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st2021-02-18 00:00:00
배우 도경수,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의 주연 발탁!
출처: SM 엔터테인먼트
국내에서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의 리메이크 작품 제작을 확정지으며 많은 국내 팬들의 관심과 환호를 받고 있다.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은 지난 2008년 개봉한 동명의 대만 영화를 리메이크하는 작품으로 피아노 천재인 전학생이 오래된 연습실에서 신비스러운 음악을 연주하던 여학생을 만나면서 시작되는 판타지 로맨스 영화다. 개봉 당시 시공간을 초월한 풋풋한 첫사랑과 감미로운 클래식 음악이 잘 어우러졌다는 평가를 받으며 ‘레전드 청춘멜로’로 지금까지도 관객들의 찬사를 받고 있다.
한국에서 새롭게 리메이크되는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에서 도경수는 원작에서 주걸륜이 맡았던 남자주인공 역할을 맡는다. 드라마 <백일의 낭군님>, 영화 <스윙키즈> <신과 함께> <형> 등에 출연해 스펙트럼 넒은 연기를 인정받으며 배우로서의 존재감을 공고히 한 도경수는 <말할 수 없는 비밀>을 통해 한층 깊어진 눈빛과 감성 연기를 선보일 예정이다. 도경수와 호흡을 맞출 여자 주인공 역은 추후 오디션을 통해 캐스팅할 계획이다.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은 <내부자들> <남산의 부장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등 굵직한 작품들을 선보여온 하이브미디어코프가 제작하며, 연출은 허진호 감독의 <행복>과 <외출>을 비롯해 <열정같은 소리하고 있네> 등의 각본을 집필하고, 개봉 예정인 서예지와 김강우 주연의 <내일의 기억>으로 데뷔한 서유민 감독이 맡았다.
강렬한 피아노 씬과 첫사랑의 대명사로 잘 알려진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
음악적으로도 인정을 받고 있는 도경수 배우가 보여줄 강렬한 피아노씬을 기대하며, 과연 한국에서는 어떤 새로운 모습으로 풋풋한 첫사랑을 그려나가고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을지 앞으로의 행보가 주목된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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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넷 - 더 탐닉하거나 도망치거나. 선택은 당신의 몫
코로나로 인해 많은 영화가 개봉을 연기하거나 위험을 무릅쓰고 개봉을 강행하는 경우로 나뉘어졌다. 개봉을 강행하는 경우는 대부분 저예산이나 독립 영화였는데, 블록버스터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개봉을 강행한 영화가 있었다. 바로 크리스토퍼 놀란의 '테넷'이다. 감독의 전작들의 평과 흥행에 과연 코로나 시국에도 흥행을 할 수 있을까, 극장가를 살릴 구원자가 될 것 인가 라는 의견들이 나왔지만, 안타깝게도 그러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테넷이 의미 없는 영화는 절대 아니다. 흥행과 평가는 별개이기에, 테넷 또한 감독의 전작들과 함께 주목할만한 영화이다.
필자는 이 영화를 유료 시사회로 개봉 전에 관람했는데, 당시에 영화가 어렵다는 평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영화에서 나오는 주요 용어들에 대해 개념을 숙지하고 관람을 하러 갔으나, 결국 영화에게 패배했다. 여기에서의 패배란, 이해를 못 했다는 것이다. 분명 초반부까지는 문제가 없는데, 중반부부터 난이도가 갑작스럽게 상승한다. 비유를 들어보자면, 수학 문제를 푸는데 처음에는 기초 맛보기 문제 한 두문제 설명하다가 갑자기 블랙라벨 몇권을 통째로 갖고와서 무작정 설명하는 느낌이랄까. 예고편에서 중심적으로 보여주는 인버전이라는 개념 자체는 어려울 것이 없다. 다만 그것이 응용되면서 어려워지는 것이다. 여기에서 관객은 둘로 나뉘어 질 것이다. 더 파고들어 테넷을 탐닉하거나, 아니면 포기하고 도망치거나.
테넷은 일반적인 블록버스터 영화랑은 다르다. 통상적인 블록버스터 영화는 많은 관객들을 포용해야 하기에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직관적인 서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테넷은 그렇지 않다. 영화를 본 관객이 테넷 관계자이거나 천재가 아닌 이상 첫관람에 완벽한 이해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처음봤는데 다 이해했다고 하는 사람은 천재거나,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흥미로운 점은 영화를 재관람함으로서 이해하는 재미, 공부하는 재미가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맞춰지지 않는 퍼즐이, 다시 볼 수록 테넷이라는 이름의 퍼즐이 맞춰지는 쾌감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특성은 일반적인 블록버스터 영화에서는 찾아보기 매우 힘든 특성이기에, 대부분의 관객들은 둘로 나뉘어지는 것이다. 탐닉하는 자는 영화를 다가가기를 원하는 이들이고 도망치는 자는 영화가 다가오기를 바라는 이들일 것이다.
영화 평론가들은 관객이 다가가는 영화를 통해 진보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나도 그것을 동의하는 이들중 한 명이지만), 그렇다고 다가오기를 바라는 이들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영화란 보편적인 잣대도 존재하지만, 취향으로 갈리는 영역임은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렇게 둘로 나눠지기에, 테넷은 더더욱 호불호가 갈릴 것이다. 탐닉한자와 포기한자, 두 그룹의 대조. 다만 확실한 것은 이번 영화도 역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만든 영화들 답게 본인만의 '매력'을 가지고 있으며, 문제는 이번의 '매력'을 탐닉하는 자와 쟁취하지 않는 자로 나뉨으로서 호불호가 갈릴 것이라는 것이다. 또 확실한 것은 이렇게 갈리기는 하지만, 영화를 안 본 사람들이 한번 봐볼까? 라는 생각이 들만큼 확실하게, 또 강력하게 매혹한다는 것이다. 어딘가 모를 은밀한 유혹.
*이 글은 원글 없이 새로 작성된 글이며, 출처란에는 작성자의 인스타그램 주소를 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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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탑건 2> 만큼 재미있고 <헤어질 결심>처럼 진하게
"작가님, 수고하셨습니다!" 유명 아나운서가 나에게 인사를 한다. "작가님 준비 많이 해오셨어요? 1시간 녹화가 20분이 걸렸네요? 늘 느끼는 거지만 진짜 영잘알이세요." 내가 대답한다. "아, 아닙니다. 그냥 무식하게 시간만 보냈던 것뿐인데요." 대답하자 휴대전화에 카톡 몇 개가 온다. 어느 날에 어떤 영화가 개봉한다는 누군가의 말이다. 어? '어느 날'에 개봉한다고? 구체적으로 정해진 게 아니라? 별 것 아니겠거니 싶어서 그냥 넘어간다. 습관적으로 휴대전화를 켜 조회수를 확인해본다. 정말 감사하게도 2만이 찍힌다. 언제부턴가 바라왔던 순간이 현실로 이뤄지고 있었다. 다만 그게 몇 개월째 내내 반복되고 있다는 건 너무나도 감사한 일이다. 프로그램 담당 작가가 나에게 말을 했다. "작가님! 출연료는 다음 주에 입금될 거예요. 금액은 얼마입니다!" 엥? 출연료가 '얼마'라고? 무슨 소리야? 내가 대답한다. "그 얼마가 어느 정도 될까요?" 작가가 대답한다. "그 금액은..."
라는 꿈을 꾸었다. 그럴 리가 없지. 가끔 언제까지 이 글을 쓰는 일에 재미를 붙일 수 있을까 생각한다. 내가 멋있다고 생각하는 몇몇 분들의 의견에 편승해서 쓰는 글이 아닌, 내 생각을 오롯이 내 마음대로 표현하는 그런 일이다. 나 자신이 '이 정도면 그래도 글 쓰는 사람이라 부를 수 있지' 싶은 것들은 이미 얻었지만 내가 원하는 건 저 멀리 있었다. 이 영화를 보고 자서 그런 꿈을 꿨던 걸까? 어느 멀티버스 중 하나에는 내가 작가로 명성을 많이 얻은 세계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게 이름이 알려지면 내 안에 있는 어떤 문제들은 해결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런 나(우리)에게 알파버스의 웨이먼드가 느닷없이 나타나 "아니야"라고 답한다. 준비물은 없다. 단지 모든 것을 모든 곳에서 받아들일 태도만 있으면 된다. 올해 개봉작 중 또 다른 마스터피스가 등장했다. 에블린과 함께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라는 멀티버스 속으로 떠나보자.
빈 세탁기처럼 돌아가는 일상
분명히 해야 할 일이 벌어야 할 돈 말고 뭐가 있었는데 말이다. 미국으로 이민 와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는 에블린은 일상에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홍콩에서 태어난 에블린. 첫사랑이었던 웨이먼드의 설득에 넘어가 타지 생활 중이었다. 잘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쉽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실패만 지속했던 그녀. 어느새 정신 차려보니 지금 현재다. 짜증이 나는 오늘. 남편 웨이먼드는 착할지 몰라도 무능력한 사람이었다. 딸 조이는 틱틱대는 일이 많았다. 아버지 공공은 아무도 돌볼 사람이 없어서 에블린과 함께 살고 있다. 쌓여가는 빨래물처럼 풀지 못했던 마음속 응어리가 점점 더 높아져간다. 이런 에블린의 일상은 점점 더 그녀를 괴롭하는 중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어느 날. 평소처럼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는데 남편 웨이먼드는 타향살이를 시작한 보람도 없이 갑자기 이혼 서류를 들이밀었다. 딸 조이는 여자친구를 데려와 가족들에게 인정받으려고 하고 있었다. 정말 진절머리가 나는 일상이다. 그런데 세상이 이런 에블린을 딱히 봐주지는 않았다. 국세청은 에블린의 세탁소에 세무조사를 예고했다. 영수증 속에 쌓여있는 에블린. 영업정지와 생계유지의 한가운데 있기 때문에 신경이 예민하다. 이 빈 차를 타고 국세청이 아니라 다른 우주로 날아가면 좋으련만. 세상은 야속하게도 에블린의 일상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다.
한숨이 가득한 얼굴. 에블린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남편 웨이먼드와 같이 있었던 에블린. 멍하니 있던 와중이었다. 갑자기 남편 웨이먼드의 눈빛이 변한다. "여보. 잘 들어. 지금 당신은 위험해. 난 다른 우주에서 왔어. 이유는 묻지 말고 내가 적어 준 쪽지대로 해." 뭔 뚱딴지 같은 소리야? 안 그래도 나사가 좀 빠져 있는 것 같은 웨이먼드. 마침내 미쳐버린 것인가? 에블린은 어리둥절한다. 금세 에블린의 귀에 이어폰을 꽂아주는 웨이먼드. 갑자기 영혼이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다양한 우주 속의 에블린. 에블린은 당황한다. 웨이먼드는 이내 자기를 소개한다. 자기는 다른 우주에서 온 알파 웨이먼드이며, 지금 세계가 굉장히 위험하다는 말을 전한다. 마냥 헛소리로 치부하기엔 이어폰을 꽂고 겪었던 경험 때문에 안 믿기도 어렵다. 이 색다른 경험 덕에 국세청 직원 디어드리 앞에서도 멍 때리는 시간이 많아지는 에블린. 에블린은 디어드리 앞에서 웨이먼드가 전한 지시사항을 수행한다. 지시사항은 그냥 헛소리가 아니었다. 다른 차원으로 넘어간 에블린. 그 다른 차원에서 에블린과 웨이먼드는 조우한다. 알파 웨이먼드는 에블린에게 세상이 왜 위기에 처했는지를 말한다. 그것은 바로 조부 투파키가 멀티버스를 싸돌아다니며 세계를 파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모든 운명의 조부 투파키는 온갖 세계의 에블린을 살해하고 있었다. 꿈꾸는 소리가 아니다. 에블린 눈앞에 벌어진 상황은 전부 다 사실이었다. 그녀는 조부 투파키를 제지해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
강력하고 빠르게
이 영화,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엄청 정신없다. 일단 핵심 키워드가 너무 많다. 가장 우선은 코미디. 두 번째는 액션. 세 번째는 가족 드라마. 네 번째는 오마주. 다섯 번째는 멀티버스 구현이다. 키워드만 다섯 가지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후반부까지 영화를 보다 보면 이 영화가 운명에 관한 작품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영화는 이런 키워드를 1분 1초가 아까울 정도로 사정없이 다 때려 박는다. 이렇기 때문에 아마 이 영화를 본 많은 분들이 ‘정신없다’라는 것에 동의하실 것이다. 단기간에 많은 정보를 쑤셔놓는 것은 도박이다. 일례로 <프렌치 디스패치>를 많은 분들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 영화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대사가 쉴 틈 없이 쏟아지지만 감독 웨스 앤더슨은 이런저런 설정을 무리 없이 이해한다. 특유의 섬세한 미장센을 중심으로 대사를 받아들여도 이야기 전개에 큰 무리가 없기 때문이다. 반대의 측면도 있다. 바로 <외계+인> 1부다. 현재의 MCU는 많은 영화들로 이뤄져 있다. 글쓴이는 다른 글에서 최동훈 감독이 마블의 영화들이 쌓아놓은 빌드업을 너무 쉽게 바라본 것이 아닌가라는 의견을 냈다. 이를 보여주듯 너무 많은 떡밥이 있는 <외계+인>. 산만한 줄거리 때문에 호평보단 혹평을 많이 받았다.
이 영화는 확실히 전자다. 이 영화가 이해가 어려운 영화는 아니다. 이 영화의 많은 요소들은 단적으로만 휙 쓰이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경우는 영화를 이해시키기 위해서도 쓰이고, 또 주제적인 측면과도 이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정보가 산발적으로 와다다 쏟아지긴 해도 영화를 보는데 큰 무리가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 대신 중반부로 흘러가는 이야기를 집중할 필요는 있다. 영화에서 원형의 이미지는 굉장히 중요하다. 이 원형의 에너지가 어떤 이유로 중요한가?라는 것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소재 중 하나일 것이다. 이때 설명이 후반부에 반복되긴 하지만 대충 보면 중반부에서 이를 놓치기 쉬울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글쓴이는 이 영화를 보지 않은 관객분들이 무언가를 마시지 않은 채로 보는 것을 추천한다. 영화 중간에 화장실을 간다? 그럼 영화의 재미가 급전직하하는 단점이 느껴질 수도 있다. <프렌치 디스패치>가 섬세한 방식으로 영화의 이해를 도운 것과 유사하게 이 영화는 광기의 에너지로 관객을 밀어붙이는 것이다.
가장 강력한 강점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영화는 다방면으로 강점을 가진 영화다. 일단 기본적으로 시각적인 쾌감이 엄청나다. 이 쾌감 중 하나는 액션이다. 전체적으로 액션의 비중이 가장 높은 인물은 주연 양자경이다. 우선 양자경이 그동안의 필모그래피에서 액션 연기를 펼치는 역할을 많이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과거의 상영작들을 찾아봤을 때 여러모로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영화도 있다. 바로 <와호장룡>이다. 장첸, 주윤발, 장쯔이, 양자경이 출연한 이 영화. 웅장한 맨몸액션이 많은 이들에 기억에 남았다. 영화는 이 시절의 홍콩영화를 재현하듯 화려한 맨몸액션을 선보인다. 일단 양자경의 액션 연기는 정말 대단하다. 극에서 일대 다수의 연기를 펼치는 부분이 있다. 템포가 굉장히 빠르고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수직적 운동능력을 선명하게 잘 드러낸다. 이는 연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 에블린의 액션 신에서 싸움을 잘하는 에블린이 되는 계기가 있다. 영화는 이 에블린이 왜 쿵후의 달인이 될 수밖에 없는지 잠깐 보여주고 이를 편집술로 보여준다. 이는 편집 능력과 시너지가 있어서 관객으로 하여금 보는 재미를 선사한다. 구체적으로 상대방과의 액션 주고받기와 이 능력이 구현되기 위한 전제가 엇나가듯이 편집되며 시각적 쾌감을 선사하는 것이다. 이는 멀티버스라는 키워드를 관객들에게 설득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우리가 아는 지식 안에서 멀티버스란 것은 없다. 심지어 이 멀티버스의 묘사가 이 영화처럼 이뤄진다면 좀 허무맹랑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글쓴이는 이를 관객들에게 경제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액션을 삽입했다고 생각한다. 상황 자체를 많이 만들어서 그 룰대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만든 것이다. 그럼 이야기에 통일성이 생긴다. 이런 토대의 튼튼함은 영화의 설득력으로 이어진다. ‘아. 그래서 그렇구나’라는 이해가 용이해지는 것이다. 이렇게 에블린의 액션은 단적으로 시각적인 쾌감만을 전하려고 제시되지 않았다.
또 웨이먼드 역을 맡은 조너던 키 콴의 액션 연기도 굉장하다. 이 웨이먼드 캐릭터가 맡은 역할의 액션 신은 비교적 초반부에 나온다. 어떤 행동을 하고 전투를 시작하는 웨이먼드. 이때 매고 있던 가방을 휘리릭 흔들며 전투태세에 돌입한다. 엥? 이거 어디서 봤는데? 갑자기 성룡이 생각난다. 역시 이 웨이먼드의 액션신에서 무언가를 오마주하고 있다. 바로 성룡의 쌍절곤 액션이다. 이는 그냥 얻어걸린 효과가 아닌 듯하다. 배우 조너던 키 쿠안이 성룡을 닮기도 했다. 또 원래 주인공을 양자경이 아닌 성룡을 계획했다는 걸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아무튼 이 액션은 영화의 가장 첫 번째 액션 시퀀스이기도 하다. 가방 끈을 쌍절곤 쓰듯이 두들겨 패는 웨이먼드. 극초반부에 유약한 모습만 제시됐던 이 캐릭터이기 때문에 이런 액션 신이 대비되는 느낌이 있다. 이는 앞에서 쓴 문단과 비슷한 맥락에서 좋은 효과를 낸다. 이 역시 멀티버스에 대한 설명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반대 측면에서도 기능한다. 영화를 끝까지 보다 보면 이런 멀티버스를 통한 액션신이 웨이먼드라는 인물의 통일성을 보여주고 있다고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영화의 연출이 멀티버스라는 모티브를 단순히 설정으로만 쓴 게 아니라 주제적인 측면과도 이어지게 설정했다. 똑똑한 연출의 힘이었다. 아, 이 두 주인공을 빼고 다른 액션 연기를 보여주는 인물들도 있다. 이 인물들의 액션도 잘 뽑았다.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나서 강렬하게 기억에 남을 것이라 생각한다. 진짜 웃긴다. 이런 생각을 하는게 정말 또라이같다.
타율 높은 코미디
또 이 영화는 정말 웃긴 코미디 영화이기도 하다. 이 영화가 코미디로서 사용했던 소재는 두 가지다. 멀티버스를 통해 다중우주를 보여줬던 시각화와 영화의 핵심 아이디어다. 우선 이 영화가 장르적인 특성이 아닌 선에서 뽑을 수 있는 강점은 설득력이라고 생각한다. 에블린이 각각의 우주 속에 한 명씩은 있을 테니 각자가 온갖 직업을 다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럼 이 직업인으로서의 광경 묘사에 있어서 구체적이지 않은 부분이 없다. 이 꼼꼼함 묘사가 ‘각종 직업의 에블린’에서 굉장히 강력한 코미디가 작동한다. (영화에 나오지는 않지만) 만약 글을 쓰는 에블린이 있다고 해보자. 그럼 글을 쓰는 특징 중 하나를 뽑아 영화에서 어떤 원동력으로 사용한다. 또 그림을 그리는 에블린이 있다고 해보자. 그럼 그림을 그릴 때 자기의 내면세계를 섬세하게 그려야 하기 때문에 감성적으로 풍부한 사람이 유리할 것이다. 영화는 탄탄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왜 멀티버스의 에블린이 필요한지를 빼먹지 않았다. 영화의 설정을 단단히 하는 연출이 코미디 소스로도 작용하는 것이다. 이렇게 직업인으로서의 에블린을 가지고 코미디를 만들 때 절대 잊히지 않는 시퀀스가 있다. 바로 어떤 영화를 차용하는 것이다. 이 영화가 어떤 작품이고, 어떤 식으로 차용했는지를 쓰면 강력한 스포일러가 될 것이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서술할 수는 없다. 그러나 본 영화의 리뷰를 하는 것을 하는 사람이 이 부분을 언급하지 않으면 왠지 직무유기처럼 느껴진다; 또 어떤 멀티버스 중에서 우리가 아는 인간의 물리법칙 외의 것도 있다. 이 부분 역시 골 때리게 잘 설정했다. 쓸데없이 상상력이 고퀄리티라서 놀랐다.
그리고 아마 영화에서 정말 중요한 아이디어가 됐을 키워드 ‘전환’이다. 영화의 메인 세계관은 주인공 에블린이 이끄는 시간대다. 그럼 다중우주 사이를 연결하는 매개체가 있어야 한다. 여기서 코미디 요소를 하나씩 추가한다. 제일 첫 번째 전환 방식은 적당히 상식 선에서 상황에 안 맞는다. 그런데 이 이후부터의 이야기는 생각하는 수위를 전부 뛰어넘는다. 단 하나 빼고 전부 예상외로 흘러갔다(그리고 이 ‘예상대로 간 코미디’도 정말 웃긴다). 당연히 이렇게 전형성을 탈피한 방식에 대해 구체적으로 다 말하면 재미가 없어진다. 이런 이유로 구체적인 소재가 뭐였는지는 쓰기 어렵다. 단지 분명한 것은 하나하나 다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전개하기 때문에 관객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을 것이다. 난 배우들이 제일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얼마나 웃겼을까? 자기들도 엄청 웃었을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저비용 고효율의 코미디 요소로 사용하는 전환이지만 이것도 단지 웃기려고만 넣은 것은 아니다. 후술하겠지만 이 작품에서 전환이라는 키워드는 영화의 다양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지점이 있다. 우리는 (글쓴이 포함) 보통 세상 사람들을 판단하는 게 쉽다. 왜 저 사람은 저러고 있을까? 에 대해서 각자의 답을 내놓는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세상에만 살고 있기 때문에 단면적인 모습만 볼 수밖에 없다. 영화는 이 판단의 오류를 꼬집는다.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색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에 신선하다고 느낄 관객 분들이 많을 것 같다.
다양성에 관해
영화에서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설정이 있다. 바로 딸 조이의 퀴어 설정이다. 다양성은 우리 문화예술 매체에서 참 피곤한 소재다. 이른바 PC라고 불리는 이 것은 들어가기만 하면 왓챠피디아에서 투기장이 열린다. 피곤하다. 혹자는 ‘PC 묻었네’라고 영화나 드라마의 가치를 깎아내리기도 한다. 억지로 이런 코드를 집어넣었기 때문에 극의 흐름을 깨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음 한 편으로는 그런 생각을 해 본다. 멀티버스 안의 수많은 세상이 있다고 해보자. 거기에는 아시아 인이라는 인종이 아예 없다. 무조건 백인만 있는 우주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화양연화>를 볼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헤어질 결심> 역시 마찬가지다. <공조 : 인터내셔날>에서 사람들이 행복하게 웃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을까? 아닐 것이다. 이는 문화예술매체의 다양성에만 국한 짓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 영화에서 웨이먼드 역을 맡은 키 호이 콴이라는 배우는 경력이 중간에 끊겼었다. 유년시절 아역으로 이름을 날리던 이 사람은 아시아인 역 빼고는 아무것도 맡을 수 없다는 제약 때문에 배우로서의 커리어가 끊겼었다. 할리우드라는 큰 판에 단지 인종이라는 이유로 주류에 끼지 못한다는 것, 아니 낄 기회조차 없다는 것은 많이 불공평한 일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 ‘PC’라는 것이 무조건 예술을 해친다고 볼 수 있을까? 글쓴이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다. 단지 레즈비언이란 이유로 가족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과연 어떤 문제가 있어서 그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 걸까? 그 사람도 인간일 뿐인데. 역시 이런 측면에서도 이 사람들이 이런 대우를 받으라는 법은 없는 셈이다. 이 지점에서 이 PC라는 ‘정치적 올바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또 우리가 소수자들에게 좀 더 친절하고 따뜻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윽박지르는 선 끝난다면 우리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알고 보면 그 사람의 우주를 전부 들여다봐야 하는 일인데도 말이다.
당신의 운명을 사랑할 수 있나요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살아온 인생에 관해 생각하는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글을 더 많이 써왔으면 어땠을까. 공부를 열심히 해 좋은 학교에 들어가면 어땠을까. 막연한 질문은 끝이 없다. 이 질문은 나에게 또 다른 세상을 연다. 삶의 관문에서 막힐 때마다 이 지점으로 돌아와 나 자신에게 묻는다. 그때 왜 그렇게 하지 않았어? 되묻는다. 세상에. 내 운명이란 왜 이따위란 말인가. 지긋지긋한 멍청함 덕에 나 자신을 향해 한숨을 내뱉는다. 이 한숨은 다른 사람에게 향한다. 왠지 잔소리를 하고 싶어 진다. 에블린처럼.
하지만 그런 이들에게 잊히고 있는 부분이 있다. 바로 지금 현재의 우리도 각자가 생각했던 어느 순간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비단 글쓴이만 해도 그렇다. 지금 여기서 글을 쓰고 있는 순간도 어렸을 때의 내가 바라왔던 모습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아직도 미련이 남는 지점이 있다. ‘그러면 안 됐는데’라는 생각으로 긴 시간 동안 후회하며 보냈다. 막상 이 글을 쓴다고 해서 그런 미련이 완벽하게 사라질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런데 이미 알고 있다. 그 선택을 했던 평행세계의 나도 맞이해야 할 필연적인 사건이 있다는 것을. 단지 그 일을 그렇게 보냈다고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리는 없다. 가능성이란 그런 것이다. 더 이상 꿈꿀 수 있는 무언가가 있는 것. 어떤 선택을 하든 ‘통계적인 필연성’에 앞서 지금 없는 것에 가능성을 갖고 무언가를 바라는 것이 삶의 의미일지도 모른다. 영화는 이 가능성과 희망에 대해서 말한다. 아무 의미 없는 인형 눈알도, 세탁소에 찌들어 보내는 일상도, 밝게 웃는 딸의 웃음도 우리가 어떤 것을 꿈꿀 수 있는 개연성이 된다는 말과 함께 전한다. 모든 것을 모든 곳에서 경험할 수 있다고 하면 지금의 내가 느끼는 즐거움이 없었을 것이다. 인생은 그렇게 풀어야 하는 미스터리의 연속인 걸 너무 잘 아니까 우리는 영화를 보는 것 아니겠어?
메버릭의 박력을 멀티버스로
이렇게 다양한 키워드와 래퍼런스를 때려박은 이 영화. 앞에서도 썼듯 '이걸 다 머릿속에 주워 담아야 영화가 이해되는 거지?'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아니다. 영화는 이야기를 끌고 가는 인력이 어마어마하다. 일단 초반부 세탁소 시퀀스부터 BGM이 들어간다. 빠른 템포로 전개되는 이야기. 알파 웨이먼드가 에블린을 만나 이어폰을 꽂아주기까지 긴 설명을 하지 않는다. 바로 액션 삽입하고. 액션 중간에 코미디 요소도 있다. 다 짬뽕처럼 다 넣는다. 그 대신 이야기 전반적으로 멀티버스의 인물들마다 갖는 공통점이 무엇인가?를 중심으로 전개하기 때문에 이야기는 사실 간단하다. 후반부에 주인공 중 어떤 인물이 구체적으로 언급하기도 한다. 올해 5월에 <탑건 : 메버릭>이 개봉했다. 800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이때 많은 분들이 이 영화를 좋아했던 이유가 톰 크루즈를 위시로 한 힘찬 에너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비행기로 활주로를 활공하는 듯한 갈등 구성이 영화가 다이내믹하게 느껴졌던 주요 연출 방식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탑건 : 메버릭>만큼의 박력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이미지가 나오면, 바로 그다음 정반대의 무언가가 나온다. 또 그 정반대를 대칭 찍고 완벽히 반대 측면에 있는 무언가가 나온다. 또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화장법이나 의상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어디서 본 적 없는 헤어스타일을 따라와서 보여준다. 그런 이상한 코디법을 받쳐주는 미장센까지 영화는 소재 하나하나가 신선하기 때문에 딸려오는 힘찬 에너지로 2시간 20분 내로 질주한다. 이 영화가 상영관을 얼마만큼 받을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이 영화가 <탑건 : 메버릭>보다 훌륭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후반부의 하이라이트 신에서 볼 수 있는 뭉클함, 코미디 요소로만 국한 짓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탑건 : 메버릭>이 이뤘던 성취를 더 크게 돌며 이뤘다고 생각한다. 색다른 경험이다. 분명 스포일러를 없이 쓰는 것 같은데 쓸 내용이 계속해서 나오기 때문이다. 올해 말 <아바타 : 물의 길>이 개봉을 앞두고 있다. 극장가의 허리케인이 되어 많은 관객을 흡수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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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로움을 사랑이라고 착각하지 않기를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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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도시에서 대도시로, 더 큰 도시로 거처를 옮겨다녔다. 서울에는 고향을 떠나 온 수많은 '레이디 버드'들이 있다. 이들이 고향을 떠난 이유는 아마도 소도시에는 일자리가 많지 않아서이고, 일자리가 있다 하더라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 이유는 고향에 갔을 때 느끼는 갑갑함 때문일 테다. 나는 직장을 다니지 않지만 아마 다시 귀향하지는 않을 것 같다.
소도시 사람들은 건너건너 다 아는 사이이다. 내가 고등학교 때 야자를 째고 놀고 있는 모습을 누군가가 보고 우리 엄마한테 일러바쳤다는 걸 나는 몇 년 전에 알았다. 그러니까, 딴짓을 하지 못한다는 거다. 다른 사람들이랑 똑같이 살지 않으면 너무 튀어서 온 동네에 소문이 쫙 퍼진다는 거다.
아마 내가 고향에 있었으면 이런 소리를 들었을 게 뻔하다.
"그집 딸은 대학 나왔으면서 취직도 안 하고 시집도 안 가고 어쩌고 저쩌고."
그렇기에 수많은 아이들이 고향을 떠나 서울에 몰린다. 그 돈이면 고향에 집을 살(이제는 아니지만) 만큼의 돈을 내고 콩만한 방에서 해로운 음식을 먹으며 낯선 곳에서 살아간다. 돈을 벌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떠나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이따금은 가정을 벗어나기 위해 결혼을 택하는 여자 아이들도 있다. 내 가까운 친척도 그리하였다. 나는 같은 여자로서 그 아이의 삶이 너무 아깝고 아쉬웠는데, 그 생각 또한 근시안적이고 자기중심적이라는 걸 최근에야 알았다.
<위대한 개츠비>의 화자인 닉의 아버지의 말처럼,
"누군가를 비판하고 싶을 때는 이 점을 기억해두는 게 좋을 거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너처럼 유리한 입장에 서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기억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무튼 우리는 떠난다. 더 나아지고 싶기 때문이다. 내 고향사람들의 눈에 비친 내가 아니고 싶기 때문이다. 나의 할머니, 엄마, 이모, 고모, 숙모, 옆집 아주머니와는 다른 인생을 살아보고 싶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 존재들은 외로움에 직면한다. 가족도, 친구도 없는 곳에서 휘몰아치는 존재의 고독을 고작 이십대 초중반의 우리가 어찌 견뎌내겠는가. 그리하여 우리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하여 몇 가지 선택을 하게 되는데, 가장 쉽고 빠른 돌파구가 연애가 되겠으며 나와 몇몇 사람들처럼 술을 비롯한 중독에 빠지기도 쉽다. 한편으로는 연애도 중독이라 볼 수 있겠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연애에 중독된 예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사랑이 문제가 아니라 옆에 누가 없으면 못살겠어서, 혼자서 자기 자신을 직면하는 것이 두려워서, 못난 나를 바라보는 게 불편해서. 아주 쉽게 자존감을 채워주는 사람, 응당 나에 대해서 좋은 말을 해주고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같이 있어 주는 사람을 찾아 온 거리를 헤매는 것이다.
나는 그쪽보다는 감정과 생각을 마비시키는 편이 더 좋았으므로 술을 선택했겠지만 그것 역시 연애중독자들과 비슷한 맥락이다. 못난 나를 바라보고 나에 대해서 생각하고 싶지 않으니까.
<브루클린>의 주인공 에일리스 역시 아일랜드의 소도시에서 미국 브루클린으로 돈을 벌러 떠난 이십대 초반의 여성이다.
에일리스는 언니 로즈가 아는 신부님의 도움으로 미국에 간다. 아일랜드에서는 소매점에서 일주일에 두 시간 정도 아르바이트를 할 자리밖에 없다. 하지만 때는 1950년대, 기회의 땅 미국에는 일자리가 차고 넘친다.
에일리스를 태운 배는 몹시 흔들릴 예정이지만, 에일리스는 배를 타고 미국으로 가본 적이 없으니 아무것도 모른 채로 혼자서 저녁식사를 한다. 결과적으로는 속에 든 걸 다 게워내고 배에 탄 그 누구보다 심하게 멀미를 한다. 그때, 에일리스와 같은 호실을 쓰는 여자는 에일리스를 돌봐주고, 미국에 입국할 때의 자세를 알려주고, 옷차림을 고쳐준다.
에일리스는 아일랜드 여자들이 모여 사는 하숙집에서 살면서 미국 백화점에서 일하게 된다. 에일리스는 낯가림이 무척 심한데, 별안간 친절하고 다정한 점원이 된다. 이탈리아 출신 남자 토니와 연애를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남자는 몇 번 만나지도 않았는데 에일리스를 가족에게 소개시키고 싶어 하고, 가족을 소개하자 마자 결혼하고 싶어하고, 롱아일랜드에 땅을 사서 집을 짓고 같이 살고 싶어 한다. 공교롭게도 롱아일랜드는 <위대한 개츠비>의 배경이다.
에일리스는 백화점 점원보다는 언니 로즈처럼 회계를 공부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낮에는 백화점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간대학에 다니며 경리 자격증을 딴다. 모든 것이 완벽한 이때, 언니 로즈가 갑자기 죽는다. 영화에서는 병을 앓고 있었다고 하지만, 글쎄, 언니가 스스로 선택했을 가능성도 열어두어야 할 것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읜 한 집안의 장녀가 살아온 삶을 상상해보자. 열심히 돈 벌어서, 둘째 에일리스에게는 결혼하라고 여기저기 남자들과 연결하고 일부러 자리 만드는 동안 로즈의 애인에 대한 소식인 전혀 들리지 않는다. 자기가 미국에 가서 아메리칸드림을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동생을 보내고, 자기는 어머니를 봉양하는 삶. 어쩐지 기시감이 든다.
여러모로 아일랜드와 한국은 비슷한 궤를 가졌다. 섬나라의 식민지로 수탈을 당한 것도 그렇고, 독립 후 경제성장도 그렇고, 상황이 그렇다 보니 국민성도 비슷하다고 한다. 아직 아일랜드 사람을 만나보지 못해서 모르겠지만, K-장녀로서 I-장녀를 이해하는 게 어려울 것도 없다.
아무튼, 언니가 죽고 에일리스는 잠시 아일랜드로 돌아오는데, 아일랜드로 간다고 하니 토니가 자기랑 결혼을 하고 가란다. 혼인신고까지 마치고 가라는데, 에일리스는 또 그렇게 하겠단다.
아일랜드에 갔더니 가장 친한 친구가 남자 하나를 붙여준다. 부잣집 아들에다 외모도 미국 토니보다 훨씬 나은 상황에서 에일리스는 고민하는 눈치다. 게다가 언니의 후임으로 회계 일을 할 자리도 얻었다.
여기서, 예의 아르바이트하던 소매점 주인이 어디에서 건너건너 아는 사람으로부터 그녀가 미국에서 이탈리아계 성을 가진 남자랑 혼인신고 했다는 걸 안다고 약간의 협박을 한다. 그렇다. 그것이 작은 마을의 특징이다. 건너건너 건너면 바다 건너 소식까지 다 아는 것이다.
잠시 고향의 안락함에 젖었던 에일리스는 당장 짐을 싸서 미국으로 건너간다. 에일리스가 그랬던 것처럼 뉴욕으로 가는 배에는 갓 미국행 배를 타고 설레하는 어린 여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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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일리스가 토니와 사랑에 빠진 것이 과연 진짜 사랑이었을까. 에일리스는 미국으로 건너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토니를 만난 것도 겨우 몇 번에 불과하다. 혈혈단신으로 뉴욕에 와 보니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필요해진 것. 토니 역시 에일리스를 정말 사랑한다면 아일랜드에 갔다 올 때까지 기다려주면 되는 거였다. 굳이 혼인신고까지 해서 여자를 밧줄에 묶어둔 채로 보내준다는 생각은 너무나도 전근대적이다.
그러나 에일리스가 아일랜드 남자와 아일랜드에 정착하게 되면 에일리스의 삶은 어머니의, 할머니의, 옆집 아줌마의 삶과 똑같아진다. 이 세상이 전부인 줄로만 알고 살아가는 것. 에일리스는 더 큰 세상이 있다는 것을 이미 확인했다. 새로운 세상에서 에일리스는 자신만의 삶을 이끌어나갈 것이다.
나의 친구들, 친분은 없지만 내가 친구라고 생각하는 수많은 청년들이 자기만의 삶을 위해 집을 떠났다. 안락하고 평화롭고 안정적인 고향을 두고 머나먼 타지로 올라와 서러운 삶을 견딘다. 우리의 서러움은 반드시 외로움을 동반한다. 분명 사랑은 사람을 구원하지만, 사랑으로 구원받으려고 하지 말자. 정확히는 사랑도 아니면서 사랑인 척하는 것들을 경계하자.
끝내 에일리스가 토니와 혼인신고를 하지 않고, 성공한 커리어우먼으로 뉴욕을 활보하는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영화 너머에 시골에서 뉴욕으로, 지방에서 서울로 상경한 젊은이가 꿈을 이루면서 멋지게 살고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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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놈’과 노랠 부르며 마지막 춤을 출거야
베놈 업고 튀어
이 영화의 주인공은 도망자가 된 남자 에디 브룩(톰 하디)다. 카니지와의 결전 이후 오명을 쓰게 된 에디. 경찰 패트릭 멀리건을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 이제 도망만 가면 된다. 하지만 느닷없이 우주의 힘에 이끌려 다른 우주로 끌려갔다. 끌려간 곳은 아이언맨과 타노스가 결전을 벌이고 있던 멀티버스였다. 바텐더에게 이상한 소리를 한참 늘어놓던 에디. 그러던 도중 또 갑자기 원래 살고 있던 시간선으로 이동했다. 혼란스러운 에디와 브룩. 멕시코를 떠나 어디든 도망쳐야 한다는 건 에디나 베놈이나 같은 생각이었다. 본격적으로 도망갈 준비를 앞둔 에디와 베놈. 이런 에디와 베놈을 널(앤디 서키스)가 노린다.
MCU가 뭐죠
이 영화에서 두드러지는 가장 큰 장점은 마블 세계관에 의존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최근 마블과 관련된 슈퍼히어로 영화/드라마들이 가진 특징이 있다. 바로 세계관의 다음단계를 위한 발판이 됐다는 점이다. <앤트맨과 와스프 : 퀀텀매니아>가 가 그 예시였다. 전자 ‘앤트맨 3’ 같은 경우를 생각해 보면 앤트맨이 뭔가 이 MCU에서 대단한 역할을 할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왜? 이 영화에서 앤트맨이 슈퍼히어로로서 다음 스태프로 넘어간다는 장치가 별로 없다. 구체적으로 이 영화에는 정복자 캉이 얼마나 강한지, 또 앤트맨의 딸 캐시가 ‘영 어벤저스’로 활약할 거라는 암시만 있다. 앤트맨이 아버지 역할로서 노력한다는 건 사실 ‘앤트맨’ 1,2편과 어벤저스 시리즈만 봐도 알 수 있는데 3편에서 굳이 동어반복이 이뤄졌다.
이 <베놈 : 라스트 댄스>는 다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스파이더맨 세계관에 힌트를 굳이 얻지 않았다. 우선 첫 장면이 의미심장하다. <스파이더맨 : 노 웨이 홈> 쿠키에서 시작한다. 피터 파커(톰 홀랜드)의 주문이 잘못되며 온 우주의 빌런들이 MCU의 세계관으로 모여든다. 이 힘에 이끌린 에디와 베놈. 어떤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 바텐더와 타노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전작 <베놈 : 랫 데어 비 카니지>에서 ‘톰스파’와 관련된 장면이 있었기 때문에 이 쿠키영상과 연관 지으면 마블의 스파이더맨 세계관에 편승해 상업적으로 잘 팔릴만한 이야기 만드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본작 <베놈 : 라스트 댄스>는 이 MCU의 멀티버스 세계관을 전적으로 거부하며 시작한다. 초장부터 이 영화는 마블의 연속극이 아닌 에디와 베놈의 이야기를 쓰겠다고 선언하는 셈이다. 영화는 그 선언을 충실히 이행한다. 두 가지 측면에서 그렇다. 첫 번째는 에디가 인간이기 때문에 겪는 딜레마에 영화가 초점을 맞췄다는 것이고, 둘째는 베놈이 슈퍼히어로와 안티히어로 사이에서 인간다운 삶을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선택은 슈퍼히어로 영화를 기대한 관객들에겐 아쉽게 느껴지겠지만 글쓴이는 나름 이 3부작의 마무리를 위해 의도적으로 고른 선택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멀티버스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무의미했나? 글쓴이는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이 영화를 가로지르는 핵심 중 하나는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포스터에 있는 문장이다)다. 영화 안에서 온갖 고생을 다 겪는 에디와 베놈이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도 둘은 헤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영화 후반부에서 벌어지는 일에 드라마틱한 선택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고 역시 영화 후반부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인물에게 캐릭터의 당위성과 핍진성을 부여한다. 쉽게 말해서 이 인물은 멀티버스가 아니면 보여줄 수 있는 위력이 급감된다(심지어 원작 코믹스 상에서도 우주적인 존재로 묘사된다). 스파이더맨과 시니스터 식스의 ㅅ자도 안 꺼내고 멀티버스와 에디-베놈의 이야기를 마무리 지은 경제적인 선택이 된 것이다.
기대는 플롯
이 영화에서 가장 의아했던 점은 캐릭터다. 이 영화에는 한 가족이 나온다. 이 가족은 에디와 베놈의 사이드킥으로서 조력자가 된다. 슈퍼히어로에서 사이드킥이 등장하는 것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 인물이 등장하고 퇴장하는 방식은 영화의 또 다른 사이드킥 심비오트와 판이하게 차이가 난다는 점에서 아쉽게 느껴진다. 우선 이 영화에서 심비오트들이 등장하는 이유는 지극히 합리적이다. 근거를 <스파이더맨 : 노 웨이 홈>에서도 찾을 수 있고 전작에서도 찾을 수 있기 때문에. 그러나 이 영화에서 이 가족은 그냥 단지 우연처럼 만난다. 그리고 그 우연처럼 만나는 과정을 생각해 보면 작위적으로 볼 수 있는 건더기가 굉장히 많은 편이다. 이 인물(들)은 목적을 진작에 이룰 수도 있었다. 내지는 목적을 이루지 않더라도 이르게 퇴장하기에 충분했다. 영화는 작위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이 선택지만 절묘하게 다 빠져나간다. 아니면 이 가족이 극후반부 엔딩까지 뭔가 유효했나? 그렇지도 못하다. 그냥 단지 영화 안에서 에디가 스스로 탈출할 수 없는 위기와 관련한 인물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심지어 영화 안에서 에디의 내면을 강조하기 위해 템포가 늘어지는 발단이 되기도 하는데, 극 중에서 꼭 필요한 캐릭터 들인 건 사실이지만 감독의 연출력이 살리지 못했다는 점에서 아쉬운 지점이다.
또 이 영화에서 수가 얕다고 느껴지는 장면이 크게 두 가지 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카타르시스가 강하게 느껴지는 인물이 있다. 이 인물은 전적으로 슈퍼히어로물의 클리셰에 편승했다는 점에서 아쉽다. 이 인물이 후반부에서 감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이라는 것에는 여지가 없다. 하지만 굳이?라는 점에서 아쉽다. 사실 후반부에서 처지가 바뀌는 수많은 인물들처럼 묘사해도 영화 안에서는 큰 문제가 없다. 그리고 이 인물이 베놈이라는 캐릭터가 가진 특성을 그대로 보여주지도 못했다. 이 영화 3부작에서 베놈이 가진 핵심 테마는 ‘악인을 잡아먹는다’라는 점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이 테마에 닿지 못하고 그냥 캐릭터가 각성하는 여지만 주고 끝난다. 이런 옅은 연출이라면 사실 굳이 ‘베놈’이 아니어도 된다. 캡틴 아메리카 혈청과 차이점이 없다. 이유와 계기를 생략하고 단지 옆에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히어로물의 특성을 부여하려니 붕 뜨는 것이다.
섹시하지 못한 히어로
글쓴이가 생각했을 때 이 베놈의 가장 큰 장점은 기괴함이라고 생각한다. 기괴함이라고 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일반적이지 않아야 도드라지는 시각적 특성이다. 심지어 베놈이 하는 짓도 기괴하다. 빌런의 ‘목을 잡아먹는다’가 핵심이다. 두 설정. 시각적으로 기괴하고 악인의 목을 잡아먹는다는 설정은 캐릭터의 비주얼과 표현 수위에 있어 잘 어울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럼 그 시각적으로 강렬한 캐릭터를 강조하기 위해서 템포가 더 빠른다던가 괴이한 비주얼을 보여준다던가 하는 식의 연출이 필요하다(‘데드풀’처럼). 이 시리즈는 베놈의 기괴하고 난폭한 캐릭터성을 뒷받침할 시각적 연출을 보여주기는 한다. 대표적으로 예고에서도 나오는 장면이 있다. 에디와 베놈이 말을 타고 질주하는 장면이다. 말의 질주와 검은색으로 색감을 묘사하며 마치 오토바이를 타는 것 같은 장면을 멋지게 표현했다. 후반부에서 빌런과 싸우는 캐릭터들의 모습도 베놈의 특성을 잘 살린 멋진 장면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심비오트가 히어로의 개성을 살리는 방식으로 연출됐는지는 미지수다. 대표적으로 영화 후반부에서 심비오트들이 등장하는 방식을 보면 ‘엑스맨’ 시리즈의 뮤턴트들과 차이점이 별로 없어 보인다. 그 이유는 이 영화에서 베놈과 심비오트들이 왜 악하거나 왜 선한지에 대한 고찰이 없다. 남들이랑 다른 외계인이니까 사람들이 배척하는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베놈이 ‘악인의 목을 잡아먹는다’라는 자경단 설정도 그렇게 효과적으로 살리지 못한다. 가령 ‘데어데블’을 보면 변호사 맷 머독과 슈퍼히어로 데어데블 사이에서 정체성을 고민하는 듯한 연출이 자주 등장한다. 드라마의 톤도 전적으로 어두워서 폭력적인 내면과 선한 변호사라는 가치가 충돌한다는 점을 묘사하기에도 충분하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의 베놈은 원초적으로 욕망에만 이끌리는 캐릭터다. 에디가 이 욕망을 핸들링하는 인물이긴 하지만 이 인물의 내면이 평범한 사람인 것만 두드러지고 나머지는 생략됐다는 점이 아쉽다.
영화 안에서 베놈을 둘러싼 세상도 깊이가 얕다는 점이 아쉽다. 물론 이 영화에서 인물들은 나름 현실감이 있다. 특히 위에서 쓴 가족들을 보면 캐릭터의 설정 자체는 아주 설득력 있게 디테일하다. 하지만 이 설득력이 이 영화의 개성을 살리는데 유효한 디테일이었는지는 미지수다. 왜? 영화가 지나치게 설명하려 하는 느낌이 강하니까. 이렇게 자경단을 다뤘던 드라마/영화들은 이 세계관을 깊게 설명하지 않는다. 메인빌런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거 자기가 입으로 설명하는 멋없다. ‘데어데블’ 시리즈도 킹핀이 얼마나 나쁜 놈인지 구구절절 설명 안 한다. 그냥 자연스럽게 이야기의 힘으로 캐릭터를 설명한다. 하다못해 올해 개봉한 <베테랑 2>도 해치를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그냥 해치의 연쇄살인을 통해 보여준다. 하지만 본작 <베놈 : 라스트 댄스>는 한껏 설명하기 바쁘다. 이 설명을 한 번 하면 몰라. 여러 번 반복한다. 이렇게 무의미하게 친절한 영화의 태도가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소니가 어떤 기준으로 영화를 만들고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든다. <모비우스>가 어색한 캐릭터성으로 낡은 전개를 보여줬던 걸 생각하면 본 작의 단점 역시 이런 특징을 있는 듯 보인다.
예의를 갖추다
글쓴이의 총평은 ‘나름 예의를 갖춘 3부작 마무리’라는 점이다. 나름 에디와 베놈의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하며 그들도 역시 우리와 다르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 베놈의 시각적인 특성을 활력 있게 묘사하면서 이야기의 동력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소니 스파이더맨 유니버스가 끊어내지 못했던 애매한 캐릭터 설정이 영화의 발목을 잡으며 플롯 전체와의 이질감으로 이어졌다는 점은 아쉬운 점이다. 하지만 이런저런 장단점과는 별개로 톰 하디가 감정적으로 관객을 끌고 당기는 박력이 대단하니 무난하게 볼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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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FAN 데일리] 아들의 두려움과 엄마의 조롱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감독] 아리 에스터 Ari ASTER
출연] 호아킨 피닉스 Joaquin PHOENIX, 네이단 레인 Nathan LANE, 에이미 라이언 Amy RYAN
시놉시스
'보 와서먼'(호아킨 피닉스)은 거의 모든 것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철없는 남자다. 그는 아파트를 떠나 어머니 '모나'(패티 루폰)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비행기를 타려 하는데, 이때 모든 상황이 엉망이 된다. 고립되고 부상을 입는 등 갈수록 기이해지는 충격적인 그의 여정이 시작되고, 어린 시절을 보낸 옛날 집에 도착하게 된 보는 끔찍한 기억들과 추악한 비밀을 마주한다.
'아리 에스터'다운 난해함
자기만의 개성과 세계관을 고스란히 품은 <유전>과 <미드소마>로 이름을 알린 아리 에스터 감독. 그의 작품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연출 면에서는 점프 스케어를 지양한다. 기괴한 영상미와 음악을 통해 분위기를 고조하고, 이를 통해 관객을 심리적으로 압박한다. 가족이라는 관계 안에 내재된 집착을 공포와 미스터리의 소재로 사용하는 능력도 뛰어나다. 수많은 상징 덕분에 곱씹어 보는 재미도 있다. 종합하면, 난해하다.
세 번째 장편영화 <보 이즈 어프레이드>도 마찬가지다. 장르는 달라졌다. 호러가 아니라 판타지나 심리극에 더 가깝다. 그러나 난해함은 여전하다. 성기 괴물과 같은 비현실적 이미지가 가득해서 내용을 이해하기 어렵다. 영화를 구성한 5개 챕터 사이의 연관성은 눈에 띄지 않는다. 코미디, 연극, 로드무비, 심지어 좀비 영화(?)까지 섞여 있다. 그런데도 눈을 뗄 수가 없다. 마지막까지 숨통을 조여 오는 이야기의 힘이 그만큼 강렬하다.
의외로 단순한 얼개
하지만 첫 두 장면에 집중하면 <보 이즈 어프레이드>의 얼개는 의외로 단순하다. "제 입장에서는 단순하다고 생각한다"는 아리 에스터 감독 말대로다. 영화는 엄마 뱃속에 태아인 보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이제 막 세상에 태어난 보. 그런데 이때 분만실 상황이 심상치 않다. 엄마는 아들이 울지 않는다고, 아들을 받을 때 간호사가 실수한 거 아니냐고 화낸다. 보를 울리려는 간호사에게 아들을 폭행한다고 소리 지른다.
영화는 곧장 다음 장면으로 넘어간다. 보는 정신과 상담을 받는 중이다. 의사와 상담을 할 때 그와 그의 어머니 관계가 썩 좋지 않다는 게 드러난다. 아버지는 이미 죽었고, 어머니 집에 찾아가는 걸 꺼리는 보. 가끔은 어머니가 죽기를 바란다는 심정도 들켜 버린다. 여기까지만 봐도 이 이야기의 주제를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억압적인 어머니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아들에 대한 영화라고.
안 그래도 영화는 주제를 알려주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다. 상담을 마친 보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에서도 힌트를 준다. 한 남자아이가 광장 분수에서 놀고 있다. 보가 그 옆을 지나갈 때 아이의 어머니는 화를 내며 아들을 낚아챈다. 아이의 장난감은 그대로 분수에 버려진다. 보가 집 앞에 도착했을 때도 똑같다. 엄마에게 혼나며 쫓기는 아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관건은 집착하는 어머니를 아들이 떨쳐낼 수 있느냐다.
뒤틀린 모정의 파노라마
이런 관점에서 <보 이즈 어프레이드>는 일종의 정신 치료기처럼 보인다. 특히 영화의 각 챕터는 보의 정신 상태를 각각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누군가가 죽거나 자기가 죽음에 가까운 충격을 받으면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보. 그때마다 그는 자기도 미처 몰랐던 현실과 욕망, 상상을 생생하게 경험하며 성장한다.
첫 번째 챕터는 보의 현 상황을 보여준다. 그는 어머니의 치마폭을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 엄마 회사가 만든 냉동식품을 먹으며 엄마 회사가 지은 건물에서 산다. 또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하지도 못한다. 엄마 생일에 찾아뵙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할 때 그는 성인답지 못하게 우유부단하다. 이는 그의 눈에 마약 중독자와 강도가 가득한 세상은 항상 위험하고, 보호막이었던 엄마가 죽었다는 소식에 그가 정신을 못 차리는 이유다.
두 번째 챕터에서 보는 모성애의 실체를 마주한다. 엄마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본가로 향하는 보. 도중에 그는 '로저(네이단 레인)'와 '그레이스(에이미 라이언)' 부부 집에 잠시 머문다. 겉보기에는 완벽한 이 가족. 그러나 속은 썩었다. 뒤틀린 모성애 때문이다. 그레이스는 파병 나간 아들이 죽은 이후로 그에게만 집착한다. 잘못된 모정은 둘째 딸 '토니'(카일리 로저스)의 죽음을 초래한다. 엄마의 사랑을 잃은 그녀는 오빠를 미워한다. 오빠 방을 칠한 하늘색 페인트를 마시고 죽을 정도로.
세 번째 챕터는 연극이다. 이 연극은 보 자신의 이야기다. 정확히는 자기가 누릴 수도 있었던 이야기다. 엄마의 죽음을 해방으로 받아들였을 때 펼칠 수 있는 이야기다. 뒤틀린 모성애에서 벗어나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남자. 아내를 만나 가정을 꾸리고, 시련을 겪어 가족을 모두 잃지만, 끝내 다시 재회하는 해피엔딩. 보는 자기가 자기 삶의 운전자가 되는 삶을 꿈꾼다.
마지막으로 그는 장례식이 열린 엄마의 집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그는 마침내 온전히 주체적인 성인이 되는 듯 보인다. 그는 첫사랑인 '일레인'(파커 포시)을 만난다. 엄마 회사 직원이었기에 늦게나마 장례식에 온 일레인. 보에게 그녀는 언제나 소중한 존재였다. 그녀가 준 사진을 항상 간직하며 잊지 않았다. 죽은 엄마의 침실에서 그녀와 섹스하면서 그는 엄마에게서 벗어나 자기가 본 연극처럼 멋진 삶을 살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원형에 가까운 정신과 치료기
아리 에스터는 이러한 보의 모험을 프로이트적의 관점에서 풀어나간다. 원형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발달 과정을 '리비도(성욕)'라는 개념으로 이야기한다. 프로이트에게 리비도는 단순한 성욕 이상이다. 성적 에너지이자 동시에 정신 활동의 에너지다. 따라서 리비도를 제대로 다루는 것은 성욕 통제 이상의 의미가 있다. 한 인간이 정상적으로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과정이다.
특히 프로이트는 부모 자식 관계와 이성과의 관계에 주목한다. 유아기가 되면 아이는 자기 성기를 쾌락의 원천으로 삼는다. 이때 아이는 어머니에 대한 애정과 아버지에 대한 적의를 품지만, 그 욕망을 억압한다. 그 과정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생긴다. 참았던 욕망은 사춘기를 맞이해 이성에 대한 성욕에 눈을 뜨면서 풀려난다. 이렇게 성적인 충동을 적절히 통제하고 해소하는 법을 배워야 정신적으로 성숙한 인격체가 될 수 있다.
따라서 리비도가 정상적인 과정으로 발달하지 못하면 고착하거나 퇴행하며 정신적인 문제를 낳는다. 바로 보가 겪는 문제다. 보의 어머니는 아들에게서 두 가지를 제거했다. 아버지와 애인이다. 그녀는 보의 아버지가 섹스 중에 죽었다고 이야기한다. 유전병인 심장병이 도져서 죽었다고. 또 보가 크루즈 여행 중 일레인에게 반해 사랑에 빠진 걸 싫어한다. 실제로 자기 회사에 일레인이 취직했는데도 보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그 결과 보에게는 온갖 문제가 생긴다. 작중 등장하는 대부분의 초자연적인 이미지가 그의 성욕과 관련돼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선 이웃과의 소음 문제가 있다. 조용히 잠자던 보에게 옆집 이웃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소음을 줄이라고 윽박지르고 보복까지 한다. 보가 일레인과 마침내 섹스할 때 큰 음악을 틀고 하는 걸 고려하면, 소음은 정상적으로 승화되지 않는 성욕으로 인한 문제라 해도 무리가 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연극을 보며 자기도 주도적으로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거라는 상상에 빠진 보. 하지만 이내 그의 상상은 물거품이 된다. 가정을 이루려면 섹스를 해야 하는데, 아버지처럼 심장마비로 죽을 거라는 두려움이 그를 덮치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엄마가 진실을 숨겨둔 다락방에서 성기 괴물을 본다. 이 괴물 역시 어머니가 만든 존재나 다름없다. 자기 성욕에 대한 두려움이 투영된 존재가 그 괴물이기 때문. 길거리에서 벌거벗은 채 칼로 보를 찌르는 남성의 존재도 마찬가지다.
두려운 아들과 비웃는 엄마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보 이즈 어프레이드>는 프로이트적 관점에서 보의 정신 이상을 치료하는 이야기다. 일레인과의 섹스를 통해 그는 자기 트라우마를 극복한다. 지극히 원형적인 이야기다. 하지만 아리 에스터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는다. 반전을 주며 영화 장르를 하나의 블랙 코미디로 전환한다.
죽은 줄 알았던 엄마가 살아 돌아오자 보는 모든 상황이 각본이라는 걸 깨닫는다. 엄마가 그를 집으로 부른 것부터 엄마가 죽었다는 뉴스, 장례식과 일레인이 늦은 밤에 찾아온 것까지. 그를 집으로 이끈 죄책감도 모두 다 모나의 계획이었다. 동시에 이는 엄마의 복수나 다름없다. 아들의 정신과 상담 내용까지도 입수한 그녀는 자기가 준 사랑을 회수하지 못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 챕터인 재판장에서 모나의 의도는 더 분명해진다. 이 재판은 정당하지 않다. 철저히 보를 공격하고 굴복시키기 위한 장이다. 재판 증거는 철저히 보의 잘못된 행동, 어머니를 실망시킨 일로 가득하다. 보의 목소리는 어머니의 변호사 앞에서 묵살된다. 그의 변호사는 입을 간신히 열었다가 떨어져 죽는다. 결국 보는 타고 있던 보트의 모터가 폭발해 죽는다. 사인은 폭사가 아니다. 익사다.
그런 보를 보면서 모나는 눈물을 흘린다. 단지 슬픔 때문은 아니다. 이 모자 관계는 집착, 가스라이팅, 속박, 폭력으로 점철됐다. 어머니는 아들이 조금이라도 자유로워지려고 하면 구속했고, 아들은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자라지 못했다. 결국 이 재판은 어머니의 조롱이다. 아무리 아들이 자유로워지고 싶어도 절대 자기 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조롱.
이는 익사의 이유이기도 하다. 초반부에 상담사는 약을 먹을 때마다 항상 물을 먹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보는 물에 집착한다. 그런데 정작 그는 바다에 빠져 죽는다. 의미심장하다. 프로이트는 아이가 아직 어머니의 몸과 자신의 몸을 구분하지 못하는 상태를 '대양적 느낌'이라고 지칭했다. 이렇게 보면 물은 모성애다. 적어도 문제지만, 너무 많아도 문제다. 영화가 양수 속에 있는 보로 시작해 바다에 빠져 죽은 보로 끝나는 이유다.
이토록 불쾌한 블랙 코미디라니
그런데 <보 이즈 어프레이드>의 장르 전환은 적잖은 아쉬움을 남긴다. 관객은 모나가 아닌 보의 입장에서 결말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보의 시점에서 세상을 보여줬다. 그가 바라보는 왜곡된 세계부터, 그의 희망까지 전부 다. 그런데 정작 마지막 순간 그를 조롱한다. 아름다운 애니메이션으로 포장된 그의 희망과 상상은 다 부질없고, 그는 죽는 순간까지 어머니를 두려워해야 할 것이라고.
그 순간 관객은 난 데 없이 함께 조롱의 대상이 된 듯한 느낌을 받는다. 관객은 보에게 감정적으로 이입해 그의 모험을 3시간 동안 함께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가 두려움과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대신 그 안에서 익사하는 결말은 불쾌할 수밖에 없다. 블랙 코미디라기에는 차마 웃음이 나오지 않는다. 보가 자기 자신을 유머 대상을 삼으면 모를까, 피폐하고 나약한 보가 조롱의 대상이 되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물론 이 지점은 <보 이즈 어프레이드>가 독특한 이유이기도 하다. 애초에 아리 에스터는 보는 사람을 불쾌하고 찝찝하게 만드는 데 특별한 재주를 가졌으니까. 제목에 담긴 언어유희를 생각하면 철저히 계획된 블랙 유머이기도 하다. "소년은 두렵다(Boy Is Afraid)”라고도 읽을 수 있는 제목은 모든 남성이 품고 있는 두려움을 영화 시작 전부터 드러내고 있다.
<보 이즈 어프레이드>를 못 만든 영화라고 말할 수는 없다. 긴장감을 고조하는 연출. 자칫 평범할 수 있는 원형적 이야기를 아름다운 이미지로 색다르게 보여준 스토리텔링. 5개 챕터로 쪼개진 심리 서사극. 마지막 순간 모두의 예상을 엇나가는 반전까지. 아리 에스터에게 박수를 보내기 충분하다. 단지 블랙 코미디에 같이 웃느냐, 웃지 않느냐, 그것이 문제일 뿐이다.
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물도 적당히 마셔야 살 수 있다
상영일정
6/29 13:00 - 15:59 한국만화박물관
6/29 19:00 - 23:19 부천시청 잔디광장 / 어울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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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EONJU IFF 데일리] 당신의 속초는 어떤 모습인가요?
영화정보
코야 카무라
Koya KAMURA
France
2024
106min
DCP
Color
Fiction
전체관람가
Korean Premiere
시놉시스
속초, 스물다섯 살 수하의 삶은 생선 장수인 엄마와 남자친구 준호로 인해 형성된다. 수하가 일하는 펜션에 얀 케랑이라는 프랑스 남자가 찾아오게 되면서 수하는 자신의 정체성과 자신이 알지 못하는 아버지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겨울이 시작되면서 수하와 케랑은 요리와 그림을 통해 섬세하고 미묘한 유대감을 형성한다.
영화리뷰
코야 카무라 감독의 <속초에서의 겨울>은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월드시네마 섹션에서 상영된다. 프랑스 영화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이 신예 감독은 첫 장편 연출작으로 엘리자 수아 뒤사팽의 소설 <속초에서의 겨울>을 스크린에 옮겨내었다. 속초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낯섦과 익숙함 사이에서 흔들리는 인물의 감정선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동적인 움직임과 절제된 연출은 이 영화를 한 편의 시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수하는 아빠에 대한 기억이 없다. 엄마는 자세히 말해주지 않았고 더 캐물으면 화를 내곤 했으니까. 남자 친구와 함께 있다가도 생선 장수인 엄마에게 돌아가 함께 시간을 보낸다. 수하는 펜션에서 일을 하고 있고, 그곳에서 요리하는 등, 숙박 안내를 하며 지내고 있다. 수하는 어떤 이유로 무슨 연유로 속초에 다시 왔는지는 모르지만, 현재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 엄마는 그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것 같지만. 그러던 어느 날 프랑스 손님이 펜션에 숙박하고 싶다고 찾아온다. 그때부터 반복되던 수하의 삶에도 작은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를 예의 없고 무례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삽화가로 일하고 있는 남자의 색다른 모습에 매력을 느끼게 된다. 아빠의 부재로 인한 그리움일지도 몰랐다. 확실한 건 그 남자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봐준다는 사실이 더욱 그와의 거리를 좁혔다. ‘당신의 속초를 보여주세요‘라는 말에 수하는 속초뿐만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주려 한다. 하지만 남자는 단호하게 선을 긋고 거리를 둔다. 열병 같은 짝사랑의 시작이었다. 그가 멀어질수록 그에게 다가가고 싶어지는 그 마음은 확신이 들수록 불안해져만 간다.
수하는 언젠가 아버지를 만나기를 꿈꾼다. 언젠가 프랑스에 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로 불문학을 전공하여 불어도 유창하게 해낸다. 우연히 만난 프랑스인 삽화가를 통해 프랑스로 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와 대화를 나누며 ‘장소‘와’형태‘에 대해 생각해 보고 평소엔 떠올리지 않았던 낯선 질문들을 마주하게 된다. “소망이나 기대는 슬픈 게 아니에요.”라는 말처럼 익숙한 장소에서 느껴지는 낯섦이 싫지만은 않았다. 전에는 느껴 보지 못한 뜨거운 열정이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하지만 겨울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따뜻한 봄을 기대하는 그 마음과는 다르게 순식간에 실망으로 뒤덮인다. 그래도 수하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잊고 살아가야 했다.
수하는 엄마를 떠날 수 없다. 깨작깨작 먹지 마, 살찌지 마, 외모 관리해 여자는 그래야 해, 라식 수술 좀 해 그 안경 안 불편해?, 결혼은 언제 하니? 엄마는 수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그 문장들을 반복하고 강박으로 이어질지 모를 그 상처의 말 들을 수도 없이 뱉어낸다. 어조가 부드럽다고 해서 좋은 말이라 할 수 없고, 상처가 덜한 것도 아니다. 수하는 그런 엄마의 말투와 시선을 알면서도, 끝내 등을 돌리지 못한다. 엄마에게 다가가고 싶은 동시에 엄마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교차한다. 남자 친구와는 이별할 수 있지만 엄마는 그럴 수 없다. 엄마가 딸에게 기대는 방식은 단단하지만 불완전하다. 과거와는 다르게 수하는 상처를 외면하지 않고, 자신의 형태에도 웃음을 지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
속초라는 공간이 지닌 익숙함과 낯섦의 경계처럼 영화는 수하가 느끼는 설렘과 불안, 그리움과 외로움의 복잡한 감정들을 섬세하게 포착하며 깊은 여운을 남긴다. 마치 겨울 바다의 잔잔한 파도처럼, 조용히 밀려왔다 사라지는 수하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이다. <속초에서의 겨울>은 화려한 볼거리나 극적인 사건 없이도 잔잔하게 흘러가는 영화다. 화려한 기교 없이도 배우들의 눈빛과 표정, 그리고 속초의 겨울 풍경을 담아낸 영상미는 아름다움을 더한다. 인물의 섬세한 감정 변화는 선의 형태로 드러나 더욱 생생하게 펼쳐진다. 강렬한 드라마나 자극적인 볼거리를 기대하는 관객에게는 다소 잔잔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섬세한 감정의 흐름을 따라가는 여운을 즐기는 관객이라면 이 영화의 깊고 섬세한 감정의 울림에 깊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스크린에 수놓아진 감정의 선들을 따라 자연스레 스며드는 겨울의 감성을 느껴보기를 추천한다.
상영스케줄
2025.05.02
21:30
CGV 전주고사 1관
2025.05.03
21:00
CGV 전주고사 1관
2025.05.07
13:30
CGV전주고사 2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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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한 방화와 폭력으로 경찰에 연행된 후
연락이 두절된 엄마.
어느 날 한 통의 연락이 온다.
엄마가 코마 상태라는 것.
의료진은 정신과 정신을 직접 연결하는 새로운 치료 기술을 제안한다.
이제껏 경험하지 못 한 새로운 구역의 발을 디딘 순간,
기이한 현상이 연이어 벌어지고
현실과 가상의 경계는 불분명해지는데..
감히 열어서는 안 될,
새로운 차원의 구역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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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코멘터리 예고편
1957년 뉴욕, 라이벌 갱단인 제트와 샤크 사이의 갈등과 그 안에서 이뤄지는 '토니'와 '마리아'의 사랑을 그린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