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4-11-01 16:29:16
국내 여성 영화 감독의 빛나는 데뷔작
<모래바람> 11월 27일 대개봉!
에디터가 차기작 제작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여성 영화 감독의 빛나는 데뷔작들을 소개합니다!
10대의 성장통을 다룬 <보희와 녹양>, <비밀의 언덕>부터 덕후였다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다큐멘터리 <성덕>, 모녀 관계를 다룬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딸에 대하여> 등 각기 다른 장르와 소재를 다룬 데뷔 영화들을 선정해 보았습니다.
특히 곧 개봉을 앞둔 <모래바람>은 박재민 감독이 씨름에 빠져 다큐멘터리까지 찍게 되었다는 비하인드가 전해져오는데요.
2009년 최초의 여자 천하장사가 탄생한 이후 5명의 여자 씨름 선수들이 비인기 종목이라는 현실을 극복하고 천하장사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담은 최초의 여자 씨름 영화!
<모래바람>은 11월 27일 극장에서 만나 보실 수 있습니다.
보희와 녹양
A Boy and Sungreen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The Apartment with Two Women
성덕
Fanatic
비밀의 언덕
The Hill of Secrets
지옥만세
Hail to Hell
딸에 대하여
Concerning My Daughter
모래바람
Sandstorm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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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F의 탈을 쓰고 윤리적 딜레마를 다루는 블랙 코미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섬 한 가운데에 자리잡은 최첨단 교도소에서 자타가 공인한 천재 과학자 '스티브(크리스 헴스워스)'는 실험에 자원한 재소자들에게 행복, 번뇌, 성욕, 복종 등의 여러 감정을 조절하는 여러 신약을 테스트한다. 자칫 비인간적일 수도 있는 이 실험은 죄수들이 주립 교도소에 갇히는 대신 자원해서 참여했다는 점, 그리고 상대적으로 많은 자유가 그들에게 주어진 다는 사실에 의해 정당화된다. 그러던 어느 날, 음주 운전으로 아내와 친구를 사망에 이르게 한 죗값을 갚기 위해 실험에 자원한 '제프(마일즈 텔러)'는 프로젝트의 목적과 주체에 의문을 품는다. 애정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약물을 주입하도록 시키는 스티브를 보면서 의구심이 피어난 것이다. 해당 실험에서 사망자가 발생하자 제프의 의심은 더욱 커지고, 사랑을 싹 틔워가던 '리지(저니 스몰렛)'에게 약물을 주입하라는 스티브의 명령에 그는 마침내 반발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스파이더헤드>는 조지 선더스의 단편 소설 <Escape from Spdierhead>를 영상화한 작품으로, <트로: 새로운 시작>, <오블리비언>, <온리 더 브레이브>에 이어 올해 <탑건: 매버릭>까지 연출한 조셉 코신스키 감독의 작품이다. 줄거리나 예고편만 봐도 느껴지듯이 <스파이더헤드>는 과학 기술 발전의 명암 중 암을 집중적으로 묘사하는 영화다. 비인간적 실험을 진행하는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해당 실험이 인류의 발전을 위한 필요악이라고 주장하는 가운데, 자유 의지 박탈당한 이들이 저항하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러나 이 영화를 SF 작품으로 규정하는 것은 부적절해 보인다. <블랙 미러> 시리즈를 연상시키는 SF 스릴러의 분위기를 풍기던 초반부가 지나가면 <스파이더헤드>는 과학 연구 윤리를 매개로 '무엇이 옳은 행위인가'에 대해 보다 일반적인 윤리적 논쟁이 벌어지는 블랙 코미디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는 각기 다른 삶의 가치를 지닌 두 인물이 있다. 우선 제약사 주인이자 실험의 기획자인 스티브는 철저한 공리주의자다. 공리주의자는 효용의 극대화를 옳은 행위라고 본다. 개개인의 행위에 깃든 본래 가치와 무관하게 가장 바람직한 결과를 낳는 행위는 많이 이루어질수록 좋다는 것이다.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한 개인의 행동이 직접 초래한 결과와 그의 간접적인 개입이 유발한 사건의 결과가 구분되지 않는다.
실제로 공리주의자는 모든 사람에게 결과의 책임을 부여한다. 본인의 행동에 대한 책임은 물론, 다른 개인이 초래한 부정적 결과를 막지 못한 책임까지도 요구한다. 이는 개인에게 지나치게 과한 도덕적 부담을 주고, 개인을 의도와 계획을 지닌 주체로 고려하지 않으며, 그들의 정체성을 추상화하는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그 결과 공리주의자 개개인은 자신의 신념이나 판단력에 근거하여 행동하는 대신, 효용의 극대화라는 기준을 충실히 따르며 자기 자신을 의사결정 과정에서 소외시킨다. 그래서 공리주의를 따르는 개인은 효용 극대화의 통로이자 수단에 불과해진다.
실제로 스티브는 실험에 자원한 모든 죄수들을 동등하게 대한다. 그들의 죄가 어떤 맥락에서 이루어졌든 간에 그들은 사회적 이익을 감소시키는 범죄를 저질렀고, 따라서 의도적인 범죄와 실수의 차이는 그에게 중요하지 않다. 그들이 자신들의 죗값을 씻겠다는 도덕적인 이유로 실험에 자원했다는 사실만이 중요하다. 이러한 그의 관점에서 보면 범죄자의 인권은 말살해도 마땅하며, 처벌 대신 승인한 인권침해 실험은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 그래서 그는 모든 사람이 통제를 따를 수 있게 되면 더 큰 선의와 대의를 추구할 수 있게 될 것이며, 평화와 화합이라는 가치를 전파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그가 모든 사람들을 복종시킬 수 있는, 심지어 사랑하는 이를 해치는 일까지 하게 만드는 약물인 B-6을 개발하는 데 총력을 다하는 이유다. 그 과정에서 제프의 죄책감을 자극해 심리적으로 압박하는 것도 망설이지 않으며, 자기 자신에게도 약물을 주입한다. 그렇게 죄수들과 제프, 그리고 본인까지도 수단으로 이용한다.
반면에 제프는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지극히 칸트적인 이유로 스티브의 실험에 반대한다. 인간은 이성을 지닌 존재이며, 타인들이 수용할 수 있는 보편적인 윤리 법칙을 만들고 이를 지킬 자유를 갖고 있다. 그래서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존엄한 존재이고, 따라서 인간은 수단으로 사용되면 안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제프에게 약물은 존재해서는 안 되는 대상이다. 사회적 맥락에서 다수의 효용을 극대화할 목적을 위해 인간을 도구로 활용하는 기제이고,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자유의지를 원천적으로 제한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때 흥미로운 것은 스티브의 신념에 비해 더 직관적으로 동의하기 쉬운 제프의 서사에 영화가 의도적으로 설득력이 떨어지는 이야기를 덧붙인다는 점이다. 영화는 제프와 리지가 범죄자들이지만 결코 나쁜 인물은 아니라고 묘사한다. 제프의 교통사고는 한순간의 치기 혹은 실수였을 뿐이고, 리지가 딸을 살해한 것 역시 의도적인 살인이 아니라 과실치사였다면서 그들의 선함에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한다. 이 경우 본래 선한 인물인 이들의 자유의지를 핍박하는 스티브와 그의 신념을 악한 것으로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제프와 리지의 과거사는 그 자체로 그들의 항변과 비판의 반례가 된다. 어찌 되었건 술에 취한 채 운전을 하기로 결정한 제프의 자유의지, 한여름에 아이를 차에 태운 채 출근하기로 한 리지의 자유의지가 그들의 비극과 범죄를 유발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제프의 서사에 윤리적 정당성이 깃들어 있다고 보기 어려운 측면이 존재하며, 이는 작중 선인과 악인을 명확히 구분하고 옹호하거나 비난할 수 없는 아이러니를 낳는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블랙 코미디로서 <스파이더헤드> 특유의 기괴하고 암울한 분위기가 돋보이는 일등공신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 곧 제프의 입장은 직관적으로 옳다고 느껴진다. 사람을 도구로 쓰지 말라는 주장에 반대하기란 쉽지 않다. 과학 기술의 급격한 발달에 대한 경계심이 나날이 높아지는 형국에서는 시의적절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메신저 때문에 메시지에 잡음이 생기다 보니, 역으로 극단적인 공리주의자인 크리스의 괴변은 더 인상적이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에 의해 보육원에 버려졌고 이후 단 한 번도 가족을 만나지 못했다는 스티브의 개인사가 간결하게 제시되면서 오히려 그의 광기에 설득력이 더해준다. 피실험자들 중 사망자가 나와도 그저 웃으며 미안하다고 말하는 크리스 햄스워스의 소름 끼칠 정도 생생한 연기도 큰 몫을 해낸다. 이러한 제프와 스티브 사이의 불균형은 영화의 분위기를 살려내기 위해 의도된 측면처럼 보이기도 한다. 원작자인 조지 선더스가 자본주의 세상에서 기존의 도덕적 가치관을 포함한 여러 기준점이 뒤틀려버린 미래의 기묘함을 글로 표현하는 데 탁월했기 때문이다. 약물에 취한 스티브가 마주하는 최후도 이러한 분위기를 극대화한다.
이는 스티브의 조수인 마크의 역할이 중요성에 비해 제한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작중 스티브의 악행, 도를 넘은 광기, 극단성은 그의 논리에 내포된 자유의지의 침해라는 취약점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이때 스티브의 악행을 외부에 고발한 마크는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미 논변의 정당성을 잃은 제프보다도 스티브와 첨예한 대립각을 세울 수 있는 캐릭터다. 스티브의 연구에 자발적으로 합류했기 때문에 자신의 신념에 따라 연구를 포기하고 스스로 연구 윤리를 어긴 책임을 다하는 그는 스티브의 진정한 안티테제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마크의 역할이 지나치게 강조될 경우 직관적으로 잘못됐다고 생각하지만 쉽사리 반박하기 어려운 스티브의 신념에서 비롯된 딜레마와 그로 인한 불쾌함이 덜 부각되고, 이는 블랙코미디로서의 매력을 저하시킬 수 있다. 그래서 <스파이더헤드>는 적은 인물에게만 초점을 맞춘 채 그들의 심리적인 갈등을 부각하는 데 집중한다.
문제는 조셉 코신스키 감독이 전작에서 보여줬던 단점들을 반복한 나머지 영화가 전반적으로 지루하다는 점이다. 특히 <오블리비언>과 유사한 문제점을 답습한 것이 눈에 띈다. <오블리비언>에서 코신스키 감독은 여러 가지 복선을 던지면서 초반부를 다소 길게 끌다가, 특정 사건을 분기점으로 후반부에 급전개를 선보인 바 있다. <스파이더헤드>도 마찬가지다. 실험 과정과 제프의 생활상을 오가면서 서서히 긴장감을 끌어올리고, 제프와 스티브의 갈등이 외면적으로 분출되는 순간 절정에 도달한다.
그런데 <스파이더헤드>의 원작이 애초에 단편이었던 관계로, 긴장감을 끌어올려야 할 초반부의 에피소드들은 필요 이상으로 늘어지면서 공허하다. 한정된 공간에서 몇 안 되는 등장인물만으로 전개되고, 화면 전환의 속도도 빠르지 않아서 매 장면마다 분량에 비해 정보량이 적은 느낌이 들다 보니 더욱 그렇다. 또한 후반부는 과하게 압축되어 주인공들의 심리적 흐름을 온전히 보여주지 못한다. 위 문제들이 한데 모인 결과 윤리적 딜레마를 지적하는 영화의 통찰은 결코 깊이 있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블랙 코미디로서 목표 달성에 실패한 셈이다.
따라서 <스파이더헤드>는 최근 주가를 올리고 있는 제작진과 배우들의 조합에 비해 알맹이가 부족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참신한 소재로 눈을 사로잡지만, 그 시선을 2시간 동안 고정시키지 못하는 수많은 넷플릭스 영화들의 전철을 그대로 따른다. 결국 <스파이더헤드>는 팝콘 무비로서, 또 조셉 코신스키 감독과 마일즈 텔러의 <탑건: 매버릭>과 크리스 햄스워스의 <토르: 러브 앤 썬더> 사이를 잇는 가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는 데 그치고 만다.
P(Poor, 형편없음)
소재만 그럴싸한 수많은 넷플릭스 영화의 전철을 착실히 따르는 범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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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고 있지만>, 정성스런 섹스 장면의 비밀
<알고 있지만>을 보고 있자니, <브리저튼>이 떠올랐다.
우연히 고른 두 컷인데, 여자가 살짝 미소지으며 다른 곳을 응시하고, 남자가 바로 옆에서 뜨거운(?) 눈빛으로 여자를 바라보는 것도 비슷하다.
주인공들의 관계 구도, 캐릭터의 속성이 참 비슷한 것 같다.
사랑에 서툰 '유나비'와 '다프네'
<알고 있지만>의 유나비, <브리저튼>의 다프네
사랑에 너무 능숙한(?) '박재언'과 '사이먼'
<알고 있지만>의 박재언, <브리저튼>의 사이먼 x
두 작품의 핵심적 공통점,
두 사람 간의 '애정씬'에 엄청난 공을 들인다는 것!
섹스 장면을 아주 길~고 아름답게, 정성들여 보여준다는 것!
누구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아는 것처럼 보이기만 했던 주인공들은,
사실 하나같이 자신의 진짜 소망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 상태이다.
사랑에 서툴었던 이도, 사랑에 능숙했던 이도.
그들은 당당하고, 당차고, 자신만만해 보이지만,
그 자신감의 원천에는 '가짜 소망'이 자리잡고 있기 쉽다.(그래서 무너지기도 쉽다)
나 조차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나의 진짜 소망이 무엇인지 스스로 모르고 있거나, 속이고 있기 때문에.
위장된 가짜 소망을 진짜 소망이라고 우기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섹스' 장면은 더없이 중요하다!
두 작품 모두 19금이어야만 했던 이유!
두 작품 모두 정성스럽게 섹스 장면을 집중적으로 보여주는 이유!
<알고 있지만>, <브리저튼> 모두에서
주인공 간의 애정씬은 양쪽 모두에게 '진짜 자신의 소망'을 발견하게 하는 중요한 장치가 된다.
진짜 자기 자신을 탐색해 보는 시간!
'몸'의 반응은 '말'보다 솔직하다.
주인공들은 서로 '마음에 없는 말'을 내뱉는다.
진짜 자신의 소망은, 진짜 자신의 욕망은 교묘하게 감추고,
자신 조차 자신의 마음을 속이면서,
상대에게 진짜 마음을 들키기라도 하면 크게 패배라도 하는 것 마냥 두려워하면서,
포장하고 또 포장한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감추고 감추는 과정에서, 나조차 내 진짜 마음을 모르게 된다.
결국 내가 내뱉은 말에 상처를 받게 되는 것은 나 자신이다.
나 스스로 내 마음을 속이고 내뱉는 말들은, 되려 나를 공격하게 된다.
그것이 아이러니다! 나를 지키기 위해 내세운 방패가 오히려 내 살을 짓누르게 된다는 것!
나를 지키려고 하면 할수록, 감추려고 하면 할수록, 더 상처받고 발목을 잡히는 것은 나라는 것.
<알고 있지만> 속 애정씬
그러나 '몸'의 반응은 '말'보다 솔직하다.
순간의 떨림과 흥분, 설레임, 기쁨, 환희는 감출 수 없다.
나의 모든 방패가 내려지는 순간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자신의 소망을 제대로 탐색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의 진짜 소망이 무엇인지!
가짜 소망과 진짜 소망 사이에서 방황하고 갈등하며, 진짜 자신의 모습을 탐색하는 인물들!
'연애인듯, 연애아닌, 연애같은 관계', 가짜인듯 진짜같은, 애매모호 경계선에 놓인 인물들!
이 경계선을 무너지게 할 수 있는 강력한 한방, 꼭 필요했던 장치, 바로 섹스 장면!
'가짜 소망'이 아니라 '진짜 소망'에 기반한 '나만의 자신감'을 찾을 수 있는 중요한 계기!
이 중요한 계기를 나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변하는 것, 움직이는 것, 찰나'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변하지 않는 것, 고정된 것, 영원한 것에 대한 갈망은 누구에게나 있다.
마치 두 사람 간에 '키스'를 하면, 그 관계를 보다 고정시켜야만 하는 것 아닌가라고 기대하는 '유나비'처럼.
이러한 유나비에게 박재언은 말한다. "왜 꼭 그래야 해?"
변하는 것, 움직이는 것, 찰나에 대해 부정적으로만 여기면,
나의 진짜 소망을 제대로 탐색하기 어렵다.
왜곡되기 쉽다. 위장되기 쉽다.
실상을 제대로 바라보기 어렵게 된다.
다프네와 사이먼은, '계약 관계' 를 거치면서 안전하게 자신들의 감춰진 진짜 소망을 발견하게 된다.
'진짜가 아닌 가짜 관계'가 이들에겐 꼭 필요했다! 안전하게 진짜를 탐색할 수 있는 가짜 판!
그러나 진짜를 발견하는 순간 가짜판은 더이상 가짜가 아니라 새로운 진짜가 된다!
유나비와 박재언도,
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애매모호한 관계'를 거치며, 그들의 진짜 소망을 꼭 발견하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 19금은 필수이겠지! 앞으로도 정말 공들여 만든, 정성스러운 애정씬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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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인의 일상화
미국이 '인디언'이라 부르던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내쫓아 땅을 빼앗은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 과정에서 일어났던 많은 일들은 소설과 영화로도 만들어졌고, 그런 이야기들 중에 <포카혼타스>나 <늑대와 춤을>, <라스트 모히칸>과 같이 잘 알려진 영화와 애니메이션도 있다. 차별받고 학살당하는 그들에게 동화되어 그들을 이해하고 사랑하며, 나아가서 그들을 위해서 앞장서서 싸워주는 이야기는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물론, 그것들이 품고 있는 무서운 '내적 식민지화'를 몰랐을 때의 이야기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에 대한 학살은 미국의 원죄나 다름없다. 위의 이야기들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어떻게 학살되고 차별받고 쫓겨났는지 보여주는 영화이기도 하지만, 거기에 '그들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구원하려던 백인들이 그들을 구원했다'라는 메시아적 서사를 덧씌운다. 이 개념은 정말 여러 군데에서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비단 아메리카 원주민뿐 아니라 아프리카나 일본에 대한 이야기도 <타잔>과 <라스트 사무라이>등으로 그려지고 최근엔 <아바타>까지 그 서사를 이어간다. 그리고 백인들은 '자신들의 제국주의 역사'를 비판한다며 열광한다. 결국 그 식민지도 백인이 구원한다는 이야기인데. 한국으로 비유해 보자면, 임진왜란 때 조선에 항복해 일본과 싸우던 항왜를 주인공으로 해서, 항왜가 조선 여인과 사랑도 하고 조선을 구했다는 식의 스토리가 되는 셈이다.
서양의 이런 메시아 서사는 기독교의 예수 스토리에서 영향받은 것이 대부분이다. 예수는 신의 아들이지만 인간의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입장을 이해하고 인간의 편에서 구원을 돕는다. 결국, 신인 자신을 희생해 인간을 구원한다. 이 기독교식 구원 이야기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신이다. 인간은 신이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즉,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존재다. 헐리우드의 많은 영화는 이런 메시아 서사를 백인과 식민지의 관계로 풀어놓아서, 얼핏 보면 식민지를 이해하고 사랑하고 구원하는 이야기 같지만 가만 들여다보면 식민지인 자체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게 짙게 깔려있다. 결국 그들을 구원하는 건 그들에게 감화된 제국인, 백인이니까.
영화감독 마틴 스코세이지는 기존의 '백인이 식민지를 구원한다'는 서사를 깔지 않고, 미국이라는 나라가 가진 흑역사와 원죄를 그대로 드러내는 영화를 만든다. 이탈리아 이민자들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뉴욕 백인들의 끔찍한 과거까지. 그는 그것을 포장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토록 많은 평단의 찬사에도 불구하고, 아카데미상과 이상하게 인연이 없는 감독이었다. 마틴 스코세이지의 영화 <플라워 킬링 문>은 흔한 '인디언에 대한 차별과 학살'에 대한 스토리가 아니다. 이 영화가 충격적인 이유는, 그동안 백인 구원서사로 점철되어 왔던 이야기들의 민낯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살인의 일상화
아메리카 원주민 오세이지 족은 백인들에 의해 바위 투성이인 오클라호마로 쫓겨가 어쩔 수 없이 그곳에 터전을 잡는다. 하지만 거기에서 석유가 터지며 상황은 반전된다. 백인들이 내쫓고 그들의 땅이라고 이름 지어준 곳에서 석유가 터졌으니, 백인들의 법으로 오세이지족의 석유가 된다. 여타 영화에서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무조건 백인의 법을 무시하고 무식하게 싸우다가 죽어가는 모습을 그렸던 것과 달리, 오세이지족은 그 법을 살려 석유가 자신들의 돈이 되도록 한다. 물론, 그 돈을 온전하게 다 쓰지 못하도록 백인들이 또 복잡한 절차를 만들긴 했지만.
영화에서 계속 그려지는 풍경은 굉장히 기이하다. 개척시대에 아메리카 원주민 오세이지족과 백인들이 너무 즐겁게 융화되어 잘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오세이지족이 백인들을 하인으로 부리고 있다. 백인들은 친절하고, 그들의 말을 배우고 같이 사업을 하며 술도 마시고 결혼도 한다. 오세이지족도 마냥 자신들의 생활방식을 고집하는 게 아니라 백인들의 집, 문화와 많이 동화되어 있다. 이런 풍경을 그리는 영화를 본 적이 없어서, 이게 정말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인지 다시 확인해야 했다.
하지만 그 평화롭게 보이는 일상에서, 오세이지족은 너무 일찍 죽는다. 그리고 그 죽음이 그냥 평범한 죽음이 아니라, 백인들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이 보인다. 이 부분이 <플라워 킬링 문>에서 가장 섬뜩한 부분 중 하나인데, 끔찍한 연쇄살인이 너무도 평범한 일상과 평화로운 음악을 배경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그려진다는 점이다. 이것은 마치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큐어>를 연상시킨다.
<큐어>는 아주 일상적인 장면에서 끔찍한 살인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기에 굉장히 섬뜩한 느낌을 주는 영화다. 물론 그것이 최면에 의한 것이긴 했지만, 평범하게 살고 있는 우리 주변의 모두가 살인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살인의 일상화'로 공포를 주는 작품이다. 발랄한 아침음악과 함께 아침 일상을 하는 도중, 마치 옷을 개듯 사람을 죽이고 다음 일을 이어가는 사람들. 하지만 <플라워 킬링 문>은 더욱 무섭다. 왜냐하면 여기서 살인을 저지르는 백인들은 최면에 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무엇이든 가능하게 하는 최면
사람들은 보통 권력이란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권력은 오히려 그 힘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힘을 드러낸다. 언론은 무언가를 일부러 보도하지 않음으로써 그 힘을 과시한다. 검찰은 기소하지 않음으로 그 힘을 과시한다. 촌지를 받은 선생님은 잘못한 학생을 처벌하지 않음으로써 권력을 보여준다.
오클라호마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집단 중 하나가 된 오세이지 족이 권력을 가진 것처럼 보였지만, 백인들이 세운 거대한 미국이라는 국가 안에 속해있기 때문에 사실상 권력은 백인들이 쥔 셈이었다. 그곳의 백인들은 모두가 한통속이다. 특히 오세이지족과 가장 친한 그들의 대변자 윌리엄 킹(로버트 드니로)부터, 그곳 보안관까지. 그 마을의 백인들은 범죄를 묵인하는 방식으로 그들의 권력을 드러낸다.
'무엇을 해도 처벌받지 않는다'라는 생각은 그 어떤 최면보다도 더 강력하다. <뜨거운 녀석들 - 견제받지 않는 권력이란 무엇인가> 글에서도 언급했듯, 견제받지 않는 권력은 부패하며 스스로 끔찍한 짓을 저지른다는 인식조차 없어진다. 처벌받지 않는 권력은 그래서 무섭다. 오세이지 족을 아무런 죄책감없이 일상 속에서 죽이는 백인들은 그들이 사이코패스라서가 아니라, 범죄를 저질러도 처벌받지 않는다는 최면에 걸려있기 때문이다. 처벌받지 않는 권력은 현대에도 도처에 자리잡고 있다.
사실 영화라는 미디어 역시 최면이다. 사람을 이야기에 빠트리고, 훌륭한 외모를 가진 배우들이 서사의 당위성을 만들어준다. 그래서 영화 속에서는 무슨 일이든 가능해진다.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은 이 영화의 메시지를 영화라는 최면 안에 녹여서, 그것이 '영화를 즐기는 재미'속에 들어가도록 두지 않는다. 이 사건이 어떤 결말을 맞았는지, 또 범죄자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시간이 지난 후 그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정말 당혹스러울 정도로 영화라는 형식을 깨고 이야기를 전달한다. 그 순간 우리는 마치 최면에서 깨는 '레드선' 주문을 들은 것처럼, 이것이 영화가 아니라 실제 역사였고 현실이라는 것을 마주한다. 현실은 영화보다 더 끔찍하다.
스스로를 구원하는 피지배자
오세이지 족은 힘없는 피해자가 아니라, 스스로 살 길을 개척하고 스스로를 구원하는 사람들이다. 원작 소설에서는 그들을 구하러 오는 FBI가 주인공처럼 그려지지만, 영화에서는 오세이지 족과 결혼하는 어니스트 버크하트(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주인공으로 했다. 더군다나 '잘생김의 서사'를 피하기 위해, 배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의치를 넣고 일그러진 표정을 지어가며 열연을 했다. 덕분에 이 영화에선 오세이지족의 억울함, 스스로 개척하고 구원하는 힘이 더욱 강조되었다. 영화 내내 오세이지 족은 그저 당하기만 하는 피해자가 아니다.
이 영화가 오세이지 족과 미국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사실 이 세상의 모든 피지배층을 대변하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미국 노예제도를 폐지한 것은 지배층인 백인이었지만, 미국 흑인들의 목숨을 건 꾸준한 저항이 없었다면 그것이 가능했을까? 여성운동 또한 권력층인 남성들이 변화해야 하지만, 여성들이 주체가 되어 운동을 하지 않았으면 지금과 같은 정도라도 변화가 일어났을까? 한국이 1919년 독립선언을 한 이후 끊임없이 저항운동을 하지 않았다면, 백인에 의해 전쟁이 끝났다고 해도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할 수 있었을까? 피지배층은 권력에 끊임없이 저항했고 그것이 스스로를 구원해왔던 길이다.
비록 계란으로 바위 치기처럼 보여도, 당장은 힘이 없는 자의 몸부림으로 보일지라도,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힘이 있다. 기존의 메시아 서사처럼 지배층의 누군가가 감화되어 싸워주지 않아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 현대의 오세이지 족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원작의 저자 인터뷰에 따르면 오세이지 족의 석유는 고갈되었지만, 7개의 카지노를 운영하며 자체 헌법으로 잘 살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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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얼핏 보면 '이전에 하던 백인이 인디언 죽이는 이야기네'라고 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훨씬 더 무섭고 끔찍한 역사의 이야기며, 그동안 백인 구원 서사를 통해 백인들이 감추고 싶었던 이야기다. 자신의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전달하는 거장의 발걸음도 묵직하고, 범죄의 희생자였지만 피해자처럼 살지 않고 백인에게 무릎 꿇지 않는 오세이지 족의 당당함이 존경스럽다. 하지만 이 영화의 한국 제목에 대해서 의문이 들었는데, 원작 소설의 첫 페이지를 보고 이해하게 되었다. 원작 소설인 <플라워 문>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불안할 정도로 커다란 달 아래에서 코요테들이 울부짖는 5월이 되면 자주달개비, 노랑데이지처럼 키가 좀 더 큰 식물들이 작은 꽃들 위로 슬금슬금 번지면서 그들에게서 빛과 물을 훔쳐가기 시작한다. 작은 꽃들의 목이 부러지고 꽃잎들은 팔랑팔랑 날아간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땅속에 묻힌다. 그래서 오세이지족 인디언들은 5월을 '꽃을 죽이는 달 Flower-killing moon'의 시기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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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영화를 욕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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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하자면, 〈카터〉의 정병길 감독은 계속 액션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 아마 〈악녀〉를 인상 깊게 본 사람이라면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을까 싶다. 〈악녀〉의 스토리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너무 구멍이 많고 전형적이라 아쉬웠다는 인상만 남아 있다. 하지만 액션신은 그렇지 않았다. 도대체 이런 액션이 도대체 어디서 나왔나 싶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특히 버스 액션신이 그랬다. 기존 액션의 연장에 있다기보다는, 완전히 새로운 느낌의 액션이었다.
〈악녀〉의 장점과 단점은 〈카터〉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이번에도 현란한 액션이 먼저고 스토리는 액션을 보여주기 위한 수단처럼 활용된다. 그래도 이전보다는 낫다. 인간의 공격성을 극대화하는 DMZ 바이러스가 창궐하자 남북이 합작하여 치료제를 만들고자 한다. 그런데 치료제 개발의 중추인 박사와 그의 딸을 북한의 연구소로 옮기고자 하는 남북 합작 작전에 미국이 개입하여 훼방을 놓는다. 여기에 부성애 코드를 장착한, 사연 있는 요원이 작전을 완수하라는 미션을 받고 개입하고, 언젠가부터 북한 정권이 영화에 나올 때 꼭 등장하는 군부 내 쿠데타 세력 또한 등장한다. 익숙한 민족주의 서사지만, 〈악녀〉 스토리의 빈약함을 생각했을 때 이 정도면 그래도 진일보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악녀〉보다 나을 뿐이다. 서사 자체만 놓고 본다면 〈카터〉는 분명 낙제점이다. 서사의 진부함과 얼개는 말할 것도 없고 개연성 없음의 문제도 사실 꽤 심각하다. 그러나 다시금 말하지만 〈카터〉의 중심은 액션이다. 정병길 감독은 〈악녀〉에서 선보였던 액션을 더 큰 스케일로, 더 실험적으로 연출했다. 규모가 커진 만큼 중간중간 공백이 보이는 점은 아쉽다. 그러나 2시간이 훌쩍 넘는 영화를 꽉 채운 액션과 이를 원테이크 연출로 담아낸 기법, 게임을 연상케 하는 카메라 워킹 등은 분명 정병길 감독만이 가진 자산이다.
그가 자신의 장점 외에 다른 것들에도 조금 더 신경을 써서 영화의 전체적 완성도를 높인다면, 그의 스타일이 익숙하지 않다며 영화를 혹평하는 관객*의 마음도 결국 돌아서리라 본다. 지금은 스타일만 언급되고 있지만, 그가 높은 완성도로 호평받은 〈내가 살인범이다〉의 각본을 쓰고 연출한 감독이었음을 되새겨보자. 그가 구축한 독창적‧독보적 스타일이 언젠가는 영화의 완성도와 어우러지길 기대하는 게 무리는 아닐 것이다. 물론 면죄부가 언제까지나 허용되지는 않을 터다. 다만 아직은 스타일에‘만’ 천착하는 액션 아방가르드 정병길에게 기회를 빼앗을 때가 아니란 소리다. 단점은 너그러이 눈감아주고, 장점에 집중한다면 〈카터〉 감상이 충분히 즐거울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네이버 영화' 평점 댓글란을 참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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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아니었다면 더 좋았을 당신께
<헤어질 결심>과 <미쓰 홍당무> 그 사이 어드메를 노니는 영화가 2024년에 이렇게 아무런 예고도 없이 재소환될 줄 누가 알았을까? 아니 그 전에 그런 혼종적인 게 어떻게 이렇게 자연스레 존재할 수 있을까?
포스터만 보고는 노인 성폭행 피해를 다룬 <69세>의 임선애 감독이 묵직하고 깔깔한 전작에 비해 산뜻하고 푸근한 사랑 영화를 만들려던 줄로만 알았지만, 정작 우리에게 당도한 것은 숨이 턱 막힐 만큼 밀도 높은 감정의 홍수다. 둘러가지 않고 변명하지도 않아서 선명도가 아주 높은 서사와 대사들, 박찬욱이나 이경미에 견줘도 손색이 없을 만한 스토리텔링, 천재적인 리듬감, 두 눈의 연기만으로 일렁이는 마음들에 함께 올라탈 수 있게 해주는 매력적인 배우들까지. <세기말의 사랑>은 정말이지 감탄밖에 안 나오는 영화다. 그리고 임선애 감독은 단순 '유망주'로만 불리기에는 아무래도 너무 아깝다. 연차만 낮을 뿐 (한국에서 여성 감독의 권위가 아직 없다는 것은? '그런' 감독의 '이런' 영화에만 유독 젠체하고 가르치려 드는 이들의 저평가를 몇 년이고 버텨야 한다는 의미) 이미 한국 영화계 거장의 반열에 성큼 올라설 수 있는 포텐셜을 다 갖추었기 때문. 윤가은, 이옥섭, 김초희에 이어 이지은과 임선애를 차세대 한국 영화의 희망으로 믿을 수 있게 되어 기쁘다.
정말로 간만에 너무 좋은 사랑 영화였다(지금의 여성 관객에게 국내 제작+로맨스 영화가 좋게 다가오기란 거의 바늘구멍 뚫는 일에 가까운데도). 그리고 이때 사랑은 영미와 도영 사이 이상하고 풋풋한 긴장, 유진과 영미의 아웃사이더 연대를 거쳐와서, 기어이 도영과 유진의 눈물로 완성되는 삼각관계 속 연인 간의 애달픈 감정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유전병 발현으로 목 아래 몸이 모두 굳어 혼자 힘만으론 꼼짝할 수도 없는 조유진에겐 친한 푼수떼기 동생 오준과 가출한 조카 미리와의 투닥대는 사랑이 있다. 못나고 외롭고 놀림받기 일쑤인 데다 튀어나온 앞니를 목도리 사이에 푹 파묻고 다녀 '미쓰 홍당무' 양미숙을 연상시키는 회계과장 '세기말 Miss Apocalypse' 김영미에겐... 원래는 아무도 없었다가, 유진과 오준 그리고 도영이 생긴다. 또 영미의 실패한 (줄 알았던) 사랑은 도영만을 향하지 않으며, 부모 잃은 그애가 평생 돌보았던 큰엄마와 그 큰엄마의 짝사랑이던 사촌오빠가 보답해주지 않은 가족 간의 정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토록 다양한 사랑이 영화 내내 말 그대로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며, 그 사랑들은 자주 내 눈과 뇌가 성급히 직조했던 적당한 상식선의 예상을 배반하기도 한다. 미리의 친아빠와 친엄마가 누구인지 너무나 갑작스럽게 툭 던져지던 씬처럼. 유진의 명품 구두가 왜 모두 '짭'이었는지, 누가 유진의 장애 '덕'을 봤는지, '지랄 1급'이라던 유진에게 들러붙어 있었던 처연한 체념의 그림자가 어디서 나온 것인지까지, 역시 예고도 없이 우르르 한 방에 깨닫게 해주던 오준의 미용대회 시퀀스의 폭풍우 같은 흐름처럼.
어쩌면 이런 예측 불가성을 즐기지 않는 이에게, 혹은 특정한 '부류'의 돌출성을 불편해하는 이에게 영화의 화려한 곁다리들은 일면 산만하거나 심지어 불필요해 보이기까지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곁다리' 즉 삼각관계와 무관하면서도 구구절절 늘어지는 각 인물들의 사연은 모두 하나의 다정한 진리로 수렴한다.
타인에게 친절하라. 당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은 저마다 당신이 모르는 싸움을 치러내고 있다.
그러니 우리가 이 사랑(들)의 경중을 가리면서 너무 많은 인물의 너무 많은 이야기가 혼란스러우니 어떤 것은 받고 어떤 것은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원래 인간이 살아간다는 게 그렇게 복잡한 일이므로. 같은 남자를 사랑한 영미와 유진이 처음엔 너무 다른 사람처럼 보이겠지만, 도영에게 부인이 있다는 형사의 말에 절망으로 물들던 영미의 표정과, 들들 볶이던 자원봉사자 학생의 “우리 엄마 죽었다 미친년아”에 남몰래 무너지던 유진의 표정을 몇 번이고 돌려보다 보면 그 둘이 얼마나 닮은 사람인지를 알게 되는 것처럼. 미리의 이기적인 가출과 카드 도용을 힐난하더니 실은 저도 유진의 장애 등급을 이용해 몰래 차를 샀다던 오준의 욕심과, "지금 누나한텐 나밖에 없으니까" 곁을 지켜야 한다는 오준의 강인한 책임감이 한 사람 안에 공존할 수 있다는 걸 이해하는 것처럼. 각자의 바닥은 다 너무 깜깜하고 처량해서 가끔 거기 떨어진 채로 만난 사람에겐 뭐든 다 말하고 날 내맡기고 싶어질 때가 있으니까 말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경계하되 타인을 밀어내지 않을 수 있고, 이해하되 섣불리 다 안다고 말하지 않는 신중함을 발휘할 수 있다.
돌봄노동에 최적화된 영미의 성실한 다정과 경청 그리고 손길이 필요했던 거면서 오로지 돈 때문에 같이 있는 거라고 처음부터 스스로를 속이던 유진이의 위악을 나는 알고,
“끝까지 버텨보는 거 나쁘지 않던데요. 그래서 저는 감옥엘 갔지만. 후회는 안 해요.”라며 이상하리만치 끝까지 가보고 싶은 충동을 참지 않는 영미의 달콤한 자포자기도 나는 알지.
그래서 내겐 유진의 영미를 향한 “화상이 맨드라미 닮았네”가 이 시대 최고의 인류애를 함축한 대사 같았다. “그 화상 만져본 적 있어? 내가 한 번 만져봐도 돼?”라는 유진의 묘한 요청. 물렁한 영미의 수락에 유진이 상처를 보듬으며 "생각보다 부드럽네"라고 말하자 영미는 설핏 웃으며 “하여튼 이상해”로 화답한다. 그 욕조 옆에서, 또 미용대회 대기실에서 넘어진 유진의 휠체어 옆에서, 영미는 몸을 낮추어 유진과 시야의 높이를 맞춘다. 제 몸 하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여자가 멸시받던 여자를 똑바로 바라볼 때, 그늘진 유진의 앞에 놓인 건 환히 쏟아지는 빛처럼 다가오는 영미의 옅은 눈동자와 상냥한 미소다.
회사 돈을 빼돌리는 남자가 제게 조금 다정했단 이유만으로 지구가 망하기 전날 밤에 같이 있고 싶을 정도로 좋아하게 된 이상하고 대책 없는 외로운 여자. 그런 여자를 두고 맨드라미의 꽃말이 '치정'인 걸 아느냐고 놀려대던 역시 이상하고 화가 많아진 외로운 여자. 소시지 반찬, 모기 물린 자국 위의 십자가, 그게 뭐라고. 그게 다 뭐라고, 사랑하는 이를 구하지도 못하는 내가 나인 게 너무 싫었을 여자들이 서로를 죽어라 질투하면서도 그 '구하고 싶은 마음'을 이해해줄 유일한 상대를 마음 속으론 악착같이 갈구한다.
사람이 사람을 구한다는 게 얼마나 불가사의하고 어려운 일인지, 결국 영미의 '저 사람 나 아니면 어떡하나'가 유진의 짐을 덜고 유진은 도영에게 "그 여자 보니까 처음으로 네가 마음 놓이더라"라고 말한다. "저는 아직 유진 씨가 마음 놓이지 않.."는다고 말하려던 도영의 말은 온라인 접견 시간 종료로 뚝 끊기고 말지만, 그 이후로 유진은 완전히 퇴장하고 도영과 영미가 꾸준히 재회해 채무 관계를 핑계로 '다시' 친해지는 에필로그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도영과 영미처럼 유진은 잘 살아갈 것이다 꿋꿋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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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상에 다가온 위험을 경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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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스 (On the Line, 2021)
개봉일 : 2021.09.15
감독 : 김선, 김곡
출연 : 변요한, 김무열, 김희원, 박명훈, 이주영, 조재윤, 이규성
일상에 다가온 위험을 경고하다.
보이스피싱. 목소리를 통해 사람을 낚아 올리는, 목소리로 피해자들을 우롱하는 사기 행각. 내가 어릴 땐 어색한 한국말 또는 낯선 사투리. 누가 봐도 수상한 번호로 택배 박스를 뒤져 찾아낸 우리 집 강아지 이름 같은 것을 이야기하며 납치범 행세를 하는 것. 어르신들이 주로 당하는 것. 같은 게 보이스피싱이었고 실제로 그때 받았던 피싱 전화들은 대부분이 어색하고 우스운 수준이었다. 한때는 이 어설픈 사기 행각을 소재로 삼은 개그 프로를 보며 함께 깔깔거리며 웃기도 했는데, 요즘은 보이스피싱도 무서울 만큼 진화했다는 이야기가 뉴스에 자주 오르내린다.
피해 금액도 눈덩이 커지듯 불어나고, 피싱 조직의 몸집은 제어할 수없이 커져가고 있으며 그 수법 또한 교묘하고 그럴싸하다고 한다. <보이스>는 간절하게 취업을 바란 면접자들, 가족을 아끼고 걱정하는 사람들 등.. 선량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피와 생명 같은 돈을 털어내고 환호성을 지르고 있는 보이스피싱 조직의 뿌리를 파고 들어가 그들의 악랄함과 광기를 선명하게 잡아낸다.
피해자들의 눈물과 고통 같은 건 범죄자들의 고려 대상이 아니다. 얼마의 돈을 입금 받고, 오늘 수익 전광판에 얼마의 금액이 찍히는지. 내가 벌어갈 돈은 얼마인지. 이들 눈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숫자만 보일뿐. 사람이 돈 앞에서 얼마나 악랄하고 이기적으로 변할 수 있는지, 아주 잘 봤다.
<씨네 21 1323호>에서 김성훈 기자님이 이들의 모습을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의 월가 사람들과 비슷하다고 표현한 글을 봤는데, 영화를 보고 나니 이 표현을 바로 이해됐다. 월가에 비해 주변이 더 지저분하고 수시로 불법적 돈 세탁을 해댄다는 것만 다를 뿐. 돈 앞에서 뿜어내는 광기와 짐승과 다를 것 없는 모습이 정말 닮았다. 특히 어쨌든 약육강식의 세계고 어차피 누군가의 피를 빤다면 즐겁게 빨아야 한다고 외치는 피싱 조직의 간부 곽프로를 보며 “미친놈이네..”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그만큼 김무열 배우님의 연기가 정말 훌륭했다.)
영화를 보기 전, 건설 현장에서 직원들을 상대로 단체 커다란 보이스피싱 사건이 일어났다는 시놉시스를 읽었을 땐 “어떻게 건설 현장에서 단체 사기 사건이 일어날 수 있지?”궁금했다. 보이스피싱을 겪어본 적도, 주변에서 당했다는 사람도 만나본 적이 없어 보이스피싱의 세계가 이렇게 커다랗고 조직적으로 진화했다는 사실을 전혀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이스>는 마치 개미굴처럼 깊고 은밀한 보이스피싱의 세계를 만천하에 공개하며 아직 실감해 본 적 없는 이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준다.
보이스피싱 조직은 세밀하게 팀을 나눠 운영한다. 더 빠르게 움직이고 언제 어디서 걸려도 금방 꼬리를 잘라낼 수 있도록 말이다. 콜센터, 대본, 돈세탁 담당, 입금과 동시에 여러 갈래로 쪼개져 돈을 쓸어 담는 조직원들. 착착 맞아떨어져가는 이들의 빌어먹을 호흡에 피해자들의 피 같은 돈은 손쓸 틈 없이 빠져나간다.
주인공 서준의 아내 미연도 맥없이 이들의 수법에 당하고 마는데, 그는 지지부진한 수사 진행과 지저분한 범죄자들의 욕망 앞에서 죽어가는 동료들과 아내를 위해 중국에 있는 보이스피싱 조직의 중심부에 잠입한다. 그리고 상상했던 것 이상의 커다란 악과 이기심을 마주하게 된다. 무기도, 지원해 줄 인원도 없이 홀로 조직의 본거지에 뛰어들어 고군분투하는 서준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초능력이나 화려한 무기가 없을 뿐이지 이야말로 진정한 히어로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초반부에 휘몰아친 사건들로 높아진 긴장감이 한두 번쯤 느슨해지는 순간이 있는 것과 약간은 애매하게 느껴졌던 액션신이 있었던 것을 제외하면 꽤 괜찮았다. 망설임 없이 터트리고 뛰어드는 서준의 행동과 숨김없이 욕망을 드러내는 악역 곽프로. 체계적으로 쌓아올린 범죄 조직의 리얼리티. 그리고 시원하게 뻗어있는 결말로 향하는 길까지. 이번 연휴, 큰 고민 걱정 없이 범죄, 액션 장르의 통쾌함과 즐거움을 느끼고 싶다면 <보이스>를 추천한다.
보이스 시놉시스
부산 건설 현장 직원들을 상대로 걸려온 전화 한 통. 보이스피싱 전화로 인해 딸의 병원비부터 아파트 중도금까지, 당일 현장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 같은 돈을 잃게 된다. 현장 작업 반장인 전직 형사 서준(변요한)은 가족과 동료들의 돈 30억을 되찾기 위해 보이스피싱 조직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마침내 중국에 위치한 본거지 콜센터 잠입에 성공한 서준, 개인정보확보, 기획실 대본 입고, 인출책 섭외, 환전소 작업, 대규모 콜센터까지! 체계적으로 조직화된 보이스피싱의 스케일에 놀라고, 그곳에서 피해자들의 희망과 공포를 파고드는 목소리의 주인공이자 기획실 총책 곽프로(김무열)를 드디어 마주한다. 그리고 그가 300억 규모의 새로운 총력전을 기획하는 것을 알게 되는데.. 상상이상으로 치밀하게 조직화된 보이스피싱의 실체! 끝까지 쫓아 반드시 되찾는다!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누군가를 걱정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이용해 피해자들의 돈과 희망을 빼앗아가는 범죄 ‘보이스피싱’. 미연은 건설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남편 서준이 행여나 잘못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에 휩쓸려 보이스피싱의 피해자가 되고 만다. 몰아치는 범죄자들의 연락과 그럴싸하게 연출되는 상황에 피해자들은 의심 없이 돈을 입금한다.
“선배님 가족이 당해도 가만히 있을 겁니까?”
길거리에 흘려진 셀 수 없이 많은 개인 정보를 노리는 보이스피싱 범죄조직들. 피해자들의 속은 타들어가고 경찰들은 중심부를 잡아야 한다며 언제 올지 모르는 시기를 노리고만 있다. 피해자이자 이 사건을 해결하는 히로인인 서준은 진행되지 않는 수사에 지쳐 직접 그들의 본거지로 쳐들어가기로 결심한다.
서준은 아수라장이 된 박실장의 사무실에서 사람들의 USB를 챙겨 나오고, 보이스피싱 피해자를 위해 슬쩍 전화선을 뽑는다. 그는 누구보다 정의심이 뛰어난 인물이다. 나와 내 아내의 복수를 넘어 불특정 다수들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모습이 히어로가 따로 없다.
서준은 건설 현장에서 일하기 전, 커다란 마약 범죄 조직들을 소탕한 이력이 있는 팀의 에이스였다. 그는 마약 국내 유통책을 잡으려다 금뱃지 아들을 건드렸다는 이유로 형사직을 박탈당한다. 아마 영화에서 보여준 서준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서준은 유통책이 명망 있는 집안의 아들임을 알고도 잡지 않았을까 싶다. 서준은 옷을 뺏긴 이유마저 넘치게 정의롭다.
“보이스피싱은 공감이란 말이야.”
콜센터에 잠입하는데 성공한 서준은 드디어 김현수 변호사라며 아내를 속였던 곽프로를 만나게 된다. 3층 기획실에서 작전을 지시하고 있는 그는 절망에 빠진 피해자들을 조롱하고 그들의 눈물을 보며 웃는다. 피해자들이 보이스피싱에 당했음을 알고 주저앉아 우는 모습과 곽프로가 웃고 있는 모습이 함께 재생되는 장면을 보며 마치 내가, 내 가족이 당하기라도 한 듯 울화통이 치밀었다.
곽프로는 서준에겐 복수를 꿈꾸지 말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상관들의 뒤통수를 치려 준비하고 있는 가장 교활한 인물이다. 곽프로는 가장 깨끗하고 순수한 색이라 여겨지는 흰색의 옷을 위아래로 갖춰 입는다. 순수한 색의 옷과 그 위에 튄 핏자국이 더럽고 악랄한 인물의 본체를 더욱 두드러져 보이게 만든다.
보이스피싱을 벌이는 콜센터 안은 마치 악마들이 모여있는 지옥 같다. 곽프로는 돈 없이 살아갈 바깥세상은 지옥, 헬 조선이라 말하지만 그보다 더 지독한 지옥이 바로 이곳에 있다. 돈 앞에서 이성을 잃고 날뛰는 사람들, 양심과 인류애 따위는 저 멀리로 던져버린 채 욕망으로 번뜩이는 그들의 눈빛, 그리고 같은 피해자임에도 자신의 이득을 위해“71번 여깄다!”고 소리치던 46번의 모습. 특히 46번의 이 모습은 46번을 애틋하게 바라보던 서준의 눈빛이 우스워질 만큼 비열했다.
보이스피싱 조직원들은 새로운 콜센터 직원들이 오면 가장 먼저 각자가 갖고 있던 물건과 이름을 빼앗고 새로운 번호가 적힌 유니폼을 입힌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에 걸려있던 인생과 양심 같은 것을 모두 내려놓고 죄책감 없이 사기행각을 벌인다. 이들은 나에겐 돈이 절실하다는 상황을 방패 삼아 피해자들의 생을 사정없이 찔러댄다.
콜센터가 발각되고 조직원들이 검거된 상황에서 46번은 끝까지 콜센터에 남은 정보들을 끌어모아 새로운 한 판을 제안한다. 여전히 보이스피싱 조직의 꼬리 자르기만 반복하고 뿌리뽑지못 하고 있는 현 상황이 훅 와닿는 결말이었다.
사실 <보이스>는 크게 기대하고 있던 작품은 아니었다. 동시에 개봉하는 <기적>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기도 했고, 최초의 보이스피싱 영화라는 신선한 소재에 눈길이 가긴 했지만 개봉 전 공개된 평점이 예상외로 낮아서 기대감을 낮추고 관람했다. 기대감이 낮아서 그랬는진 몰라도 결로적으론 꽤 괜찮았다. 다만 배우들의 연기력을 제외하면 캐릭터 자체가 크게 입체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던 점과 후반부의 다소 긴장감을 느슨하게 풀어버리는 느낌의 격투신은 조금 아쉬웠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알지 못했던 보이스피싱의 세계를 생생하게 전달하며, 일상에 드리워진 위험에 대한 경각심을 선사하는데 성공했다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가치가 있지 않을까. ‘보이스피싱 백신 영화’라는 말이 정말 찰떡처럼 어울리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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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리하네✨ 이 가족 대체 정체가 뭐야? [가족계획] 1차 예고편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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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브리저튼 시즌 2> 공식 예고편
의무를 따르는 것과 가슴을 따르는 것. 둘 중에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사교계에 또 한 번의 스캔들이 불어온다. 《브리저튼》 시즌 2, 3월 최초 공개. 오직 넷플릭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