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a2025-06-23 21:34:06
소년은 나아간다 새로운 세계로
영화 <28년 후> 후기
*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28년 후, 영국은 고립되었고 그것들은 진화했다.
영화 제목 그대로 23년만에 관객을 찾아온 <28일 후>의 속편 <28년 후>는 보다 방대해진 스케일과 서사로 극장을 찾아오게 되었다. (감독이 다른 <28주 후>는 해당 글에서 배제) 무엇보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바로 감염자 커뮤니티이다. 통칭 '알파' 라고 불리는 대장 감염자를 필두로 그들은 자신들의 영역을 넓히고 침입자들을 사냥하며 자신들의 커뮤니티를 공고히 한다. 이들이 주로 경계하는 것은 비감염자 커뮤니티인 '홀리 아일랜드 연합'으로 이들은 밀물과 썰물을 이용해 본토를 넘나들며 물자를 확보하고 스스로를 보호하는 커뮤니티를 형성한다. 어떻게 보면 늘 비감염자의 일방적인 생존기로 그려지던 대다수의 좀비물과 달리 <28년 후>는 위와 같이 두 세력이 공존하고 있음을 보이며 세계관을 이끈다.
아픈 어머니와 다수의 사냥 경험이 있는 아버지를 둔 소년 '스파이크'는 분노 바이러스 사태 이후의 세대이다. 영화 중 침몰한 감시선 해병 '에리크'와의 대화에서 유추할 수 있듯 그는 핸드폰도 필러도 택배의 존재도 모른다. 그가 익혀야 하는 것은 오로지 감염자는 심장과 머리를 쏘아야만 죽는다는 것, 그리고 알파를 상대하지 말 것이 전부이다. <28년 후>의 세계관은 섬나라인 영국을 유럽연합으로부터 격리시켜 전세계적인 팬데믹을 막고자함을 그 배경으로 한다. 새로 태어난 아이들은 수렵과 채집을 익히는 반면 바로 옆나라에서는 여전히 택배를 배달하고 현대적인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한정된 곳에만 찾아온 멸망에 이질적인 기분이 드는 것도 잠시 12살 소년 스파이크에는 과업이 존재하기에 도리어 에리크가 보여준 신기한 문물들은 그다지 관심을 끌지 못한다. 현대 문명은 스파이크의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버지 '제이미'를 따라 느린 감염자를 처치하는 법을 익히거나 아픈 어머니를 돌보는 것만이 스파이크의 삶이다. 이러한 점에 있어 영화가 보이는 전개 방식이 눈길을 끈다. 바로 영화가 다름아닌 좀비물을 보이기보단 한 소년의 성장서사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스파이크의 여정은 아버지의 불륜을 기점으로 초반과 후반으로 나뉜다. 초반 스파이크는 아버지로부터 생존의 방식을 배우게 된다. 그간 비감염자 커뮤니티가 자신들을 지켜온 방식일 것이며 그 다음 세대로 되물려줄 전통이었을 것이다. 12살 소년에게 가혹하더라도 아버지는 그에게 끝까지 사냥의 기회를 주며 알파와 맞닥트린 위기 상황에서도 그에게 절대 해서는 안되는 일들을 지속적으로 언급하며 소년을 성장시킨다. 따라서 커뮤니티를 지켜야만 한다는 가장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 스파이크의 도주는 무척이나 쉽게 이루어진다. 아버지의 불륜은 그러한 내적 외적 커뮤니티에 대한 배신으로 받아들여지며 한 차례에 지날지 몰라도 이미 다음 세대로의 계승은 이루어진 상태였기에 아직 소년일지라도 그는 단순히 커뮤니티 속 안정만을 추구하지는 않게 되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공고하게 지켜왔던 커뮤니티만의 안정이 그에게는 다름아닌 허상이었으니 말이다. 아포칼립스보단 판타지 장르에서 더욱 자주 등장했던 이러한 소년의 성장은 마치 하나의 설화이자 전설처럼 내려오는 어머니를 낫게하는 의사를 찾고자 하는 그의 첫 목표로 이어지게 된다.
좀비가 다루어지는 아포칼립스물에서의 단독 행동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다수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고 그럴수록 커뮤니티가 안겨주는 안정성은 더욱 높아진다. 하지만 스파이크는 과감히, 아픈 어머니와 함께 그녀를 고쳐줄 의사를 찾아 새로운 여정을 떠난다. 이렇게 시작된 후반부에서 소년은 아버지가 알려준 생존의 방식과는 다른 삶의 계기를 알게 된다. 다시 말해 소년은 아버지로부터 생존을, 어머니로부터 삶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28년 후>라는 영화가 무엇보다 빛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사실 그간 감염자가 커뮤니티를 이룬다는 설정은 마냥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윌 스미스 주연의 <나는 전설이다>에서 볼 수 있듯 이미 감염자와 비감염자의 전쟁으로 이어지는 설정 자체는 한 번쯤 접할 수 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폭력의 되물림 속에서 태어난 소년이 어머니와의 여정에서 보게 된 것은 바로 '죽음을 바라보는 방식' 이다. 죽음을 막기 위해 떠난 여정은 도리어 죽음을 기억하게 된 여정이 되었지만 이는 그간 가장 생명이 경시되는 좀비물에서 찾아보기 힘든 형태의 메세지였다.
좀비물은 감염으로 인해 반시체가 된 괴물들을 상대로 생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전개된다. 다시 말해 소수의 생존을 위해서 다수의 감염자를 마구 쏴죽이는 것은 필연적이었으며 그들의 죽음은 생존자의 생존 가능성을 더욱 높혀주는 필수요소나 다름 없었다. 비극을 위해서라면 늘 생존자 중 한명이 비참하게 뜯어먹히기도 하였으며 처절하게 생존을 부르짖다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경우가 대다수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머니와의 기나긴 여정 끝에 소년이 맞이하게 된 것은 추정컨대 면역자인 아기, 즉 새 생명이며 또 하나로는 감염자와 비감염자를 가리지 않고 찾아오는 죽음이다. 캘슨 박사는 좀비라 불리어지는 이들은 그저 바이러스에 감염된 이들에 지나지 않았음을 자신이 만든 건축물로 하여금 강조한다. 생존을 위해 서로를 죽이는 것이 정당화 된다면 그들이 가지는 죽음의 가치도 같을 것이다. 한 차례 전세계적인 팬데믹을 거친 지금의 관객으로써도 공감이 가능한 부분이기도 하다. 감염된 자와 감염이 되지 않은 자일 뿐이다. 죽여 마땅한 좀비는 없으며 그저 서로의 커뮤니티를 형성한 채 지금의 영국은 영토 전쟁 중일 뿐인 것이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은 생명이 경시되던 장르에서 강조되기 쉽지 않다. 그야말로 홍수같이 죽음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몇 십년간 켈슨 박사는 챙길 수 있는 모든 시체를 수습해 그들의 뼈로 건축물을 형성한다. 토양 아래 뼈는 바스라질지라도 건축물은 시간을 통과하는 장소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 영화는 덧붙인다. 많은 이들이 죽어나가는 장르에서 등장한 이 뼈탑의 의미는 그러하다. 이 바이러스가 불러온 비극을 기억하고 살아가겠다는 것이다. 이 주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스파이크는 그곳에서 어머니를 쌓아올린다. '메멘토 아모리스', 소년은 그렇게 죽음을 기억함으로 사랑했다는 사실 마저 기억에 남기게 된다. 직접적인 죽음의 경험이 아니었더라면 가능하지 않았을 성장이었을 것이다.
결말부 스파이크는 어머니의 이름을 딴 아기를 홀리 아일랜드에 넘겨주고는 다시금 모험을 떠난다. 이미 외적으로도 내적으로도 성장한 소년은 더더욱이 스스로가 경험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게 스파이크는 영화 전반에 걸쳐 미스테리로 남은 '지미'와 마주하게 된다. 부모를 전부 잃으며 시작된 지미의 서사는 더욱이 이런 스파이크의 서사와 대비된다. 자신의 커뮤니티를 공고히 하기 보단 고독한 모험을 떠난 그와 달리 자신만의 독자적인 종교 커뮤니티를 형성한 지미가 추후 그와 어떤 마찰을 빚게 될지 속편을 기대시키며 말이다.
한편 영화는 <28일 후>의 오마주도 놓치지 않는다. 오프닝 시퀀스를 비롯해 스파이크의 첫 사냥까지 저예산으로 제작 된 <28일 후>에서 돋보이던 특유의 화면 질감이나 편집, 음악 사용 방식을 철저하게 따라간다. 이때의 효율적인 편집은 굳이 인물의 입을 빌려 세계관을 설명하지 않고 말 그대로 야생으로 회귀하게 된 영국의 상황을 보여주며 이들이 3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어떻게 생존해왔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정글북>으로 유명한 러디어드 키플링의 작품 <부츠>가 인용된 사냥 시퀀스의 음악은 <28일 후>를 떠올리게 하는 최적의 장치이자 주인공이 처한 배경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군화를 강조하며 '제대 할 수 없다' 라는 가삿말은 작중에서는 전쟁 이후에도 트라우마에 갇혀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던 군인들을 뜻했으나 영화 내에서는 지속되는 감염자와 비감염자의 대치 상황을 강조하는 동시에 대물림 되는 폭력을 보여주는 구간이기도 하다. 또한 감염자 역시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는 집단인 것으로 미루어보아 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단순 생존일 뿐만 아니라 양 진영간에 벌어지는 영원한 전쟁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해당 곡의 사용은 지난 28년 간 이루어진 대치 상황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뿐 만 아니라 후반부 켈슨 박사를 찾아나선 스파이크의 여정은 지난 <28일 후>에서 짐이 보여준 경로와 유사한 점이 있다. 성당을 비롯해 철길, 생존 병사와의 만남 등은 지난 몇 십년 간 <28일 후>의 귀환을 기다렸던 이들에게 원작을 상기시켜주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이때 눈여겨볼만한 흥미로운 지점은 폭력을 되물림하던 아버지와 아들이 몰고온 것은 알파, 즉 진정한 폭력과 분노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엄청난 속도로 그들의 뒤를 쫓아오던 알파를 상기한다면 그의 모습은 침입자를 응징하고자 쫓아왔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이미 한 차례 스파이크와 제이미는 순록의 머리로 표시된 영역을 침범한 바 있으며 영토 침범은 전쟁의 선포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머니와 함께했던 여정 이후 스파이크는 그런 죽음과 폭력 속에서 태어난 새로운 생명을 갖고온다. 아이의 이름이 어머니를 따 만들어진 것을 생각한다면 아이는 그 자체로 '메멘토 아모리스' 기억된 사랑과 다름이 없다. 영화는 이렇게 말한다. 계속되는 전쟁과 폭력만으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고 그저 뺏고 빼앗길 뿐이라고, 하지만 그 안에 존재하는 존중과 기억은 세대를 다른 곳으로 이끌어주리라고. 스파이크는 서사 속에서 아주 노골적인 교두보 역할을 담당한다. 유약했던 소년은 두 차례에 걸친 부모의 전승으로 고립된 시대의 새로운 바람이 되어줄 것이다. 아직은 그 여정을 조금 더 지켜봐줘야 할지 모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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