해석한다면 이 이야기는 영화의 핵심을 플롯에 녹였다고 볼 수 있는 지점이 있다. 분명히 이 영화는 오컬트와 호러의 노선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장재현 감독의 영화에서 확연하게 다르게 느껴진다. 이 부분이 영화의 호/불호를 가를 구분선이 될 것 같다. 글쓴이는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장재현 감독이 왜 <파묘>로 전성기를 갱신했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쪽이지만 영화를 조금 좋아하시는 분들은 다 내 의견에 반대할 것 같다. 솔직히 이 불호평에 대해 어느 정도는 납득하는 부분도 있다. 왜 그럴까? <파묘>의 후반부를 좋다고 생각하는 글쓴이 마저도 이 영화의 흐름이 그렇게 깔끔하지 못하다고 보는 쪽이기 때문에 비판을 들어도 수긍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영화가 우리가 살아오며 경험한 여러 가지를 다룬다. 고등학교를 거쳐오며, 또 우리 일상생활을 둘러싸인 어떤 것에 대해 다룬다. <파묘>는 이야기의 모든 순간에서 '이 것'에 대해 코멘트한다. 무엇인지 어렴풋이라도 쓰는 것은 강력한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에 구체적인 묘사가 어렵다. 하지만 쓸 수 있는 것은 이것을 위해 이 영화가 구사해야 했던 준비물들이다. 바로 인물들이다. 이 영화 <파묘>는 마치 최동훈 감독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인물 간의 동기가 굉장히 중요하다. 이 영화가 세계관으로 보여주는 것을 인물의 동기로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저러한 일들을 이 인물이 이런 걸 원하니까 가능하네!'라고 이해시키는 것이다. 이 <파묘>의 약점은 여기에서 온다. 이 영화의 플롯은 인물들과 관련한 상황만 보여주지 감정이입할 틈을 잘 주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가령 이야기에서 주인공들간의 관계는 굉장히 중요하다. 하지만 이 부분이 뭔가 빈약하다. 다른 측면에서 이 충돌하는 영화의 장르들을 억지로 잇고 메꾼 탓에 감독의 과욕이 느껴지는 장면도 일부 있다. 이 두 부분을 '원래 그런 것 아닌가?'라고 받아들인다면 이 영화의 기획의도를 납득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관객들은 구멍이 숭숭 나 있는 감정선에 동의하지 않을 가능성도 농후하다.
대신 이야기를 빨아들이는 흡입력 하나는 근래에 봤던 영화 중 하나 중 압도적이다. 왜? 이야기가 쉽다. 이 영화 <파묘>는 모든 인물들의 동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는 1차원적으로 내레이션 깔고 전개하는 느낌이 아니라 두 인물의 입장을 서로 엇갈리면서 '여러 이야기를 통해 결정했다'는 식이다. '이럴 수도 있는가'를 차단하는 듯한 플롯이다(간혹 장르적 유사성 때문에 <곡성>과 비교할 수 있는데, 글쓴이는 이 '다 설명하는 간단한 플롯'이라는 점에서 비교하고 싶지 않다). 이렇게 플롯을 쉽게 가져가면 영화에 뭐가 좋을까? 주제를 명확하게 전달할 수 있다. 일거양득이 된 것이다. 이야기도 쉽게 전달하고, 하고자 하는 주제를 명확하게 구현했다.
4인 4색
이 영화의 중심을 이끄는 최민식, 김고은 배우는 단연 뛰어난 연기를 펼쳤다. 최민식 배우는 직업적으로 가지각색의 연기를 해왔다. 뭐 조폭 보스의 오른팔부터 복수를 꿈꾸는 남자, 탈북민 출신의 수학자, 부패 경찰관 등 우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여러 직업들이 있다. 풍수사라는 직업은 최민식의 필모그래피에서 단연 돋보이는데, 이 돋보이는 것을 섬세한 디테일까지 살리는 연기로 멋지게 소화한다. 글쓴이는 중후반부에 이 영화의 약점을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를 관객이 몰입할 수 있는 테크닉으로 소화하는 힘은 역시 한국 국가대표급 명배우의 힘이 십분 발휘됐다고 볼 수 있다(다만 살은 좀 빼셔야 할 것 같다). 또 김고은 배우는 이 영화의 플롯을 사실상 함축하는 연기를 보여준다. 이 <파묘>가 화림이라는 인물이 카리스마를 내뿜기에도 좋은 판이고 이야기의 핵심 사건을 이끄는 데 있어 중심이 된다. 화림이 이 영화에 갖는 이 두 특성 덕에 이 입체적인 인물에 관객이 이입하기 좋을 것이다. 상덕과 화림 옆에서 두 주인공을 이끄는 유해진,이도현 배우 역시 훌륭하다. 유해진 배우는 예고나 포스터만 보면 우리가 아는 유해진일 것 같지만 반대로 후반부에서 엇나갈 수도 있는 이야기의 흐름을 꽉 잡는 멋진 연기를 보여준다. 이도현 배우는 이 영화가 가진 미스터리를 꽉 쥔 채 관객들을 이끄는데, <더 글로리>의 주여정 역이 정말 추구해야 했던 지점이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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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빈의 방> - ‘긴 시간을 돌아, 가족이란 이름 아래 모인 작은 방’
마빈의 방 (Marvin's Room, 1996)
개봉일 : 1997.10.18 (한국 기준)
감독 : 제리 작스
출연 : 메릴 스트립,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다이안 키튼, 로버트 드 니로
‘긴 시간을 돌아, 가족이란 이름 아래 모인 작은 방’
나에게 남은 희망이 없다고 느껴질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누구인가? 중대한 결정을 앞두고 고민이 될 때, 가장 먼저 찾게 되는 사람은 누구인가? 이러한 질문을 받는다면, 우리는 무의식중에 가족 구성원을 이야기하게 된다. 좋든 싫든, 함께하는 시간이 행복하든 불행하든, 어찌 됐든 ‘가족’이란 선택할 수 없는 운명이자 가장 가깝고 진한 관계다.
<마빈의 방>은 불완전했던 가족이 어느 날 전해진 비보에 맞서며 한자리에 모이게 되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처음 이 영화의 포스터를 봤을 때, 난 당연하게도 포스터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는 레오의 이름이 마빈일 것이라 예상했고, 사춘기에 접어든 소년과 갈등하는 어머니의 관계를 그린 영화가 아닐까 생각했다. 이 추측은 4분의 1쯤만 맞았다. 큰 주제는 아니었지만, 소년과 어머니 사이의 갈등이 일부 그려져 있다는 것을 제외하곤 모두 내 예상 밖이었다. 마빈은 포스터에 등장하지 않는 자매의 아버지 이름이다. 왜 포스터에 있는 소년과 자매가 아닌 할아버지의 이름이 이 영화의 제목이 되었을까? 그 이유는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다.
일찍이 독립해 결혼을 하고, 아이 둘을 낳아 키우는 싱글맘 리는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아이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일에 매진하느라 고향 플로리다에 있는 가족들을 보살피지 못한다. 큰딸 베시는 장녀라는 책임감 때문인지, 아니면 먼저 자리를 박차고 나간 동생의 몫까지 자신이 해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여전히 집을 떠나지 못한 채 몸이 불편한 아버지와 고모를 모시고 있다. 정해진 시간마다 아버지에게 약을 먹이고 연약한 고모를 지키는 것. 내 인생 대신 그 두 사람에게 모든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 그게 베시가 해야 할 일이었다. 서로 성격도 목소리도 말투도 너무나 다른 두 자매는 각자의 자리에서 가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자매는 그렇게 20년을 살아왔다. 그 시간 동안 어느덧 자매는 중년의 나이가 됐고 리의 아들 행크는 18살 생일을 앞두고 있다. 자매의 현실은 여전히 이루지 못한 것 투성이었고, 행크는 떠나간 아빠만을 생각하며 점점 더 엄마를 미워하게 된다. 어느 것도 완전하게 자리 잡지 못했지만 시간은 자매의 사정을 봐주지 않았고, 끝내 새로운 비보마저 가져온다.
그다지 친하지 않은 자매, 몸 져 누운 아버지와 불편한 고모, 반항적인 아들. 당장이라도 뿔뿔이 흩어질 듯 진동하고 있던 가족은 베스의 비보를 전달받고 마빈의 방으로 모이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부터 새로운 가족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마빈의 방>의 러닝타임은 대략 100분 정도로 다른 영화들에 비해 살짝 짧은 편이다. 영화 자체의 흡입력도 한몫했겠지만, 개인적으론 영화가 조금 빠르게 끝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조금 더 길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있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이렇게 끝났기에 이 영화가 더 좋았던 걸까-싶기도 하다. 부드럽게 내 마음을 스치던 소년의 미소가, 서로를 마주 보며 눈물을 글썽이던 자매의 떨리던 눈가가 너무도 기쁘게 느껴졌던 시간이었다.
마빈의 방 시놉시스
미국 플로리다주. 백혈병에 걸려 곧 죽게 된 언니 베시가 20년 동안 헤어져있던 동생 리를 찾는다. 그녀와 같은 골수를 가진 혈육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편 오하이오주의 어느 초라한 미장원에서 헤어드레서의 꿈을 키우며 미용술을 배우고 있는 동생 리는, 마침 아들 행크가 지른 불 때문에 집이 다 타버리고 갈 곳이 없어 수녀원에서 더부살이를 하고 있던 중이다. 20년 만에 만난 두 자매. 아버지 마빈이 쓰러진 후 그에 대한 모든 책임을 언니에게 맡겨둔 채 자신의 삶을 찾아 멀리 떠나버린 사연이 있었기에, 두 자매의 만남에는 반가움보단 미움과 원망, 그리고 어색함이 흐른다.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가족이 있으시죠?”
고향집에서 홀로 아버지와 고모를 돌보던 베시에게 백혈병 진단이 내려진다. 닥터 월리는 베시에게 가족이 있냐고 물어보고 베시는 아버지와 고모가 있다고 말한다. 오하이오에 살고 있는 여동생 리와는 연락조차 잘 하지 않는 사이이기에 베시는 월리가 여동생이 있지 않았냐고 다시 묻고 나서야 여동생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누군가 물어봤을 때 바로 답할 정도는 아니지만 또다시 물으면 그때야 이야기하게 되는 사람. 형제라곤 단둘뿐이었지만, 베시와 리는 끈끈한 관계의 자매가 아니었다.
“행크에게 신경 써주세요.”
행크는 자신의 옛날 사진과 그때의 부모님 사진을 카펫에 펼쳐놓고 불을 붙인다. 행크는 여전히 떠나간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그를 잡지 않은 어머니 ‘리’를 원망하고 있다. 매일 일 때문에 바빴던 리는 행크를 챙기지 못했고, 부족한 관심과 일방적인 대화는 행크를 되바라진 길로 이끈다. 행크는 집에 불을 질렀다는 이유로 정신병원에 들어가게 되고 리는 그런 아들의 말썽에 지쳐간다. 행크가 잠들어 있던 오후, 리는 침대에 묶인 채 누워있는 행크의 가슴 쪽에 초콜릿 몇 알을 올려놓고 자리를 뜬다. 과연 손이 자유롭지 못한 행크가 그 초콜릿을 집어먹을 수 있었을까?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리는 그런 사소한 부분은 신경 쓰지 못하는 듯 보인다.
베시와 리는 20년 만에 고향집에서 다시 만난다. 리는 집에 도착하기 전 화장실 거울을 바라보며 용모를 점검하고, 언니를 위해 구매한 쿠키 한 통을 챙겨 차에서 내린다. 그녀는 치료 부작용으로 인해 가발을 썼을지도 모르는 언니를 위해 부분 가발을 뒤집어쓰는 배려심을 선보였지만 단 걸 먹지 못하는 언니의 몸 상태까지는 생각하지 못한듯하다. 리는 가족을 위해 나름의 최선을 다하지만 어딘가 부족한 모습을 보인다. 그녀는 아이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예의 없다는 소리를 듣지 않도록 과자 하나를 먹기 전에도 예절을 지키게 하고 흘리지 말고 먹으라며 잔소리를 한다. 리는 밖에 나가서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는 의도로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하는데 아이의 입장에선 그게 꽤나 강압적으로 느껴진다. 행크는 일방적인 엄마의 대화법에 질려 금세 자리를 뜬다.
대부분의 대화를 꾸중과 잔소리로 채우던 모자의 거리는 되돌리기 힘들 만큼 벌어진다. 베시는 처음 만나는 조카들이 반가워 지속적으로 말을 걸지만 행크는 쉽게 경계심을 거두지 않는다. “네가 꺼낸 거니?”라고 물으면 “갖다 놓을게요.”, “언제 나왔니?”라고 물으면 “들어갈까요?”라고 답하는 행크의 모습에서 그동안 행크와 리가 나눴던 대화의 뉘앙스가 어땠는지 대략 추측할 수 있었다. 행크는 계속 다정하게 다가오는 베시를 향해 “사람들이 잘해줄 땐 뭔가 바라는 게 있어서예요.”라고 말하며 베시의 골수 이식을 위한 검사를 하지 않겠다고 반항한다.
항상 자기밖에 모르는 엄마의 자매라니. 행크는 당연히 베시를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베시는 항상 행크의 결정을 존중했고 그의 말을 들어주었다. 평생을 궁금해했던 아버지의 존재를 말해주지 않던 리와는 다르게 베시는 단편적인 기억이라도 기꺼이 꺼내 행크에게 보여준다. 행크는 베시의 진심을 느끼고 마음속에 쳐놨던 두꺼운 선을 거둬낸다. 지금껏 그 누구도 행크에게 “왜 그런 행동을 하게 됐는지”에 대해 물어보는 사람은 없었다. 불을 냈으니 정신이 불안정한 것이라는 결론만 냈을 뿐 왜 카펫에서 사진을 태우게 되었는지 그때의 마음이 어땠는지에 대해 묻는 사람은 없었다. 베시는 유일하게 행크의 마음을 들어준 어른이었다. 행크는 계속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지만 그 누구도 들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행크는 거짓말을 시작하고, 올바르지 못한 행동까지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누군가가 행크의 말을, 담아뒀던 마음을 들어줬다면 행크가 이렇게 큰 사고를 치는 일은 없었을 텐데..싶어 안타깝기도 했다.
2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가족들은 서로에 대한 오해를 풀지 못하고 더 높이 쌓아간다. 두 자매는 각자의 자리에서 “나름의 최선을 다하며 가족을 보살폈다”고 말한다. 베시는 리를 대신해 두 어른을 보살폈다고, 리는 힘들었지만 꿋꿋하게 두 아이를 키워냈다고 말한다. 베시와 리는 자신이 어떤 사람을 사랑했는지, 어떤 일상을 보냈는지 공유하지 않는 ‘친하지 않은’ 사이로 지내왔기에 상대가 어떤 고충과 아픔을 겪어왔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리는 언니의 가발을 손질하며 베시는 동생이 손질해 준 가발을 쓰며 서로에 대해 생각하고 눈물을 보인다. 베시가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가발 벗은 모습을 리에게 보여준 순간 두 자매는 서로의 마음을 조금 더 가깝고 진실되게 바라보게 된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해.”
두 자매와 아이들은 마빈의 방에 모인 날부터 서로에 대해 새롭게 또는 다시 알아가게 된다. 리는 이제 행크에게 “바람이 세니, 행크?”라고 말을 걸며 행크의 의사를 물어보게 되었고, 베시는 짐이라고 생각했던 가족을 사실은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음을 다시 느끼게 된다.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생긴 행크는 더 이상 일탈을 하지 않게 되었고 이모 베시의 말대로 다른 꿈을 꾸기 시작한다. 할아버지가 썼던 공구가방을 물려받게 된 행크가 할아버지처럼 행복한 가정과 멋진 인생을 꾸려나갈 수 있었으면 한다.
할아버지가 낯선 아이들이 살짝 벌어진 틈 사이로 바라보기만 했던 마빈의 방. 이제 그 공간은 낯설거나 무서운 곳이 아닌 가족들이 다 함께 모이는 장소가 된다. 베시는 거울을 들고 햇빛을 반사시키며 방 곳곳에 밝은 빛을 떨어트린다. 그 빛은 리의 눈가에 고모의 어깨에 아이들의 손에 그리고 베시와 마빈의 마음속에 내려앉아 온 가족들을 밝혀주고 있다. 나는 이 가족의 앞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 함께했던 시간은 사라지지 않는 빛이 되어 그들의 앞날을 영원히 밝혀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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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걸스 오브 막시> 여성 영화의 자기 파괴적 발전
<걸스 오브 막시>
여성 영화의 자기 파괴적 발전
새로운 학년을 맞이한 '비비안(해들리 로빈슨)'은 절친인 '클라우디아(로런 차이)'와 등교 첫날부터 학기마다 여학생들을 품평하는 리스트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불쾌한 기분을 애써 떨쳐내려고 한다. 그런 그녀 앞에 전학생 '루시(알리시아 파스칼 페냐)'가 나타난다. 자신을 포함해 여자라면 일단 집적대는 미식 축구부 주장 '미첼(패트릭 슈왈제네거)'에게 명확히 거부의사를 표하는 루시. 그런 그녀를 보면서 비비안은 왜 여태까지 쌓이던 분노를 당당히 표현할 용기를 내지 못했는지 생각에 잠기고, 여성 운동을 펼쳤던 엄마의 과거를 알게 된 후 교내 여성 운동, '막시 Moxie(용기)'를 시작한다.
2010년대 중후반부터 할리우드는 물론 국내 영화계 주류를 강타한 트렌드가 있다. 바로 페미니즘이다. 여성 인권 향상의 기치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들은 <스타워즈>나 <터미네이터>처럼 오래된 프랜차이즈를 리모델링하고 <원더우먼>과 <캡틴 마블>처럼 영역을 넓혀가며 많은 관객들의 환호를 받았다. 언론사의 성 불평등을 고발하는 <밤쉘>, 능동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여성상을 조명한 <작은 아씨들>과 <벌새> 같은 작품들은 평단의 호평 속에 시상식을 휩쓸었다.
그러나 모든 빛에는 필연적으로 그림자가 따르듯이, 영화계의 새로운 방향성은 짙은 어둠을 만들기도 했다. 여성 인권을 이야기하지만 정작 그 여성에는 백인이나 중산층만 포함하며 여성이라는 범주 안에 존재하는 사회적, 경제적 차이를 무시하거나, 역으로 남성 차별을 정당화하는 작품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또한 메시지 전달 방식에 있어서는 페미니즘을 '영화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 <걸캅스>와 같은 몇몇 영화는 개연성이나 장르의 문법과 같은 최소한의 설득력을 갖추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페미니즘 철학을 전달하는 데 급급했다. 그 결과 여성 영화에 일방적으로 메시지를 전달 내지는 강제하는 프로파간다라는 이미지가 덧입혀지는 불상사가 발생하기도 했다.
제니퍼 마티유의 소설을 영상화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걸스 오브 막시>의 초중반부는 이러한 여성 영화의 부정적 전철을 착실히 뒤따라간다. 미국의 한 고등학교에서 발생한 여성 운동을 다루는 이 영화는 상당히 작위적이고 직접적인 연출로 화가 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유도한다. 예를 들어 교내 모든 여학생들에 대한 품평이 전체 메시지로 뿌려지고, 남학생들은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전학생 루시는 이유 없이 미첼로부터 조롱을 당하고, 이 문제를 알고도 교장은 무조건 사건을 덮으려고 애쓴다. 운동 장학생 선거를 앞두고서는 여성 후보인 '키에라(시드니 박)' 대신 미첼에게만 교내 방송 출연이 허가된다. 이러한 장면들은 개연성과 설득력을 갖추고 있는지에 대한 판단 이전에 무조건적으로 영화의 메시지에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장치다.
이에 더해 페미니즘에 동의하는지 여부를 도덕적인 선악의 범주로 치환시키며 영화의 메시지를 일방적으로 주입한다. 비비안이 막시 운동에 소극적인 클라우디아를 일방적으로 다그치는 장면이나, 미첼에게 독립적인 서사를 주는 대신 필요한 모든 악역을 떠안기는 연출이 대표적이다. 영화의 메시지에 동의하지 않으면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이고, 동의하면 도덕적으로 선하다는 이분법을 강요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연출은 결코 효과적이라고 할 수 없다. 왜 백인 중년 남성이 쓴 <위대한 개츠비>를 읽어야 하느냐는 루시의 질문이 그 사례다. 이 질문은 그녀의 의견에 설득력을 더하기보다는 소설의 사회적, 역사적 맥락을 젠더의 이분법으로 무리하게 치환한다는 비판을 낳으며 연출 상의 한계를 드러낸다.
등장인물들을 설정, 활용하는 방식 역시 인종 차별을 방패 삼아 페미니즘의 메시지와 전달 방식에 대한 비판을 도덕적으로 봉쇄하는 듯 보인다. 백인 남성 교사는 여성 운동을 지지한다는 표현을 하지 않지만, 비비안의 애인이자 동양계 남학생인 세스는 적극적으로 교내 여성 운동인 막시를 지지하며 대조를 이룬다. 운동 특기생 장학금을 두고 경쟁하는 미첼과 키에라의 구도, 가장 먼저 교내 성차별 이슈로 대립하는 루시와 교장의 구도가 모두 흑인과 백인으로 짜인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비비안 외에 막시를 주도하는 캐릭터의 다수는 유색인종으로 설정되어 있다. 따라서 <걸스 오브 막시>는 언뜻 보기에 일부 여성 영화들이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방식을 답습한다.
그러나 <걸스 오브 막시>는 멋진 반전을 선사하면서 점점 짙어지던 그림자를 단숨에 빛으로 전환시킨다. 절친인 비비안이 익명으로 팸플릿을 만들고 캠페인을 계획하며 막시 활동을 이끌고 있음을 눈치챈 클라우디아는 그녀를 돕기 위해 막시를 교내 단체로 정식 등록한다. 그러나 막시를 좌시할 수 없었던 교장은 클라우디아를 비비안 대신 정학시킨다. 소식을 뒤늦게 듣고 찾아온, 자신이 적극적으로 막시 운동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비난했던 비비안에게 클라우디아는 이렇게 말한다. "너는 백인이라서 내 입장을 몰라." 뒤이어 미국으로 이민 온 동양인의 입장에서 교육과 대학 진학은 미국에서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며, 따라서 학교에서 쫓겨날 각오를 하고 위험을 감수하는 것은 더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이 대화를 기점으로 비비안은 큰 충격을 받고 자신의 신념과 행동이 잘못되어 있었음을 반성한다. 본인이 옳다고 믿었던 일이 모두를 위하지는 못했다는 것을, 자신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누군가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배운다. 그리고 불의에 저항하는 일은 같은 여성이라 할지라도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방식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정작 익명 뒤에 숨은 자신이 가장 용기를 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래서 그녀는 익명을 벗고 사람들 앞에, 연단 위로 당당히 나서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최선을 다해 저항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공간을 열어준다.
그녀의 변화와 함께 영화의 스탠스도 180도로 달라진다. 앞서 보여줬던 일방적이고 고압적인 상황과 분위기 연출, 여성 운동은 무조건 옳다는 신념에는 제동이 걸린다. 인종과 젠더의 대립 구도도 허물어진다. 그 빈자리는 정체성에 관계없이 자신이 받은 차별에 함께 저항하는 연대의 정신이 자리 잡는다. 일부 여성 영화가 초래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답습하던 초반부 연출과 설정을 역이용한 결과 여성 운동과 미투 운동이 현실에서 보여줬던 영향력은 영화 내에서 성공적으로 재현된다.
사실 <걸스 오브 막시>가 반전을 선사할 것이라는 점은 오프닝에서부터 암시된다. 숲에서 쫓기다가 쓰러져 버린 비비안은 누군가에게 습격을 당하려는 찰나에 악몽에서 깨어난다. 이후 영화는 하이틴 영화의 클리셰를 충실히 재현하며 예상치 못한 오프닝을 잠시 잊게 만든다. 방학 동안 몰라보게 달라진 이성을 향한 호감과 관심, 운동부 주장과 치어리더 팀 주장 간의 연애와 같은 가십, 전학생의 등장과 그로 인한 기존 친구들과의 갈등, 주인공들의 인생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교사의 등장에 이르기까지 모범적인 하이틴 영화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비비안이 여성 운동과 시위를 펼쳤던 엄마의 과거를 알게 되고, 'Rebel Girl'이라는 노래를 들으며 막시를 만들기로 결심하는 대목에서 오프닝은 잊혔던 의미를 되찾는다. 꿈이 무의식의 통로라는 고려 하면, 숲에서 헤매는 비비안의 악몽은 모든 여성들이 직접적인 피해를 경험하지 않아도 공통된 불안함을 느끼다는 것, 그리고 그 악몽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묻어두고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한다고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클리셰처럼 평범하게 이어지는 일상의 이면에 항상 불안함이 숨어 있고, 이를 직시하고 고발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며 다소 갑작스럽다고 느껴지기도 하는 비비안의 변화에 설득력을 더한다. 이는 홀로 어두운 숲 속에 쓰러져 있던 비비안과 대낮의 밝은 학교에서 친구들 앞에 나서 목소리를 높이는 비비안의 모습이 멋진 대조를 이루는 이유다.
이처럼 <걸스 오브 막시>는 영화 앞 뒤로 예상을 벗어나는 모습을 보이면서 자신에게 쓰인 여성 영화의 부정적인 선입견으로부터 벗어난다. 여성 영화들의 잘못된 선례를 바로잡고, 자칫 일방적인 프로파간다로 전락할 위험을 영리하게 피해 가며, 이를 원동력 삼아 영화를 접하는 모든 이들을 설득할 수 있는 힘을 보여준다. 여성과 남성, 백인과 유색인종이라는 이분법 대신 여성 문제의 문제의식에 공감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각자 처한 상황 안에서 최선을 다해 함께 연대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든다. 그 결과 <걸스 오브 막시>는 여성 영화의 몇몇 부정적인 전철과 이미지를 직접 파괴하면서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데 성공한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모든 이들을 설득할 수 있을 법한 반성, 공감, 연대의 여성 영화
* 본 콘텐츠는 브런치 DAY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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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멕시코에서 만난 타노스와 콜렉터 #7
환몽(幻夢) CINE 리뷰 7화_ 영화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Sicario, 2015) 리뷰
** 영상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영화 '시카리오 : 암살자의 도시'의 후속작 '시카리오 : 데이 오브 솔다도'가 개봉했습니다. 숨 막히도록 건조하게 설계된 드니 빌뇌브 감독의 시카리오 세계관이 그만큼 인상 깊었다는 의미겠지요.
기념하여 '시카리오 : 암살자의 도시'를 조금 깊게 이야기 해봤습니다!
(공교롭게도 멕시코라는 땅에서 어벤져스의 타노스와 가오갤의 콜렉터의 조우네요!)- 드니 빌뇌브 감독의 연출 특징!
- 정의를 위한 악이란?
- CIA와 FBI 이야기
- 아쉬운 점
- 우리가 꼽은 명장면
- 환줄평 / 몽줄평영화 '시카리오 : 암살자의 도시'를 보고나서 마구 생각하고, 마구 떠들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시카리오 #시카리오암살자의도시 #드니빌뇌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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