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오브 어스 스트레인저스(All of Us Strangers)>(2023, 앤드류 헤이)
<애프터썬(Aftersun)>(2022, 샬롯 웰스)
약간의 <로스트 도터(Lost Daughter)>(2021, 매기 질렌할)
* 위 작품들의 장면과 결말 포함
“Such a sad face.이토록 슬픈 얼굴이라니.” <올 오브 어스 스트레인저스>, 폴 메스칼의 캐릭터, 해리의 외모에 대한 감상이 담긴 클레어 포이의 대사다. 단순하면서도, 그 낯에 참으로 들어맞는 표현이라고 느꼈다. 슬픈 얼굴을 지닌 배우는 드물지 않고 말하자면 앤드류 스캇도 슬픈 마스크에 속하나, 폴 메스칼의 슬픔은 인물의 피부를 녹이고 분해하는 종류의 것이어서 마음을 유독 어지럽힌다. 앤드류 스캇의 슬픔이 고집스럽게 내향적으로 모여 있다면 폴 메스칼의 슬픔은 무방비하게 넘실대며 (영화가 해리 주위에 가끔 드리우는 빛처럼) 새어나온다. ‘가슴에 매듭이 묶여 있는’ 애덤과 밀려나고 희미해짐을 느끼는 해리 역에 두 배우를 각각 캐스팅한 것은 당연하게도 탁월했다.
스크린에서 목격한 그는 흔히 웃거나 장난을 걸었고 심지어는 유쾌한 달음박질도 했는데, 어째서인지 대개 슬퍼 보였다. ‘디폴트로 우울을 탑재한 마스크의 소유자’-라는 폴 메스칼의 첫인상을 남긴 인물은 놀랍게도 <노멀 피플>의 코넬이 아니었다. <로스트 도터>, 기계적이지 않은 친절을 입고 레다에게 말을 거는 윌의 존재감은 다코타 존슨이나 올리버 잭슨-코헨 만큼 화려하지는 않았으나, 달리 특별했다. 윌의 그늘에 이렇다할 미스터리가 내포된 것은 아니었다. 니나와의 어페어, 딱 그 만치의 낙담과 여지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럼에도 폴 메스칼은, ‘저리도 해맑은데 이상하게 우울한 낯의 소년’으로, 약간의 의문과 함께 기억에 남았다. <애프터썬>을 관람하고 어느 정도 답을 얻었으나, 의문은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다시 적으면, 내가 본 폴 메스칼은 끊임없이 궁금해지는데다 ‘좋은’ 의아함을 불러일으키는 배우였다.
<올 오브 어스 스트레인저스>(2023)
해리, 슬픔의 공포
<올 오브 어스 스트레인저스>, 노크를 들은 애덤이 문을 열자 한 남자가 서 있다. 해리는 그날 울린 거짓 화재 경보처럼 느닷없이, 느슨한 긴장감을 걸치고 등장한다. 카메라가 악수를 끝내지 못하는 손에 잠깐 머무르지 않았더라도, 그가 약물 외 무언가 비물질적인 것에 취해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을 테다. 현관에 기대 웃는 그는 불규칙적으로 미세하게 떨고 있다. “내가 당신을 무섭게 하냐”고 묻지만 무서워하고 있는 것은 그 자신이다. 그의 등을 끌어당기는 검푸른 그림자, 해리는 그로부터 도망치려 한다. “우리 집 문앞에 뱀파이어가 있거든요”라는 대사는 80년대 퀴어 팝 아이콘 Frankie Goes to Hollywood의 히트송 ‘The Power of Love’를 인용한 플러팅이자 해리의 공포를 대변하는 문장이다. 그러니까, 플러팅을 가장한 무의식적 구조 요청이라는 뜻이다. 그의 미소는 흐느적거리고 자세는 비스듬하다. 적막에서 달아나듯 말은 조급하고 발성은 불균질하게 진동한다. 해리는 흐물흐물하다. 부드럽다 혹은 느끼하다는 의미가 아닌 영혼을 구성하는 조직이 (있다면) 늘어지고 풀어지고 있다는 의미, 그는 해체되는 중이다. 사면이 거울로 이루어진 엘리베이터 구석에 겨우 기대 있는 단독 숏이 해리의 상태를 상징한다고 적어볼 수도 있겠다. 양쪽의 거울이 맞반사한 그의 상은 깊어질수록 흐려진다.
육신을 버렸거나 육신으로부터 버려진 해리의 영은 일단 안정돼 보인다. 적극적이지만 너무 능숙하지 않게, 장난스러우나 가볍지 않게 로맨틱하다. 그는 애덤을 돌보기도 하고, 상호 위로를 주고받기도 한다. 그러나 애덤의 매듭이 그러했듯 해리의 그림자는 늘 거기에 있다. 술기운과 함께 걷힌 듯도 했던 해리의 공포는 애덤이 그를 데려간 ‘부모의 집’ 앞에서 되살아난다. 해리는 도망쳤다가, 애덤이 그의 집에 방문해 시신을 확인한 직후 술병을 들고 재등장한다. 앞서 묘사한 장면에서 술이 기어오르는 두려움을 누르는 일시적 억제제였다면 여기서 알코올은 두려움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촉진제가 된다. 뚜렷한 원인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내외면의 경계에서 생성돼 가슴으로 수렴하는 공포. 해리는 유령처럼 흐느끼며 그것을 분출한다. 이제 홀로가 아닌 그는 한편으로, 안도하며 스스로를 애도하는 듯도 하다. ‘마음껏’: 애덤의 품으로 무너지는 해리를 보며 그 부사가 떠올랐다.
뒤늦게 설명하자면, <올 오브 어스 스트레인저스>에서 해리는 애덤의 집 문을 두드린 날 밤에 이미 죽었다. 그 다음부터 등장하는 해리는 아마 영혼이다. 애덤의 환상일 가능성도 있지만, 어쨌건 그는 ‘진짜’다. 해리의 물리적 존재 형태는 모호하나, 보다 중요한 것은 관계의 본질이 아닐까 생각한다. 서로를 인지하고 응시하며 샅샅이 살피고 위안하는 두 사람의 로맨스는 실재한다. 해리는 애덤에게 보아지는 자이면서 애덤을 보는 자다. 애덤이 “매듭”에 관해 털어놓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한순간 애덤의 손이 움켜쥐는 가슴에 주목한다. 다음 숏은 그것을 보는 해리의 얼굴이다. 거기엔 경청이나 공감을 넘어선 몰입, 어쩌면 이입이 있다. 몇십년의 세월에 걸쳐 쌓이고 꼬인 덩어리를 제 것으로 수용하는 것만 같다. 애덤이 끝에 ‘알아듣겠냐’고 묻자, 해리는 잠시 멍하게 있다가 깨어나며 차분히 수긍한다. 씁쓸하게 내리깔리는 눈꺼풀의 무게가 전해지는 듯하다. 진심의 농도를 재는 기계가 있어 그의 반응을 측정했다면, 눈금은 분명히 100을 가리키고 있었으리라.
이처럼 폴 메스칼의 연기는 자주 리액션에서 빛난다. <애프터썬>, “다운된” 기분에 관한 딸 소피의 설명을 듣는 캘럼을 살펴보자. 그는 공감하고 있으며 아마 꽤 오래 전부터 ‘가라앉고’ 있었을 것이다. 캘럼은 소피가 더 이상 가라앉지 않길 바라는 동시에 자신의 ‘다운’을 소피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아한다. 다행히 소피는 방에, 그는 욕실에 있어 표정을 들키지 않을 수 있다. 애덤의 이야기를 듣는 해리가 온전하고 투명하게 이입함으로써 위로한다면, 소피의 이야기를 듣는 캘럼은 거리를 두고 자신을 감춘 채로 상대의 기운을 돋우려 한다. 소피가 의식하는 그 거리는 <애프터썬>의 화면에 여러 모양으로 그려진다. 물론, 캘럼은 소피와 숨쉬듯 농담을 주고받고 서로 썬크림을 발라 줄 정도로 가깝지만, 한 침대에서 부대끼며 잠을 청하기에는 어색한 정도로 먼 사이이기도 하다. 허나 폴 메스칼의 캘럼을 관찰하다 보면 그 거리가 단순히 친밀감의 불충분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님을 이해하게 된다.

<올 오브 어스 스트레인저스>(2023)
캘럼, 슬픔의 무감각
소피의 물안경이 바닷속으로 가라앉은 날, 잠수복을 입으려 애쓰던 캘럼은 친절하게 말을 걸어오는 남자와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눈다. 캘럼의 숨이 가쁜 까닭은 신체의 가쁨 탓만이 아닌 것 같다. 느리게 깜박이는 눈꺼풀은 침대에 누워 죽어가듯 잠에 빠지는 해리의 그것만큼이나 무거워 보인다. 소박하고 선명한 미래를 그리는 상대의 말에 대한 대답으로 중요한 대사가 따라붙는다. “솔직히, 마흔 살이 된 내가 보이지 않아요. 서른 살에 다다랐을 때도 놀랐는걸요.” 표면적으로는 리액션이자 장면의 완결로 처리되나, 샬롯 웰스와 폴 메스칼은 이를 독백이라고 해도 좋을 별개의 액션, 캘럼의 상태에 대한 실마리로 남겨놓는다.
캘럼은 소피가 찍은 영상을 차마 다 보지 못하고, 소피가 준비한 서프라이즈 생일 축하 앞에서 복잡한 표정을 짓는다. 호신술을 가르치는 자세는 과하게 진지하다. 무의식중에 이별을 계획하는 듯한 그는 자신의 ‘다운’이 소피에게 보이거나 전염될까 조심하지만, 때로는 소피의 기분을 살필 겨를 없이 멍하게 가라앉아 있다. 캘럼의 그늘은 즐거움에도 있다. 소피의 학교 교사에 관한 짓궂은 농담에서 읽히는 것은 캘럼의 성격이나 성향, 그리고 그가 괜찮음을 위장하고 있을 가능성이다. 웃고 대화하는 와중 그의 일부는 이미 그 자리를 떠나 있다. 우울에 닿아 있는 만성적인 피로, 스스로의 안전과 타인의 심리에 관한 무관심. 해리의 슬픔이 공포를 수반한다면 캘럼의 슬픔은 넘쳐흘러 무감각을 낳는다.
폴라로이드 사진은 점점 밝아지더라도 아주 선명해지지는 않는다. 소피가 바라보는 당시의 캘럼도 마찬가지. 소피의 기억을 바탕으로 흐르는 <애프터썬>에서, 캘럼은 영원히 완성할 수 없는 퍼즐로 흩어져 있다. 소피의 시야가 포착하지 못한 장면들을 영화는 삽입하지만, 짐작이나 상상일 수도 있는 그 상태들은 캘럼의 입장에서 묘사되지 않는다. 따라서 폴 메스칼은 가만히, 슬픔의 이미지가 된다. 거기엔 때로 무언가에 홀린 듯한 무기력이나 (단지 스스로의 안전에 관한 것을 넘어선)무신경이 들어선다. 비스듬히 기대거나 바닥에 누운 채 늘어뜨린/ 난간에 올라 아슬아슬하게 뻗은- 팔다리, 버스에 치일 뻔 하며 길을 건너는/ 바다로 걸어 들어가는- 성큼성큼 주저없는 발걸음 따위에- 그것들은 묻어 있다. 이어, <애프터썬>이 자주 관찰하는 것은 캘럼의 뒷모습, 소피가 다 받쳐주기엔 너무 넓었던 등이다. 왜소함과는 거리가 먼 폴 메스칼의 등은 무거운 동시에 희미하다. 거기엔 ‘보이지 않는 미래’가, 정체를 밝힐 수 없는 아득하게 컴컴한 그림자가, 엉망으로 이지러진 모자이크 자화상이 드리워져 있다. 서프라이즈 생일 축하를 듣는 복잡한 낯에 흐느낌의 진동으로 물결치는 등을 오버랩시킨 편집 선택은 적절했다. 가슴을 막는 액체를 온몸으로 쏟아내고 있는데, 계속해서 차올라 어쩔 줄 모르는 것 같은 자의 등이었다.
소피가 그의 부모나 고향에 대해 물으면 캘럼은 무반응에 가까운 효과음으로 얼버무리거나 머뭇거리며 답한다. 그 태도에는 ‘가족의 가장자리로 밀려났다’고 이야기하는 해리와 겹치는 데가 있다. 배우의 연기폭 내지 역할폭이 좁다는 뜻이 아니다. 서로 다른 인물의 유사성을 발견하고 화면에 옮겨, 그 세계들을 엮고 확장시킨다는 뜻에 가깝다.(배우 자신도 인지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이어 적으면, 캘럼과 소피 사이에는 캘럼과 해리가 그 부모와 공유하지 못했던 유대가 있다. ‘너는 뭐든 할 수 있어’, ‘내겐 뭐든지 말해도 돼’ 등 일련의 ‘진지한 대사’를 영화와 폴 메스칼은 ‘아빠가 딸에게 하는 통상적인 조언’ 이상의 진정성을 실어 소중하게 다룬다. 캘럼은 검푸른 무언가에 빠져 허우적대는 와중 소피 곁을 지키려 애쓰기도 했다. 그런 순간들은 단지 애상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며, 자체로 아름답다.

<애프터썬>(2022)
비정형의 슬픔으로 찰랑이는 존재들
미디어에 비친 폴 메스칼의 ‘본체’는 진중한 마음가짐과 유쾌한 태도를 지닌, 심신이 건강한 사람으로 다가온다. 펜데믹 시기 방영된 TV 시리즈 <노멀 피플> 출연으로 단숨에 유명세를 떠안은 그는, ‘사실’ 아일랜드 사립학교와 드라마스쿨을 다니며 다수의 연극 무대로 전통적 기반을 다진 배우다. 비슷한 헤어스타일을 하고 고대 로마의 검투사와 현대 런던의 젊은이를 오가는 폴 메스칼의 외모는 그러고 보면 시대를 타지 않는 ‘정석의 배우상’이다. 그런 그가 주연이면서 대상의 자리에서 관람 되는, ‘글래디에이터’로 합격인 골격을 해체하듯 사용하는, 화면 복판을 의기양양하게 차지하는 대신 가장자리로 굴러가 빠져나가는, 그런 작품들이 그를 더 궁금하게 했다.
세 작품 속에서 목격한 폴 메스칼은 ‘아무래도 좋다’는 식의 미소를 씩 날리곤 하는 배우였다. 거기엔 막연한 낙관과 허무가 혼재했으며, 경우에 따라 절박한 구조 요청이 섞여들기도 했다. 과녁을 정해 강렬한 한 방을 내리꽂기보다는 딱히 폭을 재지 않고 쪼갠 제스처들을 생소한 형태로 재조립해 시공간을 홀렸다. 그의 인물들은 스스로를 철저히 숨기지는 않았으나, 솔직하게 내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화면 한가운데에 놓이더라도 좀체 밝혀지지 않았다. 무방비하고도 신비스러웠다. ‘혼란스럽다/혼란스럽게 한다’는 표현이 긍정적인 의미로 쓰일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폴 메스칼의 실루엣은 혼란스럽고, 보는 이를 혼란스럽게 한다,고 적어보겠다. 그리하여 인물에게 매혹당하고, 그가 퍼트리는 정서에 동화된다.
폴 메스칼의 신체는 때로 내면의 균열로 인해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붕괴되는 것은 흐느끼며 구겨지는 맨살의 등이거나(캘럼), 감기는 원인이 알코올인지 낙담인지 모를 눈이거나(윌, 해리), 악수를 끝내지 못하는 손이다(해리). 그들의 눈가나 뺨에 자주 번지는 붉은색의 성분은 다름아닌 슬픔이었으리라. ‘슬픔’이라는 말을 지나치게 많이 쓴 까닭은, 비애, 침통, 유감, (몇 번 사용한) 우울, 애도, 애상… 등의 단어로 대체하면, 이들의 정서가 그 정형 사이로 줄줄 새어나가는 그림이 자꾸 상상돼서다. 폴 메스칼의 슬픔은 액체처럼 차오르고 유동하고 침범한다. 배우의 짙은 정서가 역할을 뒤덮은 것이 아니다. 슬픔은 그 역할들이 요구하는 바, 늘 피부에 스며 있으며 잠시 사그라들었다가 별안간 터져 흘러나오기도 한다. 그것에 잠식되었다기보다는, 그것에 물든 바탕 위에 쌓인 캐릭터들이다. 폴 메스칼은 분명한 이유나 사건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며 모호한, 내피에 파고들어 퍼스널리티가 돼버린 종류의 슬픔을 이해한다.

<애프터썬>(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