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자까2025-09-03 19:45:02
보편의 바깥에서 살아가고 사랑하기
영화 <3670>
박준호 감독은 무대인사에서 <3670>을 "순순하지만 생각거리가 많은 영화"라고 소개했습니다. '탈북자 게이'를 다룬 영화로 알고 왔는데 "순순하다"라고 하시기에, 저도 모르게 지참해 간 메모장에 '순순하다?'라고 끼적였습니다. 그리고 영화가 끝날 즈음에 메모장의 첫 페이지로 돌아가 물음표에 좍좍 줄을 긋고 느낌표를 그려 넣었습니다. "순순하다!" 엄한 곳에 감히 물음표를 갖다 붙인 저 자신을 반성하는 마음을 안고, <3670>의 "생각거리"들을 찬찬히 짚어보려 합니다.
※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은 <3670> 시사회를 통해 영화를 감상했습니다. <3670>은 2025년 9월 3일 국내 개봉작입니다.
3670
Summary
자유를 찾아 북에서 온 ‘철준’에게는 탈북자 친구들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다. 어디에서도 속하지 못한 채 혼자만의 외로움을 견디던 ‘철준’은 우연히 만난 동갑내기 ‘영준’의 도움으로 이제껏 알지 못했던 세계와 마주한다. ‘영준’은 ‘철준’의 친구가 되어주고 ‘철준’ 역시 조금씩 마음을 열어간다. 하지만 인기남 ‘현택’의 등장과 함께 ‘철준’과 ‘영준’의 마음에 묘한 파장이 일어나며 두 사람의 관계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가는데… (출처: 씨네21)
Cast
감독: 박준호
출연: 조유현, 김현목, 조대희 외
행복이 보편의 바깥에 있더라도
대학 시절, '교차성'에 관해 배운 적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여러 가지 정체성을 지니고 있고, 이것들이 교차하며 새로운 경험을 만들어낸다는 개념입니다. 당시 교수님께서는 그중에서도 소수자성의 교차를 특히 더 강조하셨습니다. 소수자가 겪는 차별의 경험은 정체성이 중첩될수록 새로운 형태로 강화될 뿐이라고요. 차별이 단순히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곱절로 늘어난다고 하셨습니다. 그때의 가르침이 마음속에 깊게 뿌리내려 있어서인지, 탈북자와 게이의 정체성을 모두 가진 '철준'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이 작품이 그러한 교차성으로 인한 차별의 경험을 날카롭게 다룰 줄로만 알았습니다.
'철준'은 함경북도 청진에서 온 탈북자이자 게이입니다. 자유와 행복을 찾아 남한에 온 '철준'은 열심히 게이 데이팅 앱을 뒤적이며 사람들을 만나 보지만, 관계 형성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남한 게이 '영준'과 가까워지면서 탈북자 테두리 밖의 사람과 조금씩 친분을 쌓게 되죠. 이 과정에서 제가 목격한 '철준'의 이야기는 예상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영화는 탈북자 게이 정체성을 가진 '철준'이 겪는 복합적인 차별 경험에 주목하지도 않았고, 차별을 겪어온 소수자들의 외롭고 허탈한 감정에 집중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영화의 시선은 닿은 곳에는 보편의 바깥에 서 있는 삶의 여정이 있었습니다.
<3670>은 '철준'이 한국 사회와 한국의 게이 커뮤니티에 정착하는 과정을 담고, 우정과 사랑의 교차점에 있는 '철준'과 '영준'의 사랑 이야기를 그립니다. 이제 막 한국에서 탈북자이자 게이로서 삶을 시작한 '철준'이 보편의 바깥에서 어떻게 성장해 가는지가 영화의 주요 스토리였죠. '영준'의 표현에 따르면, 저는 알에서 갓 태어난 아기 오리 탈북자 게이 청년이 다 큰 오리가 되어가는 과정을 목격한 거지요. 소수자의 피해자성보다는 주체성을 중심에 내세우는 이 영화의 서사가 참 반가웠고, 다시 한번 감히 물음표를 갖다 붙인 자신을 돌아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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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숨김의 전략 속에서
두 개의 소수자성을 지닌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 생겨나는 생각거리들도 있었습니다. 가령 탈북민 친구들에게는 게이라고 쉽게 밝히지 못하지만, 게이 친구들에게는 탈북민이라고 가감 없이 소개하는 장면들이 그랬죠. '둘 다 소수자성을 띠는 정체성인데, 숨김의 전략은 왜 달라지는 걸까?'
탈북민에게는 대학 전형이나 정착 지원과 같은 법과 제도의 보호막이 적용됩니다. 제도적 보호 아래에서 공통의 인정을 받죠. 영화에서도 '철준'은 교회에서 장학금을 받고, 탈북 스토리로 간증 연설을 하기도 합니다. 반면, 퀴어는 여전히 법과 제도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하물며 교회에서는 부정당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숨김의 전략이 사회가 인정하는 범위와 안전망의 유무에 의해 결정된다는 걸 자명하게 보여주는 장면들이었던 것이죠. 차별의 심화를 막고 낙인을 완화하는 가장 빠르고 강력한 방법은 역시 법제화라는 생각이 물씬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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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철준'을 중심으로 글을 썼지만, 영화를 보고 난 뒤에는 '영준'도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습니다. 취업에 계속해서 떨어지며 자존감 문제를 겪고 있는 '영준'의 모습에서는 손 닿으면 부서질 듯한, 후 불면 꺼질 듯한 우리나라 청년들이 자연스레 겹쳐 보였거든요. '철준'은 행복을 찾아 한국으로 왔는데, '영준'은 행복을 찾아 한국을 떠나야 했다는 게 마음이 아프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 청년들의 마음에는 어떤 상처들이 쌓이고 있을까요? 현재의 대한민국을 살고 있는 한 청년으로서, 행복을 찾아 우리나라로 온 '철준'만큼은 그 불행선상에 함께 놓이지 않길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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