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머니 '옥희'(김성령)의 죽음과 함께 중국에서의 터전마저 잃어버린 탈북자 '로기완'(송중기). 그는 마지막 재산과 희망을 쥐어짜서 벨기에 브뤼셀로 향한다. 난민으로 인정받은 후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하지만 그의 세상은 여전히 혹독하다. 벨기에 정부의 난민 심사는 거북이처럼 느리게 진행되고, 잠잘 곳도 직업도 없는 기완은 브뤼셀의 길거리에서 간신히 살아남는다.
어느 날, 기완은 무인 세탁실에서 눈을 붙이던 중 어머니와의 추억을 간직한 지갑을 도난당한다. 그는 경찰서에서 범인 '이마리'(최성은)를 만나고, 마리는 황당한 부탁을 한다. 자기가 전과가 있으니 잃어버린 금액을 줄여서 진술해 달라는 것. 기완은 지갑이 있는 곳에 바로 데려가 주겠다는 약속을 받은 뒤 그녀의 부탁을 들어준다. 그렇게 그는 미처 예상 못한, 마리와 함께 하는 삶에 첫 발을 내딛는다.
<로기완>에게 건 기대
근래 넷플릭스에서 한국 영화를 보면 실망스러운 작품이 많다. 그러다 보니 넷플릭스에서 공개되는 작품에 대한 선입견도 생겨난다. 이번에도 기대보다 못할 것이고, 단순한 킬링타임 영화일 거라고 지레짐작하는 것. 배우나 제작진 이름값에 미치지 못하는 완성도로 인한 나비효과다.
<로기완>은 조심스럽게 다른 기대를 걸어볼 만한 작품이었다. 소재를 다루는 관점이 독특했기 때문. 물론 탈북자들의 어려움 자체는 새롭지 않다. 차인표 주연의 <크로싱>(2008)이 대표적이다. <로기완>은 달랐다. 한국에 입국하려는 탈북자가 아니라 유럽에서 난민 지위를 인정받으려는 탈북자를 다룬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기대는 일부 충족된다. <로기완>은 통상적으로 고려하지 못했거나 조명받지 못한 현실을 드러낸다. 인간답게 살려고 북한을 탈출했지만, 또다시 '거주할 권리'와 '떠날 권리'를 위해 싸워야 하는 아이러니가 마음을 사로잡는다. 탈북자의 절박함과 억울함을 연기한 송중기의 연기력도 시청자의 시선을 붙들기에 충분하다.
대신 한계도 명확하다. <로기완>은 한 탈북자의 사연을 보다 보편적인 이야기로 확장하기 위해 장르를 전환한다. 그러나 탈북자의 난민 신청기가 멜로로 전환되는 분기점을 보여줄 방식을 잘못 선택했다. 그 결과 <로기완>은 시청자를 설득할 힘까지는 보여주지 못했고, 끝내 기대를 저버린다.
생존의 의미를 묻다
<로기완>은 한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생존'이다. 구체적으로는 '생존의 의미'를 묻는다. 시작부터 카메라는 로기완의 생존기를 화면에 담는다. 벨기에 정부가 난민 신청을 받아주기 전까지는 알아서 살아남아야 하는 기완. 그는 공중화장실을 숙소로 삼고, 쓰레기통을 뒤져서 밥을 먹고, 공병을 모아 번 푼돈으로 생계를 이어간다. 이 시퀀스는 담담하기에 강렬하다. 일련의 사건이 픽션보다 팩트에 가까울 것이기에 울림이 더 크다.
중반부터는 그의 생존기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 묻는다. 자기 때문에 어머니가 죽었다고 자책하는 기완. 그는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어머니의 유언을 가슴 깊숙이 간직하고 있다. 그런데 마리의 아버지 '이윤성'(조한철)은 정반대의 조언을 한다. 사람답게 사는 것은 지금 처지에서 사치가 아니냐고. 일단 살아남는 것에 집중해야 하지 않겠냐고.
그래서 기완의 이야기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난민 심사 과정이나 고기 공장에 불법으로 취업하는 장면은 문자 그대로 생존을 위한 사투를 보여준다. 반면에 쓰레기를 찾아 먹던 기완이 멀끔하게 고기를 구워 먹고, 마리와의 사랑을 싹 틔우고, 변호사의 도움을 받는 대목은 그가 어머니의 유언을 따르려는 노력을 상징한다. 즉, <로기완>은 그가 어떤 생존을 선택하는지를 뒤쫓는 영화인 셈이다.
멜로가 등장하는 이유
이에 더해 영화는 기완의 선택에 담긴 의미를 확장하려 한다. 그 일환으로 인간다운 삶을 기완의 마지막 말마따나 "떠날 권리"로 재정의한다. 이는 이중적인 말이다. 일단 물리적인 의미가 있다. 당장 탈북은 그 자체로 '떠날 권리'를 되찾기 위한 사투다. 또 이 싸움은 탈북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난민 심사에서 탈락하면 중국으로 강제 송환되고, 심사가 끝날 때까지는 벨기에를 떠날 수 없으니까.
동시에 심리적인 의미도 엿볼 수 있다. 기완은 어머니가 남긴 지갑과 돈을 자기 목숨만큼이나 소중히 여긴다. 도난당한 지갑을 되찾기 위해서라면 벨기에 마피아들에게 대책 없이 달려들 정도다. 그의 몸에 남은 흉터는 그의 치기 어린 행동으로 인해 어머니를 잃은 고통과 죄책감을 항상 상기한다. 이렇게 보면 그의 "떠날 권리"는 마음의 상처를 딛고, 자기 과거로부터 자유롭게 떠날 수 있는 삶을 말한다.
<로기완>은 그 연장선상에서 마리를 등장시킨다. 사격 선수였던 마리는 전지훈련을 간 사이에 투병 중이던 어머니가 안락사로 사망하자, 그 책임을 안락사에 동의한 윤성에게 돌리며 그를 비난한다. 가족을 한 순간 잃은 트라우마로 인해 그녀는 선수 생활을 그만둔 후 마피아의 도박장에서 이용당한다. 그녀 몸에 있는 문신은 기완의 흉터럼 어머니를 뜻하고, 문신이 있는 한 그녀 역시 트라우마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이 공통점 덕분에 <로기완>의 장르는 멜로로 바뀔 수 있다. 심리적으로 '떠날 권리'가 없는 남녀. 그 둘은 악연 또는 운명으로 만나 서로의 버팀목이 된다. 기완에게 마리는 취직하고 변호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기회였다. 마리 역시 기완 덕분에 약물을 끊고 마피아로부터 벗어난다. 그들의 사랑을 탈북자, 난민뿐만 아니라 자기 과거를 떠나고 싶은 모든 이들의 발악 혹은 절박함의 표출로 읽을 수 있는 이유다.
공통점을 찾기에는 너무 먼 남녀
그런데 <로기완>의 장르 전환은 매끄럽지 않다. 기완과 마리의 이야기를 하나로 이어주는 과정이 부족하기 때문. 물론 따로 놓고 보면 둘의 이야기는 분명 인상적이다. 탈북자로서 고통받는 기완의 삶도, 마피아에게 협박당하고 마약을 끊지 못하는 마리의 삶도 비참한 것은 사실이니까.
그러나 <로기완>은 둘의 아픔이 같은 층위에 있지 않다는 점을 간과했다. 기완의 아픔은 직관적이고, 현실적이다. 일단 한국 시청자는 탈북자라는 신분 때문에 그의 고난에 쉽게 이입할 수 있다. 또 미처 몰랐던 현실은 그의 난민 신청 심사 과정을 더 험난하게 만든다. 일례로 일부 조선족이 탈북자로 위장해 유럽 국가에서 난민 지위를 얻으려 했던 실제 시도 때문에 벨기에 정부는 준비할 수 없을 정도로 과한 서류와 증거를 요구한다.
반면에 마리의 사연은 기완에 비해 추상적이고, 거리감이 느껴진다. 마피아와 얽힌 전직 사격 선수라는 설정과 안락사 문제로 아버지와 빚는 갈등. 이 이야기는 피부에 그리 와닿지 않는다. 탈북자가 겪는 고난에 비하면 현실 감각과 무게감이 필연적으로 부족한 이야기이기 때문. 그러다 보니 기완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따라갈 경우, 마리의 이야기는 더욱 동떨어진 세계처럼 느껴진다.
둘 사이의 간극을 줄이려는 시도도 눈에 띄지 않는다. 기완의 사투를 긴 호흡으로 따라가는 동안, 그녀의 사연은 짧은 플래시백으로만 암시된다. 복선은 후반부에 가서야 회수되고, 그녀가 마피아와 손잡게 된 전사에 관한 구체적인 설명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처럼 두 주인공 중 한쪽이 비중도, 분량도 없으니 <로기완>의 멜로는 전체 분위기에 끝내 녹아들지 못한다.
긴장감도 부족하다
멜로 자체도 특색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부모의 반대로 난관에 빠지는 전개는 식상하다. 위기를 고조하는 과정은 다소 급작스럽고 작위적이다. 결국 기완과 마리가 사랑을 키우고 재확인하는 순간순간의 긴장감도, 설득력도 약할 수밖에 없다.
마지막 난민 심사가 진행되는 대목이 대표적이다. 마리로 인해 브뤼셀과 베를린 마피아 간의 알력 싸움이 커지고, 그로 인해 마리와 기완은 목숨까지 위험해진다. 그런데 마리의 서사가 애초에 빈약하다 보니, 브뤼셀 마피아의 대장인 '씨릴'(와엘 세르숩)의 동기나 목적에 대한 설명 역시 충분치 않다. 그러다 보니 최후반부에는 기완도, 마리도, 씨릴도 무리수를 남발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로기완>은 분명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탈북이라는 행위에 새로운 의미를 덧대 이야기를 확장하려는 시도 자체는 남달랐다. 단지 메시지에 힘을 주려는 의도가 과했고, 그 대가로 지향점이 불분명해졌을 따름이다. 특히 영화의 시작과 끝을 비교하면 괴리감이 크다. 지극히 영화적인 결말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중간 과정을 납득시키지 못했으니 그 또한 변명처럼 들릴 뿐이다.
만약 로기완의 난민 심사 과정에 온전히 집중했더라면 어땠을까? 로맨스를 양념으로 활용하고, 마리도 조연 중 하나였다면? 유럽 내에서 살아가는 탈북자 사회, 조선족과의 갈등 관계를 더 부각했더라면? 그러면 소재의 신선함을 온전히 살려낸, 더 특색 있는 영화가 아니었을까? 수많은 멀티버스를 상상할 수 있기에 <로기완>의 결과물은 더욱 아쉽다.
Poor 형편없음
시작과 의도는 좋았던 탈북자의 멜로드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