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ing artist2025-06-23 01:25:20
불의한 세상, 진격만이 정답인가 순수함이 해답인가. 저 육교 위 청춘들에게 답이 있긴 한걸까
영화 <해피엔드> 리뷰
최근 우리 사회에 벌어진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엄청났던 일련의 사건들을 떠올려본다. 2024년 12월 3일, 해가 지고 달이 하늘을 뒤덮은 어스름했던 그 시간. 이 사회의 정의를 구축하고, 진실을 파헤치겠다는 의지 하나로 정의를 무너뜨리고 진실을 덮으려 했던 그날, 과연 그들이 찾고자 했던 정의와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의 입에서 빈번히 내뱉어지는 말은 모두 '국가 안전보장'이라는 헌법상 개념에 수렴한다. 실제로도 국가는 국민의 생명, 신체, 기타 재산을 보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혼란스러운 것은 어디까지가 보호이고, 어디까지가 침해인지 분간하기 쉽지 않다는 데에 있고 결국 이 부분이 대한민국의 혼돈을 야기했다. 혼돈이 찾아오면 언제나 주목되는 것은 혼돈을 잠재우는 누군가. 우리나라가 위대한 이유에 대해 말해보라 한다면 수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가장 위대한 이유를 12월 3일 국회의사당으로 한걸음에 달려온 그 시민들의 행동으로 증명할 수 있지 않을까. 결국 우린 보호와 보장의 탈을 쓴 무소불위의 권력에 맞서기 위해 일어났고 그렇게 시민들의 저항은 정의가 되었다. 이게 정의이고, 진실이지 않을까. 하지만 열띤 저항의 방법을 택하지 않고도 권력에 저항할 수 있다. 영화는 이 지점을 꼬집는다. 급진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위 '들이받기' 그리고 이미 오염되어 버린 세상에서 벗어나 순수함만을 갈구하는 순수주의, 다시 말해 '도피'. 무엇이 답일까. 아님 대체 답이란 존재하긴 한 걸까.
영화 <해피엔드>.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해석과 극단적으로는 영화의 방향성 자체가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필자의 관점에서 확실한 것은 어쩌면 감독은 10대의 눈을 통해 전 세계가 놓인 이 정치적 문제 상황들을 타개할 방법들을 모색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 결과 맞이한 두 갈래로 나뉜 육교의 갈림길 속 그 무엇도 답이 될 수 없어 어정쩡 거리는 주인공 "유타"의 입장이 지금 우리의 입장이 아닐까. 그 무엇도 답이 될 수 있지만 그 무엇도 답이 되어줄 수 없는 아이러니한 현실의 반영.
일본의 한 고등학교를 다니는 유타, 한국계 혼혈인 "코우" 그리고 그들의 친구인 "밍" "아타" "톰"은 모범생과는 거리가 있지만 과거 일본의 테크노풍 음악을 즐기는 음악동아리 친구들이다. 어느 날 학교에 늦게까지 놀던 친구들은 교장선생님의 새 차를 보게 되고 장난치고 싶었던 것인지 차를 세로로 세워둔다. 결국 이 사건은 모든 일의 원흉이 된다. 교장선생님은 그 사건을 테러라 규정하고 앞으로의 사건 사고들을 예방하고 학생들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목적으로 학교 곳곳에 CCTV를 달고 AI 기술을 이용해 실시간으로 교칙 위반 행위들을 적발해 벌점을 부여했다. 이들과 같은 반이던 "후미"는 학생들의 자유를 침해하는 학교의 만행에 자신의 시위대 친구들과 담임선생님과 함께 분개했고, 이를 지켜보던 코우는 관심이 가기 시작해 시위에 함께 한다. 그런 죽마고우의 새로운 발걸음과는 달리 유타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학교의 지나친 간섭에도 개의치 않아 하자 코우와 유타는 각자의 관념 차로 인해 다투게 된다.
어떠한 영화든 주가 되는 앵글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영화 <다크나이트>의 경우 하단 앵글을 통해 작중 악당이었던 "조커"의 걸음을 악독하게 표현했다. 영화 <샤이닝>의 경우 클로즈업을 통해 주인공 "잭"의 실시간으로 변하는 표정을 섬세하게 담아냈다. 영화 <해피엔드>의 경우 이를 부감 쇼트라 할 수 있는데, 특히 제 3자 혹은 전지적인 시점으로 영화 속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이가 인물들을 바라보는 듯한 시점 내지는 카메라 앵글이 가장 눈에 띄었다. 왜냐하면 영화 속 갈등의 진원지는 단순히 교장선생님 혹은 그 옆의 선생님이 아닌 어디선가 개인을 은밀하게 감시하고 추적하는 권력이었기 때문이다. 관객은 이런 카메라 앵글을 통해 인물들의 움직임을 관조적으로 바라보게 되고, 이는 그 인물들을 감시와 권력에 한없이 나약한 존재로 보이게 한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또 하나 인상 깊은 영화적 장치를 통해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멀리서 대화하는 인물들의 대사를 내레이션이나 보이스오버 등으로 직접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대화 자리 밖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이들의 상상에 기인한 입을 통한 대사로 들려준다는 점이다. 이는 각 인물의 성격과 특히 10대들의 순수하고도 어리숙하고 유치하기까지 한 정서를 관객이 몸소 느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쩌면 영화의 주제와도 닮아있는지 모른다.
생각해 보면 그런 몇몇 씬들은 모두 학생들인 10대 청소년들과 어른들 간의 다툼 혹은 사회의 벽에 부딪혀버린 무기력해진 10대들의 모습을 담은 씬이라는 점에서 이를 또 다른 10대의 눈과 생각을 통해 해석한다는 점은 영화의 서사와도 맞닿아있다.
필자에게 있어 영화 <해피엔드>는 액자식 구조 같아 보였다. 액자식 구조를 취하는 서사에서 가장 인상 깊은 지점은 아무래도 외부와 내부를 오가는 과정에서의 자연스러운 흐름 그리고 유기성일 것이다. 본 작품의 내부는 어쩌면 외부의 반영본 혹은 축소판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근미래의 도쿄, 국가는 지진을 대비하고 시민들의 안전을 대비하기 위해 긴급명령을 내렸고, 보호 목적의 행위들은 애먼 코우와 같은 순수혈통 일본인이 아닌 이들에게 비난의 화살 시위를 당기게 했다. 영화 속 사람들은 우리 세계의 모 국가를 떠올리게끔 위대한 일본을 다시 세워야 한다면서 외지인, 비순혈 일본인들을 비국민(非國民)이라 몰아갔고, 결국 코우와 후미 그리고 시위를 모의하는 인원들이 모두 함께 분개했다. 이러한 상황에 반영인지, 학교는 교장선생님의 차량 '테러' 사건 이후 학생들의 보호와 안전을 목적으로 이전부터 맘에 안 들었던 코우와 친구들의 음악 동아리실을 밀어버렸고 AI를 통한 지속적인 감시 그리고 국가의 소위 '갈라치기'식 행정을 똑같이 베껴 교육에 있어서도 차별을 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 속 학교가 학생들의 자유를 빼앗는 행위를 가만두고 볼 수는 없어 학생들이 일어나 시위를 하는 것을 그저 혈기 왕성한 10대 청소년들의 어른들에 대한 반항 혹은 반발이라고만 치부할 수 없다. 이는 단순한 반항 혹은 학교에의 대항이 아니라 근미래의 일본 사회에 대한 반발이고 일본의 기득권층 내지는 권력층에 대한 학생들의 뜨거운 저항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의 이러한 저항이 혁명이 될 수 있었을까? 영화는 두 가지의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학교에 대한 학생들의 반발이 나아가 일본 사회에 대한 10대들의 저항이 되었을 때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을까.' 또한 '과연 그러한 변화만이 문제 해결의 답이 될까.' 결론적으로 이야기한다면 10대들의 저항을 통해 학교는 변화를 어느 정도 수용했다. 하지만 항상 변화가 있으면 거기엔 조건이 달린 법, 학교는 자동차 테러 사건의 진범이 자수하게 되면 모든 일들을 철회하겠다고 한다. 이에 학생들의 갑론을박이 여기저기서 터지기 시작했는데, 이때 유타가 앞으로 나가 자신이 진범임을 당당히 밝히며 퇴학당한다.
자동차 테러 사건을 함께한 이들을 정말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유타와 코우로 추론할 수 있다. 코우는 사회의 불합리함을 후미와 함께 배우고 목도해나가면서 사회에 분개하면서 동시에 어릴 때와 똑같이 아무 생각 없이 음악과 유치한 장난만 치려는 유타에게 실망감을 느껴 그에게 비난을 쏟는다. 유타는 공부를 잘하지도, 엄청난 부자이지도 않다. 그저 일본의 옛날 음악을 좋아하고, 친구들과 노는 것을 좋아하는 평범한 10대 청소년이다. 유타와 코우를 동일선상에 두고 본다면 건실함, 성실함 그리고 흔히 말하는 '좋은 사람'에 부합하는 사람은 아무래도 코우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두 공범이 한 장소에 놓여 사건의 진범으로서 발각될 절체절명의 순간 전혀 그럴 것 같지 않던 유타가 강당 앞에 나가 모든 책임을 짊어지고 코우로 하여금 학교의 지원을 계속해서 받게끔 엄청난 선택을 내렸다는 것은 영화가 사회에 저항하기 위해 급진적으로 진격하는 코우와 같은 정신을 옹호하려고도 유타와 같이 순수함만을 추구하며 현실 세계에서의 도피를 택한 이들을 비난하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표명하는 것으로 보인다.
영화의 종반부, 학교에서 퇴학당한 유타는 전부터 다니던 음악 기기 판매점에서 일을 계속했고, 코우는 그렇게 정상적으로 졸업을 하게 된다. 함께 졸업하게 된 밍과 아타는 서로의 미래를 걱정하다 연애를 시작하는 눈치였고, 코우 유타 아타 그리고 밍은 그들이 늘 찢어지던 육교 위에서 방향을 달리하며 찢어졌고, 영화의 초반부 씬처럼 유타와 코우가 육교 위 갈림길에 서서 서로에게 무언의 아쉬움을 보낸다. 그때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한 명은 교복 차림, 한 명은 사복 차림이라는 사실, 또 너무나 편하고 친근했던 둘의 사이가 전과 같지 않으며 둘 다 이제 청소년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초반부와 같이 먼저 발길을 돌리는 코우, 유타는 우두커니 갈림길 중앙에 서있다 코우에게 한번 더 인사를 건며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하다 전처럼 코우와는 다른 방향으로 몸을 돌리며 영화는 끝이 난다.
죽마고우였던 두 소년이 각자 추구하고자 했던 방향성이 너무 달라 결국 멀어질 수밖에 없던 아쉬움과 작별의 슬픔. 어쩌면 그들이 건넨 '다음에 보자'라는 말의 '다음'에는 기약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처연한 생각까지도 들게 한다. 순수함을 잃은 소년의 갈 곳 잃은 눈 그리고 순수함을 잊지 않으려다 결국 모든 것을 잃은 소년의 아쉬운 발걸음은 영화가 하고자 했던 모든 말들을 대신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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