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의 영화2025-09-24 15:31:23
영화에 신화를 입힐 때 「이니셰린의 밴시」
영화 「이니셰린의 밴시」 리뷰
아일랜드의 외딴 섬마을 이니셰린. 이곳에는 매일 동네 펍에서 함께 맥주를 마시는 절친 '파우릭'과 '콜름'이 있다. 둘 다 딱히 재밌는 일이 있는 건 아니다. 좋게 말하면 평화롭고 나쁘게 말하면 단조로운 이니셰린의 일상은 숨 막히게 조용하다. 간간이 본토에서 들려오는 나지막한 대포 소리만 있을 뿐(영화의 배경은 아일랜드 내전이 벌어지던 1923년이다).
그러던 어느 날, '콜름'은 돌연 '파우릭'에게 절교를 선언하며 다시는 자신에게 찾아오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갑작스러운 이별(?)을 받아들일 수 없던 '파우릭'은 관계 회복을 위해 파우릭을 찾아가지만, 돌아오는 건 차가운 말뿐이다.
"그냥 이제 자네가 싫어졌어"
관계를 회복해 보려 할수록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결국 이들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익히 알려진 대로, 영화의 기저에 깔려 있는 것은 아일랜드 내전이라는 역사적 사건이다. 실제로 영화 내내 바다 건너 본토에서 총과 대포 소리가 들려오고, 내전에 대해 언급하는 인물들의 대사도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이니셰린의 밴시」는 전쟁에 대한 영화가 아니다. 역사적 기록에 대한 영화도 아니다. 전쟁은 이니셰린과 아무런 상관없다(어느 쪽이 어느 쪽을 처형하는지는 상관없다는 작중 경찰관 '피더'의 말처럼). 이니셰린과 상관있는 문제는 전쟁이 아닌 '비극'이다(전쟁은 비극의 구체적인 한 형상일 뿐, 비극=전쟁은 아니다)
「이니셰린의 밴시」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숨 막히게 아름다운 몽타주다. 깎아지른 듯한 해안절벽, 짙푸른 바다, 티 없이 맑은 하늘과 당나귀와 댕댕이.. 영화가 아름다운 몽타주를 의식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영화의 배경이 아일랜드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는 둘도 없는 친구이던 '콜름'과 '파우릭'이 혈흔이 난무하는 원수가 돼버린 것은 인간 본연에 내재되어 있는 필연성 때문이지, 정치나 전쟁 때문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는 하나의 수사법이다.
이에 더해, 영화의 제목이면서 작품 내에서도 계속 언급되는 '밴시'는 죽음을 암시하는 고대 켈트 신화의 요정이다. 영화 속에선 일종의 동네 예언자(?)처럼 묘사되는 맥코믹 부인이 그 역할을 대신하는데, 「이니셰린의 밴시」에서 밴시(맥코믹 부인)이 자꾸 등장해 스크린을 점유하는 것 역시 필연성, 비극에 대한 일종의 환유다. 그녀는 항상 말없이 지켜보는 존재로 묘사되는데, 특히 동네 양아치 '도미닉'의 죽음 시퀀스에서 맥코믹 부인의 모습은 거의 사신 혹은 운명의 신이 가진 이미지에 근접한다.
그런 의미에서 맥코믹 부인이 불만스럽게 지켜보는 가운데 '콜름'과 '파우릭'이 대화를 나누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본토에서 들려오는 총포소리를 들으며 '파우릭'에게 사과를 건네는 '콜름'. 그러나 콜름은 "(본토의 내전이) 아마도 계속 될 것 같아요. 그게 좋은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이는 끝나지 않고, 앞으로도 끝나지 않을 갈등은 이니셰린의 필연이라는 뜻이지 않을까.
영화가 끝나는 시점까지 맥코믹 부인이 예지한 두 개의 죽음은 실현되지 않았는데(이니셰린에서의 죽음은 도미닉과 당나귀 밖에 등장하지 않았다), 어쩌면 예언의 두 번째 죽음은 앞으로도 영원히 공란으로 남을 수도 있다. 죽음을 노래하는 밴시의 목소리는 끊이지 않을 테니까..
마틴 맥도나는 아일랜드 내전을 경유해 특정한 정치적 메시지를 드러내기보다 그저 대립의 상황을 적시하는 데 그친다. 둘의 강경한 고집이 사태를 악화시켜가는 정황을 묘사한다는 점에서 한쪽 편을 들어준다고 가정하기도 어렵다. 반복되는 갈등은 몇 가지 질문을 남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최선의 행동은 무엇인가
씨네 21의 조현나 기자님은 「이니셰린의 밴시」 기획기사에 위와 같이 얘기했는데, 마틴 맥도나는 충분히 이니셰린을 떠날 수 있는 상황에서도 마치 지박령처럼 땅을 맴도는 '파우릭'을 통해 '최선의 행동'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생각한다. 반복되는 갈등,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비극은 바다 건너 나지막이 들려오는 총포 소리 같은 것이지 않을까. 그것은 인간의 손을 떠나 있는 문제라고, 우리의 모든 역사와 신화와 전설들이 말해주고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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