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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어와 세계의 아이러니, 아득한 풍경, 생존이라는 사치
※영화 〈정말 먼 곳〉의 주요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진우(강길우)는 강원도 화천에서 홀로 딸 설(김시하)이를 키우며 새로운 시작을 준비한다. 그를 돕는 목장 주인 중만(기주봉) 역시 딸 문경(기도영)과 어머니 명순(최금순)을 모시고 살아간다. 인적 드문 산골 생활에 익숙해질 때쯤 서울에서 연인 현민(홍경)과 쌍둥이 동생 은영(이상희)이 진우 앞에 나타나고, 평화롭던 일상에는 균열이 생긴다. 현민은 진우를 따라 화천으로 내려와 성당에서 마을 사람들에게 시를 가르친다. 진우의 쌍둥이 동생 은영은 자신의 딸을 맡긴 지 오 년 만에 소식도 없이 설을 데리고 가 평범하게 키우겠다고 말한다. 모두 버리고 찾아온 정말 먼 곳에는 불안한 관계가 뒤얽히고, 비밀을 감춘 이들 앞에 시련은 연이어 찾아온다.
역설과 짐작의 자리를 비워놓은 시 詩
고착된 언어로 규정된 정상성을 의도적으로 비트는 영화는 전작 〈한강에게〉처럼 서사가 시로, 시가 이미지로 전이하는 흐름을 택했다. 특히 호칭으로 고착화하는 인물의 역할 관계를 변주하는 방법으로 경계 밖 소수자의 삶과 인물의 관계성을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만든다. 집 나간 며느리가 아닌 집 나간 서방이 돌아온다는 표현으로 남편 없이 홀로 가족을 부양했던 명순의 전사를 짐작할 수 있고, 은영의 아이를 자식처럼 키워온 진우가 아빠가 아닌 엄마인 이유는 성별 이분법적 관계를 답습하는 사고를 벗어나고자 하는 그의 현실과 관련 있다. 설이는 사실상 엄마의 위치를 담당했던 문경을 언니로 부르지만 정작 친모인 은영의 호칭을 따로 부여하지 않는다. 이를 통해 진우와 특별한 관계로 연결될 수 없는 문경의 상황과 더불어 은영과 설이의 해소되지 않는 심리적 거리를 묘사한다. 이 가운데 영화는 아버지라는 단어만 남긴 채 의도적으로 전통적인 부성의 존재를 제거한다. 극 중 유일한 ‘아버지’인 중만은 조용히 영화의 모든 상황을 지켜보는 일종의 관조자이자 삶을 먼저 겪은 세대로서 몇 안 되는 대사에 켜켜이 덮인 세월의 깨달음을 다른 이들에게 전달하는 존재로 기능한다.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인 정상 가족의 해체와 성적 지향과 대척점에 선 가부장의 위계가 사라진 가족은 평등한 관계에서 서로의 존재를 그저 받아들이는 이상적 형태를 띤다.
영화는 각자의 사정으로 얽힌 인물들이 하나의 유사 가족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을 명시적 표현으로 드러내기보다 관객이 개개인의 삶을 짐작하게끔 여백을 만들어 두었다. 여러 대사 없이도 상황과 이미지로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장면은 압축된 언어로 감정을 담아내는 시와 같다. 명순의 죽음을 가족들이 처음 알게 되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차 안의 현민을 두고 멀리서 보이는 창문 밖의 모습으로 다른 가족의 반응을 지켜보기만 한다. 카메라와 인물, 그리고 인물과 인물은 서로를 그저 짐작하며 개입하지 않는다. 〈정말 먼 곳〉의 미덕은 언어가 주는 정신적 폭력에 사려 깊게 대처했다는 점이다. 성소수자를 향하는 편견과 혐오를 드러내는 사람들의 대사는 들리지 않게 웅얼거리고, 거기에 반응하는 진우와 현민 역시 말없이 노려볼 따름이다. 자칫 또 다른 고통으로 느낄 영화적 재현을 지양하는 태도는 영화의 가치를 끌어올린다. 시각과 청각을 자극하는 매체에서 침묵이 주는 안도감은 이미 일상이 되어 지친 우리에게 무거운 숙제를 건넨다. 각자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을 때 때로는 침묵과 직시가 답이 될 수 있음을 알려주는 영화는 문제를 피하지 않고 직면하되 조심스러운 접근으로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변화를 촉구한다.
언어보다 행위로 짐작해야 하는 영화에서는 배우의 작은 몸짓에도 눈길이 가기 마련이다. 특히 〈정말 먼 곳〉은 여성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들의 섬세함이 인상적인 영화다. 특히 이상희 배우와 기도영 배우는 미세하게 변화하는 인물을 흡입력 있게 묘사한다. 앞서 언급한 문경과 은영의 태도와 설이와의 관계성을 영화는 손의 이미지로 표현한다. 필사적으로 현재의 관계를 유지하려 애쓰는 문경은 마치 자신의 노동을 바쳐 원래의 궤도로 돌려놓으려는 듯 영화 내내 쉴 새 없이 손을 놀린다. 이에 반해 은영은 어디서든 주머니에 손을 넣고 직접적인 상황에 개입하지 않으려 한다. 그것이 진우와의 대화든, 양에게 먹이를 주는 동안이든 마찬가지다. 그의 수동적인 태도는 서울로 설을 데려가고자 마음먹었지만, 미처 친밀함을 쌓지도 못했던 지난 삶의 준비되지 않은 머뭇거림이다. 설을 연기한 김시하 배우가 주는 울림도 상당하다. 영화 후반 은영의 고백에 애써 자신의 마음을 감추려는 듯 담담히 책을 읽어가는 설이의 목소리는 늘 천진난만했던 모습 한편에 못내 감추던 상처가 드러나 버린 가슴 아린 장면이다. 영화는 진우와 현민의 이야기를 중심 서사로 놓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을 수 있는 도경과 은영의 서사를 상상할 수 있도록 이끄는 힘은 배우에 있다. 장례식장에서 아웃팅을 하는 은영의 모습이 자칫 극적인 장치를 위한 작위적 흐름이 될 수 있었으나 인물의 심리와 감정을 적절히 쌓은 덕분에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었다. 배우들의 호연으로 영화는 감정적인 호소나 극적인 장면 없이도 느리지만 긴장감 있는 서사를 관객에게 스민다.
현민이 영화 중반 낭송하는 시는 박은지 시인의 동명의 등단작을 인용했다. 둘의 관계가 모두에게 알려진 다음 이어지는 현민의 장면은 허탈함과 분노, 두려움 등 여러 감정을 가슴에 차곡히 억누르다 결국 짧은 시 한 편으로 겨우 내뱉을 수밖에 없던 그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잔잔한 바다를 뒤흔드는 큰 파동을 맞고 숨 고르기를 하는 듯 울리는 현민의 내레이션은 앞으로의 상황을 상상할수록 막막하고 공허하다. 영화의 주제를 요약해 놓은 시는 제목의 물리적 공간감으로 보이지 않는 인간의 무력한 내면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말한다. 진우는 자신의 삶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로부터 멀리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가장 먼 곳이라고 생각했던 공간마저 일상의 혐오로부터 안전하지 않았다. 생각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은 이상 ‘정말 먼 곳’에 왔다는 인식은 상상에 불과하며, 실은 아직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는 현실의 외로움과 무력감은 불안한 시어로 표현된다. 규정된 언어를 깨뜨리려는 현민의 수업에서 마을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지만, 정작 현민의 언어는 그들에게 끝내 와 닿지 않는다. 그리고 무너지는 발밑을 바라보며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
가깝고도 먼 풍경의 위력
언어를 양보한 자리에 채워진 풍경은 그 공백조차 느낄 수 없게 시선을 사로잡는다. 〈정말 먼 곳〉의 배경이 된 화천의 자연은 얽히고설킨 인물들의 복잡한 고민마저 작아지게 만든다. 과묵한 등장인물들만큼이나 담담한 풍광은 가족들의 평화로운 일상에 경이로운 아름다움을 더한다. 설이와 양들이 함께 거닐던 초원이나 진우와 현민의 사랑을 품어주는 새벽녘의 섬은 행복의 순간을 찬란하게 밝혀준다. 지형지물을 활용한 절묘한 인물 간의 구도는 여러 컷 분할 없이도 충분히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가파른 절벽에 있는 목장의 들쑥날쑥한 들판은 인물의 시선과 관계를 설명한다. 롱테이크 장면에 고정된 배경은 연극의 한 장면처럼 인물의 움직임을 주목하며 시선을 따라간다. 저 멀리 느리게 흘러가는 장면 하나하나는 유달리 소중하다. 별다른 기교나 편집 없이도 와이드 스크린의 저 끝에서 반대편 사이를 무대 삼아 펼쳐지는 서사는 제한된 공간성으로 인물의 동선과 반응을 집중시킨다. 화천의 아름다운 풍경과 최소화한 카메라 움직임은 익숙지 않아 오히려 초현실적인 감상을 자아낸다. 죽었던 명순이 설과 만나는 장면이나 동트기 전 숲에서 사라졌던 설이를 데려오는 장면은 이질적인 풍경과 함께 묘한 긴장감을 안겨준다. 또한 무질서한 자연이 프레임 안에서 재배열되는 기적적인 장면들은 실제 감독도 예측할 수 없었다는 인터뷰 내용처럼 믿기 힘든 자연의 신비를 경험하게 한다. 디렉션이 불가능한 양들의 움직임을 멀리서 담은 장면들은 인물의 연기와 신기하게도 어우러진다.
의도하지 않은 경이로움은 영화 마지막 눈보라 장면에서 절정을 이룬다. 출산을 앞둔 양을 보러 구불구불한 산길을 지나는 이들에게 점차 거세지는 눈바람은 마지막 순간 관객을 압도한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에 삶이란 대개 눈보라에 가까웠다. 각자의 생활환경과 가치관, 여러 사정이 얽힌 이들에게 행복했던 일상은 잠시일 뿐 수없이 좌절하고 고통받는다. 위기는 때를 가리지 않으며 영화가 끝난다고 한들 여전히 남은 숙제는 산더미다. 진우는 사라진 현민을 찾아야 하고 은영은 설이와의 관계 형성을 위해 팔을 걷어 붙어야 한다. 목장에 남은 중만과 문경은 명순의 죽음 이후 새로운 변곡점을 맞이할 것이다. 하지만 삶의 끝에 죽음이 있듯 소멸의 자리에는 또 다른 생명이 기다리고 있다. 영화의 첫 장면 가장 오래된 양의 죽음을 처음 발견한 설은 영화의 마지막 이름처럼(雪) 눈을 이끌고 가장 어린 생명을 바라본다. 가족의 막내 설과 가장 깊은 정서적 교감을 나눴던 이는 생의 마지막을 향해 가는 명순이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설이의 눈을 보며 희망을 발견한다. 편견과 혐오의 사회에서 설은 꿋꿋이 성장할 것이고, 어떻게든 절망을 딛고 살아갈 것이라는 조심스러운 기대와 함께.
이기적인 인간, 죽음으로 이어지는 삶의 기대
〈정말 먼 곳〉은 할미 양의 죽음에서 시작해 새끼 양의 탄생으로 끝난다. 인간사에 오랫동안 함께 했던 양을 향해 선조들은 풍요와 안녕을 기원했고, 그들은 신의 말씀으로 인간을 대신해 생을 다했다. 풍요와 희생의 의미를 모두 지닌 양은 인간과 닮아있다. 중만의 말처럼 양은 인간만큼이나 이기적이다. 다 함께 무리 지어 살아가지만 솔직한 눈빛 안에는 서늘한 진실이 숨겨있기도 한다. 영화의 마을 사람들은 진우에게 누구보다 따뜻하고 친절했지만 다름을 내보인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등을 돌리는 냉혹한 이면을 지녔다. 또한 독립할 시기가 지났음에도 자식을 품에 두고 놓지 못하는 어미 양처럼 중만과 진우는 각자의 반경에 문경과 설이를 둔 채 떠나보내지 못한다. 중만은 문경이 스스로 선택한 삶이라고, 진우는 차별이 일상인 사회에서 상처를 주기 싫었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그들은 바깥세상에서 받은 공포를 나눠 짊어지고 싶은 이기적인 감정에 의해 거짓 이유를 대고, 자식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자기기만의 공간에 자신을 가두었다. 마치 자유롭게 뛰노는 것처럼 보이는 양들에게 둘린 울타리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내몰린 사람들의 방어기제에 책임을 전가할 수 있을까. 소위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났다는 이유로 한국 사회에서 받았을 고통을 짐작한다면, 고향을 떠나 홀로 자식을 키워야 했던 중만과 명순, 그리고 배우자의 존재를 숨겨야 하는 진우에게 연고도 없는 이곳까지 오게 된 경위란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중만의 혼잣말은 어미 양의 투명한 눈빛에 비친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두 사람의 선택은 달랐다. 현민의 입으로 들은 진실과 설이의 실종을 겪으며 진우는 외면했던 자신의 진심과 대면한다. 설이를 위한다고 여겼던 도피가 어쩌면 자신의 불안이며, 진우의 두려움은 기우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말이다. 목장을 떠나기 전날 밤 진우는 중만에게 불안 섞인 물음을 던진다. 이 세상의 끝으로 생각했던 이곳마저 벗어나야 한다는 복잡한 마음을 중만에게 털어놓지만, 사실 진우는 중만보다 먼저 답을 찾아낸 셈이다. 두 사람을 품어줄 ‘정말 먼 곳’은 이 세상에 없다. 더는 나아갈 수 없어 그렇게 믿기로 한 중만과 허상의 공간임을 깨달은 진우가 있을 뿐이다. 중만의 여정을 책임졌던 동력은 소진되었고 남은 선택지라고는 지금의 삶에 순응하며 존재하지 않는 곳을 그리워하는 방법밖에 없다. 하지만 진우는 나아가야만 한다. 그는 있지도 않은 곳을 찾기보다 남아있는 실체에 집중하기로 한다. 현민을 찾고, 설이를 돌보고, 세상 앞에 다시 위험한 여정을 시작하기 위해 그는 숨겨진 자연을 떠나 칠흑 같은 어둠으로 향한다. 그렇게 영화 속 모두는 한 칸씩 성장하고 있다.
오 년 전 진우가 정말 먼 곳을 찾을 수밖에 없던 그 심정을 떠올려본다. 폭력과 차별에 지치고 사람이 싫어 도망치듯 떠났던 참담함을 생각한다. 익숙함의 관성에 밀려난 평범한 인간의 일상에 대해 생각한다. 존재를 인정하지 못해 끝없이 밀어냈던 결과는 막다른 벼랑 앞이다. 모든 것이 허물어지는 그곳에서 떨어지고 만 사람들이 이번 달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의 곁을 떠날 것 같은 두려움을 느낀다. 어느 정치인은 원하는 사람들끼리 특화된 공간을 만들어 거기서 즐겨 보라고 말했다. 절망을 모르는 이들은 여전히 세상에 없는 정말 먼 곳을 만들어 쫓아보낸다. 그 시간에도 누군가는 일상이 '욕심이며 사치'인 사회에 견디지 못해 사라진다. 시 구절을 잠시 빌리자면 “정말 먼 곳을 상상하는 사이 정말 가까운 곳은/ 매일 넘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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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에 눈먼 두사람 ; 영화 블라인드 리뷰
이 글은 영화 [블라인드]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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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에 얇게 치약을 바르면 된다고 하지만 그거 바를 정성이면 제가 이를 닦고 산책을 나갔겠죠? 저는 게으릅니다.
저는 시력이 좋지 않습니다.
저희 집식구들 모두 시력이 좋은데 저만 그렇습니다 . (참고 1) 요새처럼 마스크가 제2의 문신이 되는 일상이면 안경에 김이 서려 시각을 포기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라식이나 라섹 같은 시력 교정술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닙 니다. 하지만 현미경을 많이 보는 직업을 가졌기 때문에 빛 번짐이 가장 흔한 부작용 중 하나인 그런 수술을 쉽게 선택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이니 그 어떤 감각보다도 제게 중요한 것은 바로 시력입니다. 조금만 안경에 문제가 생겨도 불안해합니다. 그러니 건강한 눈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온 마음 가득 담뿍 담으며 살다가 시력을 잃어버린 루벤의 상실감은 얼마나 클까요. 집이 제아무리 부자라 해도. 루벤이 갇혀 있는 어둠을 걷어줄 수 있는 안경은 구할 수 없었을 테니까요.
출처:네이버 블로그 [은하계 반지하]
" 이 거울 조각들은 세상 모든 지역을 날아다녔다. 그리고 이 작은 거울 조각이 사람의 눈에 들어가게 되면 본인은 그것을 알지 못하지만 그 순간부터 그는 모든 것을 비뚤어진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자신이 보는 것의 가장 나쁜 부분만 보게 된다. 그 거울 조각이 심장에 박힌 사람들이 있는데 이 경우도 끔찍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들의 마음이 꽁꽁 언 얼음처럼 차가워지고 딱딱해지기 때문이다. "
눈의 여왕
후천적 사고는 참으로 명사수였습니다. 정확하게 루벤의 아름다운 눈을 겨냥해 활시위를 당겼죠. 그리고 그 화살은 보기 좋게 과녁을 맞혔습니다. 점점 시야는 희미해지는데, 자신이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을 자신만 못 본다는 생각에 루벤은 미친 듯이 발악합니다. 덕분에 화살은 더 깊숙하게 박혀 루벤의 자존감까지 관통해버리고 말았죠.
안타깝게도 영화에는 화살을 맞은 또 다른 짐승이 등장합니다.
어릴 적부터 학대를 받아 외모 콤플렉스가 심한 마리입니다. (참고 2) 길고 오래된 학대에 대한 기억은 마리가 다른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이는 것도 어려워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녀의 겉모습 은 학대의 흔적인 흉터로 가득합니다. 그녀의 고개가 다른 사람의 눈높이까지 쉽사리 올라오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죠.
루벤에게 책을 읽어주는 것을 조건으로. 상처받은 두 짐승은 서로가 가지지 못한 것을 주기 위해 처음 만나게 됩니다. 루벤은 루벤대로. 마리는 마리대로. 눈과 가슴에 모든 것을 차갑고 나쁘게만 보는 거울 조각이 박힌 채로 말입니다.
출처 : 네이버 블로그
"어린 카이, 소중한 카이, 드디어 너를 찾았어!!"
그러나 카이의 몸은 뻣뻣하고 차가웠으며 앉은 채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어린 겔다가 흘린 뜨거운 눈물이 카이의 가슴에 떨어지더니 그 기운이 카이의 심장까지 전해졌고 얼음조각 같던 심장을 녹여주고 심장에 꽂혀 있던 작은 유리조각마저 씻겨내 버렸다. 카이와 겔다는 그 의자들에 앉고 나란히 손을 잡았다. 그러자 장엄했지만 춥고 텅 비어 있던 눈의 여왕의 궁전이 악몽처럼 그들 기억에서 사라졌다.
"너희들이 어린아이들처럼 되지 못하면, 너희들은 천국에 갈 수 없다. "
눈의 여왕
처음 만난 순간부터 순조로웠던 것은 아닙니다. 부딪침은 있었죠. 시각을 잃고 모든 것을 포기한 루벤과 달리. 이상하게 마리는 루벤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소리 지르고 막 대해도. 마리는 정해진 시간에 루벤을 찾아왔습니다. 그렇게 루벤은 마리의 손길 아래서 점점 순한 짐승이 되어 갑니다. 마리가 책을 읽어주는 그 시간만큼은 욱신거리는 자신의 상처를 잊을 수가 있었죠
.그것은 마리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마리가 가진 단점들을 루벤은 볼 수 없었습니다. 아마도 마리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의 외모가 아닌 마리 자체를 봐 준 사람을 만난 순간이었을 겁니다. 가난하고 흉측하다고 손가락질 당하는 마리를 좋아해 준. 사람이기도 했고요. 자신은 알 지 못할 순수한 표정으로 마리에게 조금씩 호감을 보이는 루벤이 싫을 리가 없었습니다.
루벤은 점점 마리 옆에서 웃음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마리 역시 루벤의 옆에서 꾸미지 않은 모습으로 자신만의 매력을 발산합니다. 그들의 마음에 깊이 박혔던 유리조각은 서로에 의해 조금씩 빠지기 시작하죠 .
루벤은 점점 마리와의 거리를 좁히고 싶어 하지만. 마리는 자신을 느끼려 하는 루벤의 손길에 자신의 추함이 드러날까 두려워합니다. 탐스러운 붉은 머리에. 스물한 살의 마리. 그것이 자신이라고 포장합니다. 그저 마리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한 루벤은 마리의 말을 참고로 자신의 머릿속에서 그녀의 초상화를 완성해 나갑니다.
사진출처 : 티스토리
카이의 생각들은 여전히 그의 눈 안에 들어가 있는 유리조각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는 완벽한 구조를 지닌 모양을 많이 조립해서 서로 다른 단어들도 표현해냈지만, 본인이 그렇게 만들어내고 싶은 단어가 있었지만 만들어 내지 못한 단어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영원'이라는 단어였다. 눈의 여왕이 그에게 말했었다. "네가 그 단어를 알아낼 수 있을 때, 너는 너 자신의 주인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너에게 이 모든 세상과 새로운 스케이트 한 쌍을 줄게"그러나 카이는 그 단어를 만들 수가 없었다.
눈의 여왕
하지만 심술궂은 운명은 그들을 가만히 두지 않았습니다.
주치의는 루벤에게 시력 회복 수술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고 알려줍니다. 꿈에만 그리던 마리를 직접 만날 수 있던 생각에. 루벤은 한껏 신이 났지만. 마리는 그렇게 될 경우 끔찍한 자신의 겉모습을 보고 루벤이 떠나버릴 까봐 겁이 나기 시작합니다.
마리의 거짓말을 알고 있는 루벤의 어머니 케서린 역시. 슬슬 마리가 원망스럽습니다 .
루벤이 시력을 찾게 되었을 때. 마리의 실제 모습에 실망하게 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모습이 걱정되었을 테죠. 이미 너무도 깊어진 두 사람의 관계는 어떻게 될지. 나빠지기 시작한 자신의 건강하지 못한 몸이 얼마나 버텨줄 수 있을지. 모든 것이 걱정되기 시작합니다.
마음이 복잡해진 마리는 자신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한껏 들떠 있는 루벤을 바라봅니다.
이제 피어나는 20대의 삶을 시작하는 자신의 연인. 그토록 그리던 시각을 찾고 나면 자신의 모습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그것을 알고도 자신을 사랑하는 것 같은 마음을 거두지 않을 수 있을지. 아무것도 모른 채 자신의 목에 기꺼이 목줄을 끼워 마리의 손에 단단히 고삐를 쥐여준 자신의 지고지순한 연인을 바라봅니다. 마리는 그저 서재에 숨어 한없이 우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다독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출처 : 다음 영화
"이 드넓은 세상에서 홀로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그것은 모두 깨진 유리조각 때문이야. 하나는 카이의 심장에 박혀있고 아주 작은 유리 파편이 그의 눈에 들어갔어. 이 유리조각들을 빼내야 해. 그렇지 않으면 그는 다시는 인간과 같은 따뜻한 영혼을 가질 수 없어. 카이는 눈의 여왕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게 돼.
눈의 여왕
마리는 결국 떠나기로 합니다. 사랑해 마지않는 자신의 어린 연인을 두고. 완전히 모습을 감추기로 합니다. 그리고 영영 놓고 싶지 않았던. 자신의 손에 단단히 쥐어진 루벤의 고삐를 천천히 놓아줍니다.
마리가 없는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 버린 루벤은. 고통 속에서 수술을 마칩니다. 마리는 눈을 뜨기 전에도. 그 후에도. 자신의 앞에 없었습니다. 설상가상 자신의 곁에서 묵묵히 모든 것을 지켜봐 주던 어머니까지 세상을 뜨게 되죠. 루벤은 눈을 뜨고 모든 것을 얻을 것 같았지만. 시력을 잃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자신이 그토록 그렸던 세상을 볼 수 있었지만. 결국 자신이 가장 보고 싶어 했던 자신의 연인은 모습을 감춘 뒤였죠.
루벤은 정처 없이 떠돕니다.
외로움을 감추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머나먼 여행도 떠나봅니다. 하지만 마음은 흙탕물처럼 가라앉아 잠잠해지기만 할 뿐. 조그마한 충격에도 다시 섞여 루벤의 마음은 매번 혼탁해지기만 합니다. 그 원인은 언제나 마리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이었죠.
출처 : 네이버 블로그
이 영화는 안데르센의 동화 [눈의 여왕] 을 모티브로 하고 있습니다. 루벤이 카이 , 그리고 마리가 겔다 . 라고 말을 하죠. 하지만 영화상에서는 루벤의 시력 회복 수술을 기점으로 이 역할은 바뀐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전반부의 차가운 루벤을 바꿔준 것이 마리. 라면 후반부의 차가운 마리를 치유해 주는 것은 다시 루벤이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서로에게 서로가 없이는 안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부분이기도 하지요.
그것이 절실히 드러나는 장면이 바로 이 안타까운 연인이 도서관에서 재회하는 신(Scene)부터라고 할 수 있죠.
루벤은 외모로는 마리를 알아볼 수 없었지만. 자신이 기억하던 향기와 책을 읽어주던 목소리로 도서관의 사서가 마리임을 확신합니다. 자신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자고 애절하게 말을 하지만. 마리는 그런 루벤의 마음이 진심이 아닐 것이라고. 자신의 흉측한 모습을 견디지 못해 결국은 돌아설 것이라고 단정해버립니다. 그리고 루벤의 손길과 마음을 다시 한번 뿌리치게 되죠.(참고 3)
자신의 앞에서 사라져 가는 마리를 보며, 루벤의 마음은 다시 한번 흙탕물이 되어버립니다.
"장미는 피었다가 지지만, 아기 예수는 항상 볼 수 있다"
지붕 옆 테라스 의자에 앉아 있는 카이와 겔다는 어른이 되었지만 마음속은 여전히 아이처럼 순수했다. 초여름이 되었다. 따스하고 아름다운 초여름이었다.
눈의 여왕
루벤은 선택을 하기로 합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마리가 없는 세상은 자신에겐 의미가 전혀 없었죠. 그녀가 다시 자신의 곁으로 돌아오게 할 방법이 단 하나뿐이란 것을. 루벤은 너무도 쉽게 찾아냅니다.
자신이 두 번 다시 못 보게 될 세상을. 루벤은 두 눈 가득 담아봅니다. 천천히 그리고 꼼꼼하게. 하지만 그다지 미련 따위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가 원하는 세상은 결국 눈을 감았을 때야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으니까요. 그러니 루벤 은 자신의 눈을 스스로 찔러버리는 행동을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다시 암흑으로 돌아간 루벤을 비추고 있습니다. 마음속에 그렸던 마리의 모습과 실제 마리의 모습이 달랐을지언정. 자신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죠. 다시 장님이 되었으니 자신의 연인 마리가 돌아올 것이라는 생각에. 루벤은 웃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이 영화의 끝을 열린 결말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는 꽉 찬 돌직구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장면의 배경을 보세요. 차갑고 시린 겨울이 아닌 (최소) 봄이 배경입니다. 루벤의 마음이 마리로 인해 완전히 녹았음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마리의 마음도 자신이 녹여줄 것임을 다짐하는 루벤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죠.
다른 사람들은 손가락질할 것입니다. 아직도 이런 미련하고 초라한 사랑이 존재할 것 같냐고 반문도 하겠죠. 하지만 카이와 겔다의 여행이 끝이 나고 봄이 온 것처럼. 둘은 서로를 사랑으로 구원해 낼 것입니다. 남들이 손가락질 하는 그 "초라한"사랑으로 말입니다.
참고 1.
저희 집 사람들은 생활 패턴이 매우 규칙적입니다. 저는 뭐 말 안 해도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늘 부모님이나 남동생이 잠들었을 때 책이 읽고 싶었었는데 그게 안되니 작은방에 숨어서 불도 켜지 않고 책을 읽었죠. 덕분에 혼자만 시력이 매우 좋지 않습니다. 주워 온 거 아닙니다.
참고 2.
마리는 백색종(알비노) 비슷한 병으로 인해 학대를 받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참고 3.
저 장면에서 아 같이 가라고!!!!!라고 소리 지를 뻔함.
[이 글의 TMI]
1. 영화관에서 스피커 바로 밑자리에 앉는 바람에 루벤이 소리 지르면서 난리 칠 때마다 고막 나가는 줄 알았음.
2. 최근 다이어트를 하시는 잇님들이 많아지셔서. 다이어트 관련 글도 쓰려고 합니다. 욕 주의.
3. 연애 관련 포스팅을 계획하고 써 내려가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렇게도 순수한 사랑은 존재한다고 생각함.
4. [눈의 여왕]이 기억 안 나서 [겨울 여왕] 이라고 구글에 치고 안 나온다고 구글 탓함. 뎨성합니다.
5. 이 영화는 마리의 입장에서 심리학적으로 접근한 글 or 연애에 외모가 미치는 영향이라는 주제로 다시 쓸 예정
* 본 콘텐츠는 브런치 Rigo 작가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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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섹스 앤 더 시티의 계보를 잇다, 미드 <더 볼드타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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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 <더 볼드 타입> 포스터
더 볼드타입 (The Bold type, 2017-2021)
제작 : 미국, 코미디·드라마, 시즌5 완결
연출 : 빅터 넬리 주니어, 에리카 던튼 │ 각본 : 세라 왓슨
출연 : 아이샤 디(캣), 케이티 스티븐스(제인), 메간 페이(서턴), 멜로라 하든(재클린)
등급 : 전체 관람가<섹스 앤 더 시티>의 계보를 이을, 여성 우정 드라마
<더 볼드타입> 스틸컷
친구들과 브런치 타임을 즐기고 자유분방한 사랑을 경험하는 뉴욕의 전문직 여성 이야기는, 언제나 나의 감성을 촉진하는 단골 소재다. 이를 활용한 가장 성공적인 드라마는 단연 <섹스 앤 더 시티(1998-2004)>일 거다. 그간 ‘섹스 앤 더 시티’를 떠올리게 하는 드라마들은 종종 있었지만, 오늘 말할 드라마는 그중 가장 ‘섹스 앤 더 시티’의 주제의식을 잘 가져온 드라마가 아닐까 싶다. 직업, 패션, 우정, 성 담론, 그리고 거기에 밀레니얼 세대의 공감대가 아낌없이 더해져 있으니 말이다.
젊은 세대가 주 시청층인 미국의 채널 ‘프리폼(Freeform)’에서 방영이 됐기 때문에 관람 등급은 전체 관람가로 낮아졌고, 주인공들의 연령대도 20대 중반으로 훨씬 영(yong)해졌다는 게 차이점이라면 차이점이다. 섹스 앤 더 시티가 농염한 언니들의 과감한 섹스 라이프를 다뤘다면, 이 드라마는 사회초년생인 20대 여주인공들이 전문직 여성으로서 어떻게 경력을 쌓아나가는지, 여성으로서 자신을 어떻게 정체화 해나가는지를 집중적으로 비춘다.
화려한 잡지사의 일상, 개성 강한 캐릭터들
<더 볼드타입> 스틸컷
‘섹스 앤 더 시티’의 숨은 관전 포인트였던 화려한 패션센스 또한 놓치지 않았다. 30대 중후반이었던 ‘섹스 앤 더 시티’ 언니들보다는 경제적으로 빠듯한 20대 주인공들이기에 화려한 의상을 매일같이 휘감을 수는 없었지만, 나름의 막강한 대체 요소가 있었으니. 세명의 여주인공이 몸담은 회사이자 이 드라마의 주요 배경인 ‘스칼렛(Scarlet)’이 바로 여성잡지사라는 점이다.
직장이 ‘잡지사’라는 설정 덕에 매회 화보 촬영과 기념 파티 그리고 셀럽들이 등장하느라 한시도 눈이 지루할 틈이 없다. 심지어 주인공 제인, 캣, 서턴이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대나무 숲처럼 찾는 곳은, 화보 촬영에 쓰일 각종 장신구와 의상이 모여있는 ‘패션 클로짓(의류창고)’이라는 거.
세 명의 여주인공 캐릭터도 ‘섹스 앤 더 시티’만큼이나 확실하고 개성 있다. ‘제인’은 스칼렛의 기자로서 ‘발 각질 관리법’ 같은 가벼운 기사에서 여성의 정치와 권리를 다루고자 하는 뚝심 있는 기자로 묘사되고, 패션 어시스턴트인 ‘서턴’은 사랑보단 자신의 경력을 우선시하는 진취적인 여성으로 묘사된다. ‘캣’은 젊은 나이에 소셜 미디어 디렉터를 맡고 있는 능력잔데, 여성 사진작가와 사랑에 빠지면서 자신의 성적 지향을 깨우쳐간다.
각자 뚜렷하게 생동감이 넘치는 캐릭터 덕분일지, 매 에피소드는 세 주인공이 펼치는 각기 다른 라이프 스타일과 주제의식으로 빼곡하고 또 신선했다.
이 드라마의 숨은 주인공, 편집장 재클린
<더 볼드타입> 스틸컷
과거의 여성잡지가 그러했듯 드라마 속 가상의 잡지사인 ‘스칼렛’은 구시대적인 여성관에서 출발했다. 남자를 유혹해야 하고, 여자라면 갖춰야 할 온갖 관리법이며 기술이며 하는 기사들을 담는 잡지였다. 그런 잡지사에 여성 편집장 ‘재클린’이 오면서부터 ‘스칼렛’은 바뀐다. 정치기사를 싣고, 건강한 여성의 몸을 비추고, 이사진의 반대에도 굴하지 않는 진취적인 여성관을 제시하면서 새롭게 재창조된다.
재클린은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는 끊임없이 쇄신한다. 인쇄소에 맡기기 직전까지도 이 콘텐츠가 여성에게 올바른 길을 제시할 수 있는지를 의심하고 또 고민하는 편집장이다. 단순한 리더에 그치지 않고 여성을 향한 대의를 품은 그녀만의 방향성은, 스칼렛의 직원들에게 매 순간 용기를 불어넣는다. 또한 올바른 저널리즘을 추구함으로써 편향되거나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도록 직원들을 채찍 하는 자극제가 되기도 한다.
드라마의 표면적 주인공들은 20대 여성 제인, 서턴, 캣이지만 드라마가 거듭될수록 느껴지는 게 있다. 성장하는 그녀들을 이끄는 중추적인 인물은 단연 ‘재클린’이고, 그녀가 숨은 주인공이라는 것 말이다. 재클린은, 실제 ‘코스모 폴리탄’의 여성 편집장이었던 ‘조안나 콜스’를 모델로 했다고 전해진다. (*조안나 콜스는 이 드라마의 제작자로 참여하기도 했다)
세 친구의 우정은 당연히 디폴트고요
<더 볼드타입> 스틸컷
새로운 주제의식이 더해지면서도 이 드라마가 근본적으로 ‘포스트 섹스 앤 더 시티’로 불리는 가장 큰 이유는 3인 여성의 ‘우정’을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제인과 서턴, 캣은 잡지사의 조무래기로 시작해 어엿한 각자의 역할을 해내기까지, ‘스칼렛’의 동료이자 영혼을 나누는 솔메이트 친구 사이다. 그들이 ‘패션 클로짓’에 모여, 안 풀리는 연애사와 업무 고충에 대해 무한한 공감과 위로를 나누는 건 매 에피소드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장면이다. 그녀들은 여느 20대의 친구들처럼 싸우기도 하고, 서로 다른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도 있지만, 결국엔 서로가 없으면 안 되는 톱니바퀴처럼 이빨을 맞추며 사랑스러운 우정을 이어나간다. <섹스 앤 더 시티>에서 매번 잠자리 파트너를 바꾸던 ‘사만다’와 동화 같은 사랑을 꿈꾸던 ‘샬롯’이 친구를 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20대라고 덜 성숙하지도, 더 유난하지도 않은, 여성들의 우정은 여기 이 드라마에서도 디폴트 값이다.
볼드타입으로 표현되는 이 드라마의 정수<더 볼드타입> 포스터
‘볼드(Bold)’는 보통 활자체보다 선이 굵은 활자체를 뜻한다. 하지만 이를 사람을 수식하는 데에 쓰면 ‘개성있는, 특이한’이라는 뜻이 된다. 이 드라마의 제목으로 쓰인 ‘더 볼드 타입(The bold type)’은, 발랄하지만 경박하지 않으며 당당한 여성관을 표방하고 있는 이 드라마의 정체성을 잘 함축한 단어가 아닐까.
2-30대 여성이라면 호불호 없이 즐길 수 있을만한 이 드라마는, 참고로 미국의 영화/TV 리뷰 집계 웹사이트 ‘로튼 토마토(Rotten Tomatoes)’에서 신선도 100%를 기록한 바 있다. 시즌5로 완결되었으며, 넷플릭스에서는 현재 시즌3까지 시청 가능하다. 나는 시즌 4를 기다리느라 현재 현기증을 겪는 중이다. 이 드라마를 보는 모든 여성들에게, 재클린의 용기와 격려가 깃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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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FF 데일리] 맨 앞에 있었으나 조명되지 않았던 예술가들
부산국제영화제 커뮤니티비프 올데이시네마 상영작
*시놉시스
핑크 플로이드, 레드 제플린, 폴 매카트니, 피터 가브리엘 등 세계 최고 뮤지션들의 앨범 커버를 만든 디자인 스튜디오 ‘힙노시스’. 영감에 한계가 없던 두 천재 디자이너의 무모한 작업 스토리, 그리고 시대의 아이콘이 된 명반들의 탄생 뒷이야기
〈힙노시스: LP 커버의 전설〉은 음악이 상품이 아닌 예술이던 시대, MTV가 도래하기 이전 음악이 메시지를 던질 수 있던 시대, 록 음악이 가장 대중적이던 시대를 살아간 예술가 이야기다. 그러나 뮤지션의 이야기는 아니다. 핑크 플로이드와 레드 제플린, 폴 매카트니가 협업하고 싶어 한 LP 커버 예술가 ‘힙노시스’의 이야기다.
스톰과 포 두 사람이 힙하고, 쿨하고, 지혜롭고, 현명하다는 단어의 글자 일부를 따서 설립한 힙노시스는 LP 커버 이미지를 전문으로 제작한 회사다. 더불어 당시 사람들이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던 LP 커버를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회사다. 골방에 모여 수다를 떨고 술을 마시고 마약을 하던 이들이 예술가가 되던 시대, 스톰과 포 역시 이들과 같은 궤적을 따라 LP 커버의 세계로 진입했다. 영화는 힙노시스가 걸어온 파격적 예술의 궤적을 당사자, 그들과 협업한 뮤지션의 회고를 통해 복기한다. 앨범과 커버의 ‘의미’가 더는 존재하지 않는 지금, 음악과 커버로 메시지를 던지며 매 순간 혁신을 고민하는 이들의 이야기는 매력적인 흡인력을 뿜는다. 커버 방향성을 놓고 비틀즈와 자존심을 건 신경전을 벌이는 대목은 스톰과 포가 어떤 태도로 커버 작업에 임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1968년부터 록의 시대가 저문 80년대까지 전성기를 구가한 힙노시스는 록의 쇠락과 함께 커리어의 절정에서 수직 낙하했다. 그리고 다시는 이전과 같은 명성을 누리지 못했고 록 음악 팬들의 기억 속에서만 예술적 생명을 이어갈 수 있었다. 시대의 변화에 더는 힙하고, 쿨하고, 지혜롭고, 현명할 수 없었던 이들은 되돌릴 수 없는 실패로 예술의 역사에서 퇴장했다. 고급 예술품을 소장할 수 없는 ‘가난한 이의 미술 소장품’이자 앨범 정체성의 표현으로서의 LP/커버의 시대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누군가에게는 향수를, 누군가에게는 ‘이야기’가 된 지난 시절의 매력에 몰입시켜줄 영화다. 표지가 갖는 중요성이 점차 중요해지는 도서 시장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음악과 LP 커버를 동등한 예술로서 존중하는 영화의 태도가 인상깊기도 했다.
한편 부산국제영화제 커뮤니티 비프의 올데이시네마에서 이 영화가 상영된 후, 호밀밭 출판사 장현정 대표의 사회로 장정일 작가와의 대담이 진행되었다. 대담에서 장정일 작가는 자신이 록과 팝을 거쳐 재즈에 입문하게 된 과정을 영화와 연계해 들려주었다. 그는 80년대가 민중 문화의 시대라는 것은 이데올로기적으로 가공된 현실일 뿐이라 일갈했다. 대학 운동권은 ‘탈춤’과 ‘김민기’를 시대의 문화로 제시했지만, 정작 ‘민중’들은 고고장에서 춤을 추었고 나훈아와 이미자를 들었다. 록과 팝은 대학에서 드러낼 수 없는 ‘죄스러운’ 취향이었다. ‘의식’이 부재하다는 가혹한 비판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때문에 장정일 작가는 자신이 대학을 경유해 팝과 록을 듣지 않은 것은 커다란 축복이었다고 회고한다. 대학에 진학했다면 ‘민족 문화’의 세례에 굴절된 상태로 팝과 록을 뒤에서만 몰래 즐길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후 영국의 풍요와 반항을 대변하는 음악이 한국에서 어떻게 수용되고 감상되었나에 관한 장정일의 설명은 그 문화를 향유했거나 사후적으로 회고하는 모두에게 문화의 수용에 둘러싼 물음을 촉발한다. 장정일의 해설은 낭만적 흡인력의 〈힙노시스: LP 커버의 전설〉에 ‘제3세계’를 둘러싼 권력관계를 더해 낭만 이면의 다층적 맥락에 주목하게 한다.
*영화 매체 〈씨네랩〉 초청으로 부산국제영화제 참석 후 작성한 글입니다.
*커뮤니티 비프 관련 정보는 아래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www.biff.kr/kor/addon/10000001/page.asp?page_num=8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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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판타스틱 Mr. 폭스>
영화 〈판타스틱 Mr. 폭스〉
2009, 미국/영국, 87min, 웨스 앤더슨(Wes Anderson)
* 스포에 해당하는 내용이 있으니, 영화 감상 후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노골적이지 않은, 설득적이지 않은 영화였고, 그래서 좋았다. 보통 하나의 이야기를 시작할때, 의식하지않더라도 자신도 모르게 이야기가 전달할 수 있는, 품고있는 교훈에 대해서, 그리고 의미에 대해서 자꾸만 생각하게된다.
이것은 물론 잘못된 것은 아니고, 일면 긍정적인 효과도 물론 있지만, 내가 생각하기엔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구성해가는 작가의 입장에선 오히려 이것들에, 즉 교훈과 의미들에 대해 과도히 집착하게 되고, 그들을 뒷바침하기위한, 또 그들에 적합한 구성들로만 서사를 채워나가게 되는 경우도 많이 생기는 것 같다. 그렇게 된 이야기들은 때때로 너무나 폭력적이다. 실제로 피가 난무하거나, 격한 말투를 사용해서 폭력적인 것이 아니라, 이야기 이면의 작가가 하나의 생각, 하나의 아이디어를 너무나 일방적이고, 단편적으로, 계속해서 피력하기 때문에 폭력적이다. 관객은 이러한 이야기를 경험하면서, 자신 나름의 여러 생각들을 전개해볼 수 있는 기회를 잃게된다. 왜냐면 작가가 감독이, 그들에게 다른 생각과 판단을 해볼 수 있는 틈을 전혀 내주지않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이 점에 있어선 매우 타영화들과 비교해보았을때, 독보적으로 자유롭다. 하나의 메세지, 주장, 교훈을 관객에게 일방적으로 설득하기 위해 모든 런닝타임과 인물, 소재, 상황과 사건들을 소비하지 않는다. 이 깨달음은 현재 내가 진행하고 있는 졸업 애니메이션의 이야기 구성과정에서도 스스로 간과하였고, 또 매몰되었던 오류를 재발견해볼 수 있는 기회로도 작용하여서 크게 배움을 얻을 수 있었다.
<판타스틱 Mr. 폭스>에서 이 폭스는 마치 웨스 앤더슨 같다고 생각되기도 했다. 왜냐면 그의 영화 속 이미지들과 사건의 전개를 보여주는 방식들이 정말 폭스가 말한 판타스틱, 즉 특별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당연 시각적인 효과와 구성이며, 그와 더불어 카메라의 움직임도 너무나 배울 수 있는 점이 많았다.
가장 먼저 시각적으로 이 영화에선 매우 신중한 프레임과 화면 구성이 인상깊다. 상투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이미지의 향연’, ‘컬러의 향연’이라는 말이 저절로 나올정도로, 예술적인, 감각적인 다양성을 80분 내내 자극한다. 어떤 프레임에 영상을 멈춰세워도, 모든 장면들이 예술적이다. 이 사실은 조금은 충격적일 정도였다. 물론 영화를 보다보면 아름다운 장면들을 많이 마주하게된다. 특히 나에게 인생영화라 할 수 있는 영화는 무엇보다도 <블레이드 러너 2049>, <컨택트>와 같은 드니 빌뇌브 감독의 영화인데, 그 가장 큰 이유는 이 영화 또한 어떤 프레임에서 화면을 멈춰세워도 모두 예술작품과 같은 견고한 아름다움을 느끼게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유형의 시각적 효과를 줄곧 보여주는 영화는 사실 조금은 드물다고 생각되고, 그런 면에서 이 <판타스틱 Mr. 폭스>는 앞서 언급했던 영화만큼이나 끈질길만큼 정교한 화면을 보여준다고 생각되었다. 즉 수많은 화면들이 크고 작은 소재들과 다양한 컬러감들의 조합으로 굉장히 지루하지 않으면서도 철저한 균형을 보여주고 있었고, 수평과 수직으로 거의 대부분 화면이 구성되긴 하지만 그 속에서도 계속 다양한 깊이감을 매우 정면인 방향에서 드러냄으로서 단순히 지루한 평면으로 느껴지지 않고 확실한 직선적 공간감이 느껴진다. 물론 사건의 진행상황을 풀어내고 조망하는데 있어서, 인물들을 따라가는 단 하나의 방식만이 아니라, 아이콘적인 시각효과를 활용하거나, 미세즈 폭스가 그리는 그림을 이용하거나, 또 완전한 단면을 드러내면서 전체적인 움직임을 보여주는 등 다양한 방식들을 활용함으로서 관객이 진행되는 사건들을 좀 더 다른 시각적 소재들을 통해 재조명, 재인식할 수 있는 기회 및 환기효과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도 매우 인상적이다.
다음으로는 카메라의 움직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이 영화의 카메라는 역시 화면 구성과 비슷하게 매우 수직, 수평적인 움직임을 보여준다. 특히 완전한 수평으로 인물들 혹은 사건의 발생 등을 트랙킹하는 모습이 자주 드러난다. 이런 움직임은 물론 장단점을 지닌다. 강렬한 역동성을 강조해내기는 다소 부족함이 있을 것이고, 안정적으로 영화 속 세계를 조망하기에는 상당히 적합할 것이다. 결국 이것은 선택의 문제라 생각되고, 이런 조금은 차분한 카메라 무빙이 앞서 말한 아름답고 구성적인 프레이밍을 시각적으로 확실히 전달하는데 있어서, 난 매우 적합했다고 생각하며, 또 전에 언급한 드니 빌뇌브 감독의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도 이런 수직, 수평이 강조된 픽스된 화면과 차분한 카메라 움직임을 선택함으로서, 이 영화와 같은 아름답고 견고한 화면구성을 매우 잘 강조하고 있다.
이런 움직임의 구체적인 효과들도 물론 배울만한 점이지만, 내가 가장 크게 깨달음을 얻었던 부분은 사실 움직임의 이유에 대해 진심어리게 생각해볼 수 있었다는 데에 있었다. 즉 사실 영화를 보면서, 때때론 카메라의 움직임, 화면의 전환 등에 대해 이유를 알기가 어려운 경우가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이 스톱모션 영화는 정말 중요한 순간에, 매우 이유있는 방식으로 카메라 움직임을 드러낸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특정 인물에게 클로즈업을 하는 순간, 다른 방식으로 화면을 보여주는 순간, 또 비슷한 상황이나 인물들이 내뱉는 동일한 키워드들을 통해 장면을 연결 및 전환하는 순간 등 카메라의 움직임과 누구를 어떻게 화면에 담아낼 것인지에 대한 모든 타이밍과 방법들이 매우 타당하게 느껴지고, 이유없는 영화 속 순간들이 거의 부재한 듯이 느껴졌다. 이 점 역시 앞으로 어떠한 종류의 영상을 제작한다하더라도 매우 크게 배움을 얻어야하는 부분이라고 생각되었다.
처음 문단에서 말했었듯, 이 영화는 특정한 메세지나 교훈을 단정적으로 강요하지 않고있고, 그에 따라 나 역시 많은 가능성과 호기심을 가지고 각 영화 속의 인물들과 그들의 언행, 취향 등을 자유롭게 생각해볼 수 있었다. 맹목적인 하나의 메세지를 향해 모든 요소들이 질주하고 있지않는 이 영화에선, 역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각 소재들의 이야기가 너무나 다양하기 때문에 재밌기도 하지만, 역시나 이 이유 덕분에 이 영화의 서사를 한 갈래로 설명해 풀어내기는 어려움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이 영화의 서사 속에서 가장 흥미로웠다 말하고 싶은 부분은 결국 각 개인들의 개성을 드러내는 것에 있는 것 같다. 이는 물론 미세즈 폭스가 아들인 애쉬에게 말하는 “그래도 다르다는 건 환상적인 일이잖니”라는 대사와도 매우 같은 맥락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개성은 사실 이 영화 속에서 난 인물들의 두려움을 통해서 가장 직관적으로 와닿았었다. 대표적으로 폭스는 늑대를, 미세즈 폭스와 카일리는 천둥을 두려워한다. 이와 관련하여 상당히 인상깊은 장면은 처음 보기스, 번스, 빈이 폭스의 집을 파기 시작할때, 그것을 알아차리는 폭스와 미세즈 폭스의 안방 안 모습이 드러나는 장면인데, 이 때 몇번의 컷들을 통해 여러번씩 드러나는 그 방의 벽면을 보면 천둥이 그려진 그림들이 가득한 게 강조되고 있다. 결국 미세즈 폭스의 두려움이 현실화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천둥은 결국 야생동물을 사냥하는 인간들에 대한 두려움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처음엔 잘 인식하기 어렵지만, 이 세 농부 사업가들의 공장을 견고히 지키는 매우 폭력적인 장치인 전기 울타리의 안내판이 나타나고나서는 분명하게 알 수 있게된다. 실제로도 미세즈 폭스는 폭스가 인간을 상대하는 위험한 행동을 두려워하며 그만두길 바란다는 점에서 이 천둥에 대한 두려움은 분명하게 그녀의 본성,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할 수 있다.
그리고 폭스가 두려워하는 것은 영화의 중후반부에서 알 수 있게되고, 그에 따하 앞서 이해할 수 없었던 그의 늑대에 대한 두려움을 이해할 수 있게된다. 폭스는 굉장한 절망적 상황을 마주하며, 하수구에 쏟아지는 폭포 앞에서 미세즈 폭스에게 자신의 솔직한 진심을 토로하는데, 이때 그는 영화의 제목과 같이 자신은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특별하게 환호받는 ‘판타스틱 Mr. 폭스’가 되기를 너무 바랬다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직접적으로 자신이 바라는 바를 이야기하고 이 말에 따라, 당연 늑대는 ‘판타스틱’하지않은 자신의 모습을 상징하는 소재라 볼 수 있다. 실제로 늑대와 여우는 같은 개과이기도 하며, 둘 다 가족단위로 공동생활을 한다고 한다. 그러나 어쨌든 영화 속에서 드러나는 설정에 따르면, 폭스는 많은 다른 종의 동물들과 함께 마치 인간처럼 사회생활을 하며 살아가고, 늑대는 홀로 추운 산위에 우뚝 선채, 어떠한 옷차림도 갖추지 않은, 또 말이라는 타인과의 소통 수단도 익히지않은 매우 개인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로 나타난다. 즉 영화 후반부에서 폭스가 늑대를 실제로 마주하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장면은, 폭스가 막연하게 ‘판타스틱’한 존재, 즉 타인들에게 특별하고 대단한 존재로 갈채받지 못하게 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으나, 실제 그러한 자신의 분신같은 존재, 늑대를 실제로 마주하자 생각과 달리 그러한 모습도, ‘판타스틱’하지 않은 모습도 고유한 아름다움을 지닌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라고 해석해볼 수 있다.
이렇게 늑대를 만나는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내가 이 영화를 각 개인의 개성을 중요한 핵심으로 보았던 이유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들에 있다. 결국 미세즈 폭스의 그림에선 천둥은 사라지지만, 허리케인이라는 새로운 견제와 위협의 대상이 등장하고, 나무 위에서 살다가 결국 하수구에서의 배고픈 삶으로 폭스의 행동들은 조금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또 다시 세 농부 사업가들의 슈퍼마켓을 약탈하는 위험한 행동을 개시한다. 이처럼 결과적으로 이 장면들은 그들의 타고난 본성이자, 성격들이 결국은, 어떻게 해서든, 어떤 방식으로든 반복적으로 발현될 수 밖에 없다는 걸 뜻하는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가지게한다.
* 본 콘텐츠는 브런치 Aya 작가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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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앰버 허드의 빈자리를 채운 대신 느껴졌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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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쿠아맨이올시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아틀란티스의 왕 아쿠아맨 아서(제이슨 모모아)다. 전작에서의 모험이 끝났다. 그리고 메라(앰버 허드)와 결혼에 성공했다. 옆에는 예쁜 부인이 있고 내 왕국이 있다. 아틀란티스가 선정한 가장 성공한 남자가 된 아서. 왕국을 이끌면서 아버지가 된다는 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것과 다름없다. 하지만 이런 아서에게 도사린 위기가 있었다. 아버지가 아쿠아맨에게 당했다. 복수심에 불타는 블랙 만타(아히야 압둘 마틴 2세). 신 박사(랜들 박)와 함께 블랙 트라이던트를 손에 넣은 것이다. 더 어두워지는 블랙 만타. 남극에 봉인된 코닥스 왕을 구출해 아틀란티스를 무너트리려고 한다.
지구 온난화와 이상기후
이 영화가 다루는 소재 중 하나는 이상기후다. 지구온난화와 이상기후 문제가 슈퍼히어로물에 자주 등장하지 않아서 그렇지 소재 자체는 이 장르에 등장하기 딱 좋다. 그야 우리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거니와 현세태 우리가 처해있는 시급한 문제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또 이 <아쿠아맨과 로스트 킹덤>이 이 문제를 아쿠아맨이 다뤄야만 했던 이유를 잘 설정했다. 아쿠아맨이 살고 있는 아틀란티스는 해저 왕국이다. 바다와 지구온난화 문제는 뗄래야 땔 수 없는 관계라는 건 당연하다. 그리고 이 인물의 서사에서도 지구온난화 문제의 핵심과 이어지는 부분이 있다. 이는 영화 초반부에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아쿠아맨의 서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고 전작을 보면 더 자세하게 파악할 수 있으니 시리즈물의 의의도 놓지 않은 셈이다. 또 시각적으로도 여러 소재가 등장한다. 그냥 단순히 가족영화의 일부분으로서 짠하고 등장한 인물이 아닌 아기 캐릭터, 또 초반부에 공간적 배경이 되는 빙하 등 소재를 담는 그릇이 이 영화에는 충분했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 영화가 지구온난화 문제를 깊숙하게 탐구한다고 보긴 어려운 감이 있다. ‘왜 아쿠아맨이 다루는가’는 탄탄하게 설정했어도 사회문제를 고발하는 역할에는 부족한 것이다.
호러적 상상력
또 이 영화는 감독 제임스 완의 상상력이 빛을 발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공간적 배경은 두 곳이다. 아쿠아맨이 살고 있는 아틀란티스와 제목에 등장하는 ‘로스트 킹덤(잃어버린 왕국)’이다. 우선 아틀란티스를 묘사하는 방식은 아쿠아맨과 메라를 코디하는 방식(?)과도 유사하다. 형형색색의 빛나는 아틀란티스가 세상 화려한 이 부부와도 잘 어울린다. 대표적으로 아틀란티스의 국회정도 되는 공간이 영화에 등장한다. 또 아틀란티스 국민들의 일상을 보여주는 장면도 있다. 이 두 장면에서 영화는 어디서 처음 본 것들로 가득 차있다. 그리고 이 화려한 것들을 보여주는 카메라워킹도 심해를 다룬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처럼 움직인다. 이런 연출법은 본작이 가진 인공성을 두드러지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서사를 이끄는 데 있어 나름 근거가 된다. 우리가 3D 영상매체를 친숙하게 느낀 이유는 무엇일까? 글쓴이는 게임이라고 생각한다. 90년대 후반대생인 글쓴이는 <서든어택>이 기억에 생생하다. 뭔가 어색하지만 나름 3D의 구실을 갖췄던 이 <서든어택>처럼 이 영화는 우리에게 친숙한 언어로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다. 이렇게 간단한 화법 덕에 후반부에 아쿠아맨을 통해 하고 싶었던 말을 받아들이기 쉽다.
또 제임스 완 감독의 근본이 호러 장르에 있다는 것이 이 영화에 잘 나타나는 편이다. 사실 감독이 이 영화에서 보여준 장기가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가 1차원적으로 ‘아쿠아맨 짠! 지구온난화 쨘!’하고 끝냈으면 2023년 말의 관객들에게 욕먹기 딱 좋을 것이다. 이야기 전개가 얕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장르 비틀기로 서스펜스를 만들기도 하고, SF물로서의 개성을 확보하고 있다. 생각해 보면 이 영화에서 긴장감이 들어갈만한 요소가 그렇게 많지 않다. 하지만 그 자그마한 구멍도 감독 개인의 개성으로 주파한다. 특히 해양 생물이 개성이 강하면서도 끔찍하다. 글쓴이는 <닥터 스트레인지 : 대혼돈의 멀티버스>가 연상됐는데, 제임스 완 감독이 샘 레이미처럼 뻔하지 않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고민한 흔적이 나타났다.
오랜만에 액션
글쓴이가 생각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장점은 액션이다. 이 영화에서 액션이 자주 나오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최근에 봤던 슈퍼히어로 영화의 액션 중에서는 개성이 선명하다. 왜? 바로 맨몸액션이 나오기 때문이다. 우리가 봤던 최근 슈퍼히어로 영화 중에 맨몸액션이 등장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마블과 DC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 Volume 3>, <더 마블스>, <플래시>까지 그린 스크린과 함께 화려한 액션을 펼쳤다. 이 영화도 CG가 들어가는 부분이 분명 있긴 하지만 액션 자체는 맨몸으로 스피디하게 보여준다. 전작에서 <아쿠아맨>이 수중 액션으로 극찬받았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제임스 완이 시리즈의 전통을 유지한 셈이 된 것이다.
뚝딱거리는 인형놀이
이 <아쿠아맨과 로스트 킹덤>은 우려한 바 자체는 잘 해결한 영화라고 볼 수 있다. 어떤 것을 우려할까? 바로 메라의 서사다. 이 영화 이전에 담당 배우 앰버 허드가 거대한 스캔들에 휘말렸다. 사생활에 관대한 할리우드라도 차마 참을 수 없는 몇 기사들이 나왔다. DC의 운영진들이 이를 의식하고 분량에서 배제했다는 결정을 여러 뉴스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사실 글쓴이는 이 점을 가장 먼저 신경 쓰고 봤다. 극장에 들어가기 전에 ‘이거 앰버 허드 없는 빈자리가 좀 크게 느껴질 것 아닌가’ 우려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우려가 무색하게 메라 서사는 깔끔하다. 오히려 이상기후 문제를 옴이라는 인물과 함께 해결한다는 점이 주제와 이야기 구조가 어울리는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제임스 완이 가진 영화연출가로서의 능력이 빛을 발한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편집, 각본, CG, 음향 등 극 중 많은 요소에서 뭔가 날것의 티가 난다는 건 영화의 큰 단점이다. 이야기의 박력이 극을 이끄는 데에는 무리가 없다. 하지만 성격이 섬세한 관객이라면 이물감이 느껴질 만한 요소가 많다. 글쓴이 개인적으로는 바다와 인물이 함께 있는 것이 매치가 잘 안 됐다. 편집도 마찬가지. 갑자기 너무 길던가 뚝 끊기던가 왔다 갔다 흔들린다. 이야기도 (메라와 상관없는 부분에서) 분량이 갑자기 늘어진다. 뭐 이런 것들이 역시 영화를 관람하는데 큰 문제가 되는 건 아니지만 완성도의 측면에서는 아쉽다고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또 이야기의 캐릭터의 측면에서도 급조한 느낌은 여전히 이어진다. 가장 큰 문제는 빌런이다. 내내 강력한 카리스마를 풍기다가 갑자기 인물 서사가 끝나는 감이 있다. 이 인물이 작 중 어떤 소재와 관련이 있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이야기의 밀도 측면에서 구멍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또 주인공 아쿠아맨에게 행동 당위성이 떨어지는 느낌이 좀 있다. 가령 <아이언맨>에서 토니 스타크가 무기상에서 슈퍼히어로로 전직하는 계기를 극 중에서 전부 설명한다. 또 <캡틴 아메리카 : 퍼스트 어벤져>에서도 인물의 성격을 탄탄하게 묘사하고 2차 대전으로 넘어간다. 그러나 이 영화의 아쿠아맨은 성격 묘사와 행동의 근거가 빈약하다. 동생과의 협력이나 인류에 대한 코멘트가 어느 정도 더 있었어도 좋지 않았을까? 제이슨 모모아가 멋있고 배우 액션 연기 좋으니 슈퍼히어로다’의 결론으로 향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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