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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READ2025-06-25 19:45:51

어디까지를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영화 <그을린 사랑>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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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을린 사랑>

드뇌 빌뇌브 감독

 

쌍둥이 남매 잔느와 시몽은 어머니의 마지막 유언을 듣고 충격에 빠진다. 바로 죽은 줄 알았던 아버지와 존재조차 몰랐던 형제를 찾아 어머니가 쓴 편지를 전하라는 것. 남매는 아버지와 형제를 찾기 위해 어머니의 과거를 쫓기 시작하고, 숨겨진 진실을 알게 되는데…

 

1. 비밀은 일상에 균열을 만든다 - 모두가 모르는 비극의 시작


영화의 시작점에서, 쌍둥이 남매 잔느와 시몽은 사망한 어머니의 마지막 유언을 듣게 된다. 세상을 등진 채, 나체로, 관조차 사용하지 않은 채 자신을 묻어달라는 것. 비석도 세우지 않은 채로. 이는 자신의 어머니를 묻는 잔느와 시몽의 입장에서 꽤나 충격적인 유언인 셈이다. 이와 동시에, 어머니인 나왈은 잔느와 시몽에게 한 가지 부탁을 남긴다. 자신이 생전 적었던 편지를 두 인물에게 전해 달라는 것이다.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던 아버지, 그리고 어디 있는지도,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자신들의 형제, 니하드. 그들을 찾아 편지를 전해줘야만 어머니를 제대로 묻고 비석을 세워줄 수 있다. 유언을 전해 들은 시몽은 어머니의 유언에 반항하며 자신이 그래야 할 이유가 없다고 말하지만, 잔느는 우선 어머니의 흔적을 따라 나선다. 이 순간 잔느와 시몽, 그리고 관객은 모두 같은 생각을 머릿속에 떠올린다.

 

왜 그래야 하는가?

 

이 영화에서 어머니가 그렇게 행동한 이유를 아는 이는 오직 죽은 어머니, 나왈 뿐이다. 그래서 관객은 비밀을 아는 절대자의 입장이 아닌, 비밀을 전혀 모르는 남매, 잔느와 시몽의 시선에서 그들의 행동을 쫓게 된다. 어머니의 유언을 따라보기를 택한 잔느의 시선을 쫓다 보면,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느낀다. 나왈의 정체를 아는 사람들이, 나왈의 이름을 듣고 나면 께름칙한 반응을 보인다는 것. 심지어 아무것도 모르는 채 '나왈'의 딸이라며 자신을 소개하는 잔느를 향해 '아버지를 찾으러 왔다면서, 어머니에 대해서도 모른다'는 식으로 비아냥대기까지 한다. 이 순간 또한 잔느는 아무 대꾸도 할 수 없다.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관객 또한 마찬가지로 '무지한' 상태로 그를 둘러싼 이들의 반응을 살핀다.

 

평화롭고 아무렇지 않았던 일상에 생긴 자그마한 균열, 그리고 '무언가 있는 듯한' 불안한 기분. 이는 잔느가 나왈의 흔적을 계속해서 쫓게 만든다. 그리고 잔느가 나왈의 흔적을 쫓는 과정에서 삽입된 나왈의 과거 영상들은, 우리가 모르고 있던, 잔느와 시몽이 태어나기 전의 일들을 조금씩 드러낸다.

 

2. 오이디푸스 신화 - 세 개의 점 시퀀스

 

유명한 그리스 비극 신화 <오이디푸스 왕>은 그동안 여러 미디어 콘텐츠에서 차용되어왔다.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운명과 연을 알지 못하고 행동하던 끝에 비극의 굴레에 빠지게 되는 이야기. 해당 신화에서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살해하고 근친상간이라는 비극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행위자'이자 이 신화의 주인공이다. 동시에 그는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인물이기도 하다. 오이디푸스 신화에서 오이디푸스라는 인물이 이 세 역할을 동시에 행하고 있다면, 영화 <그을린 사랑>은 이 세 역할을 분리시켜 신화를 비틀어 차용했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영화는 발뒤꿈치에 박혀 있는 '세 개의 점'을 보여준다. 이 '세 개의 점'이 다시 등장하는 시점은 나왈이 첫 아이를 낳는 순간에 있다. 기독교인이던 나왈은 무슬림 난민인 와합과 사랑에 빠졌으나 이를 계속 이뤄나가지 못하고, 뱃속에 있던 아이조차 낳자마자 고아원으로 보내게 된다. 고아원으로 보내기 전 나왈은 스스로에게, 그리고 아기에게 약속한다. 어디에 있더라도 꼭 찾아내고 말겠다고. 그리고 얼굴이 변하더라도, 그가 자라더라도 쉽게 알아보기 위해 그의 발뒤꿈치에 점 세 개를 새긴다.

 

그리고 이 발뒤꿈치의 점 세 개가 다시 등장하는 순간, 나왈은 비로소 자라난 자신의 아들을 찾아낸다.

생각지도 못한 얼굴이 자신을 향해 돌아보는 순간,

그 얼굴과 세 점이 겹쳐지는 순간,

나왈은 차마 입을 떼지 못하고 지나치고 만다.

이를 알게 된다는 것 자체가 비극을 전해주는 것이 되므로. 

 

영화 <그을린 사랑>에서 비극적 행위의 굴레에 빠지는 이는 나왈의 아들, 니하드다. 그는 비극적인 선택을 하는 '행위자'이지만 이 이야기가 끝나기 전까지 '무지한' 상태에 머물러 있으며, 이 영화의 주인공 단계에 서지 않는다. 영화는 잔느의 시선으로 나왈의 과거를 쫓으면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나왈'인 것처럼 초점을 맞춘다. 모두가 반기지 않는 그 이름, 나왈. 감옥에 갇힌 적이 있던 잔느의 어머니, 나왈. 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당했던 이, 나왈. 조금씩 드러나는 단서들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자연스레 나왈이 숨기고 있는 과거가 있다는 것을 유추하게 된다. 그러나 이를 나왈이 찾으라고 했던 '아들'과 '아버지'의 정체와 연결하기까지는 꽤나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니하드의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 잔느와 시몽이 쫓던 두 인물은 하나로 겹쳐지게 된다.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이는 '현재' 시점에서 행동해야 할 이유를 부여받은 잔느와 시몽이며, 주인공은 비밀을 숨기고 있는 나왈이다. 그러나 비극적 행위를 행하는 자는 끝까지 정체가 숨겨진 채 드러나지 않고 있었던 니하드다. 니하드의 정체를 비밀스럽게 숨겨두다 드러냄으로써, 그와 동시에 그가 받게 된 충격과 이후의 이야기는 의도적으로 잘라냄으로써 이 이야기의 찝찝함과 충격을 더욱 극대화하는 셈이다.

 

3. 그럼에도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 이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니하드의 정체를 알게 된 잔느와 시몽은 니하드에게 편지 두 개를 전해주고 떠난다. 그리고 니하드가 그 편지를 열어봤을 때, 편지지에는 증오나 원망 대신 '사랑'이라는 단어가 적혀 있다. 니하드에게 모든 비밀을 알려주지만, 자신은 그를 원망하지 않는다고. 스스로 그를 사랑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사랑하겠다고.

그러나 이 행위를 사랑에서 비롯된 행위라고 부를 수 있을까.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이다' 라는 옛 속담처럼, '무지'의 상태에 머물러 있던 니하드가 더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비극을 저질렀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죄책감조차 가지지 않고 살아갈 수 있으므로. 그러나 나왈이 자신의 죽음과 동시에 니하드를 향해 이 비극적 진실을 전달함으로써, 나왈은 이 비극의 굴레에서 해방되고, 니하드는 비로소 이 비극적 굴레에 갇히게 된다.


이는 '진짜' 비극의 시작이다. 나왈이 죽었지만 나왈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그의 자식들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의 자식들이 이제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무지함이 낳는 비극이 있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이름 뒤에 감춰진 날카로운 칼날들이 있다. 나왈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니하드를 향해 '앎'의 무게를 선물한 셈이다.


니하드는 과연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행동하더라도, 다시는 무지했던 그 순간의 일상으로는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비밀을 알게 된 순간, 이미 균열은 시작되었으므로.

작성자 . MOVIER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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