퐁주2025-07-18 12:20:56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 <믹의 지름길> (2010)
<믹의 지름길>
왜 제목이 '믹의 지름길'인가 하면 우리가 여태껏 믹의 지름길을 따라왔는데 과연 그것이 맞느냐 하는 질문을 던지려고 한 것 같다. 믹은 비호감이지만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방향을 가리키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랬던 사람이 결말 즈음에는 에밀리 부부에게 결정권을 돌린다. 역사는 이래 왔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에게 턴이 주어진다.
러닝타임이 1시간 44분인 영화인데, 오, 그 시간이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아무것도 없는 넓은 황야에서 세 마차가 걷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참을 수 없어지는 것은 마차 바퀴의 끼익 끼익 하는 소리다. 처음에는 말들의 신음 소리인 줄 알았다. 물과 식량이 바닥나고 사람들은 황무지에서 말을 아낀다. 그저 걷고 또 걸어야만 하는 시간들 속에서 세 그룹은 동물들의 부담을 줄이려 자신들은 옆에서 걷는다. 믹은 시종일관 자기 말 한 필 위에 앉아서 이동한다. 그 모습이 얄밉다. 믹 외의 남자들은 동물들을 끌고, 여자들은 몇 걸음 떨어져서 걷는 형태다.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걷는 여자들을 보는 게 재미있었다. 여자들이 불만이 더 많이 생길 수밖에 없는 형태라고도 생각했다. 젊은 부부 중 아내인 밀리는 히스테리를 터트린다. 여기서 히스테리란 가부장에게 자기 존재를 의지하고 맡긴 채 자신은 사태에 관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여겨 혼란스러움이 폭발하는 것이다. 믹은 여자들과 대화할 때 이렇게 말한다. '저는 여자들은 카오스에서 왔다고 생각합니다. 남자들은 파괴로부터 왔죠.'
영화 속 여자들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남자들의 목표는 명확하다. 식구가 정착할 만한 '기회의 땅'을 찾는 것이다. 식수를 찾고, 금을 찾고, 공격당하기 전에 먼저 야만적인 인디언을 찾아내는 것이다. 여자의 경우엔 그런 남자를 믿는다. 에밀리는 남편에게 자기가 믿는 것은 당신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가만히 걷는 와중에 생포된 인디언이 눈에 들어온다. 에밀리는 인디언에게 저녁식사를 나눠준다. 그에게 식수를 준다. 이 두 단계에서 두 사람의 소통은 분명히 발전한다. 처음에는 거칠고 퉁명스러워 보이게 접시를 내려놓았던 인디언이 두 번째에서는 부드럽게 그릇을 내려놓는 것이다. 에밀리는 돌에 벽화를 그리는 그의 신발을 바느질로 고쳐준다. 그녀는 그렇게 하면서 믹의 비아냥과 밀리의 우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에밀리는 '빚지기 싫다'고 말했지만 정말 인디언을 위해 하는 행동들이 그런 의도 때문이었을까? 에밀리는 같은 인간에게 마땅히 해야 하는 인륜, 천륜적인 마음을 자신도 명확히 인식하지 못한다. 그래서 익숙한 자본주의의 틀 대로 자기 마음을 읽어낸 결과가 '빚지기 싫다'이다. 그녀에게는 따뜻한 마음이 있지만 그것을 해석할 언어 틀이 부족했던 것이다.
<믹의 지름길>에서는 <퍼스트 카우>가 선명하게 보인다. (북미 개봉 순서대로 하면 반대겠다) 땅과 바다에 주인이 없고, 자기가 자기 살 길을 모색해야 했던 19세기 서부개척 시대라는 시대적 배경을 공유한다. 나는 그 시대를 여태껏 봐 왔던 서부극의 신나고 열정적인 황야의 모험으로 상상했었다. 하지만 라이카트는 말이 없고 막막한 끊임없는 걷기로 개척 시대를 나타낸다. 두 영화는 모두 우정을 다루고 있기도 하다. 질서가 없고 삶과 죽음이 손바닥 뒤집듯 되는 시대에서 서로를 믿고 피어나는 그런 우정 말이다. (에밀리의 라탄 바구니를 들고, 그 안의 돋보기를 유심하게 보는 인디언)
세 마차 중 한 그룹은 특히 독실하여, 쉬는 시간에 그들은 성경을 읽고 찬송을 왼다. 어린 지미가 있고 글로리는 임신한 상태다. 물을 거부하던 남편 윌리엄은 걷다가 쓰러진다. 이 상황에서 인디언은 윌리엄의 주변에 모래를 뿌린 뒤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세 구의 마차를 옮길 때 가만히 지켜만 보던 상황과 완전히 대조된다. 윌리엄이 쓰러졌을 때 인디언은 적극적으로 개입하며 그의 노래는 영화 속 인물들과 영화 밖 관객들 모두에게 커다란 파문을 몰고 온다. 우리가 잊고 있었던, 인생이란 마땅히 이래야 한다는 느낌을 가져오는 것이다. 힘들게 전진하다 누군가 쓰러지면 그와 우리를 위해 노래를 불러야 한다는 느낌 말이다.
믹이 인디언에게 총을 겨누었을 때, 그 총구가 화면을 향하므로 관객은 마치 우리에게 총이 겨누어진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 믹에게 에밀리가 총을 겨누어 만들어지는 삼각 구도를 보며 왠지 눈물이 났다.
라이카트는 섬세하게도 처음에는 인디언을 밧줄로 감아 줄에 매인 채로 이동하게 하지만, 하룻밤이 지나고 나서는 그를 줄에서 풀어낸다. 그를 묶어봤자... 물을 발견하기가 더욱 늦어질 뿐이다. 우리는 결국 같이 움직여야 하는 사람들이다. 끊나지 않을 것 같은 황야라는 자연 속에서 살기 위해 물을 찾아내야 하는 운명공동체다.
미래를 아는 관객은 우리 주인공들이 물이 있는 지역, 혹은 인디언 마을에 도착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서도 우려스럽다. 그래서 주인공들이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인디언 마을에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한다. 과거의 폭력은 행해졌다. 황야 한가운데서 길을 잃은 인물들은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다.
Relative contents
-
- 부드러운 거부로서의 애도,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
2015년 퓰리처 희곡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른 『Marjorie Prime』은 유족의 기억을 통해 망자의 정체성을 재현하는 인공지능 홀로그램, ‘프라임’을 중심으로 디지털 시대 죽음과 애도의 의미를 날카롭게 질문하는 작품이다. 동명의 희곡을 각색한 영화,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 Marjorie Prime> 또한 기억이라는 삶의 요소가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과 맞물려 다양한 애도의 방식으로 분화되는지 다룬다.
그러나 '디지털 부활'은 더이상 픽션의 영역이 아니다. 2016년, 러시아 기자였던 Eugenia Kuyda는 사랑하던 연인을 잃고 그와 나눈 메시지를 모두 모아 구글 기반의 신경 네트워크(neural network)를 활용하여 그를 챗봇으로 부활시켰다. 챗봇 버전의 연인은 정말 사람 같아서 Kuyda는 챗봇과 과거와 미래에 관한 얘기를 나누며 연인을 잃은 슬픔을 해소했고,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이 쓸 수 있는 대화형 챗봇, ‘Replika’를 만들었다. 한국에서도 2020년부터 매년 사망한 가족을 딥페이크, VR, 인공지능 등의 기술을 활용하여 ‘부활’시키는 <VR휴먼다큐멘터리-너를 만났다> 프로그램이 방영되었다. 2025년 현재, 구글 플레이 스토어 기준 ‘Replika’의 다운로드 수는 천만 회를 넘어섰고, <너를 만났다> 프로그램 시즌 1 유튜브 클립 영상 조회 수는 3천 6백만 회를 기록하는 등, 디지털 부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인공지능을 활용하여 망자를 시청각적으로 재현하는 '디지털 부활'이 점점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고인이 된 이후에도 사랑하는 사람과 닿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디지털 기술을 통한 부활을 가속화하고 있다. 조형래는 “망자를 기리는 첨단의 기술적 방식이 막대한 규모의 사회적 정동의 재구성을 초래하고, 죽음에 대한 사회적 태도 및 문화적 관행 전반에 영향을 초래할 것임이 분명”하다면서, “이러한 초혼(招魂)의 테크놀로지가 프로이트적 의미의 애도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더 나아가 유족들에게 끊임없는 추모의 고통을 유발”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반면 디지털 시대 죽음의 의미를 연구하는 심리학자인 일레인 카스켓은 디지털 기술을 통한 애도가 지속적 결속(continuing bonds)의 한 종류라고 주장하면서, 고인과 유대 관계를 끊지 못하는 이들을 우울증 환자로 취급하는 경향을 문제시한다. 카스켓에 따르면, 고인과 유대 관계를 유지하려는 사람들은 사랑하던 고인과 맺은 심리적, 정서적 유대를 소중히 하거나 심지어 더 강화하고자 하는 오래된 충동에 따르는 것뿐이다.
영화는 마조리가 월터 프라임, 그러니까 15년 전 사망한 자신의 남편을 홀로그램으로 재현한 인공지능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월터 프라임은 자신이 청혼하던 날 함께 봤던 영화,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 얘기를 꺼내고, 치매에 걸린 마조리는 이를 기억하지 못한다. 중요한 기억을 잊어버린 자신을 원망하던 마조리는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 대신 “<카사 블랑카>를 보고 돌아온 날 청혼했다면?”이라고 묻고, “다음에 우리가 (청혼) 얘기를 나눌 때는 이게 사실이 되는 거야.”라고 말한다. 어차피 거짓된 기억을 말해도 치매로 인해 사실 여부를 제대로 판단할 수 없는 마조리는 이후로도 종종 월터 프라임에게 왜곡된 기억을 요청함으로써 망상적 위안을 얻는다.
생의 끝자락, 기억을 왜곡해서라도 숨기고 싶은 과거는 월터 프라임이 예전에 키우던 강아 지인 토니 얘기를 꺼내면서 분명해진다. 월터 프라임은 마조리에게 ‘자식이 없던 한 연인이 토니라는 이름의 검은색 푸들을 키웠는데, 토니가 죽고 나서 낳은 딸-테스-도 검은색 푸들을 골랐다’라는 이야기를 해준다. 마조리가 두 번째 푸들에게 ‘토니 2세’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설명하자, 월터 프라임은 두 번째 푸들도 금방 ‘토니’라고 불렸다며, 두 강아지가 완전히 똑같지는 않았음에도 나중에는 토니와 토니 2세를 구분하는 의미가 없어졌다고 말한다. 여기서 토니는 -2막에서 등장하는 앵무새와 마찬가지로-망자와 망자를 재현한 프라임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첫 번째 토니를 죽이고 자살한 마조리의 아들, 데미안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월터 프라임이 토니의 죽음을 설명할 때 마조리가 흘리는 눈물은, 키우던 강아지에 대한 그리움이라기보다는 아들의 자살이라는 트라우마를 대면한 자의 눈물로 해석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애도(슬픔)와 우울 Trauer und Melancholie」에서 애도를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에 대한 반응”으로 규정하고, 여기에는 “사랑하던 사람을 대신할 새로운 사랑의 대상을 찾지 못하는 것, 그리고 사랑하던 이를 생각나게 하는 어떤 행동도 금하는 것, 등이 포함된다”라고 설명한다. 달리 말해, 상실을 경험한 사람은 ‘자아의 억제’를 통해 상실 그 자체 외에 다른 곳에는 관심을 둘 수 없는 상태가 된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슬픔(애도)이 “사랑하던 대상이 더는 존재하지 않음을 인식하고 그 대상에 부과되었던 리비도를 철회”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반발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러한 반발이 너무 강하게 되면 상실을 경험한 사람이 아예 “현실에 등을 돌리는 일이 일어나게 되고, 환각적인 소원 성취의 정신병을 매개로 예전의 그 대상에 집착”하게 된다. 프로이트는 이렇듯 정상적 애도에 실패한다면 상실이 자아를 잠식하고 이것이 자기 혐오적 우울증으로 이어진다고 설명하지만, 대상의 상실이 극단적인 트라우마인 마조리의 경우, 자기 혐오적 우울보다는 오히려 그 대상을 무의식적으로 격리하려는 억압(repression)에 가까운 행동을 보인다.
“정신적 트라우마 현상의 핵심은 기억(표상)과 정동”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트라우마를 유발한 사건에 대한 강한 정동적 반응이 있었는지다. 달리 말해, 외상적 사건이 유발한 정동을 언어, 또는 행동으로 수행하지 않으면 정동의 잔여가 정신적 트라우마를 유발하는 것이다. 따라서 히스테리 환자들은 주로 트라우마적 사건의 상기(회고)로 인해 고통을 겪는다. 데미안의 죽음이 마조리에게 트라우마를 유발한다면, 이는 데미안에 대한 애도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데미안이 사랑했고, 데미안이 죽인 토니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마조리는 강한 정동을 경험한다. 이러한 반복적인 표상(기억)의 회고는 마조리에게 고통을 줄 뿐이다. 그래서 마조리는 데미안을 충분히 애도하는 대신, 데미안의 죽음이라는 표상의 억압을 택한다.
마조리는 지난 50년 동안 데미안의 이름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고, 그와 관련된 모든 사진을 집에서 치운 채 살아왔다. 하지만 치매에 걸린 마조리는 데미안이 죽었다는 사실을 잊고 테스에게 “데미안은 지금 자?”라고 묻는다. 마조리가 치매를 앓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아무렇지도 않게 데미안의 행방을 물은 직후 월터와 공원 벤치에 앉아 사프란 색의 깃발을 바라보던 기억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마조리의 모습은 모순적이다. “(벤치에서) 일어나기 싫었어. 남은 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으니까”라는 마조리의 대사는 데미안의 죽음 이후에도 삶을 이어나가야 하는 마조리의 처참한 심정을 대변한다. 이것은 데미안의 죽음이라는 표상 (기억)이 사라진 이후에도 지속되는 정동의 잔여를 의미한다.
존은 마조리가 해준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월터 프라임에게 마조리가 사프란 깃발을 바라봤던 날의 추억을 전해주지만, 영화는 플래시백 장면을 통해 마조리가 사실 공원 벤치가 아닌, 거실 소파에 앉아 TV에 나온 장면을 봤던 것임을 밝힌다. 테스의 주장처럼, 마조리는 “원래의 모습이 아니라 마지막 기억을 기억하는 것이며” 따라서 기억은 “되풀이될수록 희미해지는 복사본”과 같은 것이 된다. 결국 프라임에게 주입되는 기억은 “실제 기억이라기보다는 마조리가 기억하거나, 기억하고 싶은 과거”이다. 이렇듯 마조리와 월터 프라임을 통해 재구성되는 기억은 특정 시선에 의해 오염된 기억이며, 따라서 데미안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을 방해한다.마조리에게 데미안의 죽음은 너무도 고통스러운 기억이기 때문에 마조리는 본능적으로 이를 억압하려 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억압이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 확연한 간극이 생길 때 발생”한다며, “억압의 본질은 자아를 위협하는 본능(충동)을 의식으로 진입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억압의 동기와 목적은 본능이 만들어낸 “불쾌를 피하는 것”이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트라우마가 해소되기 위해선 “억압의 극복과정을 통한 기억의 회복”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아들의 자살이라는 트라우마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치매에 걸린 마조리는 월터 프라임의 외형을 아들이 자살하기 전인 젊은 시절로 설정하면서 아들 죽음 이전의 과거로 회귀하고자 하는 충동을 보인다. 아들을 충분히 애도하지 못하고 오히려 아들의 죽음을 잊고자 하는 마조리의 태도는 현실 도피적 성향을 띤다는 점에서 월터 프라임이 제공하는 망상적 위안을 통해 유지된다.
월터 프라임을 비교적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마조리조차도 망자와 망자를 재현한 인공지능 사이의 간극이 촉발하는 ‘두려운 낯섦’을 겪는다. 두려운 낯섦은 “공포감(또는 기이한 불안)의 일종으로,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오래전부터 친숙했던 것에서 출발하는 감정”이다. 이정환은 프로이트가 말한 ‘두려운 낯섦’이라는 개념이 로봇 공학과 관련된 논의에서 흔히 들을수 있는 “불쾌한 골짜기”와 연관이 있다고 설명한다. 두려운 낯섦에 대한 프로이트의 주장 처럼, 불쾌한 골짜기에 대한 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비인간에 대한 인간의 무의식적 두려움”이 명백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프라임이라는 ‘기술’에 호의적이든, 그렇지 않든,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신이 사랑 하는 사람을 재현한 프라임과 마주했을 때, 프라임이 자신이 생각했던 망상적 위안을 충분히 제공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왜곡된 기억을 그대로 흡수하고, 젊었을 적 외형이 데미안의 죽음 이전을 상기하는 월터 프라임을 통해 데미안의 죽음이라는 트라우마적 사건을 억압 하는 마조리조차도, 월터 프라임이 월터 그 자체가 아니라는 사실에 불쾌감을 느낀다. 자신이 생각한 실재의 이미지를 프라임이 충분히 재현하지 못할 때, 프라임은 망자의 말을 의미 없이 반복하는 앵무새에 불과한 존재가 된다.
이정환은 대상의 기억을 주입하면, 프라임을 통해 그 사람의 존재가 영원히 지속될 수 있지 만, 이 기억은 살아 있는 자의 욕망이 투영되어 있다는 점에서 실재 망자와는 다른 결핍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생전에 사랑했던, 친숙한 망자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망자와는 다른 프라임의 모습은 유령과도 같은 두려운 낯섦을 유발한다. 허구의 작품뿐만 아니라 현실속 디지털 부활 또한 두려운 낯섦을 유발하는 건 매한가지다. 조형래는 디지털 기술을 통한 망자의 재현은 늘 “고인에 대한 추모와 의미 부여를 둘러싼 다양한 상호작용을 거스르는 미묘한 위화감을 수반한다”라고 설명한다. 이렇듯 작품 안팎에 무관하게, 기술적 한계는 감각적인 측면에서도, 인지적인 측면에서도 대상을 완벽히 재현해낼 수 없다는 점에서 늘 기이한 불안, 두려운 낯섦, 즉 불쾌감을 유발한다.
테스에게도 데미안의 죽음은 평생의 트라우마이다. 마조리는 평생 데미안의 이름 한 번 꺼낸 적 없지만, 테스는 늘 데미안의 죽음으로 인해 마조리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정신적 외상은 테스의 자아에도 영향을 미쳐 영화 내내 테스는 “예민하고 성마른 성격의 소유자이자, 매사에 부정적인” 사람으로 묘사된다. 테스는 월터 프라임에게 질투를 느낄 정도로 프라임에 대해 부정적이지만, 결국 마조리가 사망하자 치유의 도구로서 마조리 프라임을 소환한다.
마조리 프라임은 테스에게 ‘토니 데리고 해변에 갔던 거 기억하니?’라고 묻는다. 테스는 기억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존이 개를 키우자고 제안했다면서, ‘카타훌라’를 고려하고 있다고 말한다. 생전 마조리는 ‘카타훌라’가 무엇인지 몰랐으므로, 마조리 프라임 또한 테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그러자 테스는 마조리에게 “‘카타훌라’를 검색해 보라”고 요청한다. 이는 프라임이 진정한 ‘대상’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의 환상이 필수적임을 의미한다. 달리 말해, 이것은 프라임의 ‘이용자’가 프라임이 환상에 불과함을 인지하고 있는 한, 프라임과의 대화가 어떠한 치유 효과도 산출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프라임이 환상에 불과하다면, 프라임과의 모든 상호작용 또한 결국 허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마조리 프라임은 테스의 요청에 따라 카타훌라 하운드의 사전적 지식을 로봇처럼 읊고, 테스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며 ‘(마조리 프라임이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사실, 즉 진짜 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 모른 척을 더는 못하겠다’라고 말한다. 테스는 이어 ‘(마조리 프라임이) 정말 엄마 같다가도, 어떨 때는 (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이) 너무도 확연하다’라고 말한다. 이미 지와 실재의 간극은 이렇듯 과거가 아닌 현재의 기억으로 인해 명확해지며, 테스로 하여금 ‘엄마처럼 친숙하지만, 엄마가 아닌’ 두려운 낯섦을 느끼게 한다. 이어지는 장면은 이 두려운 낯섦으로 인해 프라임이 어떻게 치유의 실패로 이어지는지 묘사한다.
표면적으로 테스는 엄마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했다는 콤플렉스를 갖고 있지만, 그의 근원적인 트라우마는 마조리와 마찬가지로 데미안의 죽음이 원인이다. 마조리 프라임은 ‘진짜 엄마 같지 않다는’ 테스의 불만에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더 해달라고 말하고, 이는 자연스럽게 테스가 엄마의 기억을 회고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마조리 프라임은 테스에게 결정적인 질문을 던진다. 마조리 프라임이 ‘테스 말고 다른 자식이 있었냐’고 묻자, 테스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없었다’라고 대답한다. 생전 마조리가 평생 데미안을 언급하지 않았던 것처럼, 테스 또한 데미안에 대한 기억을 숨기면서 자신의 트라우마를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반드시 생생한 정동적 경험을 포함하여, 망각된 외상적 사건을 기억해 정확히 말로 표현”할 때야 비로소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트라우마의 심리적 치유를 위해선 단순한 외상적 사건의 재현을 넘어선 생생한 재경험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프라임은 얼마든지 남아있는 자들에 의해 왜곡된 기억만을 선별적으로 저장할수 있으므로, 치유의 ‘도구’로서 프라임은 제 기능을 다 할 수 없다. 기억의 선별과 왜곡된 기억이 유발하는 이미지와 실재의 간극, 즉 두려운 낯섦은 심리적 치유를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라깡은 “욕망의 중심에 놓여있는 결여”를 ‘'대상 a'’라고 지칭하면서, 상상계적 질서 속에서 이 대상은 어떤 욕구도 충족시키지 못한다고 설명한다. 테스는 마조리 프라임을 형성하기 이전부터 자신이 원하는 어떤 환상을 프라임에게 투사한다. 이 환상은 데미안의 죽음을 기억하지 못하는, 그래서 자신에게 늘 다정하고 충분한 사랑을 주는 엄마이다. 그러나 마조리 프라임이 정말 테스에게 인자하게 미소 지으며 다정한 말을 건네자, 테스는 ‘덜 웃어야 엄마 같아 보인다’라고 충고한다. 테스의 '대상 a'-엄마의 사랑이라는 욕망의 결여-를 충족하기 위해서 마조리 프라임은 테스에게 생전에 주지 못했던 사랑과 다정함을 주어야 하지만, 동시에 사랑을 주면 줄수록 ‘진짜’ 마조리와는 멀어진다는 점에서 테스의 환상은 결코 충족될 수 없다.
애증의 대상이자 환상 속 '대상 a'인 엄마의 상실은 테스를 우울로 이끈다. 프로이트는 우울과 슬픔의 차이를 ‘자애심의 추락’으로 설명한다. “우울증 환자는 대상과 관련된 상실감으로 고통을 겪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말을 들으면 그것이 자아와 관련된 상실감이라는 것이다.” 테스는 계속해서 마조리와 존의 입을 빌려 자기 자신을 ‘무너졌다’거나, ‘엄마를 사랑하게 만들 수 없었다’고 표현한다. 마조리에게 향해 있던 애증의 리비도가 마조리의 죽음 이후 갈 곳을 잃고 테스의 자아를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눈치라도 챈 듯 마조리 프라임은 테스에게 ‘자기 자신에게 너무 가혹하게 굴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나 마조리 프라임과 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애도의 실패-우울증은 결국 테스를 자살이라는 파괴 충동으로 이끈다.
프로이트가 정상적인 애도, 달리 말해 상실을 극복하고 애도를 마무리하는 ‘작업’을 중시했던 까닭은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이 자아를 좀먹고 파괴 충동으로 이끄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데리다는 정상적인 애도와 비정상적 애도를 구분하는 프로이트의 애도 이론을 비판하면서, 죽음이 타자를 잊는 여정의 시작이 아니라, 타자를 기억하는 여정의 시작이라고 주장한다. “데리다가 보기에 프로이트의 정상적인 애도가 갖는 문제는 타자의 타자성을 말살하려 한다는 데 있다. 성공적인 애도 작업을 통해 내면화가 가능해지면, 타자는 나의 일부가 되는데, 그렇게 되면 타자는 더는 타자가 아닌 것이 되기 때문이다.”
마조리에 대한 테스의 정동-상실감으로 인한 우울, 사랑, 증오-은 너무 강력해서 테스는 자신의 편협한 시선에서 기억하는 마조리의 모습-약간 허영심이 있고, 까칠하며, 자신에게 한번도 사랑한다고 해준 적이 없을 만큼 데미안을 사랑한-만을 회고한다. 마조리 프라임은 이렇듯 테스의 내면화된 타자를 온전히 재현할 수 없다는 점에서 테스에게 두려운 낯섦을 유발하고, 프로이트식의 ‘정상적인 애도’를 완수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러나 애도의 실패가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애도는 “가능성과 불가능성, 성공과 실패의 반복적 진동 속에서 수행 적으로 이루어지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테스의 자살 이후, 존 또한 테스 프라임 앞에서 두려운 낯섦을 느낀다. 평소에도 프라임에 호의적이었던 존은 테스 프라임을 더 진짜 테스처럼 만들기 위해 적어두었던 테스의 특징들을 테스 프라임에게 읊어준다. 하지만 존 또한 이내 ‘(프라임은) 반사판 (Backboard)에 불과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나는 지금) 혼잣말을 하고 있다’라고 말하며, 테스 프라임과의 대화에 회의를 느낀다. 그러나 데리다에 따르면, 이러한 ‘좌절된 내면화’는 “타자를 타자로서 존중하는 것, 즉 부드러운 거부의 자세”를 의미한다. 프라임에게 아무리 왜곡된 기억을 주입한다고 해도, 프라임이 환상 속 ‘대상 a’를 완벽하게 충족하는 것은 아니다. 남아있는 자는 필연적으로 이미지와 재현의 간극으로 인한 두려운 낯섦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려운 낯섦이 초래하는 애도의 실패는 동시에 ‘타자를 타자로서 받아들이는’ 애도의 시작이 된다.
데리다는 “기억을 통한 내면화”가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자아를 잠식하는 멜랑콜리아를 긍정하는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멜랑콜리아는 타자를 버려두고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일종의 나르시시즘적 퇴행 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데리다는 “애도의 가능성과 불가 능성이 만나는 지점, 애도의 성공과 실패가 같아지는 지점, 애도와 멜랑콜리아가 중첩되는 공간”에 주목한다. 즉, “애도는 타인의 세계가 끝날 때, 타인을 위해 그 끝을 내 안에 담는 것이며, 동시에 관념화, 내면화, 그리고 식민화에 저항”해야 한다. “타자를 관념화하는 내사 (introjection)가 망각의 시작 지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멜랑콜리아는 극복해야 할 질병이 아닌, 내사에 저항하는 힘이 된다.
존이 테스 프라임에게 느끼는 두려운 낯섦은 이러한 멜랑콜리아를, 자기혐오의 감정을 유발한다. 그러나 이 두려운 낯섦이야말로 테스 프라임을 ‘존의’ 테스로 만들려는 시도를 무화하고, “살아남은 자인 존에게 허락된 삶 자체”를 끊임없이 인식하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존의 삶 속에 공거(cohabitation)하는 테스 프라임은 “우리 안에 사는 ‘목격자’”이다. 존은 마조리처럼 죽음을 망각하는 망상적 위안에 의존하지도, 테스처럼 멜랑콜리아를 견디다 못해 자살에 이르지도 않는다. 대신, 그는 자신의 시선에서 바라본 테스를 내면화하고, 테스와의 기억을 회고하며, 동시에 프라임의 본질적인 두려운 낯섦을 인식하고 절망하기를 반복하면서 테스의 죽음을 애도한다.
데리다는 “타자가 타자성을 유지하면서 우리와 대화 관계에 있는 ‘생각하는 기억’을 애도의 본질”로 보았다. 따라서 데리다는 멜랑콜리아와 애도가 분리된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인식할 수 없는 것은 인식하려는 애도, 달리 말해 애도 가능성과 애도 불가능성 사이의 진동이 애도하는 텍스트의 직물을 짜고, 애도의 성공과 실패 사이의 아포리아가 길을 여는” 멜랑콜리한 애도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애도라고 주장한다. 인류 탄생 이래, 현실적으로 망자의 발언이 가능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최근 디지털 기술의 발전은 망자의 발언을, 망자의 부활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데리다가 만약 살아 있다면, 망자의 동의 없는 기계적인 디지털 부활을 경계했으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한 디지털 부활은 오직 남아있는 자의 나르시시즘적 멜랑콜리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만 제작되고, 이용된다는 점에서, 기계적 디지털 부활은 너무도 쉽게 프로이트적 애도 작업의 완수를 위한 도구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앞서 프라임이 어떻게 “멜랑콜리아를 ‘극복’하는” 애도의 실패를 전제하는지 살펴보았다. 특히, 프라임은 남아있는 자가 주입한 ‘기억’과 새롭게 형성된 ‘지식’, 그러니까 다른 프라임과 대화하거나 인터넷에 검색함으로써 얻어낸 지식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애도의 실패와 성공을 오간다는 점에서, 데리다적 멜랑콜리한 애도를 체현한다. 존이 손녀를 테스 프라임에게 소개하는 장면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멜랑콜리한 애도를 예증하는 장면이다. 존이 테스 프라임에게 ‘손녀가 분류학을 공부하고 있다’라고 설명하자, 테스 프라임은 ‘이분법(Dichotomous)을 이용하지’라고 대답한다. 자연스럽게 분류학에 관한 대화를 이어 나가는 테스 프라임과 달리, 존은 테스 프라임이 분류학에 관한 지식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존의 시선에서 바라본 테스의 기억과 테스 프라임이 새롭게 얻은 지식의 혼합은 이전 에는 ‘말할 수 없던 것’, 즉 손녀와의 예측할 수 없는 상호작용을 존이 인식하게 한다. 존은 마치 어린아이 다루듯 테스 프라임에게 ‘입양이 무슨 뜻인지 알지?’라고 묻다가도, 이분법을 말하는 테스 프라임에게 놀라면서 애도의 성공과 실패를 경험한다. 테스 프라임은 그런 의미에서, 존의 내면에 식민화될 수 없는 테스의 이미지를 새기고, 테스의 죽음을 인식함과 동시에 존의 내면에 의해 식민화되지 않은 테스 그 자체를 기억하고, 애도하도록 돕는다.
데리다의 관점에서 프라임의 가장 큰 의미는 ‘내면화되지 않는 지속적 기억’에 있다. 프라임은 남겨진 자들의 기억에 의존하지만, 동시에 그 기억은 인간과 달리, 프라임의 내면에 잡아 먹히지 않고 영원히 그 상태를 유지한다. 인간의 기억은 꺼내면 꺼낼수록 희미해지거나 왜곡되지만, 프라임의 기억은 처음 상태 그대로 지속되며, 프라임 자신의 내면에 의해 오염될 가능성도 없다. 인간이 되고 싶은 욕구를 드러내긴 하지만, 프라임에게 인간과 같은 완전한 자아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러한 프라임의 기억을 영화에서 다양하게 변주되고 반복되는 ‘물’의 이미지를 통해 시각화한다.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은 희곡인 원작의 특성을 반영하여, 한정된 인물과 배경을 활용한, 절제된 미쟝센을 사용한다.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프라임 외에 다른 기술적인 특징은 눈에 띄지 않으며, 심지어는 기본적인 가구 이외의 소품조차 얼마 등장하지 않는 미니멀리즘적 미쟝센은 프라임과 인물들의 관계에 집중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미니멀리 즘적 집 내부와 대조적인 과잉 생산되는 물의 이미지는 영화의 주제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메타포다.
월터와 마조리의 집이자 테스와 존의 집인 영화의 주된 배경은 바닷가에 위치한다. 그래서 영화는 해변가를 걷는 테스와 존의 모습이라든가, 인물 없이 파도치는 장면이 종종 삽입하거나, 계단 옆에 걸린 파도 그림을 클로즈업하기도 한다. 토니가 해변가 달리기를 좋아했다는 마조리의 대사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데미안을 상징하는 토니가 사랑했던 바다는 영화 내내 ‘죽음’, 또는 일종의 상실을 상징한다. 마조리, 테스, 존이 사망한 이후 파도-또는 파도를 그린 그림-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죽음을 재현한 이미지인 프라임이 등장할 때는-집이 바닷가에 위치함에도- 어둡고 꽉 막힌 실내나, 또는 커튼 뒤로 희미하게 비치는 나무만이 등장한다. 하지만 세 프라임이 모인 마지막 장면에서는 거실 밖 커튼이 활짝 젖혀있 으며, 잔잔한 바닷가의 모습이 포커싱되도록 인물을 모두 같은 방향에서 촬영된 것을 알 수있다. 이는 궁극적인 영화의 주제인 죽음과 애도를 인간이 모두 사망한 뒤에도 프라임이 이어가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한 연출로 해석할 수 있다.
두 번째로 중요한 메타포는 ‘비’인데, 영화에서 딱 두 번 등장하는 폭우는 영화의 두 번째 주요 키워드인 ‘인간의 기억’과 연관성이 있다. 희미해지는 인간의 기억처럼, 비는 끊임없이 흐르고, 또 쉽게 휘발되고 만다는 점에서 인간의 기억을 상징한다. 따라서 프라임 뒤에 켜켜이 쌓이는 포근한 눈의 이미지는 인간의 기억처럼 흘러가지 않고 차갑게 냉동되어 켜켜이 쌓이는 프라임의 기억을 시각화한 것이다. 이는 영화 속 첫 번째 폭우 장면에서 존과 테스가 기에 대해 나눈 이야기와도 일맥상통한다. “되풀이될수록 희미해지는 복사본”같은 인간의 기억과 달리, 프라임의 기억은 “뇌 안의 퇴적층”처럼, 모든 기억을 원본 그대로 냉동시켜 저장 한다는 점에서 눈과 닮았다.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에서 얼마가 흘렀는지조차 알 수 없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월터, 마조리, 테스 프라임은 한자리에 모여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그들 뒤 넓은 창에는 눈 내리는 바닷가의 풍경이 있다. 켜켜이 쌓이는 눈과 파도치는 바닷가가 보이는 통창 앞에서 프라임은 데미안의 죽음을 끄집어 낸다. 유일하게 데미안에 대한 기억을 들은 월터 프라임이 데미안의 죽음을 언급하고, 데미안에 대해 알지 못했던 테스와 마조리 프라임도 월터 프라임과의 대화를 통해 데미안을 추억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특히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니 얼마나 좋아’라는 마조리 프라임의 마지막 대사는 수 세기가 지난 뒤에도 바래지 않고 타자를 기억하는 애도의 자세를 체현한다. 그러므로 세 프라임 뒤로 펼쳐진 ‘눈 내리는 바닷가’는 테스, 월터, 마조리뿐만 아니라 데미안과 존까지 프라임이 모든 ‘타자’의 죽음을 인간과는 다른 방식으로 영원히 기억하고 있음을, 서정적인 이미지로 형상화한다.
-
- 맞잡은 내 손에 흉터가 있을지라도
맞잡은 내 손에 흉터가 있을지라도, <태어나길 잘했어(2022)>
필름소피_김희연
주인공 춘희는 중학생 때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외삼촌 가족이 사는 집에 얹혀살게 된다. 춘희는 괜한 혹 하나를 달게 되었다는 듯한 외삼촌과 외숙모의 티 나는 눈치와 구박, 동갑내기 사촌 유라와의 불편한 마찰을 뒤로하고 다락방 한 칸을 겨우 쓸 수 있게 된다. 좁은 계단을 오르면 있는 창문과 깔고 잘 이불 하나를 겨우 펼칠 수 있는 공간은 곧 춘희의 안식처가 된다. 난방도 되지 않아 옷을 껴입어야 하는 다락방이지만 나름 춘희가 꾸민 장식들로 채워지고 빛을 낸다. 처음엔 애정을 가지고 개인적인 공간에 대한 표현으로 다락방을 꾸미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영화를 더 보다 보니 애정보단 이런 곳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보겠다는 의지였던 것 같다. 옆에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곳에서 민달팽이 한 마리를 만난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등에 껍데기를 이고 있는 달팽이가 아니라 굳이 민달팽이로 연출한 이유는 민달팽이와 춘희 모두 집이 없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이 통하지도 않고 도움이 되지도 않지만 옆에 자신과 비슷한 무엇인가가 있다는 존재만으로도 아마 춘희에게는 위로가 되지 않았을까. 민달팽이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한참을 쳐다보는 메인 포스터 속 춘희의 모습이 모든 것을 거스른 채 자신만의 우주에 빠진 것처럼 보인다.
‘저는 좀 쩔어있어요, 땀에’ 춘희는 어렸을 때부터 다한증이 있어 언제나 손뿐만 아니라 발에도 땀이 흥건하다. 친척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구박과 미움을 사는 이유에는 춘희의 땀도 포함되어 있었다. 중학생이라는 어린 나이에 견디기 힘들었을 타인의 따가운 시선에 스스로 이것을 오점이라 생각하고 활활 타고 있는 불에 손을 가까이 대어 흉터를 남기기도 하였다. 어른이 된 춘희는 마늘을 까 사촌 오빠의 식당에 가져다 주고 받은 돈을 모아 다한증 수술을 하려 한다. 어느 날 우연히 지나가면서 보게 된 상담 센터에서 다양한 사연과 고민거리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각자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을 보게 된다. 정신 차려보니 어느새 춘희는 모임에 참석하게 되고 그곳에서 주황을 만난다.
주황은 어렸을 때부터 당한 가정폭력으로 인해 말을 더듬는 버릇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주황에게 말을 잘한다고 말해준 유일한 인물이 바로 춘희였다. 둘은 서로의 상처를 이해하고 위로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된다. 하지만 계속해서 ‘제가 춘희 씨 지켜드릴게요.’라며 마음을 표현하는 주황에게 춘희는 ‘주황 씨, 누군가를 지켜준다는 말은 그렇게 쉽게 하는 게 아니에요’라고 거절하며 방어적인 태도를 취한다. 자신이 겪었던 아픔이 컸던 만큼 지켜주겠다는 주황의 말을 쉽게 받아들일 수도, 누군가에게 완전히 의지할 수도 없었던 춘희의 마음을 이해한다. 하지만 주황의 말이 결코 쉽게 뱉은 가벼운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주황은 가정폭력을 겪은 인물로 폭력과 위험으로부터 자기 자신 하나만 지키는 것도 얼마나 힘든 일인지 깨달았을 것이다. 그런 주황이 춘희에게 지켜주겠다는 말을 꺼내기까지는 많은 생각과 결심을 거친 진심 어린 위로였다는 생각이 든다.
비 오는 날 우연히 번개를 맞게 된 춘희는 어린 시절 자신을 만나게 된다. 계속해서 눈앞에 나타나는 어린 시절의 본인을 보는 춘희의 마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누구에게 기대지 못하고 가라앉은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따뜻한 말은 따로 있었지만 항상 말은 마음과 같이 나가지 않는다. 내가 쏘아붙인 모진 말들은 결국 나에게 돌아오고 우리는 모두 흉터를 안고 살아간다. 이렇듯 맞잡은 내 두 손에 흉터가 크게 느껴질 때쯤 이 영화를 한번 봤으면 좋겠다. 잘 커주셔서 감사하다는 최진영 감독님의 말씀에 이 영화에도 봄이 찾아올 것이라고 믿는다.
*씨네랩 크레이터로서 시사회 초청받아 참석하였습니다.
-
- 다른 세상과 얽혀보기
나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따로 별점을 매기지 않는다. 기억이 곧 별점이다. 볼 만했던 영화는 관람하면서 들었던 생각이나 느낌을 기억한다. 재밌었던 영화는 줄거리를 기억한다. 최악이었던 영화도 마찬가지다. 결말까지 세세하게 기억하는 영화는 마음에 쏙 들었다는 의미다.
분명 봤는데 내용도, 감상도 기억나지 않는 영화는 1) 너무 어린 시절이라 기억이 흐려졌거나 2) 기억할 가치를 못 느껴서 지워졌다. '빨간 머리 앤'하면 몇 개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주근깨, 양갈래로 땋은 빨간 머리, 활짝 웃었다가도 잔뜩 성내는 얼굴. 앤이 어떤 아이인지, 주변에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 무슨 일을 겪는지 등 이야기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빨간 머리 앤>은 넷플릭스 추천 드라마 리스트에 단골손님이다. 주변에서도 추천하는 목소리가 꽤 들렸다. 다만 앞서 말한 '기억 별점' 때문에 눈길이 가진 않았다. 선심 쓰듯 찜해둔 목록에 넣어두고 몇 달을 보냈다. 리스트 맨 끝을 차지한 작품들을 하나씩 도장깨기 했던 지난봄, 시즌1 첫 화를 재생했다.
19세기 캐나다 동부, 애번리 마을. '초록색 지붕 집'에 커스버트 남매가 산다. 건강이 나빠진 동생 매슈. 누나 마릴라는 매슈의 농사일을 도와줄 남자아이를 데려오자고 제안한다. 그런데 웬걸. 남자아이가 아닌 여자아이가 기차역에서 매슈를 기다리고 있었다. 볼과 코 주변을 덮은 주근깨, 양갈래로 땋은 빨간 머리. 이 아이가 '앤'이다. 앤은 커스버트 남매가 자신을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줄로 안다. 잔뜩 들떠서 마차를 몰고 가는 내내 입을 놀린다. 집으로 가는 길에 만난 호수, 나무, 꽃에 이름을 달아준다. 우리는 자연물을 단순히 이름 붙인다. 나무, 꽃, 하늘, 구름, 거리. 사물마다 특징을 살려서 수식어를 붙이기도 한다. 큰 나무, 작은 나무, 노란 꽃, 흐린 하늘.
앤의 작명은 남다르다. 희게 흐드러진 꽃나무. 햇살이 눈부시게 내리고, 꽃나무들이 저마다 빛을 가진 듯 반짝인다. 앤은 이 거리를 '환희의 하얀 길(The White Way of Delight)'이라고 이름 붙인다. 지나친 표현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앤은 말한다. 제 상상력을 덧대지 않아도 이미 있는 그대로 아름다운 풍경은 처음이라고.
▶ 전혀 다른 둘이 한 집에 살다
앤은 여전히 어리지만, 고아원에서 열 살 넘은 애는 성인으로 취급한다. 고아원 원장은 해먼드 부부에게 앤을 데려갔다. 노동을 대가로 숙식을 제공받았던 앤. 정확히는 노동 착취였다. 식사나 휴식은커녕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분량을 맡겼다. 실수하거나 제때 하지 못하면 구박과 욕설을 퍼붓고, 물리적 폭력도 가했다. 주변에 긍정적인 기운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앤은 자기 나름대로 방법을 찾는다. 책, 그리고 상상이었다. 흔하고 투박한 사물을 그럴싸하게 부르며 가상의 이야기를 만든다. 과한 미사여구와 풍부한 감성은 끔찍한 상황에서 앤을 지키는 방패였다. 앤이 세상을 보는 눈, 앤의 생각, 앤의 방법이 반감을 가졌던 타인들을 변화시킨다.
마릴라는 날카로운 원리원칙주의자다. 예컨대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은 매슈를 구박한다거나 외출복을 아무렇게나 던져둔 앤의 행동을 지적한다. 농장 일을 할 수 있다는 앤의 말을 듣지 않은 것도 본인의 신념이 확고해서다. '농장 일은 남자애만 할 수 있다. 앤은 여자애라서 집안일이면 몰라도 농장 일은 절대 시킬 수 없다.' 마틸다의 지론이었다. 마릴라에게 앤은 커다란 변수였다. 그렇게 다니고 싶어 하던 학교에 가지 않고, 앤을 깎아내린 마릴라의 친구 레이철에게 똑같은 말로 갚아주었다. 마릴라의 기준과 하나도 맞지 않았다. 오해가 생기거나 다투는 상황이 이어졌다. 그러나 싸움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시행착오이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크고 작은 변화가 생기기 때문이다.
'젊은 어머니의 모임'에 참여하게 된 마릴라. 이 모임은 여자아이들을 키우는 어머니들의 모임으로, 어떻게 아이를 교육할지 각자의 생각을 나눈다. 과거 '농장 일은 무조건 남자의 몫'이라던 마릴라가 그들의 이야기들을 깊이 공감하며 받아들였다. 레이철의 핀잔에도 굴하지 않고, 새로운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또, 학교에 가기 싫다는 앤을 나무라기 위해 목사를 부른 때였다. 신앙심 깊은 마릴라는 목사의 해답을 기대했다. 목사의 답은 뜻밖이었다. '여자아이는 학교에 다니지 말고, 좋은 집에 시집가기 위한 신부 수업을 들어야 한다.' 마릴라는 동조하지 못했다. 마릴라의 원리원칙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경험이었을 것이다.
마릴라는 목사의 말을 듣지 않는다. 앤이 원하는 것을 하도록 내버려 두기로 한다. 학교에 가고 싶다면 가고, 무언가를 배우고 싶다면 배우고, 뭐가 됐든 하고 싶은 일을 하길 바라며. 의젓하게 굴어도 앤은 어리숙한 십 대였다. 갈피를 못 잡던 앤도 마릴라의 지지에 힘을 얻는다.
사실 앤은 누구보다 학교에 가고 싶어 했다. 배움의 폭이 넓어진다는 기대로 매 수업에 성실히 참여했다. 그랬던 앤이 학교를 거부한 이유, 바로 친구들이었다. 앤을 얕잡아 보고, 가볍게 놀리고, 눈치를 주던 아이들. 관심사도 맞지 않아서 적응을 어려워했다. 앤은 친구들과 가까이 지내고자 현실과 상상을 적절히 섞어 이야기를 지어냈다. 그럴듯한 이야기가 진짜처럼 퍼지고, 이야기의 주인공은 루머 때문에 괴로워한다. 이 일로 앤은 온갖 손가락질을 받는다. 잘못된 행동은 맞다. 하지만 옳고 그름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는 앤이 친구와 어울려 보고자 이런저런 말을 뱉었다는 사실을 누구도 고려하지 않았다.
▶ 앤에게서 얻는 교훈
와중에 친구들 중 한 명인 루비의 집에 화재가 난다. 수리할 때까지 앤의 집에 머물게 된 루비. 그 집에 가기 싫다고 엉엉 울며 때를 쓴다. 앤이 목숨 걸고 루비의 집을 도와주었는데도 루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억지로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된 둘. 앤이 자신의 아지트로 초대하며 상상하는 즐거움을 알려준다. 상상 자체를 서툴어하는 루비에게 근사한 소재를 던져준다. 루비는 앤의 이야기에 흠뻑 빠진다. 마지막 밤, 루비는 앤에게 아쉬움을 드러낸다. 너를 학교에서 보면 좋겠다는 말을 잠꼬대로 덧붙이며.
앤은 애번리 마을 사람들과 아주 달랐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다 비슷해 보이면 주눅 들 수밖에 없다. 말과 행동을 검열하고, 흉내와 모방에 에너지를 쏟게 된다. 일방적으로 한쪽에 맞추면서 감정이 겹겹이 쌓인다. 그만큼 괴로움도 자란다. 감정은 꾸며낸다고 해서 변하지 않는다. 결국 자기 자신부터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타인(들)과 다르고, 그 다름은 당연하다는 사실을.
또, 약간의 상상력이 필요하다. 좋아하는 소재나 에피소드를 떠올려 자기 자신과 그 주변에 적용해 본다. 작은 숨구멍 하나를 만들면 더 나은 내일을 꿈꿀 수 있다. 그 힘으로 다른 세상과 마주한다. 충돌이 아니다. 앤을 생각해보자. 어려운 용어 사용을 즐기고, 감정표현에 충실한 앤. 소통 방법이 전에 없이 독특했다. 그래서 오해와 다툼이 생겼다. 앤이 모든 갈등을 해소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인정과 용인에서 나온다.
애번리 마을 사람들에게 앤의 방식이 낯설었듯 앤도 마릴라의 원칙이, 친구들의 관심사가, 해야 할 말과 해서는 안 될 말을 구분하는 일이 낯설었다. 초면인 건 마찬가지다. 여기서 앤은 자신의 방식을 숨기지 않되 상대의 다른 방식도 받아들였다. 마릴라의 말대로 옷 정리를 하면서도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늘어뜨렸다. 마릴라는 앤의 말을 무시하지 않는다. 제 방식을 앤이 존중해주어 자신 또한 앤의 방식을 존중한다. 결국 서로를 탐색하고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처음은 언제나 삐걱거린다. 판단은 잠시 미뤄두고 상대의 언어를, 상대의 시선을 알아보려는 호기심이 다름을 존중하는 첫 발이 아닐까.
*사진 출처는 IMDB입니다.
등급
12세 이상 관람가
장르
시대물
원작
도서 빨간 머리 앤
제작
모이라 월리베킷, 니키 카로, 어맨다 태핑
출연
에이미베스 맥널티(앤 셜리 役), 제럴딘 제임스(마릴라 커스버트 役), R. H. 톰슨(매슈 커스버트 役) 등
* 본 콘텐츠는 브런치 박윤혜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 사랑에 빠진 날 달에다 데려다줘
사랑은 우주선을 타고
이 영화의 주인공은 마케팅 전문가 켈리(스칼렛 요한슨)다. 못 파는 건 없다. 아니 이야기로 못 만드는 건 없다. 이 세상 존재하는 어떤 것에도 사연을 만들어서 파는 켈리. 왠지 그동안의 과거가 묘연한 사람이지만 확실한 인싸들에겐 거칠 것이 없다. 어느 날. 어떤 남자가 켈리를 찾았다. 그 남자는 모 바커스(우디 해럴슨). 모 바커스는 이내 곧 자신을 소개한다. "왜 차 같은 거나 팔아요? 당신은 더 큰 걸 팔 수 있어요"라는 모. 모는 자신감 넘치는 말투로 켈리에게 '나사(NASA)에 취업하지 않겠냐'라고 묻는다. 제안만 하면 다행이다. 금세 켈리의 숨겨진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며 스스로를 '나랏일 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상처 투성이의 과거를 숨겨주겠다는 모 바커스. 켈리가 나사(NASA)에 들어갈만한 이유는 충분하다. 그리고 그곳엔 듬직한 남자 콜 데이비스(채닝 테이텀)가 있었다. 한참 우주에 우주선을 보내려고 노력하고 있었던 미국 정부와 나사. 켈리는 마케팅 전문가로서 나사에 합류한다. 하지만 모의 제안이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미국과 세계가 놀랄만한 아이디어를 건네는 모 바커스. 속이거나, 사랑에 빠지거나, 우주에 도착하거나 셋 중 하나다.
샌드위치형 구조
영화에서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야기의 구조다. 이 영화의 구조는 크게 두 갈래다. 첫째. 포스터에 대문짝 하게 걸려있는 채닝 테이텀과 스칼렛 요한슨이 펼치는 로맨스/코미디다. 마케팅 전문가인 여자와 NASA에서 근무하는 우주 전문가인 남자. 두 남자는 술집에서 우연히 만나 사랑을 시작한다. 이 두 사람이 사랑을 시작하는 장면이 아주 흥미롭다. 첫 장면. 여자가 카페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그 책에 불이 붙는다. 이과생인 남자는 그 책에 '불이 붙는다'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여자는 일종의 수작이라고 생각한다. 남자는 진짜 책에 불이 붙어서 건넨 말이었다. 문과형 여자와 이과형 남자가 불에 대한 반응으로 성격을 보여준 예시가 될 것 같다. 이건 두 사람이 처음으로 마음을 고백할 때 보여주는 대사에서도 읽을 수 있다. 남자는 여자의 구역에 다가가려 용기 내 한 마디를 건넨다. 하지만 남자는 서투를지언정 솔직하게 나 자신을 보여준다. 반대로 여자는 능수능란하기'만'하다. 본인도 본인의 진짜 속내를 보여주는 대신 피상적인 것에만 신경 쓰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차이가 두 사람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과 동시에 이 영화가 품고 있는 장르적인 속성을 한 방에 요약했다. 서투를 순 있어도 나 자신을 그대로 보여주는 남자. 사람을 대하는 것에서는 능수능란하지만 진짜 자신의 모습을 알 수 없는 여자가 그 장면에 그대로 나온 것이다. 이거야 말로 사랑 영화에서 기대하는 낭만적인 성격 그 자체 아니겠어? 서로의 결핍을 채우는 사랑을 바라기 때문에 (글쓴이 같은) 솔로들이 이런 장르물에 열광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이 작품에 그대로 나와 좋았다.
다른 이야기는 영화가 다루고 있는 음모론이다. 음모론이 뭐야? ‘어떤 상황이 사실은 거짓말로 이루어져 있다!’라는 것이 음모론이다. 그럼 이 음모론을 둘러싼 세 가지 서스펜스가 일어난다. 1) 진짜 거짓말인지 아닌지 2) 거짓말이다 하더라도 이 거짓말이 들키지는 않을지 3) 영화의 주요 과제인 두 사람의 일이 이뤄질 수 있을지에 대한 여부가 영화에서 이야기를 끌고 가는 원동력이 된다. 선택과 집중이라는 말도 있잖아? 영화가 이야기의 동력을 하나로 유지하지 못하고 각자 주장이 강하면 난잡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아니다. 이 영화가 이야기를 조립하는 데 있어 굉장히 정교했던 이유가 따로 있는데, 모 버커스(우디 해럴슨)를 등장시킨 것이 이야기의 밀도를 높인 좋은 선택이었다. 이 인물이 이 세 가지 서스펜스를 모두 끌고 가면서 동시에 모에 대한 캐릭터들의 반응을 다각화시켜 이야기의 패턴을 지루하지 않게 만들었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것. 이 모 바커스라는 인물은 영화에서 여자 주인공 켈리라는 인물과 공통점을 가진다. 서스펜스와 로맨틱/코미디가 하나로 합쳐지는 지점이기도 한데,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 관객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장치로 작동한다.
'로맨틱'한 '영화'
글쓴이가 이 영화를 다 보고 느꼈던 건 고전적인 할리우드의 향취가 느껴진다는 점이다. 결핍과 그에 따른 관계성을 가져왔다는 것이 그 고전적인 향의 근원인 듯하다.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라는 영화가 있다. 또 <쉘부르의 우산>이란 영화가 있다. 이 두 1960년대 영화의 공통점. 두 사람 간의 결핍을 영화의 중심 배경이 되는 공간을 바탕으로 정교하게 설정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는 사랑하고 싶은 남자와 사랑받고 싶은 여자의 관계를 아파트와 열쇠라는 것에 비유한 영화다. 아파트, 그러니까 집은 인간사에 있어 꼭 필요한 것 중 하나다. 사랑이 아파트처럼 인간에게 꼭 필요하다는 비유를 영화에서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플라이 미 투 더 문>과의 공통점. 음모론의 성격과 사랑의 성격에 공통점을 찾아 낭만적인 속성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쉘부르의 우산>이라는 영화는 소재를 통해서 사랑의 힘을 믿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재를 둘러싼 캐릭터들의 리액션에는 인물들 간의 관계가 정말 중요하게 밑줄 그어져 있다. '이 사람을 대체할 수 없는 건 없다!'를 믿고 있는 영화라 후반부의 전개가 특히 감동적으로 느껴진다. 비슷한 맥락에서 <플라이 미 투 더 문>은 켈리의 비밀을 바탕으로 사랑의 힘을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켈리의 정체성이 모호하게 표현되는 영화임에도 두 사람의 사랑이 낭만적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 이 영화가 <쉘부르의 우산>같이 관계의 의미를 통해 한 사람의 존재를 믿었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또 이 <플라이 미 투 더 문>에는 현실과 영화 사이에 관한 견해가 담겨있기도 하다. 이 영화의 프로젝트를 총괄하고 있는 남자주인공 콜. 이 사람은 프로젝트를 운영하는 데 있어 정말 싫어하는 것이 있다. 바로 누군가가 개입하는 것이다. 있으면 있는 그대로가 좋지 마케터(켈리)가 붙고 영상으로 생중계를 하고 이런 거 다 거추장스럽다. 이 콜이 프로젝트를 바라보는 태도는 중후반부 찍고 어떤 인물이 무언가를 이끄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 인물은 어떤 공간의 세세한 특성까지 디테일하게 그려낸 인물이다. 사실적인 질감을 중요시했다는 점에서 어떤 상황을 묘사하는 일종의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 두 묘사는 영화가 두 인물을 겹치게 보여주면서 어떤 것을 강조했다고 읽을 수 있다. 반대로 이 태도와 정반대에 있는 것이 켈리의 태도다. 켈리는 연출이 들어간 무언가가 있다 하더라도 이야기를 재미있게 만드는 것을 추구한다. NASA는 진지한 집단이다. 광고 가판대가 아니다. 하지만 이런 금기를 부수고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끌여와 ‘각자의 NASA’를 만든 것이 이 영화가 보여주는 켈리의 활약이다. 이런 태도는 고전 영화사에서도 읽을 수 있다. 영화에 언급되는 큰 이름 스탠리 큐브릭은 인위적일지언정 그 안에서 풍기는 이미지의 매력으로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킨 영화감독이다. <배리 린든>이나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에서 보여주는 압도적인 이미지는 영화라는 매체에 매혹될 수 있는 1차원적인 요소, 시각적인 것과 상상력의 힘을 집약시켰다고 생각한다. 이걸 카메라를 있는 그대로 담는, 테런스 멜릭스러운 사람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을까? 글쓴이는 대치된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이 사람(큐브릭)이 1960년대 이후 활동했던 전력을 보면 거진 다 원작이 있다. 원작 그대로가 아닌 변형을 추구한 켈리의 태도와 겹쳐지는 것이다. 이 두 태도는 사실 영화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라는 태도로 읽어도 아무 무리가 없다. 우리 한국영화에서도 홍상수와 박찬욱이 자연스러운 욕망의 발현 / 새로운 세계(특히 건물)의 발명이라는 점에서 대비되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는 이 두 태도를 계속해서 비춰주면서 누구의 편을 별로 안 든다. 마무리가 훌륭해서 밸런스를 잘 지킨 것이다.
깔끔한 마무리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프닝과 엔딩이다. 특히 영화의 후반부 전개는 어색하지도 않고 걸리적거리는 것도 없이 깔끔했다. 어떤 점에서? 영화가 정치적으로 읽힐만한 여지를 주지를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이건 이 영화의 위험부담이기도 했다. 2차 대전 이후의 냉전을 시간적 배경으로 삼았고 그 긴장감이 영화 안에 틈입되기 때문에 그럴만한 여지가 충분하다. 선을 조금만 넘으면 이게 당시 미국이 추구했던 눈먼 경쟁을 풍자하고 싶었던 건지, 미국인들의 '국뽕' 영화인지, 로코물인지 뭔지 파악이 어려웠을 수도 있다. 실제로 영화가 다루는 사건이 부피가 점점 커지면서 어떻게 마무리 지으려나 우려가 되는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굉장히 영리하게 이야기를 마무리짓는다. 이 선택은 음모론이나 세계사 같은 거시적인 것은 저기 뒤로 치워두고 현실에 있는 것이 근간이 된다. 이게 만약 우연한 사고같이 인간이 초래한 무언가였다면 어색한 것이 많을 뻔했다. 왜? 그건 사랑영화에는 영 어울리지 않는다. 원래 사랑은 어디 갈지 모르고, 상대가 무슨 생각할지 몰라서 애가 타는 것 아니겠어? 엔딩의 이 존재는 하나로 규정되지도 않고 여기저기 잘 돌아다니면서 나름의 활약을 펼친다. 마치 어디로 향할지 그들 스스로도 모르는 사랑에 빠진 사람들처럼. 불처럼 불타면서 하나로 종잡을 수 없는 사랑의 두 속성을 시작과 끝으로 잘 요약한 선택이 돋보인다.
예술가 타입
스칼렛 요한슨은 현재의 할리우드에 있어 빠져서는 안 될 인물이다. '블랙 위도우'로서 전성기 MCU를 이끈 인물임과 동시에 <그녀>나 <결혼 이야기> 같은 영화에서 그 나름의 깊이를 보여줘 슈퍼스타라고 부르기에 모자람이 없는 배우다. 이 <플라이 미 투 더 문>은 그녀의 스타성만을 드러내는 영화는 아니었던 것 같다. 스칼렛 요한슨이 가진 브랜드 파워를 오롯이 보여준 것 같았다. 이 사람은 자신의 이미지를 너무나도 잘 아는 것 같다. 어떻게 하면 공허한 내면에 강조를 둘 수 있을지. 어떡하면 매혹적이고 섹시한 캐릭터를 유지할 수 있을지. 이 감정과 느낌 사이의 관계도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둘이 모순되지 않는다. 상대역을 맡은 채닝 테이텀도 서투른 내면을 표현하는 데 있어 섬세했다. 그리고 기술적으로도 이 장면에서 '정말 중요한 것 같아!'라고 생각한 티가 난다.
무난하게 볼 수 있어
비수기인 극장가. <인사이드 아웃 2>를 본 관객들 중 영화관에 걸려있는 것 중에 추천받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글쓴이는 이 <플라이 미 투 더 문>을 추천한다. 강한 템포로 콰콰쾅 몰아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잔잔하다고 느낄 관객이 있는 것도 알고 이야기가 얕다고 느낄 만한 여지가 충분하다는 것 역시 잘 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정말 시네마가 줄 수 있는 그 목적을 충실하게 이행한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영화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스칼렛 요한슨과 채닝 테이텀의 톡톡 튀는 로맨스/코미디도 관객을 을 빨아들이기에 충분하다. 개봉 2주차에 들어 상영관이 없긴 하지만, 그래도 주위에 관이 있다면 관람을 추천드린다.
-
- 이혼이 트렌드가 된 세상 속 코믹한 결혼 보고서!
“4주 후에 뵙겠습니다.” <부부 클리닉 사랑과 전쟁>의 명대사가 최근엔 드라마 <굿 와이프>로 전이된 느낌이다. 드라마의 높은 시청률은 그만큼 이혼과 불륜이 만연되어 있다는 걸 방증한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이혼이 트렌드(?)가 된 세상속에서 대사가 전하는 의미는 이혼숙려기간인 4주, 30일 동안의 시간은 무의미한 것인가? 2023년 추석에 개봉해 관객들의 지지를 받은 <30일>은 뻔하고 예상가능하며, 기시감 넘치는 로코이지만, 사랑과 기억에 대한 생가할거리를 준 코믹한 결혼 보고서다.
결혼식 날 나라(정소민)은 버진 로드 대신 식장 출구로 뛰쳐나간다. 그 이유는 백수지만 진정으로 사랑하는 남친 정열(강하늘)에게 가기 위해서다. 정열 또한 선배(윤경호)의 술집에서 한탄만 하다가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마음에서 나라에게 달려가던 참이었다. 이들의 마음은 통했는지, 술집 문 앞에서 마주쳤고, 집안의 반대에도 결혼에 골인했다. 역경을 딛고 사랑을 이룬 이들은 결말은 해.피.엔.딩. 이라고 하면 오산.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랑 보단 전쟁이 펼쳐지고, 이내 이들은 이혼을 결심한다. 가정법원에서 나와 30일 동안 이혼숙려기간을 보내야 하는 둘은 함께 차를 타고 가다 교통사고를 입는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나라와 정열. 근데, 약속이나 한 것처럼 과거의 기억을 하지 못한다. 심지어 서로 결혼한 사이라는 것까지.
<30일>은 영화처럼 사랑했던 남녀가 결혼 이후 180도 변화가 되는 관계에 놓인다는 다소 현실적인 이야기를 가져온다. ‘결혼하니 배우자가 변하더라’ 하는 이 말을 오롯이 옮겨놓듯 연애할 때 좋았던 그 모습이 결혼 후에는 가장 싫어하는 모습이 되는 일반적인 이야기를 초반에 깔아놓는다. 법원에서 이혼 사유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우리가 미디어를 통해 숱하게 마주한 이야기들이 등장하는데, 어디서 보고 들은 듯한 이 이야기는 기시감이 느껴질지언정 공감대를 확실히 형성한다. 보통의 부부보다야 좀 더 과장되고 과격하지만, 이들의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는 건 연애와 결혼의 차이에 한 번쯤 겪었을 답답함. 웃픈 이들의 현실적인 모습은 교통사고 이후 벌어지는 황당한 이들의 동거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집중하게 만든다.
남대중 감독은 기존 로코와의 차별화 포인트를 위해 ‘기억’이라는 키워드로 상상력을 펼쳤다고 말한 바 있다. 좋지 않은 기억이 없어진다면 죽일듯이 미워한 배우자를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에 대한 궁금증. 뭐 이 또한 다수의 영화나 드라마에서 사용되었던 것이지만, 관객이라면 충분히 호기심을 가지게 한다. 연애 시절 당시 서로에게 반했던 순간과 포인트에 다시 물들고, 이내 점점 사이가 가까워지는 나라와 정열의 모습을 보면, 왜 인간은 오류를 범했음에도 또 다시 오류를 범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갖게 한다. 그리고 영화는 그게 바로 사랑이라고 답하는 듯 하다.
이를 증명하듯 영화에서는 야구라는 스포츠가 등장하는데, 이들의 마음을 전하는 매게체로 사용되는 건 야구공이다. 마치 투포수를 연상시키듯 공을 던지고 받고, 다시 던지는 듯한 이들은 최고의 합을 맞춰가는 관계라고 볼 수 있다. 매번 포수의 사인에 맞춰 투수가 정확한 공을 던지지 못하고 실투도 하고, 그러다 홈런을 맞고 위기를 맞을 때도 있지만, 9회까지 진행하는 야구는 그만큼 다시 던지고 받고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기회와 순간이 많다. 그만큼 영화는 야구처럼 이혼 위기에 놓인 부부에게 그 기회를 주고 싶어하는 마음이 그득하다.
이런 이야기를 갖고 있는 <30일>의 정체성은 코믹이다. <위대한 소원> <기방도령> 등 꾸준히 코믹 영화를 만든 남대중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 자신만의 코믹함을 첨가한다. 앞서 소개한 두 영화만큼 B급 코믹은 줄였지만, 관객들을 웃기는 게 주 목표로 말하는 감독은 자신의 장기를 끝까지 밀고 간다.
그 중심에는 배우들의 몫이 크다. 강하늘, 정소민의 코믹 케미는 최고라 말할 수 있는데, 톰과 제리를 연상시키는 듯 서로 못잡아먹어서 안달난 이들의 코믹 연기는 그 자체로 폭소를 터뜨린다. 깐족거림과 비아냥, 뒷끝 작렬인 강하늘의 찌질함과 말보다 손이 먼저 나가는 행동파로서 망가짐을 주저하지 않는 정소민의 연기는 매력 그 자체다. 코믹과 로맨스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다. 여기에 조민수, 김신영, 윤경호, 황세인 등 조연들의 코믹 앙상블도 그 자체로 재미를 전한다.
로코의 공식을 충실하게 이행하면서 빗는 웃음과 가족애는 영화의 장점이자 단점이기는 하다. 하지만 신나게 웃으면서 결혼이란 대 환장극을 객관화할 수 있는 기회를 전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의 의의를 둘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1990년대 개봉한 박중훈, 최진실 주연의 <마누라 죽이기> 최민수, 심혜진 주연의 <결혼이야기>와 비교해보면 더 좋을 것 같다.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결혼은 인간에게 가장 힘든 과정인 동시에 가장 행복한 과정이라는 걸 느껴보길 바란다.
사진 제공: 마인드마크
평점: 3.0 /5.0
한줄평: 이혼이 트렌드가 된 세상 속 코믹한 결혼 보고서!
-
- 화려한 도시 사이에 삭막한 외로움이 따스한 사랑으로 스며든다
규정할 수 없는 마음이 외로움 사이에 표류하다 빠져드는 마음을 인정하는 순간.
-
사랑에 가뭄이 온다면 이런 모습일까. 서로를 향한 사랑의 수치는 숫자처럼 딱 떨어지는 모습이 아니라서 그 주변을 맴돌며 가벼우며 자극적인 형태의 사랑으로 나타난다. 여러 에피소드를 통해 보여주는 오해와 착각, 그리고 공허함은 사랑에 대한 이상과 현실을 더욱 극명하게 드러낸다.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하는 에밀리, 자유로운 연애를 추구하는 카미유, 사랑에 치이고 또 치였던 노라, 자신을 대상화하는 앰버 스위트.
이어진 듯 이어지지 않은 이들은 순서가 바뀐 형태로 사랑을 알아가며 자신이라고 생각했던 것들 것 조금씩 번져가 자신의 모습을 되찾는다. 새로움과 강렬한 자극을 원하면서도 끊임없이 낡은 것을 찾는 모습을 통해 나뉘어 있는 듯하면서도 묶인 듯한 우리를 발견한다. 색채는 끝끝내 돌아오지 않고 흔들리는 모습도 그대로지만, 흑백으로도 또렷이 남아있는 그 감정들과 이야기만큼은 흔들리지 않는다.
사람의 욕망을 드러내어 노라, 에밀리의 시선에서 바라본 사랑의 형태를 보여준다. 나뉘었다고 생각했던 이야기들이 동떨어지지 않은 방식으로 표현되면서 멀었던 이야기들이 가까워진다. 화려한 도시 속, 같은 건물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속의 삭막함이 드러나는 파리 13구. 그곳에서 살아가지만, 그냥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를 저마다의 삶의 방식과 사랑의 방식을 가진 네 남녀의 모습을 통해 현재의 삶을 투영하는 방식으로 그들의 감정을 드러내는 방식이 꽤 인상적이다.
품을수록 외로운 형태의 사랑은 기존에 그려왔던 사랑과는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한가지 형태로만 존재하지 않는 사랑은 욕망의 이름으로 그려져 에밀리와 카미유와 겪는 갈등을 가져오기도 한다. 어떤 사랑의 형태에 손을 들어주지 않고 그들의 사랑이 펼쳐지고 어떤 감정을 갖게 되는지 그대로 바라보는 시선이 그대로 느껴진다. 관계에 대한 평가가 아닌 이해로 다가가는 모습이 다소 따스하다. 그 누구보다 화려한 도시, 파리라는 흑백으로 가려 도시에서 어떤 로망을 펼치기보다는 어디서든 펼쳐질 수 있는 사랑의 이야기를 평이하게 그려낸다.
-
- 모리타니안 영화 후기 / 911테러 혐의자들에 대한 충격적인 대우 / 관타나모 다이어리 원작 / 실화바탕 / 골든 글로브 여우조연상 수상작 /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언제나 멋있다
영화직관하는 남자 영직남의 “모리타니안” 후기입니다.
엔드크레딧과 병행하는 실제 인물들의 감동적인 쿠키영상이 있습니다.#911테러, #관타나모수용소, #실화바탕, #베네딕트컴버배치, #조디포스터, #골든글로브여우조연상
-
- 이정재 감독의 헌트, 올 여름 가장 재미있는 영화
?Rabbitgumi 입니다!
올 여름 그동안 개봉하지 못했던 큰 영화들이 극장에 공개되었는데요.
이정재 감독의 헌트는 그 리스트의 맨 마지막에 위치한 작품이었습니다.
이정재 배우가 감독으로서 첫 연출을 맡은 작품이기도 했죠.
25년 지기 친구 정우성과 같이 공동 주연을 맡았는데요.
이 영화 흥미진진한 액션 스릴러입니다.
첩보 장르의 특성도 잘 담겨 있구요.
이 영화가 어땠을지 좀더 자세히 알려드릴게요! :)
자세한 리뷰는 영상을 참고해주세요! :)
그리고 제가 매주 일요일마다 영화에세이를 전달 드리는 Rabbitgumi 영화 이야기 뉴스레터에도 관심을 가져주시고 많은 구독 부탁드립니다!
뉴스레터에사는 일반적인 영화 리뷰 보다는 보면서 떠올렸던 감정이나 생각들을 정리하여 전달 드려요.
한 달 2,000원의 금액으로 매주 3개씩의 글을 받아보실 수 있어요. :)
지금 구독하시면 첫 구독 3달동안 매달 1,000원으로 구독하실 수 있습니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마세요!
뉴스레터 구독하기는 아래 링크에서! :)
https://rabbitgumi.stibee.com/
브런치 구독은 아래 링크에서!!
-
- 영화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 티저 예고편
마블의 새로운 강력한 히어로 ‘샹치’의 탄생과 베일에 싸여 있던 전설의 미스터리 거대 조직 ‘텐 링즈’의 실체를 다룬 첫 번째 이야기
-
- 영화 <타겟> 메인 예고편
당신도 "타겟"이 될 수 있다❗ 올여름 유일한 스릴러, [타겟] 메인 예고편 대/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