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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이정2025-08-25 21:56:00

초침 정도는 고장난 채로

영화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 리뷰

DIRECTOR. 조희영

CAST. 공민정, 정보람, 정회린, 류세일, 유의태, 김희상, 이진하 외

SYNOPSIS. "당신은 무엇을 보는가"

어느 날 갑자기 자취를 감춰버린 정호. 정호의 애인 수진. 정호를 짝사랑하는 인주. 정호의 옛 애인 유정. 수진은 정호 모르게 훈성과 비밀스런 만남을 이어가고, 인주는 시한부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정호에게 품은 마음을 고백하기로 한다. 유정은 정호의 자살 시도에 대한 죄책감으로 애인 우석과의 관계가 위태롭기만 하다. 그런데, 정호는 어디로 갔고 정호를 먼저 만난 건 누구인가? 그 정호는 정호가 맞는 걸까? 보이는 것과 믿는 것 그 사이 어딘가, 다른 것으로 알려질 이야기들.

 

POINT.

✔️ <두 개의 물과 한 개의 라이터>, <이어지는 땅> 등을 연출한 조희영 감독의 작품입니다. 홍상수 영화 스태프로 활동했다는데, 확실히 조희영 감독의 작품을 보며 홍상수 영화가 떠올랐다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그러면서도 자기 색깔을 분명하고 단단하게 찾아가는 감독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 전작에 참여했던 배우들이 모습을 드러내어, 안정적이면서 인상적인 연기를 펼칩니다.

✔️ 서울 배경의 사진엽서집을 보는 듯 아름다워요. 이민휘 음악감독의 손길까지 더해, 서울을 배경으로 한 아름다운 영화로 손꼽고 싶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전반부에서 한적한 서울을 산책하는 기분이 들어 그것도 만족스러웠어요.

✔️ 특히나 마포구 일대를 배경으로 예술하(려고 하)는 젊은이들의 이야기 같네... 하는 생각이 드는데 실제로 주소가 마포구로 나와서 조금 웃겼습니다(positive).

✔️ 영화가 길고 등장인물이 많지만, 천천히 젖어 들어 보다 보면 관계도가 머릿속에 어렵지 않게 잘 그려집니다. 영화에 펼쳐지는 다양한 관계성 안에서 나 개인의 경험을 곱씹게 만드는 영화입니다.

✔️ 영화는 8월 27일 (문화의 날!) 개봉합니다.

 

 

이 영화는 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대신 다양한 인물을 펼쳐 보여주고, 시간 순서대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대신 작은 퍼즐 조각처럼 이야기를 떠 나른다. 그 세밀한 그림 퍼즐을 맞추는 것은 관객의 몫이지만 그다지 어렵지는 않다. 처음에는 더없이 분절된 영상들처럼 보이던 여러 사람의 이야기는 이내 연결되어 가고, 인원이 좀 많긴 하지만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사람들의 관계도보다 훨씬 덜 복잡하기에.

 

느긋하게 인물들을 따라가는 전반부는 산책하듯 보았다. 필름 톤으로 보정된 도시의 골목골목, 일상의 공간과 소리와 소품들을 가만히 따라가는 시간이 꼭 휴식 같았다. 게다가 인물들의 공간은 무엇 하나 튀지 않고 일정한 결로 곱게 정돈되어 있다. 커피가 든 잔, 무심하게 쌓인 책 더미, 자잘한 오브제, 그들의 작업 도구들. 생활 노동이라는 느낌보다는 고아한 예술의 느낌이 드는 공간에서, 인물들은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게다가 그 공간들은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주어진 인물들 외에는 사람이 좀처럼 없는 텅 빈 공간이다. 길을 몇 번씩 돌아다녀도 앉을자리 하나 찾기 힘든 서순라길도, 연남동 인근의 식당도, 예쁜 카페에도. 다른 손님이 없고, 딱 필요한 인물들과 적당한 일상음만 있는 서울. 나는 마치 서울을 배경으로 한 꿈을 보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시간 지나 들여다본 기억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영화 속 인물들은 기억을 끄집어낸 대화를 몇 번 하는데, 예컨대 영호의 친구에게 의자를 주었다는 노인 이야기는 실화와 과연 얼마나 닮아있을까? 영호의 기억에서 얼마나 각색됐을까? 또 어떻게 변형되어 흘러갈까?

 

꿈결 같기도 지난 기억 같기도 한 영화. 그만큼 현실 서울과 살짝 거리감을 두고 오롯이 인물들의 이야기를 잘 따라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현실감이 몰려온 건 대화하는 훈성과 수진 뒤로 연신 차가 오갈 때였다. 도시의 소음이 비로소 들어오고, 그들의 대화는 내가 지금까지 이해한 두 사람의 감정선을 의심하게 한다. 과연 두 사람의 관계는 내가 이해한 모양과 같은가? 어쩌면 정반대였을 수도 있다. 꿈과 현실, 사랑과 거짓, 이해와 오해, 본 것과 못 본 것. 분명하게 다르다고 여겼던 것들이, 실은 그게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감각을 준다.

 

 

이해일까 오해일까

살다 보면 악다구니와 악다구니가 맞부딪치는 갈등은 생각보다 흔치 않다. 많은 갈등이 지극히 합리적인 판단과 지극히 상식적인 문장들 사이에서 일어난다. 입장이나 정보량이나 시각이 다른 사람들 사이에 이리저리 퉁퉁 튀면서 크고 작은 오해로 변주되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도 그렇다.

 

자신이 병으로 시한부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 인주의 입에서 나온 말이 주영에게, 또 선배에게 가 닿으며 오해는 불어난다. 자세히 묻지 않겠다는 주영의 말은 본인 말마따나 배려지만, 어쩌면 무관심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선배에게 그 사실을 이야기하며 '제가 말했다고 하지 말아요' 한 이야기는, 오해일지 이해일지 몰이해일지 모를 판단으로 이어진다.

 

때로는 배려하기 위한 거리 두기가 오히려 차갑게 느껴지고, 또 때로는 다정하게 굴겠다고 좁힌 거리가 오히려 부담스럽게 훅 다가오기도 하는 것. 결국 우리는 각자의 렌즈로만 서로를 바라볼 수 있다. 지극히 당연한 이 과정을 몇몇 사람들의 관계에서 실험하듯 펼쳐 보이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나의 하루에는 과연 얼마나 많은 이해와 오해가 있었을까 궁금해진다.

 

 

누구는 보고 누구는 못 본 것

이 영화에서 이따금 등장했다 사라지는 검은 개를, 누구는 보고 누구는 못 본다. 누군가는 "넌 못 봤어."라는 말을 듣자마자 호기심을 거두고, 누군가는 보이지 않는 개가 잘 살고 있을지 궁금해한다. 검은 개는 자주 등장하다가 어느 순간 극 중에서 사라지는데, 영화 속 인물들 뿐만 아니라 관객들 또한 어떤 이는 검은 개를 계속 신경 썼을 테고 또 어떤 이는 금방 잊었을 것이다.

 

검은 개는 많은 문화권에서 죽음을 상징하는데, 이 또한 상반된 두 가지 느낌을 내포하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재앙과 불운으로서의 죽음, 또 다른 경우에는 영혼의 안내자, 사후세계의 인도자 같은 느낌의 안전한 죽음이다. 죽음이란 것 자체가 인간에게 재앙으로도 안식으로도 표현되는 것처럼. 꼭 오해와 오독을 거치지 않더라도, 수많은 단어들이 실은 동전의 양면처럼 기능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초침이 고장 나도 시계는 간다

이 영화 속 인물들 사이에 피어나는 오해는 심각한 갈등을 야기하지 않는다. 불륜과 고백과 시한부까지, 단어만 보면 아침드라마 뺨치는 도파민이 완성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 엄청난 충격을 안기는 일은 없다. 마치 고장 난 초침처럼 툭, 툭 일상 감각을 두드리지만 그럭저럭 그냥저냥 일상에 녹아들어 엉킨다.

 

초침의 고장은 눈치채기도 쉽지 않고, 눈치채더라도 이 시계가 대체 언제부터 고장 나 있던 것인지 파악하기도 어렵다. 실은 우리 사이의 수많은 대화가 그렇다는 걸, 그럼에도 우리는 조금씩 배우고 또 달라지며 나아져 간다.

 

 

모든 관계는 끊임없이 변한다. 어느 순간 어느 감정을 포착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보일 것이다. 두 사람의 세계와 여러 사람이 있을 때의 세계는 또 다르고, 근거리에서 보는지 원거리에서 보는지에 따라 또 전혀 다른 그림이 된다.

 

똑같은 사건도 순서가 달라지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예술이 도둑질이 될 수도 있고, 꿈이 현실이 되기도 하며, 사랑이 거짓이 되기도 한다. 본 것이 못 본 것이 되기도 한다.

 

 

결국 다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의 경계를 뽀얀 햇볕으로 흩어 본다. 초침 정도는 고장 난 채로, 모든 걸 선명하게 안다는 감각 없이, 조금은 부유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고 싶다. 그게 예술이 하는 일인 것 같다.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초대받아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작성자 . 선이정

출처 . https://brunch.co.kr/@sunnyluvin/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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