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dong2023-11-02 20:58:55
'어디서 본 것'과 '있어 보이는 것'들의 조악한 조합
<녹야> 스포일러 없는 리뷰
어느 날의 대한민국. 진샤(판빙빙)는 인천 보안검색대에서 근무 중이다. 어느 날 초록머리의 여자(이주영)가 등장한다. 소심한 진샤. 이상한 눈빛을 보내는 초록머리 여자가 마냥 싫지는 않다. 운명처럼 이끌리는 둘. 티격태격 다투다 둘은 진샤의 집으로 간다. 초록머리 여자는 스스로를 ‘남자친구의 마약 밀수를 도우며 살아가는 사람’이라 소개한다. 직장 상사에게 “초록머리 여자 이상하다”라고 알리는 진샤. 하지만 진샤의 마음은 냉담한 시선을 거부하고 있다. 너무 다른 두 사람은 당연하다는 듯이 서로에게 끌린다. 위험한 사건까지 휘말리는 둘. 이제 둘은 눈앞에 들이닥친 상황을 돌이킬 수 없다.
당황스럽다. 이 영화의 이야기는 우연에 의존하고 있다. 진샤가 ‘어쩌다 보니’ 초록머리 여자를 만나거나, ‘하필이면 거기에’ 어떤 물건이나 누군가가 있다. 영화적 허용이라기엔 그 우연이 내포하는 바가 무엇인지 노골적으로 드러나있다. 그렇다고 로맨스/여성/범죄영화로서 장르적인 장점을 잘 취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녹야>에서 로맨스는 두 사람의 키스신 말고는 잘 느껴지지 않고, 범죄영화로 보기엔 공권력의 집행이 모호하며, 여성영화로 보기엔 노골적이고 작위적인 화법이 아쉽다. 각본이 독특하지도 않다. 이 영화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작품이 <델마와 루이스>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이렇게 수많은 단점들 중에서 빛을 반짝이는 것은 한국 도시들의 황량함이다. 인천항의 건조함이나 화려한 네온사인 아래에 깔려있는 그림자들이 인물의 고립감을 증폭시키는 것이다.
이주영 배우의 팬들에게도 이 영화를 추천하긴 어렵다. 이 배우가 갖고 있는 고유한 개성인 중성적인 매력이 톡톡 튀는 방식으로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극을 산만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이주영, 김영호 배우의 연기는 연극적이면서 판빙빙은 과잉된 감정연기를 보여준다. <야구소녀>와 <메기>같은 영화에서 볼 수 있던 그녀의 매력이 영화와 어울리던 것과 정반대다. 하지만 판빙빙과 이주영이라는 신선한 조합이 영화 외적으로 충분한 이점이 될 것 같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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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월 첫째 주 극장 개봉 & 예정작 ?
안녕하세요.
영화/OTT 콘텐츠 큐레이션 웹매거진 '씨네랩'입니다.
한국영화의 반란! 블록버스터, 액션 영화 대거 출동예정! 지난주 <밀수>에 이어 <더 문> <비공식 작전>까지 쟁쟁한 영화들이 앞다투어 개봉할 예정인데요. 이번주 개봉예정작 같이 한번 알아볼까요?
비공식 작전
Ransomed
ⓒ 네이버영화
개요: 드라마 | 한국 | 132분
감독: 김성훈
출연: 하정우, 주지훈 등
개봉: 2023.08.02.
배급: ㈜쇼박스
시놉시스
“비공식적으로? 알아서 해라? 여기는 하루하루가 지뢰밭이에요” 1987년, 5년째 중동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외교관 ‘민준’(하정우). 어느 날 수화기 너머로 20개월 전 레바논에서 실종된 외교관의 암호 메시지가 들려온다. 성공하면 미국 발령이라는 희망찬 포부에 가득 찬 그는 비공식적으로 동료를 구출하는 임무에 자원해 레바논으로 향한다. 공항 도착 직후, 몸값을 노리는 공항 경비대의 총알 세례를 피해 우연히 한국인 택시기사 ‘판수’(주지훈)의 차를 타게 된 ‘민준’. 갱단까지 돈을 노리고 그를 쫓는 지뢰밭 같은 상황 속, 기댈 곳은 유일한 한국인인 ‘판수’ 뿐이다. 그런데 돈만 주면 뭐든 하는 수상쩍은 이 인간, 과연 함께 동료를 구할 수 있을까?
CINE PICK!
<비공식작전>은 실종된 동료를 구하기 위해 레바논으로 떠난 외교관 민준과 택시기사 판수의 버디액션 무비라고 합니다. 1986년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외교관이 납치돼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나선 사람들의 실화를 모티브로 창작된 이야기 입니다. 한국과 모로코를 오가며 촬영한 ‘비공식작전’은 몇몇 세트를 제외하고서는 대부분 모로코에서 촬영을 진행했다고 하며 감독은 리얼리티와 서스펜스, 유머, 액션, 영화적 쾌감을 극대화한 영화로 만들고자 노력했다고 덧붙였습니다.
더 문
The Moon
ⓒ 네이버영화
개요: SF, 액션, 드라마 | 한국 | 129분
감독: 김용화
출연: 도경수, 설경구, 김희애 등
개봉: 2023.08.02.
배급: CJ ENM
시놉시스
2029년, 대한민국의 달 탐사선 우리호가 달을 향한 여정에 나선다. 위대한 도전에 전 세계가 주목하지만 태양 흑점 폭발로 인한 태양풍이 우리호를 덮치고 ‘황선우’(도경수) 대원만이 홀로 남겨진다. 대한민국의 우주선이 달로 향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5년 전, 원대한 꿈을 안고 날아올랐지만 모두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공중 폭발로 산산이 부서졌던 나래호. 또다시 일어난 비극에 유일한 생존자인 선우를 지키기 위해 나로 우주센터 관계자들과 정부는 총력을 다하고 온 국민이 그의 생존을 염원한다. 선우를 무사 귀환시키기 위해서 5년 전 나래호 사고의 책임을 지고 산에 묻혀 지내던 전임 센터장 ‘김재국’(설경구)이 다시 합류하지만, 그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다. 선우를 구출할 또 다른 희망인 NASA 유인 달 궤도선 메인 디렉터 ‘윤문영’(김희애)에게 도움을 청해보지만 그마저 쉽지 않다. 재국은 또다시 누군가를 잃지 않기 위해 마지막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 보는데…. 우주에 홀로 고립된 대원과 그의 무사 귀환에 모든 것을 건 남자 살기 위한, 살려내기 위한 고군분투가 시작된다.
CINE PICK!
엑소 멤버 겸 배우 도경수가 <더 문>으로 여름 극장가를 찾아왔습니다. 도경수가 연기한 선우는 분자 물리학을 전공한 UDT 출신으로 등장하는데요. 배우들에 호연과 더불어 마치 우주와 달에 있는듯한 느낌을 주며 몰입도를 극대화 했다는 평입니다.
다섯 번째 흉추
The Fifth Thoracic Vertebra
ⓒ 네이버영화
개요: 드라마, 스릴러 | 한국 | 65분
감독: 박세영
출연: 문혜인, 함석영, 온저연, 홍승기 등
개봉: 2023.08.02.
배급: 인디스토리
시놉시스
"너의 증오가 날 꽃피웠어" 헤어진 연인의 매트리스에서 피어나 사랑과 슬픔을 먹고 자란 곰팡이 꽃 인간의 척추뼈를 탐하며 생명체가 되는데... 이상하고 아름다운 스트레인저 <다섯 번째 흉추>
CINE PICK!
<다섯 번째 흉추>는 침대 매트리스에서 피어난 곰팡이 꽃이 인간의 척추뼈를 탐하며 생명체로 탈바꿈하는 여정을 이상하고 아름답게 설득해낸 박세영 감독의 장편영화 데뷔작입니다. 제26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첫 공개되어 3관왕을 휩쓸며 화제가 되었고, 이후 제48회 서울독립영화제 장편경쟁 최우수작품상, 캐나다 판타지아국제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언급 선정 등 국내외 유수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살바도르 달리 : 불멸을 찾아서
Salvador Dali : In Search of Immortality
ⓒ 네이버영화
개요: 드라마 | 스페인 | 110분
감독: 데이비드 푸졸
출연: 살바도르 달리
개봉: 2023.08.02.
배급: 마노엔터테인먼트
시놉시스
"나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이다, 천재들은 죽지 않는다!” 끝나지 않은 초현실 콘체르토! 살바도르 달리의 삶과 사랑, 그리고…. 불멸!
CINE PICK!
스스로 불멸할 것이라 믿었던 살바도르 달리는 20세기 미술에 큰 족적을 남긴 스페인 출신 화가이며 화가, 조각가, 영화제작자, 소설가, 포토그래퍼로도 유명합니다. 녹아내리는 시계, 바닷가재 전화기, 추파춥스 로고, 입술모양 소파 등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은 물론, 영화 감독인 월트 디즈니, 알프레드 히치콕과도 협업하는 한편 영화 <안달루시아의 개> 제작자이기도 합니다.
몬스터 패밀리 2
Monster Family 2
ⓒ 네이버영화
개요: 애니메이션, 코미디, 가족 | 독일, 영국 | 103분
감독: 카리야마 슌스케
출연: -
개봉: 2023.08.02.
배급: 메가박스중앙㈜
시놉시스
몬스터에서 인간으로 겨우 돌아온 ‘위시본’ 패밀리! 새 가족이 된 전설 속 몬스터 ‘바바 야가’와 ‘렌필드’의 결혼식 날, 그들은 슈퍼 소녀 ‘밀라’에게 납치당한다. 이들뿐 아니라 드라큘라, 예티, 네시, 그리고 킹 콩가까지!! ‘위시본’ 패밀리는 ‘밀라’에 의해 전 세계 몬스터들이 납치된 것을 알게 되는데… 몬스터들을 구하기 위해 다시 몬스터로 변한 ‘위시본’ 패밀리! 과연 ‘위시본’ 가족은 몬스터들을 구하고 다시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CINE PICK!
2017년 개봉한 <몬스터 패밀리>는 고독한 드라큘라의 저주로 한순간에 몬스터가 되어 버린 위시본 가족의 인간 복귀 프로젝트로 약 40만 관객을 동원한 흥행 애니메이션인데요. 그 인기를 이어갈 <몬스터 팸ㄹ리2>는 더욱 커진 스케일과 풍성한 볼거리로 화제를 모으고 있습니다. 위시본 패밀리가 인간이었을 때보다 훨씬 빠르고 강력한 다양한 캐릭터들이 등장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극장 개봉 영화, 총 다섯 편의 영화를 소개해 드렸는데 어떠셨나요?
그럼 남은 한 주도 건강하게 보내시길 바라며, 지금까지 씨네랩 에디터 Amy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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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FF 데일리] 마법 같은 기적을 불러 일으키는 색
* 이 글은 씨네랩 크리에이터 기자단으로 부산국제 영화제에 참석하여 작성한 리뷰입니다.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으니 유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포스터>
<감독>
피에트로 마르첼로
<출연진>
Juliette JOUAN, Raphaël THIÉRY, Louis GARREL, Noémie LVOVSKY
<시놉시스>
<마틴 에덴>(2019)의 피에트로 마르첼로는 본인만의 서정적이고 낭만주의적인 필모그래피를 이어간다. 알렉산드르 그린의 러시아 콩트 <스칼렛 세일즈>(1923)를 각색한 영화는 1차 세계대전 직후에 노르망디의 어느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전개된다. 마을에서 배척받는 라파엘과(라파엘 띠에리) 그의 딸 줄리엣은(줄리엣 주앙) 외롭지만 자유롭고 평화로운 삶을 영위한다. 어느 날 한 마법사가 훗날 줄리엣이 하늘을 나는 주홍 돛을 단 배에 납치될 거라는 예언을 하고, 줄리엣은 이 예언을 굳게 믿으면서 왕자를 기다린다. 그녀가 자신의 감정을 노래하는 장면은 자크 드미의 <당나귀 가죽>(1970)에 대한 오마주다. 하지만 <스칼렛>에서 불굴의 용기와 상상력의 힘을 소유한 자는 왕자가 아닌 공주이며, 비행기가 추락했을 때 왕자를 구하는 사람 역시 줄리엣이다. 피에트로 마르첼로는 황금빛 석양과 두꺼비가 사는 연못으로 시골의 마법을 포착하면서 올해 가장 아름다운 프랑스 영화 한 편을 완성했다. (서승희) (출처: 부산국제영화제 홈페이지)
우리는 때론 고되고 잔인한 현실 속에서 마법과도 같은 일을 꿈꾸곤 한다. 누군가는 그것이 터무니 없는 이라고 생각하지만, 때론, 당신이 간절히 염원한다면 삶은 당신에게 기꺼이 마법을 선물해줄 것이다. 이 마법의 다른 이름은, 다름아닌 '사랑'이다. 영화 <스칼렛>은 이러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1. ‘주홍색’의 마녀들
목공인 라파엘은 1차 세계대전 이후 죽은 아내의 집으로 돌아간다. 아내가 머문 곳은 어느 부랑자촌. 그곳에는 아들렌 부인이라는 '마녀'와 대장장이 가족, 그리고 홀로 남겨진 라파엘과 마리의 딸, '쥘리에트'가 있었다. 그들은 그 마을의 이방인이었고, 전후의 인심은 팍팍하기 그지 없어서, 언제나 핍박받기 일쑤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팍팍한 인생 속에서 나름대로의 꿈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 어느 일상의 틈에 마법이 깃들기를 염원하면서 말이다.
<스칼렛>이라는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 연상된 것은 너대니얼 호손의 <주홍글자>(Scarlet letter)였다. 이방인으로써 마을 사람들로부터 배척받는 라파엘 가족들의 모습은 어쩐지 '주홍글자'가 쓰인 표식을 가슴에 달고 다니며 박해받던 헤스터 프린을 닮아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인물들이 유난히 붉은 옷을 자주 입는 다는 점도 이러한 가설을 세우는데 일조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의 '주홍색'은 '낙인'의 이미지를 가지는 호손의 소설에서와는 다소 의미가 다른 것처럼 보인다. 딸인 쥘리에트와 아들렌 부인은 탁월한 언변과 재치로 라파엘의 일자리를 구해주는 등 어떤 고난의 상황을 타파해나갈 때마다 붉은 색을 입고 있는데, 이런 점을 생각해보면 오히려 여기서의 주홍색은 시련 그 자체를 의미하기보다는 시련을 이겨낼 수 있게 하는 어떤 마법과도 같은 힘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마법! 단조로운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고, 잔잔한 마음에 격정을 불러 일으키며, 마침내는 간절히 염원하던 일을 가능하게 하는 것. 이것을 달리 말하면, 어쩌면, 이 마법의 다른 이름은 사랑일지도 모른다.
라파엘이 자신이 사랑해 마지 않던 마리의 초상을 붉은 배경의 액자에 넣어두고, 사랑하는 남자에게 달려가는 쥘리에트가 새빨간 원피스를 입은 것처럼. 그리고 마침내, 숲속의 마녀가 예언한대로 '붉은 돛을 단 배가 하늘에서 내려와' 그토록 기다리던 연인과 재회하던 날, 온 세상이 붉게 물들었던 것처럼 말이다.
이 영화 곳곳에서는 마녀에 대한 비유를 발견할 수 있는데, 점을 보고 마녀의 노래를 부르는 아들렌 부인이 그렇고, 동물들과 벗하며 맨발로 숲을 드나드는 자유로운 여인인 쥘리에트와 그런 그에게 신비로운 조언을 해주는 숲속의 여인에게서 그러한 '마녀적인' 요소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아주 노골적인 '마법'이 나타나지 않는데, 영화는 오히려 아주 절묘하게 색상과 상황의 변화를 활용하여 '마법적이고' 아름다운 장면을 연출해낸다.
2. 고된 삶 속에서 푸른 희망을 찾는다는 것
또 인상 깊었던 것은 푸른 색의 절묘한 활용이다.-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이므로 절대적으로 옳은 해석은 아님을 밝힌다!- 푸른 색은 붉은 색과 더불어 많은 장면에서 돋보였는데, 가령 귀로에 오른 라파엘의 군복, 성장하는 쥘리에트의 옷과 장성한 그의 머리에 달린 푸른 리본, 작업에 착수한 라파엘과 쥘리에트 부녀의 푸른 앞치마 등이 그렇다. 아, 라파엘과 아들렌의 푸른 눈이라든가, 사랑하는 이의 장례식에서 아들렌과 쥘리에트가 입은 짙푸른 의상 역시 빼놓을 수 없다.
푸른색은 양가적인 의미를 가진 색이다. 그것은 때론 우울의 색이기도 하고, 희망의 색이기도 하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의 '슬픔이'라든가, '피노키오'에서 피노키오를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푸른 요정'의 이미지를 생각해보라!- 전후 죽은 아내가 머물던 곳으로 향하는 라파엘의 푸른색은 지치고 쓸쓸한 기운을 풍기는가 하면, 그의 장례식에서 보이는 푸른색은 사랑하는 이에 대한 상실감을 적절히 나타내준다. 그러나 우울과 환희는 야누스의 두 얼굴처럼 양면적인 법. 이 푸른색은 라파엘 가족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간직하고 그들의 삶을 꿋꿋이 이어나갈 때 빛을 발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삶을 살아가야 하노라 말하는 아들렌과,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해 사랑하는 아내의 모습을 본딴 선수상 제작에 매진하는 라파엘, 그리고 그런 라파엘의 유지를 이어 받아 푸른 앞치마를 입는 쥘리에트의 모습은, 사람을 비로소 살게하는 희망과 그것의 계승을 보여준다.
이처럼 영화 <스칼렛>은 생생한 색의 대비를 통해 잔잔한 시골 마을에서 이방인으로써 살아가는 이 독특한 가족-소위 정상 가족의 범주를 벗어난-의 삶을 아름답게 그려낸다. 그 안에는 사랑과 낭만이 있다.
3. 그 밖의 관람포인트!
그밖에 관심을 가지면 재밌을 듯한 관람 포인트는 아래와 같다.
첫째, 화면 연출. 이 영화는 특히 붉은 색감이 두드러진다. 비단 의상 뿐만 아니라, 붉은 노을과 붉은 얼굴 등 전반적인 화면의 색감이 붉게 연출되어 있는데, 이러한 붉은색이 어떤 의미를 가질지에 대해 상상해보며 감상하는 것도 즐거운 관람법이 되리라. 또 이 영화는 최근의 다른 영화들과는 달리 약 4:3의 화면비를 채택했는데-필자는 숫자에 약하므로 정확하지는 않을 수 있다ㅎㅎ- 이 때문에 좀 더 고전적인 인상을 준다.
둘째, 다양한 아카이브 영상의 차용이다. 피에트로 감독은 영화감독이자 아카이비스트로도 활동하고 있는데, 이번 작품에서도 세계1차대전 당시의 여러 영상들을 활용하여 좀더 생생한 장면을 표현했다.
마지막으로,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음악이다. 이 영화에서 두드러지는 또다른 점은 다름아닌 음악이다. 탄탄한 오리지널 사운드 트렉 뿐만 아니라 배우들이 직접 노래를 부르거나 악기를 연주함으로서 뮤지컬 영화는 아니면서 마치 뮤지컬 영화를 보는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실제로 배우인 라파엘과 쥘리에트-실제 배우와 배역의 이름이 동일하다-는 악기 연주에도 상당한 일가견이 있다고 한다.
자, 우리 인생이 너무나 팍팍하다면, 우리도 어떤 마법과도 힘을 가져다줄 주홍색을 찾아 떠나보는 건 어떨까? 영화관에서 영화 <스칼렛>을 관람하는 것도 이런 마법같은 경험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2022.10.08. 15:30 영화의 전당 하늘연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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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3주차 최신 씨네뉴스 1호
📮7월 3주 차 최신 영화 소식이 도착했습니다!
루카 구아디아니노 감독이 차기작 《Artificial》 촬영 준비에 본격 돌입했다고 합니다.이 작품은 《틱틱붐》의 앤드류 가필드와 《아노라》의 유라 보리소프가 주연을 맡은 AI업계 코미디로,2023년 샘 알트먼 OpenAI CEO 해임·복직 사태를 모티브 삼아 권력 다툼과 인공지능 산업의 윤리적 딜레마를 유머러스하게 풀어낼 예정입니다.
앤드류 가필드는 ‘샘 알트먼’ 역을, 유라 보리소프는 알트먼 해임을 주도한 ‘일리야 수츠케버’ 역을 맡았고, 약 4천만 달러 규모의 예산으로 올여름 샌프란시스코와 이탈리아에서 로케이션 촬영에 들어가 2026년 극장 개봉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하네요.
그 외 소식으로는 최민식·박해일 주연의 《행복의 나라로》가 하반기 개봉을 계획 중이며,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수가없다》가 예고편 심의 접수를 했는데요, 후반 작업이 거의 끝난 모양입니다. 칸 영화제 출품은 아쉽게 불발되었지만, 베니스 영화제 경쟁부문 초청이 유력하다고 하니 하루빨리 공개되었으면 좋겠네요ㅠㅠ
《행복의 나라로》는 2019년에 제작된 작품인데 올해는 드디어 개봉할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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❶ 조쉬 사프디 신작, 티모시 샬라메 주연 〈마티 수프림〉 비밀 테스트 상영
❷ 최민식x박해일 임상수 감독 신작 <행복의 나라로> 하반기 개봉
❸ 앤드류 가필드, 유라 보리소프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 신작 출연 확정
❹ 티나 로메로, 좀비 영화 <Queens of the Dead> 연출
❺ HBO, ‘해리 포터’ 리부트 첫 이미지 공개·영국서 촬영 돌입
❻ 박찬욱 감독 신작 <어쩔수가없다> 예고편 심의 접수, 베니스 영화제 갈까
❼ 엄태화 감독, 김고은x구교환 출연, <미쟝센단편영화제> 트레일러 공개
❽ <웬즈데이> 주연 제나 오르테가, 팀버튼 감독 8월 한국 내한 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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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로의 여정 속에서 찾는 '나'라는 존재
과거로의 여정 속에서 찾는 '나'라는 존재
영화의 제목 "이다(Ida)"는 안나의 본명이다. 안나는 서원식 전에 자신에게 혈육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유일한 혈육인 이모를 찾아간다. 그리고 이모에게 두 가지 사실을 듣게 된다. 자신의 실제 이름이 "이다(Ida)"라는 것과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것. 이모 또한 그녀와 마찬가지로 유대인이다. 쌀쌀맞은 이모의 태도와 그녀가 전하는 정보에 혼란스러우면서도 자신의 부모에 대해 알고 싶어진 안나는 이모와 함께 그 흔적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이 영화는 일종의 로드무비 형식을 취한다. "이다"라는 한 이름의 제목이 주는 강렬한 인상과는 다르게 이 영화의 주인공은 사실 이다(안나)와 완다 두 명이라 할 수 있다. 안나는 부모에 대해 알아가며 자신의 뿌리와 정체성에 대해 알게 되고, 그 진실들을 하나씩 마주한다. 그러나 안나가 부모에 대한 진실에 점점 다가갈수록 완다는 잊고 싶던 과거의 기억을 점차 떠올리며 그것에 잠식되어간다. 두 사람의 동행은 안나가 자신의 뿌리를 찾아가는 여정임과 동시에 그녀의 이모 완다가 자신의 과거 기억 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과정이다.
수녀원의 제한적인 정보와 환경 속에서 격리되다시피 살아오던 안나에게 바깥세상은 신기하기만 하다. 안나는 바깥세상에 대해 두려워하면서도 호기심을 가진다. 수녀원 측의 배려로 서원식을 앞두고 직접 완다를 찾아가지만 이모 완다는 그녀를 쌀쌀맞고 퉁명스럽게 대한다. 이모는 안나가 유대인이라는 것과 그녀의 실제 이름과 부모의 이름, 그리고 사진 한 장을 주고는 그녀를 수녀원으로 돌려보내려 한다. 첫 만남부터 비밀로 싸여있던 완다는 안나가 수녀원에서 그녀에 대해 아무 정보도 듣지 못했다는 것을 알자 안나에 대한 경계를 늦춘다. 판사인 완다는 법정 재판 중에 생각이 잠기더니 이다를 데리러 버스터미널로 가고, 이때부터 그녀의 태도는 상반되게 온화해진다. 이다를 보고 마주하기 힘들던 과거를 떠올려서일 수도, 자신의 부끄러운 행동들에 대한 죄책감이나 후회 때문일 수도, 혹은 온전히 이다에게 뿌리를 알려주기 위해서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계기가 어떻든 간에 그렇게 두 사람은 함께 다시 만나 서로의 과거로 여행을 떠나게 된다.
안나 가족의 죽음은 1941년 독일의 폴란드 점령 당시 폴란드 민간인들이 유대인 수백여 명을 죽였던 예드바브네 학살 사건을 배경으로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추측해보건대 안나의 부모와 함께 죽은 어린 남자아이는 아마도 그녀의 아들일 것이다. 과거의 비극에서 살아남은 두 사람은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죽은 가족들의 유골을 마주한다. 완다는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스탈린 정부 하의 폴란드 공산당원이 되어 살아남았고, 안나는 갓난아이라 유대인 티가 나지 않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들 가족을 죽인 남자는 무덤을 판 구멍에 앉아 죄의식을 보이긴 하지만 끝까지 이들에게 사과를 하지는 않는다. 자신들을 더이상 괴롭히지 않고 집에서 계속 살게 되는 조건으로 유골이 묻힌 곳을 알려주는 거래를 했을 뿐이다. 완다는 아들의 유골을 소중히 끌어안는다. 그녀는 자신이 판사로서의 권력을 휘두르며 저질렀던 과거의 행보를 되돌아보면서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히고, 결국에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반면 이다의 선택은 어떠한가. 이 영화의 엔딩씬을 그녀의 선택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의 엔딩씬은 무척 독특하다. 내내 정적이던 카메라는 엔딩씬에서 급작스럽게 흔들린다. 감독은 어딘가로 걸어가고 있는 이다의 모습을 핸드헬드로 잡는다. 핸드헬드 자체가 특별한 연출기법은 아니다. 다만 앞선 모든 장면에서 감독이 유지해오던 연출 방식과는 상반되게 끝나기 때문에 이 영화의 엔딩씬은 특별해진다. <이다>는 여백을 통해 스토리텔링하는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점은 파벨 포리코브스키 감독의 연출 특징이기도 하다. 차기작 <콜드 워>에서도 이어지는 1.33:1의 풀 프레임 화면비와 흑백의 이미지, 헤드룸을 많이 남기며 전통적인 미장센을 깨는 과감한 시도까지 그의 영화는 형식 자체가 의미하는 바가 크고, 그는 형식을 통해 많은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감독이다.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은 언제나 화면의 중심이 아닌 사이드에 위치하고 카메라는 여백이 많이 보이도록 대상을 비춘다. 그럼으로써 영화 속 인물들은 어딘가 위태롭고 불안해 보인다. 마치 세상의 구석으로 내몰린 느낌까지도 든다. 이 점을 <이다>에서 <콜드 워>까지 이어지는 그의 영화 속 시대 배경과 연결 지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시대와 운명이 반기지 않는 가운데, 세상으로부터 내쳐지는 인물들은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다시 엔딩씬으로 돌아와서, 내내 무표정하던 그녀의 표정이지만 그 순간 그녀의 표정에서는 어떠한 결연한 의지가 느껴진다. 그 의지의 분위기가 엔딩씬 전체를, 관객을 압도시킨다. 안나는 어쩌면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삶을 제대로 찾게 된 건지 모르겠다. 아니, 그 길을 비로소 시작하는 건지도. 지금까지 살아온 '안나'로서의 삶을 계속 살아가든, 새롭게 알게 된 '이다'로서의 삶을 살아가든 중요한 것은 그녀의 이름이 무엇인가와 같은 사소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어딘가로 묵묵히 걸어 나가는 그녀의 모습은 우리에게 그녀의 결연한 의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이제 어떤 선택을 하든 그녀의 선택은 오로지 그녀의 의지와 발길에 달렸다. 이다는 자신의 길을 계속해서 묵묵히 걸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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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WFF 데일리] 돌고 돌아 제자리로
SYNOPSIS
오늘날 아일랜드의 HIV 감염인들의 삶과 경험에 대한 강렬한 고찰을 담은 영화. 당사자 발화 예술과 사회적 낙인을 동시에 살펴볼 수 있는 하이브리드 다큐멘터리이다.
PROGRAM NOTE
숀 던 감독은 2017년 연극 「급류」를 발표했다. 아일랜드에서 살아가는 HIV/AIDS 감염인들을 인터뷰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극을 구성하여 만든 연극이었다. 그로부터 5년의 시간이 흘러 숀 던 감독은 공동 연출자 애나 로저스와 함께 과거 인터뷰이들을 다시 찾아가 카메라에 직접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한다. 그리고 과거 연극을 만들 때 얼굴과 이름을 드러낼 수 없었던 이들과 그들의 이야기를 연극적으로 재현했던 배우들을 중첩시켜 인터뷰이들의 이야기를 재의미화한다. 과거와 현재, 실재와 가상의 충돌은 아일랜드 사회가 HIV/AIDS를 어떤 방식으로 터부시했고 감염자들을 차별해 왔는지 깨닫는 기회로 다가온다. 또한 6년이란 시간을 사이에 두고 감염인이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게 된 변화가 그들의 이야기를 알리기 위해 노력한 활동가의 역할이었음을 확인시킨다. 비밀을 말할 수 없는 자들에게 비밀을 이야기하는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과연 이 사회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아일랜드의 상황을 넘어 한국의 상황 속에서 감염인 당사자의 이야기는 과연 어떻게 전해질 수 있을지 사뭇 궁금해진다. [이동윤]
한 가지 개인적인 경험. 나는 HIV 테스트를 해본 적이 있다. 그것도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여기까지 듣고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할까?
나는 인도에서 HIV와 함께 사는 사람들을 만나고, 집집마다 찾아가 이야기를 듣고, 아이들이 학교에 가도록 하고… 뭐 그런 일을 했다. 그러다 보면 아이들을 안아주기도, 내 손을 붙들고 우는 아주머니의 손등을 토닥이거나 등허리를 끌어안기도 자주 했다. 그들이 해준 음식을 먹거나 그들과 같은 모기에 물리는 것으로는 옮지 않지만, 혹시나 알게 모르게 그에게도 나에게도 상처가 나 있었다면, 그래서 혈액과 혈액이 닿는다면, 옮을 수 있는 가능성은 적지만 존재했다. 사실 그러다가 옮는다 해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선택한 일이니.
그런데 막상 한국에 돌아와 검사를 받으려니 머뭇거리는 내가 있었다. 결국 집에서 공부한다는 핑계로 한참을 뭉적거리다, 채용 검진을 받아야만 하는 시기가 왔을 때 병원에서 같이 검사를 해버렸다. HIV 검사 결과는 채용 검진 결과보다 늦게 나오니 따로 연락이 갈 거라고 했다.
HIV 검사 결과만을 받아보기 위해 병원을 찾았는데, 이름을 부르더니 진료실로 들어오라는 거다. 아니 왜? 음성이라면 그냥 결과지만 주고 끝내도 되는 거 아닌가? 왜 진료실로 들어오라고 하지? 나 혹시라도 양성인가? 1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머릿속이 팽팽 돌았다. 그렇게 복잡한 심경으로 들어선 진료실에서 나는 거의 U턴하다시피 했다. “음성입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한 마디만 딱 듣고.
아주 짧은 시간의 간접 경험으로도, 그려볼 수 있다. 어느 날 갑자기 내 삶에 바이러스가 찾아왔다는 말을 듣는다면 어떤 기분일지를. 그 바이러스가 단순히 몸을 아프게 하는 수준이 아니라, 사회적인 낙인과 함께 온다면?
그래서 이 영화를 보고 싶었다. HIV/에이즈가 차별, 멸시, 낙인의 대상이 아닌 사회는 존재하지 않지만, 인도에서의 그것과 아일랜드의 그것은 분명 다를 텐데. 이 영화 속 사람들은 어떤 사회를 살아가며, 어떤 목소리를 내고 있을까.
누군가의 진솔한 목소리를 듣기 위해 들어간 영화관에서 내가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뜻밖에도 매우 연극적인 독백이었다. 이어 아예 대놓고 연극 무대와, 연극을 연습하기 딱 참해 보이는 체육관마저 나온다. 이토록 연극적인 느낌으로 펼치는, 고백과 비밀에 대한 독백. 그러나 내용을 들어보면 지극히 보편적인 말이다. 이건 사실일까? 아니면 연극 연습일 뿐인 걸까?
사실은 곧 밝혀진다. 숀 던 감독은 영화에 직접 뛰어들어, HIV 감염인들을 만나고 이들의 이야기를 무대에 올린다. 직접 올라갈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가명과 대역을 쓰지만, 이들은 가명과 대역 뒤에 숨는 게 아니라 이 또한 목소리를 전하는 한 가지 방법임을 느끼게 된다. HIV가 왜 사회에서 침묵과 회피의 주제가 되었는지, 왜 당사자는 그 상황을 받아들이는지 숀 던 감독은 질문한다.
1인칭의 목소리는 힘이 있다. 언제나 그렇다. 똑같은 이야기도 보고서의 단조로운 톤으로 읽으면 ‘그런가 보다’ 싶은데, 누군가가 1인칭의 경험담으로 묶어내는 순간, 그냥 담백한 사실의 나열만 해도 저절로 힘을 갖는다. 보다 보면 왜 이 영화가 세상에 필요했는지를 알게 된다. HIV 감염인들의 목소리는 세상에 나와야 한다. 삶은 계속되니까. 그러나 아무것도 아닌 척해서도 안 된다. HIV의 고통—꼭 관련 질환보다는 사실 사회적인 시선과 불안이 더 큰 그 고통—에 대해서도 분명히 말할 필요가 있다.
현명하고 생생하게 연출해 낸 덕분에, 관객은 이 영화가 표상하는 인물들과 쉽게 연결된다. 그들의 이야기를 기꺼이 들을 마음이 생긴다. 영화 끝자락에 이르렀을 때 나는 조금 울컥했다. 세간에서 HIV는 지난 세기 죽음의 공포로 다가왔다가 잊힌 것일지 몰라도, 누군가에게는 현실이다. 아무것도 아니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꼿꼿하게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절망시킬 것도 아닌. 한 바퀴 돌아 삶을 제자리로 돌려보낼 수 있는 어떤 것.
이 영화에도 나오지만, HIV 감염인을 “PLWH” 혹은 “PLWA”라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People living with HIV/AIDS, 그러니까 이 바이러스와 함께 사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영화 속의 로비가 낙인을 강화한다며 못마땅해하는 ‘sufferer’라는 표현도, 우리가 ‘환자’라고 했을 때 단어 대 단어로 달달 외운 ‘patient’라는 단어도 적절치 않다. 사실 HIV는 바이러스이니 보균자 혹은 감염인이 맞고, AIDS의 S는 신드롬, 질환의 가능성을 안은 상태를 뜻하니 환자라는 말도 적절치 않다.
그러나 사람들이 가장 많이 쓰는 단어가 ‘에이즈 환자’라고 느껴, 적절한 표현을 많이 고민했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나는 인도에서 ‘에이즈 환자’들을 만났고, 그들은 주로 가족 단위였으며, 그래서 가족으로서 건강한 삶을 유지할 방법에 대한 건전하고 올바르고 밝은 이야기를 많이 했지만… 아마 한국에서라면 ‘에이즈 환자’를 위해 뭘 하든 훨씬 힘들었을 거라고. 한국에서 HIV/에이즈로 신고한 사람의 96%가 남성이다. 가족 단위로 이야기할 내용은 이미 아니라는 뜻이다. 신고하지 않은 사람들의 비율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코로나 이전까지 세계적으로 에이즈는 감소세였는데, 한국은 증가세를 보였다가 오히려 반대로 코로나 이후에 약간의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이 숫자만으로 함의점을 찾아낼 수는 없지만, 한 가지 예감이 있다. 인도 사람들보다, 이 영화 속 아일랜드 사람들보다, 우리나라의 HIV 감염인은 입을 쉽게 열지 않을 것 같다는. 그럴 수 없을 것 같다는.
그런데 내가 HIV 감염인들을 만나면서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은, “그래서 이들과 내가 과연 무엇이 다르지?”였다. 물론 그중에는 감염인 상태로 매일 밤 다른 상대를 찾아 침대로 끌어들이는 사람도 있었고, 교통사고로 수혈을 잘못 받아 안타깝게 감염인이 되었다가 시력까지 잃어버린 사람도 있었긴 하다. 나 개인과 비교했을 때 보다 보건 차원에서 문제 있는 생활을 한 사람도 있고 훨씬 기구한 삶을 사는 사람도 있었다는 소리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보았을 때, HIV 감염인에 곧장 꽂히는 차별의 시선과 달리, 비감염인의 삶은 과연 얼마나 다른가?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본 사람과 아닌 사람의 일상에 큰 차이가 없었듯이, HIV 또한 사실 그렇다.
그래서 이 영화에 깊숙하게 뛰어들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모으고 그들의 입이 된 숀 던 감독이 대단해 보였다. 각자의 이야기와 이름을 빼앗지 않으면서도 가릴 자리를 잘 알고 가린, 영리한 연출이었다. 우리는 우리가 터부시하는 것과 과연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 질문을 던지며, 이 사회의 감염인들의 목소리를 궁금해한다. 좋은 영화는 이렇게 나의 생에 질문을 떨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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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닉스, 양면성의 우화
1945년 6월, 온 얼굴에 붕대를 감고 피투성이가 된 채 독일 국경으로 입국하는 한 여자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아우슈비츠에서 얼굴에 총상을 맞고 생존한 유대인 가수 넬리(니나 호스)는 베를린으로 돌아와 성형수술을 받는다. 친구 레네(니나 쿤첸도르프)에 의하면 그녀의 가족은 모두 적었고, 피아니스트인 남편 조니(로널드 제르펠트)는 아내가 수용소로 끌려간 직후 이혼을 신청하고 사라진 상태다.
레네가 이스라엘 이민을 준비하는 동안 그녀는 사랑하는 남편 조니를 찾아 나선다. 나이트클럽 ‘피닉스’에서 마침내 재회하지만, 아내가 죽었다고 믿는 조니는 얼굴이 변한 넬리를 알아보지 못한다. 비통함을 느낄 새도 없이 조니는 ‘넬리와 닮은 넬리’에게 아내가 살아 돌아온 것처럼 연기해달라고 주문한다. 유산을 노리는 남편 앞에서 넬리는 결국 자기 자신을 연기하기로 결심한다.
1. 멜로드라마와 필름 누아르의 기묘한 동거
크리스티안 페촐트는 독일(유럽)의 역사를 멜로 형식으로 풀어내는 감독이다. 그는 “러브스토리가 들어 있는 사회의 구조는 사랑 그 자체만큼 중요하다"라는 명언을 남긴 더글라스 셔크의 제자라 볼 수 있다. 그의 영화는 통속적인 사랑이야기로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지만, 차츰 현실의 모순을 깨닫도록 설계되어있다.
영화는 두 가지 축으로 미스터리를 쌓아 올린다. 첫째, 유산 상속을 노린 거짓 연극이 준비하는 동안 남편이 아내를 알아볼까를 흥미진진하게 그린다.둘째, 비유대인인 남편이 혼자 살아남으려고 유대인인 아내를 고발했는지에 대한 정황적 의심이다.
영화 「피닉스」는 위베르 몽텔레의 소설 'Le Retour des cendres (재로부터의 귀환)'(1965)를 각색했다. 감독은 원작에서 핵심적인 아이디어만 가져와 독일 역사에 대입한다. 그러면서 ‘트라우마를 숨기려는 이들의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숨김을 어떻게 영화적으로 구현할 수 있을까? 페촐트 감독은 필름누아르의 가르침을 따른다. 인물을 빛과 어둠의 간극 사이에 배치한다. 넬리의 성형 수술한 얼굴을 검은 베일로 감춘다거나 인물들이 주로 밤거리를 배회하거나 어둑한 지하실에 머물게 한다. 영화가 점점 주인공을 밝은 빛에 노출시켜 혼란스러웠던 정체성과 상실감을 회복해나감을 관객에게 알린다.
2. 넬리의 이중적 위치
영화는 알프레드 히치콕의 ‘오인의 모티브’를 적극 활용한다. 감독은 ‘정체성의 혼란’을 멜로드라마 형식으로 풀어냈다. 그래서 주인공 넬리는 이중적 위치에 처해진다.
첫째, 상실감이다. 넬리는 얼굴에 총상을 입었기 때문에 성형수술 전후로 남편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외모가 바뀐다. 수술 이후 그녀는 남편의 흔적을 찾아 옛 집터를 방문하는 장면이 연달아 등장한다. 넬리의 얼굴이 다른 모습으로 ‘재건’되었듯 전후 베를린에 사는 주민도 과거와는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없음을 의미한다.
둘째, 정체성의 혼란이다. 그녀는 남편 조니의 제안으로 자기 자신을 연기하게 된다. 이는 <현기증(1958)>의 여주인공 매들린(주디)이 겪은 딜레마와 유사하다. 두 영화의 연관 지점은 둘 다 프랑스 소설을 원작으로 두고 있다는 점이다. 행복했던 시절의 과거로 도피하고 싶은 피해자의 비극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공유한다고 볼 수 있다.
3. 조니의 이중적 위치
감독에 의하면 프레스턴 스터지스의 <레이디 이브(1941)>을 참고했다고 밝힌 만큼 조니는 <레이디 이브>의 찰스와 많이 닮았다. 피닉스가 등장하는 시점부터는 필름 누아르 <과거로부터(1947)>의 영향이 짙게 배어 나온다. 설명은 이쯤 해두고 왜 조니가 이중적 위치에 처하게 되는지를 고찰해보자!
첫째, 넬리는 피닉스 바에서 조니를 발견하지만, 그는 남편이 아닌 동명이었다. 그녀는 조니라는 남자를 뒤쫓아 으슥한 골목에 들어서게 된다. 그때 그 남자는 넬리의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거나 핸드복을 낚아채 내용물을 확인한다. 처음엔 노상강도라고 여겼지만, 후에 이 의미가 밝혀진다.
둘째, 남편 조니가 가짜 연극을 꾸밀 때 넬리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수용소에서 겪었던 일을 물어보면 어떻게 하냐?’며 조니를 설득한다. 그녀는 아우슈비츠에서 겪은 끔찍한 경험을 어디서 읽은 것이라고 대충 둘려대며 이야기한다. 수감자들은 아우슈비츠에 끌려온 신입 유태인을 직접 수색한다고 말한다. 어느 날 그녀가 어떤 소녀의 몸수색을 맡았는데, 그 안에서 소녀 엄마의 옷자락이 나왔다며 당시를 회고한다. 몸수색은 도대체 어떤 의미를 지닐까? 잠깐 영화 오프닝을 되짚어보면, 국경 심문에서 경비병이 굳이 그녀의 얼굴을 신분증과 대조해본다. 이것은 영화에서 ‘신분확인’이 주제라는 것과 ‘검문검색’이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암시였다.
돌이켜보면 동명이인 조니가 그녀에게 노상강도짓을 한 것은 일종의 몸수색이었던 것이다. 그 검문검색을 거친 뒤에야 진짜 남편 조니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황당한 유산상속 계획에 동참하며 그의 지하실에 머물게 된다. 그는 그녀에게 일정기간까지 누구와도 접촉해서는 안 된다면서 이곳에 머물 것을 종용한다. 얼떨결에 지하실에 감금된 그녀는 또다시 수감된 셈이다. 그렇다면 첫 번째 경우의 동명이인에게 몸수색을 당하고 두 번째 경우의 남편 조니에게 수감되었다는 이중성에 갇히게 된다. 이것은 다음 4장을 읽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4. 두 남녀의 동상이몽
영화는 전후 독일 사회와 생존자들의 트라우마를 담고 있다. 이를 위해 ‘가짜가 돼버린 현실의 경험’ vs ‘진짜가 되어가는 가상의 역할극’의 구조를 가져간다. 그러기위해 피해자와 방관자의 관계를 비대칭적으로 놓는다. 넬리는 남편 생각을 하면서 아우슈비츠에서 버텼지만, 조니는 아내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유산이나 챙길 궁리 한다. 심지어 아내를 밀고했을 가능성도 있다. 친구 르네의 경고에도 넬리는 남편 곁을 맴돌며 행복했던 결혼생활의 부활을 꿈꾼다. 그렇기 때문에 넬리는 남편의 계획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불가능한지 조니를 납득시켜다 둘 사이의 견해 차이를 뒤늦게 깨닫는다. 그것이 완벽하다고 부를만한 엔딩과 조응한다.
먼저 피해자인 넬리의 입장에서 남편, 친구들, 친분이 있는 여관 주인 등 그녀 주변의 유럽인들은 변절해서 나치에 협력했다. 르네는 두 사람의 이스라엘 이민을 추진하면서 유럽인을 용서할 수 없다고 넬리를 설득한다. 즉 넬리는 홀로코스트 이전의 관계를 끊어내고 새로운 땅으로 이주하거나 남편을 포함한 유럽인을 용서하고 베를린에서 함께 사느냐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그녀는 남편을 사랑했기에 후자를 택한다. 끝끝내 유럽인을 용서할 수 없었던 르네는 절망한 끝에 권총으로 자살한다. 이것이 복선이다. 어쨌든 그녀는 남편을 택했고, 그의 지하실에서 외출을 금지당했다. 그렇게 또 한 번의 수감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반대로 가해자 조니 역시 수감자이다. 앞서 말했듯이 수감자가 새로 온 신입을 검문검색하는 경우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수용소에 갇혀있을까? 그가 머무는 지하실에 가구나 살림도 별로 없고, 가진 돈도 2달러가 전부다. 즉, 조니는 전후 패전의 멍에를 짊어지고 있다. 가난뿐 아니라 고통받은 자들에 대한 죄책감과 부끄러움 역시 오롯이 그의 몫이다. 그렇게 그도 '양심의 가책'이라는 거대한 철장 안에 갇힌 셈이 된다.
5. 제목이 가진 이중성
피닉스는 죽어도 부활한다는 전설 속의 불새를 뜻한다. 그럼 도대체 무엇이 ‘불사’라는 의미일까? 제목의 의미는 크게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첫째, 극 중 미군을 위한 나이트클럽의 이름이다. 당연하게도 전후 세계질서는 유럽에서 미국으로 넘어갔다는 의미다. 자세히보면 영화 속 피닉스는 독일식 카바레도 아니고 미국식 클럽도 아닌 어중간한 공간으로 묘사된다. 원래 이곳은 카바레였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쇼걸이 등장하는 무대가 있고, 악단이 배치되어 있다. 이는 주인공 넬리가 가수이고 남편 조니가 피아니스트인 이유이기도 하다. 이것은 오늘날 독일문화의 단면이기도 하다. 독일 음원차트만 봐도 미국 팝송이 다수를 차지하고, 독일인들은 미국적 사고방식과 대중문화에 노출되어있다. 오프닝에서 독일어보다 영어가 먼저 등장하는 것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마땅하다.
둘째, 역사가 반복된다는 의미로도 읽힌다. 이해를 돕기위해 히틀러는 왜 반유대주의를 외쳤을지부터 살펴보자, 먼저 배후중상설(Dolchstoßlegende)을 근거로 들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 독일은 사실 전투에서 사실 전투에서 지지 않았으나 유대인과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의 병역기피, 탈영, 파업선동, 간첩질 때문에 전쟁에서 졌다는 인지부조화적 음모론이다. 1929년 대공황이 닥치자 자본가·은행가 유대인 이미지로 말미암아 반유대주의가 폭발적으로 계층을 가리지 않고 널리 퍼지게 된다. 러시아가 공산화되자 그 배후에 유대인이 있다는 유대-볼셰비즘설(Judeo-Bolshevism)이 널리 퍼졌으며, 유대인이 세계 지배 음모를 꾸민다는 시온 의정서가 신봉되었고, 헨리 포드가 반유대 언론을 후원하면서 나치에게 영향을 미쳤다. 헨리 포드는 나치 독일에 막대한 자금을 후원하기도 했다. 이 분위기를 교묘하게 파고든 나치당이 정권을 잡게 되고,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는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땅에서 인종청소는 현재 진행 중이다. 그것도 유태인 스스로가 그런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
★★★★☆ (4.5/5.0)
Good : 오인의 모티브, 멜로드라마와 필름 누아르의 독창적 계승
Caution :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으면 오독할 수 있다.
●독일 음악가 쿠르트 바일이 쓴 <Speak Low(1943)>은 전형적인 재즈음악이다. 재즈는 잘 알다시피 미국 남부가 고향이다. 주제가조차 이중성에 위치하고 있는 셈이다.
●넬리가 남편과 파리에서 쇼핑을 했다는 정황이 드러난다. 테오도르 헤르츨이 주도한 시오니즘은 드래퓌스 사건에서 촉발되었으니 이 역시 그런 맥락을 깔고 있다.
●600만의 유대인, 1100만 명의 슬라브인, 50만의 집시(룸인), 연합군이나 레지스탕스의 포로 중에 유색인의 경우 현장에서 처형되거나 강제 노동·절멸 수용소로 보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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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페이스](2024)에 대한 헐거운 리뷰
Chapter 1 이중성, 저택과 창고
Chapter 2 노예와 영화
00:00 김대우 월드
01:42 이중성
03:43 저택과 창고
04:33 노예들
05:59 메타 영화
07:12 별점 및 한 줄 평
07:32 다음 리뷰 예고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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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가족의 색깔> 메인 예고편
남편 ‘슈헤이’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 ‘슌야’와 단둘이 남게 된
‘아키라’는 오랜 시간 왕래가 끊긴
슈헤이의 아버지 ‘세츠오’를 찾아간다.
세 사람은 어색한 동거를 시작하고,
아키라는 철도를 좋아하는 슌야를 위해
기관사가 되기로 결심하는데···
우리는 진짜 가족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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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미션 임파스벌 : 데드 레코닝 PART ONE> 2차 예고편
마지막 미션은 시작되었다! 역대급 액션과 스케일?️ 7월 극장에서 직접 확인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