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중학교 2학년이었던 은희에게 한문학원 영지 선생님이 묻는다. "뭘 좋아해요?" 은희는 주춤거리며 만화 그리는 걸 좋아한다고 말한다.
2019년, 은희 나이의 두 배도 넘은 나도 같은 질문을 던져보았다. 나에게.
내 나이는 은희 나이의 두 배보다 큰 숫자가 되었다. 아직도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 헤매는 중이다. 영화와 책, 정도로 성글게 말해도 좋지만, 어떤 영화 어떤 책을 좋아하는지 콕 발견할 때마다 희열을 느끼니까. 올해는 작정하고 그런 해로 보내겠다 다짐했다. 풍성한 텍스트의 세계를 바지런히 산책한 2019년, 영화 딱 한 작품만 꼽으라면 나는 <벌새>를 고르겠다. 같은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하도 많아 별스러울 것도 없겠지만.
<벌새>는 은희라는 아이의 삶을 촘촘하게 담아냈다. SNS가 발달한 요즘은 좀 다르겠지만, 20세기 말의 보통 중학생이 사는 세상은 그렇게 넓지 않았다. 대치동에서 떡집을 하시는 부모님, "공부 못해서 강북까지 버스 타고 학교 다니는" 언니, 외고-서울대 코스를 밟으리란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오빠, 학원에서 같이 킥킥거리는 친구, 서툴고 어색한 애정 표현을 주고받는 남자친구. 조금씩 변주하면 수백 명을 비슷하게 찍어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으로, 은희는 그렇게 살고 있다.
언제나 거시적인 통계는 이런 식으로 우리를 속인다. 은희는 하나뿐이다. 수백 명은 고사하고 다섯 명뿐인 가족 중에서도, 아니 친구나 남자친구와의 일 대 일 관계에서조차 소홀하게 치부되는 때가 많지만 은희는 사실 하나뿐이다. 내가 여기 있다고, 나도 여기 있다고, 벌새 날갯짓처럼 은희는 계속해서 외친다. 바라보는 시선으로, 내리깐 시선으로, 꾹 다문 입술로, 참아낸 한숨으로, 그런 것들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열네 살의 삶에도 중요한 일은 쉴 새 없이 일어난다. 친구 지숙, 남자친구, 후배 유리, 오빠, 언니, 아빠, 엄마, 선생님...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리고 그 모든 상황 대부분이 은희를 그냥 지나칠 때, 은희의 앞에 따뜻한 우롱차를 한 잔 내어주고 은희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한문 선생님 영지가 있다.
은은한 미소를 지어주는 사람. 누구도 묻지 않는 질문을 은희에게 건네는 사람, 누구도 위로용으로는 부르지 않을 법한 노래를 부르는 사람. 반듯한 얼굴을 하고 일상을 사는 어른들에게도 자기 자신이 싫어지는 순간이 있음을 숨기지 않는 사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듯한 기분이 듦을 인정하고 손가락을 움직임으로써 그 상태를 벗어나는 법을 아는 사람.
그런 영지는 은희의 세상에 유일무이한 존재다. "미성년"의 "어린" "여자"를 둘러싼 세상은 일상 구석구석까지 폭력이 스며 있어, 영지 같은 존재는 흔치 않다. 어쩌면 여기에 '폭력'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게 과도해 보일지 모르겠다. <벌새>는 분명 <박화영>이나 <파수꾼>이 아니지만, 세상 모든 단어가 그렇듯 폭력이라는 말에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촘촘하게 들어있다. 하물며 90년대, 하고픈 말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이들이 지금보다 많던 시절이었다.
'날라리 색출'을 하겠다며 '날라리' 친구 이름을 써 내게 시키고 불도저 같은 구호를 외치게 하는 학교 선생님의 태도에서도, 선명한 외도의 흔적을 숨기지 못한 주제에 당당하게 밥상머리 훈계를 늘어놓는 아버지의 태도에서도, 그 뒤에서 괴롭게 머리를 쥐뜯는 것밖에 못하면서 동생에게는 폭력을 수시로 쏟아내는 오빠의 태도에서도, 언니 수희에게 무자비하게 쏟아지던 비난에서도... 폭력은 보인다. 일방적으로 비틀리고 상처 받는 사람이 분명 그곳에 있었다.
폭력은 기묘해서 저절로 흐른다. 각자를 죄고 있는 억압은 각자만 쥐고 흔드는 게 아니라 약자에게까지 흘러간다. 이야기를 비극으로 만드는, 겉으로 보이는 폭력뿐이 아니다. 일상 구석구석에 선연하게 녹아 있다. 하얀 커튼 휘날리는 부엌이며, 평범한 갈색 가구가 놓여 있는 거실, 화분이 있는 베란다... 복도식 아파트 1012호 구석구석에. 그건 마치 소파 밑의 유리 파편처럼 어딘가에 숨어 있다.
90년대를 섬세하게 담아낸 이 영화의 공간 배경은 정겨울 정도다. 금방이라도 행주가 마르는 것이 눈에 보일 듯한 부엌, 의자를 뺄 때 어떤 소리가 날지 알 것만 같은 은희의 방, 눈에 익은 교복... (나는 2000년대에 중학교를 다녔지만 은희와 똑같은 교복을 입었다. 그때 보면서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교복은 커서 보니 더 이상했다.) 그 평범한 공간마다 그토록 여상하게 폭력성은 묻어 있었다.
이 폭력성이 단순히 은희 오빠가 은희를 때렸기 때문만은 아니다. 무심한 듯한 엄마의 표정조차 은희를 할퀸다. 그런데 은희의 그런 마음을 아무도 알아주지 못한다. 폭력은 핏빛이 아니라 투명한 색이다. 그것도 물풀처럼 끈적하게 묻어나는 투명함이다. 이 잔잔한 일상 속의 폭력을 피부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메타메시지로 전해지는 폭력이 훨씬 더 깊고 진하게 멀리 간다는 것도.
지진을 예감하는 작은 새처럼 예민하게 피부로 그걸 감지하던 사람들. 선명했지만 너무나 공공연해서 아직 언어로 정의되지도 않았던 폭력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던 작은 벌새 같았던 이들. 그들은 맞설 수 없는 대신 그렇게 서로를 챙겼다. 아무도 자신을 중히 여겨주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 같기도 한 너를, 너 같기도 한 나를.
그 시절의 그 감정은 소설 <항구의 사랑>에도 나오듯 집단적이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관찰하고 기이하게 여겼음에도, 대부분이 그 마음을 소위 말하는 '퀴어'로 분류하지 않는다. 뉴스에서도 연구 논문에서도 '이반'이라는 한시적 용어로 담았고, 주변 어른들의 말로 통역하면 "다 한때야."일 것이다.
90년대 여중생 혹은 여고생들 사이에서 산발적으로 그러나 전국적으로 일어났다는 그러한 양상. 연구하는 이들은 아이돌-팬픽-이반이라는 '현상'들을 일직선으로 긋는다. 이 일직선 안에 사랑이라고 이름 붙는 감정이 있다면, 그 사랑은 섬이 아니었을까. 일상 속 폭력의 안전지대. 실은 내가 받고 싶었던 사랑을 줌으로써 서로를 철저히 이해하는 이들의 도피성. 그래서인지 이 사랑은 자아 의탁 정도가 유달리 높아 보인다.
사랑하는 대상에 나를 투사하는 마음은 어떤 사랑에서나 빠질 수 없겠지만, 어쩌면 이런 마음이야말로 벌새가 돌아갈 집이었는지 모른다.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은 House of Hummingbird, 벌새의 집이다.) 실제 벌새의 둥지는 아주 작고, 포식자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거미줄의 점성을 이용해 이끼와 잎으로 뒤덮는다고 한다.
변영주 감독의 강연집에서 읽은 말이 생각났다. 20대 때 그가 꽂혔던 말이 "여성성은 모든 약한 것들과의 연대"라고. 읽을 땐 '좋은데?' 하고 슥 지나간 말인데 이 영화를 보면서 그 말을 내 식대로 소화했다. 세밀하게 흔들리는 감정들을 무시하지 않고 눈여겨보고, 위로하기 위해 차 한 잔과 작은 음식들을 기꺼이 내어주고, 격려의 말을 건네는 것. 그렇게 서로 배려하고 챙기고 다독이며 함께하는 것. 변영주 감독이 꽂혔다는 말을 나는 그렇게 받아들였다. 그런 의미에서 벌새는 철저히 여성 서사다. 은희가 (유리와 지숙 또한 마찬가지로) 서투르게 그런 세상을 찾으며 조금씩 성장할 때, 이미 어른이 된 영지가 너그럽게 차를 내어주는 아름다운 성장의 서사.
아름다운 서사에도 예외는 없어서, 삶에는 죽음이 도도히 흐르고 있다. 그러나 호의적이지 않은 것들 사이로 호의적인 것들만이 흐르는 죽음을 역행한다. 연어가 옆구리 찢어지도록 강을 거스르듯. 그렇게 세상을 거스를 수 있다면, 묵묵히 바른 그런 사람 하나 곁에 있다면 나 무서울 것이 없겠다.
그러나 알고 있다. 그런 이들도 그저 시간의 강물에 몸을 내맡긴 또 한 마리 물고기와 같다는 걸. 영지와 은희에게 일어난 일은, 특수한 일인 동시에 사실 삶을 풍경으로 매일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걸. 차마 마침표 찍지 못한 끝이 어디선가 숭덩 나타나곤 한다는 걸.
우리가 살결을 맞대고 마음을 마주볼 수 있는 시간이 영구히 허락될 수는 없다는 걸. 그러니 우리가 기대봄직한 건 그저 친절한 타인이 되어, 팔딱이며 물방울을 폭죽처럼 튀기는 것뿐이라는 걸. 삶의 한 순간을 들여, 그 순간을 서로에게 축제가 되게 할 뿐이라는 걸. 순간에 거하면서도 그 순간을 영원에 가 닿게 하는 방법은 오직 누군가의 마음에 아로새겨지는 것뿐이라는 걸.
은희는 친절한 타인을 만나면서 죽음을 거슬러보았다. 맞고 있지만 않았다. 맞서 싸웠다. 혹을 떼냈다. 병원에서 새하얀 햇살 아래 친절한 아주머니들이 예쁘다 안쓰럽다 말하며 놓아주는 반찬을 먹었다. 끝내 마지막에 감자전을 허겁지겁 씹어먹는 은희를 예리한 눈으로 들여다보는 엄마가 있었다. 딸에게 무슨 일인가 일어났음을 감지하는 엄마의 눈. 실은 마찬가지로 한 마리 벌새였던 엄마의 눈.
그러니 은희는 무사할 것이다. 무사히 자라 어른이 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과거의 자신을 떠오르게 하는 누군가를 만나면 그에게 차를 가만 놓아줄지 모른다. 철근이 엿가락처럼 휘어지고 끊어진 어느 갑작스러웠던 날, 마침표 없이 끝나버린 어떤 이의 문장을 떠올릴지 모른다. 언젠가 제 인생도 빛이 날까요, 묻던 그의 날갯짓에선 이미 빛이 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