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onymoushilarious2025-06-16 15:58:12
시절 인연, 슬프고도 아름다운
'해피 엔드', 끝났지만 끝나지 않았다
'시절 인연'이라는 말이 있다. 사전적 정의는 '모든 인연은 때가 있다'는 것이다. 한 때 불타오르던 연인 관계도 언젠가는 시들고, 영원히 친구일 것만 같았던 우정도 소원해지는 시기가 온다. 그래서 모든 인간 관계에 큰 미련을 두지 않으려고 하는 것도 이 이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해피엔드' 속 이 청춘들의 고뇌에 공감했던 이유는 뭘까. 인간관계에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그들의 세상이었던 끈끈한 우정이 사라져가는 걸 보면서 마음 아파한 이유가 뭘까. 나도 한 때 느꼈던 감정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들의 현재가 너무 아름다워 잃지 않았으면 좋겠는 마음 때문이었을까. 마치 다 커버린 자식을 보면 '더 크지 말고 아이로 남아있어 주렴'하는 부모의 마음처럼. (자식도 없는 주제에 참 주책인 것 같기도...)
둘 중 가장 어른스러운 사람은 누구였을까
코우, 유타 두 친구는 소꿉친구였다. 어렸을 때부터 언제나 함께였던 친구. 그들의 공통 분모는 음악이었고, 어떤 이유에서든 음악적 취향을 공유한다는 데 있어 그들은 서로를 이해했다. 아니, 서로를 이해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개개인의 인생에는 몇 번의 기로들이 있다. 그 때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나의 인생도 바뀔 수도 있지만 내가 속한 무리가 달라질 때가 있다.
코우는 재일 한국인으로서 일본에서 교묘하게 배척당하는 소수 집단이었고, 유타는 그저 one of 일본인이었다. 겉보기에는 다르지 않아도 국가 권력 앞에서 항상 코우가 성가신 과정을 통해 사회에 자신이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해내어야 했기에 코우가 사회에 느꼈을 반감을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유타는 '이미 너는 내 사람'이라는 사고에 갇혀 코우가 변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던 것 같다. 고등학생인 유타 뿐 아니라 이런 오류는 어느 나이대의 사람이든 범할 수 있는 지극히 인간적인 오류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유타도 보이는 것처럼 마냥 철 없기만 하진 않는다. 유타를 보며 느꼈던 점이 있다는 '굉장히 외로운 사람이구나'하는 점이었다. 가정에서 부모의 관심을 받지 못했고, 그 외로움을 친구들로부터 풀어내었던 것 같다. 어른이 되어가며 지금처럼 자주는 보지 못할 친구들에게서 조금은 독립했어야 할 자신을 코우의 행동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코우 또한 유타의 겉만 보고 유타는 생각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유타가 가장 생각이 깊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겉모습은 가장 아이같지만 가장 중요한 순간에 친구들을 위해 희생타를 날릴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이도 유타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세상을 바꿔야만 한다고 격하게 주장했던 코우가 자신의 장학금 문제와 부모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마지막에 주저하는 모습에서 유타의 행동과 대비되기도 했다. 유타는 일본 사회에서 소수로 핍박받지 않는 자신이 희생해야만 흔들리는 우정을 지켜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유타를 보며 가장 밝은 척하는 사람이 속에 가장 깊은 어둠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도 표현이 센 반항적인 사람일수록 속 안에 감추고 있는 상처가 많은 사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스친다.
그럼에도 앞으로 나아가는
한 때 친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도 내가 알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 멀어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들이 서로를 이해할 때의 웃음을 기억하고 있는 제 3자의 사람으로서, 이들의 관계성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드는 것을 조금 안타까워했던 것 같다.
코우는 자신의 고등학교 시절의 전부였던 음악보다는 점점 더 사회에 반항하는 Rebel의 삶을 살아가지 않을까 싶고, 유타도 음악밖에 모르는 바보냐는 코우의 말을 긍정적으로 승화해 점점 음악에 삶을 바치지 않을까 싶다. 마지막 장면에서 육교에서 헤어지는 그들을 보며, 서로의 길을 응원하며 언젠가는 또 음악으로 같은 길에서 만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들의 시절은 끝났을 것 같지만 그저 관계성의 밀도가 달라졌다고 생각한다. 항상 만나야만 우정의 증명이었던 것 같은 시절에서 자주 만나지 않아도 가늘고 길게 우정을 유지하는 방법을 찾은 것 같다. 그렇게 둘은 서로 부딪히고 애정하며 다음 단계의 관계로 넘어간 것 같다. 그렇게 성장한 것이다. 분명히 이들의 우정의 결말은 해피엔딩이다.
다시 '시절인연'이라는 말로 돌아와서, 모든 인연은 때가 있다는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시절인연'은 한 시절을 공유한 관계성도 언젠가는 끝난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안 될 것 같다. 상대의 변화에 유연하게 움직이며 나도 그를 보며 변하고 그도 나를 보며 변할 수 있는 건강한 관계라면, 아주 친밀했던 한 시절이 끝나게 되더라도 다음 국면에서도 다른 밀도의 관계성으로 변모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끝난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의 우정이 다시 태어난 것으로 이해하고 싶다.
그들의 청춘이 아름다워 보인다면 내가 늙어버린 걸까
영화 속 배경은 미래적이지만 정치나 사회제도는 여전히 구시대적인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을 보며 근미래도 뭐 별다를 것 없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학생들을 규제하기 위해 '판옵티콘' 개념까지 나오는 걸 보니 안전과 질서라는 명목하에 행해지는 독재는 어디까지 규범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걸까 고민하게 되었다.
그런 세상을 왕따라도 시키듯이 보이지만 자신들만의 낭만을 구축해가는 학생들이 그저 예뻐보였던 것은 내가 나이가 들어버렸기 때문인가 하는 반성 아닌 반성도 하게 된다. 영화에 '젊은 사람들이 세상을 포기했다'라는 뜻의 대사가 나오는데, 너무 부패해버린 세상에서는 세대가 극단적으로 나뉘는 것 같다. '망한 세력을 다시 일으키자는 세력'과 '우린 망했으니 이제 즐기자'라는 세력. 세상이 온전하지 못해 코우와 유타의 우정이 빗나간 것은 아닐까 괜히 사회 탓도 해본다. 두 사람의 사회에 대한 시각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처음에 두 사람을 포함한 학생들이 너무 예뻐보였던 건 사회고 뭐고 다 제쳐두고 음악만 있으면 통일이 되는 그들의 순수함이 예뻤던 것 같다. 따지지 않고 그저 좋아하는 일에 돌진할 수 있는 무모함, 그것이 젊다는 뜻 아닐까. 물론 나이가 들어서 무모해지는 것도 굉장히 응원한다. 왜냐하면 나이가 차서 무모해진다는 것은 그만큼 생각을 많이 하고 내린 결정일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젊은 날의 무모함은 세상이 태클걸지 않는, 무모해도 까방권이 생기는 시기다보니 약간의 부러움과 함께 맘껏 무모해봤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들었다.
각자의 길을 찾아 새로운 인생을 찾아가는 길목에 선, 코우와 유타, 그리고 다른 친구들의 삶이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각자의 길을 잘 가다가 다시 모였을 때는 더 성숙해지며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는 관계로 발전했으면 좋겠다.
- 1
- 200
- 13.1K
- 123
- 10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