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onymoushilarious2025-06-30 23:51:52
분명 액션인데 로맨스 같았던 파과
파과
'파과', 거의 10년 가까이 된 이야기일 텐데 난 이 서사를 소설로 처음 접했다. 처음 읽고 누군가가 멋있는 제작자가 나타나 이걸 영화화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10년전의 나는 그만큼 흡인력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었더랬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 영화는 60대 킬러를 주인공으로 해야 하는데 그 때 당시에는 이런 캐스팅이 가능할까 싶었다. 그런데 이 영화의 제작 소식이 들리고, 이혜영 배우님이 캐스팅되었다는 사실을 듣고 무릎을 탁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캐스팅만으로도 영화관에 가서 볼 이유가 충분했다. 다만 10년의 간극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내용을 온전하게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이 영화를 관람하는 데 있어 좋은 결론을 냈을까 아닐까.
1. 복수극인 줄 알았으나
이 영화 속 인물은 많지 않다. 킬러 조각의 주변 인물들인데 워낙 세상과 단절하며 살아온 탓에 주위에 사람도 많지 않은 탓도 있다. 그런 조각의 삶에 끼어든 신입 킬러, 투우. 처음에는 그가 조각의 삶을 망치러 온 것 같았다. 뭔가 과거에 조각이 그의 원한을 산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점점 영화가 진행될수록 그는 조각의 관심이 필요했음을 알게된다. 그는 조각을 원망한 게 아니라 그녀를 사랑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를 여자로 느낀 것 같진 않고 그녀를 엄마로 생각한 것 같다. 아버지를 죽인 그녀를 원망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다시 찾아오지 않아 절망한 아이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투우가 강선생의 아이를 납치한 것은, 아이를 약간은 질투했기 때문이 아닐까. 처음에는 자신을 돌아봐주지 않은 것에 대한 원망이었지만 자신은 잊어놓고 강선생의 아이에게 시선을 보내는 조각을 또 한 번 원망하고, 조각의 시선 끝에 있는 그 아이를 괴롭히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방법이 온전치는 않았지만 누군가의 온전한 사랑이 필요했던 아이였음을 알고 나면 투우가 그리 나쁘게만 보이지 않는다. 사실 영화를 보면서 '처음부터 밝히지'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그랬다면 이 영화의 주제는 의미가 없어졌겠지만 그냥 처음부터 밝히고 보고 싶었다는 말을 했다면 투우의 삶이 조금은 나아졌을까 생각한다.
2. 그럼에도 삶을 이어가는 조각
사실 이 서사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더라도 생은 아름다운 것이니 그럼에도 살아가보자는 조각의 의지이다. 다른 사람들의 생을 끊는 것이 일상인 그녀가 생은 지속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사실 조금은 아이러니하다. 항상 생과 사의 기로에 있는 그녀에게 죽음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을 것이고, 항상 서늘한 주검만을 바라보던 그녀가 죽음을 앞두고 보니 갑자기 죽음이 아닌 생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녀의 생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였기 때문에 저 멀리 보통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을 바라보며 나의 생은 어떠했는가를 반추해보기 시작한 것이다. 이미 유효기간이 다 되어 가는 삶이기에 남은 생은 누군가의 죽음의 순간에 존재하기 보다는, 누군가의 생의 순간에 함께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삶의 생기에 일조하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죽음으로 점철된 그녀의 삶에 한 줄기 의미를 찾고 싶어졌던 것 같다. 그녀의 삶은 그저 일, 일, 일이었기 때문에 죽음을 앞두고 나서야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고 싶어졌다는 점에서 그녀의 삶도 투우처럼 얼마나 외롭고 처절했는지를 알 수 있다.
하다못해 이런 킬러도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해야 그 다음 생을 살아내는데, 의미없이 나의 하루를 흘려보내기는 싫어졌다. 조각은 자신을 '파과'로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더이상 예전과 같은 기량을 뽐낼 수 없는 자신을 상품성 없는 과일과 같다고 느겼을지도 모르겠지만 사는 내내 죽음만을 생각했던 그녀가 비로소 생을 생각하던 그 순간부터 그녀의 진짜 삶은 시작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은 점점 병들고 있지만 그녀의 정신은 점점 생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전성기란 모두가 다른 시기에 찾아온다. 그녀의 신체적 전성기는 그녀를 킬러 계의 전설로 만들었지만 그녀의 인생의 진정한 전성기는 오히려 병이 찾아오고 난 뒤가 아닐까. 몸이 고장나고 나서야 그제서야 주위를 둘러보고 다른 사람과 가끔은 온정을 주고받는 사람처럼 사는 삶을 살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그녀가 강선생과 인연을 이어갈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그녀의 삶은 전과는 조금은 달라져 있을 것이라는 것은 짐작이 가기 때문이다.
총평
그녀가 행하는 죽음은 명분이 있지만 그녀의 삶은 지속할 명분이 없었기에 방황하던 그녀에게 강선생은 참 귀인인 것 같다. 그렇게 모두의 삶을 응원하고 싶다. 다만, 투우가 안타까울 뿐이다. 투우가 살아서 조각과 함께 교류할 수 있었다면 좋을텐데...... 영화 특성상 액션 영화이다 보니 누구 하나는 죽고 살고 하긴 해야 하는데, 워낙 투우가 조각을 보는 눈이 애틋했어서 영화를 보는 내내 난 이 영화가 액션이 아니라 로맨스영화 같았다.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투우를 연기한 김성철 배우의 눈빛이 죽이고 싶은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애정하는 사람에게 하소연하는 눈빛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캐릭터에 바로 몰입할 수 있었다. 액션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크게 실망하지 않을 것 같은데, 나는 액션은 문외한이니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액션을 보면서 중간중간 설레고 싶다면 이 영화 나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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