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 신고

댓글 신고

RABBITGUMI2025-10-10 16:09:49

실패한 혁명가가 지켜낸 불씨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2025)

젊은 시절의 인간은 언제나 불타 있다. 누군가는 사랑을 위해, 누군가는 신념을 위해, 또 누군가는 단지 자신이 존재했다는 흔적을 남기기 위해 싸운다. 살아간다는 건 결국 저마다의 전쟁을 치르는 일이다. 하지만 그 전쟁은 총칼이 아니라 신념으로, 혹은 가족과의 관계 속에서 벌어진다. 그리고 그 투쟁은 언제나 불완전하다. 우리가 바라는 승리는 대체로 우리의 손에서 완성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싸움을 멈추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불완전함 속에서만 인간은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바로 그 불완전한 투쟁의 역사를 세대의 서사로 그려낸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나라, 여전히 편견과 차별의 구조 속에서 몸부림치는 사람들의 초상을 담아낸 이 영화는, 혁명이란 대의가 결국 ‘가족’이라는 가장 내밀한 관계 안에서 어떻게 이어지는가를 묻는다. 사회적 투쟁이 사라질 수 없듯, 사랑의 투쟁 또한 결코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실패할지라도, 그 불씨는 다음 세대로 건너간다. 그 대물림의 과정이 이 영화 안에 세 가지 감정으로 담겼다.

 

 

 

[첫번째 감정] 밥의 상실감

 

 

 

 

 

밥(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은 한때 세상을 바꾸겠다고 외쳤던 혁명가였다. 젊은 시절의 그는 폭발적인 성향이었고, 실제로 폭탄 설치 전문가로 활동했다. 하지만 딸 윌라가 태어나면서 그 모든 열정은 잦아들었다. 그에게 혁명은 먼 이야기가 되었다. 그는 더 이상 거리로 나서지 못했다. 대신 딸의 곁에 머물렀다. 아내 퍼피디아가 딸과 자신을 떠나버렸지만, 밥은 도망치지 않았다. 우는 갓난 아기인 딸을 달랬고, 그는 아주 정성스럽게 딸을 보며 그 상실의 공간을 딸로 채웠다. 그러나 그 선택은 역설적으로 그를 또 다른 상실로 이끌었다.

 

 

 

밥은 스스로를 실패한 혁명가라고 생각한다. 세상도 바꾸지 못했고, 가족도 지켜내지 못했다는 자책감은 그를 약물과 술에 잠기게 만든다. 그는 매일 조금씩 자신을 잃어간다. 그의 방에는 혁명의 포스터와 술병이 함께 놓여 있다. 그 병 속에서 그는 과거의 이상을, 혹은 과거의 자신을 찾으려 한다. 하지만 아무리 취해도 다시는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 그에게 남은 건 딸뿐이다. 아니 딸과 취할 술과 약이 있을 뿐이다. 너무나 소중한 아이가 존재하기에 그는 완전히 무너지지 못한다.

 

 

 

그래서 밥의 상실감은 단순한 실패의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지켜야 하는 존재’를 통해 다시 불씨를 품게 되는 감정이다. 혁명의 방식이 달라졌을 뿐, 그는 여전히 싸우고 있다. 폭탄 대신 딸의 웃음을, 투쟁 대신 보호를 택한 그의 삶은 조용하지만 깊은 저항이다. 사회를 바꾸는 혁명은 멈췄을지 몰라도, 인간을 바꾸는 혁명은 그의 품 안에서 여전히 타오르고 있다. 어쩌면 밥은 실패한 혁명가가 아니라, 혁명의 유일한 생존자일지도 모른다. 자신을 잃었지만, 혁명의 불씨를 품고 있던 그는, 마지막엔 실패자가 아니었다. 혁명을 지켜낸 사람이 되었다.

 

 

 

 

 

[두번째 감정] 록조의 욕망

 

 

 

반면 록조 대령(숀 펜)은 철저히 반대편에 서 있는 인물이다. 그는 백인 우월주의의 상징이며, 군복의 상징성과 권력의 향기를 탐닉한다. 그는 ‘질서’라는 이름으로 억압을 정당화하고, ‘애국’이라는 말로 잔혹을 포장한다. 하지만 영화가 흥미로운 건, 그의 이데올로기적 폭력 뒤에 감춰진 또 다른 욕망 때문이다. 록조는 흑인 여성에게 성적으로 끌린다. 그것은 사회적으로는, 특히 록조 대령같은 백인 남성에게는 금기이며, 개인적으로는 모순이다. 그는 자신이 혐오하는 대상을 욕망한다.

 

 

 

퍼피디아와의 관계는 바로 그 모순의 정점이다. 폭발음이 울리는 전장의 한가운데서, 두 사람은 위험과 쾌락을 동시에 탐한다. 그 장면은 불쾌할 만큼 강렬하다. 폭탄보다 뜨겁고, 권력보다 어리석다. 록조는 육체로 혁명을 정복하려는 퍼피디아에게 끌리고, 퍼피디아는 그 안에서 자신이 억눌렀던 권력의 욕망을 실현한다. 두 사람의 관계는 일종의 타락한 동맹이다. 중간중간 록조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언급하지만, 영화 전반에 등장하는 그에게 ‘사랑’은 아무 의미없는 휴지조각일 뿐이다. 그는 그 단어를 단지 이용할 뿐이다.

 

 

 

그런 결과로 결국 록조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그는 권력의 문턱에 도달하지도 못했고, 사랑도 잃었다. 그에게 남은 것은 오직 ‘강한 백인 남성’이라는 껍데기뿐이다. 가족도, 신념도, 온전한 자아도 없이 그저 증오로 스스로를 유지하는 인간. 그가 그렇게 증오를 키우는 이유는, 어쩌면 자신이 진짜로 욕망하는 것을 결코 얻을 수 없다는 절망 때문일지도 모른다. 밥이 상실 속에서 불씨를 품었다면, 록조는 욕망 속에서 스스로를 태워버린 사람이다. 록조는 주류 백인 남성에 의해 처단당하는 백인 남성이다. 미국 주류사회의 모순점은 여기서도 드러난다.

 

 

 

 

 

[세번째 감정] 윌라의 사랑

 

 

 

윌라(체이스 인피니티)는 밥의 과잉보호 속에서 자란다. 그녀는 자유를 갈망하지만, 아버지는 늘 ‘세상은 위험하다’고 말한다. 그 말은 사랑이자 억압이다. 밥은 딸을 지키려 하지만, 그 방식이 너무 절박해서 오히려 딸을 질식시킨다. 윌라는 아버지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벗어나고 싶다. 사랑은 언제나 양날의 검이다. 보호는 곧 구속이 되고, 애정은 곧 부담이 된다. 윌라에게 아빠는 귀찮은 사람이고, 약에 찌들은 골치덩이였다. 아빠의 못난 행동 속에서 딸에 대한 온전한 사랑을 찾기는 사실 어려웠다.

 

 

 

영화는 윌라가 납치되어 끔찍한 과정을 거치는 동안, 그녀가 아버지의 사랑을 다시 이해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록조의 세계는 냉혹하고, 그녀가 믿어온 ‘자유’의 세상은 생각보다 잔인하다. 그 속에서 윌라는 자신이 어릴 적 외면했던 아버지의 고통을 본다. 진짜 혁명은 총 대신 딸을 품는 일이었음을, 사랑은 단지 감정이 아니라 생존의 의지였음을 깨닫는다. 약에 찌들은 아빠였지만 그건 아빠가 가지고 있던 큰 상실감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뒤늦게 알게 된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영화의 하이라이트에 펼쳐지는 도로 추격씬이다. 구불구불한 길 위, 한 차량이 그녀를 따라온다. 윌라는 앞으로 나아가지만, 오르막을 갔다 다시 내려간다. 누가 따라오는 건지, 그 사람이 누군지 모르는 가운데, 따라오는 존재가 도로의 모양에 따라 보였다가 보이지 않는다. 모든 추격이 끝나고 아빠와 다시 재회하는 그 순간, 그녀는 진짜 혁명을 만난다. 그렇게 진짜 사랑을 확인한다. 그 뒤에 그녀의 얼굴에 떠오르는 건 두려움이 아니라 확신이다. 자신을 쫓는 게 누구든, 이제는 도망치지 않겠다는 결심. 그 순간 윌라는 아버지의 불씨를 이어받는다. 그녀의 사랑은 더 이상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세대를 잇는 혁명의 또 다른 형태다.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가장 오락적인 사회 비판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폴 토마스 앤더슨이 지금까지 보여준 어떤 영화보다도 오락적이고 직관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가장 사회적이고 철학적인 영화이기도 하다. 그는 이 작품에서 혁명과 가족, 욕망과 보호, 이상과 현실의 경계를 한데 엮는다. 영화는 거대한 정치 서사로 출발하지만, 결국엔 사랑과 상실이라는 인간적 이야기로 귀결된다.아이맥스 카메라로 촬영된 영상은 압도적이다. 거대한 스크린 위에서 폭발의 순간마다 관객의 심장은 실제로 진동한다. 음악은 그 감정을 섬세히 따라간다. 피아노의 단조 리듬은 긴장감을 조율하고, 관객의 심박수를 스토리와 함께 흔든다. 그 사운드는 혁명의 북소리이자 인간의 심장의 리듬이다.

 

 

 

연기 면에서는 디카프리오의 절제된 불안이 인상적이다. 그는 고통을 외치지 않는다. 대신 작은 눈빛과 주름 속에서 상실의 무게를 전달한다. 미완의 인간처럼 때론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이지만, 그의 진심은 변하지 않는다. 숀 펜은 그와 정반대다. 록조는 폭발적인 욕망의 화신이고, 숀 펜은 그 불안을 거의 광기에 가까운 리얼리즘으로 표현한다. 두 배우의 대비는 영화 전체의 긴장을 유지시킨다. 그리고 체이스 인피니티의 윌라는 그 둘의 중간 지점에서 완벽히 성장한다. 그녀는 상처와 사랑을 동시에 체화한, 새로운 세대의 얼굴이다.

 

 

 

이 영화가 한국에서 상영관을 많이 확보하지 못한 건 안타까운 일이다. 오락성과 철학성을 동시에 가진 작품이 흔치 않은데, 이 영화는 그 균형을 기적처럼 이뤄냈다. 단순한 정치 영화도, 단순한 가족 드라마도 아니다. 그것은 ‘삶이란 연속된 투쟁의 역사’라는 명제를 스크린 위에 시각화한 대서사다.

 

 

 

결국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우리에게 질문을 남긴다. “당신은 지금 어떤 투쟁을 이어가고 있는가?”. 누군가의 혁명이 실패로 끝났다면, 그 불씨는 당신의 삶에서 어떻게 다시 피어날 것인가. 삶은 한 번의 승리가 아니라, 이름 모를 수많은 전투들의 연속이다. 그리고 그 전투 속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단 하나의 것은, 결국 ‘사랑’이다.

작성자 . RABBITGUMI

출처 . https://brunch.co.kr/@moviehouse/866

  • 1
  • 200
  • 13.1K
  • 123
  • 10M
Comments

Relative contents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