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st2021-02-16 00:00:00
한국 영화 속 가족에 관하여
엄마인데요 자식입니다
한국 영화 속 가족에 관하여
엄마인데요 자식입니다
한국 영화에서 그리는 가족은 주로 소위 말하는 정상 가족과 비정상 가족 두 종류로 나뉘곤 한다. 전자는 주로 윤제균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엄마와 아빠 그리고 자녀가 있는 가족으로 서로 치고박고 다투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부모가 자식을 위해 희생하며 자식은 부모만 생각하면 그리움에 눈물짓는 케이스다. 가족이 등장하는 대부분의 한국 상업영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 형태로, 입양 등의 변주된 형태가 있긴 하지만 가족의 상봉 장면이 거의 반드시 등장하며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감정적인 장면이 필히 포함된다. 후자의 경우는 편부 가정보다는 편모 가정이 압도적으로 많고 차별당하는 장면이 심심찮게 등장하며 자식은 부모를 이해하지 못하다가 성장하여 이해하고 눈물짓는다. 영화제목 하나 언급하지 않고 대충 썼는데 이 몇줄 쓰는 사이에 머릿속에 스쳐지나간 영화만 몇 편인지 모르겠다. 전자든 후자든 억지스러운 감동 장면이 거의 필수적으로 등장하고 마지막에는 결국 가족은 가족이라는 진부한 서사로 마무리되는 통에 종종 대체 핏줄이 뭐길래 이렇게까지 구질구질하게 묘사를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심지어 뛰어난 원작이 있는 경우에도 최루성 가족 서사를 위해 파괴된 원작의 팬들이 울부짖기도 하는데 신기한 건 그럼에도 높은 확률로 흥행이 보장된다는 점이다(예를 들자면.. <신과 함께>...). 소위 말하는 이런 노랑장판 감성은 인기가 있어서 지속적으로 제작되는 것일까, 아니면 보다보니 익숙해진 관객이 볼 영화가 없어서 보는 것일까. 노랑장판 감성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높아지는 상황에도 한국 상업영화에서 빠지지 않는 가족 설정은 언제나 논란거리다.
헐리우드에서 제작된 <레이디 버드>를 보며 부러웠던 건 모녀의 관계, 나아가 가족 설정이 한국에서 볼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이었다. 물론 나이에 따른 수직관계가 아직까지 가족 내부에도 강하게 존재하는 동아시아 정서와 자녀도 하나의 인격체임을 인정하고 동등하게 대하는 서구 사회의 정서를 비교하는 건 어불성설일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레이디 버드>에 그려진 모녀관계는 사뭇 달랐다. 크리스틴(시얼샤 로넌 분)은 엄마 매리언(로리 맷칼프 분)과 대립하면서도 사랑하고 매리언이 크리스틴을 위해 일방적으로 희생하는 일은 없다. 극적인 사건 없이 담담하게 크리스틴의 성장담을 그려낸 <레이디 버드>는 모녀관계를 비틀거나 거대한 사건 없이도 관객들의 공감과 감동을 자아냈다. 몇 년째 마냥 헐리우드를 부러워만 하고 있을 무렵 연초부터 <세자매>를 만났다. 김선영, 문소리, 장윤주라는 특이 조합이 무려 자매라니 그리고 셋이 주연이라니. 이 역시나 흔한 막장가족 서사가 아닐까 걱정되기도 했지만 <세자매>는 시작부터 범상치 않다. 첫째 희숙(김선영 분)은 자해를 일삼는 암환자이며 둘째 미연(문소리 분)은 안정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남편이 바람을 피웠고, 막내 미옥(장윤주 분)은 누가 봐도 분노조절장애다. 가장 눈에 띄는 건 미옥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숙과 미연의 존재감도 만만치 않다. 그리고 이 세자매는 서로를 사랑하고 미워하며 함께 성장한다. 가족을 향한 뒷담화와 애정이 공존하는 서사는 분명 한국 영화계에서는 드물다.
세자매 이외에도 세자매가 가진 각각의 가족도 그간의 한국영화에서 쉽게 볼 수 없었던 모양새다. 희숙은 날라리 딸과 함께 살며 남편과는 별거 중인 것으로 보이고, 미연은 좋은 집에서 신실한 신자로서 교회를 다니며 두 아이를 키우지만 둘째인 딸은 무슨 이유에선지 식사 기도를 하지 못한다. 미옥은 신기하게도(?) 자신을 사랑하는 이혼남을 만났지만 남편이 전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과는 소원하다(영화를 보면 안 소원한 게 신기하다). 묘사되는 특이 가족의 형태는 배우 김선영의 전작 중 하나인 <당신의 부탁>을 연상시키는데 전작에서 가족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김선영은 이번에는 가족을 강하게 끌어안는다. <당신의 부탁>, <세자매> 모두에서 공통적으로 다루는 가족의 중심축은 엄마라는 역할이다(<당신의 부탁>의 영어제목은 <Mothers>다). 별의별 책임을 다 떠안아온 한국의 어머니들은(<당신의 부탁>에서 효진(임수정 분)은 심지어 친자식도 아닌 사별한 남편의 아이 종욱(윤찬영 분)을 맡게 된다) 자신의 목소리를 잃고 의견을 말살당해왔다. 미옥의 캐릭터가 신선하게 느껴지는 건 엄마가 되고 싶어하는(어떻게 본다면 일반적이지 않은 가족 형태를 띠는 바람에 '엄마가 되는 것을 당하지 않은') 미옥이 유일하게 영화 내내 소리를 지르며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희숙은 마지막까지도 자신의 의견을 울먹이면서밖에 말하지 못하고 보다못한 희숙의 딸이 욕을 해가며 대신 소리를 질러준다. 영화 내내 고상한 부잣집 사모님 코스프레를 하던 미연은 남편의 내연녀를 조용히 밟는 모습으로 성격을 드러내다가 영화 마지막에 가서야 고함을 지른다.
세자매의 성격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은 대단히 한국적이게도 무언가를 먹는 순간들이다. 희숙은 조촐한 밥상을 차려 마요네즈를 좋아하는 딸과 함께 조금씩 먹는다. 평생을 눈치보며 살아온 희숙은 식사마저 딸의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끝마치지 못한다. 불우한 어린시절을 지나 부잣집 사모님이 된 미연은 자신의 과거를 어떻게든 포장하려는듯 식사를 정갈하고 풍부하게 차린 후 기도를 끝마치고서야 식사를 시작한다. 하지만 미연의 딸이 식사기도를 하지 못하자 결국 식사를 포기하고 딸을 방에 데려다 혼을 낸다(미연은 영화 내내 자신의 직계 가족들과는 한 번도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한다). 하지만 남편의 내연녀에게 복수(?)를 한 이후 다음날 아침은 대충 가져온 식사로 때우는 모습으로 속내를 표출한다. 영화 내내 과자와 술로 식사를 때우던 미옥은 언니인 미연을 만나서야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 후반부에는 엄마가 되겠다는 의지를 피력하며 어설픈 밥상을 차린다. 흥미로운 점은 자매들이 가장 잘 먹을 때는 서로를 만날 때이며 남이 차린 밥상이라는 점이다. 식사 장면이 직접적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희숙이 가장 제대로 된 식사를 하는 것은 미연을 만났을 때다. 서사에서 맥거핀으로 작용하는, 미연과 미옥이 여행가서 먹었던 식당은 결국 영화 내내 제대로 된 식사를 거의 하지 못하는 미옥이 제대로 된 식사를 추억하려는 시도의 매개체다. 미연이 있어야만 밥을 먹을 수 있다고 무의식중에 생각하는 미옥은 그래서 어떻게든 식당 이름을 기억해 내려고 하며 끝내 그 장소를 찾지만 식당은 문을 닫은 상태였다. 하지만 미연이 없어도 식사를 차릴 수 있게 된 미옥에게 더 이상 식당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세자매>의 서사는 어김없이 싸우고 서로를 미워하면서도 사랑하는 세자매가 뭉치는 모습으로 마무리되지만 그 묘사 양상은 파격적으로 다르다. 불우한 과거를 지닌 세자매는 각기 다른 모습으로 성장한다. 가정폭력의 피해자들은 대부분 영화상에서 피해의식을 간직한 약자로만 그려져 오곤 했는데 최소한 미연과 미옥은 변주된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피해의식을 가진 채 평생을 사과하며 살아온 희숙에게 미연은 이제 그만 사과하라고 종용하고, 도리어 자식들을 평생 가정폭력의 피해자로 살게 만든 아버지에게 사과를 요구한다. 가부장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세자매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편을 들지만 아직 가부장제에 편입하지 않은 희숙의 딸 보미는 왜 어른들이 사과를 하지 않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식당에서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막내 남동생이 갑자기 나타나 난동을 부리는 데서 시작한 이 장면은 서로의 존재를 부정하려 하던 세자매가 합심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동시에 세대를 건넌 여성들이 피해자의 위치를 부정하고 일어서는 장면이기도 하다. 각기 나름의 가정에서 어머니의 위치를 가지고 가부장제의 또 다른 피해자로 살아오던 여성들은 순간이나마 어머니라는 지위를 거절하고 보호받고 사랑받는 자식으로서의 위치를 돌려받을 것을 주장한다. 희숙은 동생들을 대신해 폭력의 제물이 되었던 전사였으며 미연은 막내동생을 보호하려 집 밖으로 도망나왔던 보호자였고 미옥은 이 상황을 타개하고자 자신의 개성을 강하게 표출해왔던 예술가였다. 세자매가 서로를 피해자로서 연대하는 동시에 수직적인 가족관계에 맞서 사과를 요구하는 이 장면은 세자매가 단순히 가족이 아니라 같은 피해를 공유한 동료임을 자각하는 순간이다.
그리고 이 장면을 지나 서로가 서로의 기댈 곳이 되어줄 것을 확인한 세자매는 삶을 향해 한 걸음 내딛는다. 희숙은 암을 방치하는 대신 꾸준히 치료받을 것을 약속하고 미연은 별거한 남편을 무시하고 아이들과 행복하게 살 것을 다짐하며 미옥은 미숙하지만 엄마의 역할을 해내기로 마음먹는다. 희숙이 치료를 받는다고 해도 암이 치료될 것이라는 보장도 없고 미연이 남편없이 아이들을 잘 키울 수 있을지도 불분명하지만 타버린 반찬과 간이 안 맞는 국을 차린 미옥의 밥상처럼 이들의 삶은 불완전하지만 제 기능을 할 것이다. 한국 영화에서 그려지던 가족의 클리셰는 개성 강한 세 배우를 만나 흥미롭게 변주되었고 노랑장판이 아니라도 충분히 감동을 선사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또한 수많은 서사에서 엄마라는 역할을 강요받던 여배우들은 엄마를 넘어선 역할을 묘사해 보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세자매>는 가족중심적인 최루성 억지감동 서사를 고집하는 한국 영화계에서 보기드문 뒤틀린 가족영화지만 가족서사에서 여성서사를 추출하여 관객에게 신선한 서사를 선사했다. 이제 한국 영화계에서도 새로운 가족 서사를 기대할 수 있는 걸까?
* 이미지 출처: 네이버영화
* 본 콘텐츠는 브런치 레이 작가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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