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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tkatniss 2025-06-25 21:19:57

<밥 잘사주는 예쁜 누나>가 사랑과 갈등을 보여주는 방식

<봄밤>을 분석한지 어느덧 세 달, 안판석 감독님과 김은 작가님의 첫번째 히트작, <밥 잘사주는 예쁜 누나>를 보았다. 독특한 제목과 당시는 흔하지 않았던 올드팝의 사용으로 가히 2018년 최고의 화제작이었다 칭해도 지나치지 않은 드라마. <봄밤>의 방영 당시 <밥누나>의 자기 복제라는 비판이 꽤나 있었는데, 안판석 사단의 배우들이 대거 공통출연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연출, 감정선과 캐릭터, 주제의식 모두 상이하여 그러한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 글에서는 <밥누나>가 영상연출을 통하여 사랑과 갈등을 보여주는 방식을 중점적으로 탐구할 것이며, 곁가지로 <봄밤>과의 차이점, 그리고 두 드라마에서 공통적으로 보여지는 안판석 감독님의 연출 세계 또한 언급할 예정이다.

 

​<밥누나>는 멜로 이전에 궁극적으로 윤진아라는 인물의 성장기이기 때문에, 첫화의 상당한 부분을 윤진아의 'status quo'를 확립하는 데에 사용한다. 드라마의 오프닝이 본인이 근무하는 커피회사 분점의 검수 작업을 하는 진아의 모습이라는 점은 이를 확연히 드러낸다. 직장에서의 오프닝이 끝난 후 드라마는 곧바로 진아와 남자친구와의 관계를 드러낸다. 진아는 다른 마음을 품은 것이 분명한 남자친구를 만나러 나가며 큰 돈을 들여 새로운 구두와 원피스를 산다. 3개월 할부를 해가면서까지, 발에 맞지 않는 구두를 신어가면서까지 만난 남자친구는 진아에게 이별을 고한다. '곤약같다'는 무례하기 짝이 없는 이유를 대며 말이다. 그 후에 이어지는 소꿉친구 경선과의 대화에서 경선은 진아가 무색무취같은 여자라고 말한다 (손예진 배우님이 무색무취,곤약같은 여성이라니.............이는 정말 미스캐스팅이 아닌가 도대체 누가 손예진을). 그렇다- 극이 시작하기 전 우리의 주인공 진아는 롱 원피스를 사고도 비치색 스타킹을 받쳐입는 여자, 무색무취, 즉 본인의 특징이나 색을 찾지 못한 채 삶을 살아가는 인물인 것이다. 드라마에서 주연 윤진아를 맡은 손예진 배우님은 제작발표회에서 진아가 '30대 여성의 매너리즘'에 빠져 있다고 언급한다. 진아의 회사업무, 출근풍경, 집의 반복으로 채워진 1화의 반 가량은 시청자가 이러한 진아의 일상을 따라가며 자연히 진아라는 인물에 동화되게 하며, 진아가 빠진 매너리즘의 늪을 대리경험하게 만든다. 2화에서 <Save The Last Dance For Me>와 함께 길게 이어지는 경선과의 별것없는 대화 또한 이의 연장선이다.

 

이러한 진아의 견고하고도 단조로운 세계는 준희의 등장으로 큰 변화를 맞이한다. 3년만에 처음 마주하는 진아와 준희를 카메라는 긴 호흡의 샷들로 포착한다. 정면 롱샷-미디움샷-그리고 ELS의 부감으로. 모두 직선으로 걸어가는 회색 역사에서 유일하게 자전거를 타고 원형으로 빙빙 도는 준희는 갑자기 등장한 준희가 진아의 일상에 등장한 설렘이자 파문임을 시각화한다.

 

 

 

준희가 진아에게 어떤 인물인지 알 수 있는 극적 장치는 1화의 끝에도 등장한다. 진아는 1화 내내 남자친구와의 데이트를 위해 산 하이힐, 업무용 검은 힐 등 자신의 발에 맞지 않는 구두를 신고 불편해 한다. 그러한 진아가 준희와 있을 때 비로소 편안한 운동화로 갈아신고, 준희는 진아가 길에서 신발을 갈아신는 것을 돕는다는 점은 준희가 진아의 status quo를 변화시킬 인물이라는 것, 그리고 진아의 가장 편안한 모습을 이끌어내는 인물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같은 빌딩의 직장에 다니며 준희와 진아의 관계는 전과는 달리 묘해지는데, 이는 준희, 승철과 세영이 엘레베이터에서 저녁 약속을 잡는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준희는 진아가 남자친구와 다시 만난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보란듯이 진아 앞에서 세영과 저녁 약속을 잡는다. 이때 준희-승철과 세영-진아의 미디움 투샷이 반복되는데, 세영-진아의 투샷에서 세영은 화면의 왼쪽에, 진아는 세영보다 조금 더 카메라와 가까우며, 화면의 오른쪽에 위치한다. 사람의 눈은 자연적으로 화면의 왼쪽보다는 오른쪽에 더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세영은 rule of third의 왼쪽 라인보다 조금 더 바깥쪽으로 치우친 곳에 위치하는 반면, 진아는 오른쪽 라인과 비교적 가까이 위치하여 안정적인 스팟에 서 있다. 이러한 화면 구성의 원리를 통해, 세영과 준희의 대화동안 진아에게 포커스가 맞춰있지 않아도 시청자들은 외려 그들의 대화를 신경쓰는 진아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출처 티빙 <밥잘사주는 예쁜 누나> 2회 갈무리]

 

진아의 회사에 비상사태가 난 탓에 세영과의 저녁 약속은 파토가 나고, 진아와 준희는 다음 날 따로 저녁을 함께한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이 비 덕에 진아와 준희는 설레는 시간을 보낸다. 단순히 신경쓰이는 상대에서 설레는 상대로 발전해 가는 두 남녀의 감정을, 카메라는 슬로우 모션과 화면을 꽉 채우는 웜한 프랙티컬, 그와 어울리는 빨간 우산을 통해 시각화한다. 드라마의 간판 씬이라고 할 수 있는 '빨간 우산' 장면은 대부분이 슬로우 모션으로 촬영되었다. 유일하게 슬로우가 아닌 장면은 진아와 준희가 골목이 끝나는 부근, 택시를 잡는 대신 조금 더 걷기로 결정하고 온 길을 되돌아가는 롱샷 하나뿐이다. 진아와 준희를 중점으로 전경은 도로를 지나다니는 차가, 후경은 등불이 가득한 골목길이 채운 이 와이드샷은 슬로우 모션으로 기록한 반짝이는 순간이 결국 일상 속에 존재함을 시청자들에게 상기한다.

 

 

 

3회에 등장하는 진아와 준희의 첫 데이트 시퀀스에서 또한 비슷한 문법이 등장한다. 데이트가 끝난 이후 함께 걸어가는 둘의 모습은 LS->CU 앞모습과 LS 뒷모습으로 담긴다. 주제곡 <Something in the Rain>, 슬로우 모션 롱테이크는 살짝씩 부딪히는 둘의 팔, 진아의 어깨에 손을 두를지 말지 수차례 망설이는 준희의 바디 랭귀지와 합쳐져 시작하는 사랑의 설렘과 망설임을 그대로 전달한다.

 

<봄밤>이 와이드한 샷에 담긴 주인공들의 바디 랭귀지와 클로즈업의 자제를 통해 사랑의 감정을 드러냈다면, <밥누나>에서는 슬로우 모션, 타이트한 얼굴 샷과 인서트를 통해 '사랑'을 시각화한다. 진아와 준희의 회사에서 비밀 데이트 시퀀스에서 펜을 마주잡고 그림을 그리는 손, 슬로우 모션 미디움 샷을 사용한 연출, 3화 차 안에서 손을 잡을까 망설이는 진아와 준희의 손, 그리고 진아의 얼굴 클로즈업. 이러한 샷구성들은 주인공들의 미묘한 기류와 설렘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썸만 타던 준희와 진아는 3화의 말미 드디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로 준희와 진아는 비밀스레 손을 잡는데, 주변 사람들이 화면을 채운 더티 미디움 클로즈업으로 타이트하게 담은 두 주인공들은 시청자와 주인공들만 아는 서로의 감정을 강조하는 동시에 사람들에게 숨겨야 하는 둘 관계의 특성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이와 반대로 <밥누나>에서 대부분의 감정적 대립 상황은 와이드한 롱테이크로 연출된다. 롱테이크 안에서 인물들의 블로킹을 통해 샷 사이즈가 변화하는 식이다. 12화 진아가 선을 본 후 경선과 대립할 때, 경선이 호텔로 들어오고(LS), 진아가 경선을 따라 들어와 경선과 마주보기까지(MS Profile) 블로킹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둘의 다툼은 처음부터 끝까지 마지막 포지션인 미디움 샷으로 유지된다.

 

 

 

 

같은 회차 준희와 경선이 다툴 때도블로킹 변화를 거쳐 미디움 투샷에 안착한 샷은 둘의 다툼을 끝까지 하나의 샷으로 담는다. 두 샷 모두 경선은 카메라에 옆모습 혹은 뒷모습을 보이고, 이는 시청자가 주인공의 표정에 집중하도록 한다.

 

 

재회 후 진아가 준희를 찾아가 그동안의 설움을 토로하는 장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진아의 미디움 샷과 준희의 리버스로 구성된 씬에서 진아의 미디움 샷은 진아가 화를 내고, 뒤로 돌아 준희의 현관으로 향하자 진아를 따라 일어선 후 진아에게 화를 내는(MLS) 준희의 모습까지를 롱테이크로 담는다. 하나의 샷이 실질적으로 대립 장면의 오프닝과 엔딩의 역할을 모두 하는 셈이다. 이후 준희의 집을 나선 진아가 비를 맞으며 감정을 추스리는 장면 또한 미디움 롱샷으로 연출되었으며, 이는 인물의 갈등과 감정에 지나치게 가까이 가지 않는 <밥누나>의 연출 철학을 다시금 강조한다.

 

 

씬에 여러 인물이 등장할 때에도 드라마는 같은 방식을 고수한다. 준희의 아버지-진아-준희가 대립하는 씬 역시 세 인물의 동선 변화를 통해 원 테이크로 촬영된다. 씬은 진아와 준희 아버지의 대화를 롱샷으로 열고, 그를 발견하고 걸어가는 준희를 멈춰세워 시작되는 말다툼을 담은 진아-준희의 미디움샷으로 이어진다. 후에 준희가 프레임 아웃하고, 준희 아버지는 진아 쪽으로 걸어온다. 씬과 샷은 진아-준희의 대립보다는 와이드한 미디움샷으로 담긴 진아-준희 아버지의 대화로 마무리된다.

 

<봄밤>이나 <밥누나>를 보기 전, 드라마는 샷의 분절과 배열을 통해 인물의 의도와 감정을 전부 내놓아 보여주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 때문에 나의 샷리스트는 언제나 아주, 아주 많은 샷들로 가득했다. 그런데 안판석 감독님의 드라마를 분석하며 시청자들에게 숨을 쉴 공간과 선택지를 주는 연출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두 드라마에서 배운 점이 굉장히 많다. 연출을 하며 혼란스러울 때, 앞으로 나는 그 두 드라마로 돌아갈 것 같다. 기본에 충실하자, 는 마음으로 마치 경전을 읽듯이 말이다.

 

 

 

[14회 준희-진아의 갈등 (MLS/준희 MS/감정을 감추고 모진 말을 하는 진아는 조금 더 타이트한 MS)]

 

 

 

지금까지 <밥누나>의 디테일한 샷구성을 분석했다면, 이제부터는 이 드라마의 전체적인 연출과 톤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봄밤>이 그러하듯이 <밥누나> 역시 드라마의 배경이 되는 계절의 계절감을 아름답게 담아내고 있다. 전체적으로 채도가 낮고 창백한 주변의 톤은 인물들의 의상과 어우러져 우리나라의 회색 겨울을 잘 드러낸다. 물의 윤슬, 거울이나 유리에 비친 상 등 리플랙션을 이용한 샷들이나 서울의 건물들을 이용한 화면을 시원하게 가로지르는 사선 구도가 유독 자주 쓰이는 것 또한 이러한 겨울의 계절감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본다. 창백한 배경의 색감, 사선의 차가운 구도와 리플랙션은 강한 hallation의 필터와 맞물려 대비적으로 다양한 컬러와 높은 콘트라스트/따뜻한 톤의 화면을 가진 로맨틱한 씬들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창백한 색감과 사선 구도/서울의 아파트와 고층건물을 이용한 샷들]

 

안판석 감독님은 종영 후 인터뷰에서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가 장르를 구분할 수 없는 그저 '인생 이야기'라고 말씀하셨다. 한 사람의 인생을 더듬어 보려면 가족, 교우, 직장관계와 사랑을 다뤄야 하고, 그것이 새끼줄처럼 꼬여지면서 걷잡을 수 없는 길을 가게 되는 '인생'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멜로인 동시에 궁극적으로 윤진아라는 여성의 성장담인 이 드라마는 그래서 진아의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진아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가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크다. 평범한 일상의 풍경 속 촘촘히 느린 스탭으로 쌓아올린 주인공 윤진아의 삶 속에서 사랑의 순간은 조금 더 높은 콘트라스트로, 조금 더 따뜻하고 선명한 슬로우 모션으로 기록된다.

 

 

[마지막 화 준희와 진아의 재회]

 

사랑은 지나쳐버릴 수도 있는 수많은 일상의 순간을 잡아 서로의 평전을 쓰는 것이라는 드라마의 기획 의도는 그렇게 시청자들의 마음에 가 닿는다. 또 안판석 감독의 손 안에서 우리가 흔히 지나치는 한국의 풍경-밤의 거리, 아파트 단지-은 낭만을 머금은 채 재탄생하고, 그는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의 삶에도 묘한 기대를 불어넣는다.

 

 

모르는 일이다. '드라마를 통해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고, 사랑은 무엇인지 이야기하고 싶다'는 감독님의 바람처럼 시청자들의 일상에 가닿은 울림과 기대가 그들이 삶을, 혹은 사랑을 바라보는 방식을 영원히 바꿔 놓을지도.

작성자 . kitkatni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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