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1-06-17 11:35:10
<킬러의 보디가드 2> 전 세계 박스오피스 접수하러 등장!
북미 6월 16일, 국내 6월 23일 개봉
2017년 개봉한 액션 코미디 영화 <킬러의 보디가드>의 후속작인 <킬러의 보디가드 2>가 북미 박스오피스 차트 1위에 도전할 예정입니다.
<킬러의 보디가드 2>가 이번 주 북미에서 개봉하는 유일한 작품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박스오피스 1위 달성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으로 추측됩니다. 국내도 마찬가지입니다. <킬러의 보디가드 2>는 국내 2021년 6월 23일에 개봉 예정인데, 조우진 주연의 영화 <발신제한>을 제외한다면 딱히 경쟁작이 없는 상황입니다. 다시 돌아와서, 라이언 레이놀즈, 사무엘 L. 잭슨 그리고 셀마 헤이엑이 주연을 맡은 <킬러의 보디가드 2>는 16일에 개봉하여 오는 23일까지 1,500만 달러를 벌어들일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킬러의 보디가드 2>는 몇 안 되는 극장 개봉작 중 하나로서, 이 영화는 영화 사업이 코로나 침체기에서 회복됨에 따라 또 다른 흥미로운 사례가 될 것으로 보이고 있습니다. <킬러의 보디가드 2>는 코로나19가 시작된 이후 대형 스크린에서 공개된 첫 코미디 작품인데요. 이는, 슈퍼 히어로와 서스펜스 스릴러의 인기로 인해 많은 영화 팬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는 장르이기도 하기에, 이번에 얼마나 많은 관객들을 이끌 수 있을지 기대가 됩니다.
이번 후속작은 1편보다 더 적은 예산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킬러의 보디가드 2>의 제작비는 5천만 달러 정도로 알려져 있고, 1편은 6천9백만 달러의 예산이 소요됐습니다. <킬러의 보디가드>가 북미 박스오피스 티켓 판매 2,100만 달러로 시작하여, 북미 박스오피스 최종 7,500만 달러, 그리고 전 세계 1억 7,600만 달러를 벌어들이며 다소 부족한 흥행 성과와 함께 극장 개봉을 마친 이력이 있기에, 줄어든 예산에 대한 문제점을 납득시키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킬러의 보디가드 2>는 마이클(라이언 레이놀즈)과 다리우스(사무엘 L. 잭슨)가 유럽 전역을 위기로 몰아넣는 미치광이들의 사악한 음모를 없애기 위해 다시 뭉치게 된다는 줄거리로, 다리우스의 아내 소니아(셀마 헤이엑)까지 합세한다는 차별점을 담고 있습니다.
개봉 예정작인 <킬러의 보디가드 2>를 제외하고, 현재 북미 박스오피스 시장은 <인 더 하이츠>와 <피터 래빗 2>가 이끌고 있는 상황입니다. 두 영화 모두 예상보다 좋은 성과를 보이고 있는데, HBO Max에서도 관람 가능한 <인 더 하이츠>는 총 1,140만 달러를 벌어들였고, <피터 래빗 2>는 1,010만 달러를 벌어들였습니다.
백신 접종으로 인해 되살아나는 극장 시장과 액션 코미디 장르의 귀한! 과연 <킬러의 보디가드 2>는 <인 더 하이츠>와 <피터 래빗 2>를 넘어서 북미 박스오피스 시장 1위에 안착할 수 있을까요? 국내에서도 6월 23일 개봉 예정이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씨네랩 에디터 M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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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두사와 싸우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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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놉]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글을 퍼가거나 인용 시 출처를 반드시 남겨주세요.
조던 필 감독의 작품은 어딘가 불편하다.
차마 건드리지 못했던 주제에 대해 과감하고 가감 없이 시선을 주는 면에서 그렇다.
그러나 그저 고발의 목소리에서 그치지 않고. 이 불쾌감의 근원을 관객들의 마음속에서 끄집어 내 양지로 가져오는 역할도 자처한다. 덕분에 우리는 스스로의 마음에 묻은 음습함이 얼마나 짙고 추했는지에 대해서도 한 번쯤은 알 수 있게 되었고. 이 마음이 뙤약볕에 잘 말려진 후 다시 제모습을 찾은 것을 보는 데서 오는 기시감도. 다시 품 속으로 마음을 돌려 넣을 때 오는 안도감도 함께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
[겟 아웃]과 [어스]에서는 인종 차별적인 문제와 소외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이번 영화 [놉]은 그 어떤 알 수 없는 존재가 주는 공포로 관객들을 마주하려 한다. 영화 개봉 직전까지 알려진 정보가 없어 이로 인해 관객들의 추측만 난무했다는 점도 이번 영화에 대한 기대를 키우는데 한몫했다.
한국에서 자신의 작품이 흥행한 것이 너무 기뻐 조동필이라는 애칭을 sns에까지 박제해버린 감독의 이번 작품은. 얼굴도 안 보고 그냥 데려간다는 셋째 딸 같은 영화가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죠스의 재현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기;감독이 천재성을 드러내는 방법
사진출처:다음 영화
창작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장애물이라는 말이 영화 [죠스]처럼 잘 어울리는 작품은 없을 것이다.
제아무리 스필버그 감독이라 해도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해 맞부딪칠 수밖에 없었을 기술적(혹은 금전적) 한계는. 달랑 지느러미를 보여주며 상어를 연상시키는 쪽으로 영화의 방향을 수정하게 만들었다. 아직 트이지 않은 길 때문에 목표 지점을 눈앞에 두고 돌아가야 했을 감독의 눈물이 바다처럼 차올랐으리라.
그러나 그 “달랑”지느러미 하나는 감독이 눈물로 쌓은 바다 안에서 마음껏 뛰어놀며 영화 한 편의 서스펜스도 바닷물처럼 차오르게 하는 일등 공신이 되었고. 제목만큼이나 강인한 턱뼈로 블록버스터 영화의 시초라는 전리품 같은 타이틀을 확신에 찬 채 우적우적 씹어 삼킬 수 있었다.
그 기념비적인 영화 이후로 몇십 년이 흐른 지금, 이제는 오히려 기술의 발달을 영화 전반에 내세워 뭐든 "보여주려"라는 시대가 당도했다. 그러나 천편일률적으로 화려함을 강조하는 트렌드가 이제는 영화의 장애물이라고 판단했는지. 감독은 슬그머니 뒷걸음치는 것을 전략으로 삼은 듯하다.
[놉]은 영화 속 지느러미의 역할을 음향(음악)과 색채에 맡겼다. 그리고 그 미끼들의 효과는 영화계의 시초가 그랬던 것처럼 확실하고 효과적이다. 죠스의 움직임을 상징하는 소리들 만으로도. 영화 속의 긴장감은 저 멀리서부터 흩어지지 않고 끌어 모인 채 쌓이고.[놉]의 죠스는 많은 것을 보여주지 않고도 생생하게 관객들을 공포에 떨게 한다.
몇 번에 걸쳐 영화계의 시초에 대해 강조하는 것도 이런 점에서 맞물린다고 생각할 수 있다. 제아무리 컴퓨터 그래픽이 눈을 사로잡는다 해도. 결국 본질은 어디까지 왔는지 알 수 없는 것에서 오는 공포라는 점을 감독은 진작에 간파한 셈이다.
바다만큼이나 끝과 속을 알 수 없는 하늘을 유유히 유영하는 UFO(라고 하자)를 바라보며, 죠스의 재림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감독의 짠 내 나는 눈물바다가 아닌. 기술과 시초(초심)의 결합으로 한계 없이 하늘을 훨훨 날고 있다는 점이 다행으로. 그리고 감사함으로 다가왔다.
UFO에 대한 주관적인 해석;그리고 그것을 대하는 두 사람의 태도
사진출처:다음 영화
이번 영화에서 공공의 적 역할을 하는 것은 다름 아닌 UFO이다. 전작들에 비하면 조금 SF 적이고 간접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러나 UFO의 본질을 생각해 본다면. 이보다도 더 직접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영화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름에 걸맞게 UFO(Unidentified Flying Object)는 미확인 비행물체이며. 존재한다는 증거가 없으면 믿음의 영역에 들어올 수 없는 실체가 불확실한 것에 가깝다. 하지만 정확한 존재 여부가 확인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대중들의 관심은 물론 음모론까지 확고하게 자리하고 있다는 면에서 보았을 때. 작품 속의 UFO가 가짜 뉴스, 혹은 비정상적으로 대중들의 관심을 끌어당기고 있는 그 무언가(헛소문,찌라시 등등)로 해석한다 해도 문제는 없을 것이다.
다들 그것이 유명해서, 혹은 궁금해서 맹목적이라는 말 외에는 설명할 수 없는 광기로 그것을 쫓지만 들여다보기 전까지는 정확한 실체조차 알 수 없다는 면에서 보아도. 또한 (앞 주제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아주 직접적이지 않고 간접적인 방법으로 공포의 대상을 그린 것마저도 헛소문의 실체나 퍼지는 방법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
이 UFO가 반응하는 방식 또한 주목할 만하다.
이 정체불명의 괴물은 말 그대로 별 영양가 없어 보이는 관심에만 반응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신의 존재에 대해 어느 정도 관음의 마음이 있어 눈길을 주는 자들만을 삼킨다.
목마와 깃발만을 성심성의껏 골라 내뱉는 것에서도 관심에 있어서의 가짜, 혹은 자신에게 반응하지 않는 것은 충실히 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신을 감싸고 있는 기본 정서인 "알 수 없는" 감정과 실체 없이 공포를 조성하는 데 있어 이런 것들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리키(스티븐 연)로 대변되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가짜 뉴스의 존재 자체에 사로잡혀 호기심을 드러내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그 UFO를 기회로 생각하며 어떻게든 실체 없이 달리는 말위에 올라타려는 태도를 보인다. 마치 그 뉴스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는 것처럼.
결국 카더라 뉴스가 가진 비정형성에 관심이라는 독을 품은 사람들은, 모두 외눈박이 괴물에게 삼켜지는 형벌을 받고야 말았다.
나쁜 기적이란 무엇인가.;메두사와 싸우는 방법
사진출처:다음 영화
OJ(다니엘 칼루 유야)가 UFO와의 마지막 전투를 준비하는 과정은 마치 페르세우스가 메두사와의 전투를 준비하는 것처럼 보였다. 다만 신(God)들에게 페르세우스가 받은 것은 전투에서 실제로 쓸 "장비"들이었지만. OJ가 가진 무기들은 물리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인물이 가지고 있는 성품에 가깝다는 것이 차이 정도라고 할 수 있겠다.
OJ는 영화 속 많은 것들이 그러하듯. UFO에게도 이름을 붙인다. 하나하나 특별하다는 의미임과 동시에, 특성들도 함께 떠올리려는 듯이. 영화에서 이름이 붙은 것들의 대부분이 짐승이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길들일 수 있다.는 의미도 함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봤을 때 UFO에게 진 재킷이라는 이름을 지은 것도 이해가 가능하다. 여동생에게는 오빠에게 뺏겼다고도 생각할 수 있는 이름이었지만. OJ에게는 첫 번째 말(Horse)임과 동시에 조련에 있어 가장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던 이름이었을 것이다. 가장 낯설었고, 가장 힘들었지만. 자신의 직업 철학에 있어 근간을 세우게 해 준.
OJ가 이 사태를 스스로 나쁜 기적이라 불렀다는 것에서도 그의 작지만 확실한 신념을 볼 수 있는 장면이기도 하다. 찬찬히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성품 탓에. 결국 이 진 재킷의 성격을 파악하면 이 사태도 마무리될 것이라 믿었을 테니 말이다.
그에게 "길들인다"라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그 생물이 가진 고유한 성격을 이해하고 그에 맞게 대응한다는 것이었을 것이고. 어쩌면 이번 기회에 시대에 뒤떨어져 보이는 자신의 철학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거기에 여동생에게 이 낯설고 큰 위험을 양보하지 않겠다는 마음가짐도 함께 얹은 채로. 마치 내 실력을 지켜 보라는 듯 동생에게 수신호를 보냈을 것이다.
OJ는 페르세우스가 그랬듯 진 재킷에게 등을 돌려 접근한다. 거울을 대신하는 그림자와, 소리만으로 진 재킷의 위치를 짐작하면서. 이 고집스럽고. 그 어떤 소란에도 성급하지 않던 OJ의 태도는 결국 진 재킷의 목을 베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다.
그는 끝까지 현혹되지 않았고. 한 번쯤은 궁금증에 고개를 돌릴 법한 자신의 마음마저도 다잡았다. 이름의 무거움과 사물의 본질을 아는 자는 그렇게 끝까지 꼿꼿하게. 자신의 존엄성을 유지하며 웃을 수 있었다.
마치면서
영화의 후반부는 발견했을 땐 이미 피하기 늦은 눈사태를 보는 것 같다. 제아무리 달려 도망친다 해도 발목을 잡아 끄는 눈덩이들에 잡아먹히고도 남을 듯한 압박감이 굉장하다.
그러나 영화 초반부는 제법 눈싸움을 할 수 있을 법한 그 덩어리를 만드는 것조차 힘들다고 느껴질 만큼의 지루함이 꽤 길다. 그마저도 조각조각 나 있다는 인상이 들어 과연 이게 먹히기는 할까.라는 의문이 애써 만들어 놓은 작은 눈덩이마저도 녹이는 것만 같다.
이런 단점을 제외하면 영화는 꽤 잘 만들어졌다는 생각을 몇 번이고 하게 한다.
또한 영화가 주는 메시지를 알아채는 것도 그다지 어렵지는 않다. 우연이겠지만 현재 한국 영화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역 바이럴 등의 이슈들에 대한 생각이 곧바로 떠올랐다.
마케팅을 비롯한 대다수의 관객들, 혹은 평론가들의 말들을 무시할 수 없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대다수의 의견에 그저 휩쓸리듯 선동되는 것은 대중이 해야 할 역할이 아닌 것을 늘 알아야 한다. 그러니 자신의 취향에 당당해지는 것. 또한 타인의 취향도 존중하는 목소리를 낼 줄 아는 것이 관객이 가져야 할 올바른 태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 영화였다.
시종일관 꼿꼿한 OJ의 태도가 유달리 마음에 남는다.
[이 글의 TMI]
1. 점프 스케어는 거의 없는데도 영화 분위기가 너무 무서움.
2. 그리스 로마 신화 덕후라 그런가 뭘 봐도 하나씩은 연상이 되는 듯.
3.휴가 중에도 영화 보고 리뷰 쓰는 나 칭찬해.(?)
4. 미키7 다 읽었다. 봉준호 감독님이 어떻게 이걸 영화로 만드실지 궁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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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어지며 미어지기를 택한 마음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여야 한다.언제 봐도 마법 같은,『데미안』속 문장이다. '새'와 '알'은 세상 모든 성장을 함축적으로 나타낸다. 우리는 언제나 오늘을 사는 동시에 내일을 향한다. 삶의 여정이란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가는 것이기에 목적지가 저곳이라면, 지금 발 디딘 이곳을 벗어나야만 한다. 잃는 동시에 얻는다.
이 사실을 개념적으로 받아들이고 정립할 수 있는 건 시간이 꽤나 흘러서지만, 이제 막 자라는 아이일 때부터 사실 이동은 시작되었다. 우리는 딱 이맘때의 아이 '클레오'를 영화에서 만난다. 한창 자랄 일만 남은 여섯 살 과 그 아이가 훨씬 더 미약할 때부터 함께했던 유모 '글로리아'.
클레오의 세계는 어떻게 달라질까. 그의 시점을 온전히 담고자 노력한 영화이기에, 글로리아뿐인 클레오의 세계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살필 때다.
* 아래부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아이의 일과는 단순하다. 일어나 글로리아와 유치원에 가고, 끝나면 글로리아와 손을 잡고 조잘조잘 떠들며 집으로 돌아간다. 먹고 씻는 사이사이에 장난도 치다 보면 까무룩 잠들고. 가끔 만나는 아빠와 짤막한 인사를 나누며 또다시 글로리아와 단둘이 하루를 보낸다.
유일하게 글로리아가 없는 유치원에서의 일과는 어떤가. 요리 수업인지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선생님을 따라 달걀을 깬다. 달걀은 그냥 깨지지 않는다. 어딘가에 부딪혀야 한다. 그런데 너무 강한 힘으로 뭉개져서도 안 된다. 껍질이 파편처럼 섞이고 마니까. 하지만 아이들의 작은 손은 그 크기와 달리 어딘가 맹렬한 면이 있어서 조절을 하지 않고, 기꺼이 부딪힌다.
조각조각을 걸러내야 하는 일. 꽤나 성가신 일이 아이들에겐 당연한 과정이다. 그저 재료 속에 숨은 껍질을 찾는 데에 온 집중과 정성을 다한다. 이제 주걱으로 보올에 담긴 재료들을 힘차게 섞는다. 이때도 온 힘을 다하는 아이들에게 선생님은 일러둔다. 너무 세게 하지 말라고.
이 장면은 클레오를 비롯한 우리 인간 모두의 겪어온, 겪은, 그리고 겪을 일상의 연속이다. 다만 어느 순간부터 잊었을 뿐이다. 자신이 얼마나 많은 세계를 깨고 나왔는지를. 다만 깨고 나왔을 때의 고통과 낯섦은 마음 어딘가에 남아있어서 새로움 앞에 쉽게 움츠러든다.
잔잔하던 일상에 작은 파동이 일렁인다. 글로리아에게 일이 생긴 것이다. 그는 경제적 이민자다. 머나먼 섬에서 나고 자라 아이들까지 낳았지만, 돈을 벌기 위해서는 일자리를 찾아야 했고 섬보다는 도시가 훨씬 유리했다. 몇 년을 이곳 프랑스에서 보냈는데 집으로 돌아갈 일이 생겼다. 어머니의 부고.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밭의 소리와 글로리아의 무거운 목소리. 발걸음을 서성일 때마다 글로리아가 갈대 틈 사이로 보이는 듯 보이지 않는다. 어느 밤. 글로리아는 아이에게 조심스럽고도 덤덤하게 사실을 전한다. 아이는 잠시간 멈칫하다가도 크게 개의치 않아 보인다. 여름방학에 클레오가 섬으로 놀러 오게 해 달라는 글로리아의 부탁에 아빠가 긍정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글로리아는 맹세의 침까지 뱉었다. 우스꽝스러운 다짐. 궁금해진다. 글로리아는 정말 확신했을까. 클레오를 다시 보게 되리라고. 그의 눈동자에는 한치의 거짓이 없었으나, 확신할 순 없다. 클레오를 보내겠다는 아빠의 긍정은 사실 빈말이었는데 감쪽같았다.
하지만 클레오는 아빠의 빈말보다 글로리아의 맹세의 침 뱉기를 믿는다. 나름 격렬한 투쟁을 거치고 나서 클레오는 드디어 글로리아가 있는 곳으로 향한다.
과거는 모두 질감 덩어리가 뭉친 애니메이션으로 표현된다. 거친 파도의 바다와 들끓는 화산이 있는 섬. 글로리아처럼 보이는 여자, 지금보다 어딘가 어려 보이는 실루엣. 표정은 알 수 없다. 질감과 명암과 움직임을 느낌으로 받아들여 그의 마음을 유추할 뿐이다.
클레오는 그다지 달가운 손님이 아니다. 섬 특성상 폐쇄적인 환경이고, 외부인을 경계하는 만큼 내부인의 자부심이 굉장하다. 아이러니하게도 글로리아는 내부인이지만 가족 안에서는 어딘가 모르게 외부인 같다.
특히 클레오보다 몇 살 더 많은 듯한 세자르에게 글로리아는 낯선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존재도 잘 모르겠던 사람이 대뜸 제 엄마 행세를 하려 들고, 게다가 생김새도 이질적인 애를 데려와선 저한테 주지도 않은 관심과 사랑을 쏟아붓는다. 세자르의 반항심과 반발심은 바다 위 절벽에서 다이빙하는 아찔한 취미로 이어진다.
클레오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환경을 관찰하고 습득해 간다. 세자르의 날 선 모습을 아이가 모를 리 없다. 하지만 툴툴대고 인상 쓴 얼굴을 하고서도 세자르는 클레오를 자신이 돌볼 대상임을 인지한다. 잠든 아이를 업고 집으로 걸어가는 식으로. 어쩌면 돌봄 받지 못한 자신을 클레오에게 투영하는 것인지도 모르고.
그 감정을 직접적으로 서술하는 건 아니다. 영화의 시선은 내내 오묘하다. 클레오와 글로리아의 깊고 오래된 사랑과 유대감을, 유모가 된 계기를 얼굴 없는 애니메이션으로 유추할 뿐이다. 그들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손쉽게 입 밖으로 내뱉지 않는다. 그저 눈빛과 행동, 웃음으로 감각하게 된다.
클레오는 글로리아의 세계에 들어와 사진에서 보았던 추억의 대상들을 몸소 겪었다. 그의 세계는 다양하고 넓은 반면, 자신의 세계는 여전히 글로리아밖에 없었고. 환경을 바꿨지만 여전히 새는 알에서 나오지 못한 거다. 원치 않았을 테지만, 클레오의 알은 깨지고 만다. 글로리아의 손자가 태어나면서.
갓난아기는 빽빽 울고 어른들은 달려들어 그를 어르고 달랜다. 클레오는 제가 온몸으로 받던 글로리아의 관심을 모조리 '뺏겼다'. 한참 자라난 이들의 눈엔 자연스러운 흐름이나, 이제 막 세계가 깨어진 존재에겐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이다. 글로리아의 모든 관심을 저 작은 애가 앗아갔다. 단잠 자는 글로리아를 깨우려고까지 하는 저 아기는 악마처럼 보일 따름이다.
결국 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클레오는 아이들이 지닌 특유의 맹목스러움을 아기에게 분출하고, 글로리아가 이를 엄하게 꾸짖는다. 집밖으로 뛰쳐나가 마구잡이로 걷던 클레오의 발걸음은 남자아이들이 깔깔대며 뛰놀고 있는 바다 위 절벽으로 향한다. 그리고 비장하게, 다이빙한다.
앞서 말했듯 어른의 세계는 이것저것 복잡하고 많은 것들이 담긴다. 글로리아는 딸과 아들이, 손주가, 마음을 나누고 있는 사람이, 공사 중인 호텔이,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어느 하나가 없어져도 상실감이 아주 클 테지만 남은 것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아이의 세계엔 어느 딱 하나밖에 없어서 그 하나가 사라지면 세상을 잃는 것과 같다.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은 마지막 발악처럼 무모한 게 당연하고, 글로리아도 아이의 마음을 듣고 헤아린다. 클레오에 대한 사랑과 별개로 그를 돌보는 건 돈을 받는 일이라서 글로리아는 아이에게 큰 요구를 하지 않았다. 잠자리에 들지 않고 장난치려 들 때도 받아주듯. 그런데 세자르에겐 어딘가 모르게 엄했다. 행동을 교정하려 들고 책임을 요구하고.
그래서 클레오를 바다에서 꺼내준 세자르에게 '엄마에게 뽀뽀해 줘'라며 사랑의 표현을 요구했다. 세자르가 뚱하게 그냥 고맙다고 말하라고 하자, 그제야 진심의 말을 전한다. 어딘가 모르게 따듯해진 찰나의 표정이 잔상에 남았고.
글로리아는 일로서 아이를 돌보는 게 익숙하더라도 가족으로서 아이를 돌보는 건 다소 서툴었던 걸까. 아무리 성인이라고 한들 언제나 부족한 면은 있기 마련이니까.
이건 평생 익숙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별.
클레오를 돌봐줄 새 유모가 생기고, 글로리아는 한 번 고향에 돌아온 이상 나갈 생각이 없다. 이곳엔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이 많으니까. 클레오를 덜 사랑하는 게 아니다. 세계가 다르다. 클레오에겐 글로리아밖에 없어서, 오히려 둘은 멀어져야 한다.
각자는 자신만의 세계가 있고, 그 세계는 어느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 깨어지고 부서지며 나눠진 조각조각이 또 다른 추억을 만든다는 것을 배워야 하니까. 기억의 총합으로 자신의 세계를 구성하고, 또 다음 세계를 깨고 나온다는 것을.
그렇게 클레오가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던 때. 이번엔 전과 다르다. 다음을 기약하지 않고, 글로리아는 제가 오래도록 찼던 고래 목걸이를 클레오에게 둘러준다. 자신의 몸과 다를 바 없던 무언가를 떼어내는 감각. 지금 당장은 클레오가 매끈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없을 테지만 느낌으로는 알았을 테다.
꽤 의연해 보이던 글로리아는 몸을 돌려 걷자마자 엉엉 울고 싶던 마음을, 끝에서야 터뜨린다. 아프다. 너무너무 아프다. 언제나처럼 목에 있던 목걸이가 사라진 무게만큼 허전하다. 우리는 그의 눈물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안다. 비워진 무게에 문득 익숙해질 것임을. 클레오가 글로리아 세계에서 완전히 제거된다는 게 아니다. 사랑스러운 일부로 존재할 테다. 다만 빈자리는 곧 새로움으로 채워지기에. 글로리아가 그래왔듯 클레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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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닥터 스트레인지2> 대혼돈이 아니라 광기의 멀티버스인 이유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갑작스레 꿈에서 깨어난 '닥터 스트레인지(베네딕트 컴버배치)'. 그는 멀티버스를 암시하는 듯한 꿈의 내용을 걱정하면서도 오랜 동료이자 친구였던 '크리스틴 팔머(레이첼 맥아담스)'의 결혼식에 참석한다. 끝내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은 크리스틴과의 관계를 곱씹던 중, 괴생명체가 급습하자 '웡(베네딕트 웡)'과 함께 전투를 벌인 그는 전투 도중 꿈에 등장했던 소녀 ‘아메리카 차베즈(소치틀 고메즈)'를 만난다. 그녀로부터 멀티버스가 실재하며 멀티버스를 넘나들 수 있는 아메리카의 능력을 뺏는 존재가 있다는 소식을 들은 닥터 스트레인지는 과거의 전우이자 마법에 통달한 또 다른 히어로 '완다 막시모프(엘리자베스 올슨)'를 찾아가 도움을 청한다. 그러나 스칼렛 위치로 각성한 완다는 자신의 목적을 이유로 그의 부탁을 거절하고, 닥터 스트레인지는 완다로부터 아메리카를 지키기 위해 멀티버스를 넘나드는 싸움에 나선다.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는 2016년에 나온 <닥터 스트레인지>의 속편으로, 멀티버스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린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이후 개봉하는 첫 MCU 영화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닥터 스트레인지 2>를 기대하는 시선과 분위기는 특히 '멀티버스'에 집중되어 있었다. 실제로 개봉 전 수많은 팬들은 <노 웨이 홈>이 그랬듯이 이번 작품도 특급 '카메오'를 선보일 거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작품은 멀티버스에 방점이 찍힌 영화가 아니다. 실제로 영화는 '닥터 스트레인지가 스칼렛 위치의 추적을 피해 아메리칸 차베즈를 보호한다'는 핵심 플롯에 충실하다. 즉 이 작품 속 멀티버스는 그저 공간적 배경이고, 카메오는 말 그대로 카메오에 불과하며 단지 멀티버스를 오가는 닥터 스트레인지의 이야기를 보여줄 뿐이다. 그 대신 <닥터 스트레인지 2>는 부제인 멀티버스에 붙은 대혼돈, 정확히 말하면 '광기(madness)'에 주목한다. 다시 말해,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는 닥터 스트레인지가 광기를 마주하며 겪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닥터 스트레인지가 마주한 두 가지 광기
그렇다면 영화 속 그 광기는 무엇일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역시나 스칼렛 위치다. 자신이 만든 환상의 공간에서 자신의 마법으로 만들었던 쌍둥이 아이들과 함께하는 삶을 누렸던 완다 막시모프. 그녀는 자신의 환상이 파괴되고 연인이었던 비전에 이어 그 아이들마저 잃는다. 이후 어둠의 마법서인 다크 홀드에 의해 타락한 그녀는 쌍둥이 아이들을 다시 만나려는 광기에 휩싸인다. 그래서 그녀는 다른 우주의 쌍둥이들을 데려와 자신의 가정을 완성하는 꿈을 꾸고, 이를 위해 멀티버스를 오가는 능력을 지닌 아메리카 차베즈를 사로잡아 그녀의 힘을 빼앗으려 든다. 이는 세계와 우주의 수호자인 닥터 스트레인지가 용납할 수 없는 행위이자 위협이며, 따라서 스칼렛 위치는 누가 보더라도 닥터 스트레인지가 마주해야 할 위협적인 광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닥터 스트레인지가 직면한 광기는 외부에만 있지 않다. 그의 내부에도 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소재가 바로 꿈이다. 흔히 꿈은 잠재의식의 표현이라고 여겨진다. 깨어 있는 동안 자아나 의식이 미처 깨닫거나 인식하지 못한 경험이나 불안감, 심지어는 미래에 대한 비전을 무의식이 형상화한 것이 꿈이다. 영화는 이러한 꿈의 특성을 멀티버스와 결부시킨다. 영화에서의 꿈은 멀티버스 속 자신을 볼 수 있는 통로다. 따라서 멀티버스에 존재하는 자신을 만나는 것은 결국 본인 내면의 또 다른 자기 자신을 만나는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멀티버스를 돌아다니며 다른 여러 닥터 스트레인지를 만나는 여행은 닥터 스트레인지 본인이 애써 누르고 억압하고 있던 무의식에 속한 본인 모습을 만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는 멀티버스 여정에서 처음으로 도착한 세계에서 그가 잊으려던 크리스틴과의 추억을 다시 보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특히 그에게 내재되어 있던 광기가 다양한 형태로 발현된 결과물이 멀티버스의 닥터 스트레인지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는 대의를 위해 희생을 정당화하고, 옳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오만과 독선으로 가득하며, 사랑하는 이를 차지하려고 세계를 파괴하는 스트레인지를 마주한다. 당장 크리스틴의 결혼식에 참석한 닥터 스트레인지의 모습과 대사를 보면 다른 우주 속 본인이 될 가능성이 은연중에 보이기도 한다. 그렇기에 닥터 스트레인지의 멀티버스 모험은 완다의 광기를 마주하는 여정이자, 동시에 자기 자신의 광기를 대면하고 그 광기가 자신을 잠식하지 못하게 하는 내적 여정이다. 그러다 보니 작중 닥터 스트레인지보다 완다가 더 능동적으로 사건을 주도하는 인물로 묘사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그녀의 광기는 이미 드러나 있는 상태이지만, 닥터 스트레인지의 것은 아직 탐색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 모습만 다를 뿐 결국 공통적으로 광기를 품고 있는 두 주역의 초반부 대화에 유달리 '이성적'이라는 표현이 많이 등장하는 것 역시 사뭇 의미심장하다.
거울로서의 멀티버스
이에 더해 멀티버스는 두 광기가 해소되는 공간으로도 활용된다. 멀티버스는 단지 또 다른 '나'를 발견하는 통로일 뿐만 아니라, '나'를 볼 수 있는 거울과도 같기 때문이다. 거울을 보는 행위는 거울에 반사된 '나'의 상을 보는 것이다. 이때 거울은 '나' 혼자의 힘으로는 알 수 없는 이미지를 보여준다. 따라서 거울을 보는 행위는 자기 자신의 외관이나 정체성을 재고하고 반성할 기회를 잡는 일이다. 그런데 거울에 비치는 상은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는 못한다. 언제나 좌우가 바뀌어 있으며, 거울의 표면에 따라서 형태가 왜곡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나'는 거울 안에서 자신의 모습과 유사하나, 동일하지는 않은 또 다른 주체를 만난다. 이때 '나'에게 그 주체는 하나의 대상이고, 그 주체의 입장에서도 '나'는 하나의 대상이다. 그렇기에 '나'는 거울 속 자신을 통해 타인을 만나고,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다시 찾을 수 있다. 이는 덴마크의 설치 예술가 올라퍼 엘리아슨이 거울을 두고 평행세계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말한 이유이기도 하다.
닥터 스트레인지에게는 멀티버스가 바로 그 거울이다. 다른 세계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본인이 내재한 광기의 위험성을 깨달은 그는 그들이 먼저 간 길을 따르면서도 또 다르게 걷는다. 전편들에서 알 수 있듯이 본래 닥터 스트레인지는 대의를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희생을 감수하거나 금지된 규칙을 깨는 데에 주저함이 없었다. 1편에서 그는 금지된 타임 스톤의 힘을 적극적으로 이용했고, <인피니티 워>와 <엔드게임>에서는 더 큰 계획을 위해 타노스에게 타임 스톤을 내주며 많은 이들의 희생을 감수했다.
하지만 멀티버스라는 거울을 통해 다른 세계의 스트레인지가 대의를 위한 희생을 택하거나 어둠의 마법에 기댔는데도 실패하는 모습을 제삼자의 시점에서 객관적으로 목격한 스트레인지는 이전과 다르다. 독선적인 성격을 잠재우고 다른 이들을 믿으며, 좋은 결과는 물론 옳은 과정도 같이 추구한다. 그 덕분에 그는 자신의 독단이라는 광기가 낳았던 죄책감과 그로 인한 행복의 부재로부터 탈피하는 데 성공한다. 그렇기에 닥터 스트레인지가 소서러 슈프림인 웡에게 허리 숙여 인사하는 장면은 유머스러운 대목이기도 하지만, 그가 드러나지 않은 광기를 통제하며 한 단계 성숙해졌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광기의 멀티버스인 이유
같은 맥락에서 보면 멀티버스를 건너오는 완다의 공포스러운 추격전에도 다른 의미가 있다. 완다는 닥터 스트레인지 외에 꿈에서 멀티버스를 볼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그러므로 그녀에게도 멀티버스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통로이자 동시에 거울이다. 즉, 그녀의 여정은 단지 아메리카 차베즈를 쫓는 것이 아니라, 스칼렛 위치라는 정체성 밑에 가려진 나머지 더 이상 현실의 자기 모습이 아닌 완다의 의식을 깊은 내면에서 끌어올리는 여정인 것이다.
초반부와 후반부의 완다가 처한 상황을 대조하면 그 의미가 더욱 명확해진다. 카마르 타지에 진입하려던 완다는 닥터 스트레인지에 의해 미러 디멘션에 갇힌다. 그는 완다를 수많은 거울로 가득한 방에 가두어 놓으면서 그녀로 하여금 스칼렛 위치가 된 자신의 모습을 직시하게 만들려 하나 이는 효과를 보지 못한다. 반면 후반부에 스칼렛 위치는 멀티버스의 완다를 마주 본다. 멀티버스라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본인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깨닫고 타락해버린 현재의 모습을 깨닫는다. 닥터 스트레인지가 다른 우주의 자신의 모습에 비추어 같은 함정에 빠지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것처럼.
이는 완다가 사용하는 다크 홀드의 대척점에 있는 '비샨티의 책'이 맥거핀으로 활용되는 이유다. 닥터 스트레인지와 완다의 대립은 선과 악의 대결이 아니라, 각자 품고 있는 광기를 어떻게 직시하고, 수용하고, 통제할 것이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일례로 다른 우주의 자신에게 빙의하는 흑마법 '드림 워킹'을 시전 한다는 점에서 둘은 다를 게 없지만, 그보다는 마법의 목적과 결과가 무엇이냐가 더 중요한 차이점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영화의 부제를 '광기의 멀티버스'가 아니라 '대혼돈의 멀티버스'로 번역한 선택은 캐릭터의 서사에 집중한 의도와 멀티버스라는 소재에 숨겨져 있는 의미를 부각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크다.
양날의 검인 광기의 멀티버스
이처럼 광기로 가득 찬 내면을 여행하는 통로이자, 자신의 모습을 직시하게 만드는 거울인 멀티버스. 다만 멀티버스의 활용은 양날의 검이기도 하다. 우선 완다의 광기를 강조시킨 결과 자칫 올드할 수 있는 샘 레이미 감독 특유의 호러 영화적 요소가 MCU에 잘 녹아든 것은 장점이다. 닥터 스트레인지 일행을 쫓는 터널 장면이나 프로페서 X와의 전투에서 다수의 점프 스케어를 동원해 완다의 집착이나 광기를 살려내는 것이 대표적이다. 스칼렛 위치의 압도적인 힘을 잘 묘사한 이 장면들은 인간이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파멸되는 공포감인 코스믹 호러를 부각하는데, 이 대목이 MCU의 클리셰를 비틀면서 신선한 충격을 주기 때문이다. 그간 MCU의 빌런들은 제모 남작이나 미스테리오, 알렉산더 피어스와 같은 반전형 빌런인 경우가 많았다. 반면에 광기로 가득한 완다는 초반부터 빌런으로 등장해 영화의 분위기를 장악해 버린다.
다만 멀티버스와 관련된 인물들의 서사가 평면적이라는 문제를 피하지는 못한다. 작중 멀티버스가 본질적으로 수단과 배경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아메리카만 해도 그녀의 과거사가 잠시 모습을 비추지만, 그녀의 역할은 두 주연의 내면을 살피는 멀티버스를 여는 데 한정된다. 그래서 그녀는 철저히 수동적으로 묘사되며, 본격적인 서사는 다음 기회를 기약할 수밖에 없다. 다른 우주의 히어로들 역시 같은 이유로 등장할 때의 임팩트에 비해 초라하게 퇴장하기를 반복한다. <노 웨이 홈>과 달리 본 작에서는 카메오가 단순한 일회성 팬 서비스로 낭비되는 듯한 인상이 강한 것이다. 또 멀티버스 속 인물들을 가볍게 소비하는 것은 그간 영웅의 죽음과 희생의 가치를 중시했던 MCU의 접근법과는 괴리가 있다. 달리 말해 '광기의 멀티버스'만으로 호러 영화와 MCU의 간극을 메우는 데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호러물 클리셰대로 안일하게 방심한 인물들이 단숨에 죽는 전개가 남발되거나, 스토리 전개에 있어서 우연적 요소가 적지 않은 것은 미흡한 봉합의 또 다른 증거나 다름없다.
한편 멀티버스라는 소재에 매몰되지 않았다는 장점과는 별개로 단독 영화로서도 호불호가 갈리는 지점이 있다. 액션이 대표적이다. 닥터 스트레인지를 상징하는 액션이라면 미러 디멘션을 활용한 화려하고 기하하적인 공간 왜곡을 꼽을 수 있는데, 이러한 연출이 완다를 상대할 때를 제외하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물론 마블은 토르, 아이언맨, 캡틴 아메리카의 성장을 위해 제각기 묠니르, 슈트, 방패를 제거한 전적이 있다. 다만 이후 더 강력한 능력이나 무기를 획득해 히어로 영화다운 액션을 보여준 것과 세 히어로와 달리, 닥터 스트레인지에게서는 그러한 외적인 변화를 찾을 수가 없다. 이는 미러 디멘션을 활용한 연출이 주제와 메시지를 잘 살려낸 것과 무관하게 히어로 영화로서 실망스러운 측면이다.
또한 디즈니+의 독점 드라마인 <완다비전>과의 연계가 매우 강해 진입 장벽이 높아진 점도 지적될 만하다. 영화가 닥터 스트레인지와 완다의 심리를 묘사하는 데 방점을 찍은 것을 고려하면, 완다의 성장과 변화를 깊게 다룬 <완다비전>의 내용을 모를 경우 2시간의 러닝타임은 물음표로 가득 찰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비단 이번 작품뿐만 아니라 앞으로 모든 마블 영화가 마주할 문제이기에, MCU로서는 적잖은 과제를 떠안은 셈이다. 결국 광기에 물든 두 히어로의 이야기에 철저히 초점을 맞춘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는 기대한 바에 따라 장단점과 만족도가 극단으로 갈릴, MCU 페이즈 4의 또 다른 문제작으로 막을 내린다.
A(Acceptable, 무난함)
멀티버스 파티에 매몰되지 않으려는 닥터 스트레인지의 한 수, 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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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마이 뉴욕 다이어리(2020)> 리뷰
고백한다. 뉴욕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데도(어쩌면 그렇기 때문일지도) 나는 이 도시에 대해 막연한 환상을 품고 있다. 우뚝 솟은 마천루에 온갖 신경을 빼앗기지 않을까 싶으면서도, 어쩐지 내 안의 허영심을 충족시켜줄 것만 같은 세계적인 도시. 괜히 맥북이나 고풍스러운 책 한 권을 들고 센트럴 파크에 앉아 있어야 할 것만 같은, 그런 곳.
온갖 정보가 발달해 사실 뉴욕 지하철은 한국의 것보다 못하고, 뉴욕이든 서울이든 결국 서양화된 도시이기에 생각보다 ‘그럴싸한 건’ 없다는 말을 숱하게 들었음에도 미디어가 만들어낸 환상적 이미지는 내게서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니, 영화 속 주인공 조안나(마가렛 퀄리)는 어떨까.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1989)》가 개봉한 시점에서 고작 몇 년 지나지 않았던 시절의 미국에서 자란 조안나는, 더군다나 작가 지망생이기까지 하다. 좁은 플랫에서 원고와 싸우고, 카페에서 글을 쓰는 친구들과 예술적 교감을 나누며 청춘을 개척하고픈 열망을 지닌 청춘. 그에게 뉴욕이 어떤 의미였을지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나 역시 일정 부분 그런 꿈이 있기에, 더욱더.
조안나가 뉴욕에 있게 된 건 우연과 운명의 합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안나가 이토록 오래 머물게 될 줄은, 조안나도 그의 친구 제니(세아나 커스레이크)도 짐작하지 못했으므로. 잠시 머물고자 했던 뉴욕이었으나 조안나는 안정적이되 심심하기만 한 버클리에서 뉴욕으로 아예 거처를 옮긴다. 충동적인 결정이었던 듯 보이나 그는 빠르게 적응한다. 다만, 많은 이들이 오가는 대도시는 이방인에게 열린 공간이지만, 열려있다는 것이 늘 환대의 의미와 동일하진 않다는 것을 조안나가 깨닫는 데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렇듯 마이 뉴욕 다이어리(원제: My Salinger Year)는 주인공 조안나의 여정을 따라가는 성장 드라마다. 평범한 건 싫고, 특별해지고 싶다는 치기 어린 소망을 품은 주인공이 마주한 뉴욕이라는 흥미로운 공간. 그는 새로운 사랑을 찾기도 하고, 일자리를 구하기도 하지만, 그의 이름으로 렌트를 구한 집은 어딘가 어설프고, 작가를 꿈꾸는 그가 하는 일은 팬레터에 기계적으로 답장을 보내는 일에 불과하다. 이윽고 조안나는 결심한다. 진심이 담긴 팬레터에 'JD 샐린저 씨는 팬레터를 받지 않습니다, ' 따위의 무의미한 대답을 타이핑하는 일을 지속할 수 없다고. 그러자 언뜻 잔잔해 보였던 일상에 파문이 일기 시작한다.※ 이하 스포일러 주의
조안나가 일하게 된 곳은 마가렛(시고니 위버)의 작가 에이전시다. 마가렛은 조안나를 고용하는 순간부터 단호하게 말한다. 작가(지망생)는 자신의 비서로 고용하지 않는다고. 조안나는 김이 샐 법도 한데, 복도에 걸린 애거서 크리스티나 스콧 피츠제럴드의 사진에 전율을 느낀다. 실망도 하지만, 조안나는 꿈을 버리지 않는다. 마가렛이 자신을 알아봐 주고 좋은 기회를 마련해 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아주 하지 않았던 건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조안나는 자신이 읽어본 적도 없는 J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에 매혹된 이들에게 경직된 답장을 쓰던 중 그들의 진심에 성심성의껏 답하기 시작한다. '홀든'이라는 주인공의 이름도 적극적으로 인용하며 제법 그럴싸하게 쓰기도 하고, 절박해 보이는 학생에겐 교훈적인 답장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답장을 받은 이가 뉴욕 사무실까지 찾아와 되묻는다. 내 진심이 담긴 편지를 멋대로 읽어본 당신의 답장이 규격화된 답장보다 더 나을 이유가 무엇이냐고.
조안나 래코프라는 이름이 소녀의 입술 밖으로 튀어나온다. 우스꽝스러운 이름이라고 했다. 빈정거림이 분명한데도 조안나는 그 말에 반박하지 않는다. 자신은 허락되지 않은 대화에 끼어든 이방인에 불과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가 사라지고 조안나는 복도를 걷는다. 조안나의 소망 중 하나가 '특별해지는 것'이었다는 것을 상기해보자. 그는 뉴욕이라는 메트로폴리탄에서 작가라는 단독자가 되고자 버클리의 삶을 버렸고 버클리에서 만났던 남자 친구와는 연락을 줄였다. 그러나 조안나의 손에 남은 건 무엇인가? 그는 등단한 시인이라는 것을 감췄고 영혼에 반하는 일을 주 업무로 삼았다. J.D. 샐린저가 그에게 당신은 작가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시인이라고 얼떨결에 대답했던 조안나는 하루에 15분씩 자신만의 글을 쓰긴커녕 타인의 삶을 흉내 내어 답장하는 일만 지속하고 있었으며, 상사인 마가렛에겐 조안나라는 유능한 비서로 인식되기보단 '샐린저에게 익숙한 환경'으로 인식될 뿐이었다.
조안나가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뉴욕에 와서조차 오래도록 읽지 않았다는 건 적지 않게 흥미롭다. 업무를 진행하며 왜 샐린저의 팬들이 이 책에 그토록 집착하는지 궁금했을 법도 한데 말이다. 그러나 이 지점이야말로 지금껏 조안나의 성장이 지연된 이유일 것이다. 그는 많은 일을 겪으면서도, 그 심장부로 파고들지 않았다. 워싱턴으로의 짧은 귀향과 돈(더글라스 부스)의 부재를 경험한 후에야 조안나는 자신이 돈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대니얼(콤 피오레)의 죽음을 통해서야 조안나는 인간 마가렛을 알게 된다. 작가 에이전시에서 일하는 것과, 뉴욕에서 일상을 이어가는 것은 허영심을 충족시켜줄 수 있을 진 모르겠으나 작가라는 꿈을 이뤄주진 못한다. 꿈은 외면을 모방하는 것만으로 성취할 수 없는 것이므로.
타인의 마음뿐만 아니라 자신의 마음 깊은 곳까지 살펴본 조안나는 우울을 떨치고 나아갈 동력을 얻었다. 친구 제니가 뉴욕을 떠나는 것을 배웅하며 연인이었던 돈과 동거한 공간을 떠나지만, 그것이 버클리로 돌아간다는 의미는 아니다. 또한 후임자가 나타날 때까진 맡은 업무를 모두 하겠다고 말한 만큼, 조안나의 출근은 순식간에 중단되지 않는다. 하지만 카메라는 자신의 이름이 적힌 원고를 소중히 든 조안나를 똑똑히 비춘다. 뉴요커 건물에 도착한 조안나의 원고가 어떤 미래를 맞이할지 우리는 모르지만, 감독은 스크린을 통해 조안나를 작가로 호명했다. 그렇기에 관객은 알 수 있다. 샐린저가 말했듯 조안나는 이제 매일같이 자신만의 글을 쓸 것이라는 걸. 꿈에 그리던 모습으로 거듭났다는 사실을.
《마이 뉴욕 다이어리》는 자전적 에세이를 바탕으로 하기에, 영화의 마지막은 너무나 당연한 결말이었다. 그럼에도 러닝타임이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까닭은 영화 곳곳에 녹아 있는 인간적인 유머와, 90년대의 뉴욕을 겪어본 적 없는 나까지 향수에 젖게 만드는 따뜻한 스크린의 색감 때문이 아닐지. 무시무시하고 악랄한 악역이나, 회복하기 어려울 만큼의 끔찍한 사건 없이도 인간은 성장할 수 있다. 그저 조금만, 조금만 더 본질적인 것에 집중한다면, 우리 역시 조안나처럼 20대를 따스하고 애틋하면서 한편으론 엉뚱하고 우습기도 한 시절이었다고 회고할 수 있으리라 나는 믿는다.
★★★
* 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참석하여 감상한 후, 주관적 견해에 따라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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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기 욕심 있었던 봉준호 출연작 모음
얼마 전, 뉴욕타임즈 선정 ‘21세기 최고의 영화’ 1위에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이름을 올렸죠.
세계 영화사에 길이 남을 대기록인데요…! 👏그 소식을 듣고 문득 떠올랐습니다.
감독이 아닌 ‘배우 봉준호’의 얼굴.
작품 속 인물로 깜짝 등장하던 그의 카메오 모먼트들…사실 알고 보면 연기에 대한 은근한 욕심(?)도 있었던 봉 감독. 그의 짧지만 인상 깊은 출연 순간들을 한데 모아봤습니다.봉준호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연기는 배우 고유의 영역이라, 내가 컨트롤할 수 없다.” 고 말하며,직접적인 지시보단 질문을 통해 배우 스스로 감정을 찾도록 유도한다고 밝혔는데요.
어쩌면, 그가 직접 연기에 나섰던 순간들은
연기를 ‘통제’하기보단 ‘이해’하려는 노력,
영화를 더 잘 만들기 위한 공부의 일환이었나 봅니다.심지어 잠깐이지만 연기도 자연스럽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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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MFF 데일리] 메탈, 일상과 사회의 불안함을 극복하다
감독: 리타 바그다디 / Rita Baghdadi
출연: Lilas Mayassi, Shery Bechara, Maya Khairallah
시놉시스: 베이루트 외곽에서 활동하는 릴라스와 그녀의 스래시 메탈 밴드 멤버 셰리, 마야, 알마와 타티야나에게는 큰 꿈이 있지만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는다. 기대를 품고 참가한 영국의 음악 축제도 그들의 생각대로 되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던 릴라스는 붕괴 직전의 레바논을 목격한다. 설상가상으로 릴라스와 동료 기타리스트 셰리의 복잡한 우정에도 금이 가기 시작하고... 밴드, 국가, 꿈 모두가 위기에 처한 릴라스는 갈림길에 서게 된다.
'사이렌' 속 레바논의 한 뉴스 앵커는 스래시 메탈 밴드, 슬레이브 투 사이렌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흔히 메탈 음악은 무거운 사회적 주제를 다루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왜 당신들은 일상적인 소재를 가사로 다루냐고. 그러자 리더인 릴라스는 이렇게 답한다. 조부모들이 태어난 이래로 레바논은 고통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에 레바논에서 사는 일상만으로도 충분히 무거운 주제라고 생각한다고. 이 문답은 올해 선댄스영화제에서 첫 공개된 리타 바그다디 감독의 장편 다큐멘터리 '사이렌'이 지향하는 바를 명확히 보여준다.
일상에 힘을 주니 사회가 보인다
사실 '사이렌'이 단지 릴라스와 셰리를 비롯한 밴드 멤버들의 개인사만 보여주려는 영화가 아니라는 사실은 도입부에서부터 알 수 있다. 정권교체를 열망하는 시위대가 거리를 점거하는 장면으로 시작되는 만큼, 이 작품에 레바논의 정치사회적 현실을 비판하려는 의도가 있음은 명백하다.
그런데 영화는 레바논의 사회적 문제점을 직접 묘사하지는 않는다. 대신 밴드 멤버들의 일상에 주목한다. 돈이 되지 않는 밴드가 영국 글래스턴베리에서 열리는 록 페스티벌에 가서 유명세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장면이나 릴라스가 동성 연인을 두고 어머니와 벌이는 갈등이 스크린을 채운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학교에서 음악 교사로도 일하는 랄라스의 모습, 앨범에 들어갈 노래의 키나 템포를 놓고 세리와 릴라스가 충돌하는 것도 그들의 일상을 장식한다.
하지만 일상 자체가 고통이라는 릴라스의 말대로, 힘을 주지 않아도 스쳐 지나가는 그들의 일상에서는 레바논의 사회적 문제가 엿보인다. 좀처럼 성공하기 힘든 메탈 밴드의 현실은 표현의 자유조차 보장될 수 없는 보수적인 이슬람 국가의 사회문화적 측면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릴라스와 엄마의 말다툼도 동성애를 사회악으로 치부하는 억압적인 현실의 단면을 보여준다. 릴라스와 셰리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여성밴드는 대타가 없다"는 말은 여성으로서 메탈 밴드에서 활동하는 것이 얼마나 비주류적인 활동인지를 보여준다. 정권교체를 원하는 시위대 옆에서 주인공들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일상적인 대화를 나눈다.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기에 오히려 일상과 사회가 연결되는 지점은 흥미롭다. 이러한 다양한 갈등 덕분에 '사이렌'은 다큐멘터리지만 극영화 같기도 하다.
일상과 사회를 잇는 메탈 밴드와 음악
물론 영화의 의도가 직설적으로 엿보이는 장면이 없지는 않다. 베이루트 항구 폭발사고를 다루는 대목이 그렇다. 이 사고는 레바논의 정치와 경제를 모두 혼란에 빠트린 대형 사고였고, 순전히 사고인지 아니면 인위적인 테러인지도 아직 불명확하다. 이때 영화는 릴라스와 셰리의 갈등을 이 사건과 곧장 이어 붙인다. 그저 일상적일 수 있는 갈등이 모이고 모이다 보면 레바논의 수도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거대한 폭발처럼 커질 수 있다고 말하려는 것처럼.
바로 이 지점에서 메탈 밴드와 그들의 음악이 갖는 힘이 존재감을 발휘한다. 깊어지던 릴라스와 셰리의 충돌은 진솔한 대화 이후 더 끈끈한 우정으로 모습을 바꾼다. 이렇게 밴드 내의 반목이 사라지자 그들이 준비하는 앨범의 트랙 리스트는 멤버 모두가 만족할 만한 명곡으로 채워진다. 밴드가 하나 되자 그들의 문제는 해결된다. 혼자라면 무서울 검고 어두운 터널도 함께 걸으면 그렇지 않듯이.
그래서 무너진 신전을 배경으로 오케스트라와 합동 공연을 펼치는 슬레이브 투 사이렌의 모습 역시 상대적으로 짧게 지나가는데도 불구하고 인상적이다. 혼란스러움과 불안함, 우울함이 가득한 일상을 극복하듯이 다양한 문제가 산적한 레바논 사회도 전진할 수 있다는 믿음이 강렬한 메탈 합주에서 느껴지기 때문이다. 특히 거대하고 화려한 무대를 꾸미는 슬레이브 투 사이렌이 보이는 엔딩 크레디트 덕분에 그 믿음은 더욱 강해진다.
그들이 '사이렌의 노예'인 이유
특히 밴드 멤버들이 다름 아닌 사이렌의 노예라는 점에서 그 믿음은 더욱 특별하다. 본래 사이렌은 그리스 신화 속 등장하는 괴물이다. 상반신은 여성, 하반신은 새의 모습을 한 이들은 지중해의 한 섬에서 감미로운 노래로 선원들을 유혹해 잡아먹는 것으로 유명하다. 오직 오디세우스만이 돛대에 자신을 묶은 채로 사이렌의 노래를 들어 유혹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런데 사이렌과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면 괴물에 불과했던 사이렌의 존재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집으로 돌아가려는 오디세우스는 기존 질서를 회복하려는 영웅이다. 그렇기에 그를 유혹해 파멸시키려는 사이렌의 존재는 기존의 질서를 전복하려는 모든 타자를 상징한다. 동성애자나 여성 메탈 밴드 멤버, 정권교체를 요구하는 시위대처럼. 즉, 사이렌의 노래는 그저 사회를 위협하는 목소리가 아니라 당당히 발화하는 주체, 억압되고 무시당했지만 언제나 사회 안에 잠재되어 있던 주체의 목소리이자 힘의 가능성이다. 이것이 '사이렌'의 메탈 음악에 담긴 진짜 힘이자 의미다.
그래서 '사이렌'이라는 노래를 들려주는 영화는 제목부터 마지막 크레디트까지 한 톨도 빼놓을 수 없을 만큼 인상적이다.
Schedule in JIMFF
2022-08-14 20:30 CGV 제천 1관
2022-08-15 16:30 메가박스 제천 1관
2022-08-16 20:30 의림지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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