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라별2021-06-08 16:04:06
제한된 색감으로 집약적 표현을 해낸 영화 《자산어보》
흑백영화에 대한 약간의 거부감이 있었던 내게 흑백영화를 보는 재미를 알려준 영화 《자산어보》. 컬러풀한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라 검정색과 흰색 이 두가지로만 이뤄진 영화를 두 시간 동안 보기에는 약간 부담스러웠었는데 그 생각을 바꿔준 작품이었다.
영화 《자산어보》 시놉시스
“이 양반은 대역 죄인이니 너무 잘해줄 생각들 말어” 순조 1년, 신유박해로 세상의 끝 흑산도로 유배된 ‘정약전’. 호기심 많은 '정약전'은 그 곳에서 바다 생물에 매료되어 책을 쓰기로 한다. 이에 바다를 훤히 알고 있는 청년 어부 ‘창대’에게 도움을 구하지만 ‘창대’는 죄인을 도울 수 없다며 단칼에 거절한다.
“내가 아는 지식과 너의 물고기 지식을 바꾸자" ‘창대’가 혼자 글 공부를 하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정약전’은 서로의 지식을 거래하자고 제안하고 거래라는 말에 ‘창대’는 못 이기는 척 받아들인다. 둘은 티격태격하면서도 점차 서로의 스승이자 벗이 되어 간다.
"너 공부해서 출세하고 싶지?" 그러던 중 '창대'가 출세하기 위해 공부에 매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정약전'은 크게 실망한다. ‘창대’ 역시 '정약전'과는 길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정약전'의 곁을 떠나 세상 밖으로 나가고자 결심한다.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자산어보》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색에 가려진 아름다운 선을 조망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들었던 느낌은 ‘이게 바로 움직이는 산수화구나’였다. 정약전이 배를 타고 귀양지를 가는 장면에서 바다와 산, 구름을 보여주는데 미술관에서 작품을 보는 느낌이었다. 출렁이는 바다의 모습과 하늘, 바다, 산의 다양한 색과 같은 정보들이 다가왔다면 저곳이 흑산도구나 하는 지역으로서만 다가왔을 것이다.
하지만 흰색과 검정색이라는 제한적인 정보로 산, 바다 그리고 하늘을 표현하다보니 그 아름다운 곡선들이 눈에 띄게 보였다. 수려하다는 말이 절로 떠오를 정도로 순간적인 탄성이 나왔다.
색이 보이는 듯한 고증
사극을 많이 접해서 그런 것일수도 있지만 분명 흑백 영화를 보는데 컬러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마 그 이유는 옷이나 배, 당시 가옥 고증이 매우 잘 되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흑백으로 보기만 하더라도 헤질대로 해진 누더기 옷들을 입은 백성들과 너무나도 곱디 고운 무명비단을 입고 있는 양반들까지 질감을 굉장히 선명하게 대비해서 꼭 색이 보이는 듯한 풍성함이 느껴졌다.
특히 막판에 가서 창대가 출세의 뜻을 가지고 스승인 정약전이 아닌 아버지를 따라 양반이 되었을 때 명도의 대비가 가장 크게 드러났다. 출세를 하고 싶어도 그 마음은 선햇던 창대는 하얀 무명비단을, 관직을 돈으로 사고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아버지와 늙은 관료는 검정색과 같은 어두운 비단을 입고 있어서 그 차이를 흑백영화이기에 더욱 극명하게 잘 볼 수 있었다.
영화 내용 그대로일까?
사실 정약용이라는 인물은 알았어도 정약용의 형제에 대한 이야기에는 무지했다. 이번 영화 《자산어보》를 통해 거의 처음 안 것과 다름 없었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서 ‘창대는 왜 그렇게 늦게 스승님을 만나러간거야,,, 아니 만나서 마지막 자산어보 마침표는 같이 찍는 해피엔딩이길 바랬는데!!’ 이러면서 혼자 안타까워서 펑펑 울다 나왔다.
그렇게 다 울고 근데 이게 사실은 맞는건지 의문스러웠다. 영화의 내용과 실제 역사가 맞는지 다시 찾아봤는데 영화에서는 정약전의 흑산도 생활을 깊이 있게 풀어내고 우이도에 대한 이야기는 굉장히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그래서 흑산도에서의 삶이 대부분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 역사는 우이도에서의 귀양살이가 더 오래됐다고 한다.
뭐 영화는 극히 일부분의 기간을 편집해 만든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이런 부분마저 딴지를 걸면 안되니 말이다. 나는 오히려 이렇게 역사 영화를 통해서 가려진 인물들을 대중화시켜서 역사적 인물들을 다양하게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으로 만족한다. 그 사실에 대해 왜곡만 없다면 말이다.
영화 《자산어보》는 내용적으로도 연출적으로도 굉장히 큰 감동과 여운이 있었던 작품이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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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낭비할수록 채워지는 이상한 마법을 손끝으로 느껴본다면
※영화 〈시티 라이트〉의 주요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여기 도시를 떠돌아다니는 한 남자가 있다. 가진 것이라고는 낡고 펑퍼짐한 양복과 맞지 않는 모자, 지팡이뿐인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길모퉁이에서 꽃을 팔고 있는 한 소녀가 있었다. 그에게 부토니에를 사려했을 때 남자는 알게 되었다. 소녀의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잠깐의 만남 이후 그는 길 위의 삶을 그만두기로 한다. 대신 자신을 위해 웃어주는 한 사람을 위해 살기로 마음먹는다.
20세기 문화예술을 말할 때 빼놓아서는 안 되는 최고의 예술가이자 감독, 제작자 찰리 채플린의 영화 〈시티 라이트〉는 사랑에 빠진 눈먼 소녀를 지키기 위해 가난한 남자가 벌이는 고군분투를 그린 로맨틱 코미디다. 로맨스 장르에는 언제나 두 사람의 사랑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존재한다. 이는 중세 기사도 문학인 ‘로망스’부터 시작되었다. 기사와 귀부인이라는 계급과 신분의 차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플라토닉 사랑을 자아낸다. 닿지 못하는 사랑의 결실은 곧 귀족 사회의 도덕적 가치를 수호하는 매뉴얼이 된다. 명예와 품위를 잃지 않으면서도 겸손하고 금욕적인 기사도의 원형은 당대의 사회 질서를 지배했다. 이후 로망스가 로맨스 소설로 변화하면서 ‘낭만적 사랑’의 서사가 등장하고, 현대에 와서는 사라진 신분과 계급 대신 다양한 심리적, 물질적 장애물로 세분된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을 가로막은 집안과 신분을 지난 현대의 작가는 사장과 평직원, 북한의 장교와 남한의 유명 배우, 심지어는 도깨비와 인간 사이의 장애물까지 만들어낸다. 독자, 시청자, 또는 관객은 이 미끄러지는 위치와 관계에서 발생하는 정보의 격차로 발생하는 오해와 편견, 이별과 재회에 이목을 집중한다. 하지만 로맨스 장르의 또 다른 특징은 독자의 바람을 충족시키는 해피 엔딩으로 끝난다는 점이다. 사랑과 이별에 갈등하고 위기를 맞는 이들은 결국 절대적인 사랑의 힘이라는 우연 혹은 필연으로 재회하고, 행복한 결말을 이룬다. 롤러코스터처럼 종잡을 수 없는 갈등의 연속에도 이미 독자는 이 바람 잘 날 없는 사랑이 이뤄질 것이라는 기대를 은연중에 품는다. 독자는 로맨스 안에서 현실과 다른 환상적 사랑의 결실을 바라기 때문이다.
과거의 로맨스는 주로 우월적 지위의 완벽한 남성이, 그보다 낮은 지위의 선량하지만 수동적인 여자 주인공을 구원하고 해방하는 드라마였다. 이는 현대의 로맨스 장르에서도 여전히 통용되는 법칙이다. 다만 그 안에서 여러 설정과 관계성의 변주를 준다. 앞서 언급했던 도깨비와 인간의 사랑처럼 믿을 수 없는 능력의 탈인간을 남자 주인공으로 설정하거나, 여성의 지위가 낮았던 근대의 조선 양반집 여성과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한국계 미국인 남성을 주인공으로 설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대 로맨스 장르에서 특징 중 하나는 한쪽의 일방적 관계가 아니라 두 사람의 결핍이 서로 마주하며 성장해 동등한 지위를 만든다는 점이다. 이는 시대의 변화에 영향을 더 많이 받은 여성 캐릭터의 성장과 맞닿아 있다. 이제 로맨스의 여성은 과거의 인습에 따라 ‘도덕적 미덕’을 구현하는 존재로 남아있지 않다. 자신의 욕망과 목표를 정확히 인식하고 주체적 실현을 위해 노력한다. 무조건 선량하거나 씩씩한 캐릭터도 아니다. 좌절과 절망, 탐욕과 부정을 숨기지 않기도 하며,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거침없이 행동한다. 과거 남성과 여성의 구도가 전복되기도 하며 미스터리, 공포, 판타지 등 다양한 장르와 결합해 확장된 장르의 변용과 해체도 이루어진다. 완벽한 사람은 없다는 현실적 인식과 다양성의 확장이 맞물린 로맨스의 두 사람은 서로의 부족함을 깨닫고 연대와 성장의 길로 함께 들어서는 관계가 된다.
〈시티 라이트〉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마법에 빠진 것처럼 다른 사람을 돕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영화를 관통하는 이 무조건적 선의와 환대의 가치는 유성 영화의 시대에 들어선 1930년대를 마주 선 찰리 채플린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 연결된다. 찰리 채플린이 연기하는 남자는 거리를 떠돌아다니며 생활하는 단벌 신사다. 평소처럼 길을 걷다 첫눈에 반한 소녀는 소리만 듣고 우연히도 고급 자동차에서 나오는 부유한 남자와 그를 착각한다. 남자는 당황하지만 소녀의 사정을 이해하고 그를 돕기로 마음먹는다. 하지만 집도 절도 없는 사정은 본인도 마찬가지기에 여느 때처럼 방황하며 고민을 하던 중 강가에서 극단적 선택을 하려던 한 남성을 구한다. 그는 이 도시의 백만장자였고, 목숨을 살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준 찰리 채플린을 금세 친구로 사귀고 집으로 초대한다. 감정 기복이 심하고 술을 즐기는 이 백만장자는 찰리의 여러 사정을 묻지 않고 통 크게 그를 환대한다. 소녀를 돕기 위해 돈을 건네주기도 하고, 잠자리도 제공해 주는 등 선의를 베풀어 준다. 불의의 사고로 그와의 기억을 잃기 전까지는 말이다.
무성영화의 시대가 저물어 가는 1930년대 음향 기술의 도입에 반기를 들었던 그는 사회의 부조리에도 말없이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부의 불평등과 인간의 가치 하락을 꼬집는 블랙 코미디로써 영화는 사회의 약자들에게 가닿을 수 없는 도시의 불빛에 휘청거리는 소시민을 연기한다. 소녀의 집세와 개안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돈을 얻으려 했던 그의 노력은 안타까움 속에 담긴 익살스러운 슬랩스틱에 담겨 웃음과 함께 복잡한 감정을 자아낸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 보려는 노력은 번번이 실패한다. 결국 경찰에 쫓기는 범죄자 신세가 되어서야 소녀에게 돈을 쥐여줄 수 있던 그의 마음은 오로지 한 곳으로 향한다. 자신도 변변치 않은 현실에도 소녀가 세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고군분투하는 남자의 일대기는 뒤안길로 사라질 위기의 무성영화가 주는 그 울림과 가치를 고집스럽게 지켜내려는 감독 찰리 채플린의 심정과 닮았다.
이 영화를 말할 때 헬렌 켈러라는 인물을 빼놓을 수 없다. 찰리 채플린과 그의 짧은 만남은 영화의 스토리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었다. 찰리 채플린과 헬렌 켈러는 국가의 억압과 독선에 당당히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지금이야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내가 어릴 적만 하더라도 대중과 미디어에 비치는 헬렌 켈러는 ‘불굴의 의지로 장애를 딛고 삶을 이어 온 투혼의 인물’ 정도였다. 모두가 행복한 동화 속 헬렌 켈러의 삶은 그의 스승 설리번 선생님과의 유대관계와 우정, 박애와 사랑의 성녀, 그 정도뿐이다. 정말 그가 어떤 일을 했는지는 철저히 가려지고 윤색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헬렌 켈러는 서른 살까지의 인생까지다. 알려지지 않은 그는 공산주의 사회운동가이자 페미니스트였고, 1900년대 초반 미국 사회당에 입당해 여성과 노동자, 유색인종의 권리와 평등을 위해 싸웠다. 여러 신문의 칼럼과 저서로 부정의한 사회로부터 투쟁해 온 헬렌을 보며 사람들은 그가 장애인과 사회복지 운동 외의 다른 운동에 투신하는 것을 싫어했다. 대중이 정해놓은 성스러운 이미지로 ‘숭배’ 해야 하는 ‘천사’가 정치 세력에 옮아 ‘불순한’ 사회운동을 하다니. 견디지 못한 언론은 그를 향해 십자포화를 날렸다. 장애인이라는 그의 정체성을 과거에는 ‘삼중 장애의 역경을 딛고 세상에 나온 영웅’으로 추앙했지만 비난의 대상이 된 이후 ‘세상 물정 모르는 장애 여성의 치기’로 격하한 언론의 이중성은 극에 달했다. 장애를 단지 극복해야 할 비정상적 양태로 바라본 편협한 시각은 등을 돌렸을 때 더욱 모진 차별과 비난의 무기로 활용되었다.
찰리 채플린도 같은 곤경에 처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어두운 면과 빈곤의 굴레를 풍자와 해학으로 표현한 그의 영화는 냉전 시대의 광풍 앞에 ‘공산주의적 선동’으로 몰린다. 소아성애자라는 근거 없는 가짜 뉴스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그는 결국 미국을 떠나 이민을 간다. 여성이자 장애인으로 사회의 진보를 위해 투신했던 헬렌의 삶에 감명을 받은 찰리는 〈시티 라이트〉에서 도시의 불빛을 볼 수 없던, 아니 도시의 따가운 시선에 가려진 한 소녀가 선한 의지와 노력으로 결국 주체적인 인물로 성장하는 이야기를 만든다.
이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는 영화사적으로 손꼽히는 명장면이다. 영화 줄곧 원경에서 시민들의 군상, 그 안의 찰리 채플린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담았던 카메라는 눈을 뜬 소녀가 그의 얼굴이 아닌 손끝으로 남자를 알아보는 장면에서 또렷이 서로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관객은 무조건적 희생과 사랑의 연대라는, 자본주의와 거리가 멀어 보이던 가치를 묵묵히 이어나간 끝에 마침내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게 되는 두 사람의 표정을 만난다. 고난 끝에 찾아온 행복이 현실이 되기 바라는 감독의 간절함은 참고 참다 마지막에 드디어 시선을 가까이 두는 탁월한 완급조절로 드러난다. 설명을 듣기 전에는 그 의미를 전혀 알 수도 없는 ‘평화와 번영’ 동상 위에서 대범하게 잠을 청하는 유쾌하고 날카로운 찰리 채플린의 시선은 이렇듯 정말 필요한 순간에는 마음을 울리는 직접적인 메시지로 표출한다.
우리는 사랑과 연대가 가진 힘을 알고 있다. 저 큰 도시 한 구석에 평화와 번영을 바라는 동상 하나 세운다고 그 가치는 실현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는 별것 아닌 몸부림이겠지만, 자신의 곤궁함을 받아들이면서 한 인간의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그의 몸이 오히려 가장 시대의 변화를 추동하는 상징으로 내세울 만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동상이 아닌 행동이다. 우리의 진가는 사회에 겉돌고 외면받는 사람들을 포용하고 같은 인간으로 바라보는 시선이다. 지난달부터 우리는 서아시아의 한 나라가 무너지는 장면을 바라봤다. 한순간에 억압의 과거로 퇴보하는 장면을 실시간으로 바라보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타인을 포용할 만큼 충분히 밝은 도시의 불빛에 비해 비좁은 시민들의 인식은 여러 이유를 들어 세상의 불의와 고통을 애써 외면하고 만다. 사회에 내 집 하나 없이 무시당하는 역할을 맡았지만 해학을 담아 웃음과 눈물을 만든 찰리 채플린은 영화 내내 웃지도 않고 전 세계의 관객을 웃겼다. 어쩌면 우리는 난민과 이주민을 카메라 뒤편에서 남의 일처럼 바라보고 있지는 않았는지 반성해야 한다. 닫힌 우리의 마음을 바꿀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기꺼이 카메라를 들고 가까이 줌을 당겨 그들을 만나고 손을 잡는 것이다. 다정함은 세상을 구한다. 그래야 절망 앞에 웃을 수 있고, 선의지를 담은 표정으로 타인을 반길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속 마침내 행복을 찾은 남자의 이름은 리틀 트램프, 작은 방랑자이다.
※ 이 글은 파랑달의 브런치에서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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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데스 설원의 생존자들| 무엇이 비극을 기적으로 바꿨나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72년 10월 13일. 우루과이 공군기 571편이 안데스 산맥에 충돌해 추락한다. 비행기 동체는 두 동강 나고, 안데스 설원에 불시착한 승객들은 꼼짝없이 구조만 기다린다. 그러나 영하 40도에 이르는 추위와 눈보라, 굶주림 때문에 생존자들은 하나 둘 죽어간다.
비행기 잔해에서 간신히 찾은 라디오를 틀어보지만, 들려오는 소식은 실종 후 10일이 지나 수색작업을 포기했다는 절망적인 뉴스뿐. 이에 '난도'(아구스틴 파델라)와 '안토니오'(아구스틴 델라 코르테), '로베르트(마티아스 레칼트)', '누마(엔조 보그린칙)'를 비롯한 생존자들은 어떻게든 살아남고, 외부에 자기들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사투를 벌인다. 입에 담기 힘든 일을 저지르면서까지.
같은 실화, 다른 영화
<더 임파서블>과 <쥬라기 월드: 폴른 킹덤>으로 이름을 알린 후안 안토니오 바요나 감독. 그가 넷플릭스와 손잡고 5년 만에 돌아왔다. 그의 신작 <안데스 설원의 생존자들>은 우루과이 공군 571편 추락사고를 다룬 파블로 비에르시의 논픽션 '눈의 사회'를 영상화했다. 1993년 <얼라이브> 개봉 이후 20년 만에 같은 실화를 다루는 작품이 공개됐다.
같은 사건을 다룬 작품이 있기 때문일까? <안데스 설원의 생존자들>은 극적 요소가 두드러졌던 <얼라이브>와 달리 담백하고 사실적이다. 100시간이 넘는 생존자 인터뷰를 녹음하며 초기 작업을 진행한 것으로 알려졌고, 실제 사진과 영상도 적재적소에 활용했다. 이륙 전 비행장에서 웃는 사진, 조난당한 이들이 카메라로 추억을 남기는 장면, 극적인 구조 당시 영상 등은 안타까움과 환희를 극대화한다.
그러나 착실한 재현에서 그쳤다면 제80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를 비롯한 여러 영화제와 시상식이 <안데스 설원의 생존자들>을 초청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작품의 특이점은 둘이다. 하나는 체험이다. 마치 안데스 설원 한가운데에서 같이 지내는 듯한 경험을 선사한다. 다른 하나는 도전이다. 생존물의 클리셰를 따르는 대신 비극을 기적으로 바꾼 원동력에 주목한다. 이 도전은 사실적인 체험 덕분에 더욱 빛난다.
안데스 설원의 늪에 함께 빠져들다
<안데스 설원의 생존자들>의 초반부는 압도적이다. 추락하는 비행기 속으로 시청자를 끌어들이는 인력이 무시무시하다. 전적으로 바요나 감독의 역량 덕분이다. 그가 전작 <쥬라기 월드: 폴른 킹덤>에서 보여준 능력이 이번에도 가감 없이 발현됐다. <폴른 킹덤>에서는 '보는 재미'를 위한 반면, <안데스 설원의 생존자들>에서는 '체감하는 재미'를 위해 활용됐다는 게 차이일 뿐이다.
<폴른 킹덤>에서 바요나 감독은 서스펜스를 조성하는 데 탁월한 재주를 보여줬다. 인도미누스 렉스의 유해를 발굴하는 탐사정과 모사사우루스가 등장하는 오프닝 시퀀스는 영화 본편의 어두운 분위기를 완벽히 축약해 보여줬다. 주인공과 인도랩터의 숨바꼭질이 펼쳐지는 후반부는 마치 고전 호러 영화를 보는 듯한 극도의 긴장감을 뽐냈다. 많은 영화감독이 블록버스터에서 자기 색깔을 잃곤 하는데, 바요나는 달랐다.
그의 색깔은 <안데스 설원의 생존자들>에 고스란히 녹아들었다. 비극의 시작을 알리는 추락 장면은 간결하나 충격적이다. 비행기 고도가 갑자기 낮아지자 통로에 서 있던 승객은 무중력 상태가 됐다가 바닥에 떨어진다. 카메라는 돌연 산에 충돌해 쪼개지는 기체를 비춘다. 그 순간 승객들은 일제히 앞으로 쏠리고, 다리가 꺾이고, 코에서 피가 난다. 이 일련의 과정은 묘한 리듬 속에서 톱니바퀴 같은 짧은 컷의 연속으로 이어진다.
비극과 기적 사이에서 긴장감을 유지하는 역량도 탁월하다. 기적을 한 방울씩 맛보게 하면서 절망감을 극대화한다. 지나가는 비행기를 보고 흥분했다가 좌절하는 생존자들의 모습이 대표적이다. 오래간만에 웃고 떠들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찰나 눈사태에 갇히는 장면도 빼놓을 수 없다. 유달리 많은 얼굴 클로즈업 덕분에 그 간극은 더 극대화된다. 안데스 설원이 마치 생존자들을 놓아줄 생각이 없는 하얀 늪처럼 보일 정도다.
비극이 기적이 되는 길
특히 <안데스 설원의 생존자들>에서는 늪에서 발버둥 치는 생존자들을 다루는 태도가 퍽 흥미롭다. '파리대왕'이나 <콘크리트 유토피아> 같은 일반적인 생존물과 전개가 다르기 때문이다. 보통 고립된 생존자들은 작은 사회를 이룬다. 나름대로 경제, 사회 체계를 구축해 생존을 도모한다. 그 과정에서 생존자 사이에도 권력이 나눠지고, 계급이 생기고, 갈등이 터져 나온다. 잔인함, 이기심, 본능도 이성을 꺾는다.
<안데스 설원의 생존자들>은 다르다. 물론 상황은 비슷하다. 생존과 인간성 중 어떤 걸 선택해야 하는지에 대한 딜레마 자체는 생존물에서 뺄 수 없는 재료니까. 극 중 생존자들은 생존을 위해 식인을 해야 할지, 아니면 인간으로서 품위를 지켜야 할지 딜레마에 빠진다. 그 순간부터 영화는 보다 입체적으로 변한다. 그전까지는 그저 추위와 눈보라에 맞서는 이야기였다면, 이제부터는 삶의 목적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딜레마를 풀어가는 방식이 예상 외다. 극한의 대립은 없다. 마냥 이기적일 수도 있는 상황에서 주인공들은 존중과 배려를 실천에 옮긴다. 로베르트는 거부감을 느낄 모든 이들을 배려해 가장 먼저 칼을 집어든다. 끝내 인육을 거부한 누마도 식인을 한 사람들을 비난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영화는 주인공들 선택에 당위를 부여하고, 삶을 향한 의지도 입체적으로 부각한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을 떠날 수 없는 죄책감도 드러낸다. 오랜만에 배가 불러 기분이 좋아진 생존자들. 그들 머리 위로 돌연 눈사태가 덮친다. 인간성을 포기한 이들에게 신이 형벌을 내린 게 아닌가 싶은 타이밍이다. 가장 먼저 탈출하는 사람이 하필이면 인육을 안 먹은 누마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장기 기증 서약처럼 자기 시신을 먹어도 된다는 의사를 밝히는 장면 역시 같은 맥락에서 복잡 미묘하다.
죽은 자가 말하는 이유
여기에 의외의 포인트가 하나 더 추가된다. 내레이션이다. 영화는 내레이션으로 시작하고 끝난다. 화자는 깊은 곳에서 흔들리는 생존자들의 속내를 꺼내 놓는다. 서서히 웃음이 깃들며 평화를 누리는 생존자들 사이에서 엄습하는 비극을 암시하기도 한다. 특히 화자가 누마라는 점이 흥미롭다. 실화를 다룬 영화의 화자는 보통 생존자다. 그가 회고록을 쓰거나 인터뷰를 하는 식으로. 반면에 누마는 사망자 29명 중 마지막 사망자다.
그러면 자연히 궁금해진다. 왜 바요나 감독은 생존자가 아닌 죽은 자에게 발언권을 준 걸까? 그 답은 누마의 행적에서 엿볼 수 있다. 누마는 생존자 중에서도 비주류였다. 그는 마지막까지 인간성을 지키기 위해 인육을 거부한 인물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누마를 내레이션 화자로 삼은 것은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바가 아닌 다른 이야기를 펼치려는 선택이라 유추할 수 있다.
그 이야기는 바로 사망자의 역할에 관한 것이다. 보통 생존물에서 사망자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한다. 그들은 생존자의 무용담을 포장하는 양념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반면에 바요나 감독은 사망자들에게도 역할과 의지가 있음을 거듭 강조한다. 점점 죽어가는 와중에 누마가 자기 시신을 기증하며 친구들의 생환을 염원하듯이. 이렇게 영화는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공동체 의식을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 전하려 한다.
그 덕분에 <안데스 설원의 생존자들>의 끝은 일반적인 궤를 따르지 않는다. 구조되는 순간까지는 환희로 가득했던 생존자들. 그러나 막상 집으로 돌아오자 그들은 먼저 죽어간 친구, 가족을 생각하며 밀려오는 착잡함에 빠져든다. 그렇게 영화는 생존자들에게 몸과 마음을 모두 내어준 이들을 자연스럽게 상기시키며 끝난다. 극 중 사망자가 나올 때마다 그들의 이름과 나이를 자막으로 모두 표기한 것 역시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안데스 설원의 생존자들>은 넷플릭스 공개 전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다. 제80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비경쟁 부문 초청작 및 폐막작으로 공개됐고, 제38회 고야상에서는 13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됐다. 지난 7일에 열린 제81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 외국어영화상 후보로 출품됐을 뿐만 아니라, 3월에 열릴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 국제영화상 부문에 스페인 대표 출품작으로 선정됐다.
수상 여부를 미리 알 길은 없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안데스 설원의 생존자들>에게 쏟아진 호평이 결코 과하지 않다는 것. 익숙하지는 않을 스페인어 영화라는 약간의 장벽만 넘어선다면,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펼치는 사투와 안데스 설원의 장대함에 눈과 마음을 뺏기지 않기는 어려워 보인다.
Exceed Expectations 기대 이상
같이 떨고, 함께 좌절하고, 어울려 기뻐하고, 끝내 숙연해지는 14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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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MZ DOCS] 러시아의 침략 전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해야만 할까
감독:뉴아시안필름메이커스콜렉티브
출연진:뉴아시안필름메이커스콜렉티브,우크라이나 피난민,국민들
시놉시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여러 도시들을 침략했고 피난민들은 폴란드 국경과 유럽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그곳에 남은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생사를 오고 가는 침략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결사 투쟁한다. 전쟁의 참상을 알려주는 영상들이 속속히 SNS에 올라오고 뉴아시안필름메이커스콜렉티브애 속해있는 12명의 감독들은 전쟁을 반대하기 위해 위챗이나 여러 영상을 통해 전쟁의 비극을 보여준다. 그러나 아직까지 전쟁은 계속 진행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러시아의 침략 전쟁을 강력히 규탄하고 투쟁하는데...
크라이나 국민들은 러시아의 침략 전쟁으로부터 생사가 갈리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아직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계속 침략하고 있다. 끊이지 않는 전쟁의 공포를 느껴야 하는 우크라이나의 민간인들은 필사적으로 살아남으려고 해도 자신들이 사는 거주지를 러시아군이 폭격까지 해서 도망칠 곳이 없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국민들과 군인들은 결사 항쟁을 하고 있으며 러시아의 침공을 강하게 규탄한다. 대피소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리고 병동에서는 부상당한 사람들과 군인들도 많아서인지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큰 피해를 본다. 여기서 러시아의 전 대통령이었던 고르바초프와 지금의 러시아 대통령 푸틴을 비교하며 소련을 해체시킨 고르바초프의 평화의 역할을 더 강조시키며 지금의 푸틴에게 경고를 한다. 지금도 우크라이나에 있는 도시들의 대부분이 파괴되고 있다. 이 다큐멘터리는 마치 자신이 전쟁에 참여한 것처럼 느껴지는데 전쟁이란 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는지 알 수 있다.
우리나라라고 안심할 수 없다.
왜냐하면 북한과의 휴전 상태이기 때문에 앞으로 이런 전쟁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한다.
※ 저의 주관적인 영화 리뷰입니다.
2022.09.26 (월) 19:30 메가박스 백석 8관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기간: 09월 22일 - 09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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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좌수사 이순신 그의 난중일기
책 한 권을 빌렸다. 바로 호란과 임진왜란에 대해 조사한 책이었다. 갑자기 자타공인 역덕이 되고 싶은 나. 냅다 깊게 파는 나의 역사덕후적 호기심이 빛을 발한다. 아니. 역사 이야기 능수능란하게 푸는 사람들 멋있지 않아? 어느 년에 뭐가 일어났고 어떤 것 때문에 발생했고 이런 거 줄줄줄 설명하면 왠지 모르게 멋지다. 역사가 약하다는 말은 사실 거의 모든 것이 약점이라는 말을 한 누군가의 명언이 생각난다. 그래. 맞는 말인 것 같아. 왠지 이 부분을 파면 다 잘 풀릴 것 같다.
풀릴지 안 풀릴지는 미래의 내가 아는 일이겠지만 그래도 모르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나 싶다. 어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굴러다니는 짤들 보다 책으로 읽는 게 훨씬 더 생산적이지 아닐까? 반지성주의가 판치는 이 시대 지성에 그나마 다가가는 것이 민주사회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 믿는다. 이 영화라는 문화예술도 사실 이 '지성'이라고 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영화를 봐도 역사적 맥락과 관련 있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우리나라는 시대극 만들기 좋다. 위대하고 극적인 인물이 많이 나와서 그런게 아닐까 싶다. 이 영화는 이 시대극 만들기 좋은 한국사를 소재로 했다. <외계+인> 1부에 이은 여름 대작 두 번째, <한산 : 용의 출현>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다음 1달 후의 조선으로 가보자.
해저 괴물 복카이센
문제가 뭘까? 다 알 것도 같았다. 일본의 장수 와키자카는 해저 괴물 거북선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쉽게 끝날 것 같았던 전쟁. 이웃나라 조선은 당파싸움에 여념이 없었다. 전쟁에 대한 대비가 단 조금도 되지 않았다. 그래서 쉽게 이길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답답함이 아쉽다. 갑자기 느닷없이 나타난 이순신이라는 존재에 머리가 아프다. 와키자카는 해저 괴물 복카이센이 전장을 휩쓸고 있다는 말에 여러 번 생각을 되뇌인다. 할 수 있어. 전염병 같은 두려움만 이긴다면.
‘해저 괴물 복카이센’을 이끌던 장수의 관점으로 돌아간다. 전쟁 중이었던 해전. 거북선이 일본의 배에 부딪혔다. 오도 가도 못하게 된 조선의 거북선. 일본의 배와 조선의 거북선이 붙은 상태에서 백병전이 열렸다. 거북선에서 배를 이끌던 장수 나대용은 방패 하나와 무기를 들고 들이받은 배의 일본 장수 둘을 제거하려 배의 위로 올라간다. 조총이 빗발치던 전장. 방패로는 한계가 있었다. 왼쪽 허벅지에 총알이 박힌 나대용. 위기의 순간, 일본 장수와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어디에선가 날아온 화살이 나대용을 구해줬다. 나대용을 구한 사람은 이순신이다. 처절한 전투 끝에 부하를 구한 이순신. 그렇게 임진왜란의 어느 전장을 보여주고 카메라는 1달 후를 비춘다. 이순신은 전투에서 생포한 포로들을 심문하다 왜나라가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예감한다. 이순신은 열세의 전장을 뒤집어 조선을 구할 수 있을까?
자주 봤었지
사실 이순신 장군의 위대함은 다들 알고 있다. ‘우리에겐 12척의 배가 있소’부터 시작해서 우리 역사에 수많은 명장면을 만들어낸 이순신 장군. 우리나라의 위대한 전쟁영웅 하면 늘 들어가는 이름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순신 장군이라는 소재는 적지 않게 사용됐다는 뜻이다. 우리나라 영화 역사상 가장 많은 관객이 들어갔던 것이 <명량>이다. 또 내 나이 또래라면 다들 기억하는 <불멸의 이순신>도 있다. 굳이 영상매체가 아니더라도 한능검이나 교과서에서도 임진왜란 이야기는 자주 본다.
전쟁영웅의 이야기라 봐도 봐도 좋은 이야기겠지만 이는 곧 창작의 어려움을 의미하기도 한다. 어떻게 관객에게 어필하지?를 생각해보자. 여러분과 내가 각본가라고 해보자. 이야기를 2시간가량으로 구성하고자 하면 뭔가 신선한 아이디어가 생각나지 않는다. "1) 일본이 우리나라에게 명분 없는 침략전쟁을 일으킴 2) 한산도, 노량, 명량 해전에서는 조선이 승리한다" 같이 두 결론을 내고 논리관계를 만든다는 것 자체도 충분히 어렵다. 근데 이에 틀어맞게 이야기를 만든다는 것은 난이도가 한 단계 올라가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영화를 보기 전에 이런 점이 마음에 걸렸다. 이거 또 봤던 이야기 하는 거 아닌가? 또 전작 <명량>에서 흔히 말하는 ‘국뽕’ 마케팅은 이런 우려에 부채질을 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이런 단점들을 적당히 잘 보완했다.
좋은 기획
일단 영화는 조선의 관점에서 풀지 않는다. 전적으로 일본 장수 와키자카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 영화의 간단한 배경과 결말은 우리 모두 다 알고 있다. 바로 한산도 대첩은 조선의 압승으로 승리한다는 것이다. 보통 어떤 일의 긴장감은 결과를 모르기 때문에 느껴진다. <캡틴 아메리카 : 윈터 솔저>에서 버키와 캡틴이 맨몸액션을 벌인다. 둘 다 호각세의 능력자들이기 때문에 합을 주고받는 것이 어떤 결론으로 향할지 예상할 수 없다. 그런데 이 영화는 이 ‘결과를 알 수 없음’의 서스펜스를 과감히 포기했다. 그 대신 후반부 하이라이트 신을 위해 최대한 반대편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러니까 이순신 장군이 기획하고 싸운 전쟁영화임에도 주인공이 두 명이 되는 셈이다. 그것도 물리적인 분량은 와키자카 쪽이 더 많다.
이렇게 되면 갖는 이점이 생긴다. 앞에서 썼듯 왜 나라의 관점에서 이순신의 지략가적 면모가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이 덕에 같은 소재의 전쟁영화가 있더라도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보다 신선하다고 느끼기 쉬울 것 같다. 구체적으로 써보자면, ‘반전’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기본적으로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일어나는 게 반전이다. 당시 일본의 관점에서는 이 전쟁이 불가사의했다. 조선은 거의 준비가 안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반영하는 대사도 나온다("전쟁은 금방 끝난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 전쟁 준비 잘해간다. 이를 일본 관점에서 풀어가니 그 준비성이 더 도드라진다. 그렇게 일본 장수 와키자카의 관점에서 철저한 전쟁 서사를 묘사하면 '와 이걸 어떻게 이기지?'싶은 의문점이 든다. 또 이순신에 대한 정보가 일본 내부에는 거의 없다 보니 와키자카에 몰입하게 된다. 마치 <어벤저스> 시리즈의 '타노스'같은 느낌? 영화 전체적으로 이순신을 깨러 가는 느낌이 강하다. 영화는 이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하는 의문과 이순신에 대한 미스테리를 후반부의 해전 신을 위해 쓰고 있다. 이야기 구성에 있어 보다 신선한 접근방식을 채택한 것이다. 초중반까지 일본 내부의 권력투쟁과 첩보 대결만 봐도 이야기 보는 데에는 무리가 없을 정도였다. 이는 굉장히 효과적이었다. 이 영화가 전작 <명량>과 다른 지점이 있어 비교당할 이유가 없는 것이 이 점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또 '의'를 표현하기 쉬운 것도 이 영화의 형식의 강점이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일본 관점에서 전개해야 내적 논리의모순을 관객이 알 수 없다. 이를 통해 일본의 입장에서도 명분 없는 침략전쟁이라는 것을 표현하기 용이하다. 일단 영화 초반부에 왜 '의'가 중요한지 제시된다. 다른 측면에서 우리는 이 전투의 결과를 알고 있다. 이 '의'라는 것이 어디 쪽에 있는 걸까? 쉽다. 이순신에겐 있고 일본의 장수들에게는 없는 것이 이 '의'일 것이다. 흰 종이에 붓 한번 살짝 찍어보자. 그럼 그 점이 선명하게 보인다. 의와는 거리가 먼 일본 내부의 상황을 조명하다가 조선을 쨘하고 보여주면 두 나라의 내부 상황이 대조적으로 보일 것이다. 일본 장수들이 하는 말을 잘 보면 거의 명분이 없다. 누가 싫거나. 그냥 꼴 보기 싫어서. 아래 군사들 죽든지 말든지 알바 아니니까. 거의 이런 식이다. 그러니까 의가 없는 왜의 명분과 이에 물든 일본 장수들의 냉정함이 더 도드라지는 것이다. 전작 <명량>이 민족주의(속칭 '국뽕')를 위해 영화 전반적인 장면을 희생한 것과는 다르게 뾰족한 기획을 통해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특별한 무언가를 위한 발상이 아니라 '이런 영화를 만들 거야!'라는 아이디어에 기반한 좋은 선택이었다.
이를 위해서
이 신선한 방식의 이야기를 위해서라면 역시 배우들이 영화를 잘 이해해야 한다. 일단 박해일-변요한-김성규-박지환 네 배우의 극 이해도가 굉장히 뛰어났다. 일단 박해일 배우는 한국영화의 지난 역사를 말하는 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기라성 같은 배우들'할 때 그 '기라성'을 담당하고 있는 박해일 배우. <살인의 추억>, <국화꽃 향기>, <연애의 목적> 많은 영화에 출연했다. 그중 올해가 그의 경력 중 최고점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이 영화에서도 그의 전성기를 확인할 수 있다. 사실 상대역의 변요한 배우가 섬뜩한 연기를 워낙 잘해서 좀 심심하다고 느끼는 분이 많을 것 같다. 그런데 나는 박해일 배우가 연기를 잘했다고 느낀 것이, 1) 가벼워 보이지도 않으면서 2) 뭔가 고뇌하고 있는 내면을 묘사하고 있으며 3) 조선 내부의 상황으로 인해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심리상태까지 극의 배경이 되는 좋은 연기를 수행했다. 비교적 와키자카에 비해 물리적 비중이 적음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의 존재감이 후반부까지 느껴지는 이유는 박해일 배우의 눈빛, 표정, 발성이 이 영화에 잘 어울리기 때문 아닐까 생각한다. <헤어질 결심>과 <명량>까지 참 좋은 배우다.
다음은 변요한 배우다. 앞 문단에서도 썼듯 이 와키자카가 영화의 진주 인공이다. 물리적으로 분량이 아마 제일 많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박해일 배우는 잔잔한 파도처럼 극을 이끈다. 이와 대조적으로 변요한 배우는 감정적으로 화려한 연기를 보여주머 이야기를 전개한다. 일단 갖고 있던 감정선이 다양했다. 전쟁 준비는 또 착착 잘 되어가고 있다. 근데 반대쪽에서 승전보를 울렸던 이순신에게 묘한 열등감을 품고 있다. 또 이순신이 한편으로는 궁금하기도 하다. 자신감까지 있다. 선조의 입장 변화를 위시한 조선의 내부 상황이 시끄럽기 때문이다. 또 일본 내부에서 권력 교통정리가 안 됐다. 이를 묘사하는 연기까지 해야 한다. 이렇게 전반부의 감정연기를 넘어가면 하이라이트가 있다. 중반부가 넘어가서 이순신과의 한바탕에서 이 사람의 처지는 여러 번 바뀌게 된다. 이때 분출했던 감정표현들이 선명해서 기억에 남는다. 자기가 주체로 이끄는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았던 한 인간의 모습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데 변요한 배우는 정말 열 일했다. 아마 이 배우의 최고작으로 남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김성규-박지환 배우도 기억에 남는 연기를 했다. 두 배우는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한 조연이다. 이 역할을 살리는 좋은 연기였다. 일단 김성규 배우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건 <범죄도시> 시리즈였다. 그리고 <악인전>에서도 봤었다. 이 두 작품만으로도 연기 정말 잘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악인전>에서는 뭔가 난잡한 이야기 톤 사이에서도 빛났던 기억이 있다. 이때 단순히 연기만 잘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느낀 건 똑똑한 배우라는 점이다. 이 준사라는 캐릭터는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하다. 임진왜란이 왜 일어났고, 어떤 점에서 이순신이 전투를 승리할 수 있었는가?를 묘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리액션 연기가 좋아야 한다. 몸짓 하나, 눈빛 하나가 무언가 외롭고 상처받은 사람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박지환 배우 역시 뛰어난 연기였다. <범죄도시> 시리즈의 장이수 캐릭터로 유명한 이 박지환 배우. 솔직히 영화 보면서 '내 아임다' 생각이 안 난다면 거짓말이다. 그런데 영화는 전반적으로 이 캐릭터를 경제적으로 활용한다. 이 사람이 잘할 수 있는 연기만 딱 잘라서 보여준 느낌? 이 사람을 개인적으로 알았던 게 아닐까 싶었던 캐릭터 연출법이었다.
단점이 없지는 않아
영화가 개봉하기 이전에 시사회 평을 몇 개 봤었다. 일단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던 건 '<명량>의 단점을 극복했다'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솔직히 기대 좀 하고 갔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극복하긴 했다'다. 영화에는 엄청 큰 단점은 없다. 그 대신 아쉬운 건 몇 개 있다.
그중 하나는 역시 극 중에서 옥택연-김향기 배우가 연기하는 임준영-보름 역의 서사 전부다. 난 이게 왜 필요한지 모르겠다. 일단 영화 안에서 스파이가 있어서 얻는 이점이 있다. 그런데 이 스파이가 단지 <명량>의 프리퀄이라고 해서 이런 이야기를 할당받는 게 그게 완성도에 도움이 되는가? 는 의문이다. 조선 측의 특정 인물과의 대비를 이루기 위해? 굳이? 일본의 스파이가 있는 것까지 대칭을 이룰 필요가 있나? 영화를 보다 보면 중반부까지 이순신-와키자카의 전략적 선택이 재밌다가 임준영이 나오면 산만하다는 느낌이 강하다. 이는 배우의 퍼포먼스와도 연관이 있다. 음.. 잘 모르겠다. 이 배우를 캐스팅한 게 좋은 선택인지. <외계+인> 1부의 썬더가 생각나는 연기였다.
그리고 후반부 하이라이트 해전 신에서 CG 티가 난다. 아마 바다와 실제 배에서 찍으면 다칠 수도 있으니 그랬던 건 이해한다. 그런데 사람이 없는 신 정도는 실물로 찍어도 괜찮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또 초중반부는 일본의 관점에서 전개하지만 중후반부는 조선의 학익진과 거북선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만든다. 그래서 전반부의 살짝 느리더라도 신선한 템포가 후반부까지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은 아쉽다. 오잉? 호기심이 가는 이야기가 식상한 촬영기법으로 치환되니 뭔가 김샌 느낌이 든다.
그리고, 영화 전반적으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질척임이 있다. 분명 전작에서의 '국뽕'요소를 많이 뺀 것도 안다. 불필요한 사족 많이 쳐냈다. 근데 살짝 유치하고 예전 느낌이 나는 연출법이 장면 장면마다 보인다. 완성도에 치명타를 가하는 것은 아니나 확실히 아쉬운 지점이다.
그래도 좋았어
이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영화 좋다. 잘 만들었다. 일단 두말할 필요 없는 후반부 해전 신은 쾌감이 대단하다. 부분 부분마다 꼼꼼하게 동선을 잘 짜 놔서 보는 맛이 있다. 이 액션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사운드와 표정이 될 것이다. 적의 변수에 당황하는 일본군, 급변하는 전쟁 상황, 포격 소리까지 CG를 많이 사용한 만큼 소리에 집중해야 현실감이 든다. 이 현실감은 유효하게 작용한다. 후반부 전투 신에서 우리나라 말도 자막처리를 할 정도로 집중했던 소리 연출은 러닝타임의 반을 할애한 만큼 제 몫을 다한다. 티켓 가격이 많이 오른 극장가 이 액션신만 봐도 가격 값을 한다.
또 영화에서 묘사하는 또 다른 주인공이 있다. 극에서 나오는 군사집단은 이순신의 수군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중반부를 넘어가면 특별한 존재들이 조선의 땅을 지키며 왜적과 항전하는 모습이 묘사된다. 주인공이 이순신 장군인 것도 맞다. 그래서 이순신 장군의 위대함을 말하는 것도 영화가 하고 싶은 말을 전개하는 방식일 수도 있다. 그런데 제목이 한산이다. 이 한산도대첩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싸워온 만큼 이들을 조명하는 것도 영화가 하고 싶은 말을 전하는 좋은 방식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가볍지 않은 톤으로 배우들의 연기까지 깔끔하니 임진왜란의 무게감에 잘 어울리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 극장가, 두 번째 여름 대작으로 부모님과 함께 가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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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을 뒤흔든 순정마초의 뒤안길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793년, 프랑스의 왕후 마리 앙투아네트가 단두대에서 처형당한다. 흥분과 광기에 휩싸인 군중 사이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는 코르시카 출신의 포병 장교 '나폴레옹'(호아킨 피닉스). 그는 이 혼란을 자기 기회로 삼기로 결정하고, 툴룽에서 영국군을 무찌르며 영웅으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때마침 하늘도 그에게 행운을 선사한다. 한 사교 파티에서 기품 있는 여인 '조제핀'(바네사 커비)을 만나 첫눈에 반한 것. 자기 운명을 바꿔줄 남자를 찾던 조제핀은 열렬한 그의 구애를 받아들이고, 그들은 부부가 된다. 비록 결혼 생활이 원만하지는 않았지만, 조제핀을 만난 후 승승장구한 나폴레옹은 마침내 황제의 자리에 올라선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부터 둘의 관계는 금이 가기 시작하고, 나폴레옹의 몰락도 막을 올린다.
주의! 리들리 스콧의 시대극입니다
리들리 스콧의 시대극은 한 가지 특징이 있다. 다루는 시대를 재현하는 데 크게 연연하지 않는다는 것. 특히 일반적으로 알려진 역사적 이미지를 보여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염두에 둬야 한다. 할리우드에서도 손꼽히는 비주얼리스트의 웅장한 영상미에 홀리면 그의 시각에서 해석한 시대, 사건, 인물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자칫 잊을 수 있기 때문.
<글래디에이터>, <킹덤 오브 헤븐>, <엑소더스>,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 모두 마찬가지였다. 리들리 스콧의 화려한 볼거리는 자유의 평등의 가치를 고찰하고, 종교의 의미와 기능을 성찰하며, 젠더 이슈를 고민케 하는 도발적인 질문을 품고 있었다. 과거를 재현하는 대신 과거를 거울삼아 현재를 반추한 결과였다.
Apple TV+와 리들리 스콧이 손잡은 <나폴레옹>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뛰어난 정치가이자 뛰어난 군인으로 알려져 있다. 전유럽에 자유주의를 흩뿌리고, 대륙법의 기반인 '나폴레옹 법전'을 만들었으며, 황제 자리를 차지해 정점을 찍은 정치인.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가 '전쟁론'에서 전쟁의 신으로 칭송한 전술가이자 일반 병사들의 사랑까지 한 몸에 받은 꼬마 부사관.
<나폴레옹>은 이 모든 이미지를 멜로드라마라는 틀 안에 담아낸다. 위대한 나폴레옹 1세가 아니라 사랑에 빠진 한 남자 나폴레옹의 시점에서 그의 모든 행적과 위업을 다시 해석한다. 이 재해석은 분명 신선하고, 그의 일생과 나름 맞아떨어지는 부분도 있으며, 예상치 못한 울림을 안기기도 한다. 다만 해외에서 먼저 공개된 후 호불호가 격렬히 나뉜 이유이기도 하다. 특히 자기 해석을 밀어붙일 뚝심이 부족한 게 결정적인 패착이다.
화살표가 확실한 오프닝 시퀀스
당장 마리 앙투아네트의 목이 단두대에서 달아나는 오프닝 시퀀스는 이 영화가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를 대놓고 알려준다. 오프닝 분위기만 느껴도 영화에 대한 호불호를 결정할 수 있다는 말이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단두대로 향한다. 사형집행인은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치운 후 자세를 고정시킨다. 거대한 칼이 그녀의 하얀 목에 닿고, 집행인이 왕비의 목을 들어 올리자 지켜보던 군중이 환호한다.
프랑스 혁명이라는 거대한 변화를 상징하는 시작점. 그러나 연출은 역사적 중요성과 사뭇 대조된다. 웅장하거나 비극적인 음악이 깔려야 할 것 같은 직관에 반하는 음악이 들려온다. 왈츠를 듣는 듯 신나고 경박스럽기까지 하다. 웅장한 전기 영화나 서사시를 기대했다면 실망할 것이라 미리 경고하는 듯하다. 기록된 역사와 달리 나폴레옹이 군중 안에서 왕후의 처형을 지켜보는 것도 그 일환이다.
'나폴레옹 1세'는 없다
그러니 <나폴레옹>의 지향점은 분명하다. 위대한 정치인이자 뛰어난 군인이었던 나폴레옹의 후광을 지우는 것. 실제로 영화는 혁명, 쿠데타, 즉위식 등 그가 주도한 여러 정치적 사건을 빠르게 스케치하는 데서 그친다. 배경이나 맥락은 사치라는 듯이 생략한다. 보나파르트 가문을 비롯한 주변인들의 동기와 욕망에 대한 설명도 많지 않다. 황제까지 즉위한 나폴레옹 1세의 정치적 여정을 영화만 보고 파악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전쟁의 신이라는 찬사를 받은 보나파르트 장군의 모습도 편린만 스쳐 지나간다. 물론 각각의 전투 시퀀스는 인상적이다. 아우스터리츠 전투가 대표적이다. 적군 유인, 보병 간 전투, 기병대 기습, 포격으로 마무리되는 전투 양상을 명확하게 담아냈다. 워털루 전투 역시 나폴레옹의 최후에 걸맞은 거대한 스케일을 자랑한다. 다만 나머지 전투는 그저 나폴레옹이 거쳐야 했던 퀘스트 중 일부로 짚고 넘어간다.
블랙 코미디적인 요소도 활용된다. 극 중 나폴레옹은 카리스마형 주인공이 아니다. 군사적 재능은 있지만 전장에서 숨을 헐떡이며 벌벌 떤다. 1799년 쿠데타 장면도 비장함보다 우스꽝스러움으로 가득하다. 그가 지휘한 전투에서 수백만 명이 사망했다는 마지막 자막은 화룡점정이다. 리들리 스콧 작품 중 <글래디에이터>, <킹덤 오브 헤븐> 등과 비슷한 분위기를 기대했다면 실망해도 이상하지 않다. 해외에서 영국인(리들리 스콧)이 프랑스 위인을 비하했다는 지적이 나올 여지도 충분해 보인다.
순정마초 나폴레옹
이처럼 정치인과 군인의 모습을 지운 여백에 <나폴레옹>은 사랑에 빠진 한 남자의 모습을 그려 놓는다. 나폴레옹은 극장에서 조제핀을 만나고, 첫눈에 사랑에 빠진고, 곧장 결혼한다. 그는 이집트 원정 전후로 조제핀의 불륜을 확인하지만, 가까스로 이혼 위기를 극복한다. 이후 부부는 아들을 낳지 못해 갈등을 빚고, 끝내 이혼을 선택하지만, 죽을 때까지 친구로 남는다.
나폴레옹이 겪은 수많은 사건들은 이 사랑의 소용돌이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조제핀이 "승리의 부인(마담 드 빅투아르)"이라고 불렸다는 사실에서 착안한 재해석으로 보인다. 극 중 일방적이었던 그의 사랑이 양방향이 되고, 조제핀이 마침내 그와 진정으로 사랑에 빠지며, 행운이 차오르는 순간부터 그의 전성기가 펼쳐진다. 쿠데타로 제1집정을 거쳐 황제가 되고,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동맹군을 무너뜨리며 유럽을 제패한다.
반면에 그가 더 큰 영광을 원한다면서 조제핀을 버리자 몰락이 시작된다. 이혼한 순간부터 그의 운은 다한다. 그는 러시아 원정에서 패배하고, 퇴위하고, 유배를 떠난다. 마지막 기회도 그녀에게 달려 있다. 조제핀이 아직 생기 있을 때, 그는 알바 섬을 탈출한다. 그러나 그녀가 끝내 폐렴으로 사망하자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한다. 그렇게 황후와 황제는 흥망성쇠를 같이 겪는다.
리들리 스콧다운 영상미도 이 로맨스와 어우러지며 힘을 발한다. 황제 즉위식과 텅 빈 모스크바에 나폴레옹이 입성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스크린을 벌겋게 물들인 모스크바 대화재는 정점이다. 이 장면들은 정치인이자 군인으로서 나폴레옹의 정점과 위기를 보여주지 않는다. 조제핀의 내레이션이 나폴레옹을 감싸는 연출이 더해지면서 조제핀이라는 행운이 정점에 달하는 순간, 그 행운이 그를 배신했음을 보여준다.
부실했던 기초 공사
그러나 과감한 재해석에 충분히 힘을 실어주지 못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오프닝에서 나폴레옹의 일생을 로맨스로 풀어내겠다는 지향점을 보여줬는데, 정작 초반 전개가 그 방향성을 뒷받침하지 못한다. 실제로 초반부는 씬마다 정치인, 군인, 남자 나폴레옹의 모습이 뒤엉켜 있다. 극장 안에서 편집점을 찾을 수 있을 정도로 난잡하다. 특히 이집트 원정까지는 나폴레옹의 연애사가 위업을 포괄하지 못한 채 서로 충돌하는 듯 보인다.
특히 로맨스를 쌓아 올리는 분량이 부족하다. <나폴레옹>은 관객이 순정남 나폴레옹에게 이입하고, 로맨스의 관점에서 전쟁과 정치적 사건을 따라간다는 전제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그가 조제핀을 사랑하는 과정은 급하게 지나가고, 조제핀의 개인사도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자연히 나폴레옹과 조제핀의 관계도, 그녀가 그의 행운을 뜻한다는 해석도 부각될 수가 없다. 나폴레옹을 운 좋게 권력을 잡은 정신병자 내지는 사랑하는 여자도 차지 못한 찌질한 전쟁광으로 묘사했다는 비판이 가능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처럼 부실한 초반 전개는 러닝타임을 고려한 선택처럼 보이지만, 판단착오에 가까워 보인다. 근래 OTT 공개 예정 작품은 극장 개봉 시 러닝타임의 제한에서 비교적 자유롭기 때문이다. 3시간을 넘긴 <플라워 킬링 문>이 대표적이다. 조제핀의 삶을 보다 집중적으로 들여다보는 4시간 30분 분량의 컷이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더욱 아쉽다. <나폴레옹>의 완성도 문제를 대부분 해결할 수 있었을 테니.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노래 하나가 떠오른다. 2011년 '무한도전' 서해안 고속도로 가요제에서 공개된 '순정마초'가 떠오른다. 가사 때문이다. "나의 사랑을 버린 그댈 잊지 못한, 죽은 심장 상처 난 백합 순정마초." 첫사랑을 기억하는 순정남이자, 다른 여자들을 차버리고 다니는 마초라는 의미였다.
누군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가사다. 나폴레옹의 첫사랑이자 그 사랑을 배신했던 조제핀. 첫사랑인 황후를 버리고 떠난 나폴레옹. 이 커플의 관계가 가사와 정확히 일치한다.
이 지점에서 나폴레옹 1세의 일생을 그려낸 장엄한 서사시를 기대할 이들에게 <나폴레옹>이 실망스러운 이유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배경으로 조금 더 웅장하게, 위엄 있게, 극적으로 그려낸 리들리 스콧 버전의 '순정마초'니까.
Acceptable 무난함
웅장한 이미지 사이로 흥하고 지는 순정마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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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라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0년 만에 출소한 ‘수혁’(정우성). 과거 여자친구 '민서'(이엘리야)를 만난 그는 자신에게 딸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에 수혁은 오랫동안 몸 담았던 조직을 떠나 평범한 삶을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수혁이 자기와 함께 일할 거라 믿었던 보스 ‘응국’(박성웅)은 그의 선택에 실망하고, 오른팔 ‘성준’(김준한)에게 수혁을 감시하라고 지시한다.
수혁이 언제든 자기 자리를 빼앗을까 두려워하는 성준은 아예 수혁을 제거하기로 하고, 세탁기라 부르는 2인조 킬러 커플 ‘우진’(김남길)과 ‘진아’(박유나)에게 일을 맡긴다. 하지만 그들은 수혁 대신 민서를 죽이는 실수를 저지르고, 수혁이 복수를 다짐하면서 상황은 성준의 뜻대로 돌아가지 않기 시작한다.
새로워야 한다는 강박의 부작용
정우성의 장편 연출 데뷔작 <보호자>는 제47회 토론토국제영화제 스페셜 프레젠테이션(Special Presentations) 부문, 제55회 시체스 영화제 경쟁 부문 오르비타(Orbita) 섹션, 제42회 하와이 국제영화제에 공식 초청되어 화제를 낳았다. 사실 <보호자>는 정우성 감독의 의도치 않은 데뷔 무대다. 원래 연출자가 제작 도중 하차하는 바람에 갑작스레 메가폰을 잡았기 때문.
그래서일까? 정우성 감독의 절친인 이정재 감독의 연출 데뷔작 <헌트>에 비하면 <보호자>의 완성도는 여러모로 아쉽다. 특히 비슷한 장르 영화로부터 '달라져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 티가 난다. 스토리가 평이하다 보니 액션을 연출하거나 캐릭터를 구축할 때 시도한 변화가 유독 눈에 띄기도 한다.
그런데 기존 작품과 달라야 한다는 강박은 양날의 검이다. 영화 클리셰는 관객에게 인기가 있어서 거듭 사용된 기법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익숙하다는 이유로 클리셰를 파괴하면 관객이 오히려 영화를 어색하게 느끼며 호응하지 않는 경우도 더러 있다.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처럼. 안타깝게도 <보호자>는 이러한 실패의 역사에 한 줄을 더 보탠다.
스스로 잠재력을 막다
<보호자>의 기본 얼개는 익숙하다. 주인공과 여자친구, 딸의 관계는 눈물샘을 자극하는 간편한 설정으로 가득하다. 10년 만에 출소한 수혁은 작별인사도 제대로 못했던 민서를 만난다. 그는 그제야 민서가 임신했고, 10년 동안 혼자서 딸을 키웠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심지어 암에 걸린 채로. 수혁은 이제라도 여자친구와 딸 곁에 남기로 결심하고, 민서의 부탁대로 평범하게 살려한다.
하지만 그의 결심 앞에는 과거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그가 몸담았던 조직이 그를 자유롭게 두지 않는다. 수혁, 응국, 성준의 삼각관계도 새롭지는 않다. 조직을 떠나고 싶어 하는 과거의 2인자 수혁. 그런 동생을 이해하면서도 서운함을 감추지 못하는 1인자 응국. 예나 지금이나 수혁만 챙기는 큰형이 미운 현재 2인자 성준. 한국 누아르 영화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수없이 봐온 삼자대면이 펼쳐진다.
클리셰 홍수 속에서 제목과 소재는 잠재력을 꽃피우지 못한다. 영화는 '평범함'과 '보호자'라는 두 키워드를 내세워 이야기를 끌고 간다. 평범하게 살기로 마음먹은 수혁은 과거 동료를 만나 회포를 푼다. 응국은 그런 수혁을 비웃는다. 대조적인 두 장면에는 평범한 삶에 대한 자조와 회의가 담겨 있는 듯 보인다.
'보호자'라는 키워드도 거듭 언급된다. 민서가 사망했을 때 간호사는 수혁을 보호자라고 반복해서 호칭한다. 또 수혁은 딸이 인질로 잡혔을 때도, 결말에 도달해서도 자기를 아빠가 아닌 보호자로 소개한다. 민서와 약속한 평범한 삶을 살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끝내 보호자로 남는 듯하다.
문제는 수혁의 서사가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 이야기와 설정이 새롭지 않다고 판단해서인지 영화는 많은 내용을 생략했다. 그 결과 관객은 스스로 이야기를 추측해야 한다. 자연히 영화는 진부해지고 재미도 떨어진다.
액션에 승부를 걸다
이에 제작진은 확실한 선택과 집중을 보여준다. 시나리오는 장르적 관성에 맡기고, 대신 디테일한 부분에서 새로움을 추구한다. 액션이 대표적이다. 한국적이지 않고 이질적인 장치가 여럿 등장해 눈길을 끈다. 사제 네일건, <스피어더맨> 시리즈 속 그린 고블린이 사용할 법한 폭탄 등.
캐릭터 별로 액션을 구분해 직관적인 재미를 주려고 노력한 지점도 인상적이다. 일례로 수혁에게 자동차는 분신과도 같다. 10년 전에 사용하던 승용차와의 재회가 그의 첫 등장일 정도. 자연히 그의 액션은 자동차 비중이 크다. 몸으로 부딪힐만한 장면에서도 최대한 차를 활용한다. 호텔 건물 정문과 로비를 차로 뚫고 들어가서 성준의 부하들과 싸우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반면에 성준은 작중 유일하게 총을 사용하며, 그의 부하들도 주로 맨몸 액션을 선보인다. 성준이라는 인물이 불안과 열등감, 질투심에 찌들어 있는 만큼 그 감정을 더 날카롭게 강조하려는 의도가 느껴진다. 우진과 진아의 경우에는 전혀 다른 결의 액션을 보여주면서 영화에 생동감을 더한다. 이 커플은 폭력을 게임처럼 생각한다. 즉각적인 재미와 쾌감을 추구하는 그들의 액션은 무겁기만 할 수 있는 영화에 숨통을 틔어준다.
실패로 귀결된 승부수
하지만 액션에 힘을 주는 승부수도 성공적이지는 않다. 우선 부실한 각본이 발목을 잡는다. 흔히 좋은 액션에는 내러티브가 담긴다고 한다. 최근에 개봉한 <미션 임파서블 7>이 좋은 예시다. 남녀 주인공 사이에 신뢰가 싹트는 과정을 액션에 녹인 결과 후반부 기차 시퀀스에는 강렬한 카타르시스가 담겼다. <보호자>는 반대다. 급한 전개 때문에 인물 사이에 감정이 쌓일 겨를이 없다. 그 결과 액션에는 액션 그 자체의 쾌감만 남는다.
액션 자체의 맛도 좋지는 않다. 아이디어는 반짝여도, 연출이 받쳐주지 않기 때문. 일레로 카 체이싱 장면에서 카메라는 추격자와 쫓기는 사람을 차례로 보여준다. 이어서 쫓기는 사람이 뭔가 일을 꾸미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다음 장면에서 영화는 템포를 한 번 끊는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여주는 대신, 추격자와 쫓기는 사람의 얼굴을 굳이 다시 보여준다. 결국 액션은 리듬이 늘어지고, 올드하다는 인상을 준다.
마지막으로 달라야 한다는 강박도 쾌감을 저해한다. 초반부 수혁이 카지노를 급습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수혁은 모든 조명의 전원을 끊은 후 카지노에 들어선다. 이때 수혁은 어두컴컴한 카지노 내부에서 홀로 칼에 손전등을 달고 다른 조직원을 공격한다. <스타워즈>의 라이트 세이버 액션을 보는 듯한 효과를 주려는 듯이.
문제는 따로 있다. 손전등 때문에 액션을 제대로 볼 수가 없다. 화면은 어둡고, 손전등은 유일한 광원이다. 그 손전등은 카메라 렌즈를 정면으로 비추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자연히 화면은 환하게 빛나다가 어두워질 뿐이다. 심지어 카메라도 덩달아 흔들린다. 그 결과 이 액션 시퀀스는 현란하지만, 정확히 무슨 일이 있는지를 알기는 어렵다.
잠깐이나마 빛나는 가능성
새로워야 한다는 욕심은 캐릭터를 묘사할 때도 드러난다. 사실 일부 캐릭터는 꽤 인상적이다. 선악 구분이 없는 우진과 진아 커플은 과장에 과장을 보태 한국형 조커와 할리퀸을 보는 듯하다. 의외의 대목에서 냉소적인 코미디를 선보이기도 하고, 서로를 끔찍이 챙기고 아끼면서 전형성도 약간 파괴한다. 특히 우진이 매번 다른 버전의 과거사를 털어놓는 장면은 <다크 나이트> 속 조커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이 커플도 영화 전체를 구하지는 못한다. 존재감은 강렬하지만, 그들이 정작 다른 캐릭터와 얽힐 때는 위화감이 느껴진다. 특히 수혁과의 관계가 부자연스럽다. 우진과 진아는 너무 가볍다. 돈만 받으면 되는 그들은 그저 게임을 즐기는 듯 보인다. 반대로 수혁은 너무 무겁다. 그는 아내를 죽인 원수, 딸을 납치한 파렴치범에게 복수하려 든다. 영화는 그 사이에서 좀처럼 균형점을 찾지 못한다.
결국 세 인물은 화학적으로 결합되지 않는다. 얽혀 있는 물리적인 시간은 길지만, 한 화면에서 서로 다른 영화를 찍는 것 같다. 다른 영화에서도 볼 수 있는 갈등 구조와 인간관계를 지나치게 꼰 것도 한몫한다. 수혁과 성준이 갈등을 빚는 몇몇 장면에서는 우진과 수혁이 순간적으로 같은 편 같아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보호자>의 과욕과 강박은 부메랑으로 되돌아온다.
결국 <보호자>는 "명배우는 명감독이 못된다"는 명제를 증명한 또 하나의 작품이 되어 버렸다. 의외의 대목에서는 나름대로 개성을 보여줬지만, 끝내 전체 완성도를 뒤집지는 못했다. 그래도 기대만큼 돋보인 김남길의 연기력, 예상외였던 박유나의 존재감, 그리고 정우성이라는 신인 감독의 가능성은 위안이 되지 않을까 싶다. 어떻게든 차이를 만들고 싶었던 강박이 끝끝내 아쉽기는 하지만.
Dreadful 끔찍한
수습은 했지만, 완성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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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인을 목격한 맹인 침술사가 등장하는 스릴러
?Rabbitgumi 입니다!
오랜만에 개봉한 웰메이드 사극 올빼미가 개봉했어요.
다들 요즘 볼만한 영화가 없다고 생각하고 계실텐데,
제 리뷰를 보시고 극장에서 이 영화를 관람해보세요!
배우들의 좋은 연기와 스릴로 가득찬 사극을 보실 수 있을 거에요.
이 영화가 어땠을지 좀더 자세히 영상에서 알려드릴게요! :)
그리고 제가 매주 일요일마다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에 영화에세이를 전달 드리는 Rabbitgumi 영화 이야기 뉴스레터에도 관심을 가져주시고 많은 구독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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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라이 대 싸이코 / 변요한 신혜선 / 그녀가 죽었다 / 스토킹 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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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2199년,
인공지능 AI에 의해 인류가 재배되고 있다!인간의 기억마저 AI에 의해 입력되고 삭제 되는 세상.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상 현실 ‘매트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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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매트릭스’를 빠져 나오면서 AI에게 가장 위험한 인물이 된
'모피어스’는 자신과 함께 인류를 구할 마지막 영웅 ‘그’를 찾아 헤맨다.
마침내 ‘모피어스’는 낮에는 평범한 회사원으로, 밤에는 해커로 활동하는 청년 ‘네오’를 ‘그’로 지목하는데…
꿈에서 깨어난 자들,
이제 그들이 만드는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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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글리치> 공식 티저 예고편
자친구가 지구에서 사라졌다.....?! 범인은 바로 외계인?! ????? 전여빈 X 나나의 찰떡 케미 200% 지금까지 세상에 없던 멀티장르 버라이어티 추적극 《글리치》 10월 7일, 오직 넷플릭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