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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한2025-08-20 20:17:11

타오르는 꽃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 리뷰

 

 

‘시선’ 그리고 ‘기억하기’

 

 

 

 

© 그린나래미디어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시선이 대상을 향하고, 대상을 기억하고, 시선이 다시 캔버스로 향한 다음, 다시 기억을 재현시켜 손으로 그려낸다. 즉, 그리기는 ‘시선’과 ‘기억하기’가 함께 작동한다. 그렇다면 사랑에 빠지는 과정은 어떨까. 셀린 시아마 감독은 그림 그리는 과정과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겹쳐 놓는다. 상대방이 동요할 때의 손동작이나 당황스러울 때 입술을 깨무는 것을 보고 기억하는 것. 이렇게 상대방의 사소한 행동들과 습관들을 보고 기억하는 것. 그렇게 감독은 사랑에 빠지는 과정도 그림 그리는 행위와 같이 ‘시선’과 ‘기억하기’가 아니냐고 묻는다.

 

 

 

엘로이즈(아델 하에넬)가 초상화 모델로서 포즈 취하는 것을 거부하는 행위는 마리안느(노에미 메를랑)가 더욱 열심히 대상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기억하도록 만든다. 그래서 마리안느는 화가라는 것을 숨기고 엘로이즈와의 산책길에서 그녀를 계속해서 훔쳐보게 된다. 엘로이즈는 그런 그녀의 시선을 느끼고 그녀를 바라본다. 그렇게 사랑은 ‘시선’에서 시작되어 ‘기억하기’로 절정에 이른다. 엘로이즈의 첫 웃음을 기억한다는 마리안느, 처음으로 키스하고 싶었던 순간을 기억한다는 엘로이즈. 영화 첫 시퀀스 속 등장하는 그림인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그렇게 완성된다. 시선과 기억의 재현으로. 사랑으로.

 

 

 

 

 

주체와 객체의 전복 그리고 협력

 

 

 

 

© 그린나래미디어

 

 

영화는 마리안느를 그리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카메라는 모델의 모습을 먼저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고 있는 학생들을 선행해서 보여준다. 어쩌면 그림을 그리는 행위에서 화가가 시선의 주체라는 관습에서 벗어나 모델이 시선의 주체가 된 듯이. 모델이면서 동시에 선생님의 역할인 마리안느는 학생들에게 자신의 손을 보라고 하는 등 조언을 통해 그림 그리는 행위의 능동 객체가 된다.

 

 

 

영화 초반에 엘로이즈는 결혼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초상화 모델로서 포즈 취하는 것을 거부한다. 이것은 모델이 그저 그림 그리는 행위에서 수동적 객체가 아니라 선택 가능한 능동적 객체로서의 입지가 가능함을 보여준다. 이렇게 셀린 시아마 감독은 영화 속에서 관습적인 주체와 객체의 관계성에 전복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는데, 이것은 엘로이즈의 대사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우린 똑같은 위치에 있어요. 아주 동등한 위치죠. 당신이 날 볼 때 난 누구를 보겠어요?”

 

 

 

그리스 신화에서 오르페우스는 그의 아내 에우리디케를 잃을까 두려워 하데스의 약속을 어기고 출구의 문턱에 발을 딛는 순간 조급한 마음에 그만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이 신화의 이야기 속에서 이별의 주체는 오로지 오르페우스의 몫이고 객체는 에우리디케라고 읽힐 수 있겠다. 하지만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오르페우스 신화를 변주하여 이별의 주체와 객체에 대해서 다르게 생각해 보기를 권유한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의 마지막 이별 장면에서, 엘로이즈가 먼저 “돌아봐요.”라고 말하는 것은 이별의 능동적 주체로서의 에우리디케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마리안느는 본인이 말했던 것처럼 그녀와의 추억을 선택하는 시인의 선택을 하며 뒤를 돌아본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객체가 주체가 되고 주체가 객체가 되는 그저 관계성의 전복을 바랐던 것일까? 그건 아니다. 그림의 마지막 완성 장면에서 마리안느는 엘로이즈를 불러 마지막 붓 터칭을 하며 그림이 끝나는 순간을 함께한다. 이 장면은 주체와 객체의 협력적 지지를 옹호한다. 모델(객체)의 역할과 화가(주체)의 역할이 동시에, 능동적으로 그리고 협력적으로 맞물릴 때, 아름다운 그림(사랑)은 완성될 수 있다고.

 

 

 

  

 

타오르는 꽃

 

 

 

 

© 그린나래미디어

 

 

그녀들이 사랑했던 순간들처럼 꽃은 어쩔 수 없이 시간과 함께 점점 시들 수밖에 없는 운명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시선과 감정의 기억은 영원히 간직될 수 있다. 소피의 꽃 자수처럼. 엘로이즈의 28쪽처럼. 마리안느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화처럼.

작성자 . 려한

출처 . https://brunch.co.kr/@ryeohan/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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