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a2025-09-24 13:09:39
[30th BIFF 데일리] 권태에 물들다
영화 <프랑수아 오종의 이방인> 후기
감독 프랑수아 오종
주연 벤자민 브아장, 레베카 마더, 피에르 로탱, 스완 아를로
프로그램 노트
프랑수아 오종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1942)을 각색해 흑백의 아름다운 영상미로 1950년대 알제리를 섬세하게 재현한다. 카뮈가 그려낸 태양 아래 짓눌린 해변은—현실이자 은유의 공간인 그 불안한 세계—오종의 유려한 미장센으로 스크린에 되살아난다. 바로 그 해변에서 주인공 뫼르소는 명확한 이유 없이 한 아랍 청년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프랑스 영화계의 젊은 스타 벵자맹 부아쟁은 자의식 없이 행동하고 자신의 행위조차 남의 일처럼 받아들이는 ‘이방인’ 뫼르소를 완벽하게 소화해 낸다. 카뮈 소설의 그 유명한 첫 문장 “오늘 엄마가 죽었다.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대신, “아랍인 하나를 죽였다.”라는 주인공의 독백으로 시작하는 오종의 인상적인 각색은 관객을 어두웠던 프랑스 식민지 시대로 단번에 이끈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아랍인을 살해한 것보다 더 큰 죄로 여겨졌던 그 시대로. 오종은 그 모순된 도덕의 세계를 냉정하게 응시하며 ‘부조리’의 본질을 그만의 시각으로 조명한다. (서승희)
영화 <이방인>은 감독 프랑수아 오종의 시선으로 재해석한 카뮈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어머니의 죽음을 묘사하는 덤덤한 서술과 달리 그의 영화에서 청년 ‘뫼르소’는 한 아랍인을 죽였다 말하며 다른 시각의 전개를 예고한다. 흑백의 대비로 배경을 보다 뛰어나게 묘사한 오종은 1950년대 프랑스인과 알제리 현지 사람들의 첨예한 사회적 대립을 묘사함과 동시에 그 부조리를 포착한다. 청년 ‘뫼르소’는 오종의 지난작 <썸머85>에서 한층 싱그러운 소년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배우 벤자민 브아장이 연기하며 뫼르소가 살인에 이르기까지 결정적 게기를 제공한 무뢰배 ‘레몽’은 지난 전주국제영화제에서도 상영된 <가을이 오면> 속 배우 피에르 로탱이 연기한다. 오종이 매작품에서 보여주는 섬세한 전개 속 호기심을 자극하는 캐릭터를 계속 맡아온 두 사람이 이번 <프랑수아 오종의 이방인>에서 역시 강렬한 연기로 영화 속 서사에 힘을 보탠다.
벤자민 브아장의 뫼르소는 외적으로도 카뮈의 소설 속에서 방금 튀어나온 듯한 우수를 보여주지만 그의 행동과 대사를 통해서 이는 더욱 확장된다. 원작에 대한 내용을 알지 못하는 이 역시 확실한 캐릭터성을 갖고 있는 뫼르소라는 청년의 시간이 어떻게 흐를지 궁금증을 가질 수 있음과 동시에 그 하루에 뻔한 권태로움보다는 신선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원작을 아는 이들 또한 프랑수의 오종의 이방인이라는 점에서 색다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잘 조형된 샷 하나에는 무감각 해보이는 청년 뫼르소의 권태로움이 담겨 있기도 하지만 진실성에 대한 철학 역시 담겨져 있다. 매작품마다 지루할틈 없는 서사 속에 이러한 철학을 주제 삼아 전개하는 오종의 마법은 소향씨어터를 가득 매울 정도의 박수 소리로 재증명 된 바 있다.
한편 76회 칸 수상작이었던 영화 <추락의 해부>에서 국내 관객들에게 역시 인상을 남긴 바 있는 배우 스완 아를로의 등장으로도 연기 밀도를 높인 영화 <프랑수아 오종의 이방인>은 현재 부산국제영화제에서 24일까지 상영 될 예정이다.
Schedule in BIFF
2025.09.21 (일) 동서대학교 소향씨어터 신한카드홀 5관 20:00
2025.09.22 (월) 시청자 미디어센터 16:30
2025.09.24 (수) CGV 센텀시티 1관 10:00
부산국제영화제 기간 09월 17일 ~ 09월 26일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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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의로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듯이
구사일생
경기 대기 중. 홍대의 머릿속에 생각이 많다. 홍대에게 무슨 문제가 생긴 것 같다. 고민이 많아 보이는 홍대. 홍대의 시선은 동료 축구선수 성찬으로 향한다. 인터뷰 중. 빅리그 입단이 확실시된 성찬에게 질문이 쏟아진다. 박성찬 선수! 이 경기는 어떻게 플레이할 생각이십니까? 뭐 빅리그도 물론 좋지만 지금 앞에 있는 경기에 집중해야죠. 겸손함을 보여주는 성찬. 그런 성찬을 바라보는 홍대의 시선이 심상치 않다. 경기 시작! 주심이 호루라기를 분다. 갑자기 홍대가 이상한 행동을 한다. 성찬을 도와 팀의 승리를 이끌어야 할 홍대가 성찬이를 맨 마킹 한 것이다. 경기를 던져버리는 홍대. 당연히 라커룸에선 난리가 났다.
라커룸에서만 난리가 나면 다행일 것이다. 홍대의 역주행은 금세 수많은 화제를 낳았다. 빗발치듯 따라온 기자들. 난감한 질문이 들어온다. 그러나 그중에 가장 깐족거리는 사람이 있었다. 유난히 눈이 맑은 기자 하나가 유달리 거슬리게 행동한다. "경기 중 역주행 퍼포먼스는 사기 혐의로 수배 중인 어머니에게 보내는 메시지인가요?" "현재 사기 혐의 수배 중인 어머니의 도주를 돕고 계신 건 아닌가요?" 홍대의 얼굴표정에 무언가 변화가 있다. 화가 난 홍대. 도발하던 기자의 눈을 찌른다. 이 장면은 뜨거운 감자가 돼서 홍대의 커리어에 직격탄을 날렸다. 축구선수로서 은퇴 5분 전인 홍대. 아예 축구계는 접고 연예게 입문을 노리고 있다. 그런데 좋은 걸로 이슈가 된 것이 아니다. 뾰족한 대책이 없는 상황. 이때, 홍대에게 제의가 들어온다. "너 감독해라. 월드컵 나갈 건데. 홈리스 월드컵이야. 다큐 제작팀도 붙을 거다."
감동 실화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실제로 2010년에 한국 홈리스 국가대표팀이 월드컵에 출전한 바가 있다고 한다. 이 한 줄로 알 수 있는 정보는 두 개다. 하나는 '홈리스'를 소재로 했다는 것과 스포츠영화라는 장르적 특성이다.
영화는 홈리스를 소재로 다루고 있다. 영화 표면적으로 주인공 롤을 맡은 배우는 홍대 역의 박서준과 소민 역의 이지은 배우다. 이 둘은 영화에서 밑그림이 된다. 무슨 말이냐. 홍대는 홈리스를 하나의 축으로 모으는 역할이다. 또 이 사람들을 다독여서 하나의 팀으로 만들어야 하는 임무가 있다(그 과정에서 이뤄지는 홍대 내적인 성장은 보너스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홍대가 영화의 핵심에 겹쳐지는 순간이 있다. 이는 영화 내내 제시되는 홈리스들의 입장과 홍대가 처해있는 상황이 병치된다는 특성을 갖고 있다. 이런 연출은 영화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왜? 영화가 다루는 핵심 소재는 소수자이기 때문이다. 왜 사람들이 홈리스와 같은 입장에 놓이는지, 또 어떤 이유로 이들을 보호해야 하는지가 영화에서 직간접적으로 묘사된다. 약간 부차적인 장면이긴 하지만 홈리스들에 대한 시선이나 '빅이슈'라는 잡지사가 등장하는 방식도 나름 괜찮았다고 생각한다. 이 사람들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비하하거나 희화하는 걸 지양하지만 소재를 다루는 것에 거침없었던 감독의 수가 돋보인다.
또 이 작품은 스포츠영화로서의 장르적 특성을 갖고 있다. 2부에 축구 경기장이 등장한다. 이 축구장 시퀀스의 완성도를 떠나 이런 장르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흥미롭게 볼 부분이 있다는 뜻이다. 글쓴이가 생각했을 때 스포츠영화로서의 장르성을 챙겼던 것이 어느 지점에선 강점을 가진다고 생각한다. 일례로 중반부까지 홈리스들을 가르치는 홍대의 모습이 그렇다. 운동이라고 하는 것이 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에 갑자기 짠하고 잘하지 않는다. 누구는 잘하고 누구는 못하는 게 당연하다. 영화에서 홈리스들 간의 사연이 다양한 만큼 이 피지컬적인 재능도 각자 다르게 묘사되는 부분은 흥미로웠다. 홈리스들의 연령대를 생각해 보면 사실 당연한 건데 섬세한 연출방식으로 리얼리티를 더했다.
몇 명 퇴장당한 축구경기처럼
영화를 한 줄로 요약하면 '착한 영화'다. 홈리스에 대해 자극적으로 소비하지 않았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영화는 좋은 평을 받기 충분하다. 그러나 이와 상응하는 이 영화의 단점을 뽑자면 그 나머지다. 사실 영화에서 감정적으로 뭉클한 장면이 있다. 신인류의 OST가 들어가는 장면은 역시 감독의 감각이 젊다는 걸 체감하게 한다. 전체적으로 뻔했던 경기장 시퀀스에서 이 노래가 삽입되는 장면 하나만큼은 식상하지 않았다. 또 웃긴 장면도 있다. 홈리스들의 서사를 쌓아가는 과정이 약간 전형적이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양현민 배우의 퍼포먼스는 인상 깊었다.
그런데 이 외의 지점에서 마이너스가 너무 많았다. 우선 첫 번째. 영화는 착하기만 하다. 이를 구체적으로 풀어서 써보자면 영화가 살짝 노골적이라고 느껴졌다는 점이다. 우선 <플로리다 프로젝트>가 생각난다. 션 베이커의 작품 세계가 그렇지만 영화에서 해결책이 없었다는 점은 우리 각자의 몫으로 설루션을 돌렸다는 점에서 그 작품의 강점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비단 사회문제를 다룬 영화 중에 깊이 있는 통찰을 다룬 작품은 많다. 후반부에 약간 김새긴 했지만 시스템이 만든 비극 자체를 생각한다는 점에서 훌륭하다(물론 영화가 제시한 해결방식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 <드림>은 중반부 즈음에 어떤 인물이 누구에게 코미디 대사와 함께 직접적으로 제시된다. 이 인물이 축구대회까지 가는 길에 굉장히 중요한데 이 장면에서 갑자기 방점이 쾅 찍히고 존재감이 옅어지는 건 차치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대사들이 너무 대놓고 들어갔다. 이병헌 감독의 진심이 느껴지긴 했다. 심지어 이 장면에 들어간 코미디 대사들 웃기기까지 하다. 그런데 이 대사 하나가 너무 템포에서 임팩트가 커서 이 장면만 기억나는 느낌? 조연 홈리스들의 도전서사가 이 장면이 내포하는 메시지로 귀결이 나는 거면 모르겠다. 어차피 이 장면을 보여주려고 후반부가 있는 거면 이다음 시퀀스들이 굳이 없어도 되지 않을까?
또 인물을 설정하는 방식에서도 꼼꼼하지 못한 것들이 군데군데 보였다. 우선 홍대 쪽 묘사다. 홍대 역을 맡은 박서준 배우는 좋은 연기를 보여준다. 뭔가 과한 초중반부를 이끌 만큼 본인이 갖는 스타성을 적절히 활용한다. 특히 초반부에 홍대가 사고를 치고 인터넷 밈으로서 주인공이 퍼지는 영상이 있다. 이런 건 배우가 박서준이고 그의 역할에 이입되기 때문에 만들 수 있는 영상이다. 그러나 이 인물이 약간 과시적으로 묘사되는 부분이 있다. 바로 쌍쌍바가 등장하는 시퀀스다. 음.. 모르겠다. 박서준과 이병헌이라는 이름을 보고 극장을 가는 사람 중 이런 방식의 연출을 원했던 분들이 몇 명이나 있을까? 또 이 홍대는 중후반부 지점을 지나 터닝포인트를 맞이한다. 이 시퀀스는 좀 나사가 빠진 듯하다. 소민이의 직업적 역량을 우회적으로 드러내고 싶었던 건가 싶다. 뭐 비단 홍대라는 캐릭터 자체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주변인들도 이야기 몰입에 지장을 준다. 바로 홍대 어머니 캐릭터다. 이 홍대 어머니 캐릭터가 이야기에 있어서 기본 바탕이 된다. 이 인물의 어떤 행동들이 과연 현실성이 있는가? 의 문제는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으니 차치하기로 한다. 이 사람은 이야기의 핵심과도 영 닿아있지 않은 것으로 보이고, 심지어 어떤 장면에선 몰입을 방해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왜? 홍대가 갖고 있는 내적인 문제는 초반부에 나온다. 홍대가 갖고 있는 이 문제를 영화는 후반부까지 계속 이어지게 장면을 구성했다. 이 부분에 집중하고 보는 게 부담스럽지 않고 깔끔한데 어머니의 이야기까지 들어오니 좀 난잡해진다. 하려고 했던 것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또 홍대와 홍대 어머니의 연출뿐만 아니라 홈리스와 소민 캐릭터도 영 아쉽게 느껴진다. 우선 소민 캐릭터다. 이 캐릭터는 좀 작위적으로 느껴지는 지점이 많다. 소민이가 하는 대사도 약간 예전 영화들 같다. “약 먹을 시간 됐어”같은 대사들 뭔가 아쉽다. 대사를 떠나서도 인물의 동선이나 움직임들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는 것은 캐릭터가 너무 평면적이었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사실 소민 캐릭터에게 별로 마음에 드는 점이 없다. 그나마 이지은 배우의 미모 빼면 굉장히 전형적인 캐릭터와 평범한 대사들만 반복한다. 안 그래도 상투적인 화법을 더 진부하게 만든 것이다. 글쓴이가 이지은 배우의 팬임에도 불구하고 소민이라는 인물이 대사 할 때마다 눈을 감게 됐던 것도 여기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지은 배우를 캐스팅했다는 점에서 오는 단점이 이 영화에서 느껴졌다. 가수와 배우의 이미지가 강해서 그런지 카메라 드는 폼이 좀 이질감이 들었다. <브로커>에서 가수 커리어 내내 한 적 없는 쌍욕을 하는데 어색하지 않았던 것과는 정반대다.
홈리스 쪽 캐릭터에서도 아쉬운 지점이 있다. 사실 이 부분은 전부 아쉽다. 그중에서도 장점과 단점을 뽑아보자면 양현민/고창석 배우는 이 작품의 윤활유가 된다. 소수자 다음으로 중요한 영화의 소재는 가족이다. 고창석 배우는 가족영화로서 가져야 할 뭉클함을 치트키라도 쓴 것 마냥 다 만든다. 또 양현민 배우는 비주얼과 말투부터 코미디적 요소를 잘 살린다. 글쓴이가 가장 많이 웃었던 부분이 이 양현민 배우 캐릭터에 있기도 하다. 그러나 홈리스 서사에서 아쉽게 느껴졌던 건 이현우 배우가 맡은 인선 역이다. <영웅>에 대한 글을 쓰면서도 비슷한 문장을 썼었던 것 같다. 이 배우가 처음 등장할 때 '아마 이럴 거야' 생각했다. 그리고 정확히 다 맞아떨어져 갔다. 예상과 단 조금도 벗어나지 않은 연기를 보여준다. 이 배우는 커리어에서 확실한 전환점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그게 아니라면 이 영화에서 인선 역의 입지처럼 이 배우의 등장만으로도 모든 줄거리가 예상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거 실화냐
그렇게 아쉬운 인물연출은 영화의 줄거리와도 이어진다. 1부 홈리스들을 모으는 장면에서 나타나는 불균일함은 뭐 어쩔 수 없다고 치자. 2부는 약간 당황스럽다고 느껴질 정도다. 일단 실제 홈리스 월드컵의 규칙이 어땠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규칙의 여부를 떠나 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드는 과정에 있어 각색이라는 부분은 연출가의 중요한 덕목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몇몇 장면들은 영화 감상에 있어 내적인 모순을 스스로 보여주는 듯했다. 예를 들어 영화에서 홍대 일행이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히자 어떤 사람들과 대화하는 신이 있다. 이 사람들은 영화 후반부의 터닝포인트가 되어 이야기를 쉽게 푸는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인물들에게 더 쉬운 접근법을 만들어준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 사람들은 영화에서 치명적인 단점으로 작동한다. 없어도 되는 존재를 떠나 팀의 조직력과 완성도의 측면에서도 강한 유효타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글쓴이가 생각하는 영화의 최고 단점이다.
또 이 축구경기를 중계하는 중계진들은 영화의 리얼리티성을 떨어트린다는 악영향을 끼친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 실화를 찾아보니 해설자들이 실제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들을 실제로 했는지 안 했는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듯하다. 그 상황이 있기 전까지 영화에서 한국의 홈리스에게 감정이입할 요소들을 넣었어야 했던 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든다. 이는 영화 전체적으로 '굳이 말 안 해도 알 걸 두 번 세 번 반복하는 습관'의 연장선상같이 느껴져서 이병헌 감독의 단순한 실수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포기하지 않는 홈리스들의 모습. 강박적으로 느껴지는 균형감각. 현실적인 어려움. 이런 큼지막한 덩어리들은 대놓고 때려 박았다. 그걸 잘 이어 붙이면 뭐 아무 문제없었을 텐데 은근슬쩍 딱 갖다 놓아서 영화가 끊기는 듯한 느낌은 아쉽다. 이렇게 예상이 가는 장면들의 연속이라는 점은 영화 후반부에 있어 '언제 끝나나' 싶게 생각하는 지점이기도 했다.
좋은 영화는 맞지만 재밌지는 않았어
사실 이 <드림>을 기대했다. 글쓴이는 그냥 웃긴 영화, 재밌는 영화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야기가 품고 있는 좋은 시선에 대한 강박이 템포를 끊어버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영화가 하나의 이야기 같지 않게 들린다는 것. 상황을 전부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나 이병헌이라서 이런 거 잘한다 다들 알지??' 같은 것들은 감독의 전작 <극한직업>이 생각나지 않는다는 것이 거짓말처럼 느껴지게 한다. 분명히 재기 발랄한 무언가가 있었는데 말이다. 박서준의 열연, 이지은의 사랑스러움도 이병헌이라는 감독이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었다는 단점을 받쳐주지는 못했다. 좋은 의도로 착한 영화를 만들었다고 해서 완성도에 생긴 구멍을 메워주지는 않는데 말이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다. 박서준과 이지은 배우, 하현상과 신인류의 팬이라면 볼만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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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정이라는 이름의 정권, 혹은 저항의 씨앗
모하마드 라술로프 감독의 영화 <신성한 나무의 씨앗>은 2022년 마흐사 아미니의 사망 이후 이란 전역에서 일어난 '여성, 생명, 자유' 시위를 배경으로 한다. 이 작품은 억압적 체제 속에서 무너지는 한 가족의 서사를 통해 정치와 일상이 만나는 지점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주인공 이만은 시위가 진행되는 상황 속에서 수사 판사로 승진하며 가족의 안전을 명분으로 총을 받는다. 하지만 이 총이 사라진 순간부터 그는 가족을 의심하기 시작하고, 불안과 권력욕이 겹치며 점점 독재자의 얼굴을 드러낸다. 결국 신뢰는 깨지고, 가정은 붕괴한다.
이만의 가족은 체제 내 다양한 위치와 시선을 상징한다. 이만은 억압하는 정권을, 아내는 전통적 가치에 묶인 여성상을, 딸들은 변화와 저항의 가능성을 담는다. 특히 영화 곳곳에 삽입된 실제 시위 장면과 폭력에 노출된 여성들의 모습은 현실과 극의 경계를 허물며 강한 메시지를 던진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지급된 총은 결국 가족을 파괴하는 도구가 되고, 일상을 기록하던 캠코더마저 후반부엔 취조와 감시의 시선으로 변질된다. 보호와 통제, 기록과 감시는 종이 한 장 차이일 뿐이라는 것을 영화는 냉철하게 보여준다.
이만이 “나는 정직하게 살아왔다”라고 말하지만 그가 가족 중 총을 가져간 사람을 찾아내는 과정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고 공포로 통제하는 방식이다. 문제는 그가 이 모든 행동이 정당하다고 믿는다는 데 있다. 권력과 신념이 결합한 자의 위험성을 영화는 날카롭게 포착한다.
이만은 가족들을 심문하기까지 이르고, 아내인 나즈메는 이만처럼 좋은 아버지에게 그러면 안 된다며 아이들을 다그친다. 가정도 하나의 서열이 존재하는 집단이다. 그렇다면 이만은 누구에게 그런 권력을 부여받았을까. 오랜 가부장제, 침묵을 강요당해 온 여성들, 자기검열에 익숙한 사회가 그 답일 것이다. 영화 속 여성들은 머리 염색, 매니큐어, 히잡, 옷차림 하나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다. 그 현실 속에서 변화의 목소리는 죽음과 폭력으로 되돌아온다.
반면 둘째 딸 사나는 타협하지 않는다. 그는 부모가 자신을 아이로 여길 때, 몰래 언니의 친구를 집에 숨겨 들이고, 총을 감춘다. 이만을 가장 불안하게 만드는 존재는 결국 가족 중에서도 가장 약자로 인식했던 사나인 셈이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낯설지 않게 마주해왔다. 어머니의 희생을 당연시했던 과거 세대와, 가부장적인 그 구조에 의문을 제기하는 현재 세대 사이의 균열. 이 영화는 바로 그 지점을 정면으로 파고든다.
2시간 47분의 상영시간, 점점 고조되는 갈등과 폭력의 수위가 때론 불편하게 다가올 수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지독하게 현실적이라 계속 바라보게 만든다. 이만의 붕괴는 마치 변화를 막고 억압만 해서는 긍정적인 결말을 맞을 수 없다는 걸 암시하는 듯하다.
이 영화는 단지 스크린 속 이야기로 그치지 않는다. 나즈메를 연기한 배우는 영화 출연으로 인해 사실상 자택에 감금되어 있는 상태로 전해진다. <신성한 나무의 씨앗>은 영화 안과 밖 모두에서 저항과 용기를 담은 기록이다. 허구와 현실 사이에 뿌려진 이 씨앗이 어떤 나무로 자라날지는, 이 영화를 마주한 우리의 몫이다.
본 글은 씨네랩 크리에이터로 시사회에 초대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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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에 대한 관점 • <머티리얼리스트>
(스포일러 포함)
<머티리얼리스트>가 홍보되었던 맥락은 여성 1인 남성 2인 구도의 전통적 삼각관계 구도와 뉴욕이라는 화려한 도시에서 사랑을 찾는다는 것이다. 루시(다코타 존슨)은 잘 나가는 커플매니저이며, 그녀는 가난해서 헤어진 옛 남자친구 존(크리스 에반스)과 '유니콘'이라 불리는 완벽한 남자 해리(페드로 파스칼)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게 된다. 이런 플롯은 한 마디로 전형적이다. 우디 앨런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 가지는 기대는 비슷한 류의 로맨틱 코미디 장르 영화와 달랐는데, 셀린 송이라는 이름 때문이다.
알콜로 소독된 깔끔함
셀린 송 영화는 차분하고 조용하다. 셀린 송 영화의 남자들은 소리지르지 않는다. 여자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우아하다. 음악은 미니멀하고 그마저도 많이 들리지 않는다. 공간은 깔끔하고 세련되었다. 그러니까 군더더기가 없다. <머티리얼리스트>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존과 싸우다 대뜸 차 밖으로 나가버린 루시는 길 한복판에서 말다툼을 시작한다. 그런데 이들의 말은 씹히거나 저는 부분이 하나도 없고 관객에게 한 글자 한 글자 다 잘 전달된다. 다른 차들의 클락션 소리도 음소거되었다. 루시가 가장 감정적으로 폭발하는 장면이기도 한데, 여기에는 격정이 없다. 루시가 가난하게 태어났고 가난하게 자라, '가슴을 엘 만큼 부자인' 남자를 원한다고 말하는 것은 중요하다. 다코타 존슨이 네포 베이비로 가난 없이 자랐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렇게 살아온 존슨의 얼굴빛과 몸짓과 말투와 눈빛이 루시라는 캐릭터와는 잘 맞지 않는 느낌이 든다. 어떤 영화 속 인물이 가난하게 태어났고 가난하게 자랐다고 말한다면, 관객은 그것에 설득되어야 한다. 그런데... 설득이 되지 않았다.
설득되지 않는 논거들
영화를 구축하는 주요 사건들 중 이상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이 있었다. 첫 번째는 의뢰인 소피가 당한 성폭행 사건이다. 모든 요소가 평범하게 우수하고 특별한 강점이 없어 데이트에 번번이 실패하는 의뢰인 소피는 루시가 가장 좋아하는 의뢰인이다. 그런데 소피는 루시의 중매로 만난 마크 P라는 남자에게 데이트 중 성폭행을 당한다. 루시는 이 사건으로 크게 무너지고 일을 잠시 쉬게 된다. 우선 데이트 중 성폭행은 현실에서든 영화에서든 충분히 일어날 수 있고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영화가 성폭행이라는, 이견을 제시할 수 없는 너무나 큰 사건을 제시함으로써 이 급전개(급 갈등 만들기)에 따라 붙는 질문을 차단하려고 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냉소와 염세의 화신 같아 보이는 루시에게 감정적 충격을 안겨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선택한 사건이라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두 번째는 키 크는 수술이다. 초반에 이 수술은 가볍게 언급되고, 여자들이 남자를 볼 때 빠지지 않는 조건이 키라는 것은 반복되고 강조된다. 루시는 해리의 상처를 보고 그가 키 크는 수술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해리는 태어날 때부터 완벽한 남자가 아니었다. 루시는 이 사실을 알게 된 직후 이별을 고하는데, 여태껏 느껴왔던 해리에 관한 기시감이 자신의 객관적인 상품 가치를 키우기 위해 노력해 왔음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 이별 통보의 타이밍은 해리를 상처주기에 너무나도 적절해서 경악스럽기도 하다... 역설적으로, 내내 인간미가 느껴지지 않던 해리라는 남자가 가장 아름다워 보일 때는 루시 앞에서 자신의 원래 키대로 다리를 굽히는 순간이다. 그런데 이 키 수술이 성폭행 사건처럼, 다소 도구적으로 끼워넣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만약 해리의 캐릭터가 더 자세히 표현된다면 설득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것은 영화의 관심사가 아닐 터.
그녀가 '딜'을 외칠 때
루시가 커플매니저를 그만두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며 결말이다. 그녀는 영화 내내 자기 의뢰인들의 '스펙'을 재며, 그에 대한 고충도 토로한다. 결국 그녀가 선택하는 남자도 스펙 면에서 완벽한 해리가 아니라 그녀의 마음이 가리키는 존이다. 이런 관점 자체는 특별하달 것이 없다. 그렇지만 셀린 송이 수미상관으로 끼워 놓은 원시시대의 '최초로 결혼한 사람들'을 보면 송은 처음부터 이런 일반적이고 보편적이고 근본적, 근원적인 사랑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던 것 같다. 오프닝에서 원시시대 남자는 자루에 돌로 된 도구들과 풀꽃다발을 가지고 여자에게 다가간다. 결말에는 여자의 부른 배가 보인다. 행복한 두 사람의 얼굴. 현대의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으며 그건 나쁜 게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이 깔끔하고 세련된 영화는 의외로 처절한 질문에서 시작했을 것이다. ‘왜 그는 나를 선택했는가?’ <머티리얼리스트>에서 가장 마음에 남는 장면이 있다. 루시와 해리는 고급 식당의 원형 테이블을 두고 마주 앉아 있다. 루시는 돈도 많고, 화도 내지 않고, 잘생겼고, 몸도 좋으며 어디 하나 걸리는 부분이 없는 완벽한 이 남자가 왜 자신을 선택했는지 궁금해 한다. 그녀는 거래 전 체크해야 할 사항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 “당신은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을 만날 수 있어요. 당신이 25살과 만난다면 10년 후에도 그녀는 지금의 내 모습일 거에요.” 그녀가 판단했을 때 이 계약은 한 쪽에게 너무 수지가 맞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계속해서 계약을 고집하는 상대방에게 자신이라는 상품의 실제 가치를 고지해야만 한다. 그래야 정당하니까. 사모펀드 매니저인 해리는 더욱 가관인 답변을 내놓는다. “나는 당신의 무형 자산을 보고 투자하는 겁니다. 잠재력이 아주 큰.” 이 ‘무형 자산’이라는 말은 루시의 취향, 경험, 역사를 의미할 것이다. 루시는 그가 사랑에 대하여 그녀와 같은 관점으로 접근했기 때문에 거래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이 관점은 후에 루시가 해리를 차 버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인상적인 장면은 어느 정도는 우울하도록 계산되었다. 회색이 한 방울 섞인 파랑의 느낌이다. 음악은 아주 간결하고 비관적인 느낌마저 든다. 영화의 주인공인 두 남녀가 연애하기로 결정하는 장면인데도 말이다. 기존의 로맨틱코미디 장르가 소재로 삼은 ‘계약 연애’, 혹은 ‘연애 계약’의 귀여움과는 거리가 멀다. 바로 이런 것들이 셀린 송의 영화를 만드는 것 같다. <패스트 라이브즈>도 즐거운 사랑 영화가 아니었다. 그 영화는 잃어버리고 떠나온 것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머티리얼리스트>는 무엇에 관한 이야기일까. 한 사람이 돈이 아닌 다른 의미를 향해 다가가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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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일을 위한 고군분투
* 이 글은 씨네랩으로부터 초청 받아 참석한 영화 <팜 스프링스>의 시사회 관람 후기입니다.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니, 이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만 사는 것 같다'는 술어가 있다. 이 말은 내일 일은 생각하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제가 할 일에 돌진하는 사람들에게 흔히 붙는 수식어이다. 이러한 수식어는 특히 요즘 젊은 세대 사이에서 빈번하게 쓰인다. 전세계적으로 불황이 휩쓸고, 당장 내일의 일을 기약할 수 없는 세계의 젊은이들에게 '오늘'을 사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해 보인다. 새롭게 생겨나는 '욜로(You Only Live Once)'라든가,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단어들은 이러한 불안정한 상황에 처한 젊은이들의 사정이 반영된 결과이리라.
<팜 스프링스>의 두 주인공, 나일스와 세라 역시 이러한 현실에서 크게 유리되어 있지 않다. 자, 이제 그들의 이야기를 들여다 보자.
1. 오늘만 사는 남자와 오늘이 끝나기를 바라는 여자
나일스는 오늘만 사는 남자이다. 말 그대로, '모종의 사건'을 계기로 오늘에 갇혀 버리고 만 그는 그렇게 수천 번의 오늘을 살면서 정말이지 '안 해 본 일이 없다.' 무한히 반복되는 오늘을 벗어나기 위해 죽음까지 불사했으나, 시간이 지나면 거짓말처럼 돌아오는 '오늘'의 아침에 나일스는 굴복하고 만다.
반면 세라는 오늘이 얼른 지나가버리고 내일이 오기를 바라는 여인이다. 남 모를 비밀을 품고 있는 그녀에게 현실은 지나치게 고통스럽고, 그녀는 그것을 죄 잊어버리려는 것처럼 술을 들이킨다.
이러한 둘은 어떠한 사건을 계기로 나란히 '오늘'에 갇혀버리고 만다. 이 반복되는 시간의 섬에서, 단 둘이!
"소용 없어요, 세라. 다 해봤다고요."
'오늘'을 벗어나려는 세라에게 타임 루프 선배인 나일스는 말한다. 운명에 저항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고, 나는 당신과 있는 것이 좋으니 함께 즐거운 '오늘'을 보내자고. 세라 역시 수 많은 '오늘'을 그와 보내며 그를 사랑하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그녀에게는 '오늘'을 벗어나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녀의 '오늘'에는 그녀가 저지른 과오가 남아있고, 그 과오를 바로잡으려면 내일이 와야했으므로.
2. 내일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이 영화는 흔한 타임 루프 클리셰의 유쾌한 점을 따라가면서도 재치있게 비튼다.
특히 인상적인 점은 타임 루프를 깨고 나가기 위한 열쇠는 두 남녀의 회개 혹은 개심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혹은 선량함도 아니다.
그것은 지극히 실험적이고 과학적이며 인간적인 노력에 의해 성취된다. 여주는 그 수많은 오늘을 활용해 양자 역학 따위를 통달해버리고, 마침내 '오늘'을 벗어나는 방법을 깨닫는다.
내일로 나아가기 위한 열쇠는, 내일로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가짐과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일련의 노력인 셈이다.
그리하여 '내일이 오기를 두려워하던' 남자와 '오늘이 제발 지나가기를 바라던' 여자는 '오늘'을 벗어난다.
두 사람은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될까?
서로가 있어 행복할 거라는 동화적인 이야기는 꺼내지 않겠다. 이 영화는 그러기엔 지극히 현실적이다. 그러나 관객들은 예상할 수 있다. 남녀간의 사랑이 아니더라도, 이들은 성공적으로 오늘을 살고, 어제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내일로 나아갈 것이라는 것을. 그들은 이제 실수를 바로잡고 원하는 것을 위해 나설 줄 아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전반적으로 가벼운 킬링타임용 영화라는 인상이 든다. 성행위나 폭력에 대한 묘사가 가볍게 다루어진다는 점에 미성년자들에게 그렇게 권장할 만한 영화는 아닐 거 같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싫지 않은 이유는 그 특유의 유쾌함에 있다. 클리셰를 적절히 비트는 재치와 삶에 대한 나름대로의 심도 있는 고찰은 관객들을 어렵지 않게 그들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이 영화를 보며 나를 포함한 오늘날의 많은 젊은이들의 삶에 대해 생각했다.
우리의 어제의 실수를 부끄러워하고, 오늘의 과오를 외면하거나, 내일 있을 일로부터 회피하곤 한다. 우리는 그럴 만한 사회를 살고 있으니까. 그러나 생각해보면 실수와 과오는 바로 잡으면 되고, 내일은 거창하게 생각할 것 없이 그저 나아가면 된다. 작은 것부터, 우리 눈 앞에서 우리가 가장 원하는 것을 차근차근 해내면서.
자, 우리도 내일을 살아보는 것은 어떨까?
한 발짝씩 나아가다보면 내일은 어느새 오늘이 되어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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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가
K-컬쳐를 논하기 전, 부끄럽게도 우리는 사람 앞에 K-number를 붙여 한국에서 해외로 입양을 보내왔다. 여기서 K-number는 입양된 한국 아이들의 고유한 번호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기록에서 출발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조작된 서류와 감춰진 기록들이다.
기록하는 미오카
“나는 생모에게 버림받은 기억이 없다.”
미오카의 서류를 따라가며 영화가 흘러간다. 기록을 따라 도착한 곳에는 진짜 김미옥은 없다. 미옥 씨는 그럼에도 그 곳의 한 곳 한 곳을 카메라로 촬영한다. 이것이 미오카의 진정한 기록일 것이다. 기록물을 믿기보다 기록하는 주체를 믿어야만 하는 현실. 미오카의 머리 기장과 입양인들의 기억에서 비롯하여 뿌리를 찾아간다. 이것이 조세영 감독이 담고자 하는 기록이다.
입양된 아이들의 삶
그들이 자신의 뿌리를 찾고자 하는 것은 당연하다. 어디에서 어떻게 왔는지, 나의 부모는 어떤 사람인지. 나는 버림받은 기억이 없는데 혹여나 여직 나의 부모가 날 찾고 있을까봐 의무감에서라도 움직인다고 한다. 과거를 모른 채 입양된 아이들은 평생을 ‘정체성’을 찾는 데 많은 시간을 허비한다.
조작되고 감춰진 50년의 기록
아이들을 화물처럼 모아 입양을 보냈던 기록. 정부와 입양기관의 만행이 속속들이 밝혀지며, 관객석에선 비통의 탄성만이 흘러나온다. 이들은 여직 자신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며 발뺌한다. 그렇다면 약 2만 명이 되는 아이들의 삶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가? 입양인 커뮤니티 뿐만 아니라,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이다.
*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하여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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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드러운 거부로서의 애도,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
2015년 퓰리처 희곡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른 『Marjorie Prime』은 유족의 기억을 통해 망자의 정체성을 재현하는 인공지능 홀로그램, ‘프라임’을 중심으로 디지털 시대 죽음과 애도의 의미를 날카롭게 질문하는 작품이다. 동명의 희곡을 각색한 영화,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 Marjorie Prime> 또한 기억이라는 삶의 요소가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과 맞물려 다양한 애도의 방식으로 분화되는지 다룬다.
그러나 '디지털 부활'은 더이상 픽션의 영역이 아니다. 2016년, 러시아 기자였던 Eugenia Kuyda는 사랑하던 연인을 잃고 그와 나눈 메시지를 모두 모아 구글 기반의 신경 네트워크(neural network)를 활용하여 그를 챗봇으로 부활시켰다. 챗봇 버전의 연인은 정말 사람 같아서 Kuyda는 챗봇과 과거와 미래에 관한 얘기를 나누며 연인을 잃은 슬픔을 해소했고,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이 쓸 수 있는 대화형 챗봇, ‘Replika’를 만들었다. 한국에서도 2020년부터 매년 사망한 가족을 딥페이크, VR, 인공지능 등의 기술을 활용하여 ‘부활’시키는 <VR휴먼다큐멘터리-너를 만났다> 프로그램이 방영되었다. 2025년 현재, 구글 플레이 스토어 기준 ‘Replika’의 다운로드 수는 천만 회를 넘어섰고, <너를 만났다> 프로그램 시즌 1 유튜브 클립 영상 조회 수는 3천 6백만 회를 기록하는 등, 디지털 부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인공지능을 활용하여 망자를 시청각적으로 재현하는 '디지털 부활'이 점점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고인이 된 이후에도 사랑하는 사람과 닿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디지털 기술을 통한 부활을 가속화하고 있다. 조형래는 “망자를 기리는 첨단의 기술적 방식이 막대한 규모의 사회적 정동의 재구성을 초래하고, 죽음에 대한 사회적 태도 및 문화적 관행 전반에 영향을 초래할 것임이 분명”하다면서, “이러한 초혼(招魂)의 테크놀로지가 프로이트적 의미의 애도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더 나아가 유족들에게 끊임없는 추모의 고통을 유발”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반면 디지털 시대 죽음의 의미를 연구하는 심리학자인 일레인 카스켓은 디지털 기술을 통한 애도가 지속적 결속(continuing bonds)의 한 종류라고 주장하면서, 고인과 유대 관계를 끊지 못하는 이들을 우울증 환자로 취급하는 경향을 문제시한다. 카스켓에 따르면, 고인과 유대 관계를 유지하려는 사람들은 사랑하던 고인과 맺은 심리적, 정서적 유대를 소중히 하거나 심지어 더 강화하고자 하는 오래된 충동에 따르는 것뿐이다.
영화는 마조리가 월터 프라임, 그러니까 15년 전 사망한 자신의 남편을 홀로그램으로 재현한 인공지능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월터 프라임은 자신이 청혼하던 날 함께 봤던 영화,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 얘기를 꺼내고, 치매에 걸린 마조리는 이를 기억하지 못한다. 중요한 기억을 잊어버린 자신을 원망하던 마조리는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 대신 “<카사 블랑카>를 보고 돌아온 날 청혼했다면?”이라고 묻고, “다음에 우리가 (청혼) 얘기를 나눌 때는 이게 사실이 되는 거야.”라고 말한다. 어차피 거짓된 기억을 말해도 치매로 인해 사실 여부를 제대로 판단할 수 없는 마조리는 이후로도 종종 월터 프라임에게 왜곡된 기억을 요청함으로써 망상적 위안을 얻는다.
생의 끝자락, 기억을 왜곡해서라도 숨기고 싶은 과거는 월터 프라임이 예전에 키우던 강아 지인 토니 얘기를 꺼내면서 분명해진다. 월터 프라임은 마조리에게 ‘자식이 없던 한 연인이 토니라는 이름의 검은색 푸들을 키웠는데, 토니가 죽고 나서 낳은 딸-테스-도 검은색 푸들을 골랐다’라는 이야기를 해준다. 마조리가 두 번째 푸들에게 ‘토니 2세’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설명하자, 월터 프라임은 두 번째 푸들도 금방 ‘토니’라고 불렸다며, 두 강아지가 완전히 똑같지는 않았음에도 나중에는 토니와 토니 2세를 구분하는 의미가 없어졌다고 말한다. 여기서 토니는 -2막에서 등장하는 앵무새와 마찬가지로-망자와 망자를 재현한 프라임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첫 번째 토니를 죽이고 자살한 마조리의 아들, 데미안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월터 프라임이 토니의 죽음을 설명할 때 마조리가 흘리는 눈물은, 키우던 강아지에 대한 그리움이라기보다는 아들의 자살이라는 트라우마를 대면한 자의 눈물로 해석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애도(슬픔)와 우울 Trauer und Melancholie」에서 애도를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에 대한 반응”으로 규정하고, 여기에는 “사랑하던 사람을 대신할 새로운 사랑의 대상을 찾지 못하는 것, 그리고 사랑하던 이를 생각나게 하는 어떤 행동도 금하는 것, 등이 포함된다”라고 설명한다. 달리 말해, 상실을 경험한 사람은 ‘자아의 억제’를 통해 상실 그 자체 외에 다른 곳에는 관심을 둘 수 없는 상태가 된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슬픔(애도)이 “사랑하던 대상이 더는 존재하지 않음을 인식하고 그 대상에 부과되었던 리비도를 철회”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반발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러한 반발이 너무 강하게 되면 상실을 경험한 사람이 아예 “현실에 등을 돌리는 일이 일어나게 되고, 환각적인 소원 성취의 정신병을 매개로 예전의 그 대상에 집착”하게 된다. 프로이트는 이렇듯 정상적 애도에 실패한다면 상실이 자아를 잠식하고 이것이 자기 혐오적 우울증으로 이어진다고 설명하지만, 대상의 상실이 극단적인 트라우마인 마조리의 경우, 자기 혐오적 우울보다는 오히려 그 대상을 무의식적으로 격리하려는 억압(repression)에 가까운 행동을 보인다.
“정신적 트라우마 현상의 핵심은 기억(표상)과 정동”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트라우마를 유발한 사건에 대한 강한 정동적 반응이 있었는지다. 달리 말해, 외상적 사건이 유발한 정동을 언어, 또는 행동으로 수행하지 않으면 정동의 잔여가 정신적 트라우마를 유발하는 것이다. 따라서 히스테리 환자들은 주로 트라우마적 사건의 상기(회고)로 인해 고통을 겪는다. 데미안의 죽음이 마조리에게 트라우마를 유발한다면, 이는 데미안에 대한 애도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데미안이 사랑했고, 데미안이 죽인 토니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마조리는 강한 정동을 경험한다. 이러한 반복적인 표상(기억)의 회고는 마조리에게 고통을 줄 뿐이다. 그래서 마조리는 데미안을 충분히 애도하는 대신, 데미안의 죽음이라는 표상의 억압을 택한다.
마조리는 지난 50년 동안 데미안의 이름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고, 그와 관련된 모든 사진을 집에서 치운 채 살아왔다. 하지만 치매에 걸린 마조리는 데미안이 죽었다는 사실을 잊고 테스에게 “데미안은 지금 자?”라고 묻는다. 마조리가 치매를 앓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아무렇지도 않게 데미안의 행방을 물은 직후 월터와 공원 벤치에 앉아 사프란 색의 깃발을 바라보던 기억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마조리의 모습은 모순적이다. “(벤치에서) 일어나기 싫었어. 남은 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으니까”라는 마조리의 대사는 데미안의 죽음 이후에도 삶을 이어나가야 하는 마조리의 처참한 심정을 대변한다. 이것은 데미안의 죽음이라는 표상 (기억)이 사라진 이후에도 지속되는 정동의 잔여를 의미한다.
존은 마조리가 해준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월터 프라임에게 마조리가 사프란 깃발을 바라봤던 날의 추억을 전해주지만, 영화는 플래시백 장면을 통해 마조리가 사실 공원 벤치가 아닌, 거실 소파에 앉아 TV에 나온 장면을 봤던 것임을 밝힌다. 테스의 주장처럼, 마조리는 “원래의 모습이 아니라 마지막 기억을 기억하는 것이며” 따라서 기억은 “되풀이될수록 희미해지는 복사본”과 같은 것이 된다. 결국 프라임에게 주입되는 기억은 “실제 기억이라기보다는 마조리가 기억하거나, 기억하고 싶은 과거”이다. 이렇듯 마조리와 월터 프라임을 통해 재구성되는 기억은 특정 시선에 의해 오염된 기억이며, 따라서 데미안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을 방해한다.마조리에게 데미안의 죽음은 너무도 고통스러운 기억이기 때문에 마조리는 본능적으로 이를 억압하려 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억압이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 확연한 간극이 생길 때 발생”한다며, “억압의 본질은 자아를 위협하는 본능(충동)을 의식으로 진입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억압의 동기와 목적은 본능이 만들어낸 “불쾌를 피하는 것”이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트라우마가 해소되기 위해선 “억압의 극복과정을 통한 기억의 회복”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아들의 자살이라는 트라우마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치매에 걸린 마조리는 월터 프라임의 외형을 아들이 자살하기 전인 젊은 시절로 설정하면서 아들 죽음 이전의 과거로 회귀하고자 하는 충동을 보인다. 아들을 충분히 애도하지 못하고 오히려 아들의 죽음을 잊고자 하는 마조리의 태도는 현실 도피적 성향을 띤다는 점에서 월터 프라임이 제공하는 망상적 위안을 통해 유지된다.
월터 프라임을 비교적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마조리조차도 망자와 망자를 재현한 인공지능 사이의 간극이 촉발하는 ‘두려운 낯섦’을 겪는다. 두려운 낯섦은 “공포감(또는 기이한 불안)의 일종으로,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오래전부터 친숙했던 것에서 출발하는 감정”이다. 이정환은 프로이트가 말한 ‘두려운 낯섦’이라는 개념이 로봇 공학과 관련된 논의에서 흔히 들을수 있는 “불쾌한 골짜기”와 연관이 있다고 설명한다. 두려운 낯섦에 대한 프로이트의 주장 처럼, 불쾌한 골짜기에 대한 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비인간에 대한 인간의 무의식적 두려움”이 명백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프라임이라는 ‘기술’에 호의적이든, 그렇지 않든,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신이 사랑 하는 사람을 재현한 프라임과 마주했을 때, 프라임이 자신이 생각했던 망상적 위안을 충분히 제공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왜곡된 기억을 그대로 흡수하고, 젊었을 적 외형이 데미안의 죽음 이전을 상기하는 월터 프라임을 통해 데미안의 죽음이라는 트라우마적 사건을 억압 하는 마조리조차도, 월터 프라임이 월터 그 자체가 아니라는 사실에 불쾌감을 느낀다. 자신이 생각한 실재의 이미지를 프라임이 충분히 재현하지 못할 때, 프라임은 망자의 말을 의미 없이 반복하는 앵무새에 불과한 존재가 된다.
이정환은 대상의 기억을 주입하면, 프라임을 통해 그 사람의 존재가 영원히 지속될 수 있지 만, 이 기억은 살아 있는 자의 욕망이 투영되어 있다는 점에서 실재 망자와는 다른 결핍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생전에 사랑했던, 친숙한 망자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망자와는 다른 프라임의 모습은 유령과도 같은 두려운 낯섦을 유발한다. 허구의 작품뿐만 아니라 현실속 디지털 부활 또한 두려운 낯섦을 유발하는 건 매한가지다. 조형래는 디지털 기술을 통한 망자의 재현은 늘 “고인에 대한 추모와 의미 부여를 둘러싼 다양한 상호작용을 거스르는 미묘한 위화감을 수반한다”라고 설명한다. 이렇듯 작품 안팎에 무관하게, 기술적 한계는 감각적인 측면에서도, 인지적인 측면에서도 대상을 완벽히 재현해낼 수 없다는 점에서 늘 기이한 불안, 두려운 낯섦, 즉 불쾌감을 유발한다.
테스에게도 데미안의 죽음은 평생의 트라우마이다. 마조리는 평생 데미안의 이름 한 번 꺼낸 적 없지만, 테스는 늘 데미안의 죽음으로 인해 마조리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정신적 외상은 테스의 자아에도 영향을 미쳐 영화 내내 테스는 “예민하고 성마른 성격의 소유자이자, 매사에 부정적인” 사람으로 묘사된다. 테스는 월터 프라임에게 질투를 느낄 정도로 프라임에 대해 부정적이지만, 결국 마조리가 사망하자 치유의 도구로서 마조리 프라임을 소환한다.
마조리 프라임은 테스에게 ‘토니 데리고 해변에 갔던 거 기억하니?’라고 묻는다. 테스는 기억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존이 개를 키우자고 제안했다면서, ‘카타훌라’를 고려하고 있다고 말한다. 생전 마조리는 ‘카타훌라’가 무엇인지 몰랐으므로, 마조리 프라임 또한 테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그러자 테스는 마조리에게 “‘카타훌라’를 검색해 보라”고 요청한다. 이는 프라임이 진정한 ‘대상’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의 환상이 필수적임을 의미한다. 달리 말해, 이것은 프라임의 ‘이용자’가 프라임이 환상에 불과함을 인지하고 있는 한, 프라임과의 대화가 어떠한 치유 효과도 산출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프라임이 환상에 불과하다면, 프라임과의 모든 상호작용 또한 결국 허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마조리 프라임은 테스의 요청에 따라 카타훌라 하운드의 사전적 지식을 로봇처럼 읊고, 테스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며 ‘(마조리 프라임이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사실, 즉 진짜 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 모른 척을 더는 못하겠다’라고 말한다. 테스는 이어 ‘(마조리 프라임이) 정말 엄마 같다가도, 어떨 때는 (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이) 너무도 확연하다’라고 말한다. 이미 지와 실재의 간극은 이렇듯 과거가 아닌 현재의 기억으로 인해 명확해지며, 테스로 하여금 ‘엄마처럼 친숙하지만, 엄마가 아닌’ 두려운 낯섦을 느끼게 한다. 이어지는 장면은 이 두려운 낯섦으로 인해 프라임이 어떻게 치유의 실패로 이어지는지 묘사한다.
표면적으로 테스는 엄마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했다는 콤플렉스를 갖고 있지만, 그의 근원적인 트라우마는 마조리와 마찬가지로 데미안의 죽음이 원인이다. 마조리 프라임은 ‘진짜 엄마 같지 않다는’ 테스의 불만에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더 해달라고 말하고, 이는 자연스럽게 테스가 엄마의 기억을 회고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마조리 프라임은 테스에게 결정적인 질문을 던진다. 마조리 프라임이 ‘테스 말고 다른 자식이 있었냐’고 묻자, 테스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없었다’라고 대답한다. 생전 마조리가 평생 데미안을 언급하지 않았던 것처럼, 테스 또한 데미안에 대한 기억을 숨기면서 자신의 트라우마를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반드시 생생한 정동적 경험을 포함하여, 망각된 외상적 사건을 기억해 정확히 말로 표현”할 때야 비로소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트라우마의 심리적 치유를 위해선 단순한 외상적 사건의 재현을 넘어선 생생한 재경험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프라임은 얼마든지 남아있는 자들에 의해 왜곡된 기억만을 선별적으로 저장할수 있으므로, 치유의 ‘도구’로서 프라임은 제 기능을 다 할 수 없다. 기억의 선별과 왜곡된 기억이 유발하는 이미지와 실재의 간극, 즉 두려운 낯섦은 심리적 치유를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라깡은 “욕망의 중심에 놓여있는 결여”를 ‘'대상 a'’라고 지칭하면서, 상상계적 질서 속에서 이 대상은 어떤 욕구도 충족시키지 못한다고 설명한다. 테스는 마조리 프라임을 형성하기 이전부터 자신이 원하는 어떤 환상을 프라임에게 투사한다. 이 환상은 데미안의 죽음을 기억하지 못하는, 그래서 자신에게 늘 다정하고 충분한 사랑을 주는 엄마이다. 그러나 마조리 프라임이 정말 테스에게 인자하게 미소 지으며 다정한 말을 건네자, 테스는 ‘덜 웃어야 엄마 같아 보인다’라고 충고한다. 테스의 '대상 a'-엄마의 사랑이라는 욕망의 결여-를 충족하기 위해서 마조리 프라임은 테스에게 생전에 주지 못했던 사랑과 다정함을 주어야 하지만, 동시에 사랑을 주면 줄수록 ‘진짜’ 마조리와는 멀어진다는 점에서 테스의 환상은 결코 충족될 수 없다.
애증의 대상이자 환상 속 '대상 a'인 엄마의 상실은 테스를 우울로 이끈다. 프로이트는 우울과 슬픔의 차이를 ‘자애심의 추락’으로 설명한다. “우울증 환자는 대상과 관련된 상실감으로 고통을 겪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말을 들으면 그것이 자아와 관련된 상실감이라는 것이다.” 테스는 계속해서 마조리와 존의 입을 빌려 자기 자신을 ‘무너졌다’거나, ‘엄마를 사랑하게 만들 수 없었다’고 표현한다. 마조리에게 향해 있던 애증의 리비도가 마조리의 죽음 이후 갈 곳을 잃고 테스의 자아를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눈치라도 챈 듯 마조리 프라임은 테스에게 ‘자기 자신에게 너무 가혹하게 굴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나 마조리 프라임과 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애도의 실패-우울증은 결국 테스를 자살이라는 파괴 충동으로 이끈다.
프로이트가 정상적인 애도, 달리 말해 상실을 극복하고 애도를 마무리하는 ‘작업’을 중시했던 까닭은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이 자아를 좀먹고 파괴 충동으로 이끄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데리다는 정상적인 애도와 비정상적 애도를 구분하는 프로이트의 애도 이론을 비판하면서, 죽음이 타자를 잊는 여정의 시작이 아니라, 타자를 기억하는 여정의 시작이라고 주장한다. “데리다가 보기에 프로이트의 정상적인 애도가 갖는 문제는 타자의 타자성을 말살하려 한다는 데 있다. 성공적인 애도 작업을 통해 내면화가 가능해지면, 타자는 나의 일부가 되는데, 그렇게 되면 타자는 더는 타자가 아닌 것이 되기 때문이다.”
마조리에 대한 테스의 정동-상실감으로 인한 우울, 사랑, 증오-은 너무 강력해서 테스는 자신의 편협한 시선에서 기억하는 마조리의 모습-약간 허영심이 있고, 까칠하며, 자신에게 한번도 사랑한다고 해준 적이 없을 만큼 데미안을 사랑한-만을 회고한다. 마조리 프라임은 이렇듯 테스의 내면화된 타자를 온전히 재현할 수 없다는 점에서 테스에게 두려운 낯섦을 유발하고, 프로이트식의 ‘정상적인 애도’를 완수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러나 애도의 실패가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애도는 “가능성과 불가능성, 성공과 실패의 반복적 진동 속에서 수행 적으로 이루어지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테스의 자살 이후, 존 또한 테스 프라임 앞에서 두려운 낯섦을 느낀다. 평소에도 프라임에 호의적이었던 존은 테스 프라임을 더 진짜 테스처럼 만들기 위해 적어두었던 테스의 특징들을 테스 프라임에게 읊어준다. 하지만 존 또한 이내 ‘(프라임은) 반사판 (Backboard)에 불과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나는 지금) 혼잣말을 하고 있다’라고 말하며, 테스 프라임과의 대화에 회의를 느낀다. 그러나 데리다에 따르면, 이러한 ‘좌절된 내면화’는 “타자를 타자로서 존중하는 것, 즉 부드러운 거부의 자세”를 의미한다. 프라임에게 아무리 왜곡된 기억을 주입한다고 해도, 프라임이 환상 속 ‘대상 a’를 완벽하게 충족하는 것은 아니다. 남아있는 자는 필연적으로 이미지와 재현의 간극으로 인한 두려운 낯섦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려운 낯섦이 초래하는 애도의 실패는 동시에 ‘타자를 타자로서 받아들이는’ 애도의 시작이 된다.
데리다는 “기억을 통한 내면화”가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자아를 잠식하는 멜랑콜리아를 긍정하는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멜랑콜리아는 타자를 버려두고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일종의 나르시시즘적 퇴행 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데리다는 “애도의 가능성과 불가 능성이 만나는 지점, 애도의 성공과 실패가 같아지는 지점, 애도와 멜랑콜리아가 중첩되는 공간”에 주목한다. 즉, “애도는 타인의 세계가 끝날 때, 타인을 위해 그 끝을 내 안에 담는 것이며, 동시에 관념화, 내면화, 그리고 식민화에 저항”해야 한다. “타자를 관념화하는 내사 (introjection)가 망각의 시작 지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멜랑콜리아는 극복해야 할 질병이 아닌, 내사에 저항하는 힘이 된다.
존이 테스 프라임에게 느끼는 두려운 낯섦은 이러한 멜랑콜리아를, 자기혐오의 감정을 유발한다. 그러나 이 두려운 낯섦이야말로 테스 프라임을 ‘존의’ 테스로 만들려는 시도를 무화하고, “살아남은 자인 존에게 허락된 삶 자체”를 끊임없이 인식하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존의 삶 속에 공거(cohabitation)하는 테스 프라임은 “우리 안에 사는 ‘목격자’”이다. 존은 마조리처럼 죽음을 망각하는 망상적 위안에 의존하지도, 테스처럼 멜랑콜리아를 견디다 못해 자살에 이르지도 않는다. 대신, 그는 자신의 시선에서 바라본 테스를 내면화하고, 테스와의 기억을 회고하며, 동시에 프라임의 본질적인 두려운 낯섦을 인식하고 절망하기를 반복하면서 테스의 죽음을 애도한다.
데리다는 “타자가 타자성을 유지하면서 우리와 대화 관계에 있는 ‘생각하는 기억’을 애도의 본질”로 보았다. 따라서 데리다는 멜랑콜리아와 애도가 분리된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인식할 수 없는 것은 인식하려는 애도, 달리 말해 애도 가능성과 애도 불가능성 사이의 진동이 애도하는 텍스트의 직물을 짜고, 애도의 성공과 실패 사이의 아포리아가 길을 여는” 멜랑콜리한 애도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애도라고 주장한다. 인류 탄생 이래, 현실적으로 망자의 발언이 가능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최근 디지털 기술의 발전은 망자의 발언을, 망자의 부활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데리다가 만약 살아 있다면, 망자의 동의 없는 기계적인 디지털 부활을 경계했으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한 디지털 부활은 오직 남아있는 자의 나르시시즘적 멜랑콜리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만 제작되고, 이용된다는 점에서, 기계적 디지털 부활은 너무도 쉽게 프로이트적 애도 작업의 완수를 위한 도구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앞서 프라임이 어떻게 “멜랑콜리아를 ‘극복’하는” 애도의 실패를 전제하는지 살펴보았다. 특히, 프라임은 남아있는 자가 주입한 ‘기억’과 새롭게 형성된 ‘지식’, 그러니까 다른 프라임과 대화하거나 인터넷에 검색함으로써 얻어낸 지식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애도의 실패와 성공을 오간다는 점에서, 데리다적 멜랑콜리한 애도를 체현한다. 존이 손녀를 테스 프라임에게 소개하는 장면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멜랑콜리한 애도를 예증하는 장면이다. 존이 테스 프라임에게 ‘손녀가 분류학을 공부하고 있다’라고 설명하자, 테스 프라임은 ‘이분법(Dichotomous)을 이용하지’라고 대답한다. 자연스럽게 분류학에 관한 대화를 이어 나가는 테스 프라임과 달리, 존은 테스 프라임이 분류학에 관한 지식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존의 시선에서 바라본 테스의 기억과 테스 프라임이 새롭게 얻은 지식의 혼합은 이전 에는 ‘말할 수 없던 것’, 즉 손녀와의 예측할 수 없는 상호작용을 존이 인식하게 한다. 존은 마치 어린아이 다루듯 테스 프라임에게 ‘입양이 무슨 뜻인지 알지?’라고 묻다가도, 이분법을 말하는 테스 프라임에게 놀라면서 애도의 성공과 실패를 경험한다. 테스 프라임은 그런 의미에서, 존의 내면에 식민화될 수 없는 테스의 이미지를 새기고, 테스의 죽음을 인식함과 동시에 존의 내면에 의해 식민화되지 않은 테스 그 자체를 기억하고, 애도하도록 돕는다.
데리다의 관점에서 프라임의 가장 큰 의미는 ‘내면화되지 않는 지속적 기억’에 있다. 프라임은 남겨진 자들의 기억에 의존하지만, 동시에 그 기억은 인간과 달리, 프라임의 내면에 잡아 먹히지 않고 영원히 그 상태를 유지한다. 인간의 기억은 꺼내면 꺼낼수록 희미해지거나 왜곡되지만, 프라임의 기억은 처음 상태 그대로 지속되며, 프라임 자신의 내면에 의해 오염될 가능성도 없다. 인간이 되고 싶은 욕구를 드러내긴 하지만, 프라임에게 인간과 같은 완전한 자아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러한 프라임의 기억을 영화에서 다양하게 변주되고 반복되는 ‘물’의 이미지를 통해 시각화한다.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은 희곡인 원작의 특성을 반영하여, 한정된 인물과 배경을 활용한, 절제된 미쟝센을 사용한다.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프라임 외에 다른 기술적인 특징은 눈에 띄지 않으며, 심지어는 기본적인 가구 이외의 소품조차 얼마 등장하지 않는 미니멀리즘적 미쟝센은 프라임과 인물들의 관계에 집중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미니멀리 즘적 집 내부와 대조적인 과잉 생산되는 물의 이미지는 영화의 주제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메타포다.
월터와 마조리의 집이자 테스와 존의 집인 영화의 주된 배경은 바닷가에 위치한다. 그래서 영화는 해변가를 걷는 테스와 존의 모습이라든가, 인물 없이 파도치는 장면이 종종 삽입하거나, 계단 옆에 걸린 파도 그림을 클로즈업하기도 한다. 토니가 해변가 달리기를 좋아했다는 마조리의 대사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데미안을 상징하는 토니가 사랑했던 바다는 영화 내내 ‘죽음’, 또는 일종의 상실을 상징한다. 마조리, 테스, 존이 사망한 이후 파도-또는 파도를 그린 그림-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죽음을 재현한 이미지인 프라임이 등장할 때는-집이 바닷가에 위치함에도- 어둡고 꽉 막힌 실내나, 또는 커튼 뒤로 희미하게 비치는 나무만이 등장한다. 하지만 세 프라임이 모인 마지막 장면에서는 거실 밖 커튼이 활짝 젖혀있 으며, 잔잔한 바닷가의 모습이 포커싱되도록 인물을 모두 같은 방향에서 촬영된 것을 알 수있다. 이는 궁극적인 영화의 주제인 죽음과 애도를 인간이 모두 사망한 뒤에도 프라임이 이어가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한 연출로 해석할 수 있다.
두 번째로 중요한 메타포는 ‘비’인데, 영화에서 딱 두 번 등장하는 폭우는 영화의 두 번째 주요 키워드인 ‘인간의 기억’과 연관성이 있다. 희미해지는 인간의 기억처럼, 비는 끊임없이 흐르고, 또 쉽게 휘발되고 만다는 점에서 인간의 기억을 상징한다. 따라서 프라임 뒤에 켜켜이 쌓이는 포근한 눈의 이미지는 인간의 기억처럼 흘러가지 않고 차갑게 냉동되어 켜켜이 쌓이는 프라임의 기억을 시각화한 것이다. 이는 영화 속 첫 번째 폭우 장면에서 존과 테스가 기에 대해 나눈 이야기와도 일맥상통한다. “되풀이될수록 희미해지는 복사본”같은 인간의 기억과 달리, 프라임의 기억은 “뇌 안의 퇴적층”처럼, 모든 기억을 원본 그대로 냉동시켜 저장 한다는 점에서 눈과 닮았다.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에서 얼마가 흘렀는지조차 알 수 없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월터, 마조리, 테스 프라임은 한자리에 모여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그들 뒤 넓은 창에는 눈 내리는 바닷가의 풍경이 있다. 켜켜이 쌓이는 눈과 파도치는 바닷가가 보이는 통창 앞에서 프라임은 데미안의 죽음을 끄집어 낸다. 유일하게 데미안에 대한 기억을 들은 월터 프라임이 데미안의 죽음을 언급하고, 데미안에 대해 알지 못했던 테스와 마조리 프라임도 월터 프라임과의 대화를 통해 데미안을 추억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특히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니 얼마나 좋아’라는 마조리 프라임의 마지막 대사는 수 세기가 지난 뒤에도 바래지 않고 타자를 기억하는 애도의 자세를 체현한다. 그러므로 세 프라임 뒤로 펼쳐진 ‘눈 내리는 바닷가’는 테스, 월터, 마조리뿐만 아니라 데미안과 존까지 프라임이 모든 ‘타자’의 죽음을 인간과는 다른 방식으로 영원히 기억하고 있음을, 서정적인 이미지로 형상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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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분석영상 :
- 매트릭스1 영화정보
장르: SF, 액션
감독/각본: 워쇼스키 형제
제작: 조엘 실버, 댄 크라치올로, 캐롤 휴스, 리차드 미리쉬
음악: 돈 데이비스
촬영: 빌 포프
편집: 자크 스탠버그
출연: 키아누 리브스, 로렌스 피시번, 캐리앤 모스, 휴고 위빙 외
제작사: 실버 픽처스, 빌리지 로드쇼 픽처스, 아츠 엔터테인먼트, 그라우쵸 II 필름 파트너쉽
배급사: 미국 워너 브라더스, 호주 로드 쇼 엔터테인먼트
개봉일: 미국 1999년 3월 31일, 대한민국 1999년 5월 15일
화면비: 2.39 : 1
제작비: 6300만 달러 ~ 6500만 달러
상영 시간: 136분
북미 박스오피스: $171,479,930 (1999년 9월 23일), 월드 박스오피스 $463,517,383 (2003년 3월 10일)
상영 등급: 12세 관람가
- 매트릭스2 리로디드 영화정보
장르: SF, 액션
감독/각본/원작: 워쇼스키 형제
제작: 조엘 실버, 비키 포플웰, 스티브 리처즈, 필 우스터하우스
음악: 돈 데이비스
촬영: 빌 포프
편집: 자크 스탠버그
출연: 키아누 리브스, 로렌스 피시번, 캐리앤 모스, 휴고 위빙, 글로리아 포스터, 제이다 핀켓 스미스, 해럴드 페리노, 모니카 벨루치, 랑베르 윌슨, 지나 토레스, 랜들 덕 김, 예성
제작사: 미국 빌리지 로드쇼 픽처스, 미국 실버 픽처스, NPV 엔터테인먼트, 하이네켄 브랜디드 엔터테인먼트
배급사: 워너 브라더스. 호주 로드 쇼 필름 디스트리뷰터스
개봉일: 미국 국기 2003년 5월 15일, 대한민국 국기 2003년 5월 22일, 호주 국기 2003년 5월 16일
화면비: 2.39 : 1
제작비: 1억 5,000만 달러
상영 시간: 138분
북미 박스오피스: $281,576,461 (2003년 10월 30일)
월드 박스오피스: $742,128,461 (2011년 11월 25일)
- 매트릭스3 레볼루션 영화정보
장르: SF, 액션
감독/각본/원작: 워쇼스키 형제
제작: 조엘 실버, 비키 포플웰, 스티브 리처즈, 필 우스터하우스
음악: 돈 데이비스
촬영: 빌 포프
편집: 자크 스탠버그
출연: 키아누 리브스, 로렌스 피시번, 캐리앤 모스, 휴고 위빙, 글로리아 포스터, 제이다 핀켓 스미스, 해럴드 페리노, 모니카 벨루치, 랑베르 윌슨, 지나 토레스, 랜들 덕 김, 예성
제작사: 미국 빌리지 로드쇼 픽처스, 미국 실버 픽처스, NPV 엔터테인먼트, 하이네켄 브랜디드 엔터테인먼트
배급사: 워너 브라더스. 호주 로드 쇼 필름 디스트리뷰터스
개봉일: 미국 국기 2003년 5월 15일, 대한민국 국기 2003년 5월 22일, 호주 국기 2003년 5월 16일
화면비: 2.39 : 1
제작비: 1억 5,000만 달러
상영 시간: 129분
북미 박스오피스: $139,313,948 (2004년 2월 26일)
월드 박스오피스: $427,343,298 (2004년 3월 28일)
- 매트릭스4 영화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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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물] 끝장리뷰 | 세 개의 챕터(3막 구조) 분석 | 물과 불 상징 | 천국과 지옥, 신발 의미 | 남성과 여성 | 두 어머니 | 결말해석
[괴물](2023)에 대한 헐거운 리뷰
Chapter 1 3개의 Chapter, 지옥과 신발
Chapter 2 미나토와 요리, 물과 불, 여성과 남성, 결말해석
00:00 고레에다 히로카즈
01:58 3막 구조
04:56 천국과 지옥, 신발
06:16 미나토와 호리
07:10 남성과 여성
10:17 물과 불
11:32 결말해석
13:03 별점 및 한 줄 평
13:21 다음 리뷰 예고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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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히즈 올 댓> 공식 예고편
애디슨 레이와 태너 뷰캐넌 주연의 《히즈 올 댓》은 1999년에 나온 10대 영화의 클래식 《쉬즈 올 댓》을 재창조한 작품이다. 시대에 맞게 변신한 이번 영화는 엄청난 도전을 받아들인 인플루언서(애디슨 레이)의 이야기. 그녀는 학교 최고의 루저(태너 뷰캐넌)를 프롬의 왕으로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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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내겐 너무 소중한 너> 메인 예고편
가짜라도! 아빠가 되어야 한다!
돈만 빼고 세상 무서울 게 없다고 호언장담하던 ‘재식’은
갑자기 세상을 떠난 ‘지영’의 전재산을 먹튀하기 위해
‘지영’의 딸 ‘은혜’의 가짜 아빠를 자처하게 된다.
알고 보니 ‘은혜’는 시각과 청각 장애를 모두 가진 아이.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은혜’를 귀찮아 하던 ‘재식’은
손끝으로 세상을 느끼는 ‘은혜’만의 특별한 방식에
조금씩 익숙해지기 시작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