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2021-09-30 16:15:12
캔디맨, 캔디맨, 캔디맨, 캔디맨… 캔디맨
영화 〈캔디맨〉(1992), 〈캔디맨〉(2021) 리뷰
1992년과 2021년의 〈캔디맨〉 포스터
*글에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 김춘수 시인의 시 〈꽃〉의 한 구절이다. 명확한 형태를 지니지 못한 채 부유하던 ‘그’는 호명을 통해 꽃이라는 구체적 물질성을 부여받는다. 누군가의 이름을 공들여 불러주면 추상적인 것이 물질이 되고, “무엇이 되고 싶다”는 욕망을 지닌 존재('그')의 욕망은 현실이 된다. 호명은 존재를 소환하는 정치적 행위다.
영화 〈캔디맨〉은 호명과 주체성의 문제에 흑인을 대상으로 한 인종 폭력 문제를 결합한 미스터리‧공포 영화다. 1992년에 처음 개봉한 후 두 편의 후속작이 나왔고, 올해는 흑인 문제와 미스터리 장르를 성공적으로 결합하여 자신만의 영역을 넓히고 있는 조던 필 감독(〈겟 아웃〉, 〈어스〉 연출)이 각본을 써 새로 만들어졌다. 완성도가 떨어지는 〈캔디맨2〉, 〈캔디맨3〉은 제외하고, 1992년과 2021년에 같은 이름으로 개봉한 두 〈캔디맨〉의 궤적을 따라가 보자.
두 영화의 핵심 소재는 모두 도시 괴담이다. 거울을 보고 캔디맨의 이름을 다섯 번 부르면, 손목이 잘려 피가 뚝뚝 흐르는 팔에 갈고리를 꽂은 캔디맨이 나타나 이름 부른 자를 잔인하게 살해한다는 게 괴담의 내용이다. 흑인 빈민가였던 카브리니 그린이 재개발된 후에도, 캔디맨 괴담은 끊이지 않고 전승되었다. 두 영화의 주인공은 모두 처음에는 캔디맨 괴담을 믿지 않다가, 호명을 통해 캔디맨을 소환한 후, 하락 혹은 상승의 길을 걷는다. 그리고 여기에 윤리, 정치가 결합된다.
1992년 〈캔디맨〉의 주인공 헬렌 라일
먼저 1992년의 〈캔디맨〉이다. 도시 전설에 관한 논문을 쓰는 헬렌 라일은 캔디맨 괴담에 흥미를 느낀다. 그녀는 도시 전체가 일상적 공포를 전설적 존재 탓으로 돌리는 상황에 문제의식을 갖는다. 때문에 캔디맨 괴담을 연구하면 사람들이 괴담을 믿는 구조적‧실제적 원인이 드러날 거라 생각한다.
헬렌은 캔디맨 괴담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흑인 빈민가로 향한다. 그런데 그녀가 캔디맨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피가 낭자한 잔혹한 범죄가 잇따라 발생하는데, 현장에는 늘 정신을 잃은 헬렌이 있다. 헬렌을 걱정하던 사람들은 점차 그녀를 의심하고, 결국 그녀를 정신병원에 감금하기에 이른다.
헬렌이 사회와 멀어질수록, 캔디맨과는 더욱 가까워진다. 캔디맨은 수시로 나타나 자신과 함께 불멸의 존재가 되자고 속삭인다. 헬렌은 자신을 둘러싼 절망적 상황에 휩쓸려 캔디맨의 제안을 수락하지만, 그의 말이 거짓임을 깨달은 후에는 캔디맨이 희생물로 삼으려 납치한 어린아이 앤소니를 구하는 윤리적 선택을 내린다. 그러나 한순간이나마 캔디맨의 제안을 수락한 대가는 가혹했다. 앤소니를 구하는 과정에서 끔찍한 부상을 당한 헬렌은 억울함을 해소하지 못한 채 또 다른 캔디맨이 되어 도시를 부유한다.
어린 앤소니를 구하는 헬렌(1992)
이번엔 2021년의 〈캔디맨〉이다. 주인공은 앤소니다(헬렌이 캔디맨에게서 구한 그 앤소니가 맞다). 그는 새로운 그림을 그리지 못해 힘든 시기를 보내는 남성 화가로 성장했다. 괴로워하던 앤소니는 캔디맨 괴담을 듣고 예술적 영감을 얻어 작품을 만들어 낸다. 작품의 이름은 〈Say my name〉이다. 사람들이 장난 삼아 캔디맨을 '호명'하라는 작품의 요청에 따르면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파국이 시작된다. 앤소니는 무시받던 자신의 예술이 캔디맨의 부활과 더불어 화제가 되자 묘한 쾌감을 느낀다. 그런데 캔디맨이 활보할수록 앤소니에게도 변화가 생긴다. 앤소니가 캔디맨과 연결된 존재임을 암시하는 증거가 점차 늘어만 간다. 혼란 끝에 앤소니는 자신이 캔디맨의 희생물이 될 운명이었음을, 미친 여자라는 오명으로만 남아 있는 헬렌 덕에 살아남았음을 알게 된다. 앤소니는 결국 캔디맨이 되어 예정된 운명에 굴복한다.
2021년 〈캔디맨〉의 주인공 앤소니
1992년의 헬렌은 앤소니를 캔디맨으로부터 구해줬다. 그러나 2021년의 앤소니는 이 사실을 알고 난 후에도 캔디맨이 되었다. 왜 앤소니는 헬렌이 목숨을 걸고 그의 운명을 바꿔줬음에도 이를 되돌리려 하는 걸까? 캔디맨이 되는 것이 ‘윤리의 연장’이기 때문이다. 앤소니의 선택을 이해하기 위해선 캔디맨 괴담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알아야 한다. 1992년 영화에도 캔디맨이 어떻게 탄생했는지가 나온다. 하지만 영화는 이를 캔디맨이 뿜는 공포를 극대화하는 자원으로만 활용한다. 하지만 2021년의 영화는 캔디맨의 탄생을 더 적극적으로 독해하여 영화의 주제로 가져온다. 1992년의 영화가 극한의 공포 속에서도 앤소니를 구해 내는 헬렌 개인의 윤리에 집중했다면, 2021년의 영화는 캔디맨을 흑인이 감당해 온 폭력의 계보에 맥락화시킴으로써 불합리한 인종 폭력을 고발한다.
최초의 캔디맨은 흑인 화가였다(앤소니의 직업도 화가다). 그는 지역의 저명한 백인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일을 했는데, 그러다 한 유력 백인의 딸 ‘헬렌’의 초상화를 그리는 일을 맡는다. ‘불행히도’ 그들은 사랑에 빠지고 임신을 한다(1992년의 영화에서 캔디맨이 같은 이름을 가진 연구자 헬렌에게 집착하는 이유다). 헬렌의 아버지는 격분하여 흑인 화가에게 잔혹한 응징을 가했다. 그의 팔을 자른 후 갈고리를 박아 넣었고, 온몸에 꿀을 발라 벌에게 쏘이게 했으며, 괴로워하는 그를 불에 태웠다. 즉 최초의 캔디맨은 흑인 남성에 가해진 린치의 희생자였다.
캔디맨이 죽지 않은 건 흑인 린치가 중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캔디맨’이란 이름은 아이들에게 칼날이 든 사탕을 나눠준다는 누명으로 린치를 당한 흑인 남성의 사례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린치를 당한 흑인 남성들은 분노, 공포, 원한을 응집한 캔디맨으로 다시 태어나 무차별 복수를 감행한다. 캔디맨의 살인을 흑인 대상 린치에 '균형을 잡는 폭력’으로 볼 수 있는 이유다.
헬렌을 협박‧유혹하는 캔디맨(1992)
1992년의 영화는 캔디맨이 형체 없이 소문, 꿈, 공포로만 존재한다고 말하며, 2021년의 영화 속 캔디맨은 거울 안에서만 움직일 수 있다. 그런 캔디맨이 물리적 공간에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건 사람들이 캔디맨을 믿고 그를 호명할 때, 즉 그의 추상성에 물질성을 부여할 때다. 사람들이 여전히 그의 이름을 잊지 않고 불러주기에 캔디맨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다시 한번, 사람들이 캔디맨을 잊지 못하는 건 여전히 흑인이 린치를 당하기 때문이다. 흑인의 생명값이 백인보다 낮게 매겨져 하찮게 여겨지는 한, 캔디맨은 영원히 죽지 않고 ‘호명’되어 ‘복수’를 이어갈 것이다. 그러므로 “내 얘기를 모두에게 전해”라는 2021년 캔디맨의 마지막 말은 흑인 린치에 대한 엄중한 경고다. 흑인 린치가 멈추지 않으면 캔디맨도 멈추지 않는다. 흉흉한 도시 괴담은 흑인을 향한 물리적 폭력이 중단될 때에야 사라질 수 있다.
폭력에 대항하는 원한적 주체로서의 캔디맨이라는 호명은 주류사회에 포섭되지 않은 소수자의 경험‧분노가 왜 미스터리‧공포의 영화 장르로 이어졌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해되지 못하는’ 소수자의 감정은 ‘이해할 수 없는’ 공포의 대상이 되어 우리 주변을 횡행한다. 소수자가 겪는 폭력이 이해 불가능한 미스터리로 남는 한 캔디맨은 불멸이다. 캔디맨을 향한 공포는 인종차별 사회의 자업자득이다.
캔디맨, 캔디맨, 캔디맨, 캔디맨… 캔디맨. 다섯 번의 호명 이후에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 사회는 도래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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