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DAY2022-02-24 10:33:16
<리코리쉬 피자> 사랑의 탈을 쓴 힘과 위치의 변화
<리코리쉬 피자> 리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아역배우로 활동하던 15세 소년 '개리(쿠퍼 호프만)'. 어느 날 그는 학교 졸업사진을 찍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던 중 아름다운 햇살과 함께 등장한 연상의 여인 '알라나(알라나 하임)'를 만나고, 첫눈에 반한다. 스스럼없이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걸고, 데이트를 청하며 적극적으로 대시하는 개리. 그러나 서로 다른 나이와 환경, 직업으로 인해 그들의 관계가 엎치락뒤치락하며 좀처럼 진전되지 못하는 사이, 연인과 친구 사이에 있는 그들이 비즈니스 파트너로 엮이면서 이들의 연애사는 더욱더 험난하게 꼬이기 시작한다.
<리코리쉬 피자>는 할리우드의 젊은 천재 감독인 폴 토머스 앤더슨(PTA)의 신작으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 감독, 각본상 후보에 오른 것을 비롯해 수많은 영화제와 시상식에 노미네이트 되며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리코리쉬 피자>에서 진정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가 시상식에서 받은 상의 숫자가 아니다. 그보다는 이 작품이 겉보기에는 폴 토마스 앤더슨의 영화와는 결이 다소 다른 듯 느껴지지만, 그 속내는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눈길을 끈다.
그간 앤더슨은 설령 스타일은 다를지언정 유사 가족 관계, 폐쇄된 집단, 사이비 종교, 깊은 상처를 가진 캐릭터 등의 소재에 집중하며 불완전한 인간 내면을 낱낱이 파헤치는 드라마를 만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그의 영화는 국가의 권위를 부정하며 미국의 어두운 부분들을 샅샅이 파헤치는 메시지로 가득하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 1973년 미국 10대, 20대 청춘의 로맨스를 다룬 <리코리쉬 피자>는 필연적으로 어색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로맨틱 코미디 영화는 첫 장면부터 앤더슨이 그려내는 로맨스가 평범한 사랑 이야기일 수 없음을 보여준다.
당장 <리코리쉬 피자>의 시작을 보자. 졸업사진을 찍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십 대 소년 개리 앞에 알라나가 등장한다. 따스한 햇살, 그리고 로맨틱한 음악은 그녀의 등장을 더 화려하게 꾸며준다. 사진 찍는 일을 돕는 알라나와 그녀에게 한눈에 반한 개리는 대화를 이어가고, 그 대화 안에서 그들은 서로의 이름과 나이, 사는 곳 등을 알아가며 조금씩 하나의 관계로 묶인다. 알라나의 등장부터 개리의 퇴장까지 롱테이크로 이어지는 이 장면만 떼어놓고 보면 <리코리쉬 피자>는 그 어떤 하이틴 로맨스와도 견주어도 뒤처지지 않는 간질거림과 살랑거림을 선사한다.
그러나 이 롱테이크의 말미에서 영화는 본색을 드러낸다. 시종일관 나이가 더 많다는 무기를 내세워서 개리와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던 알라나. 그러나 개리 앞에서는 여유 넘치던 그녀도 그녀의 엉덩이를 만지는 촬영 기사 앞에서는 불쾌하다는 말조차 하지 못하는 약자로 변하고 만다. 가장 아름답고 황홀한 찰나에 그 리듬과 분위기를 아주 효율적인 방식으로 단칼에 끊어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영화는 누군가에게는 눈부신 사랑의 대상이 누군가에게는 그저 희롱의 대상이 되는 순간이자 본 작의 테마를 날카롭게 소개한다. 즉, 사람과 사람의 관계 내에서 그들을 둘러싼 배경과 환경에 따라 그 위치는 언제든 바뀔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후 2시간에 걸쳐 펼쳐지는 알라나와 개리의 로맨스는 우위를 점하기 위한 싸움으로 가득하다. 알라나는 자신보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큰돈을 만지는 개리를 부러워한다. 반면에 개리는 미성년자라는 한계 때문에 자유롭게 이동하지 못하고, 이에 알라나는 개리의 매니저가 되어준다. 또 개리의 촬영장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개리와 알라나에게 서로 다른 남녀가 번갈아가며 데이트를 요청하기도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리코리쉬 피자>는 우선 앤더슨의 사랑에 대한 정의로 이해할 수 있다. 그에게 사랑은 감정의 교류, 추억의 공유, 뜨거운 육체적 교감이 아니라 위계의 형성을 뜻하는 듯 보인다. 그래서 <리코리쉬 피자>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기까지 남녀 사이에서 더 우월한 지위와 주도권을 점하기 위해 얼마나 치열한 경쟁과 갈등이 발생하는지를 보여준다.
이렇게 사랑에 대한 낭만적인 접근법을 걷어냄으로써 <리코리쉬 피자>는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보다 현실적이며 깊은 이야기를 차곡차곡 쌓아나간다. 단순히 남녀와 사랑의 관계에만 국한되는 대신, 그 관계를 매개로 보다 다양한 역학관계의 전복과 치열한 재전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여성의 섹스와 산업 사이의 역학관계다. 영화를 보다 보면 앞서 본 오프닝 시퀀스처럼 말랑말랑한 분위기가 불균질 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리고 그 순간에는 공통점이 있다. 애인과 친구 사이 어딘가에 있는 개리와 알라나 사이에 비즈니스가 끼어들고, 그로 인해 알라나의 성과 관련된 사건이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물침대 사업을 시작한 개리는 박람회에서 한 여성에게 섹시한 의상만 입힌 채 물침대를 홍보하게 하며 알라나는 그 여성에게 관심을 표한다. 바로 그 찰나에 개리는 용의자로 잘못 지목되어 경찰에게 체포되는데, 이 대목에서의 장면 전환은 굉장히 사나운 인상을 남긴다. 특히 경찰이 개리를 거칠게 다루며 그의 사업을 일시적으로 막는 모습에서는 마치 여성의 성이 상업적으로 이용되는 것을 막는 듯한 느낌도 준다.
더 나아가 이 장면은 다양한 형태로 반복된다. 물침대 상점 오픈식에서 비키니를 입고 홍보를 하던 알라나는 다른 여자와 키스하는 개리를 본 후 좌절한다. 개리가 물침대를 사려는 고객에게 섹시하게 응대하라고 요구하자 알라나는 개리가 말한 것 이상으로 고객을 유혹하기도 하고, 또 배우가 되기로 결심한 후 에이전트와 오디션을 보던 중 개리의 조언을 무시한 채 작품 내에서 노출도 감수할 수 있다고 밝히기도 하면서 개리와 격렬하게 싸우기도 한다. 이렇게 영화는 개리와 알라나의 관계가 점진적으로 진행되려는 찰나마다 섹스를 매개로 빛에서 어둠으로, 환희에서 절망으로 급격하게 분위기를 전환한다.
그러나 <리코리쉬 피자>의 로맨스는 여성의 몸을 성적인 대상을 활용하는 세태에 대한 일차원적인 비판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알라나의 이야기 속 성역할과 성위계를 고정되지 않은 시선으로 고찰하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는 알라나가 성을 이용하는 사회와 산업의 피해자임과 동시에 능수능란하게 자신의 성적 매력을 사용한다는 사실이 위치한다. 성공에 대한 열망을 지닌 그녀에게 성적 매력은 유용한 도구다. 그녀는 촬영장에서 남자 배우를 유혹하고, 자신의 매니저가 된 개리가 불평하자 가슴을 보여주기도 하고, 시장 후보인 조엘이 밤에 호출하자 곧장 달려가기도 한다. 이처럼 단순한 수동적 캐릭터가 아닌 알라나의 모습은 중요한 메시지를 남긴다. 설령 기존의 사회 질서가 여성을 성적으로 소비하더라도, 알라나의 주도적인 선택과 참여가 없다면 그 질서는 완성되지 않는다. 즉, 그녀에게는 개리와의 관계에서도 그러했듯이 선택권과 주도권이 있다.
이는 알라나가 기름이 떨어진 트럭을 끌고 내려가는 후진 장면이 러닝타임 중 가장 시원하며 황홀한 순간인 이유다. 그녀가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와 선택권을 다르게 활용한 최초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전까지는 자신을 성적으로 이용하려는 세계에 편입되고자 했던 알라나. 그랬던 그녀는 이제 '존 피터스(브래들리 쿠퍼)'처럼 마초적인 남성의 공간에서 개리로 대변되는 또 다른 남성이 아무 역할을 하지 못하는 사이, 운전대를 잡고서 스스로를 구해낸다.
또한 이 장면은 작중 한국 전쟁의 영웅을 연기한 왕년의 스타 '잭 홀든(숀 펜)'이 오토바이를 탄 채 그의 세계로 빠져들어갈 때, 알라나가 오토바이에서 뒤로 추락했던 장면과 정반대에 위치한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잭 홀든에게 알라나는 과거 파트너였던 그레이스의 대체재에 불과하다. 그래서 잭 홀든이라는 마초적인 영웅의 세계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을 수 없던 그녀는 오토바이 뒤로 추락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뒤로 추락했던 그녀가, 이제 오히려 후진을 통해 존 피터스와 잭 홀든이 상징하며 그녀가 편입되고자 했던 기존의 남성적 질서를 전복한다. 그러니 이 장면 직후 세상을 바꾸겠다는 시장 후보 조엘의 선거캠프에 알리나가 합류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넓게 보면 미국 사회의 그림자를 들춰내는 앤더슨의 장기가 발휘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에 더해 <리코리쉬 피자>의 메시지는 여성이라는 카테고리에만 머무르지 않고 보다 많은 이들을 향해 뻗어 나간다. 알라나가 보여주는 주도성과 저항력은 개리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개리는 성공을 갈망하는 알라나만큼이나 사회 속으로 편입되고 싶어 하는 인물이다. 그는 설령 알라나와의 관계가 뒤틀린다 해도 배우로서 성공을 꿈꾸고, 또 물침대 상점에 이어 핀볼 게임장을 오픈하면서 물질적 성공을 이루고자 한다. 이렇게 주류 질서에 편입되고자 하는 개리의 열망은 그보다 모든 면에서 사회적 위치의 우위를 점하는 남성인 존 피터스에게 조롱당하자 분노하고 또 복수하는 장면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영화 말미에 그는 막 오픈한 게임장을 뒤로한 채 알라나를 향해 달려간다. 마치 알라나가 기존 질서에 순응하며 동성 연인을 지키지 못하는 조엘과 달리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개리에게 달려가듯이. 이렇게 개리도 주류 질서로 편입되고자 하던 과거와 달리, 자신을 감싸고 있던 힘과 권위를 주도적으로 뒤집는다. 사회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본인이 원하는 것을 깨닫고 이루어낸다. 영화는 이러한 커플의 탄생과 변화를 세 번의 달리기를 통해 보여준다. 알라나는 경찰서에 갇힌 개리를 꺼내 주기 위해, 개리는 오토바이에서 떨어진 알라나를 향해 달린다. 이는 두 주인공의 달리기가 스크린 상에서 서로 다른 방향이고, 곤경에 처한 사람도 정반대라는 점에서 둘 사이의 위계 변화가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순간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에 둘은 그들의 역학관계에서 마침내 평형점을 찾았다는 듯 같은 방향을 보면서 전력으로 질주한다. 이렇게 역학 관계의 변화로 사랑과 연애를 정의하면서 앤더슨은 사랑을 매개로 보다 넓은 사회상까지도 통찰해낸다.
<리코리쉬 피자>는 폴 토마스 앤더슨의 작품 중 유독 대중성을 염두에 둔 영화임이 분명해 보인다. 소재 자체가 많은 이들을 시간 여행에 빠트리고 공감을 이끌어내기에 유리한 소재이자 장르인 하이틴 로맨틱 코미디를 선택한 것부터가 그렇다. 비록 스토리라인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는 듯 보이나, 공간과 음악을 활용해 석유 파동을 비롯한 히피 문화, 반전 운동 등으로 가득했던 70년대의 정취를 스크린에 가득 풀어놓은 것도 큰 몫을 맡는다. 그러나 이러한 겉모습에 현혹되서는 안 된다. 익숙하고 친숙한 사랑 이야기를 냉철하게 들여다보고 낱낱이 파헤칠 때 비로소 앤더슨의 로맨스가 품고 있는 이중, 삼중의 드라마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사랑을 힘과 관계로 이해할 때만 느낄 수 있는 전복의 짜릿함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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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건 나를 위한, 아니 우리 모두를 위한 응원가
하나의 문학 작품을 읽는 것 같은 드라마가 화제가 되고 있다. 사실 이 드라마의 시청률은 잘 나오고 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하나의 잘 만들어진, 매 화의 대사 하나하나가 공들여 쓰여졌다는 게 느껴지는 드라마 정말 오랜간만에 찾았다. 어느 대사 하나 예상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 드라마가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것 같은데, 최소한 나에게는 너무나 취향이다. 그래서 난 이 드라마가 너무 어둡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함께 덕질하자고 꼬셔보려고 한다. 과연 내 구구절절한 글로 그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1. 폐부를 찌르는 대사의 향연
이 드라마의 장르를 나눠본다면, 휴먼 80/로맨스 20 정도가 될 것 같다. 로맨스에 대해 이야기하기 이전에 이 드라마는 현대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관계에 대한 고찰이 너무 잘 느껴지는 드라마이다. 관계가 가진 성질은 다양해서 가족과의 관계가 될 수도 있고, 연인과의 관계가 될 수도 있고, 동료와의 관계가 될 수도 있다. 연인 간의 관계의 실패로, 질투와 시기가 난무하는 동료와의 관계 등으로 관계 자체에서 염증을 느끼는 두 남녀, 구씨와 미정은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에 대한 '추앙"을 시작한다. 다른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를 새로운 사람에게서 치유받고자 하기 위함일까. 결국 인간은 사람에게 질리면서도 사람 간의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걸까. 대사 하나하나에서 내 인생을 돌아볼만한 묵직한 대사들이 많았다.
“싫을 때는 눈 앞에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도 싫어. 말을 걸면 더 싫고. 쓸데없는 말을 들어줘야 하고 나도 쓸데없는 말을 해 내야 되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중노동이야.”
“나도 그런데. 하루 24시간 중에 괜찮은 시간은 한두시간 되나? 나머지는 다 견디는 시간. 하는 일 없이 지쳐. 그래도 소몰이하듯이 어렵게 어렵게 나를 끌고 가요.”이 대사가 내가 이 드라마를 계속 보게 만든 폐부를 찌르는 대사였다. 처음 만나서 어색함에 아무말이나 해야 할 때, 상대가 하는 말도 아무말이구나 싶을 때, 이 어색한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을 때 오는 현타. 그리고 그 상황이 종료되고, 한창 말 잘하고 나와서 '내가 그런 말을 하고 나왔지. 쓸데없는 말이었는데."하는 자책에서 비롯된 두 번째 현타. 구씨의 대사에서 이런 내 모습이 투영되어 깊이 공감했다.
그리고 요 근래 내 자신을 왜 좋아할 수 없을까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있어서 이런 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에 대한 대사에 공감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남이 하는 이야기가 가끔 지칠 때가 있다. 그들의 일방적인 이야기에 지치면, 그 지친 감정은 곧 짜증으로 치환된다. 그리고 나도 그렇게 일방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싫어하면서도 내가 힘든 일이 있을 때, 누군가에게 주절주절 이야기할 때가 있다. 그리곤 후회한다. 그 사람은 이 이야기가 재미가 없었을 텐데, 내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그저 들어준 것은 아닐까. 그래서 또다시 미안해진다. 내 이기적인 마음을 비판하며, 또다시 나는 나를 미워하게 된다.
나도 그들과 똑같은 사람이었으면서 남을 비판했을 때, 내가 나에게 느끼는 위선적 혐오감, 나는 오늘도 마음으로 삭히지 못하고, 또 감정을 표출해내고야 말았다는 후회 그리고 내 말을 들어주느라 지쳤을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 하나의 인간 관계를 잃어버린 것 같다는 불안함. 그렇게 쿨한 척 하지만 한없이 소심한 내 자신에 대한 끝없는 자책. 이 생각의 잔재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나에 대한 자책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인간을 싫어하고, 인간에게서 내 자신을 휘둘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도 인간들과의 관계를 끊임없이 신경쓰는 나 자신에 대한 비판이 결국 나에 대한 혐오로까지 이어지는 것 같다.
나는 인간을 상대하는 게 힘들어서 인생은 혼자 살면 되는 거 아닌가 싶다가도 결국 온전히 혼자서만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결국 완전히 인간과의 관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그 공허함을 이 드라마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대사를 통해 '맞아, 나도 그런 비슷한 느낌 받았었어'하며 동질감을 느끼고, 좀 덜 외로울 수 있었던 것 같다.
2. 왜 하필 추앙일까.
계속 궁금했었다. 왜 작가는 연애하자는 말을 추앙이라고 바꾸어 표현했던 것일까. 처음에 이 대사를 들었을 때, 읭?하던 느낌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 때의 그 의문스러운 느낌 때문에 많은 뇌피셜 해석들을 찾아봤었는데, 기독교적인 세계관이 들어갔다고 해석하신 분들이 꽤나 많았었다. 그 해석에 대해 많이 동감하는 편이다.
하지만 나는 그냥 세계관이고 뭐고 그냥 단순하게 해석해서 누군가와 연애를 할 때, 상대의 반응에 따라 내 기분이 왔다갔다 하는 것 자체에 염증을 느끼고, 내가 좋으면 그냥 좋다고 표현할 거라는 대사에서 이 추앙은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미정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점이 신선하고, 미정이라는 캐릭터의 걸크는 여기에 핵심 포인트가 있다고 생각했다.
자꾸 답을 기다리게 되는 마음은 어쩔 수 없지만, 두고 봐라. 나도 이제 톡 안 한다. 그런 보복은 안 해요. 남자랑 사귀면서 조용한 응징과 보복 얼마나 많이 했게요. 당신의 애정도를 재지 않아도 돼서 너무 좋아요. 그냥 추앙만 하면 되니까.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사람들의 반응에 따라 이리저리 기분이 좌지우지되는 거 말고, 그냥 나는 그 때 상황에 맞추어 내가 하고 싶은 감정적 표현을 하고 사는 것만으로도 나의 자존감은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을 미정이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술에 절어사는 상대(구씨)를 바꾸려 들지 않고, 그저 좋아한다는 표현, 그를 향한 지속적인 관심을 표현하는 것으로 미정은 자기 자신을 위한 사랑을 시작한다는 개념이 너무 신박하다고 느껴졌고, 그런 담백하지만 묵직한 표현을 통해 구씨가 미정에게 스며드는 과정이 너무도 자연스러우면서 보기가 불편하지 않았다. 세상에 존재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싫어도, 나를 제대로 이해하는 한 명의 사람만 있다면 세상은 살 만해진다는 미정의 말처럼 나를 사랑하는 사람 간의 섹슈얼한 관계가 아니라 나를 응원하는 사람의 존재 덕분에 나는 오늘도 버틴다는 메시지가 너무 가슴 따뜻해진다.
이런 드라마를 보면,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자극적인 로맨스는 참 많지만 내 영혼을 보듬어주고, 내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 하나 정도는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니다. 나의 경우, 그런 사람을 찾으려면, 나부터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사랑해보는 연습부터 해봐야 겠다. 나는 그런 경험이 전무하기에.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다는 생각은 사치라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 생각은 유효하지만 나를 이해하고, 나를 구원할 한 사람은 필요하다. 지금의 나의 모습은 너무나 침체되어 있음을 느끼기에.
요근래 참 나에 대한 고찰도 많이 하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 나는 어떤 인간인가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조금 생각을 단순화시키려고 한다. 그냥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눈치 보지 말고 해야겠다. 남을 신경쓰지 않는 척했던 과거를 지나 정말 나만을 위한 삶을 살아내고 싶다.
3. 삶이 힘든 그대에게
지금 이 시각, 드라마는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아무래도 열린 결말인 듯하다. 무엇보다도 하수구에 떨어질 뻔한 위기의 동전을 구하고, 편의점에서 샀던 술을 노숙자에게 준 걸로 봐서 지옥으로 떨어지기 직전의 자신을 스스로 구원하고, 새로운 챕터를 열고 있는 것이다. 그가 화류계를 떠나고, 정말 술을 끊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술을 끊는 첫 스텝은 밟은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 그렇게 구씨는 조금씩 미정의 세계에 가까워질 수 있겠지. 나는 그렇게 믿을 거다. 아무래도 작가님은 각자가 원하는 결말을 알아서 상상하라는 의도로 그런 결말을 내신 것 같으니, 나는 내가 원하는 결말을 내련다.
삶이 힘들고, 연애가 지치고, 친구 관계도 염증이 날 때, 미정의 상황, 기정의 상황, 창희의 상황에 감정 이입하기 보다는 그들이 하는 말에 조금만 귀를 기울여보시기를 추천한다. 그들이 하는 말을 통해 내 안에서 답을 내지 못한 답답함을 뚫어내는 잔잔한 위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그랬다. 그렇게 해방일지에 스며들며, 이들의 말에 공감하며, 이들의 캐릭터가 대단히 성공하지는 못해도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기를 응원하게 된다. 어쩌면 나는 이 드라마 속 모든 캐릭터들을 "추앙"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을 응원하면서 나도 누군가에게 무조건적인 응원, "추앙"을 받고 싶다. 그렇게 여러분들도 세상의 단 한 명의 사람에게 "추앙"받는 삶이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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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주를 넘은 우정
2024년 9월 7일 토요일 20시에 은평 롯데몰 9층 스카이필드 야외 풋살장에서 잔디극장 야외 상영회가 개최되었다. 제12회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에서 선착순 무료로 진행한 상영회였다. 영화는 <숀더쉽 더 무비: 꼬마 외계인 룰라!>(2020)이 상영되었다. 여름의 끝자락을 부여잡은 바람이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품으며 날아가는 밤이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IMDB
<숀더쉽 더 무비: 꼬마 외계인 룰라!>는 아드먼 애니메이션 제작사의 최신작이자 ‘숀더쉽’ 두 번째 시리즈 영화다. 점토를 사용하여 스톱 플레이 모션을 활용하는 연출 방식은 아드먼 애니메이션의 아이덴티티다. 그러나 이번 작품은 우주를 넘나드는 내용이므로 점토 방식을 넘어 UFO나 로봇의 다양한 소재를 활용한다. SF 소재 활용뿐만 아니라 작품 전반에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 <E.T>(1982), <월-E>(2008), <아마겟돈>(1998) 등 SF 영화의 오마주를 영화에 담아낸다. 특히,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OST와 함께 표현하는 오마주 연출 방식과 <월-E>의 오마주 캐릭터는 직관적이다. SF영화 오마주를 통해 제작자는 고전 영화의 존경심을 전하고, 어른들에게 친숙한 장면을 전하며, 아이들에게 재미를 전한다.
소재의 활용으로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영화는 캐릭터의 시너지를 더한다. 꼬마 외계인 룰라의 신비스러운 능력과 귀여운 외모는 ‘숀더쉽’ 시리즈에 어울리는 캐릭터로 소화된다. 초반부, 숀과 친구들이 벌이는 엉뚱한 장난과 사고들이 무색하게 룰라의 사고 역시 만만치 않다. 숀이 피곤한 안색을 보일 정도로 벌이는 룰라의 장난과 ‘에이전트 레드’ 일당의 추적을 피하며 UFO를 찾기 위한 여정에서 둘은 우정을 쌓아간다. 한편, 비처의 우정은 특별하다. 숀과 친구들의 장난을 제어하는 양치기 개로 숀과 대립 관계를 이룬다. 하지만, 룰라를 함께 집으로 데려가 주겠다는 공통된 목표로 대립자에서 협력자로 변하는 과정은 관객의 감정도 변한다. 숀과 비처는 피자를 통해 룰라를 만난다. 룰라를 무사히 집으로 바래다주는 결말처럼 피자로 처음 연을 닿은 이들의 둥근 우정은 달처럼 아름답다.
※본 영화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 초청으로 참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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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리셰란 안개 속에 갇힌 재난 영화
안개 속 추돌 사고, 무너지는 다리 위에 갇힌 이들의 필사적 탈출. <탈출: 프로젝트 사일런스>는 친숙한 인천공항대교가 무너진다는 설정과 그 안에서 생과 사를 넘나드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재난 영화의 장르적 재미를 전하겠다는 강한 포부가 느껴진다. 하지만 이 의도도 잠시, 클리셰란 안개 속에 갇힌 영화는 성공한 재난영화가 걸어왔던 길에 켜진 지시등을 조용히 밟으며, 무난한 탈출을 감행한다.
짙은 안개로 연쇄추돌사고가 일어난 인천공항대교는 아수라장이다. 불길이 일어나고 유독가스가 퍼지는 등 상황은 더 악화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 다리를 건너던 군사용 실험견들도 풀려난다. 일명 ‘프로젝트 사일런스’라 불리는 이 실험견들은 사고 이후 제어가 되지 않고, 책임연구원 양 박사(김희원)는 위험을 감지한다. 이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학 가는 딸 경민(김수안)을 데려다주기 위해 다리를 건너던 안보실 행정관 정원(이선균)은 물론, 프로 골퍼 유라(박주현)와 매니저 미란(박희본), 노 부부 병학(문성근), 예수정(순옥), 그리고 사고 소식 후 부리나케 달려온 레커차 기사 조박(주지훈) 등은 위험을 무릅쓰고 다리 탈출을 감행한다.
<탈출: 프로젝트 사일런스>의 주요 무대인 인천공항대교가 재난 현장이 되는 모습은 현실적이다. 해외여행을 갈 때 매번 지나다니는 다리가 안개로 인해 한순간 지옥으로 변하는 모습은 허구라는 걸 알고 보다 공포감을 자아낸다. JTBC <한문철의 블랙박스 리뷰>만 봐도 안개로 인해 가시거리가 저하되는 상황에서 운전하기 어렵다는 걸 알고 있는 이들에게 극 중 안개와 추돌사고의 공포는 피부로 와 닿는다.
하지만 매력은 그뿐이다. 멋지게 문을 연 영화는 이후부터 장점이 사라진다. 재난 영화에서 숱하게 봐왔던 클리셰들이 남발되는데, 감독은 이를 버리지 않고 동력 삼아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낡고 뻔한 서사에다 개연성까지 결여되니 이야기의 몰입도는 떨어지기 마련. 여기에 자신의 야욕 때문에 국민의 안전은 나 몰라라 하는 정치인의 등장과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은 전개에 악영향을 미친다.인물들도 예외는 아니다. 정무적으로 행동하는 아빠와 정반대로 인간 및 동물애를 발휘하는 딸의 관계와 갈등, 그리고 봉합은 익히 우리가 예상하는대로 흘러간다. 특히 국가가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지 않았을 때 생기는 피해를 직접 경험한 정원의 180도 달라진 모습, 그리고 마지막 결단은 너무나 뻔하게 흘러간다. 이로 인해 <터널> <부산행> 등 재난 영화에서 전해졌던 소중한 삶의 울림은 적게 다가온다.
그 외의 인물들도 극의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기능적으로 활용된다. 레커차 기사는 극의 분위기 메이커를 담당하고, 양 박사는 자신이 진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빌런의 역할에 충실하다. 프로 골퍼 유라와 미란은 탈출을 위한 조력자인 동시에 고구마 행동을, 노부부는 다른 이들의 생을 위한 희생자 역할을 충실히 이행할 뿐이다. 재난 상황에서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선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모습보다는 극을 위해 존재하는 스테레오 타입의 인물로만 보인다. 현실에 착 달라붙지 않고 붕 뜬 느낌의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마지막 탈출의 긴장감과 감동은 반감된다. 반대로 실험견에게 전사를 부여하며, 이 개들이 사람을 공격하는지에 대해 나오는데, 감정적으로는 인간보다 개에게 더 끌린다. 물론, 이들의 말로도 허망하지만 말이다.
이런 단점을 차지하면 킬링타임용으로는 무난한 작품이다. 빈약한 서서와 인물 설정보다는 완성도 높은 기술력으로 구현한 영상은 볼거리임은 틀림없다. 어쩌면 스크린보다 OTT 플랫폼에 더 적합해 보인다.사진제공: CJ ENM
평점: 2.0/ 5.0
한줄평: 클리셰란 안개 속에 갇힌 재난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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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우들의 앙상블로 이끄는 대환장 축제 한마당
“망진이랑 이거 하나만 하고 빠이 할 거야?”
개최 일주일 전 갑자기 정종 문화제에서 연산군 문화제로 바뀐 망진의 지역 축제를 성공적으로, 그리고 무사히 끝마치려는 축제대행사 ‘질투는 나의 힘’ 대표 혜수와 어쩌다 팀원들이 된 그들의 고군분투를 그린다.
예고편│Trailer
영제: Extreme Festival│감독·각본: 김홍기
출연진: 김재화, 조민재, 박강섭, 장세림 외 多
장르: 코미디, 드라마│상영 시간: 94분
국가: 대한민국│등급: 12세 관람가
평점: 평론가 6.8
제작: 비리프, 실버라이닝 스튜디오│배급: 트윈플러스파트너스
개봉일: 2023년 6월 7일
“난장판 축제 현장으로 여러분을 모십니다”
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지역 축제를 맡아 어떻게든 현생을 이어가려 고군분투하는 대행사 대표 혜수의 하드캐리는 눈물겹다. 함께할 직원 하나 없는 회사의 공동대표이자 베스트셀러 한 권으로 연명하는 작가인 애인 상민은 능청스러운 한량짓에 여념이 없다. 퇴직한 직원 래오를 알바로 데려오는가 하면, 설상가상으로 알바로 뽑은 처음 본 은채를 인턴으로 채용하는 대 환장할 짓까지 벌이고 초대가수는 사기를 당한다. 이 정도면 회사를 운영하겠다는 것인지, 망하게 하겠다는 건지 의심을 해도 이상하지 않지만 혜수에겐 다음 밴댕이젓 축제의 칼날을 쥐고 있는 군수의 비위를 맞춰 어떻게든 잘 마무리해야 하는 궁극적이고 초단기적인 목표만이 있을 뿐이다.
‘익스트림 페스티벌’이라는 영화 제목 그대로 가상의 지역 문화축제를 진행하며 생기는 별의별 일들을 그린 한국 코미디 드라마였다. 망할 망을 뜻하는 건 아니겠지만 지역 이름부터 심상치 않은 망진군의 아주 소규모 축제를 진행하는 대행사 ‘질투는 나의 힘’ 대표 혜수를 통해 고달픈 K-직장인과 자영업의 현실도 관객의 뼈를 때린다. 등장인물 개개인이 가진 작은 문제부터 지방행정의 탁상공론식 실태는 물론, 마지막엔 소규모 연극집단이 가지는 예술적 고뇌까지 수렴한다.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의 극본에 참여했던 김홍기 감독인 만큼 축제를 진행함에 있어 현실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상황들을 채워나가며 젊은 감독의 패기 넘치는 풍자와 메시지를 던진다. 물론, 작은 에피소드들이 계속 연계되며 다소 산만할 수도 있지만, 축제라는 큰 틀안에서 소소하게 웃고 즐길 수 있는 시간임에는 틀림이 없다.
어떤 역할을 망론하고 대체 불가한 존재감을 내뿜는 김재화는 인턴보다 더 눈물 나는 대표 혜수를 미친듯한 원맨쇼로 채우고, 사고뭉치 월급루팡 이사 상민을 맡은 조민재는 미워도 미워할 수 없는 잔망스러움을 선보인다. 그나마 멀쩡해 보였지만 예상치 못한 반전 발언으로 막장드라마를 만들어버린 래오의 박강섭은 강렬한 한방을 남기고, 인 서울을 꿈꾸며 지른 인턴 지원 생활이 물거품 된 은채의 장세림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통통 튀는 매력을 보여준다. 더불어 기자처럼, 간호사처럼, 불륜처럼, 뭐 하는 인물인지 종잡을 수 없는 의문의 커플도 매 장면마다 등장해 한마디씩 툭툭 던지며 리프레시는 물론, 소소한 웃음을 전한다. 이처럼 영화 익스트림 페스티벌은 진짜 지역축제의 하루를 진행하고 참여하며 체험하는 여러 인물들을 교차시키면서 현실 공감적 상황을 이끌어 관객의 몰입을 유도한다. ‘중요한 건 꺾여도 그냥 하는 마음’이라는 그들의 말이 씁쓸하지만 유쾌하게 다가오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한 줄 평 : 정신없지만 공감가는 재기 발랄한 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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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씨너스> 속 뱀파이어화, 그리고 뱀파이어
<씨너스(Sinners)>(2025, 라이언 쿠글러)
* 작품의 장면과 결말 포함
<씨너스>의 두 번째 오프닝은 위장이다. 먼저 영화는 (아마도 애니의) 스토리텔링으로 열린다. 생과 사의 경계를 허물어 혼을 소환할 능력이 있는, 또한 악마도 불러들이는/매혹하는attracts 목소리에 관한 이야기. 이어 1932년 미국 남부라는 배경을 알리는 간결한 문구가 화면에 뜨고, 앞뒤 설명 없는 상황이 뒤따른다. 지옥을 뚫고 달려온 듯한 몰골의 소년이 손잡이만 남은 기타를 들고 교회로 들어선다. 목사는 그를 알아본다. 대립하듯 마주보는 두 사람을 번갈아 조명하는 숏들 사이에 이질적인 상이 끼어든다. 관람을 마친 후의 관객은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게 되지만, 이 시점에서는 판별할 수 없다. 영화가 그 미지의 존재를 소년과 포개고 있다고 추측하게 될 수도 있다. 그동안 우리는 할리우드 영화에서 성직자가 십자가를 들고 기도문을 외우면 괴로워하는 악마의 상을 수없이 봐 왔다. 첫 시퀀스에서 ‘그 목소리The voice를 지닌 자가 악마를 불러들일 것’이라는 정보를 얻었으므로, 관객은 기타를 쥔 소년이 위험한 존재라고 짐작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후 전개를 따라가며 전자의 일부가 다시 이해되고, 후자는 완전히 뒤집힌다. 영화 후반부에 이 교회 씬이 재등장하면 관객은 아주 다른 것을 읽어내게 된다.
사실 라이언 쿠글러 감독의 세계를 대강이라도 안다면, 악마에 씌인 블루스 뮤지션이 십자가에 의해 구원받는 서사를 연상하도록 관객을 유도하는 제스처에 다른 속셈이 있음을 어렵지 않게 예상했을 수도 있겠다. 이 위장은 거기 속아넘어갔건 그 이면을 예상했건 효과적으로 작용한다. 미리 적으면, 악마에 맞서는 힘은 부두교와 블루스- 블랙 헤리티지에서 나온다. 러닝타임을 한참 건너뛰어 새미가 뱀파이어 수장 레믹에게 붙들리는 클라이맥스 씬을 보자. 프리쳐 보이인 새미가 기도문을 외우자, 레믹이 웃으며 그것을 따라 외기 시작하더니 뱀파이어들 모두가 합창한다. 이는 영화가 위장의 해체를 완료하는 장면이다.
환상을 퍼트리는 뱀파이어와 감염의 매개 - 메리와 그레이스
다시 오프닝으로 돌아가, 목사가 소년에게 ‘기타를 내려놓고 악을 버리라’고 강력히 애원하는 와중 영화는 하루 전으로 시간을 되돌린다. 이 다음부터 묘사되는 것은 스모크와 스택이 새미를 데리고 주점 오픈 준비를 하는 과정이다. 초점은 준비 단계 자체보다는 인물 소개에 있다. 오가는 대화와 행위로 과거사와 관계성이 드러난다. 보, 그레이스, 슬림, 메리, 콘브레드, 애니가 등장한 후, 다음 장으로 넘어가는 신호처럼 뱀파이어 악마 레믹은 충격음과 함께 화면에 뚝 떨어진다. 그가 퍼트리는 뱀파이어화는 좀비화를 수반한다. 물린 자들은 피를 필요로 하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을 감염시키기를 갈망하게 되며, 자아를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집단적으로 사고하고 움직이게 된다. 뱀파이어화와 함께 퍼지는 것은 “서로에게 무조건 친절한”, 피부색을 ‘인식하지 않는’ 거대한 연합체에 대한 환상이다. 이는 현재에도 All Lives Matter나 Equalism 같은 이름으로 존재하는, 차이를 뭉뚱그리고 차별을 덮는 ‘휴머니즘’적 태도들을 조롱하는 은유가 아닐까.
영화가 쌓아두었던 각 인물의 특징은 감염의 상대적 취약성, 그리고 누가 어떻게 감염되고 감염시키는가와 관련이 있다. 이를테면 동료에게 행사된 혐오성 법폭력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슬림은 스스로를 희생해 타인을 지킨다. 뱀파이어에 관한 지식과 영적 능력이 있어 전략적 구심점이 되는 부두교 주술사 애니는 감염되면 자신을 죽여달라고 스모크에게 당부한다. 뛰어난 블루스 싱어/댄서인 펄린은 마늘을 먹기는 싫어했으나 결정적인 순간 새미를 구한다. 더 취약하다/덜 취약하다는 당연히 악에 가깝다/선에 가깝다의 의미가 아니다. 이는 상대적이고 어느 정도 우연한 것이며, 경우에 따라 인물이 실제로 그러한가보다 영화가 인물에게 부여한 상징성과 더 관련이 깊어지기도 한다.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 매개 역할로 배정된 메리와 그레이스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뱀파이어인 상태로 처음 건물 안에 들어오는 자가 백인의 얼굴을 한 메리라는 점, 뱀파이어들을 건물 안으로 들이는 대사를 뱉는 자가 인종분리정책의 직접적 대상은 아닌 그레이스라는 점은 의도적인 설정으로 보인다.
기차역 대화의 말미에 메리는 ‘지옥에나 가라’고 저주했고, 스택은 멀어져가는 메리를 향해 ‘네 자리도 마련해 둘게’라고 받아친 후 ‘내 바로 옆에’라고 속삭이듯 덧붙였다. 상대방에게 일부러 닿지 않도록 전달된 이 대사는 스택의 진심을 드러내는 와중 일종의 느슨한 복선 역할 또한 한다. 서로 사랑하는 매리와 스택의 관계는 복잡하다. 메리의 조상 중에는 흑인이 있으므로 당시의 원-드롭 룰에 따르면 그는 백인이 아니다. 그러나 인종은 (레이시스트들이 주장하듯)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 계획적으로 구성된 것이다. 후에 우리는 메리가 부유한 백인 남성과 결혼하도록 스택이 주선했음을 알게 된다. 여기엔 (특히 부유한 백인)여성이 남성의 울타리 안에 포함되는 역학과 흑인이 여전히 명백히 차별받는 노예‘해방’ 이후의 역학이 있다. 후자를 피부에 샅샅이 감각하는 스택은 메리를 인격체로 존중함에도 전자의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전자에서 빠져나오려 하는 메리의 지속적인 주장은 후자를 염두에 두지 않는 것처럼 들린다. 이 관계는 남성과 여성, 흑인과 백인이 아닌 1930년대 미국 남부의 흑인 남성과 백인 여성의 관계다. (가부장제는 영화가 중점적으로 다루는 부분은 아니니)이들의 사랑은 인종을 뛰어넘는다고 볼 수도 있지만, 실질적인 관계를 맺을 때는 인종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
메리는 스택으로부터 주점이 적자라는 이야기를 듣고, 도움이 되고자 레믹 일행과 교류를 시도한 결과 감염된다. 영화는 메리를 영리하고 민첩하게 묘사함으로써 그의 행동이 부주의했다고 평가할 여지를 차단한다. 메리가 매개로 선택된 것은 그가 지닐 수밖에 없는 특권 때문이다. 백인의 얼굴로 흑인들의 공간에 드나들며 “가족”으로 환영받는 메리는 분리정책에서 자유로운 개인으로 보이기도 한다. 허나 한편으로 양쪽을 오가는 것은 그가 백인이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세 백인의 선의를 믿고 밖으로 나간 메리는 ‘모두의 화합’이라는 사상에 상대적으로 취약하다. 스택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길 바라는, 백인이 아닌 인류human being로 인식되길 바라는 메리는 틀리지 않았다. 다만 영화는 메리의 감염을 통해, 그 바람이 시대 맥락과 사회적 상황을 무시하고 차별을 무화하는 막연한 관념, 심지어는 종교로 변질되는 모습을 은유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뱀파이어화된 메리는 별안간 그 복잡한 과거사가 녹아내리기라도 한 듯 스택을 유혹한다. 스택은 메리를 거부한 상태에서 거기 넘어간다. 스택과 뱀파이어-메리의 베드신은 애니와 스모크, 새미와 펄린의 것과 달리 부자연스럽고 이상하다. 침을 줄줄 흘리는 메리를 보고, 스택은 ‘그거 침이냐’고 묻는다. 메리는 ‘좀 줄까?’라고 묻고, 스택은 달라고 한다. 이후 메리는 스택의 입 안에 침을 뱉는다. 이는 단지 페티시가 아니다. 이미 메리가 아닌 메리의/백인의 몸에서 떨어져나온 것을 스택이 아래에서 받아먹는 일련의 행위에, 위계와 취약성에 대한 은유가 있지는 않은가? 이들의 사랑에 애초에 위계와 동경이 내포해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이 순간-감염되었고 감염시키는 백인과 감염되는 흑인 사이의 역학을 말하는 것이다. 영화가 1992년에 (레믹과의 끈은 끊어지고 뱀파이어화된 개별 신체만 남은, 햇빛은 보지 못해도 함께 펍에 입장할 수 있게 된 연인으로)스택과 메리를 재등장시킨 까닭은 어쩌면 이들이 사랑을 나누는 행위를 오염시킨 것에 대한 사과의 표현은 아니었을까.
그레이스의 경우는 어떤가, 그는 영화가 드리운 상징성 때문에 매개로 선택된다. 길을 사이에 두고 흑인 전용과 백인 전용 마켓을 운영하는 보와 그레이스 차우 부부 역시 양쪽을 오갈 수 있다. 영화는 두 사람의 자녀인 리사가 그레이스를 부르기 위해 흑인 전용 마켓에서 백인 전용 마켓으로 이동하는 모습을 하나의 숏으로 연결해 촬영하며 이 점을 강조한다. 동시에 메리와 그들은 분명히 다르다. 아시안인 그들은 백인들의 공간에서 이를테면 ‘안 보이는’ 존재가 된다. 스모크가 총을 쏜 직후 백인 전용 마켓의 손님들은 카운터에 있는 그레이스를 ‘보지 않은’ 채 “유색인종”을 폄하하는 발언을 주고받는다. 반면 흑인 커뮤니티 내에서 이 부부는 메리처럼 손님으로서의 가족보단 함께 일하는 동료로서의 가족으로 간주된다. 새미의 노래로 과거와 미래의 예술혼들이 소환되는 ‘I Lied to You’ 씬에서 영화는 중국 전통 극예술 재현을 잊지 않는다.
한편으로 영화는 보와 그레이스의 캐릭터에 미묘한 차이를 심는다. 첫 등장에서 보는 흑인 전용 마켓에서 일하고 있었고, 그레이스는 백인 전용 마켓에서 흰 앞치마를 입고 일하고 있었다. 새미의 아버지를 비롯해 교회에서 예배를 보던 이들이 전부 눈이 시릴 정도로 흰 복장을 하고 있었음을 떠올려보자, <씨너스>에서 새하얀 옷은 단지 옷이 아니다. 스모크를 허물없이 반기는 보와 달리 그레이스는 총격 사건을 먼저 언급한다. 주크 조인트에서 스택이 메리에게 물렸을 때도, 보는 도우려 하고 그레이스는 선을 긋는다. 결정적으로, 그레이스는 건물의 봉인을 해제해 뱀파이어들을 안으로 들인다. 사실 부부의 반응이 다른 까닭은 성격의 차이나 자녀를 주로 누가 보살펴왔는가의 문제로 짐작된다. 뱀파이어들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면 마을로 향했을 수도 있으므로 그레이스의 걱정은 타당하다고도 생각한다. 허나 슬림이나 메리, 애니에 비해 얕게 다루어지는 그레이스가 ‘실제로 어떠한가’는 내 생각에 여기서 별로 중요하지 않다. 영화가 보에 비해 그레이스를 조금 더 ‘백인적인 것’에 가까운 인물로 ‘정했기 때문에’, 그의 대사가 뱀파이어들을 안으로 들이는 것이다. 그레이스가 정말로 백인성을 추구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상징성을 걸치고 있다는 뜻이다. 제 의지와 상관없이 감염을 품고 들어오는 메리의 경우 인물의 특권적 특성이 감염이라는 은유로 발현된다면, 제 의지로 뱀파이어들을 들이는 그레이스의 경우 영화가 부여한 상징성이 실제로는 그것과 상관없는 인물의 행동과 큰 그림에서 연결되는 것이다. 메리와 스택에게 불멸의 로맨스가 선사되었다면 그레이스에게는 이른 죽음이 배정된다. 그는 문이 열리자마자 화염병을 던지고, 한 뱀파이어의 심장에 말뚝을 찔러넣은 채 함께 활활 타오른다. (그 죽음은 자의로 보이기도 한다.) 그레이스를 뱀파이어화하지 않는 것은 관객의 미움을 받을 것이 분명한 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을 수 있다.
신들린, 그리고 한이 서린 음악들 - 레믹과 새미(들)
<씨너스>는 델타 곳곳에 산재해 있는 인물들을 따라가며 다른 공간을 번갈아 보여주는 한편 시간선은 분리하지 않는다. 인물의 과거 회상을 시각적으로 재현해 관객에게 공유하는 대신, 인물이 자신의 이야기를 발화해 주위 인물들과 공유하게 한다. 스토리텔링이 영화 안 청자에게 들리고 울려퍼지는 것이 <씨너스>에선 중요하다. 스택, 새미와 차를 타고 가던 중 슬림은 아직도 노역을 살고 있는 동료를 마주친다. 그가 겪은 폭력에 관해 슬림이 털어놓는 동안 화면에는 청각적 재현이 배경 사운드로 깔린다. 슬림의 대사와 그가 떠올리는 과거의 소리가 겹치며 재생되는 것이다. 과거의 소리는 슬림과 관객에게만 들리는 것이겠으나, 슬림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스택과 새미도 어쩌면 그것을 ‘듣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두 가지 사운드는 슬림의 신음으로 모이고, 그것은 싱잉으로 이어진다. 애초에 그것들은 블루스 ‘안에’ 있다고 영화는 이야기하려는 듯하다. 새미가 주크 조인트에서 아버지를 위해 쓴 곡을 부르는 것 또한 일종의 스토리텔링, 이 곡은 과거와 미래의 예술혼을 불러낼 뿐 아니라 그곳의 사람들이 한데 모여 각자의 모양대로 춤추게 한다. 뱀파이어를 매혹하는 블루스는 후에 그들에게 맞서는 무기가 된다.
블루스를 비롯한 블랙 헤리티지 뮤직들 말고도 영화에는 또다른 음악, 뱀파이어들이 합창하는 포크송이 등장한다. 이는 영화가 오프닝에 소개한 미디엄의 기원 중 하나이며 블루스와도 관련이 있는 아일랜드 포크다. 이와 더불어 영화가 숨겨둔 결이 드러난다. 레믹은 단지 미국의 백인이 아닌 상당히 나이든 아일랜드인 뱀파이어다. 영국의 식민지배를 기억하고 미국 내 차별을 겪었을, ‘터전을 빼앗긴’ 적이 있음을 언급하는 레믹은 1932년 델타에서 오히려 흑인들, 특히 자신과 같은 음악가인 새미에게 공감한다.(라이언 쿠글러 감독은 레믹이 “그가 도달한 시점에 이 장소에 있던 인종적 정의가 존재하기 이전 시대를 살아온 자”라고 말한다.[Indiewire]) 그가 처음 등장해 조안과 버트에게 애원하는 씬으로 돌아가보자. 집 안쪽에 있는 KKK단 복장이 흔들리는 시선으로 잡히는 숏이 있는데, 이는 아마도 레믹의 시점숏이다. 그가 늘어놓는 이야기는 델타의 동료가 덮어쓴 누명과 유사한 인종차별적 망상 서사다. 다만 대상이 흑인에서 아메리카 선주민, 촉토 “인디언”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뒤이어 찾아온 선주민들은 정중하게 위험을 경고하지만, 문을 연 조안은 불안해하면서도 겨눈 총을 내리지 않는다. 레믹이 백인성을 꾸며내 KKK단 일원인 백인을 먼저 감염시키는 것은, 전략적 선택이면서 일종의 대리 복수 겸 조롱(제 ‘종’차별에 제가 넘어가도록 하는)이 아닐까.
주크 조인트 입구에서 가로막힌 레믹은 제 손등을 쓸며 대수롭지 않은 것을 이야기하듯 “이거?”라고 뱉고 실소한다. 처음엔 이 반응의 원인을 그는 스스로의 피부색을 인식하지 않아도 되는 백인이기 때문으로 읽었다. 허나 레믹의 헤리티지를 알고 나니 그에게 있어 그 ‘분리’는 ‘정말로 이상한 것’인 동시에 이해가능한 것이리란 판단이 든다. 스모크와 스택이 알 카포네 밑에서 일했었다는 점, 아일랜드 맥주와 이탈리아 와인을 훔쳐 주점을 꾸리고는 양쪽이 싸우도록 내버려두었다는 점을 기억해보자.(그저 범법적 비즈니스 전략일까, 혹시 어떤 복수의 일환일까.) 이와 더불어 20세기 미국에서 아일랜드 이민자들을 비롯한 가난한 유럽인들은 한때 백인으로 여겨지지 않았으나, 흑인을 노예화하는 시스템에 포섭되고 동참하며 ‘백인으로 통합되었다’는 것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소수적 인종/민족을 분리하거나 묶으며 착취 피라미드를 만드는 인종주의의 역학, ‘아닌 것을 골라냄으로써 제 1의 종을 형성하는’ 종차별. 레믹은 이 구조를 이해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지만, 이미 증오에 사로잡힌 그의 목적은 흑인들과 연대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내 고통을 다들 느끼라’, ‘내가 바라는 대로 움직이라’고 강제한다. 회유를 위한 위장처럼 들렸지만 레믹은 원하는 바를 순순히 밝혔다. KKK단, 그리고 사실상 KKK단을 허용하는 지배세력의 말살. ‘우리를 핍박한 저들’을 전부 해하려 한다는 면에서, 레믹은 <블랙팬서>의 에릭 킬몽거와 닮은 데가 있다. 이들은 ‘적들’을 파괴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수단화할 준비가 돼 있다. 레믹은 자신이 퍼트리는 ‘모두의 화합’ 사상을 스스로 믿지 않는다. 그가 상상하고 원하는 그림은 ‘I Lied to You’ 씬의 말미에 카메라를 등진 그가 바라보고 있는 상- 음악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모든 것이 불타는, 아무것도 살아남지 못하는 세상이다.
레믹이 새미를 붙들고 목을 대뜸 물어뜯는 대신 구구절절 과거사를 늘어놓는 까닭은, 새미야말로 그가 이해받고 싶었던 단 한 사람, 갈망하는 동시에 두려워하는 것을 지닌 이였기 때문일 수 있다. 결국 레믹은 새미의 음악적 상징-기타로 인해 치명상을 입고 스모크에게 심장을 뚫린다. 그가 증오에 사로잡힌 악마가 되면서도 지켜온 단 하나가 음악이었기에, 뱀파이어화된 채 오랫동안 살아온 그를 죽이는(해방시키는) 것 또한 음악이어야 했던 것이 아닐까. 새미는 레믹의 증오에도, ‘모두의 화합’ 사상과 닮은 종교에도 포섭되지 않고 기타 조각을 꼭 쥔 채 제 길을 떠난다. 60년 후 새미가 펄린의 이름을 걸고 공연하는 장면, 재회한 스택과 메리가 그의 음악에 감동받는 장면은 슬림, 펄린, 새미와 같은 이들이 전해 온 음악의 유산이 현재로 이어짐을 긍정한다. 분노에 매몰돼 너의 주변을 불태우지 말라, ‘모두의 화합’이라는 예쁘장한 환상에 빠져 인종주의의 역사와 현존하는 차별을 무화하지 말라, <씨너스>의 자발적 ‘죄인들’이 블루스로 전하는 말씀은 2025년에 너무나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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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자 하는 내용이 주로 흑인이 아닌 인물들에 관한 것이어서 스모크와 애니의 이야기가 빠졌는데, 연결… 보단 비교해야 할 지점이 있어 엔딩만 언급한다: 스모크의 복수는 레믹의 파괴와는 다르다. 영화가 플래시백으로 강조하듯 그 스스로 한 말을 지키는 행위이며, 극단적인 저항이다. 영화는 픽션이라는 전제 하에 이 반격을 긍정한다. 죽어가는 스모크 앞에 나타난 애니는 “연기smoke가 아이에게 닿는 게 싫다”는 언어 유희로 “스모크”의 정체성을 내세에 가져오지 말 것을 요구하면서도(그는 늘 스모크를 ‘일라이자’라는 본명으로 부른다), 그가 호그우드를 쏘는 행위는 암묵적으로 허용한다. 하나 더, 크리스천이 아닌 애니가 입은 흰색은 교회 신도들이 걸쳤던 흰색과는 다르다고 본다. 이승에서 바라보고 상상하는 막연한 구원과 순수, 믿음의 (어쩌면 백인성 추구의) 상징이 아닌, 사후에 다다른 낙원에서 얻은 평화를 반영하는 흰색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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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자가 원하는 걸 얻었다
자신이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지기 위해 어디까지, 얼마나 노력해야 할까? 자신의 노력으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지만, 그 과정은 무척 어렵다. 수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어려운 조건들을 만족시켜야 한다. 그러나 가장 쉽게 원하는 것을 얻는 방법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 높은 지위나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의 도움이 있다면 그 과정이 훨씬 수월해진다.
영화 <히든 페이스>는 세 인물이 각자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가진 자원을 바탕으로 기 싸움을 벌이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누군가는 사회적 지위를, 누군가는 상대방의 감정을, 또 다른 누군가는 자신의 쾌락을 위해 상대를 이용한다. 이들은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되고, 각자가 어떤 속셈을 가지고 있는지도 알게 되었을 때 그 얼굴에 나타나는 진실이 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보여주고 싶은 것 아닐까.
[첫번째 감정] 성진의 욕심
주인공 성진(송승헌)은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 자라난 인물이다. 그는 고생 끝에 지휘자의 직업을 얻었지만, 더 큰 성공을 향한 욕구가 여전히 강하다. 성진은 차분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딱딱하고 차가운 면이 있다. 아내인 수연(조여정)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서 감정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 특히 두드러진다. 아내의 살가운 접근에도 성진의 반응은 냉담하며, 그 미소조차도 어색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성진은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아내 수연의 집안이 가진 힘을 은근히 이용하려 한다. 이런 모습은 영화 전반에 걸쳐 은밀하게 드러나지만, 성진의 얄팍한 속내가 명확하게 드러나는 순간은 아내 수연이 사라지고 나서 곧바로 낯선 여자 미주(박지현)에게 빠져들 때이다. 수연을 향한 그의 마음이 얼마나 얇고 가벼운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욕심으로부터 비롯된 성진의 마음은 미주와의 관계를 통해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영화가 후반부로 갈수록 성진의 얄팍한 욕망이 모든 것을 삼켜버리고, 그는 현재의 위치에 안주하며 살아가게 된다. 그는 욕심이 많은 인물이지만, 사실 수연의 집안의 지원이 없이는 별다른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무력한 존재이기도 하다. 그의 무기력함은 영화의 후반부로 갈수록 더욱 더 짙어진다.
[두번째 감정] 미주의 사랑
미주는 어린 시절 수연을 만나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같은 성이라는 이유로 세상에 그 사랑을 공개할 수는 없었지만, 그녀는 오랜 세월 수연을 위해 헌신해왔다. 약한 노예와 주인의 관계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영화 중반 이후 미주의 행동들은 그녀의 사랑이 인정받지 못했을 때의 폭발적인 반응처럼 보인다. 마치 그 인정받지 못한 감정을 성진에게 풀어놓는 듯한 그녀의 행동은 버림받은 사람의 일탈처럼 느껴진다.
영화 초반의 미주는 비밀을 품고 있는 미스터리한 인물로 묘사된다. 그녀의 비밀은 대부분 수연이 가진 비밀을 지켜주기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관객에게 놀라움을 준다. 이후 미주는 수연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 위해 성진을 이용한다. 성진이 아내 수연을 자신의 성공을 위해 이용하듯, 미주 역시 수연을 상처 주기 위한 도구로 성진을 활용하는 것이다. 영화는 이런 미주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살짝씩 보여주면서 이 인물이 가진 의도를 알 수 없게 만든다.
영화는 미주가 가진 진심이 무엇인지 정확히 드러내지 않는다. 그녀는 가장 매력적이면서도 그 내면을 알기 어려운 인물이다. 미주라는 인물의 서사와 미스터리함은 결국 그녀가 가진 '사랑'이라는 감정 속에 깊이 담겨 있다. 이 때문에 관객은 그녀를 쉽게 판단할 수 없고, 그 점이 이 영화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든다.
[세번째 감정] 수연의 자신감
수연은 마치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녀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수연은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고, 사랑이라는 감정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사람들을 자신의 뜻대로 조종할 수 있었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수연은 하나도 잃은 것이 없다. 중반부에서 그녀가 모든 것을 잃을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수연이 그렇게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다른 인물들이 원하는 것을 모두 그녀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성진과 미주는 수연에게 함부로 대할 수 없으며, 완전히 그녀를 밀어낼 수도 없다. 결국 그들은 수연을 원래 자리로 돌려놓고 각자가 원하는 것을 취하며 살아간다. 수연은 자신의 의도를 철저히 감추고 성진과 미주를 이용하면서 모든 것을 조종한다. 마치 악마처럼 보이는 그녀는 자신의 삶에서 모든 것을 통제하며, 그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취하며 살아간다.
고급스러운 치정극
영화 <히든 페이스>는 고급스러운 치정극이다. 아름다운 화면과 잘 짜인 집의 구조는 이 영화의 중요한 매력 요소 중 하나다. 집의 독특한 구조는 숨겨진 방과 한쪽만 볼 수 있는 거울을 통해 흥미롭게 보여진다. 어쩌면 그 특이한 집의 구조는 각 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특이한 인물관계를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쪽에게만 그 관계의 진실이 보이는 관계, 그러니까 숨겨진 얼굴을 힘을 가진 한 쪽만 제대로 볼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 영화의 인물들 중 관객이 응원하고 싶은 인물은 없다. 모두가 자신의 욕심과 욕망에 눈이 먼 인물들이고, 그 모든 것을 파악하고 조종하는 사람은 수연이다. 그래서 세 인물은 서로의 나쁜 의도를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며 살아간다. 결국에는 각자가 원하는 것을 얻었으니, 그들의 이야기는 비극인지 희극인지조차 모호해진다.
특히 미주 역을 맡은 박지현 배우의 연기가 이 영화에서 가장 돋보인다. 진짜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인물을 잘 표현하고 있고, 어떤 일이든 다 꾸며낼 수 있을 것 같은 알 수없는 느낌을 잘 살렸다.
범죄와 치정극을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히든 페이스>는 충분히 흥미로운 영화가 될 것이다. 각자의 욕망 속에서 벌어지는 심리전과 예측할 수 없는 전개는 관객을 몰입하게 만들며, 그들 사이의 긴장감이 영화 내내 유지된다. 당신도 이들의 숨겨진 얼굴을 확인해보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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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핫도그로 잃어버린 몸찾는 액션 스릴러!
윤계상 배우가 주연을 맡은 유체이탈자가 개봉했습니다.
12시간 마다 유체가 이탈하여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간다는 신기한 설정인데요.
게다가 다른 사람을 옮겨다니는 사람이 기억을 잃은 상태라 더욱 긴장감을 높이죠.
한정된 공간과 한정된 인물을 가지고 이야기를 이끌어가지만 긴장감은 높습니다.
핫도그와 노숙자를 통해 실마리를 찾아가게 되는데요.
근접액션, 차량 액션, 총기 액션 등 다양한 액션이 포함되어 있어 볼거리도 많습니다.
자세한 리뷰는 영상을 참고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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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iritwalke starring actor Yoon Kye-sang has been released.
It's a strange setting that the fluid escapes every 12 hours and enters another person's body.
In addition, it raises tension even more because he who move around people have lost his memories.
The movie lead the story with limited space and limited characters, but the tension is high.
the main character track clues through hot dogs and homeless people.
There are many things to see as it includes various actions such as close action, vehicle action, and gun action.
Please refer to the video for detailed revi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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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플래시백> 메인 예고편
“네가 선택하는 순간 그게 너의 현실이 될 거야”
과거, 현재, 미래를 초월하는 금지된 약 '머큐리'단조로운 일상에 지친 직장인 ‘프레드릭'.
어느 날 길에서 마주친 낯선 남자에게서 데자뷔를 느낀 뒤
기억 저편에 묻어두었던 고등학생 시절 첫사랑 '신디'를 떠올린다.
신디가 졸업 시험을 앞두고 갑자기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프레드릭은
그의 실종이 친구들과 호기심에 삼킨 금지된 약 '머큐리'와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직감한다.
“나는 과거의 기억인가, 미래의 환영인가”
과거와 미래의 경계에 갇힌 프레드릭의 마지막 선택!
과거의 미스터리를 파헤칠수록 시공간이 무너지는 기묘한 감각을 느끼게 되고
악몽 같은 과거와 감옥 같은 미래의 경계에 갇힌 프레드릭은 자신의 현실을 결정할 최후의 선택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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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엘리멘탈> 티저 예고편
?과 ?처럼 서로 정반대이지만 그래서 더 신비로운 우리의 첫 만남 모두가 손꼽아 기다려온 디즈니·픽사의 2023년 신작 [엘리멘탈] 티저 예고편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