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072025-07-21 07:01:32
성장통이라는 꿈
영화 <이사> 리뷰
* 이 글은 씨네랩의 크리에이터로 참석한 시사회를 보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 스포일러 포함
성장통이라는 꿈
‘우리 그때 참 좋았었는데……’
렌코에게 엄마(나즈나)와 아빠(켄이치)와 함께 한 시간은 무엇보다 소중하다. 갑자기 아빠가 집을 나가고, 엄마는 둘만의 규칙을 만들어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지만 렌코는 이 변화가 싫다. 왜 예전처럼 지내면 안되는 거야?
렌코는 달린다. 자전거를 끌고 힘들게 올라 온 오르막길을 뛰어 내려가고, 엄마와 선생을 피해 달리고, 렌코를 발견한 아빠를 피해 또 달린다. 렌코가 달리는 이유는 변화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이다.
렌코는 변화를 막기 위해 시위를 계획한다. 하지만 생각보다 나즈나가 일찍 집에 돌아오면서 계획이 틀어진다. 렌코를 잡으려하는 나즈나를 피해 화장실로 도망쳐 문을 잠근다. 소식을 듣고 켄이치가 집으로 온다. 이때 렌코의 상태를 두고 둘 사이 말싸움이 오간다.
나즈나는 켄이치와의 생활에서 존중받지 못했다. 그녀는 피를 보면서까지 유리창을 깨뜨리며 울부짓는다. 렌코는 이유를 직접적으로 듣지 못했지만 엄마와 아빠 사이 발생한 균열을 확실히 목격한다.
렌코의 시위 이후 나즈나와 켄이치는 일주일에 한 번 셋이 모이는 식사 자리를 마련하기로 한다. 둘의 관계는 짧은 만남에서조차 평화롭지 않다. 과연 렌코의 가족은 화목했던 때로 돌아갈 수 있을까?
렌코는 나즈나의 허락을 받지 않고 예전에 셋이 놀러 갔던 펜션을 예약한다. 그리고 그곳에 켄이치를 부른다. 켄이치는 렌코를 이유로 재결합을 제안하지만 그때 렌코는 자리를 벗어나 도망친다.
이혼은 아이에게 혼란을 가져다 줄 수 있다. 또래집단에게 영향을 많이 받는 나이대에 따돌림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마땅한 가족의 형태는 없다. 부모도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가진 하나의 개인이다. 나즈나는 이미 위태로울 정도로 손상된 상태다. 나즈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렌코는 깨닫는다. 나즈나와 켄이치의 균열은 회복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변화를 받아들이는 일은 쉽지 않다. 행복했던 과거의 기억이 남아있다.
영화에서 ‘불’은 변화와 이별의 상징으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영화 초반 렌코는 불길 속에 타들어 가는 가족사진을 서둘러 꺼내 불을 끈다. 과거의 기억을 간직하고 싶은 렌코의 마음과 달리 렌코는 반복적으로 발화를 목격한다. 불에 타서 소실되는 영혼은 과거의 기억을 의미한다. 즉 영화는 렌코를 불 앞에 두어 과거의 기억을 떠나보내야 한다고 암시한다.
렌코는 우연히 만난 할아버지에게 ‘모든 것을 기억하고 살 수 없다’는 말을 듣고 마지막으로 바닷가 근처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렌코는 꿈을 꾼다. 파도를 타고 무언가 불타오르며 떠내려온다. 그 옆에서 렌코가 엄마 아빠와 함께 웃으며 장난을 치고 있다. 행복했던 과거의 기억이 그곳에 있다. 모든 게 불에 타자 과거는 바다 저편으로 사라진다. 드디어 과거의 기억이 떠나갔다.
성장은 이사와 닮은 것도 같다. 과거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순간 변화를 맞이한다. 변화의 길목에는 새로운 시작이 있다. 렌코는 엄마와 새로운 둘만의 규칙을 만든다. 앞으로 둘이서 잘살아 보겠다는 다짐을 친구들 앞에서 당당하게 발표한다.
‘어디 가니?’
‘미래요.’
이제 렌코는 미래를 향해 간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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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굴과 리액션, <스파이의 아내>
스포일러 있습니다. 영화를 감상하지 않으셨다면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영화가 끝나고 난 뒤, 몇 가지 물음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이 물음은 여러 요인들 중에서도 우선 헐거운 인과성, 그러니까 구멍이 숭숭 뚫린 서사의 맥락에 기인한다. 왜 사토코(아오이 유우)는 마음을 바꿔 남편을 돕는가, 영화를 보는 사토코의 얼굴 표정의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사토코의 밀항을 진정 남편이 밀고한 것인가, 유사쿠(타카하시 잇세이)가 어떤 목적으로 몰래 필름을 바꿨는가와 같은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영화의 서사 구조는 평이하다 못해 의도적으로 헐겁게 구축된 느낌도 들기도 한다. 그런데 이 영화가 매혹적인 이유는 그러한 허점을 보완하는 독특한 시도가 존재하기 때문이 아닐까. 감히 넘겨짚건대 영화의 동력원은 첫째로 종종 클로즈업되는 인물의 얼굴이고, 둘째로는 목도한 현상에 대해 인물이 드러내는 리액션에 있다.
섬세한 불안이 겹겹이 쌓인 모호한 인상의 영화라서, 특정 지점이 마음에 든다기보단 영화가 전체적으로 어떤 인상이었는지 기술하는 편이 더 손쉬운 접근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총체적인 분위기를 형성하는 베일을 걷어내고 가장 인상적이었던 순간을 꼽아보라고 한다면 사토코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는 두 개의 쇼트를 고를 수밖에 없다. 먼저 사토코는 유사쿠가 숨겨 놓은 필름의 내용을 확인한다. 이때 관객에게는 영사되는 필름의 내용물 대신 사토코의 클로즈업된 얼굴, 미묘하게 놀라는 듯한 표정만이 포착되다가 다음 쇼트로 커트된다. 사토코의 오묘한 표정을 통해 관객은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구멍난 서사를 헤쳐나갈 동력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가장 먼저 대다수 관객은 당장 표정에서 드러나는 것들을 헤아리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꼬리를 무는 질문들이 생겨난다. 그 필름에는 실험 노트처럼 비윤리적인 끔찍한 만행들이 기록되어 있을까, 설마 필름에 자신이 기대했던 내용이 없었나, 사토코가 남편에게 이 영상을 본 뒤 어떤 말을 건넬까와 같은 질문들 말이다.
관객이 서사의 구멍에 대처할 수 있는 더욱 직관적인 사토코의 표정은 밀항에 실패해 체포된 뒤 압수당한 필름을 영사하는 순간에 드러난다. 유사쿠가 바꿔치기한 걸로 추정되는 필름에는 사토코 본인이 무도회에서 쓸 법한 가면을 쓰고 연기했던 영화가 담겨 있었다. 이 영화가 끝난 뒤 카메라에 담긴 사토코의 표정은 분명한 정보를 제시한다. 혼란과 당황함 이후에 뒤따라오는 배신감과 의아함 등으로 뒤섞인 불투명한 감정의 총체가 관객에게 전달된다. 그러니까 이 영화가 플롯을 연결하고 극의 흐름을 이어가는 방식은 종종 인물의 표정만으로 향후 이어질 서사의 조각을 관객이 스스로 가늠하게 하는 쪽에 가깝다. 더욱 흥미로운 건 클로즈업되는 사토코의 표정은 영화를 볼 때 말고도 폐허를 목도하는 장면에서도 포착되는데, 세 쇼트는 모두 조명이 극도로 제한된 채 제시된다. 너무 어두워서 표정이 부분적으로만 드러나는 상황 속에서 관객은 그녀의 표정을 끈질기게 탐구해야만 한다.
한편 사토코는 자신이 목도한 바꿔치기된 필름의 내용을 보고 나서 스크린으로 돌진한 뒤 실성한 듯 웃음을 '흐느낀다'(어쩐지 웃음을 터뜨린다기보다는 흐느끼는 쪽에 가깝다고 느꼈다). 이 쇼트 이후 바로 이어지는 쇼트에선 유사쿠가 배를 타고 유유히 떠나는 모습이 제시된다. 유사쿠는 실제인지 허구인지 분간할 수 없는 정체불명의 쇼트 속에서 배를 타고 손을 흔들고 있다. 사실 이 쇼트에 담긴 유사쿠의 모습이 진정 어떤 유사쿠인지 관객은 파악할 수 없다. 유사쿠가 정말 아내를 미끼로 자신만 유유히 미국으로 빠져나갔을까? 만약 유사쿠의 소행이라면 그 행동은 아내를 위험에서 지키려는 의도가 우선이었을까? 혹시 사토코가 여행을 간다고 했을 때 어딘가 모르게 석연찮아 하던 가정부 코마코의 소행은 아닐까?(다소 억지스러운 추측이긴 하지만) 혹은 어쩌면 그 장면은 사토코가 배신감과 분노 등이 뒤섞인 채로 마주한 환상의 이미지로 느껴지기도 한다. 대략 짐작은 가지만 명확한 증거가 없으니 관객은 그저 사토코의 표정과 리액션에 의지해서 극을 따라가야 한다. 이 영화가 더욱 독특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헐거운 서사의 동력원으로 보일 법한 얼굴 표정과 상황에 대처하는 각종 리액션들이 상황을 간명하게 엮어내기보다는 오히려 의뭉스러운 인상만을 증폭시키는 데 있다.
다소 느슨하지만 최소한으로 기능하는 서스펜스, 미장센에 묻어 있는 1940년대 일본의 정서, 소재에 관한 역사 성찰적 접근, 첩보나 멜로 등이 배합된 장르적인 질감 등이 영화를 향한 감상 포인트를 다채롭게 가공하고 있지만 정작 이 영화 자체는 앞서 말한 특징적인 몇몇 표지로부터만 동력을 얻는 듯 보인다. 그 동력원을 통해서 가닿는 곳에는 무엇이 있는가. 쉽게 단언할 수 없다. 마냥 몇 가지 키워드로만 집약하고 싶지 않다. 이런 모호한 영화들의 특징이라면 품고 있는 다채로운 기운을 음미하는 과정에서 문득 다른 사유로의 확장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성찰적인 뉘앙스를 풍겼던 이 영화에선 어쩐지 끝내 유사쿠가 망명하여 자국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렸다는 이야기, 대의를 위해 국가를 저버린 양심적인 개인들의 서사는 결국 소멸되고야 만다. 대신 영화가 끝을 내는 방식은 사토코의 울음소리와 함께 삽입되는 몇 가지의 문장들이다. '1945년 8월 종전'이라는 정보는 과연 합당한가? 천황의 항복 선언을 떠올린다면 종전보다는 패전이 맞는 표현이 아닌가. 이어서 다음 해에 유사쿠는 죽었지만 위조된 죽음일 수도 있다는 정보가 뒤따른다. 사토코가 몇 년 뒤에 미국으로 여행을 갔다는 문장으로 영화는 끝난다. 어쩐지 불필요해 보이는 결말부의 문장들이 과연 불투명한 매혹성을 강화하는지 석연찮은 의구심을 키우는지는 모르겠다. 확실한 건 아직까지는 이 모호한 인상을 뿜어내는 영화에 호의적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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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스트 인 파리(Paris Pieds Nus/Lost in Paris/ 2016/ 프랑스, 벨기에)
(이미지 출처: 네이버이미지)
<보이지 않는 손>
캐나다 여성 피오나는 파리에 사는 88세의 이모 마르타로부터 짧은 편지를 한 통 받는다. 양로원에 강제로 수용하려는 사람들로부터 구해달라는 것. 어렸을 때에는 가까운 사이였지만 이모가 프랑스 파리로 이주한 후 48년 동안 만난 적이 없다. 그래도 피오나는 용감하게 파리로 향한다.
어렵게 찾은 이모의 집. 그러나 이모는 집에 없다. 이웃 남자 마르탱에 따르면 며칠 전부터 행동이 이상했다고 하여 피오나는 걱정스럽다.
이모가 집에 올 때까지 파리 관광에 나선 피오나. 들뜬 기분에 다리 위에서 사진을 찍다 그만 강물에 빠지고 만다. 유람선에 구조되기는 했지만 휴대전화도, 캐나다 국기를 꽂은 배낭도, 여권도, 지갑도 모두 잃어버린 그녀는 앞길이 막막하다. 다시 이모 집을 찾았지만 이모는 감감무소식.
피오나는 캐나다 대사관에서 여권 발급신청을 하고 이모를 찾아 달라고 부탁한다. 갈 곳이 없는 그녀의 사정이 딱해 영사과 직원은 식사 교환권을 건넨다. 지정 식당으로 간 피오나, 그 식당에서 묘한 분위기의 노숙자 돔을 만난다. 그녀에게 능청맞게 춤을 권하는 돔. 그럴 기분이 아니어서 사양했지만 돔의 능숙한 리드에 저도 모르게 춤을 추는 피오나. 그런데 웬일. 둘의 춤은 마치 오랫동안 함께 해온 커플의 춤처럼 정말 아름답다. 춤을 추는 두 사람도 서로에게 익숙한 자신들에게 놀란다. 그리고 돔은 피오나를 사랑하게 된다.
그런데 알고보니 물 위로 떠오른 피오나의 배낭을 발견한 것은 바로 돔이었다. 짐을 찾으려는 피오나. 횡재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돔.
이튿날 돔은 마음을 고쳐먹고 배낭과 그녀의 소지품을 가지고 캐나다 대사관으로 가고 거기서 다시 피오나를 만난다. 돔에게 화를 내며 배낭을 받아 메고 이모의 이웃들을 만나 행방을 묻는 피오나에게, 이모는 이틀 전에 사망했으며 장례식이 바로 오늘이라는 슬픈 소식이 전해진다. 장례식장 위치를 친절하게 알려 받긴 했지만 피오나는 복잡한 파리의 전철을 탈 자신이 없다. 이때 그녀 주위를 몰래 맴돌던 돔이 나타나 길 안내를 한다.
돔과 함께 장례식장을 찾아 고인을 추모하다가 이모는 마르타인데 고인은 마르트임을 알게 된다. 마르트는 이모처럼 무용수였던 데에다 이모의 이웃에 살았던 터라 사람들이 헷갈렸던 것. 마르타도, 마르타와 마르트 둘 모두의 친구였으며 마르타의 애인이었던 남자 무용수 노르망도 장례식에 나타나지만 피오나와는 길이 엇갈리고 만다.
약간 치매 증세를 보이는 마르타는 경찰이나 응급구조대가 자신을 양로원에 강제로 넣으려 한다고 오해하여 이리저리 피하며 집에 들어가지를 않는다. 경찰은 사실 피오나의 부탁을 받아 이모의 행방을 찾아 나섰던 것.
파리의 밤거리를 헤매던 마르타는 돔을 만나 그와 함께 잠시 머물다가 우연히 쓰레기통에서 울리는 피오나의 휴대전화를 받게 된다. 피오나가 혹시나 하여 전화를 걸었던 것. 드디어 마르타는 피오나가 파리에 온 것을 알게 되고 피오나는 이모가 지금 '파리의 뉴욕'에 있음을 간신히 알아차린다. 그때 멀리서 다가오는 경찰들을 피해 마르타는 휴대폰을 다시 쓰레기통으로 던져 버리고 에펠탑 위로 숨는다.
'파리의 뉴욕'으로 이모를 찾아나선 피오나는 노숙자 텐트에 있는 돔을 만나 이모를 찾아달라고 부탁한다. 세상의 모든 문제를 풀 능력을 지닌 듯한 돔 덕분에 이모가 에펠탑에 있음을 알게 되어 둘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탑 꼭대기로 오른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피오나 역시 돔을 좋아하고 있음을 고백한다. 마침내 마르타, 피오나, 돔은 에펠탑 위에서 만나지만 반가움도 잠시, 이모는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모의 '자연분해 유골함'을 들고 센강 다리 위에서 추모하는 피오나, 돔, 마르탱과 양로원 직원. 1분간의 묵념 후에 유골함을 센강으로 던짐으로써 장례식을 끝낸 일행은 작별인사를 나누고 헤어진다. 그런데 몇 걸음 내딛던 피오나, 발걸음을 돌려 돔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쳐주지 않겠느냐고 묻는다. 그녀의 어렸을 적 꿈도 마르타 이모와 마찬가지로 파리에 사는 것이었다.
이 영화의 원제는 Paris Pieds Nus(파리를 맨발로)이며 주인공이자 감독인 도미니끄 아벨과 피오나 고든은 부부이다. 이들의 영화는 찰리 채플린의 영화처럼 동화적이며 대사나 사실적인 연기보다 과장된 동작과 춤이 더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영화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항상 화면 위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어야 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세 번의 춤과 서로 상대를 꿈 속에서 만나는 피오나와 돔의 과장된 동작은 예술이다.
아울러 이들의 영화에서 줄거리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실제로 <로스트 인 파리>는 <피오나>, <돔>, <마르타> 등 세 에피소드로 연결되어 있고 내러티브보다 각 캐릭터의 개성과 삶에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다. 영화의 내용을 간추리자면 세 사람이 한 자리에서 만나게 되기까지의 우여곡절을 통해 돔과 피오나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 전부이다. 그러니 마르타의 구조요청은 둘을 이어주기 위한 모티브였던 셈.
피오나는 돔을 만나기 위해 이모로부터 편지를 받고, 파리로 날아가고, 파리에서 두 번이나 강물에 빠지고, 모르는 사람의 장례식에서 추모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에펠탑 꼭대기로 올라가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에게 반복되는 고난과 어려움은 결코 슬프거나 우울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홀로 지내다 가족이나 친척도 모르게 세상을 떠나는, 세상을 뜬 이가 마르트인지 마르타인지 주변의 관심을 받지도 못하는, 양로원에 갇혀 답답하게 여생을 살아내야 하는, 한때는 젊고 아름다웠고 기운찼던 노인들의 삶이 가엾거나 쓸쓸하다기보다는 유머러스한 상황과 상큼한 색감으로 명랑하게 묘사되기 때문이다.
인생은 인생이 그 주인이며 인간들은 제멋대로 달리는 인생이라는 기차에 타거나 내리거나하는 승객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면 사실 그닥 슬플 일도 불행할 일도 없지 않을까.
그런데 피오나와 돔과 마르타를 에펠탑 꼭대기로 모은 보이지 않는 손의 실체는 무엇일까. 인생이라는 기차의 기관사는 누구일까(©2020.최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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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꿈, 중경삼림
아직도 중경삼림을 처음 봤던 때를 잊을 수 없다. 영화가 끝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고화질의 중경삼림 포스터를 바탕화면에 띄운 일이었다. 얼핏 보았을 땐 정신없고 산만한 포스터가 처음에는 조금 낯설었는데, 영화를 보고 나니 이보다 영화를 잘 나타내기도 힘든 일임을 깨달았다. 아무렇게나 잘라 붙인듯한 사진들이 콜라주 되어 하나의 작품이 된 포스터는 영화와 꼭 닮아있다.
홍콩을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들 듯, 중경삼림 또한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영화이다. 누가 그랬듯 내게 있지도 않은 추억을 불러일으키고, 겪지도 않은 시대를 그리워하게 만든다. 러닝타임 내내 빨려드는 느낌을 받은 것은 단순히 왕가위의 촬영기법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중경삼림의 두 에피소드는 모두 이별로부터 시작된다. 이별이 낱말 뜻 그대로 이야기의 마지막에 놓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시작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다만 결과는 다소 다르다. 경찰 223이 과거를 받아들인다면 663은 미래를 받아들인다. 과거로 회귀하던 223은 결국 이별 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깨닫지만, 메이와의 시간은 과거에 머물러 있음을 인정하고 그 자체를 사랑하게 된다. 변화를 인지하지 못한 채 자신도 모르게 미래로 향하던 663은 나아가 변화를 만들어나간다. 실연의 아픔은 잔존하고 과거는 침전하지만, 시간은 흐르고 역사는 바뀌지 않는다. 불안하고 혼란한 건 매한가지이지만 그렇다고 슬픔과 함께 침전할 수만은 없는 것이었다.
한 칼럼은 중경삼림의 청춘들은 식민지 시대의 자유를 담았다고 표현한다.
'식민지 시대의 자유'. 언뜻 보았을 때, 이질적인 의미를 갖는 두 단어의 조합에서 확장되는 독특한 감수성을 중경삼림은 풍긴다. 처음 중경삼림을 보면서 느꼈던 혼란함 역시 이로부터 멀지 않은 데서 비롯되었다. 소통과 불통, 이주와 정주, 우연과 필연, 풍요 속 결핍, 끝과 연속되는 시작. 감독은 이처럼 이질감 가득한 단어들을 교묘히 엮어 또 다른 아름다움을 끌어낸다.
덕분에 중경삼림은 몽환 그 자체다. 영화를 본 많은 사람이 받는 느낌 중 하나이기도 하고, 왕가위 감독 역시 그런 느낌을 주기 위해 여러 요소를 곳곳에 배치해 두었다. 촬영 기법은 물론 영화 속 시간과 미장센, 옴니버스 형식, 장면을 넘나드는 음악과 보이스오버 등을 보고 있으면 마치 꿈속 같은 기분이 든다. 하룻밤 사이 개연성도 없이 황당한 일들이 연속해서 일어나고, 출처 모를 소리가 머리에 울려 퍼지고, 장면은 예고도 없이 편집되며 자각할 새도 없이 순간 이동하듯 공간과 시간이 바뀌다, 그러다 눈을 뜨면 사라져 버리는, 夢中人. 그 때문 인지 항상 중경삼림을 보고 나면 101분이라는 시간 동안 꿈속을 부유하다 깬 기분이 든다.
오랜만에 다시 본 중경삼림은 또 달랐다. 앞서 영화를 볼 때도 홍콩에 대한 이야기들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감독이 정치적 상황을 꼬집고 투영하기 위해 만든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단지 홍콩의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 거대한 역사적 사건을 관통하며 자연스럽게 시대적 맥락이 담겼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어쩌면 역사적 상황과 분리해 오롯이 심미적으로만 영화를 보고 싶었던 나의 욕심이었을 지도 모른다.
묵은 꿈속에서 벗어나, 새로이 본 중경삼림에는 생각보다 많은 장치가 있었다. 아편전쟁과 마약 딜러 그리고 서양 남자와 인도 하수인, 유통기한이 찍힌 통조림, 침사추이, Midnight Express, 캘리포니아와 노스탤지어...
영화 전반적으로 배어있는 몽환적인 연출과 설정, 꿈이라는 키워드가 들어간 곡들을 테마곡으로 사용한 데는 꿈처럼 믿기지 않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홍콩인들의 불안이 담겨있었던 게 아닐까.
오지 않을 것만 같던 1997년을 지나서 오지 않을 것 같은 2046년으로 향하는 홍콩은 여전히 부유한다. 영국과의 이별은 또 하나의 시작이 되어 또 다른 불안을 도래하게 했고, 홍콩인들은 지금도 불확실한 미래에 많은 에너지와 목소리를 쏟아내고 있다.
나만 꾸고 있다고 생각했던 꿈은 사실 하나의 거대한 꿈 중의 일부였다. 금발 여인의 꿈, 경찰 223의 꿈, 페이의 꿈, 경찰 663의 꿈, 왕가위의 꿈, 홍콩 젊은이들의 꿈, 차라리 꿈이었으면 싶던 홍콩의 꿈, 지나간 시대를 동경하는 한 세대의 꿈, 또다시 나아가야 할 홍콩인들의 꿈. California Drea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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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더> - ‘아주 평범한 기적이 깃든 우주’
원더 (Wonder)
개봉일 : 2017.12.27
감독 : 스티븐 크보스키
출연 : 제이콥 트렘블레이, 줄리아 로버츠, 오웬 윌슨, 이자벨라 비도빅, 노아 주프, 브라이스 게이사르
‘아주 평범한 기적이 깃든 우주’
“나는 평범한 아이가 될 수 없을 거다.” 이제 5학년이 되는 작은 덩치의 남자아이 ‘어기’가 말한다. 어기에 대해 말해주자면 이런저런 할 말이 많다. 남들과 조금 다르게 태어나 첫 숨을 내뱉고, 건강히 자라기 위해 27번의 수술을 거친 아이. 다른 이의 시선이 불편해 집안에서 쉽게 나가지 못하는 아이. 커다란 우주 헬멧을 쓰고 우주비행사가 되는 걸 꿈꾸는 아이. 누구보다 총명하지만 자만하지 않는 아이. 하지만 아직 많은 이가 알아주지 못한, 숨어서 빛나고 있는 아이. <원더>를 보면서 내내 마음속으로 외쳤다. “사랑스러운 우리 어기. 사랑스러운 아이들. 너무 예쁘다.” 어기를 포함해 등장하는 여러 아이들의 모습 또한 정말 사랑스러워서 중간중간 절로 웃음이 났다.
태어나자마자 갖게 된 상처들은 어기의 얼굴에 흔적을 남겼고, 어기는 그 흔적들을 가리고 싶어 한다. ‘나 자신이 부끄러워서’라기보단, 남들의 시선이 부끄러워서. 가족들은 밖으로 나가길 꺼리는 어기를 위해 많은 걸 배려한다. 엄마 이자벨은 석사학위를 잠시 내려놓고 어기를 위해 홈스쿨링을 했으며 누나인 비아는 어릴 적부터 어기를 챙기며 엄마 아빠를 걱정시키지 않는 딸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어기의 가족들은 태양처럼 빛나는 어기를 중심으로 도는 하나의 우주다.
평범한 아이가 될 수 없을 거라는 생각, 나의 단점으로 비칠 수 있는 시간의 흔적을 가려야 한다는 부담감, 남들의 시선 앞에서 선뜻 용기를 낼 수 없었던 상황을 마주하고, 그것에 좌절해본 적이 한 번쯤은 있지 않은가? 나는 평범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그 무엇도 아니라는 우울한 마음이 들 때 <원더>를 추천한다. 당신이 굉장한 우주를 갖고 있지 않아도 괜찮다. 지금도 충분히 박수받을 자격이 있다.
각자의 고민과 아픔 앞에서 좌절하고 무릎 꿇는것이 아닌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끝없이 날갯짓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참으로 예뻤다. 그리고 아이들의 힘의 원천인 가족애와 우정이 눈부시게 빛나는 영화였다.
원더 시놉시스
누구보다 위트 있고 호기심 많은 매력 부자 ‘어기'. 하지만 남들과 다른 외모로 태어난 ‘어기'는 모두가 좋아하는 크리스마스 대신 얼굴을 감출 수 있는 할로윈을 더 좋아한다. 10살이 된 아들에게 더 큰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던 엄마 ‘이사벨’과 아빠 ‘네이트’는 ‘어기'를 학교에 보낼 준비를 하고, 동생에게 모든 것을 양보해왔지만 누구보다 그를 사랑하는 누나 ‘비아'도 ‘어기'의 첫걸음을 응원해준다.
그렇게 가족이 세상의 전부였던 ‘어기'는 처음으로 헬멧을 벗고 낯선 세상에 용감하게 첫발을 내딛지만 첫날부터 ‘남다른 외모'로 화제의 주인공이 되고, 사람들의 시선에 큰 상처를 받는다. 그러나 ‘어기'는 27번의 성형(?)수술을 견뎌낸 긍정적인 성격으로 다시 한번 용기를 내고, 주변 사람들도 하나둘 변하기 시작하는데...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이륙 준비 완료”
5학년이 될 때까지 또래 친구를 사귀거나 학교를 다녀본 적 없는 어기를 위해 엄마 이자벨과 아빠 네이트는 큰마음을 먹고 어기를 학교에 보내기로 결심한다. 집안에서 아빠와 광선검으로 칼싸움을 하고, 엄마와 함께 공부를 하고, 자신만의 우주인 작은 방 안에서 뛰놀기만 했던 어기에게 또래 친구들이 가득한 학교에 간다는 건 또 다른 행성에 착륙하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릴 적부터 자신의 외모가 눈에 띈다는 걸 인지하고 있던 어기에게 다양한 눈빛으로 쳐다볼 불특정 다수 사이로 들어간다는 건 두렵고, 겁나는 일이었다.
어기는 얼굴에 난 상처들을 가리고 싶을 때, 혼자 있거나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을 때 헬멧을 쓴다. 또래보다 조금 왜소한 어기의 어깨를 꽉 채운 채 얹혀있는 헬멧은 어기를 잠시나마 우주로 보내준다. 어기는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우주에서 자유를 만끽한다. 하지만 이젠 얼굴을 가리고 있던 헬멧을 내려놓고 우주가 아닌 지구로 돌아올 시간이 되었다.
이미 서로 아는 아이들, 끼리끼리 모여 자연스레 어울리고 있는 아이들 사이에 쭈뼛쭈뼛 등장한 어기에게 아이들은 여러 의미를 담은 시선을 보낸다. 어기는 자신을 지구에 내려온 츄바카 같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얼굴에 흔적이 있어.”
신발을 물려신는 집안의 아들 잭, 잘 사는 집안의 아들 줄리안, 이상한 애 샬롯. 어기는 처음 본 친구들의 눈빛과 신발을 보며 그들에 대해 추측해본다. 어기가 여느 아이들에 비해 눈치와 상황 판단이 빠른 건 어기가 총명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만큼 많은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자랐다는 반증 같아서 마음 한편이 아렸다. 첫 등교 날 줄리안과 몇몇 친구들에 의해 마음의 상처를 받은 어기는 소중히 길러온 머리를 자르고 헬멧을 쓴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저녁식사 자리에서 평소답지 않게 말없이 헬멧을 벗지 않는 어기를 걱정하던 이자벨은 어기의 옆에 앉아 다정하게 말을 건넨다.
“누구나 얼굴에 흔적이 있어. 얼굴은 우리가 갈 길을 보여주는 지도이자 우리가 지나온 길을 보여주는 지도야.”
어기의 얼굴에 생긴 흔적들은 흉한 흉터가 아닌 수많은 위기와 아픔을 견뎌낸 어기의 용기와 인내심, 그리고 가족들의 사랑이 담긴 지도다. 이 지도는 어기가 기적과도 같은 아이임을 말해주는 가장 큰 증거이자, 앞으로 어기가 걸어갈 수많은 길을 안내한다. 어기는 가족들과 친구들의 사랑을 통해 우주가 아닌 지구로 돌아가는 길을 무사히 찾게 된다.
“한 번만 그 눈으로 날 봐주길 바랄 뿐이다.”
어기가 엄마 아빠의 사랑을 잔뜩 받으며 침대에서 잠들 때, 어기의 누나 비아는 다정한 세 사람을 바라보다가 홀로 방으로 들어간다. 동생을 갖고 싶다는 소원을 빈 끝에 얻은 소중한 동생 어기는 어릴 때부터 자주 아파 매일같이 엄마 아빠를 걱정시켰다. 비아는 엄마 아빠만큼 동생을 사랑하기에 엄마 아빠가 아픈 동생을 더 신경쓰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여왔다. 이 집의 주인공이 동생이어도 괜찮았고, 엄마 아빠의 문제를 하나 더 늘리지 않도록 노력해 야했다. 아무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강요한 적은 없지만 비아는 첫재로서, 아픈 동생의 누나로서 책임감을 갖고 부정적인 말 한번 하지 않고 묵묵히 어기를 챙긴다.
어기가 처음으로 학교에 간 날, 비아도 새로운 학기를 맞이한다. 하지만 새 학기 첫날이 이렇게 엉망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엄마 아빠에게 하지 못했던 말들도 털어놓을 수 있었던 절친 미란다가 자신을 모르는척하기 시작했고, 드넓은 우주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 든다. 터덜터덜 걸어가던 비아에게 친절한 말씨를 뽐내는 저스틴이 다가오고, 비아는 새로운 친구 앞에서 공통점을 어필하기 위해 얼떨결에 외동이라는 거짓말을 한다.
항상 어른스럽게, 괜찮은 척 지내왔지만 어기의 누나이기 전에 비아도 이자벨과 네이트의 어린 딸이다. 비아도 어리광 부리고 싶을 때가 있었을 것이고, 엄마 아빠의 우주에 중심에 있고 싶었을것이다. 비아는 아픈 동생을 위해 어기의 누나 역할을 집어 들고, 어린 딸의 역할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어기라는 우주를 따라 돌거나 그 뒤로 숨는 위성이 되어 살아간다.
저스틴은 비아의 말에 진심으로 집중해 주는 친구다. 저스틴은 자기 얘기하기에 바쁜 연극부 아이들과는 달리 남들의 이야기를 듣고 무대 앞이 아닌 무대 뒤가 좋다고 말하는 비아를 신기해하며 만일 비아가 무대에 오른다면 혼자라도 박수를 쳐주겠다고 약속한다. 비아는 저스틴의 말에 용기를 내 무대 위에 오르기 위해 오디션을 치르고, 미란다의 양보 덕분에 주인공으로서 무대에 서게 된다. 엄마, 아빠, 동생이 지켜보는 가운데 첫 무대를 마친 비아는 벅찬 표정으로 가족의 품에 안긴다.
“넌 너무 신비로워서 아무도 못 알아보는 거야.”
비아가 연기했던 주인공의 마지막 대사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충분히 아름답고 대견한 자신에게, 그리고 비아의 연극과 이 영화를 보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비아가 전하는 마음처럼 느껴진 대사였다. 만일 남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신을 가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당장 그 생각을 저 멀리 우주로 날려버리길 바란다. 당신이 너무 빛나고, 신비롭기에 남들이 당신의 진정한 가치를 알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뿐이니까 절대 실망하지 말라고, 낙담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진정한 친구가 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어기는 5학년의 나이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학교에 간다. 그전까지는 또래 친구들을 한 번도 사귀어본 적 없었기에 어기에게 친구는 비아와 강아지 데이지가 전부였다. 잭을 만나며 드디어 나에게도 친구가 생기나-싶었지만, 줄리안과 함께 뒷얘기를 하고 있는 잭을 보고 어기는 크게 실망한다. 우주복을 입고 달 위를 뛰어다니는듯했던 기분이 순식간에 가라앉고, 어기는 다시 헬멧 속에 숨어버린다.
잭은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계속해서 어기를 놀리는 줄리안과 한판 싸움을 한다. 잭도 처음엔 그저 선생님, 엄마의 부탁으로 인해 어기와 함께 어울렸지만, 어기의 친절함과 재치 넘치는 모습에 반해 진심으로 어기와 친구가 되고 싶어 한다. 잭은 선생님에게 사과 편지를 쓰고 근신 처분을 받지만, 다시 용기를 내 어기에게 다가간다.
“옳음과 친절함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땐 친절함을 선택해라.”
초등학교 고학년쯤부터 많은 아이들이 사춘기를 겪는다. 그 시기를 지나고 있는 아이들은 가족보다는 친구들과의 소속감을 중요시하게 된다. 나와 다른 것이 있다면 틀린 것이고, 친구가 맞다고 하면 쉽게 휩쓸리기도 하는 것이 그때의 아이들이다. 소위 잘 사는 집안의 아들이자 선생님들의 총애를 받고 있는 줄리안은 친구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은 아이다. 쉽게 말하자면 이 교실의 실세랄까. 아이들은 낯선 모습의 어기를 쉽게 받아주지 않았고, 어기를 괴롭히는 줄리안의 행동을 저지하지 못한다. 교실이라는 작은 세계에서 줄리안처럼 어기를 받아들이지 않는 건 ‘옳은 일’축에 끼는 분위기였으니까.
브라운 선생님은 매주 아이들에게 새로운 격언을 가르친다. 가장 먼저 가르친 격언은 “옳음과 친절함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땐 친절함을 선택해라.”였다.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아이들은 선생님이 알려준 격언을 따라 행동한다. 잭과 썸머는 다수의 시선이 만든 ‘옳은 배척’이 아닌 친절함을 베풀었고, 나는 그 아이들의 용기가 정말 대단한 것이라 칭찬하고 싶다.
“이겼니?”
수학여행에서 싸움을 했다는 어기의 말에 걱정하던 네이트가 뒤이어 묻는다. 그 싸움에서 이겼느냐고. 네이트는 어기의 첫 등교 날, 아는 것이 있어도 한 번만 손을 들고 과학시간엔 모두 밟아버리라고 말하며 어기에게 힘을 실어준다. 어기는 아빠의 말대로 과학시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수업을 들으며 즐거움을 찾는다.
어기가 처음 학교를 구경하던 날, 줄리안은 어기를 한껏 내려다보며 과학은 선택과목이라 어려울 것이라고 무시했지만 어기는 과학경진 대회에서는 줄리안의 팀을 가볍게 재끼고 당당히 1등을 차지한다.
“넌 기적 같은 아이야.”
어기는 평범한 아이가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도 평범한 사람이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평범한 사람은 없다. 모두가 각자의 특별함으로 빛나고 있으니 우리는 평범하기보단 각자 다른 형태의 특별함을 가진 사람들이다. 나는 내 우주의 중심이다. 난 하나의 태양을 두고 돌고 있는 가려진 위성이 아닌 다른 우주의 옆에 머물고 있는 또 다른 하나의 우주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그리고 다른 이의 우주도 나의 우주만큼 특별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함을 잊지 말자.
상대의 외적인 형태가 아닌 그의 눈과 그의 얼굴에 남아있는 흔적들을 바라본 적이 몇 번이나 있었지? 그가 나에게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어떤 말을 하며 살아왔는지 또 어떤 흔적을 남기며 살아왔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려고 하는지. 그의 우주엔 어떤 것들이 가득 차있는지.. 그리고 나의 우주엔 어떤 이야기가 있는지, 어떤 이야기를 남들에게 말해주고 싶은지에 대해 천천히 살펴본 게 언제였는지.. 부끄럽지만 너무 멀어 제대로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나는 언제나 내가 부끄러웠고, 평범함이라는 단어조차 뚫고 내려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원더>는 이런 나의 부끄러운 우주에 대해, 친절을 베풀어준 사람에 대해, 우리의 소중함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를 선물한 영화였다.
나는 여전히 어기처럼 커다란 헬멧을 쓰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다. 매일은 아니지만 자주 꺼내 쓰고 있다. 생각 한번, 다짐 한 번으로 마음을 바꿀 수 있을 만큼의 긍정적 에너지가 가득한 사람이 아니다 보니 여전히 용기 내는 것이 어렵지만, 언젠가는 이 헬멧을 벗어던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날이다.
만일 처음 학교에 가던 날의 어기와 나처럼 무거운 헬멧을 쓰고 있는 사람이 이 글을, 이 영화를 보고 있다면 당신도 충분히 특별하고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더 마음껏 사랑하고 믿어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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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 미제라블> 누가 그들을 불쌍한 사람들로 만드는가
1. 몽페르메유로 전근 온 경감 '스테판(다미엔 보나드)'은 '크리스(알렉시스 마넨티)', '그와다(제브릴 종가)'와 같은 순찰팀에 배정된다. 처음으로 순찰에 나선 스테판은 경찰과 공권력에 대한 증오와 불신이 가득한 시민들, 그리고 그럴수록 시민들에게 더 거칠어지는 동료들을 마주하며 적잖은 충격을 받는다. 그렇게 새로운 임무에 발을 들이민 스테판에게 첫 사건이 주어진다. 바로 집시 서커스단의 아기 사자를 훔쳐 간 도둑을 붙잡는 것. SNS를 살피던 스테판과 그의 팀은 이민자 청소년인 '이사(이사 페리카)'가 범인임을 파악하고 체포에 나서지만 강한 저항을 마주하고, 그 와중에 이사가 그와다가 쏜 총에 부상당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된다.
사회적 약자의 봉기를 다루는 영화들은 흔히 약자들을 선으로, 그들을 탄압하는 이들을 악으로 상정하고 이야기를 풀어간다. 관객들의 공감과 분노를 빠르게 유도할 수 있고, 그들의 폭력이 갖는 정당성도 손쉽게 납득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래드 리 감독의 첫 장편 영화이자 2005년 파리 교외지역에서 발생한 이민자 청소년들과 경찰 간의 충돌과 연쇄적인 차량 방화 사건을 모티브로 삼은 <레 미제라블>도 언뜻 보기에는 다르지 않다.
작중 인종, 종교, 빈부격차 등으로 인한 갈등과 상실감에 빠진 시민들에게 경찰은 악인이다. 그들은 무슬림 여성들을 심문하며 희롱하고, 아이들에게 거침없이 폭력을 행사하며, 영장 없이 가정집을 수색한다. 영화 시작부터 거듭되는 시민과 경찰의 충들은 안전핀이 제거된 수류탄을 손에 쥔 것 같은 일촉즉발의 긴장감을 유발하며, 이러한 긴장감은 이민자 청소년들을 선, 경찰들을 악으로 인식하게끔 만든다. 이렇게 영화는 제목만 봐도 예상할 수 있는 결말, '불쌍한 사람들(Les Misérables)'의 분노가 거침없이 분출될 피날레를 향해 달려 나가는 뻔한 재현에 머무르는 듯 보인다.
2. 하지만 <레 미제라블>은 이내 평면적인 선악의 이분법을 탈피해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게 된 이 비극의 원인을 살펴보려는 본래 의도를 드러낸다. 특히 이사에게 총을 쏜 경찰 중 하나인 스테판이 주인공이라는 점, 그리고 영화가 그의 시점에서 진행된다는 점에서 의도는 더욱 명확해진다. 막 몽페르메유로 전근 온 스테판은 본질적으로 도시의 상황을 제 3자의 입장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는 관찰자다. 따라서 그의 시점과 일치된 관객들은 영화가 시종일관 긴장되는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의 끓어오르는 분노를 조명하는 것과 별개로 스테판처럼 그들의 분노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근본 원인을 되짚어 볼 수 있다.
영화의 관찰자적인 태도는 이사가 총에 맞는 장면에서도 알 수 있다. 이 장면은 사실 선악 구도로 인물들을 나누기에 최적인 순간이다. 하지만 래드 리 감독은 해당 장면을 경찰, 이사, 이사의 친구들 중 그 누구의 시점으로도 보지 않는다. 대신 카메라는 공중에서 총을 쏜 경찰, 총에 맞은 이사, 경찰들을 공격하는 이사의 친구들을 모두 내려다보며 정비되지 않아 더러워진 도시의 품 안에 그들의 갈등을 위치시킨다. 이처럼 첨예한 대립이 극에 달하는 찰나에 도리어 한 발짝 물러서는 연출은 경찰이 쏜 총에 아이가 맞았다는 사건의 충격만 부각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사연과 상황을 모두 살펴보고 진정한 가해자와 피해자를 찾게 만든다.
그와다는 아이들이 자신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폭력적으로 대응하자 총을 꺼내 들었다. 아이들의 입장에서 이미 지나치게 강압적인 태도를 지속적으로 견지했던 경찰의 명령을 신뢰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그와다와 크리스는 서커스단 집시들이 보여주었듯 대화보다 주먹이 우선시되는 사회적 분위기, 또한 총격 사건을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 기회로 삼으려는 정치인들 때문에 강압적인 수단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올라가다 보면 결국 다양한 요인에서 비롯된 갈등과 차별을 제도적으로 봉합하지 못한 프랑스 사회의 시스템이 모든 사태의 근원이라는 결론에 다다를 수밖에 없다.
3. 이에 더해 <레 미제라블>은 관찰자인 스테판의 눈을 빌려 이민자뿐만 아니라 그들이 적대시하는 경찰도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점을 환기시킨다. 스테판은 총을 쏜 당사자인 그와다와 밤중에 대화를 나눈다. 그와다는 몽페르메유에서 긴 시간을 지낸 경험으로 비추어 볼 때 이 도시에서 폭력을 쓰지 않을 수 없다고 항변하고, 스테판은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테판은 그와다에게 이사를 쏘는 장면이 담긴 sd 카드를 넘겨준다. 그와다가 도덕적으로, 또 윤리적으로 옳지 않은 일을 한 것은 맞다. 하지만 이미 증오와 분노가 또 다른 증오와 분노를 낳고, 폭력이 폭력을 부르는 악순환의 굴레 안에 들어온 이상 그에게만 책임을 지울 수는 없으며, 관찰자인 스테판도 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이다.
이민자들과는 또 다른 맥락 안에서 피해자가 되어버린 경찰들의 딜레마는 스테판 본인의 서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비록 이사에게 총을 쏜 팀원 중 하나이지만, 그는 팀원들에게 절차를 지키라고 항의하고, 총에 맞은 이사를 치료해주는 등 경찰로서 자신의 권한과 범위 내에서 사회 시스템을 유지하는 데 충실한 상식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그런데도 그는 성난 이민자들의 공격을 피하지 못한다. 이처럼 그저 사회적으로 주어진 일에 충실했던 사람마저도 가해자가 되어버리는 스테판의 서사는 자연스럽게 과연 경찰들을 악이라는 프레임 안에 고정시키고, 이 모든 비극의 책임을 그들에게 돌리는 것이 정당한지 의문을 낳는다.
이는 크리스, 스테판, 그와다가 퇴근 후 집에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며 하루 동안 감내해야 했던 부정적인 감정을 털어내는 장면이 긴장감이 팽배한 영화에서 유일하게 숨을 고를 수 있는 대목인 이유다. 영화는 감정 이입이 용이한 이민자들 대신 악인으로 인식하기 쉬운 경찰들의 개인사를 일부 흘리면서 그들이 가해자이자 피해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에 감정적으로도 공감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그들의 저녁을 장식하는 평화로운 석양은 분노와 불신, 갈등의 골이 나날이 깊어지는 악순환이 경찰들의 일상을 잠식했으며, 그들은 그저 자신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발버둥 칠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4. 한편 <레 미제라블>은 스테판 외에도 축구라는 상징을 통해 프랑스 경찰과 이민자들이 모두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사실, 간과되기 쉬운 진실이자 프랑스 사회의 치부를 드러낸다. 1998년 월드컵에서 알제리 이민자 2세인 지네딘 지단을 중심으로 우승을 차지한 이래 프랑스 남자 축구 대표팀은 프랑스 사회의 통합을 상징해 왔다. 2010년 월드컵 당시 팀에 내분이 발생해 조별리그 탈락을 맛보자 청문회가 열렸을 정도다. 그러다 보니 2018년 러시아 월드컵 결승전에서 프랑스가 20년 만에 승리하자 파리 주피터 광장을 가득 메우고 환호하는 인파를 담은 영화의 오프닝은 마치 온전히 하나 된 프랑스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화의 결말은 프랑스 사람들의 환호를 비명과 괴성으로 바꾸어 놓으면서 축구라는 상징에 담긴 하나 된 프랑스라는 공허한 허상을 파괴한다. 그 중심에는 닭과 사자가 있다. 영화는 세 번에 걸쳐서 닭과 사자를 한 공간에 놓는다. 우선 집시들의 아기 사자를 훔친 이사는 사자 앞에 수탉 한 마리를 던져준다. 이후 집시들의 항의에 굴복한 공권력에 의해 총을 맞고, 집시들에게 끌려간 이사는 자신이 던졌던 닭 마냥 사자 우리에 잠시 갇히는 벌을 받는다. 마지막으로 클라이맥스에서 이사는 한 마리의 사자가 되어 닭을 보듯 시장과 경찰들을 습격한다.
이때 닭과 사자는 단지 약자와 강자가 아니다. 그들은 이제 약자가 된 강자, 또는 강자가 된 약자다. 그들은 서로 분노하고 폭력을 휘두르며 누가 가해자이고 피해자인지조차 알 수 없는, 모두가 불쌍해진 프랑스 사회를 담아낸 우화 속 주인공이기도 하다. 특히 수탉이 프랑스 남자 축구 국가 대표팀의 상징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세 차례 반복되는 닭과 사자의 우화는 이민자들과 경찰을 대립항 대신 그들을 사회적 시스템의 피해자라는 동류항에 위치시킨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5. 영화는 총을 겨눈 스테판과 폭탄을 든 이사가 꽉 막힌 아파트 복도에서 서로 대치한 상태로 끝난다. 이 대치 상황은 연이은 분노와 증오, 폭력의 결과이자 누군가의 승리도 패배도 없으며 그 누구도 일방적인 가해자 혹은 피해자라고 말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이나 다름없다. 섣불리 그 끝을 보여주지 않는 결말은 러닝타임 내내 줄곧 던져왔던 질문, 이 상황이 과연 누구의 잘못이며 이 사태를 촉발시킨 본질적인 문제는 과연 무엇인지라는 의문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그 결과 <레 미제라블>은 시작부터 끝까지 특별하다. 뻔한 길을 가지 않으면서 당연하다면 당연할 수 있는 갈등 구도나 사연을 자신만의 관점으로 보여준다. 단지 눈에 보이는 사건과 현상을 다시 보여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외피가 숨기는 사회 구조적 모순, 개개인의 일상적인 삶에서 특정하기 어려운 거시적인 문제점을 직관적으로 느끼도록 한다. 이처럼 단지 세상을 재현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제시할 줄 아는 영화 <레 미제라블>은 색다르고 인상적이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꼬리를 무는 증오, 분노, 폭력이 파괴한 '하나 된 프랑스'라는 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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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WIFF 데일리] 보이는 자에서 보는 자로
시선의 방향
그리스로마신화에 아르고스(Argos)라는 이름의 괴물이 등장한다. 그는 온몸에 붙어있는 100개의 눈으로 모든 것을 보는 자다. 아르고스는 제우스의 애인인 이오를 감시하다 제우스에게 죽임을 당하는데, 헤라는 그 100개의 눈을 공작의 깃털에 붙여준다. 모든 것을 보는 눈은 뛰어난 감시자를 뜻한다. 판옵티콘의 감독자들은 죄수들의 모든 것을 본다.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 있는 자들은 결코 위를 볼 수 없다.
마네의 <올랭피아>는 항상 관찰자의 시선에 의해 관음되던 여성이 고개를 들고 관찰자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이는 곧 비난으로 이어진다. 은밀하게, 자기들끼리 관음하고 관찰하는 '보는 자'로서의 권위를 유지하다 한순간에 '보이는 자'의 위치에 서버린 관객들은 당황스럽다.
아시아단편 단편선은 아시아 여성 감독들이 만든 영화들 중 경쟁에서 선정된 작품들을 모아둔 섹션으로, 단편선 1부터 4까지 나뉘어 있다. 단편선 1에 속한 몇 작품을 살펴보자. 작품들에서 여성은 더 이상 '보이는 자'로만 머무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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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지내고 싶지만(Crack)(2021)
감독 : 이현주
상영시간 : 23분
시놉시스 : 25년 동안 혼자 살아온 민영은 함께 살게 된 조카 연정에게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지만, 연정의 행동 하나하나가 거슬리기 시작한다.(출처: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잘 지내고 싶지만>의 민영과 연정을 보자. 민영은 연정이 오기 전 집을 깨끗이 닦고 연정을 맞을 준비를 한다. 연정의 약봉투를 세심히 살피고, 배탈이 난 연정을 위해 죽을 배달시켜 준다. 연정은 연정대로, 민영이 기침을 하자 쌍화탕을 먹어 보라고 권하고, 민영의 몫까지 삼겹살을 사온다. 민영은 엘리베이터도 없고 방도 한 칸뿐이지만 자본과 권력을 가진 집 주인으로서 객식구인 연정을 관찰하고 살핀다.
그러나 민영은 혼자 산 사람이다. 혼자 오래 살아온 사람이 느끼는 양가감정이 있다. 혼자 있으니 쓸쓸해서 누가 옆에 있었으면 싶은 감정과 누구도 내 공간을 침범하지 않는 혼자만의 공간을 지키고 싶은 감정. 홍성은 감독의 <혼자 사는 사람들>(2021)에서 혼자 밥 먹고 혼자 TV보는 진아처럼, 민영도 혼자 사는 게 익숙한 사람이다. 혼자 산다는 것은 내 집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통제가능한 삶에는 특별한 사건이 있지 않는 한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다.
민영의 평화로운 삶에 조카 연정의 침입은 미세한 균열(Crack)을 만들어낸다. 호기롭게 '잘 지내보자'고 했지만, 그럴 수 없다. 이제 민영의 집에는 연정의 눈이 있기 때문이다. 25년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타인의 눈. 그 눈으로 민영은 관찰당하기 시작한다.
아플 때 쌍화탕을 데워주었더라도, 밤에 시끄럽게 뭘 먹지 않았어도. 아침에 잠에서 깬 민영이 TV를 켰을 때 연정이 인상을 찌푸리지 않았어도, 화장대 앞에 누워있는 연정의 다리를 치웠을 때 연정이 몸을 돌리지 않았어도 민영은 견디기 어려웠을 거다. 민영은 통제불가능한 연정의 눈을 피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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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스(The Dress)(2022)
감독 : 스팡팅
상영시간 : 30분
시놉시스 : 리얼돌 호텔에서 일하는 원치는 어느 날 이상한 손님을 맞는다. 그는 매 방문마다 인형에 빨간 드레스를 입혀 놓고 떠난다. 원치는 리얼돌이 되고픈 욕망을 난생처음 느끼게 된다.(출처: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드레스>는 리얼돌 호텔을 이용하는 사람들과 그 호텔을 청소하는 청소부의 눈으로 호텔을 관음한다. 호텔 청소부라는 존재는 무엇인가. 봐도 못본 척, 알아도 모른 척, 호텔을 드나드는 구구절절한 사연들을 모른 척 해주는 사람이다. 사람일까? 어쩌면 NPC라고 볼 수도 있겠다. 여기서 다시 <프리 가이>의 가이를 소환해보자. NPC였던 가이는 자신이 살던 세상의 수상함을 깨닫고 세상 밖 현실의 진짜 사람과 소통하게 되면서 감정을 깨닫는다.
호텔이든 모텔이든 여관이든 묵을 일이 생기면 이따금 청소하는 사람들을 마주치게 된다. 그들은 내 눈에 보이는 자들이며 그들의 눈에 나는 보이지 않는다(못본 척 한다에 가깝지만). 리얼돌 호텔을 찾는 자들 역시 자신은 볼 수 있지만 인형은 절대 자신을 볼 수 없으므로 시선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렇기에 이곳에서는 무슨 짓이든 가능하다. 죽은 어머니의 드레스를 입히는 것까지도 할 수 있다.
청소부 원치는 리얼돌에 빨간 드레스를 입혀놓고 떠나는 남자가 궁금해진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원치는 보는 자다. 섹스돌에 드레스를 입히는 괴상한 취향을 가진 남자를 훔쳐보는 자. 그는 원치의 존재를 모르고 보여지는 자로 전복된다.
호텔에 전기가 끊겨 손님을 받을 수 없게 된 날, 원치는 그의 예약을 취소하지 않고 그가 이용할 방에 들어가 옷을 벗고 기다린다. 그는 보는 자로 들어갔으나 인형이 아닌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보이는 자로 전락한다. 그렇기에 그는 호텔을 황급히 떠나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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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 중의 탑(The Top of the Tower)(2022)
감독 : 박은새
상영시간 : 22분
시놉시스 : 반지하에 살고 있는 지숙이네 가족. 어느 날 십자가에서 빛이 나는 광경을 목격하고 그 빛을 다시 보기 위해 이사를 결심하게 된다.(출처: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기생충>에서 기택의 가족이 사는 반지하 집은 침수피해만 겪은 게 아니라 지나가는 행인들이 창문에다 대고 노상방뇨하고 구토하는 등의 일상적인 테러를 겪는다. 사람이 살고 있는데도 말이다. 영화가 아니더라도 반지하 성범죄, 반지하 불법촬영 등의 뉴스기사도 심심찮게 볼 수 있는데, 앞서 언급한 것처럼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시선은 권력을 가진다.
수험생인 지숙의 가족도 반지하에 산다. 지숙은 꾸벅꾸벅 졸고 있다가 갑자기 방에 걸어둔 십자가에서 빛이 나더니 천장으로 튀어오르는 것을 목격한다. 아! 드디어 성령을 본 것이다. 지숙 가족이 다니는 교회에는 성령을 본 사람들이 원하는 바를 이루었다는 간증이 이어지고 있었다. 한 신도는 성령이 십자가에서 빛나다가 하늘로 솟아올랐는데, 이후 아들이 연금복권에 당첨되었단다.
하지만 지숙은 반지하에 산다. 목사가 이르기를, 성령이 하늘로 올라가야 간절한 기도가 하나님께 닿을 텐데, 지숙네 가족은 너무 낮은 곳에 있다. 이들이 반지하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지숙이 잘 되는 것이다. 지숙은 서울대 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지만 사실 택도 없지 싶다.
목사는 이 가족에게 옥탑방을 소개해준다. 엄마 아빠는 있는 돈 없는 돈, 친구 친척 사돈의 팔촌의 돈까지 끌어다가 무리하게 이사를 한다. 이삿짐 비용이라도 아껴보려고 세 가족이 죽도록 짐을 올린다. 이 집도 역시 엘베 없는 집이다.
마지막 매트리스만 올리면 이사도 끝인데, 문 앞에 다다랐을 때 지숙은 또 다시 성령을 목격한다. 지숙을 가여이 여긴 하나님의 은혜일까. 지숙은 성령의 빛을 따라 옥상으로 뛰쳐나간다. 그러나 지숙의 눈 앞에는 거대한 고층건물이 떡하니 버티고 서 있다. 그리고 하늘에서 빛나는 것은 성령이 아니라 폭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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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단편 단편선1에는 위의 세 작품 외에도 <로봇이 아닙니다.>와 <거미>까지 총 다섯 작품이 포함되어 있다. <거미>는 에도시대에 강도의 습격으로 부상당한 동생의 복수를 하는 여자 이야기이고, <로봇이 아닙니다.>는 자율주행자동차가 백인이 아닌 여성을 사람으로 인식하지 못하여 발생한 사고를 다룬다. 서두의 아르고스 이야기는 <로봇이 아닙니다.>에서 가지고 왔다. 연구에서 과소대표되고 비표준화되는 여성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작품이다. 시선의 방향이라는 주제로 영화를 묶어보기로 한 계기가 된 작품이기도 하다.
아시아단편 단편선1을 상영하던 날, 영화제 현장에서 한 남자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아마 동시간에 나와 함께 영화관에 있었던 분들이 계실 것이다). 시선을 집중시킬 만큼 제법 큰소리였다. 양손으로 성기를 쥐고 흔드는 짓을 몇십 분은 한 것 같은데(하필 나는 그 남자 근처에 있는 가게에 들어가는 중이었다), 그 누구도 그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옛날 같았으면 여자들이 꺅 하고 소리를 질렀을지도 모른다. 그는 당당하게 성기를 흔들고, 놀란 여성들을 보는 자로 군림하고 싶었겠으나 딱하게도 현장에서 그는 보이는 자, 아무리 봐 달라고 소리를 질러도 그 누구도 대꾸해주지 않는 자가 되어 있었다.
자동차 창문 열고 따라오며 똑같은 짓을 하던 성인 남성을 보고는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던 교복 입은 어린 여자 아이도, 그런 사람을 보니 딱하더라는 글을 쓰는 어른 여자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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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2022년 8월 27일 14:00~15:45 /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1관
2022년 8월 29일 16:30~18:15 /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5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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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으로 시의적절한 가족 영화 해피엔드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신작, 해피엔드가 개봉했습니다.
칸 영화제에서 2년 연속으로 '가족영화'가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는 점, 그리고 칸이 사랑한 감독 미카엘 하네케의 신작이 '가족영화'라는 점이 참 재미난 관람 포인트라 생각합니다.
영화를 관람하시고 시청해주시면 이해에 더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이번 콘텐츠도 재밌게 시청해주세요!제작지원 : 그린나래미디어
#해피엔드 #미카엘하네케 #영화해피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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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랜75 - 또 다른 의미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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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영상은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써 2월 8일 개봉하는 '플랜75'의 개봉전 시사회를 다녀온 뒤 제작된 영상입니다]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가까운 미래의 일본. 청년층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정부는 75세 이상 국민의 죽음을 적극 지원하는 정책 '플랜 75'를 발표한다. 명예퇴직 후 '플랜 75' 신청을 고민하는 78세 여성 '미치' 가족의 신청서를 받은 '플랜 75' 담당 시청 직원 '히로무' 개인별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는 '플랜 75' 콜센터 직원 '요코' '플랜 75' 이용자의 유품을 처리하는 이주노동자 '마리아' '플랜 75'의 세상,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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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청설> 티저 예고편
홍경 X 노윤서 X 김민주 청량 설렘의 대명사 [청설] 티저 예고편 공개! [청설] 11월 6일 극장 대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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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우리가 죽기를 바라는 사람들> 메인 예고편
올해 대학에 입학한 첫째 아들 지미의 클럽 활동과 기상 시간까지 챙기는 바바라는 네 아이의 엄마다.
어느 날, 대학 클럽 신고식에서 지미가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지만 어느 누구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긴 시간을 침묵으로 기다린 바바라는 잠시 집안일을 미뤄 둔 채 지미를 위한 프로젝트를 시작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