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2024-12-13 14:04:55
단점으로 쏘아 올린 장점
넷플릭스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 리뷰
이 글은 넷플릭스 작품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의 리뷰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장르물을 다루는데 답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는 장면이나 설정들이 있다. 예를 들어 수사물에서는 발바닥에서 땀난다는 말 외엔 묘사할 방법이 없는 형사들의 고군분투가 그려진다던가. 주인공은 조사를 해야만 하는 세력과의 갈등을 겪으며 숨길 수밖에 없는 비밀을 가진 채 초조해한다던가. 흑막이라고 불리는 최후의 빌런이 나타났을 때 아니 네가!!라는 말이 나오는 반전이 숨겨져 있다던가. 하는 것들 말이다.
장르마다의 특성은 대다수의 사람이 기대하는 점이면서도 식상함을 느끼기 쉬운 포인트이기에, 기본적인 규칙은 지키면서도 작품만의 변주로 확실한 자리매김을 해야 하는 이중고를 가져다주기도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는 변주로 가득하다고 하기보다는 단점으로만 가득하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화면은 어둡고 사건 전개는 느리며 수사물에서 볼 법한 장면이 거의 없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이런 단점을 뒤집어 모조리 장점으로 만들어버린다.

12.3일 이후로 가르마 위치만 달랐지 우리나라에도 존재하고 있는 것 같은 히틀러의 인기는 스포트라이트가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어두컴컴한 곳의 가장 정중앙에 우두커니 선 채로 그는 마치 자신만이 계시를 받은 듯 밝은 빛 아래에 존재했고. 모두가 자신을 올려다보는 가운데 반짝반짝 홀로 빛나며 말빨 하나로 군중들을 홀라당 사로잡았다.(아 물론 누구는 그마저도 못해서 전 세계인의 욕만 홀라당 얻어먹었으니 그게 다른 점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
이렇듯 스포트라이트는 집중할 수 있는 힘을 주지만 수사물에서는 그다지 각광받는 시점은 아니다. 그리고 이 포커싱을 위해서, 극 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태수(한석규)의 집은 거의 대부분의 장면에서 어두워야만 한다는 위험요소가 있었다.
그러나 이 단점을 완벽하게 커버하기 위해. 위대한 배우 한석규가 등장한다. 개인적으로 한석규는 허탈함을 표현해 낼 줄 아는 세상 몇 안 되는 배우라고 생각하는데 이 작품에서도 그의 진가가 모든 장면에서 발휘된다.
태수의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담은 숨결 한 번에. 시청자들은 마음 바닥까지 훑는 듯한 저릿함을 느끼기도 하고, 애처롭게 딸을 쳐다보는 눈빛에서 쏟아지는 태수의 복잡한 심경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눈가가 파르르 떨리기도 한다.
극 중 분위기와 너무도 닮은 태수는 거의 대부분의 장면에서 침착하고 냉철하며 묵직한 태도를 취하지만. 마치 혼자만 벚꽃을 뿌린 듯 샤랄라 빛나는 군도 속의 강동원처럼. 태수는 자신을 에워싼 어둠에 조금도 잠식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좋은 배우를 보는 카타르시스 자체가 스포트라이트가 되어 확실하게 태수를 비춘다.

수사 장르물에서 한국인이 좋아하는 속도로 수사가 진행되려면 계엄에서 해제까지의 속도쯤은 되어야 할 텐데, 이 작품은 프로파일러라는 태수의 직업상, 수사의 진척이 마치 국민의 짐 때문에 탄핵이 자꾸 미뤄지는 것만큼 느릿느릿하고 지지부진하게 진행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드라마는 각본의 거의 대부분을 태수와 딸 하빈(채원빈)에게 집중시키는 두 번째 스포트라이트를 씀으로써 흩어지는 이야기를 없애고 극 중에 덩그러니 두 사람만을 남겨둔다.
여러 용의자와 더불어 결국에는 밝혀질 최종 빌런을 이리저리 꼬아 놓으려면 주변에 대한 설명이 많아질 수밖에 없고. 이로 인해 극을 따라가는 데 있어 에너지를 많이 써야 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과연 이 등장인물이 필요했는가?라는 물음이 생기기도 하고. 소위 말하는 떡밥이 완벽하게 설명되지 못해 물음표를 남기거나 실패한 수사물이라는 오명을 얻기도 한다.
그러나 외롭게 뻗은 두 가지 외에 모든 곁가지를 없앰으로써 극 전체는 긴장감을 잃지 않을 수 있게 되고. 딸과 아버지 사이에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안감으로 시청자를 단단히 동여맨 채 수사의 방향과 속도를 받아들이게 한다.

행여나 그 와중에도 이탈하는 사람이 있을까 봐 걱정이라도 되었던 듯. 작품은 세 번째 트릭을 쓰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버릴 것 하나 없이 아름다운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형사들의 냄새나는 양말도, 목에서 피맛이 느껴질 것 같은 추격전도. 흠씬 두들겨 맞아 정신이 혼미해지는 폭력 장면도 없다. 오로지 극의 분위기를 십분 닮은 태수의 집이 존재할 뿐이다. 그의 집은 과연 김건희의 도이치 모터스 주가 조작정도가 아니고서야 프로파일러의 월급으로 이 정도의 수준을 유지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아름답지만. 동시에 어딘가 비밀을 감춘 듯 모든 문이 닫혀 있으며 대척점을 이루는 부녀관계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듯 그들은 늘 식탁의 끝과 끝에 존재한다.
장면들이 가진 아름다움과 선으로 구분한 상징들은(마치 영화 [기생충]처럼) 배우들과 어우러져 최종적인 장면을 구성한다.
분명 비어있거나 심심하다고 느낄 수 있는 위험요소를 이 마지막 트릭이 완벽하게 없애준다. 덕분에 배우들은 빛나고, 극의 진행 또한 매끄러우며, 비밀을 숨긴듯한 아름다움을 보면서 만족할 수 있는 드라마가 완성될 수 있었다.
마치면서 (좀 길다)
1. 한석규 베우는 나이에 맞는 역할을 언제나 따박따박 잘하는 배우라고 생각하는데. 이 작품만큼 그의 나이와 시간과 때에 맞는 작품은 없다고 생각한다. 단 하나의 거짓 없이 진실과 진심만으로 뭉친 대배우를 보는 이 마음이 얼마나 감사하면서도 코끝이 찡한 건지 모르겠다.
2. 비질란테로 대변할 수 있는 "사이다"물이 아니지만. 가장 현실적인 마지막을 선사한 드라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한 이런 결말은 한석규 배우가 있었기에 더 진실되었다고 생각한다.
3. 개인적으로는 제목조차 탁월하다고 생각한다. 처음엔 딸만 아버지를 배신한 줄 알았으나.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모든 관계의 인물들이 서로에게 비수를 꽂다 못해 더 이상 고통을 호소할 수 없을 때까지 서로를 괴롭힌다. 그들의 관계에서 오는 배신감 때문에 모든 장면이 아름답지만 동시에 아프게 느껴지는 이유다.
최근 누군가는 알량한 신뢰를 업고 온 국민을 배신했다.
이 배신이 가진 파급은 너무 커서 열흘이나 지난 지금도 일상에 온전히 발을 붙이지 못하고 사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덕분에 불안장애 약을 안 빼먹고 자알 먹는다)
제목이 이 드라마의 정체성을 갖고 있다면.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왜 이렇게 어려울까.라는 극 중 대사는 가르마 타는 거 외엔 그 어떤 관심도 없어 보이는 당신에게 선사하는 메시지 같기만 하다.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당신 혼자 빠진 그 망상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스포트라이트를 이용했다는 히틀러처럼. 당신 또한 그의 말로를 따라갈 것이니. 그대의 최후가 오거든 단 한 번만이라도 눈을 똑바로 뜨고 있는 그대로 보기를 바란다.
당신은 우리에겐 친밀하지는 않았을지언정 배신자였으며. 주지 않은 신뢰마저도 이용하려 했다는 것을. 앞에 펼쳐진 이 모든 처참함은 당신이 자처한 것임을.
[이 글의 TMI]
1. 도시락 싸놨는데 안 들고 옴
2. 나 잡혀가면 좌표 좀 찍어줘요.
3. 냄비밥 해놓고 깜빡해서 밥 다 쉬었음.ㅠㅠ
#넷플릭스 #영화리뷰 #OTT리뷰 #이토록친밀한배자 #munalogi #한석규 #신작리뷰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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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대무패 9단계의 최고 단계가 어쩌면 '패배하기'는 아니었을까?
"성공은 실패의 어머니." 필자가 다소 꼬인 사람이라 그런지 몰라도 토마스 에디슨의 본 명언을 필자는 좋아하지 않는다. 아직 실패가 너무 무섭다. 작다면 작은 실패와 고난을 반복해가며 만들어진 두려움은 당분간 도전을 선뜻 선택하지 못하게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성공은 실패의 어머니'라는 말은 필자에게 있어 '흥. 웃기고 있네'라는 멸시의 대상이면서 역설적이게도 동경의 대상이기도 하다. 나보다 많은 것들을 먼저 경험한 분들의 말씀, '지금 너가 겪은 것들은 모두 예고편에 불과해'와 같은 직언은 닥쳐올 실패들을 앞서서 걱정하게 해, 이 모든 역경들을 이겨낸 그분들을, 역경들을 떨쳐내고 성공을 해 명언을 남긴 토마스 에디슨을 존경하게 한다. 본 작품을 모두 관람한 이 시점에 질문을 하나 해보자. 실패를 하고 있는 난 패배자이고, 토마스 에디슨은 승리자인가? 토마스 에디슨이 과연 전구를 발명하고 축음기를 발명하기 전까지도 늘 그는 승리자였는가? 명언을 깨닫고, 내뱉기 전까지는 그도 어쩌면 수 많은 패배자들 중 하나였지 않았을까? 승리자와 패배자를 구분 짓는 기준이 무엇인가.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은 승리자와 패배자로 이루어진 이분법의 재판장에서 패배자의 손을 들어 세상 모든 패배자들을 위로하고 따스히 안아준다. 재밌는 건 영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과연 그 구분이 실재하는 것인가 묻기도 한다는 점이다.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의 중반부, 주인공 가족인 후버 가족의 가장 별종, "드웨인"의 절규가 이어졌던 배경 속 뒤 표지판엔 흥미로운 구절이 보인다. '뭉치면 산다.' 군대나 전쟁과 어울릴 법한 구절이 가족 오락 드라마에 사용된 데엔 어쩌면 이는 의도적인 설정으로 영화의 전체적인 이야기를 내포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이런 관점에서 작품을 바라본다면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은 산개와 화합의 과정을 담은 작품으로 보여진다. 특히 이를 주 배경이 되는 장소의 구분을 통해 표현한다.
우린 흔히 '혈연으로 이어진 인간 공동체'를 '가족' 내지는 '가정'이라고 부르는데, 두 단어의 앞 글자가 모두 '집 가(家)'라는 데엔 '가족=집'이라는 걸 의미하는 지 모른다. 가족의 정신과 마음이 모두 담긴 집을 공간적 배경으로 삼는 영화의 초반부 씬을 보면 화합과 결집과는 어울리지 않는 불안한 가정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대화가 긴밀히 오가는 식사 씬에선 쇼트와 역쇼트를 빈번히 사용하여 영화의 호흡을 빠르게 가져가지만 인물들이 집의 복도 내지는 공간을 누비는 장면에선 롱테이크로 촬영한 점이 인상적이다. 대화 씬의 속도와 걷는 씬의 속도가 다른 데엔 빠른 대사와 박자감을 통해 갈등의 흥미진진한 진행을 표현하고자 함과 상대적으로 천천히 이동함으로서 집 안에 만연하게 존재하는 가족 간 미묘한 거리감을 표현하고자 했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그러던 와중 불안과 불합치만이 존재하던 집안의 분위기를 바꿔주는 하나의 사건이 벌어지는데, 이것이 바로 영화의 본격적인 사건의 중심인 막내 "올리버"의 '미스 리틀 선샤인' 진출을 위한 캘리포니아 행 여행이다.
필자의 관점에서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흥미로웠던 장면은 바로 여행 중 차량 클러치가 고장 나 모두가 차를 밀면서 한 명씩 탑승하는 장면이다. 본 씬과 영화의 전 후 서사를 비교해보면, 본 씬을 기준으로 인물들의 분위기와 표정 등이 변하게 됨을 눈치 챌 수 있다. 공군 사관학교에 가고자 했던, 니체를 극심하게 믿어 침묵의 서약을 했던 아들 "드웨인"의 늘 무표정이던 얼굴이 입체적으로 변해 절규도 하고 웃기도 했으며 작품의 진 주인공으로 보여지는 삼촌이자 잘 나가는 학자였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몰락해버린 "프랭크"가 무한의 우울함에서 벗어나 웃고, 떠들고, 위로하고, 도전하기 시작한 계기도 바로 본 장면을 기준으로 한 후였다. 영화의 종반부 이러한 행동이 똑같이 반복된다는 점은 본 씬의 중요도를 영화가 의도적으로 일러주는 것 같으면서 인물들의 행동이 워낙 재밌다 보니 중반부 이후 차를 출발시키려는 씬들이 등장할 때면 이번엔 어떻게 가려나 하는 흥미로운 생각마저 하게 해 영화에 크나큰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아이스크림, 운, 신, 미스 리틀 선샤인. 본 작품을 본 분들이라면 모두 인상깊다고 생각할 만한 영화의 소재들이다. 영화는 우리가 흔히 행복의 존재라고 생각하는 보통의 사물과 존재들에게 아이러니를 더한 대사와 연출들을 보여준다. 이런 아이러니함의 중심엔 항상 아빠 주인공인 "리처드"가 서 있다. 달달한 맛과 시원한 온도감으로 우리에게 행복을 선사하는 아이스크림에겐 '미인대회에서 떨어지기 위해 먹는 패배자들을 위한 음식'이라는 칭호를 딸 앞에서 서슴치 않게 씌웠고, 삼촌 "프랭크"가 "올리버"에게 운을 빈다고 했을 때 "운 따위는 나약한 패배자들이나 의지하는 것"이라 말하면서 운을 비운의 존재로 전락시켰다. 인상깊은 점은 바로 이런 "리처드"가 승리자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해 도착한 미스 리틀 선샤인 대회장에서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에 딸을 만류하기 위해 내뱉은 첫 마디가 바로 "너의 운을 빌어."라는 것이다.
패배자와 승리자를 항상 구분 짓고 '절대무패 9단계'라는 본인만의 잣대로 비교하던 "리처드"의 영화 속 삶을 생각한다면 과연 그는 승리자였느가 하는 의문이 들게 되고, 이는 아이러니함의 시작점이다. 절대무패 9단계라는 본인만의 학설을 자랑스럽게, 마치 승리자인 것처럼 강연하지만 협소한 공간에서 몇 안 되는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아이러니, 몰락한 학자인 "프랭크"를 패배자라고 멸시하지만 본인도 다른 사람의 확실치 않은 말 한마디에 설레발치며 사업을 확장시켜 결국 파산 직전에 다다르게 되었다는 아이러니는 "리처드"를 마치 똥 묻은 개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것과 같은 역설로 보이게 한다.
작품의 재밌는 지점은 운과 아이스크림의 존재 뿐만 아니라 신의 등장 타이밍과 미스 리틀 선샤인의 존재에도 있다.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 속 'GOD'이라는 단어가 실제 대사로서 등장하는 때를 생각해본다면 할아버지가 마약 하는 씬이나 미스 리틀 선샤인에서 "리처드"가 이상함을 느끼던 때이다. 물론 영어 대사나 영문화권 사람들의 평상시 말에도 GOD이라는 단어는 굉장히 흔히 사용되는 단어이고, 관용어와 같이 각종 상황에서 사용되지만, 단어의 뜻과 같이 실제 신의 은총이나 신의 손길이 필요치 않은 장면에서 유독 'GOD'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온다는 건 영화가 의도적으로 단어와 대사를 통해 역설적인 상황을 연출하고자 한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미국의 최고 미인을 선정하는 대회인 미스 아메리카 그리고 아동계의 미스 아메리카인 미스 리틀 선샤인을 영화가 연출한 방법도 이러한 의도가 담겨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영화를 본 관람객마다 생각은 모두 다르겠지만 필자의 관점에선 영화가 미스 리틀 선샤인과 미스 아메리카에 선정된 인물이나 출연한 인물들 심지어 행사 자체를 그리 아름답게 담지도, 좋은 의미로 담기 위해 노력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게 옳은 것인가?'라는 생각을 관객이 자연스럽게 할 수 있게끔 여지를 남겨놓은 것처럼 보여졌다. 미스 리틀 선샤인과 미스 아메리카. 어쩌면 모두 승리자를 뽑기 위한 행사이고, 선발된 인원들 또한 모두 승리자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영화가 승리자를 예찬하고, 승리자를 위한 작품이었다면 두 존재를 더욱 매력적으로 그리지 않았을까?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은 모든 루저들, 모든 패배자들을 위하는 영화이다. 스스로 패배자이면서 패배자임을 인정하기 싫은 가정이 승리자가 되기 위한 여행을 떠났고, 그 끝엔 스스로를 패배자라고 인정하는 것으로 그 막을 내린다. 그렇다면 영화는 그런 패배자들을 처절하고, 비참하게 그렸을까? 승리자라고 스스로를 추대했던 초반부의 처연한 분위기와 패배자임을 인정하고 승리자와 패배자를 구분짓는 행위마저 모두 의미 없음을 드러낸 종반부의 행복한 분위기의 차이는 그 반대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은 모두 패배자이고 그저 인정만 하면 된다고 단정 짓는 작품일까? 물론 그렇지도 않다. 영화 속 승리자로 보여지는 사람들의 외양, 이미지, 풍기는 분위기 모두에서 과연 그들이 어떠한 면에서 승리자인 것인지 의심하게 만들고 오히려 패배자로 보여지는 후버 가족의 이미지와 풍겨지는 분위기를 더욱 빛내는 것처럼 연출했다.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은 패배자를 낙담시키지도 그렇다고 우대하지도 않는다. 우리 모두가 패배자이자 승리자임을, 패배자와 승리자를 구분지어 평가하는 게 모두 덧 없음을, 승리자와 패배자를 구분짓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건 바로 화합 그리고 사랑이란 걸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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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즈니의 변화는 실패했다
자녀의 입장에서 부모는 보수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부모는 자녀가 안전하고 좋은 길로만 가길 원한다. 하지만 우리가 자라면서 교육을 받고 직업을 가지게 되는 그 이후에도 완벽하게 안전한 길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의 입장에서 가장 최선은 그 많은 길 중에서 가장 안전한 길이다. 이미 자신이 걸어왔던 길, 그게 아니라면 주변에서 누군가가 이미 지나갔던 안전한 길로 자녀가 가길 원한다. 그 길을 그대로 따라간다면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방향으로는 가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게 좀 더 편하고 풍족하게 살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부모의 마음이다.
하지만 자녀의 입장에서 그 길은 이미 남들이 가봤던 길이다. 전혀 새롭지 않고 오히려 퇴보하는 듯한 느낌을 줄 수도 있다. 그래서 많은 자녀들이 새로운 길을 궁금해한다. 그저 호기심에서 머물 수도 있지만 일부는 그 호기심의 벽을 뚫고 새로운 경험을 하러 뛰쳐나간다. 부모의 생각대로 거기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하지만 최대한 조심하면서 나아가는 자녀는 그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새롭고 창의적인 느낌을 받게 된다. 그건 부모가 생각하지 못했던 발전이자 진보다.
보수적인 부모와 진보적인 자녀의 갈등을 다룬 영화
영화 <인어공주>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자녀와 부모의 대립이 전면에서 다뤄진다. 물론 이 영화의 이야기 중심 주제는 젊은 두 남녀의 사랑이다. 하지만 그 사랑을 위해서 넘어야 할 관문은 남녀 모두에게 부모다. 부모는 이 둘의 관계를 반대하며 더 나아가 각자가 살고 있는 새로운 사회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서로를 위험한 존재로 보며 교류를 차단하려 애쓴다. 그런 상황에 놓은 두 남녀에게는 더 상대방에게 다가가려는 힘이 커질 수밖에 없다. 그 힘은 일종의 반항심으로 부모에게 반기를 들게 한다.
영화의 중심인물은 에리얼(할리 베일리)이다. 인어인 그녀는 인간 사회와 인간이 쓰는 물건에 굉장히 관심이 많다. 아버지 트리톤 왕(하비에르 바르뎀)의 눈을 피해 인간이 쓰는 물건을 모으고 배 위 인간들의 모습을 훔쳐본다. 인간에 의해 아내를 잃은 트리톤 왕의 입장에서 인간들은 위험한 종족이고 교류가 불가능한 종족이다. 그래서 그는 막내딸은 에리얼이 물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한다. 에리얼의 자유를 속박하면서 그녀를 보호하려 하는 것이다. 이 속박은 에리얼의 반항심과 자유에 대한 갈망을 크게 만든다.
에리얼이 사랑에 빠지는 에릭 왕자(조너 하우어 킹) 역시 보수적인 어머니 밑에서 생활하고 있다. 어린 시절 입양된 그는, 안전한 길로 가길 원하는 어머니의 말을 답답해한다. 어느 날 배가 폭풍우에 침몰하게 되고, 에리얼이 그를 구하면서 그는 바다에서 자신을 구해준 존재를 찾아다닌다.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이용해 은인을 구해 다니는 그는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포기하지 않는다.
애니메이션 <인어공주>의 실사영화
1989년에 개봉했던 애니메이션 <인어공주>를 실사 버전으로 리메이크한 영화 <인어공주>는 보수적인 부모의 보호를 벗어나 독립적인 선택을 하는 에리얼과 에릭 왕자의 사랑이야기를 원작과 거의 동일하게 담았다. 과거 우리가 알고 있는 <인어공주>의 이야기를 그대로 담으면서 몇 가지 변주를 줬다. 에리얼을 백인에서 흑인으로 바꾼 것이 가장 큰 변화이고, 음악의 색깔도 좀 더 R&B 의 느낌을 넣어 변주했다. 이야기 자체를 변주하진 않았기 때문에 큰 줄기는 익숙한 느낌을 주고, 작은 변주로 새로운 느낌을 주려 노력했다는 생각이 든다.
문제는 이 변주가 그렇게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주인공 에리얼을 흑인으로 변경한 것은 큰 변화다. 최근 디즈니 작품들의 방향은 좀 더 다양한 인종을 등장시키는 것이다. 정치적 올바름주의(PC주의:Political Correctness)를 여러 작품에 적용하면서 마블 시리즈의 주인공들을 유색인종으로 바꾸고, 애니메이션을 실사화한 작품들에도 인물들의 인종과 역할을 조금씩 바꾸고 있다. 이런 디즈니의 행보는 변화가 적용된 영화들이 훌륭하고 재미있다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지만 현재까지의 상황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다.
마블에서 최근 개봉했던 영화들 중 <샹치>, <블랜팬서: 와칸다 포에버>,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는 모두 주인공이 유색인종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흥행성적이나 관객들의 평가가 과거의 마블 시리즈들에 비해서 그렇게 좋지 않다. 무엇보다 바뀐 캐릭터에 대한 호감을 만들어내지 못한 것이 꽤 크게 다가온다. 팬들의 불만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디즈니의 대표 작품인 <인어공주>를 실사화하는 프로젝트는 큰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실패한 변화
<인어공주>의 주인공 에리얼을 흑인으로 바꾼 선택은 제작 단계부터 무수한 논쟁을 만들었다. 무엇보다 어린 시절에 기억하고 있는 애니메이션 속 에리얼의 이미지와 다르다는 것은 큰 반발을 불러왔다. 디즈니는 마치 에리얼이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다른 세상으로 나가는 것처럼 자신의 뜻을 그대로 밀어붙여 작품을 완성했다. 뮤지컬 장르의 영화를 성공적으로 만들어 본 경험이 있는 롭 마샬 감독을 고용해 완성도를 높이려 애썼다.
에리얼 역을 맡은 할리 베일리는 가수 출신으로 영화에 등장하는 주요 노래들을 훌륭하게 소화해 낸다. 하지만 문제는 에리얼이라는 배역과 할리 베일리의 이미지가 좀처럼 잘 어우러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흑인이라는 인종의 문제를 떠나서 좀 더 부드러운 이미지를 가진 원작의 에리얼에 비해 할리 베일리가 맡은 에리얼의 이미지는 좀 더 강인하다. 할리 베일리의 머리스타일인 드레드록스(레게 머리)도 기존의 인어공주 이미지와 상반되는 인상을 준다. 이런 요소들은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몰입을 적지 않게 방해한다. 극이 진행될수록 에릭 왕자와의 감정 교류와 갈등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게 만든다.
대표적인 영화의 사운드트랙 중 '언더더씨'가 흥겹게 흘러나오고 다른 노래들도 들려오지만 캐릭터들에 완전히 공감하지 못한 탓에 보는 관객들에게 인상적으로 다가오지 못한다. 이건 각본의 탓도 크다. 과거 애니메이션 원작의 이야기를 그대로 끌고 왔지만, 그 당시에는 진보적으로 보였던 캐릭터들이 지금은 너무 익숙하고 진부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랑 때문에 기존의 틀을 벗어나 반항하는 이야기는 지금 시대에 더 이상 새롭지 않다. 너무 충실하게 과거의 이야기를 그대로 따라가면서 안정을 추구했지만, 그래서 이 영화가 새롭다는 느낌을 전혀 주지 못한다.
이 영화의 다른 단점으로는 어두운 화면을 들 수 있다. 물속에서의 모습도 마찬가지고 지상에서 벌어지는 장면들도 너무 어둡게 느껴진다. 좀 더 자연스럽게 보이기 위한 선택이었겠지만 어색한 CG와 어두운 화면이 섞이면서 영화의 질감을 떨어뜨린다. 무엇보다 이런 어두운 화면은 밝은 영화의 분위기를 낮춰 영화의 전반적인 완성도를 떨어뜨린다. 영화 말미 인어족들이 에리얼의 뒤에서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장면은 분장한 사람이 등장한다는 생각이 들어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영화에서 가장 돋보이는 캐릭터는 에리얼의 고모인 울슐라(멜리사 맥카시)다. 원작과 비슷한 이미지로 등장해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캐릭터를 훌륭한 가창력을 뽐낸다. 비록 악역이지만 영화에서 가장 역동적인 캐릭터다.
영화 <인어공주>는 아이들이 보기에 다소 긴 러닝타임(135분)을 가지고 있다. 또한 어두운 화면과 조금 무섭게 등장하는 울슐라 캐릭터 덕분에 아이와 부모가 함께 보기에도 적절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야기와 캐릭터, 러닝타임 등 영화가 가진 장점에 비해 단점이 더 도드라져 보이는 영화 <인어공주>는 여러모로 아쉽게 느껴지는 실사영화다. 이 영화의 흥행 성적에 따라 향후 디즈니가 실사화하는 여러 영화들에 변화가 있을지 궁금해진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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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tGPT에게 물어본 <인어공주(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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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MFF 데일리] 달처럼 두둥실
개막작 <소나타> 리뷰감독] 바르토즈 블라쉬케Bartosz Blaschke
출연] Michał Sikorski, Malgorzata Foremniak, Lukasz Simlat
시놉시스] 조산아로 태어나 자폐 진단을 받은 그제고즈는 자신만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그의 유일한 취미는 집안에 있는 오래되고 고장난 피아노를 두드리는 것뿐이다. 그가 15세가 되던 해 생일, 그는 자신의 고립이 사실 자폐증이 아니라 청각 장애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스카진스키 교수의 도움 덕에 인공 와우를 장착한 그제고즈는 말하기, 듣기 능력과 함께 음악적 재능을 발견하게 되고, 피아니스트가 되어 콘서트 홀에서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를 연주할 수 있기를 꿈꾼다.***
영화제가 시작된다. 때마침 보름달에 가까운 날이다. 제천국제영화제 하면 휘영청 달 밝고 바람 맑은 밤을 떠올리게 된다. 밤하늘이라니. 사실 마지막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본 게 언제였나 가물가물하고, 장마 소식이 있으니 오늘 밤 달이 뜰지 여부도 알 수 없지만… 날씨가 어땠든 제천의 밤이 주는 들뜬 분위기가 향긋하게 마음에 남은 탓이다.
올해 제천의 첫 밤을 여는 영화는 SONATA라는 제목을 둥글고 단선적인 필체로 띄우며 시작할 것이다.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여서일까? 달을 닮은 글씨였다. 정직하고 투박하게, 오롯이 빛을 보내는.
달빛처럼 느린 걸음을 차분하게
영화 <소나타>는 얼마든지 뭉클하고 감동적인 톤으로 담아낼 수 있는 이야기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점을 생각했을 때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보다 훨씬 느린 걸음을,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 곡조처럼 차분한 톤으로 옮기는 방법을 택했다. 귀여운 동요를 배우는 특수학급에 뚱하게 앉아 고립되어 있던 그제고즈가 본인의 문제가 청력 장애임을 알게 되고, 나아가 <월광 소나타>를 꿈꾸기까지… 그 길에 마법은 없다. 때로는 지치고, 때로는 이 고립이 깨지긴 하는 걸까 싶은 지난한 걸음이다.
길이 쉽지 않은 대신, 영화가 메트로놈처럼 그제고즈의 속도에 관객을 맞추어 기어이 함께 걷게 만든다. 그제고즈의 ‘듣기’를 관객이 체험할 수 있게 계산된 사운드 덕분에, 그의 세상이 한 번씩 새로워질 때마다 생생하게 함께 느낄 수 있다. 어느새 정신 차려 보면 그 여정에 나란히 서 있다.
그제고즈의 여정은 묵묵히 혼자 달리는 마라톤보다는 이어달리기를 닮았다. 그제고즈의 교육을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하는 엄마와 아빠, 그제고즈에게 새로운 가르침을 주었던 선생님들, 우호적이지 않았던 이들의 존재까지도. 한 사람의 인생에서 바톤을 넘기듯 만나고 또 헤어지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으면, 순간 깨닫게 된다. 삶은 온전히 단단한 한 사람으로서 나아가는 게 아니라, 가끔 서투르기도 하고 쉽게 지치기도 하는 여러 사람에게 조금씩 의지하며 나아가는 것임을.
선율 따라 기쁜 걸음을 다정하게
이어달리기 같은 만남과 헤어짐으로 그제고즈는 조금씩 성장한다. 물론 오랫동안 세상과 다른 속도로 걸어온 그가 템포를 맞추는 일은, 메트로놈의 박자를 따라가는 것보다 훨씬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같이 걷고 손을 내밀어주는 이들이 있다. 관심을 기울이고, 이름을 말해주고, 무엇보다도 정해져 있다고 믿었던 선 바깥으로 한 걸음 나아가도록 신뢰와 지지를 보내주는 이들. 아니라는 가정을 한 번만 해보자는 이들. 무언가 더 나은 세상을 열고자 한다면 미지의 걸음을 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 내가 알아온 세상이 모두 정답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이들.
바로 이런 이들과 만날 때, 거칠게 비좁아져 있던 세상이 점차로 확장되어 간다. 그렇게 그제고즈는 성장하고, 그 과정은 지극히 자연스럽게 그려진다. 동시에 그제고즈를 둘러싼 주변에도 성장에 뒤따르는 기쁨과 슬픔이 있다는 점까지 세심하게 포착한다. 만남은 일방적일 수 없으므로.
사람만 만나는 것은 아니다. 그제고즈에게 가장 의미 있는 순간은 피아노와의 만남이다. 그동안 닿지 않았던 세상이 음악의 파동으로 열린다. 감지하지 못했던 파동을 처음 느낀 이후, 세상은 이전과 다른 곳이 되고, 청각 보조 기구에 대한 만남과도 맞닿는다. 어떤 조우는 세상을 바꾸어 놓는다. 그렇게 달라진 마음은 결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새로운 세상에서 만나
그제고즈의 피아노처럼 어떤 음악이, 어떤 영화가, 어떤 순간이, 우리에게 그러할 것이다. 가끔 새로운 음악을 들었는데 너무 좋아서 황홀해지는 순간, 무심코 본 영화가 마음에 들어와서 나를 바꿔 놓고 마는 순간. 그래서 음악을 좋아하고, 영화를 좋아한다. 생각지도 못한 순간, 다정하게 새로운 힘을 건네 주니까. 내가 보고 듣고 알았던 세상 바깥으로 나를 이어주는 힘, 선명하다 생각했던 경계를 지워내고 그 바깥으로 걸음을 뗄 수 있게 이끄는 힘을.
가슴이 두근거린다. 제천에서 당신은 어떤 음악을, 어떤 영화를, 어떤 순간을 조우하게 될까? 알 수 없지만 다만 그 순간이 그제고즈와 <월광 소나타>의 만남처럼 아름답게 빛난다면 참 좋겠다. 이 영화를 끝까지 본 당신이라면, 이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 기원인지 눈치챌 것이다. 삶이라는 여정에서 이 짧은 만남이 어떤 흔적을 남길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제천을 즐기는 당신의 마음에 새로운 힘이, 달처럼 두둥실 차오르기를.
18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상영시간표
상영 시간
장소
CODE
2022-08-11 19:00
의림지무대
1
2022-08-14 17:00
CGV 제천 1관
324
2022-08-15 10:30
CGV 제천 1관
403
* 글 : 선이정
* 해당 글의 원글는 "선이정"님 브런치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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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 첫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모아나 2>가 개봉 2주 차에도 선두를 지키며 흥행 돌풍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2주 만에 누적 관객 수 220만 명을 돌파하며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강력한 흥행 파워를 다시 한번 보여주었습니다. 2016년 개봉한 1편이 개봉 24일 만에 200만 관객을 달성했던 것과 비교하면 훨씬 빠른 속도입니다. 다른 애니메이션과 비교해 보아도 누적 관객 수 724만 명의 <엘리멘탈>보다 8일, 누적 관객 수 557만 명의 <스즈메의 문단속>보다 하루 빠른 속도라고 하는데요.
과연 <모아나 2>는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2위는 주연 배우 곽도원의 음주 운전 논란으로 인해 개봉일이 미루어지는 곤욕을 치렀던 <소방관>이 차지했습니다.
‘홍제동 방화 사건’을 다룬 <소방관>은 목표 관객 달성 시, 기부 공약을 밝히기도 했는데요. 100만 관객 달성 시 약 1억 1,900만 원, 손익분기점인 250만 명 돌파 시 약 3억 원을 국립소방병원에 기부할 계획이며, 목표 초과 시 추가 기부도 진행될 예정입니다. 또한, 관객 1명당 티켓 구매액 중 119원을 적립하는 ‘119월 기부 챌린지’를 통해 상영 4일 만에 약 5,950만 원이 모금되며 화제를 모았습니다.
뒤이어, 꾸준한 입소문으로 관객들의 발걸음을 이끌고 있는 <위키드>가 누적 관객 수 149만 명을 돌파하며 3위에 올랐습니다.
북미 박스오피스는 지난주와 동일한 영화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모아나 2>와 <위키드>가 나란히 1, 2위를 유지하며 각각 누적 수익 3억 달러를 돌파하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모아나 2>는 전 세계 수익 6억 달러를 넘어 곧 1편의 총수익인 6억 4,300만 달러를 추월할 전망입니다.
<위키드>는 최근 미국 영화 비평위원회(NBR)로부터 올해의 영화상, 감독상, NBR 스포트라이트 상을 받으며 앞으로 이어질 시상식 시즌에서의 활약이 기대되고 있습니다.
한편, 3위를 차지한 <글래디에이터 Ⅱ>는 개봉 3주 차 주말 동안 북미에서 1,240만 달러를 추가로 벌어들여, 현재 북미 누적 수익은 1억 3,270만 달러, 전 세계적으로는 3억 6,800만 달러를 기록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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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계를 넘어 진화하는 인간 신체에 대한 명상
인체는 매우 창의적이라서 항상 새로운 걸 만들어내죠. 다음 세대에 무엇이 남는 지 보려는 것 같아요.
인간의 신체가 변화하면서 사람들이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되고, 감염의 위험도 사라진 멀지 않은 미래. 예술가 ‘사울’과 그의 파트너 ‘카프리스’는 몸에 생겨나는 새로운 장기들에 문신을 새기고, 그것을 적출하는 전위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 모은다. 인간의 신체가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가속 진화 증후군’을 앓고 있는 사울은 전직 외과의인 카프리스의 도움을 받아 계속 자라나는 몸 안의 장기들을 제거해나가고 있다. 그에게 장기 적출은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일종의 반항이자 거부다. 하지만 계속되는 몸의 변화와 적출 수술로 인해 그는 제대로 된 음식 섭취는 물론 목소리를 내는 것조차 어려움을 겪는다.
어느 날 동료 예술가의 공연을 방문하고 돌아오던 길에 사울은 ‘랭’이라는 남성으로부터 자신의 어린 아들의 시체를 해부하는 공연을 진행해 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는다. 사울과 카프리스는 어린아이의 시체 해부라는 일에 윤리적 죄책감과 우려를 나타내면서도 새로운 퍼포먼스에 대한 기대를 떨쳐버리지 못한다. 한편 랭은 장기를 변형 및 이식해 플라스틱을 인류의 주식으로 삼고자 하는 운동을 이끌어가는 수장으로, 전 세계에 포진된 그의 조직은 일반적인 음식 대신 산업폐기물 등을 원료로 한 합성 플라스틱을 먹으며 살아간다. 그가 사울에게 해부를 부탁한 8살 아들 ‘브라켄’은 기적적으로 태어나면서부터 자연히 플라스틱을 섭취하고 소화할 수 있는 기관을 가지고 태어난 ‘신인류’로, 랭은 사울과 카프리스에게 이러한 신인류의 내부를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공연을 요청하면서 자신들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내고자 한다. 하지만 아이의 배를 갈라 들여다본 내부에는 특별한 소화기관이 아니라 문신이 새겨지고 여기저기 꿰메진 장기들만이 있다. 그리고 아이의 오염된 장기의 배후에는 인간 신체의 변화, 즉 진화의 흐름을 부정하고픈 거대 권력의 ‘정상성’에 대한 고집이 존재한다.
육안으로 볼 수 없었던 피부 밑의 세계를 직접 열어 볼 수 있게 되면서, 영화 속 미래의 사람들은 가학적인 신체 훼손에 열광한다. 이제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피부 아래를 깊숙히 탐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열광하는 피부 밑의 세계에 ‘의미’란 없다. 그곳에는 오염되고 변형된 피투성이의 장기들뿐이며, 예술가는 애써 이것들에 알량한 의미를 붙여보려 한다. 고통이 없어진 세계에서는 인간이 스스로의 존재를 인지할 수 있는 영혼과 미덕의 가치에 대한 감각마저 무뎌진다. 사울이 참가하는 ‘내면의 아름다움 선발대회’ 역시 인격이나 마음의 도덕이 아니라, 단순히 몸 안의 장기들의 생김새와 배열을 평가하는 대회라는 점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렇듯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에서 변화는 필수적이지만, 동시에 그것에 따른 상실 역시 불가피하다.
해부 쇼가 끝난 뒤에도 사울은 여전히 음식을 씹어 삼키고 말을 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는다. 어느 날 아침 음식을 삼킬 수 없어 고통스러워하던 그는 결국 합성 플라스틱 바를 섭취해 보기를 선택하고, 마침내 자신도 계속된 몸의 변형 끝에 플라스틱을 소화할 수 있는 신인류로 거듭났음을 확인한다. 플라스틱 바를 씹어 삼키며 눈물을 흘리는 사울의 얼굴이 흑백으로 클로즈업되는 마지막 장면은 변화한 자신의 몸에 대한 절망을, 혹은 인류의 진화를 직접 체험한 이의 환희를 의미할 것이다.
영화의 감독 데이빗 크로넨버그는 8년 만의 복귀작이자 20년 만에 다시 택한 바디호러 장르인 이 영화를 두고 “인류의 진화에 대한 명상”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변형되고 훼손된 인간의 신체를 꾸준히 다루어 왔고, 그의 영화 속에서 인간의 몸은 정상성의 범주를 교란하며 부서지고 절단되고 뒤틀린 채 관객들에게 공포와 더불어 신체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선사했다. <미래의 범죄들>은 크로넨버그가 지금껏 구축해 온 세계관을 기반으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인간 신체와 이를 통제하고 억압하려는 정상성 간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 영화는 자아가 자신의 신체의 경계를 확립하기 위해 비자아로서 배척한 것들(피, 체액, 적출된 장기 등), 즉 비체(abject)적인 것들을 적극적으로 스크린에 비추면서 인간의 신체를 중심으로 한 질서와 체계를 가로지르고, 끝내 그것들을 수용하면서 인간 신체의 변화를 암시한다. 관객은 영화를 통해 과도기적 상태에 놓인 인간이 경계선을 넘어 진화하는 변태變態의 과정을 목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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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 번 때리기만 하는 세상에게 어퍼컷 한 방
웩. 몸에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 같다. 땀이 잘 나는 체질이라 그런가? 오늘 스웻셔츠 하나만 입고 돌아다녔는데 이런 냄새가 나는 건 좀 그랬다. 또 몸에 거북한 느낌이 있다. 위산이 역류하는 따가움이 싫었다. 그래도 책은 읽고 싶어서 도서관에서 꾸역꾸역 읽는다. 이 책을 읽는 이유는 오늘 비상금을 털어서다. 이렇게라도 오늘을 보내지 않으면 완벽한 잉여의 삶이 될 것 같았다. 어찌어찌 곳간을 털어서 3만 원을 갖고 왔다. 밖에 외출하기 위한 보람이 있다. 날씨도 때마침 좋았다. 비상금을 털어 버스를 탔다. 계속 방구석에 박혀서 아무것도 안 하기엔 인생이 아쉬웠다. 모처럼 게임 파일들도 다 지워 하나만 남겨놨다. 좋아. 다시 하나에 집중해보자고. 내가 살아온 갓생이 대학생이라는 허울 아래서만 가능했다면 여러모로 자존심이 상하다. 원래 내 인생은 내가 개척해야 하는 거잖아? 아무도 동의 안 할지도 모르지만 난 그동안 이기고 있는 삶을 걸어왔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이 내가 탄 버스도 승자의 여유 같은 느낌이다. 뭐랄까, 내 또래에 책 읽는 사람 없는 것 같거든.
그럴 리가 있나. 갑자기 오늘 돈이 없어했던 행동들이 떠올랐다. 위에 썼던 곳간은 게임 머니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아끼는 여동생의 생일선물도 없어 '카톡 메시지면 충분하겠지' 싶은 나의 정신승리가 오늘 일상의 발단이 됐다. 금세 하는 게임에 눈이 갔다. 모여있는 게임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이거 팔까? 어차피 모아봤자 디지털 쪼가린 거 이럴 때 써야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7개월 차 사회복무요원 생활. 이제까지는 어찌어찌 버틸 수 있었지만 컴활 예약부터 영화 예매까지 돈 쓸 일이 많아 생활고에 직면했다. 이제는 팔 스니커즈들도 없다. 950원짜리 컵라면으로 끼니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까지 와버렸다. 와. 그렇게 좋아하는 친한 여동생에게 생일 선물도 못 줘 안달복달하는 하루라니. 금세 내 삶이 불쌍해지기 시작했다. 열심히 살아 모아놨던 돈이 없는 게 이렇게 돌아왔다. 그러니까 군것질 좀 적당히 쳐하면 될 일인데 역시 나는 모지리가 맞다. 여자 친구도, 넓은 인간관계도, 술과 담배도 하지 않거나 없는데 이럴 때 돈이 없어서 밖으로 못 나가는 처지다. 이기고 살았던 갓생을 산 사람 치고는 과연 궁색하기 그지없다. 아. 내 또래 중에 책 안 읽는다는 생각도 그냥 나의 생각이다. 주위를 들여다봤을 때 책 많이 읽는 사람이 충분히 있을 수도 있다. 에휴. 그럼 그렇지. 내가 만든 나의 기대를 내가 부숴버렸다. 나는 3만 원에 울고 웃는, 그 정도짜리 인간이다. 이런 나의 한 구석도 웃음으로 마무리 짓고 싶은데 말이지. 어떤 노래 가사처럼 지면서 배우는 게 삶이라지만 난 세상에게 너무 자주 지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내가 만든 세상은 참으로 광활해서 현실로 나가려면 긴 시간이 걸린다. 젠장. 언제 한번쯤 이길 수 있을까? 늘 세상에게 지고만 사는 것 같다. 미생의 삶으로 그렇게 가다 끝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근데 이런 나에게, 또 지루한 일상을 버티는 우리에게 아마추어 복싱 선수가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딱 100엔짜리의 이야기라고 하는데, 실상 까 보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왓챠에 절찬 스트리밍 중인 <백 엔의 사랑>이다.
100엔짜리 인생
주인공 이치코는 일본 어느 곳에 사는 32세 여성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쭉 백수인 이치코. 어린 조카가 한 명 있다. 조카는 허구한 날 괴롭힘이나 당한다. 이모가 돼서 이런 조카와 같이 운동을 한다거나 자신감, 자존감을 키워주면 좋겠지만 이치코에게 그런 건 없다. 하는 일이라곤 조카와 게임을 하는 게 전부인 이치코. 맨날 '나 언니처럼 되면 어떡하지'식의 시비 걸기가 전부인 동생과 크게 싸우게 된다. 머리에 케첩을 붓고 식탁을 엎은 꼴에 어머니는 폭발해 이치코에게 독립을 권유한다. 그렇게 반강제로 집에서 쫓겨난 이치코. 다행히 어머니와 절연하거나 그런 건 아니다. 임대주택으로 거처를 옮긴 이치코, 평소에 자주 가던 100엔 숍에 취직하게 된다. 이왕 일자리 구한 거 좋은 곳에 들어갔으면 좋았을 걸 그거랑은 거리가 멀다. 가게 점장은 우울증 환자다. 또 동료직원 노마는 띠동갑인 주제에 이치코에게 치근덕대는 게 일쑤다. 또 말도 더럽게 많아서 여러모로 사람을 귀찮게 한다. 게다가 도둑질을 해서 잘렸던 한 할머니는 유통기한이 지난 도시락이나 가락국수를 지맘대로 가져가곤 한다. 역시 사회생활에 쉬운 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을 다니는 이치코. 뭔가 큰 임팩트가 있는 사건 없이 그렇게 일상이 흘러갈 것 같았다.
그런데, 한 남자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남자는 100엔 숍의 단골쯤 되는 사람이다. 스윽 나타나서 바나나만 사 가는 사람이라 '바나나맨'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바나나맨은 말투부터 표정까지 건조한 사람이다. 웃지도 않고 말투도 그렇게 예의가 바른 사람이 아니라 영 까칠해 보인다. 그런데 그 남자가 어쩐지 이치코에게 데이트를 신청한다. 32년의 인생 동안 연애를 해본 적이 없는 이치코. 바나나맨의 정체는 알고 보니 전직 복서였다. 바나나맨과 사랑에 빠진 이치코. 바나나맨이 선수로 뛰었던 복싱 운동장에 등록해 뭐라도 부딪혀보기로 한다. 영화는 잘하는 것도, 재미있는 것도 없었던 이치코가 사랑을 만나 성장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영원히 지고 사는 거니까
당연한 이야기지만 영원한 건 없다. 이는 사람이 있으면 지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그 뜻은 패자가 되는 일을 피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냥 피하기만 어려우면 그나마 다행인데 이런 경험들은 사람의 마음속에 축적된다. 이런 과정을 안 거치고 싶지만 사실 절대 그럴 수 없다. 그렇게 스스로를 미워하게 된다. 패배자. 루저. 뭐 그런 생각을 스스로에게 품게 된다. 가끔은 '이런 말로도 이 상황의 위로가 될까'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점점 사람이 외로워지는 이유도, 그런 실패의 경험을 타인이 짐작할 수도 없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럴 때 사람에게 뭔가 색다른 위로가 필요하다. 단순히 '그냥 잘 될 거야'식의 위로가 아닌 새로운 시각의 무언가가 있으면 참 좋을 것이다. 그래서 연애를 하는 사람도 많은 것 같다. 내가 사랑하면서 날 아끼는 이에게 기대면 행복해진다. 근데 매 순간 연인에게 기댈 수 없는 노릇이다. 그/그녀가 도라에몽이 아니니까. 항상 내가 원하는 걸 가져다주지 않을 것이다. 이 영화는 이 '색다른 위로'에 관한 영화다. 영화는 여주인공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 온갖 방식으로 괴롭힌다. 특히 동료였던 노마 캐릭터는 진짜 한 대 때려버리고 싶은 첫인상을 끝까지 유지한다. 또 바나나맨이나 복싱같이 이치코가 사랑했던 대상들도 한 방씩은 먹인다. 그렇지만 이것들 덕에 그녀가 웃는 날이 몇 번은 오는데, 이게 '이치코가 어떤 걸 바쳐서 이 결과들을 얻었나'를 생각해보면 영화가 하려는 말이 이런 게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 것이다.
솔직히 좀 과하긴 해
극을 보면서 느껴지는 단점은 살짝 과하다는 점이다. 물론 이게 영화를 보는 입장에서 크게 지장이 가는 정도는 아닐 것이지만 작위적인 설정이 있기는 했다. 일례로 주인공의 100엔 숍에서 유통기한 지난 도시락을 가져가던 아주머니 묘사가 그렇다. 아무리 영화라지만 이 사람이 굳이 이럴필요가 있나? 싶은 구석이 있다. 인물의 귀결을 안 내도 되는데 급 마무리한 느낌? 또 노마 캐릭터도 보면서? 싶은 구석이 있다. 이 사람의 패고 싶은 캐릭터성은 그 값을 충분히 하지만 벌인 일에 책임을 안 지는 느낌이다. 이 둘의 인물 설정이 영화니까! 실제가 아니니까!라고 하면 딱히 할 말은 없다. 그러나 극의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 좀 기능적으로만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물의 설정이 어느 정도는 작위적임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좋은 편이다. 일단 바나나맨과 이치코의 캐릭터 설정이 좋았다. 바나나맨이 좀 나쁜 놈이긴 해도 이치코에게 동기부여를 심어주는 역할을 제대로 했다. 적당히 나쁜 놈이라 거리감에서 오는 그 매력이 딱 잘 느껴졌다. 자기 이야기라곤 도통 안 하는 바나나맨. 바나나맨에게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그가 복싱선수였다는 점이다. 인물 설정과 여주인공의 각성 계기가 연관이 있어 이 부분의 개연성이 딱딱 맞아떨어졌다고 볼 수 있다. 또, 남주인공에게 관심이 생기고 이와 나서도 비슷하다. 복싱이라는 스포츠는 상대방을 주먹으로 때리는 스포츠다. 근데 이치코는 처음 여동생과 싸우고 집에서 쫓겨난다. 개싸움으로는 케첩도 붓고 별의별 짓을 다하지만 이치코는 복싱에 문외한이다. -물론 복싱을 하나둘 씩 배워 엔딩신에서 결투를 벌인다.- 난 비유라고 생각한다. 현실에서 힘을 영 못쓰는 우리 세대에 대한 이야기를 에둘러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 무슨 기계도 아니고 늘 잘할 수는 없다. 언제는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애가 됐다가 내일 성숙해지는 게 우리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복싱(실전)에는 약해도 내 만만한 선에서(가족)는 여포가 되는 우리 모습이다. 보통 이런 내 모습을 알게 되면 자괴감이 쓰나미처럼 몰려온다. 챔피언이 될 수는 없어도 100엔짜리 개싸움은 가능한 여주인공.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인물은 더 나은 선택지를 위해 미친 듯이 산다. 이렇게 감정적으로 이 사람에게 이입이 가능하게끔 극본이 인물 간의 연출과 사건 배치를 잘한 편이다. 즉 영화를 주인공의 매력 하나만으로 재미있게 볼 수 있다는 말씀! 미운 오리 새끼가 되어 백조로 날아오르는 이치코에게 뭔가 정이 간다.
안도 사쿠라의 격이 다른 루저 연기
안도 사쿠라라는 이름은 전부터 알고 있었다. <어느 가족>에서 우는 연기가 칸에서 엄청 극찬을 받았다고 알고 있다. 이 사람이 연기하는 건 이번에 처음 봤다. 뭐랄까, 처음에 덩치가 좀 있게 나올 때는 이렇게 미련해 보일 수가 없다. 그냥 눈빛이랑 뒤태만으로도 둔해 보인다. 또 극 중반에 고기를 먹는 신이 있는데 젓가락질도 서투른 사람이다. 아니 젓가락질을 서투른 연기를 하려면 뭘 어떻게 해야 할까? 극도로 섬세한 사람이 아니면 이런 디테일을 포착하지 못할 것 같다. 또 바나나맨에게 지나치게 순종적인 여자 친구 역할도 잘 수행해낸다. 자칫 보면 지 가족에겐 나빠도 남자 친구에겐 착한 이중적인 모습이 밉상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 선을 잘 탄 느낌이다. 이 영화에서도 사랑의 힘을 받아 변하기는 했다. 그런데 안도 벚꽃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찌질이 연기를 하면서도 하이라이트의 당당한 모습을 2시간 내내 유지한다. 뭐 루저였던 사람의 성장 서사는 다른 영화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이 사람은 뭔가 느낌이 다르다.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자기가 루저였던 시기가 있지 않고 나서 이런 게 가능할까? 싶은 연기다. 일본식 찐따 코미디로도 괜찮은 작품이다.
이게 전부는 아닐 거야 웃는 날 꼭 올 거야
이 영화는 잔인한 현실을 담고 있기도 하다. 사실 이치코의 삶과 우리는 그렇게 다르지 않다. 인생은 원래 지면서 배우는 거라지만 어째 가슴속에 패배 소식이 너무나도 많이 쌓였다. 그러다 보면 이 세상에 난 어울릴 수 없는 걸까, 루저가 되는 기분이다. 이치코도 마찬가지다. 37살에 복싱 시합에 나가 두들겨 맞았던 바나나맨처럼 삶에서 피동적이었던 이치코. 이치코는 마음이 자라 이제 세상에게 반격을 준비한다. 우리 모두 이치코가 하려고 했던 이 '반격'의 한 갈래 안에서 살고 있다. 1인분의 삶을 하고 싶어서가 열심히들 사는 이유 아닌가. 그렇게 세상에게 피투성이가 되도록 맞더라도 뭐라도 미친 듯이 부딪히는 게 우리 모습이다. 영화는 이런 우리에게 글러브 하나를 건네준다. 싸우라는 것이다. 어차피 이 삶에서 이기고 살 수는 없다. 그러려면 이왕에 다 걸어서 뭐라도 얻고 끝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감독이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야 엔딩처럼 좋은 시간이 올 테니까. 다들 잘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피투성이가 되야 세상이 우리에게 잠깐의 시간을 주곤 했으니 앞으로도 그러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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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7 짤막한 마블쟁이 생각
2021. 01. 04 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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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블쟁이 인스타그램: @marvel_jeng2
* 영상에 사용된 모든 음악은 Epidemicsound 의 정식 라이센스 음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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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레일로드 워> 메인 예고편
작업반장 ‘마위안’(성룡)은 함께 일하는 철도 노동자들과
항일 게릴라군 ‘비호’를 결성해 활동 중이다.
어느 날 대원들은 부상당한 팔로군 병사 ‘다궈’(왕대륙)를 숨겨주고
그들이 완수하지 못한 항일 작전에 대해 듣게 된다.
평생에 한번 큰일을 해내고 싶었던 ‘마위안’과 대원들은
팔로군의 임무를 대신 수행하리라 결심하는데…
자, 드디어 큰일 한번 해보자!
‘비호’의 대담한 전쟁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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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빙 <아일랜드> 메인 예고편
다시 시작되는 운명 세상을 구원할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악에 대항해 싸워야 하는 운명을 가진 인물들의 여정 티빙 오리지널 시리즈 [아일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