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하늘2021-09-08 13:53:28
혐오시대 속 오렌지한 깜빵생활
넷플릭스 드라마 리뷰
종북좌파, 보수꼴통. 정치적 성향으로 좌우가 갈린 서로를 향해 혐오하는 발언들이다. 특정 인물과 세대를 향한 혐오가 가득한 대한민국 현실. 나이, 성별, 지역, 학력, 빈부, 성향, 기질, 나라, 정치 등 혐오의 대상과 범위가 급속도로 퍼지고 있다. 인문학자 박민영은 "지금, 또 혐오하셨네요"에서 우리 안에 스며든 혐오 바이러스로 인해 일상적으로 혐오하고, 혐오당하는 이 시대를 향해 결국에 가해자이자 피해자는 바로 ‘나’라고 경고하고 있다.
오늘날의 넷플릭스를 있게 한 작품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Orange is the New Black”이다. 무려 1억 번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한 이 작품은 배경 자체도 아주 독특하다. 바로 여자 교도소 이야기. 일반인이라면 잘 그려지지 않는 여자 교소도. 그곳에 주인공 파이퍼 패프먼이라는 백인 여자가 15개월을 복역하며 일어나는 이야기를 다뤘다. 사실 내게 넷플릭스 세계를 인도한 친구가 있었는데 드라마 “설국열차”을 권했다. 그런데 눈이 잘 가지 않았다. 우선 영화 설국열차를 정말 재미있게 본 상황이고, 이미 이야기를 알게 된 입장에서 생각만큼 손이 가 질 않았다.
당시 엄청나게 화제를 모이던 대한민국의 넷플릭스의 자존심 “킹덤” 역시 흔한 좀비물이라 생각하였기에 식상했다. 그런데 조금 검색하다가 넷플릭스에서 가장 많이 조회된 드라마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지금의 넷플릭스가 있기에 엄청난 공헌을 한 작품을 사람들이 추천했다.
바로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 무려 시즌 7까지 진행되는 거대하고 기나긴 길이었지만, 모든 이야기가 끝나서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 의 의미를 찾아보았다.
여기서 오렌지는 죄수복을 의미한다. 한국의 죄수복은 회색이나 푸른 계열로 알고 있는데 미국은 오렌지 색이다. 그리고 ‘New Black'이란 말은 실패 없는, 또는 대세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매 시즌마다 유행이 될 무언가를 칭할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
- 나무위키 참고
그래서 개인적으로 내가 이해한 것은 오렌지 색을 입고 있는 죄수인 우리가 새로 떠오르는 대세다!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오렌지는 단순하게 여자 죄수들을 의미할까?
드라마는 워낙 탄탄한 캐릭터의 힘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캐릭터의 이야기를 연기자들은 충분히 몰입을 가져오도록 역할을 다해낸다. 중요한 것은 내용의 전개 과정 가운데 한 여자의 인생 가운데 교도소라는 곳에 들어오기까지의 이야기들을 디테일하게 다루고 있고, 그것이 주인공만이 아닌 굉장히 넓은 범위의 인물들까지 이해하게 만든다. 이러한 전 이해를 통해, 나는 어느덧 그 여인들을 향해 연민을 느끼고 있는 걸 발견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인종도 다르고, 성적 취향도 다르고, 범죄도 다르고, 살아온 환경도 다른 그들이 서로를 이해하며 하나의 사회를 구성하며 그 안에서 작은 기쁨들을 발견하며 살아가는 걸 볼 수 있다.
자신을 향한 세상과 시스템의 혐오의 벽은 허물어지고, 혐오를 당하던 그녀들은 감옥이라는 상황 속에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간다. 그리고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교도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잘못된 구조와 시스템에 대항한다. 그래서 오렌지가 뉴 블랙 즉, 새로운 대세가 되는 것이다. 이 시대에 살아가며 잘못된 구조와 시스템을 알면서도 여전히 대항할 수 없는 무력한 우리에게 이 드라마는 이야기하고 있다.
“오렌지가 바로 뉴 블랙이다.” 그리고 이 드라마는 말한다.
혐오를 넘어선 오렌지들의 모습을 간파한 당신이야 말로 바로 “뉴 블랙.”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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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 의미에서 <듄>이 떠오르는 시작
스포일러 주의!
<퇴마록>은 해동밀교의 145대 교주인 서교주가 완전한 악이 되기 위해 생명을 재물로 바치는 의식을 치르는 것으로 시작한다. 어느 날, 과거의 트라우마를 안고 살고 있는 박윤규 신부에게 장호법이 찾아온다. 장호법은 서교주가 아들 장준후를 이용해 완전한 악이 되려는 계략을 꾸미고 있으니 준호를 몰래 구출하여 이를 막아내자고 제안한다. 박신부는 처음엔 망설였지만 금세 이를 받아들이며 함께 해동밀교로 향한다. 한편, 하나뿐인 가족을 잃은 과거로 인해 귀신에 대한 복수심을 품고 있는 이현암 역시 혈도를 치료하기 위한 목적으로 해동밀교로 향하게 되면서 이 네 명의 인물은 의도치 않게 서로 얽히게 된다. 그때, 얼마 지나지 않아 점점 끔찍한 존재가 되어가는 서교주. 그렇게 박신부, 장호법, 현암은 모두 서교주와 맞서기로 결심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김동철 감독의 애니메이션 영화다.
제목을 보고 오해하지 마시라. <퇴마록>이 <듄>만큼 어마어마한 대작이라는 뜻이 아니다. 여러모로 비슷한 지점이 많다는 뜻이다. 거대한 전체 이야기의 프롤로그라는 점, 약한 이야기를 메꾸기 위해 시청각적 요소를 강조했다는 점, 원작을 안 본 관객도 충분히 즐길 수 있게 노력했다는 점에서 많은 부분이 닮아 있다. 더불어 거대한 시리즈의 첫 작품이라는 것에서 오는 필연적인 단점이 있다는 것도 비슷하다. 문제는 결국 세계관 소개에 머문 이야기다. 낯선 설정, 낯선 인물, 낯선 상황들이 초반에 몰아치는데 원작을 안 본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를 따라가기 꽤나 버겁다. 특히 <퇴마록>은 <듄>과 달리 85분이라는 짧은 상영 시간 내에 많은 것들을 설명해야 하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을 명쾌히 설명해 주기보다는 찰나의 이미지나 플래시백으로 암시하는 방식을 택했다. 분명 여기서 조금만 나아가면 세계관도 더 친숙해지고 개연성 확보도 가능했을 텐데 제작 여건의 한계 때문에 이를 제대로 그려내지 못한 것 같아 큰 아쉬움을 남긴다.
이러한 부족한 설명은 캐릭터와 후반 전개에서 고스란히 나타난다. 박신부, 장호법, 준호, 현암의 서사가 조금만 더 친절하고 자세하게 그려졌다면 더 매력적이고 인상적인 인물들로 다가왔을 것이다. 해동밀교의 호법들도 너무 빠르고 허망하게 퇴장하여 기억 속에서 쉽게 잊혀진다. 후반에 장호법이 사실 준호의 아버지였다는 반전도 아무런 복선 없이 갑작스레 튀어나와 당혹감을 준다. 후반부에 장호법이 호법을 맡기 위해 아들을 서교주의 양자로 보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데, 굉장히 중대한 사항인데도 준호는 이를 너무 빠르게 납득한다. 단순히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로 끝나면 안 될 것 같은 문제인데도 영화는 별 대수가 아닌 것처럼 다음 장면으로 서둘러 넘어간다. 이런 부분이 영화를 보는 내내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퇴마록>은 실망스러운 영화였을까? 그렇지는 않았다. 오히려 <퇴마록>은 올해 가장 즐겁게 본 영화 중 하나였다. 영화가 꺼낸 회심의 일격이 적중했기 때문이다. 바로 액션이다. <퇴마록>의 액션은 볼거리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물론 단순한 볼거리로만 봐도 충분히 즐겁지만 이를 넘어서 캐릭터에 대한 설명과 서사를 대신하는 수단으로서도 기능하기 때문이다. 작중에서 다소 허무하게 퇴장하는 세 명의 호법들도 액션 장면에서만큼은 이들이 어떤 존재이며 왜 이 영화에 필요한 존재인지를 순간적으로 납득시킨다. 이후에 박신부, 준호, 현암이 힘을 합쳐 서교주에게 맞서는 장면에서는 이전까지 플래시백으로 펼쳐졌던 박신부의 서사, 준호의 서사, 현암의 서사가 서로 교집합을 이루면서 진한 울림을 준다. 여기에 장호법과 장준호의 아버지-아들 서사도 다소 뜬금없었던 것과는 별개로 가족이라는 보편적인 정서가 주는 힘 덕분에 어느 정도의 감동을 전달하는 데 성공한다. 덩달아 플래시백 덕분에 빈약하게 보일 수 있는 영화 전체 이야기가 굉장히 풍성해 보이는 효과까지 생겼다. 이러한 강력한 장점들이 이야기의 아쉬움을 메꿔주었다.
<퇴마록>은 원작을 본 사람에게는 감격스러운 팬 서비스를, 원작을 보지 않은 관객들도 충분히 즐겁게 볼 수 있도록 노력한 잘 만든 애니메이션이다. 원작의 팬들을 챙기면서도 그렇지 않은 관객에게도 만족감을 주는 적절한 모범례를 만난 것 같았달까. 후속작을 강력하게 어필하는 결말을 보고 나면 "함께 하겠나?"라고 묻는 박신부의 대사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게 된다. 계속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절실하니 부디 더 큰 이야기를 펼칠 후속작들을 만날 수 있길 염원한다.
별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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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닥터 스트레인지2> 대혼돈이 아니라 광기의 멀티버스인 이유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갑작스레 꿈에서 깨어난 '닥터 스트레인지(베네딕트 컴버배치)'. 그는 멀티버스를 암시하는 듯한 꿈의 내용을 걱정하면서도 오랜 동료이자 친구였던 '크리스틴 팔머(레이첼 맥아담스)'의 결혼식에 참석한다. 끝내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은 크리스틴과의 관계를 곱씹던 중, 괴생명체가 급습하자 '웡(베네딕트 웡)'과 함께 전투를 벌인 그는 전투 도중 꿈에 등장했던 소녀 ‘아메리카 차베즈(소치틀 고메즈)'를 만난다. 그녀로부터 멀티버스가 실재하며 멀티버스를 넘나들 수 있는 아메리카의 능력을 뺏는 존재가 있다는 소식을 들은 닥터 스트레인지는 과거의 전우이자 마법에 통달한 또 다른 히어로 '완다 막시모프(엘리자베스 올슨)'를 찾아가 도움을 청한다. 그러나 스칼렛 위치로 각성한 완다는 자신의 목적을 이유로 그의 부탁을 거절하고, 닥터 스트레인지는 완다로부터 아메리카를 지키기 위해 멀티버스를 넘나드는 싸움에 나선다.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는 2016년에 나온 <닥터 스트레인지>의 속편으로, 멀티버스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린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이후 개봉하는 첫 MCU 영화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닥터 스트레인지 2>를 기대하는 시선과 분위기는 특히 '멀티버스'에 집중되어 있었다. 실제로 개봉 전 수많은 팬들은 <노 웨이 홈>이 그랬듯이 이번 작품도 특급 '카메오'를 선보일 거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작품은 멀티버스에 방점이 찍힌 영화가 아니다. 실제로 영화는 '닥터 스트레인지가 스칼렛 위치의 추적을 피해 아메리칸 차베즈를 보호한다'는 핵심 플롯에 충실하다. 즉 이 작품 속 멀티버스는 그저 공간적 배경이고, 카메오는 말 그대로 카메오에 불과하며 단지 멀티버스를 오가는 닥터 스트레인지의 이야기를 보여줄 뿐이다. 그 대신 <닥터 스트레인지 2>는 부제인 멀티버스에 붙은 대혼돈, 정확히 말하면 '광기(madness)'에 주목한다. 다시 말해,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는 닥터 스트레인지가 광기를 마주하며 겪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닥터 스트레인지가 마주한 두 가지 광기
그렇다면 영화 속 그 광기는 무엇일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역시나 스칼렛 위치다. 자신이 만든 환상의 공간에서 자신의 마법으로 만들었던 쌍둥이 아이들과 함께하는 삶을 누렸던 완다 막시모프. 그녀는 자신의 환상이 파괴되고 연인이었던 비전에 이어 그 아이들마저 잃는다. 이후 어둠의 마법서인 다크 홀드에 의해 타락한 그녀는 쌍둥이 아이들을 다시 만나려는 광기에 휩싸인다. 그래서 그녀는 다른 우주의 쌍둥이들을 데려와 자신의 가정을 완성하는 꿈을 꾸고, 이를 위해 멀티버스를 오가는 능력을 지닌 아메리카 차베즈를 사로잡아 그녀의 힘을 빼앗으려 든다. 이는 세계와 우주의 수호자인 닥터 스트레인지가 용납할 수 없는 행위이자 위협이며, 따라서 스칼렛 위치는 누가 보더라도 닥터 스트레인지가 마주해야 할 위협적인 광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닥터 스트레인지가 직면한 광기는 외부에만 있지 않다. 그의 내부에도 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소재가 바로 꿈이다. 흔히 꿈은 잠재의식의 표현이라고 여겨진다. 깨어 있는 동안 자아나 의식이 미처 깨닫거나 인식하지 못한 경험이나 불안감, 심지어는 미래에 대한 비전을 무의식이 형상화한 것이 꿈이다. 영화는 이러한 꿈의 특성을 멀티버스와 결부시킨다. 영화에서의 꿈은 멀티버스 속 자신을 볼 수 있는 통로다. 따라서 멀티버스에 존재하는 자신을 만나는 것은 결국 본인 내면의 또 다른 자기 자신을 만나는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멀티버스를 돌아다니며 다른 여러 닥터 스트레인지를 만나는 여행은 닥터 스트레인지 본인이 애써 누르고 억압하고 있던 무의식에 속한 본인 모습을 만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는 멀티버스 여정에서 처음으로 도착한 세계에서 그가 잊으려던 크리스틴과의 추억을 다시 보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특히 그에게 내재되어 있던 광기가 다양한 형태로 발현된 결과물이 멀티버스의 닥터 스트레인지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는 대의를 위해 희생을 정당화하고, 옳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오만과 독선으로 가득하며, 사랑하는 이를 차지하려고 세계를 파괴하는 스트레인지를 마주한다. 당장 크리스틴의 결혼식에 참석한 닥터 스트레인지의 모습과 대사를 보면 다른 우주 속 본인이 될 가능성이 은연중에 보이기도 한다. 그렇기에 닥터 스트레인지의 멀티버스 모험은 완다의 광기를 마주하는 여정이자, 동시에 자기 자신의 광기를 대면하고 그 광기가 자신을 잠식하지 못하게 하는 내적 여정이다. 그러다 보니 작중 닥터 스트레인지보다 완다가 더 능동적으로 사건을 주도하는 인물로 묘사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그녀의 광기는 이미 드러나 있는 상태이지만, 닥터 스트레인지의 것은 아직 탐색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 모습만 다를 뿐 결국 공통적으로 광기를 품고 있는 두 주역의 초반부 대화에 유달리 '이성적'이라는 표현이 많이 등장하는 것 역시 사뭇 의미심장하다.
거울로서의 멀티버스
이에 더해 멀티버스는 두 광기가 해소되는 공간으로도 활용된다. 멀티버스는 단지 또 다른 '나'를 발견하는 통로일 뿐만 아니라, '나'를 볼 수 있는 거울과도 같기 때문이다. 거울을 보는 행위는 거울에 반사된 '나'의 상을 보는 것이다. 이때 거울은 '나' 혼자의 힘으로는 알 수 없는 이미지를 보여준다. 따라서 거울을 보는 행위는 자기 자신의 외관이나 정체성을 재고하고 반성할 기회를 잡는 일이다. 그런데 거울에 비치는 상은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는 못한다. 언제나 좌우가 바뀌어 있으며, 거울의 표면에 따라서 형태가 왜곡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나'는 거울 안에서 자신의 모습과 유사하나, 동일하지는 않은 또 다른 주체를 만난다. 이때 '나'에게 그 주체는 하나의 대상이고, 그 주체의 입장에서도 '나'는 하나의 대상이다. 그렇기에 '나'는 거울 속 자신을 통해 타인을 만나고,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다시 찾을 수 있다. 이는 덴마크의 설치 예술가 올라퍼 엘리아슨이 거울을 두고 평행세계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말한 이유이기도 하다.
닥터 스트레인지에게는 멀티버스가 바로 그 거울이다. 다른 세계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본인이 내재한 광기의 위험성을 깨달은 그는 그들이 먼저 간 길을 따르면서도 또 다르게 걷는다. 전편들에서 알 수 있듯이 본래 닥터 스트레인지는 대의를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희생을 감수하거나 금지된 규칙을 깨는 데에 주저함이 없었다. 1편에서 그는 금지된 타임 스톤의 힘을 적극적으로 이용했고, <인피니티 워>와 <엔드게임>에서는 더 큰 계획을 위해 타노스에게 타임 스톤을 내주며 많은 이들의 희생을 감수했다.
하지만 멀티버스라는 거울을 통해 다른 세계의 스트레인지가 대의를 위한 희생을 택하거나 어둠의 마법에 기댔는데도 실패하는 모습을 제삼자의 시점에서 객관적으로 목격한 스트레인지는 이전과 다르다. 독선적인 성격을 잠재우고 다른 이들을 믿으며, 좋은 결과는 물론 옳은 과정도 같이 추구한다. 그 덕분에 그는 자신의 독단이라는 광기가 낳았던 죄책감과 그로 인한 행복의 부재로부터 탈피하는 데 성공한다. 그렇기에 닥터 스트레인지가 소서러 슈프림인 웡에게 허리 숙여 인사하는 장면은 유머스러운 대목이기도 하지만, 그가 드러나지 않은 광기를 통제하며 한 단계 성숙해졌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광기의 멀티버스인 이유
같은 맥락에서 보면 멀티버스를 건너오는 완다의 공포스러운 추격전에도 다른 의미가 있다. 완다는 닥터 스트레인지 외에 꿈에서 멀티버스를 볼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그러므로 그녀에게도 멀티버스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통로이자 동시에 거울이다. 즉, 그녀의 여정은 단지 아메리카 차베즈를 쫓는 것이 아니라, 스칼렛 위치라는 정체성 밑에 가려진 나머지 더 이상 현실의 자기 모습이 아닌 완다의 의식을 깊은 내면에서 끌어올리는 여정인 것이다.
초반부와 후반부의 완다가 처한 상황을 대조하면 그 의미가 더욱 명확해진다. 카마르 타지에 진입하려던 완다는 닥터 스트레인지에 의해 미러 디멘션에 갇힌다. 그는 완다를 수많은 거울로 가득한 방에 가두어 놓으면서 그녀로 하여금 스칼렛 위치가 된 자신의 모습을 직시하게 만들려 하나 이는 효과를 보지 못한다. 반면 후반부에 스칼렛 위치는 멀티버스의 완다를 마주 본다. 멀티버스라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본인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깨닫고 타락해버린 현재의 모습을 깨닫는다. 닥터 스트레인지가 다른 우주의 자신의 모습에 비추어 같은 함정에 빠지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것처럼.
이는 완다가 사용하는 다크 홀드의 대척점에 있는 '비샨티의 책'이 맥거핀으로 활용되는 이유다. 닥터 스트레인지와 완다의 대립은 선과 악의 대결이 아니라, 각자 품고 있는 광기를 어떻게 직시하고, 수용하고, 통제할 것이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일례로 다른 우주의 자신에게 빙의하는 흑마법 '드림 워킹'을 시전 한다는 점에서 둘은 다를 게 없지만, 그보다는 마법의 목적과 결과가 무엇이냐가 더 중요한 차이점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영화의 부제를 '광기의 멀티버스'가 아니라 '대혼돈의 멀티버스'로 번역한 선택은 캐릭터의 서사에 집중한 의도와 멀티버스라는 소재에 숨겨져 있는 의미를 부각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크다.
양날의 검인 광기의 멀티버스
이처럼 광기로 가득 찬 내면을 여행하는 통로이자, 자신의 모습을 직시하게 만드는 거울인 멀티버스. 다만 멀티버스의 활용은 양날의 검이기도 하다. 우선 완다의 광기를 강조시킨 결과 자칫 올드할 수 있는 샘 레이미 감독 특유의 호러 영화적 요소가 MCU에 잘 녹아든 것은 장점이다. 닥터 스트레인지 일행을 쫓는 터널 장면이나 프로페서 X와의 전투에서 다수의 점프 스케어를 동원해 완다의 집착이나 광기를 살려내는 것이 대표적이다. 스칼렛 위치의 압도적인 힘을 잘 묘사한 이 장면들은 인간이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파멸되는 공포감인 코스믹 호러를 부각하는데, 이 대목이 MCU의 클리셰를 비틀면서 신선한 충격을 주기 때문이다. 그간 MCU의 빌런들은 제모 남작이나 미스테리오, 알렉산더 피어스와 같은 반전형 빌런인 경우가 많았다. 반면에 광기로 가득한 완다는 초반부터 빌런으로 등장해 영화의 분위기를 장악해 버린다.
다만 멀티버스와 관련된 인물들의 서사가 평면적이라는 문제를 피하지는 못한다. 작중 멀티버스가 본질적으로 수단과 배경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아메리카만 해도 그녀의 과거사가 잠시 모습을 비추지만, 그녀의 역할은 두 주연의 내면을 살피는 멀티버스를 여는 데 한정된다. 그래서 그녀는 철저히 수동적으로 묘사되며, 본격적인 서사는 다음 기회를 기약할 수밖에 없다. 다른 우주의 히어로들 역시 같은 이유로 등장할 때의 임팩트에 비해 초라하게 퇴장하기를 반복한다. <노 웨이 홈>과 달리 본 작에서는 카메오가 단순한 일회성 팬 서비스로 낭비되는 듯한 인상이 강한 것이다. 또 멀티버스 속 인물들을 가볍게 소비하는 것은 그간 영웅의 죽음과 희생의 가치를 중시했던 MCU의 접근법과는 괴리가 있다. 달리 말해 '광기의 멀티버스'만으로 호러 영화와 MCU의 간극을 메우는 데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호러물 클리셰대로 안일하게 방심한 인물들이 단숨에 죽는 전개가 남발되거나, 스토리 전개에 있어서 우연적 요소가 적지 않은 것은 미흡한 봉합의 또 다른 증거나 다름없다.
한편 멀티버스라는 소재에 매몰되지 않았다는 장점과는 별개로 단독 영화로서도 호불호가 갈리는 지점이 있다. 액션이 대표적이다. 닥터 스트레인지를 상징하는 액션이라면 미러 디멘션을 활용한 화려하고 기하하적인 공간 왜곡을 꼽을 수 있는데, 이러한 연출이 완다를 상대할 때를 제외하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물론 마블은 토르, 아이언맨, 캡틴 아메리카의 성장을 위해 제각기 묠니르, 슈트, 방패를 제거한 전적이 있다. 다만 이후 더 강력한 능력이나 무기를 획득해 히어로 영화다운 액션을 보여준 것과 세 히어로와 달리, 닥터 스트레인지에게서는 그러한 외적인 변화를 찾을 수가 없다. 이는 미러 디멘션을 활용한 연출이 주제와 메시지를 잘 살려낸 것과 무관하게 히어로 영화로서 실망스러운 측면이다.
또한 디즈니+의 독점 드라마인 <완다비전>과의 연계가 매우 강해 진입 장벽이 높아진 점도 지적될 만하다. 영화가 닥터 스트레인지와 완다의 심리를 묘사하는 데 방점을 찍은 것을 고려하면, 완다의 성장과 변화를 깊게 다룬 <완다비전>의 내용을 모를 경우 2시간의 러닝타임은 물음표로 가득 찰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비단 이번 작품뿐만 아니라 앞으로 모든 마블 영화가 마주할 문제이기에, MCU로서는 적잖은 과제를 떠안은 셈이다. 결국 광기에 물든 두 히어로의 이야기에 철저히 초점을 맞춘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는 기대한 바에 따라 장단점과 만족도가 극단으로 갈릴, MCU 페이즈 4의 또 다른 문제작으로 막을 내린다.
A(Acceptable, 무난함)
멀티버스 파티에 매몰되지 않으려는 닥터 스트레인지의 한 수, 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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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니스 엔드
저니스 엔드
영화를 보다 보면, 어떤 느낌이 올 때가 있다. 이 영화가 그랬는데, 어느 순간, 이 영화는 매우 '개인적'이고 '연극적'인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는 아무 정보 없이 보기 시작했는데, 1차 세계대전이 배경이었고, 영국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것만으로 선택했다.
영화를 다 보고 영화정보를 찾아보니, 내 느낌이 정확하게 맞아서 신기했다. 이 영화는 R. C. 셰리프가 1928년에 쓴 희곡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셰리프는 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군 장교로 참전했으며,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희곡을 썼다.
잘 알려진 것처럼, 1차 세계대전은 재래식 무기로 싸운 전쟁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가 나온 전쟁이다. 나중에 2차 세계대전이 이 기록을 깨지만, 불과 20년 사이 무기의 발달은 상상을 뛰어넘었다. 연합군은 4천3백만 명이 참전했고, 사망자와 실종자(사망으로 추정)를 합하면 1천만 명이 넘었다. 즉, 4명 가운데 한 명이 전사한 것이다. 여기에 부상자가 1천2백만 명이었으니 사상자로 보면 4명 가운데 2명은 죽거나 다친 것이다.
동맹국은 2천5백만 명이 참전했는데, 사망자와 실종자가 8백만 명이고, 부상자도 8백만 명 정도다. 사상자가 1천6백만 명이니 통계로 보면 동맹국 군인의 피해가 더 컸다.
군인과 민간인 사상자 수는 당연히 2차 세계대전이 훨씬 많지만, 2차 세계대전의 무기는 1차 세계대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고 파괴적이었다. 1차 세계대전은 '참호전'이라는 특징으로 말할 수 있다. 전선을 따라 참호를 길게 파고, 진지를 구축한 다음, 적과 대치한다. 서로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 상대 참호를 점령해야 하고, 그렇게 병사들의 몸뚱이를 갈아넣으면서 전쟁은 끝없는 소모전으로 변해갔다.
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나 문학작품이 많다. 가장 유명한 소설 '서부전선 이상없다'를 비롯해 최근에 개봉한 영화 '1917' 그래픽노블 '1914-1918' 등이 있다. 1차 세계대전을 다룬 책 가운데 존 엘리스가 쓴 '참호에 갇힌 1차 세계대전'을 보면, 이 전쟁이 '참호전'이라는 특징을 얻게 된 이유를 잘 설명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도 매우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지만, 참전 군인 대부분은 참호에서 생활한다. 전선을 따라 길고 복잡하게 만든 참호는 아군의 기지 역할을 하고, 안전한 방어진지이면서, 적을 공격할 때도 빠르게 기습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적과 아군의 참호 거리는 불과 50미터여서, 상대방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으며, 상대방에게 심리전 - 음악, 방송 등 - 을 펼칠 수 있고, 심지어 적군이어도 임시 휴전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참호는 안전하지만 매우 비좁고 비가 오면 진흙탕으로 변해 발이 빠져 엉망진창이 되었다. 여기에 쥐가 들끓고, 미쳐 거두지 못한 아군 병사의 시신을 참호 바깥쪽에 땅을 파서 메워 벽을 만들기도 했다.
영화는 참호 생활의 어려움을 매우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영화가 '개인적'이고 '연극적'이라고 느끼게 되는 부분은 두 가지였는데, 그 하나가 참호생활의 묘사였고, 다른 하나는 군인들 - 장교와 사병 - 특히 장교들의 심리상태를 치밀하게 묘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롤리 소위는 이제 막 장교 훈련을 마치고 임관한 앳된 소위다. 그는 전방 연대로 전입 인사를 하러 왔다가 사단장을 찾는다. 사단장은 롤리 소위의 삼촌(외삼촌)이다. 이 정도 빽이면 좋은 보직을 받아 안전하게 군생활을 할 수 있겠지만, 롤리 소위는 최전방 대대로 배속해달라고 요청한다. 스탠호프 대위가 대대장으로 있는 그 대대로 꼭 배속을 해달라는 롤리 소위의 부탁에, 사단장도 어쩔 수 없다며 수긍한다.
롤리 소위와 스탠호프 대위는 전쟁 전에 함께 살던 사이였다. 롤리 소위의 집안은 명문가로 부유한 - 아마 귀족일 수도 있다 - 집안이었고, 그런 롤리의 저택에서 관리인으로 일하던 사람이 스탠호프였다. 스탠호프는 전쟁이 발발하면서 입대해 지금은 대위가 되었고, 사단에서 유명한 전설적인 대대장이 되었다.
반면 롤리 소위는 학군장교였다가 최근 8주 훈련을 마치고 이제 막 전방부대로 배속받은 신참이었다. 롤리 소위의 기억으로 스탠호프는 자신보다 나이는 많지만 가장 친한 친구였으며,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롤리, 롤리의 누나와 함께 셋이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낸 추억이 있었다.
프랑스 최전선에서 독일군과 대치하고 있는 대대는 이제 막 직전 부대와 임무 교대를 하고, 앞으로 6일 동안 참호에서 대기하며 독일군의 움직임을 살피고, 방어 임무를 맡았다. 전선은 벌써 몇달 째 교착상태에 있었고, 소문으로는 독일군의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될 거라고 하지만, 그런 소문 속에서 이미 몇 달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롤리 소위는 전쟁 전의 스탠호프를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가 참호에서 본 대대장 스탠호프는 롤리 소위의 기억에 있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 전입인사를 하러 온 롤리를 바라보는 스탠호프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친동생 같은 롤리였지만, 최전선에서 만나는 롤리를 보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심정이 그의 내부에서 뒤섞이며 심한 내적 갈등이 일어나는 것을 눈동자의 흔들림만으로 느낄 수 있었다.
스탠호프 대위는 전쟁이 발발한 이후 수많은 전투를 치르며 전설적인 군인으로 불리고 있다. 그는 탁월한 지휘관으로, 많은 전투에서 승리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그가 지휘관으로 누구보다 병사 한 명, 한 명에 대한 애정이 깊기 때문이다. 수많은 전투를 치르며 승리하지만, 그만큼 많은 병사를 잃은 스탠호프 대위는, 부하 병사들 한 명, 한 명이 똑같은 '인간'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동료가 그렇게 허무하게 주검으로 변하는 장면을 보면서 비통한 감정과 그 감정을 누르고 전투를 치러야 하는 지휘관으로의 냉정함을 유지해야 하는 이성 사이에서 갈등을 일으킨다.
결국 스탠호프 대위는 견디기 힘든 감정을 억누르려 술을 마시게 되고, 거의 알콜중독에 이르게 된다. 롤리 소위가 스탠호프 대위를 만난 이후, 이야기는 스탠호프 대위를 둘러싸고 측근인 부하 장교들과 연대장의 대화, 갈등을 깊이 있게 보여주고 있다.
영국군은 첩보를 통해 3월 21일, 독일군이 공격할 거라는 정보를 얻지만, 확실한 정보를 알기 위해 스탠호프 대대에 독일군을 생포하라는 명령이 하달된다. 스탠호프 대위는 더 어두워진 다음 공격하자고 주장하지만, 연대장은 상급부대에 보고해야 한다며 오후5시에 공격하라고 다그친다. 이는 분명 병사들이 더 많이 죽게 되는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스탠호프 대위는 연대장에게 반발하지만, 결국 어쩔 수 없는 한계에 부닥친다.
두 명의 장교와 여덟 명의 병사로 침투조를 짜는데, 지휘장교로 스탠호프 대위와 생사고락을 함께 했고, 가장 친하게 지낸 오스본 중위가 차출되고, 롤리 소위는 자원한다. 그렇게 독일군 생포작전이 시작되고, 열 명의 군인이 독일군 참호로 뛰어들어 독일군 한 명을 생포하는데 성공하지만, 살아돌아온 군인은 롤리 소위와 네 명의 병사였다.
전쟁에서 군인은 그저 소모품에 불과하다는 걸 여실히 보여준다. 전투에서 이기는 방법은, 수많은 젊은이를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적군을 더 많이 죽이는 방법이 유일했던 전쟁이 1차 세계대전이었다. 그런 잔혹한 전술 앞에서 '인간'을 생각하는 스탠호프 대위의 심정은 갈갈이 찢겨나간다.
참호 안에서 일어나는 장교들의 갈등, 장교와 사병의 갈등은 연극적 요소가 강하다. 스탠호프 대위는 마치 햄릿처럼 보인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익과는 아무 관련도 없는 전쟁에 끌려들어온 '개인'이며, 명분이라고는 오로지 '국가의 이익'인데, '국가'는 개인에게 어떤 의미인지 명확하지 않다. 단지 '애국심'만으로 명분을 찾기에는 이 전쟁의 참혹함과 잔혹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개개인에게 깊은 내면의 상처를 입히고 있다.
스탠호프 대위의 대대가 참호로 들어간 지 나흘째 되는 날, 독일군의 총공격이 시작된다. 나중에 알려지지만, 이날의 공격은 독일군의 '춘계 대공습'으로 기록되었고, 단 사흘의 전투로 양쪽에서 무려 70만 명이 넘는 사망자가 나왔다.
독일군의 포격으로 롤리 소위는 등에 부상을 입고 스탠호프 대위가 보는 앞에서 죽음을 맞는다. 스탠호프 대위는 포탄이 어지럽게 터지는 참호에서 전사한 병사들을 바라보며 망연자실한다. 그렇게 참호에 있던 영국군 대대는 전멸한다. 포연이 그치고, 전멸한 영국군 사이를 걷는 독일군은 방독면을 쓰고 있다. 1차 세계대전에서 독가스를 썼다는 주장은 사실로 확인되었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스쳐가듯 잠깐 독일군이 방독면을 쓴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전쟁의 참혹성을 알리고 있다.
전투는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극한 상황이라 결코 낭만적이지도, 인간적이지도 않다. 죽음과 삶의 경계가 없고, 어떤 예측도 할 수 없는 불안정한 상황이기 때문에, 군인은 거의 본능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이런 대규모 살상전에서 살아남은 것이 기적이고 우연이라면, 전사한 병사 역시 그의 죽음은 우연일 뿐이다. 문제는, 인간의 존재가 이런 불분명한 명분 때문에 도구로, 소모품으로 소모되고 있다는 딜레마를 스스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병사 개개인은 전쟁의 거대한 구조를 깨뜨리지 못한다. 결국 구조의 틀에 갇힌 개인은 자신의 삶, 생명을 지키지 못하고, 죽음의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어가야 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며, 이런 모순과 갈등이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인 것이다.
이 영화는 1차 세계대전이 배경이지만, 인간의 존재와 극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인간들 사이의 갈등, 내면의 심리를 깊이 있게 다루고 있어 보편적 공감을 끌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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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티리얼리스트 | 당황스러울 만큼 야심 찬 삼각 로맨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야심으로 가득한 당황스러움
당황스럽다. <머티리얼리스트>의 오프닝은 예상과 전혀 다르다. 아직 수렵 단계인 인류가 등장하고, 한 남자가 동굴로 향하는 모습을 비춘다. 동굴 입구에 다다르자 한 여자가 그를 맞이하려 동굴 밖으로 나온다. 수많은 사냥 도구를 정리하던 중에 남자는 잔뜩 가져온 꽃들 중 하나의 줄기를 꺾는다. 그가 반지 모양을 만들어 여자의 손가락에 끼우고, 서로를 그윽하게 바라볼 때 영화는 돌연 현재 시점으로 전환된다.
이 오프닝은 시작 전에 기대했던 로맨스 영화와는 거리가 멀다. 그다음 장면들도 예상을 벗어난다. 한 여자와 두 남자의 삼각 로맨스를 다루면서도 주인공 '루시'(다코타 존슨)는 딱히 어장 관리를 하지 않는다. 그녀는 두 남자와 관계를 깔끔하게 맺고 끊는다. '해리'(페드로 파스칼)'와 존'(크리스 에반스)이 신경전을 벌이는 장면도 눈에 띄지 않는다. <에밀리, 파리에 가다>나 <트와일라잇> 시리즈에 비하면 뭔가가 빠진, 순한 맛이다.
셀린 송 감독은 그 빈자리를 잔잔하고 긴 호흡의 대화 장면으로 채운다. 주인공들이 대화를 나누며 고찰하는 주제의 무게감 덕분에 이 대화는 절대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대담하다. 오프닝과 주인공들의 대화를 이어 본다면 야심도 엿보인다. 서서히 무너지는 만들어진 믿음, 곧 결혼은 낭만적 사랑의 필연적 결과물이라는 이 믿음을 인류의 본질적 가치로 승화시키려는 시도가 바로 그 야심이다.
낭만적 사랑과 결혼
사랑 없이는 결혼해서는 안 된다는 믿음은 우리의 상식과도 같다. 하지만 이 믿음은 절대적 진리가 아니다. 과거에 결혼은 가문의 결합, 재산의 상속, 사회적 안정과 같은 실용적 목적을 위한 계약이었다. 개인의 감정보다는 집안의 이익이 우선시됐다. 남편이나 아내와 사랑에 빠질 수 있다면 행운이었고, 결혼과 사랑의 상대가 달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계약이었던 결혼은 낭만주의 시대를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숭고한 감정의 결실로 변모했다. 낭만주의자들은 사랑을 통해 '소울메이트', 영혼의 반쪽을 찾아야 한다고 믿었다. 사랑은 태초부터 정해진 운명적인 반쪽을 발견하는 과정이고, 결혼은 한 개인의 실존을 완성하는 필연적 종착지였다. 그렇기에 낭만주의라는 종교에서 손익을 따져 결혼을 결정하는 일은 신성모독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가 도래하자 상황은 또 달라졌다. 대부분의 개념을 금전적 가치로 환산하는 세상에서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개인들이 보기에 결혼 역시 손익 계산의 대상이었으니. 그들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도 이익이 되면 결혼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도 결혼이 부담스러우면 안 하기로 결심했다. 애초에 결혼과 사랑이 필연적인 관계가 아니었으니, 계산법이 어렵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2세기 넘게 인류를 지배해 온 낭만주의의 아성이 그대로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사랑이 빠진 결혼은 사회적으로 물의를 낳기 마련이었다. 이에 사람들은 절충안을 찾아냈다. 결혼정보회사와 커플 매니저의 도움을 받기로. 사랑에 빠질 수 있을 것만 같은 조건을 갖춘 사람을 찾아낼 수 있다면, 낭만적 사랑과 물질적 이득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고, 사랑 없이 결혼하는 신성모독도 피할 수 있을 테니까.
완벽한 부자에게 없는 것
뉴욕의 결혼정보회사에서 가장 날 나가는 커플 매니저 루시(다코타 존슨)도 예외는 아니다. 배우 지망생이었던 과거에는 낭만적 사랑의 추종자였지만, 지금은 정반대로 속물적이다. 그녀는 타인을 만나면 언제나 그 사람의 견적을 재기 시작한다. 키와 외모, 학력과 재력, 나이와 직업 등 물질적인 가치로 평가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줄 세워서 등급을 매기는 게 바로 그녀의 일이니까.
따라서 고객의 결혼식장에서 해리를 만나고, 그가 대시를 해온 순간 루시의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다. 그의 고백을 받아주고, 행복한 연애를 즐기다가 결혼식을 올리는 것. 해리는 모든 조건이 완벽했으니까. 그는 잘생겼고, 키도 적당히 크고, 억대 연봉을 받는 금융업 종사자이며, 수십억짜리 아파트와 펜트하우스를 가진 데다가, 성격도 매너 있고 돈을 아끼는 구두쇠 기질도 없다.
그런데 정작 그녀는 해리와는 사랑에 빠지지 못한다. 그보다는 해리를 만난 결혼식에서 우연히 재회한 전 남자 친구 존에게 더 마음이 열린다. 그 차이는 루시와 두 사람의 대화 내용에서 엿볼 수 있다. 루시와 해리는 서로의 조건에 관해서만 이야기한다. 각자의 장점이 어떻게 서로를 보완해 줄 것인지, 그들의 연애와 결혼이 더 좋은 투자로 이어질 것인지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반면에 그들의 대화에는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다. 해리는 루시의 외모, 지적 능력, 공감력은 높게 평가하지만, 그녀라는 사람에게는 정작 관심이 없다. 루시가 근심으로 가득해도 전혀 눈치채지 못할 정도다. 루시도 다르지 않다. 그와 처음으로 섹스하는 순간에도, 그녀의 눈은 해리의 아파트 내부를 둘러보기에 바쁘다. 처음으로 루시가 해리의 다리에 있는 흉터를 궁금해하는 순간 대화를 피하는 모습은 이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상품과 사람의 차이
존과 루시의 대화는 다르다. 그들의 대화 속에는 사람이 존재한다. 존의 연극 뒤풀이에서 둘이 짧게 대화를 나누는 대화만 봐도 알 수 있다. 존은 한두 마디만 주고받아도 그녀가 연극에 집중하지 못했고, 직장에서의 사건 때문에 근심과 걱정이 가득하다는 사실을 알아챈다. 비록 모든 술값을 계산한 해리가 뒤풀이 자리의 주인공이 됐고, 루시의 면도 세워줬지만, 정작 루시와 인간적으로 교감한 사람은 해리가 아니다. 바로 존이다.
이 차이점을 영화는 루시의 시점에서 재해석해서 보여준다. 회사에서 루시는 난관에 부딪힌다. 그녀가 주선한 데이트에 나간 고객, 소피가 폭행과 스토킹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법적 분쟁에 얽힌 것. 루시는 소피에게 사과하려 하지만, 무책임한 말만 되풀이하고 만다. 상대방이 직업도, 키도, 나이도 속인 사실을 속인 것도 모른 채,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저 조건이 맞는 상품끼리 매칭한 그녀의 책임은 절대 지워지지 않으니까.
그 순간 그녀는 깨닫는다. 물질과 조건은 허상이지만, 그 뒤에 숨어있는 사람은 진상이라는 것. 물질적 조건은 언제든 사라지거나 꾸며낼 수도 있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것. 이 사건을 계기로 루시는 다른 사람이 된다. 이전처럼 데이트 상대방의 조건에 집착하는 고객에게 맞춰주지 않고 그들의 환상을 냉철하게 깨버린다. 소피가 도움을 청하면 즉시 달려가서 그녀를 도와주기도 한다. 고객을 담당하는 매니저가 아니라, 친구로서.
존과 함께 즉흥적으로 떠난 여행 동안 나누는 대화에는 그녀의 변화와 깨달음이 함축되어 있다. 우연히 참석한 결혼식을 지켜보며 루시와 존은 조건만 보면 반대해야 할 결혼에 관해 이야기한다. 결혼과 출산, 육아와 가정이 서로에게 가져다줄 긍정적인 변화와 현실적인 어려움에 대해서 가감 없이 털어놓는다.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데이트할 때 해리와 한 번도 나눠 보지 않은 대화다.
그 오프닝이 필요했던 이유
이 대화 끝에 루시는 모든 조건이 완벽한 해리 대신 존에게 마음의 문을 연다. 사랑과 결혼은 사람 간의 일이지, 잘 들어맞는 조건만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니까. 현대인들을 위한 경제적 언어로 이 선택의 이유를 한 번 더 번역해 주기도 한다. 결혼을 계약과 투자의 개념으로 본다면, 루시는 언제든 가치가 변동할 수 있는 존의 직업과 가난함보다는 보장되어 있다는 확신을 준 존의 사랑과 사람 됨됨이에 투자를 결심한 셈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영화는 오프닝 장면을 다시 등장시키며 낭만적 사랑의 가치를 찬송한다. 이 가득한 가방을 멘 존이 공원 데이트 도중 나눠 먹을 음식을 잔뜩 사서 루시에게 가져다주는 장면은 원시인이 꽃다발을 사랑하는 여자에게 가져다준 모습과 겹친다. 또 승진하고 연봉도 인상될 거라는 소식을 루시가 전화로 듣는 순간, 존은 꽃을 꺾어 만든 반지를 루시의 손가락에 끼워준다. 원시인이 그랬듯이.
이 장면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듯하다. 방금 루시가 들은 소식처럼 경제적 조건은 더 좋아질 수도 있고, 반대로 더 나빠질 수도 있다. 하지만 바로 이 반지, 그리고 반지에 담긴 사랑만큼은 변하지 않을 거라고. 이는 흥미롭고도 대담한 왜곡이라서 더 인상적이다. 절대적 진리라 할 수 없는 낭만적 사랑이라는 관념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태초의 인류까지 시간을 역행하는 이 시도는 야심 찬 영화적 허용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셀린 송'다운 균형감
마치 망치에 얻어맞듯이 순간적으로 현실감을 부여하는 셀린 송 특유의 작법은 이 야심 찬 시도를 뒷받침한다. 전작 <패스트 라이브즈>에서 셀린 송은 남녀 주인공이 감동적으로, 운명적으로 재회하거나 관계가 진전해야 할 것 같은 순간마다 갑작스럽게 차가운 현실의 제약을 상기하면서 분위기를 전환하는 연출과 편집을 선보인 바 있다. <머티리얼리스트>에서도 이 독특한 리듬은 제 역할을 해낸다.
우연히 재회한 루시와 존이 미련에 흔들리려는 찰나를 포착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둘의 분위기가 끈적해지려는 순간, 그들이 이별한 날의 모습이 갑자기 삽입된다. 시끄러운 뉴욕의 도로 소음, 주차 비용이 마음에 안 드는 존의 불평, 5주년 기념일에도 어떻게든 돈을 아끼려는 존과 그의 가난함이 서운하고 짜증 난 루시의 이별 통보가 어우러진 덕분에 멜로로 흐를 것 같던 흐름은 단숨에 깨져 버린다.
이처럼 솔직하고도 노골적인 이별 통보와 비슷한 장면이 추가로 등장한 덕분에 <머티리얼리스트>는 최소한의 설득력을 유지한 채 관객을 마지막 장면까지 끌고 가는 데 성공한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직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사건이 자칫 지나치게 판타지적인 로맨스로 흐를 수 있는 이야기의 균형감을 잡아주기 때문이다.
엔딩 크레디트가 마련한 기회
그렇지만 셀린 송의 결론이 모든 관객을 설득하지는 못한다. 관객의 결혼관과 연애관에 따라 감상은 천지 차이기 때문이다. 만약 셀린 송이 제시한 사랑과 결혼의 관념이 본래 본인의 신념과 일치한다면 <머티리얼리스트>는 너무나도 낭만적인 영화다. 반대의 경우라면 이 영화는 너무나도 비현실적이고, 순진하며, 심지어 강적일 수 있다. 물질적인 조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을 가르치려는, 교조적 인상을 남길 테니까.
다만 엔딩 크레디트까지 보고 나면 <머티리얼리스트>의 결말이 마냥 독단적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엔딩 크레디트는 화려한 결혼식이 아니라 시청이나 법원에서 간단한 법적 절차만으로 진행되는 '시빌 웨딩(Civil Wedding)'을 치르는 수많은 커플(오프닝의 원시인 커플을 포함해서)을 보여준다. 이는 마치 낭만적 결혼과 물질적 결혼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립적인 광경을 보면서 영화 내용을 곱씹어 보라는 의도 같기도 하다.
결국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연상시키는 독특한 오프닝과 현실적인 엔딩 크레디트의 조합을 보다 보면 이 작품은 과감한 주장을 제시하고 논쟁을 일으키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결론에 동의하든 안 하든, 시대에 따라 변하는 사랑과 결혼의 관념에 대해 고민할 장을 제공하는 것. 삼각 로맨스 영화에서 마주할 거라 기대하지 않았기에 <머터리얼리스트>의 시도는 더욱 당황스럽고, 야심 차다.
Acceptable 그럭저럭
존을 추천하지만, 해리를 선택해도 그건 당신의 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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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성서사의 관점으로 본 〈탑건: 매버릭〉
오랜만에 속편으로 돌아오는 옛 영화는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기는커녕 옛 추억마저 갉아먹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탑건: 매버릭〉은 오히려 전편(〈탑건〉(1986))보다 훨씬 뛰어난 완성도와 서사를 선보인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영화적 체험’, ‘영화관에서만 할 수 있는 경험’을 극대화하는 정말 재미있는 블록버스터 영화다.
그러나 이 영화가 훌륭한 상업영화라는 것과는 별개로, 〈탑건〉과 〈탑건: 매버릭〉은 남성서사의 관점으로 살펴볼 때 다른 의미에서 흥미로워지는 영화다. 〈탑건〉은 남성판 ‘말괄량이 길들이기’의 할리우드 버전이라 할 만하다. 매버릭은 뛰어난 재능을 지녔지만 반항적 기질과 즉흥적 성격으로 동료‧조직과 자주 마찰을 빚는다. 훌륭한 전투기 조종술로 매번 의심과 회의의 눈초리를 돌파하긴 하지만, 자기 고집대로 비행을 하다가 동료 파일럿 구스가 목숨을 잃는 사고가 발생하자 큰 충격을 받기도 한다.
‘말괄량이 길들이기’와 같은 고전 작품이든 할리우든 영화든, 통제되지 않는 말썽쟁이 캐릭터가 여성인 경우 결말은 늘 비슷하다. 완전히 길들여지거나, 세계와 불화하여 파국을 맞이하거나. 하지만 같은 말썽쟁이임에도 성별만 다른 매버릭은 그들과는 조금 다른 길을 걷는다. 매버릭은 비행을 멈추기는커녕 조직으로부터 네 잘못이 아니니 비행을 멈추지 말라는 독려를 받는다. 결말에 가서는 내내 라이벌 구도에 있던 또 다른 남성 인물에게 인정받기까지 한다. 완벽한 ‘내부자’로 거듭나는 것이다. 어쩌면 이는 주인공의 콜 네임이 영단어 ‘maverick’이라는 데서부터 예정된 것인지도 모른다. ‘개성이 강한[독립적인] 사람’이라는 뜻의 이 단어를 이름으로 쓰는 매버릭에게는 ‘말괄량이’로 불리는 여성들과는 처음부터 다른 결말이 예정되어 있던 것이다.
〈탑건〉이 여성과는 다른 길을 걷는 남성 말괄량이의 사회 진입기를 다룬다면, 〈탑건: 매버릭〉은 어느새 은퇴할 나이가 된 매버릭이 어떻게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이를 유산의 형태로 후대에게 상속하는지를 보여준다. 이는 영화의 기본 설정에서부터 드러난다. 매버릭과 그의 팀은 인간 파일럿보다 무인 조종이 가능한 전투기를 더 선호하는 해군 제독 때문에 위기를 맞는다. 매버릭이 예산을 뺏기지 않고 계속 비행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해야만 한다.
그에게 주어진 미션은 후배 파일럿 교육이다. 적이 관리하는 우라늄 농축 시설을 폭격할 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젊은 파일럿들을 교육하라는 임무가 그에게 주어진다. 〈탑건〉의 속편이 나온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짐작했듯, 매버릭이 교육해야 하는 사람 중에는 그와 함께 비행하다 목숨을 잃은 구스의 아들 루스터도 있다. 루스터는 절차적 문제는 없었더라도 매버릭 때문에 자신의 아버지가 죽었다고 생각하기에 내내 매버릭과 긴장 관계를 유지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영화는 둘이 어떻게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며 화해하는지를 좇는다. 결혼하지 않은 매버릭이 아버지를 잃은 루스터와 유사 가족을 형성하여 ‘아버지-아들’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한때 말썽쟁이였던 한 남자가 어떻게 조국의 위대한 자산이자 누군가의 훌륭한 아버지로 거듭날 수 있었는지를 증명해내는 것이다. 톰 크루즈의 열정과 영화의 완성도에는 기꺼이 박수를 보내고 싶지만, 딸을 남기지 못하고 사그라진 말괄량이 여성들을 생각하면 어딘가 씁쓸해진다.
〈탑건: 매버릭〉에서 흥미로운 또 다른 지점은 주인공들이 폭격해야 하는 적이 누구인지에 관한 구체적 언급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적이 NATO 규정을 위반해 위협이 된다는 언급이 스치듯 나올 뿐이다. 적군의 인종‧국적을 추측할 만한 단서도 없다. 적이 강력하고 악할수록 주인공의 ‘선함’이 부각된다는 점에서 이는 꽤 흥미로운 지점인데, 영화는 화려한 볼거리와 탄탄한 연출, 무엇보다 매버릭과 루스터의 ‘아버지-아들 되기’ 서사에 집중함으로써 적군 얼굴의 빈자리를 채운다. 작전에 성공한 후 기지로 되돌아갈 때, 매버릭과 루스터가 설원 위에서 서로에게 의지하며 진심을 확인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요컨대 ‘탑건’ 시리즈는 다소 길어 보이는 35년의 시리즈 공백을 오히려 영화적 자원으로 활용하여 관객에게 다가가고자 했다. 시리즈의 공백을 한 남성의 생애주기에 맞춰 마치 매버릭이 은퇴할 나이가 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남성서사를 상업 블록버스터와 버무린 것이다. 수십 년을 거슬러 속편을 제작할 탄탄한 역사를 지닌 할리우드의 필모그래피, 그리고 말썽쟁이였으나 끝내 모범시민으로 거듭난 남성 캐릭터는 부러움과 씁쓸함을 동시에 자아낸다. 언젠가 도래할 비非 남성 캐릭터의 귀환 또한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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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어 너머의 언어로
언어를 배운다는 건 단지 말의 외형만을 익히는 일이 아니라, 다른 층위의 세계관을 맛보는 일이 아닐까. 프랑스어를 배우면 자동차, 달, 바다는 여성이 되고 비행기, 해, 땅은 남성이 된다. 모국어가 한국어인 사람으로서는 참으로 낯설게도, 사물에 성별을 붙여 규정하게 되는 것이다. 프랑스어를 배우기 이전과 이후의 관념은 은근하게 달라진다.
한편 일본어를 배우면 존댓말의 형태는 두 갈래로 번져간다. 자신을 낮추는 겸양어와 상대를 높이는 존경어. 우리말에서도 ‘나’를 ‘저’로 부르는 등 낮춤말이 있지만 상대적으로 적다 보니, 동사를 3개씩 외우는 일이 힘든 건 둘째치고 마음이 갑갑하다. 결재 도장까지 깍듯하게 상사 이름 쪽으로 기울여 찍는 문화를 얼핏 느낀다.
언어는 사회성과 역사성을 갖기에, 쓰는 사람들에 의해 규정되고 변형되기 마련이다. 언어의 층위는 그렇게 오랜 시간의 마디마디가 쌓여 이루어진 것이다. 한 인물이 시간과 성별을 뛰어넘어 존재한 400년의 시간을 담아낸 영화 <올란도>는 그 모양을 잘 보여준다.
영화는 자못 간단한 구조로 보인다. 한 젊은 귀족 올란도가 여왕에게 찬사를 보낸 후, 여왕이 저택과 함께 내려준 ‘영원히 죽지도 늙지도 말라’는 말이 고스란히 이루어졌다. 영화에 담긴 400년의 시간은 연극 막처럼 명확한 텍스트 제목으로 나뉘어 있으며, 각 타이틀은 올란도의 삶에서 주요 화두가 어떻게 이동하는지를 보여준다. 올란도를 둘러싼 세상의 언어가 어떻게 변화하는지 살펴보자.
영화가 시작되면 수직적인 관계를 고스란히 담아낸 언어들이 눈에 띈다. 여왕이 올란도의 아버지에게 “그대의 것은 이미 내 것이었다”라고 말할 때도 그렇지만, 올란도를 지칭하는 말은 모두 소유격이 도드라진다. “내 아들, 수족, 마스코트”이자 “나의 승리”. 변하지도, 병들지도, 늙지도 말라는, 말도 안 되는 명령이 실제로 이루어진 것은 그래서였을까? 이 말은 단지 물리 법칙을 어겨서 이상해 보일 뿐, 말도 안 되는 명령들이 ‘까라면 까야지’ 안에서 이루어지는 현실과 그렇게 다르지도 않다.
이 수직성은 훗날 러시아 대사의 딸 사샤를 사랑하게 된 올란도에게서도 보인다. “내가 너를 사랑하기에 너는 내 것”이라는 말에 사샤의 주권은 들어있지 않다. 사샤를 만나기 전 약혼했던 상대가 올란도의 “배신”을 탓할 때는 “남자는 자기 마음을 따를 줄 알아야 한다”라고 가뿐하게 넘겼으나, 얼음이 녹기 전에 돌아가야 한다고 분명하게 피력했던 사샤가 나타나지 않았을 때는 “여자a woman가 배신했다”라고 한다. 고유명사였던 사샤는 일반명사가, 수많은 여자 중 하나가 된다. 소유도 박탈도 올란도의 의지로만 이루어졌다.
훗날 올란도에게 청혼하는 해리와의 대화에서도 비슷한 대사가 재현된다. 여왕이 했던 “집을 주겠다”는 말이나 “내가 곧 영국이고 너는 내 것”이라는 말. 올란도가 했던 “I’m offering my hand”라는 말. 해리뿐이 아니다. 남성 귀족들의 대화는 허세와 과시, 권위로 꽉 차 의미나 감정이 들어갈 여지가 없다. 다리가 아프다는 말을 들어도 공감과 위로는 없고, 과학이나 예술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저 성별에 비유한다. 폄하하고 재단하며, 자신이 조금이라도 더 수직적 우위를 점하고자 끊임없이 재배치를 꾀하는 대화다.
이러한 세상에서, 올란도는 소통의 가능성을 간직한 인물이다. 그래서 그는 세상과 공명할 수 있었다. 러시아어에서 프랑스어로, 프랑스어에서 영어로 언어를 바꾸며 사샤가 소통을 모색할 때 “그냥 영어를 더 크게 말했”던 대부분의 귀족과 달리, 올란도는 사샤와 프랑스어로 대화하며 둘만의 공간을 만든다. 사랑이 끝난 후 잠에 빠졌다가 새로운 챕터로 나아갈 때도 마찬가지다. 시를 탐구하고, 정치의 세계로 나아가 향한 오스만 제국에서도 아랍어 인사말을 익혀 시장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고 있다.
올란도가 간직하고 있던 소통의 가능성은 전쟁을 겪으며 뜻밖에도 성별 전환이라는 방식으로 발아한다. 쓰러져 죽어가는 이를 “적”으로 규정하는 해리와 달리 올란도는 그냥 죽어가는 사람으로 바라보았다. 이것은 균열의 조짐이다. 피아의 위치와 높이가 ‘명징하게 직조’되어 있는 세상의 균열. 아기 울음소리와 비명 같은 고통의 소리들 사이, 전쟁이 낸 균열 사이로 걸어가며, 올란도는 이제 또 다른 언어의 세계로 건너간다.
먼지가 축복처럼 빛나며 내리고, 물과 볕이 얼굴을 적시는 모습은 마치 세례라도 받는 모양 같다. 프랑스어로, 아랍어로 타인과 계속 대화를 시도해왔던 올란도는 이제 전쟁과 지배의 언어를 버렸다. 그때 여성이 되었다는 점은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책 제목을 떠올리게 한다. 단지 성별만 다른, 여전히 같은 사람이다. 평소 큰일이 있었을 때처럼 7일 간 자고 일어난 점도 같다. 그러나 이제 사회가 그를 다르게 대한다. 올란도는 언어의 수직선에서 자신을 끌어내리려는 끊임없는 도전을 받는다. 그 도전을 피하는 길은 남편, 아들처럼 사회가 정한 우산 아래로 들어가는 길이라는 종용을 받는다. 이에 올란도는 자기 자신으로 굳게 서는 방법으로 응전한다. 설령 자신과 닮아 있고 이해의 구석이 있는 셜머딘이 상대라 해도, 올란도는 타인의 일부가 되길 택하지 않는다.
그 무엇의 곁에도 머물지 않고, 올란도는 계속해서 박차고 달린다. 그가 박차고 달리는 것은 과거에 버리고 온, 전쟁과 지배의 언어다. 미로 같은 정원을, 안갯속 들판을 계속 달리며 그는 새로운 세상으로, 새로운 언어의 세계로 나아간다. 영화의 초입부터 불을 든 사람들의 반대 방향으로 걷고 뛰고 있었던 그는, 이제는 임신한 몸으로 전쟁의 포화 속을 달린다. 전쟁의 이름은 밝히지 않는다. 시기의 힌트조차 주지 않는다. 이건 보통 전쟁이 사용하는 언어와는 반대 방식이다.
전쟁은 전쟁만을 명시한다. 보불 전쟁이라든지 펠로폰네소스 전쟁 같은 식으로 승자와 패자를 딱 잘라 명시하고, 뒤켠에 있던 민간인과 피해자들의 기록은 남기지 않는다. 그렇게 모두를 익명성에 가두고 만다. 이 영화는 넘어지면서도 포화를 뚫고 가는 올란도만을 오롯이 비추고, 역으로 전쟁을 익명성에 가둔다. 이는 올란도의 달리기와 나란한 방향이다.
그렇게 영화 <올란도>는 시간을 따라 촘촘히 배치한-사회성과 역사성을 가진- 지배의 언어를 역방향 달리기로 틀어버린다. 억압적인 층위 안에서 유린되어 온 언어의 사필귀정을 꾀하는 시도다. 동시에 이 시도는 자체로 완성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점임을 명확히 한다. 출판사에 건넨 두툼한 원고 더미가, 딸의 손에 들려 있는 카메라가 그 방향성을 드러낸다. 일방적이고 수직적인 소통의 수단으로만 기능하던 언어는 소통을 풍성하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제 예술의 경지로 나아간다. 거기서 생명은 피어난다. “더 이상 운명에 붙들리지 않”고, “삶이 시작되는 것”이라는 대사는 그래서 유의미하다.
오토바이 사이드카에 딸을 태우고, 한때 자신의 것이었던 저택에 유유히 걸어 들어서는 올란도의 모습. 그 걸음은 딱딱한 액자 프레임에 갇힌 초상화와는 달리 분명하게 살아있다. 초상화 바깥의 인간 올란도의 얼굴. 남자의 얼굴도 여자의 얼굴도 아닌, 천사의 노래 가사처럼 “인간의 얼굴”이었다. 딸이 손에 든 카메라 속의 천사. 400년을 살아온 이는 앞으로도 “영원히 죽지도 늙지도 않”을 테고, 언어도 그러할 것이다. 발화와 문자 그 너머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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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2주 최신개봉영화(특송, 하우스 오브 구찌,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청춘적니, 클리포드 더 빅 레드 독)
[WEEKEND CHOICE MOVIE] 2022년 1월 2주차 #개봉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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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https://blog.naver.com/rainb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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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왓챠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 런칭 예고편
음식을 먹기 힘들어져가는 워킹맘, 그리고 그녀를 위한 남편의 마음이 담긴 한 그릇. 애틋한 마음이 담긴 우리 가족만의 특별한 레시피가 올겨울 찾아옵니다.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온 스크린' 섹션 공식 초청작! 왓챠 오리지널 드라마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 12월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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