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2024-03-13 08:11:05
다정하고 따뜻하게 꿈틀거리는 관계의 성장통
영화 〈로봇 드림〉
뉴욕 맨해튼. 도그는 혼자인 게 외롭다. 누군가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다른 동물을 보며 부러워한다. 특별한 것 없는 일상은 무료하게 반복되고 그럴수록 도그의 외로움도 커진다. 여느 때처럼 소파에 늘어져 TV를 보던 어느 날이었다. TV에 반려 로봇 광고가 나오고, 도그는 홀린 듯 로봇을 주문한다. 설레는 마음으로 주문한 로봇은 도그를 위해 만들어진 것만 같다. 둘은 함께 산책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게임을 하며 차곡차곡 우정을 쌓아 나간다. 그럴수록 둘의 행복도 함께 커진다.
그러던 어느 날 둘은 바닷가로 향한다. 역시나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그런데 뜻밖의 사고가 생긴다. 바닷물이 로봇의 몸을 굳게 만든다. 도그는 하는 수 없이 내일 다시 와 녹이 슬어 움직이지 못하는 로봇을 데려가기로 한다. 하지만 다음 날 다시 찾은 해변은 폐장 안내와 함께 출입문이 굳게 닫혀 있다. 도그는 몰래 해변 진입을 시도하지만 번번이 경찰에게 가로막히고, 로봇을 되찾기 위해 시에 민원을 넣어보지만 끝내 출입을 반려당한다. 몇 개월 동안 둘은 떨어져 있어야만 한다.
둘은 몸과 마음을 다해 서로를 무한히 그리워한다. 기분 좋게 재회하는 꿈, 어렵게 찾아갔더니 버림받는 꿈…… 아끼고 사랑하는 존재와 원치 않는 이별을 했을 때 겪을 법한 감정의 파고가 이어진다. 아기자기한 작화에 담긴 감정의 크기가 만만치 않다. 이 '부조화'가 오히려 이별의 아픔을 증폭한다. 원치 않는 우정의 단절이 주는 감정으로 힘든 시간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자칫 이야기가 지루하다고 느낄 수도 있겠다. 그만큼 섬세하게 도그와 로봇이 서로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좇는다.
영화는 누군가를 간직하며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네가 없더라도 삶은 어떻게든 이어진다. 그러나 결코 이전과는 같을 수 없다. 일상의 모든 곳에서 너의 흔적을 떠올린다. 공연히 빈자리를 그리워한다. 심지어는 네가 없다는 데 화가 나기도 한다. 새로운 관계를 꾸려 또 다른 행복을 만끽하는 순간에도 불현듯 옛 기억과 현재가 겹친다는 자각에 움찔할 때도 있다. 요컨대, 우리는 나름의 방식으로 각자의 삶을 살아가겠지만 그 모든 것에는 너의 흔적이 남아 있다. 길고 긴 그리움의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로봇은 도그를 찾는다. 둘은 이전처럼 다시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서로를 그리워한 이들의 마음은 어떻게 연결되고 이어질까?
대사 하나 없이 감정을 차곡히 쌓아 올리는 영화는 깜짝 놀랄 만한 결말로 나아간다. 아마도 영화의 메시지를 더 강렬하기 부각하기 위한 선택인 듯하다. 아니, 어쩌면 지극히 현실적인 결말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꽤 여운이 남는 결말이다. 살면서 한 번쯤은 겪어봄 직한, 그로 인해 조금은 더 성숙해졌을 관계의 성장통이 마음 깊은 곳에서 다시금 꿈틀거린다. 비인간 존재들이 주인공이라 그런지 때로는 잔혹하기도 한 인간관계의 또 다른 측면은 잠시 잊게 된다. 그저 따뜻하고 다정한 우정이라는, 어쩌면 판타지일지도 모르는 관계에 몰입하게 된다. 잔잔한 여운을 남기는 영화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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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풋풋한 종이 내음 첫걸음
누가 봐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천재들이 있다. 그들의 영역은 확고하지만, 아무에게나 허락되지는 않는다. 좁은 문을 여는 이들은 강렬하다. 때론 자신을 불태워 버릴 만큼 이글거리기도 하고, 모난 정처럼 망치를 맞는 경우도 있다. 꿈꾼다고 이룰 수 있는 것 같지도 않지만, 이런 삶을 꿈꾸는 이도 현저히 적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라고 말하고 싶어지는 마음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감각적인 언어로 소설을 쓰는 일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상태에서 막연하게 동경만 하는 이가 있다면. 그가 꿈꾸는 작가 상도 분명 그런 파괴적 천재는 아니기가 쉽다. 보기 좋은 카페에 앉아, 멋진 도구(노트북이 됐든 만년필이 됐든 연필이 됐든)로 글을 쓰고 있는 모습에 가깝기가 쉽다. 겪어보기 전까지는 '창작의 고통'이라는 말조차 달콤해 보인다. 이 문장은 저격이라기보다 자아비판이다. 내게도 낯설지 않은 감각이므로.
<마이 뉴욕 다이어리>가 시작되면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보며 풋풋한 미소를 짓는 조안나도 그런 단계에 있다. 5개 국어를 하고 여행을 다니고 소설을 쓰는 삶을 살고 싶었다고 말하며 웃는다. 그리고 지금은 조안나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그의 사회생활 초년기다. 잡지에 시를 투고해 등단했고, 친구를 만나러 왔던 뉴욕에 눌러앉는다. 싸구려 아파트에서, 카페에서 글을 쓰는 작가의 삶을 살고 싶은 마음에. 그리고 이 삶을 이어가기 위해 일자리도 구한다. 작가 에이전시에서 일하면서, 작가(이자 작가 지망생)인 자신의 정체성은 숨겨 두어야 하는 이중생활이다.
<마이 뉴욕 다이어리>는 뚜벅뚜벅 혼자 삶을 개척해 가는 젊은이의 성장을 담으려 했다. 해리와 샐리의 설왕설래 없이 혼자서 걷기에도 뉴욕은 아름답다는 것을, 악마도 프라다도 아닌 상사 아래서 충분히 단단한 시간을 쌓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 인간의 젊은 날이 어떻게 시작되는지, 풋풋한 종이 내음 안에서 따스한 톤의 색깔로 펼쳐 보인다. 다만 영화의 전개도 어쩐지 그만큼 풋풋하여 아쉬움을 남긴다.
이 영화의 원제는 <My Salinger year>다. 여기서 샐린저는 "그 유명한" 소설가 J.D. 샐린저. 이런 "그 유명한" 이들의 작품을 안 봤다고 하면 사람들은 "그걸 안 봤다고?" 하며 놀라는데, '나만 안 본 천만 영화', '나만 안 본 베스트셀러'는 사실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나름대로 열심히 읽고 쓰며 지내온 조안나지만, 미국 십대라면 읽지 않을 수 없다는 <호밀밭의 파수꾼>을 비롯해 샐린저의 책은 한 권도 읽지 않았다. (이런 걸 말할 때는 좀 부끄러운데, 나도 그렇다.) 뉴욕에서 새로 사귄 남자친구도 "믿을 수가 없다"라고 반응하지만, 어쩌겠는가. 안 읽은 걸.
그런 조안나지만 문학 전공을 따라 작가 에이전시에서 일하게 되고, 맡게 된 작가가 하필 샐린저다. 보통의 작가와 달리 계약 관계를 검토하거나 출판 현황을 체크하는 업무보다, 작가의 은둔 생활을 보호하는 것이 주요 임무다. 세계 곳곳에서 보내오는 팬들의 편지는 잘 검토한 뒤 갈아버리고, 정해진 양식대로 답장을 보내야 하며, 다른 시간에는 타자기로 녹취록을 풀어내는 단순 업무가 대부분이다. 정작 타자기도 칠 줄 모르고, 에이전시에서 선호하지 않는 '작가'지만, 그 사실은 잘 숨긴 채 무사히 취업에 성공한다. 그리고 가끔 샐린저와 통화할 기회가 생긴다.
시고니 위버가 분한 사장 마가렛은 이미 산전수전 다 겪고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성공한 직장인이다. 배경인 1995년 기준으로 사무실에 컴퓨터를 들이고 싶지 않다며 타자기 사용을 고수할 만큼 변화를 좋아하지 않지만, 감각은 기민하다.
분명한 마이 웨이를 가진 상사와, 정석대로는 가지 않지만 아이디어 반짝이는 신입이라는 클리셰. 샐린저의 팬들에게 '진심 어린' 답장을 보내고 싶다는 조안나는 마가렛과 의견이 부딪고, 그 과정에서 서로의 장점을 인정하게 되겠지. 상사는 신입을 키워볼 만한 좋은 젊은이로 인정하고, 신입은 상사의 연륜과 보호에서 더욱 성장할 것 같은 느낌이다. 동시에 샐린저를 통해 문학을 향해 힘찬 도약을 이루게 되겠지.
게다가 그 배경은 90년대의 정취가 담긴 아름다운 소품과 의상, 낭만을 가득 담은 뉴욕의 정경, 그 안에서 펼쳐지는 싱그러운 초년의 시절. 아름다운 정서를 담뿍 전달하기에 더할 나위가 없다.
그 기대는 살짝 아쉬운 선에서 충족된다. 마가렛과의 관계도 샐린저와의 관계도 또한 팽팽한 힘 없이 축 늘어진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유가 뭘까. 나는 조안나라는 캐릭터의 설정에는 공감했지만, 그 설정은 영화 속 언행과 매끄럽게 이어지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시로 등단했다는 점, 대학원을 중퇴하고 뉴욕으로 왔다는 점, 글을 쓰고 싶어 한다는 점을 대사로는 설명하는데, 극 중 모든 행동에선 드러나지 않는다는 느낌. 마치 내가 처음 썼던 단편 시나리오 같다. 내용을 전달해야 한다는 점에 급급해서 정작 사건으로는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고, 설정해둔 캐릭터 특성을 대사에 마구 욱여넣었던…
샐린저라는 작가를 맡은 에이전트임에도 러닝타임 후반부에서야 샐린저를 읽기 시작하는 인물이, 샐린저의 책에 감명을 받고 편지를 써오는 사람들에게 대체 무슨 답장을 하고 싶어 하는지? 조안나는 '진심' 어린 답장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가 보내고 싶은 진심이 대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글을 쓰지 못하는 자신을 괴로워한다는 설정도,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잘 아는 감정이기에 넘실넘실 다가올 뿐 영화에서 잘 보였는지는 모르겠다.
물론 영화 속 인물이 꼭 실제 직장인처럼 행동할 필요는 없다. 조안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보여줄 수도 없다. 그러나 결말까지 가는 동안 조안나에게 일어나는 변화는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 배경이 직장이고 직업적 성취에 대한 이야기라면, 어느 정도 일에서도 글에서도 보여줘야 하는 영역이 있지 않을까? 바둑 두다 낙하산 타고 대기업 들어간 장그래도 '쟤는 언제 자나?' 싶을 정도로 노력하는 모습들을 함께 담아, 가까스로 쌓은 기초 지식에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붙여 자기 자리를 확보해간다는 설정에 개연성을 확보했듯이. 그런 개연성의 노력이 없는 채로 조안나는 엉성하게 그려지다 말았다. 그럼에도 얼기설기 풀려나가는 조안나의 시간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말로 스토리를 눙쳐 버리는 수준이다.
샐린저와 마가렛에게 각각 문학 조언과 업무 조언을 들으며 성장의 양 날개를 펴는 지점에서는 다소 의구심이 일지만, 동시에 그 미숙하고 모자란 면면은 조안나라는 캐릭터의 매력이기도 하다. 미숙하고, 엉망진창이고,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일단 발을 떼어 보는 것. 그 시기가 아니라면 차마 가질 수 없는 마음. 많이 계산하지 않는 속내. 그래서 어쩐지 응원하고 싶어지는 단계. 그때 동경하는 삶을 따라 뚜벅뚜벅 걸어간다는 건 축복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이 마음이 문학을 사랑하는 마음과 명확한 연관 관계가 있는지 그건 모르겠다. 다만 나는 문학과 얽힌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길 잃은 기분도, 그걸 박차고 풋내 나는 발걸음을 떼기 시작할 때의 기분도. 멋진 어른을 보며 존경하기도 하지만 결국 나는 내 길을 갈 수밖에 없다는 깨달음과 동시에, 불어오는 바람이 머리칼을 날리고, 내가 여기 있구나, 새삼스러운 그 기분. 막연함과 외로움, 설렘. 그 자리에 함께 놓여 있는 문학.
미묘한 아쉬움을 그렇게 젊음과 문학이라는 단어가 벌충한다. 포스터 카피대로 여기는 인생의 마지막 페이지가 아니라 첫 페이지니까. 그렇게 자신을 알아가고, 세상을 알아가고, 그렇게 자라날 테지. 내게 이 이야기가 멋진 성장기로 다가오진 못했지만, 그럼에도 씩씩하게 발을 떼는 조안나의 첫걸음에서는 풋풋한 종이 내음이 났다.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에서 시사회에 초대받아 감상하고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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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직함으로부터의 구원
*본 영화의 내용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272kg의 거구로 세상을 거부한 채 살아가는 대학 강사 ‘찰리’는 남은 시간이 얼마 없음을 느끼고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10대 딸 ‘엘리’를 집으로 초대한다. 그리고, 매일 자신을 찾아와 에세이 한 편을 완성하면 전 재산을 주겠다고 제안한다.
<더 웨일> 줄거리
처음 시작부터 강렬하다. 우연히 들른 집에서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찰리의 모습을 본 토마스에게 찰리는 종이에 적힌 글을 읽어달라고 한다. 그 글이 도대체 뭐길래 곧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 응급조치가 아닌 읽어달라는 부탁을 한 것일까?
자신의 친구이자 간호사인 리즈가 도착하고 나서야 진정된 찰리에게 토마스가 왜 이 글을 읽어달라고 했는지 물었을 때 그 의문이 해결된다.
'이것을 들으며 죽고 싶었다.' 찰리는 이렇게 말한다.
그럼 여기서 죽음을 목도에 둔 찰리를 발견한 토마스를 살펴보자. 토마스는 왜 연고도 없는 찰리의 집 문을 두드린 걸까?
그는 새생명 교단의 선교사이다. 집들을 방문하며 자신들의 교리를 전파하려는 다르게 말하면 타인을 '구원'시키기 위해 움직이는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 찰리라는 인물이 눈에 띄었다.
곧 죽을 것 같은 모습을 하면서도 자신을 살려달라고 하는 것이 아닌 에세이 하나를 읽어달라고 하는 인물이 말이다. 그래서 찰리는 그를 '구원'해주기로 한다.
하지만 구원에 회의적인 찰리의 태도뿐만 아니라 찰리의 친구인 리즈는 새생명 교단에 적대적이까지 해 그의 구원은 순탄치 않다.
그들의 태도는 언뜻 보면 평범한 사람들의 반응 같지만 자세히 들여보면 사연이 있다.
리즈의 오빠이자 찰리의 연인이었던 이는 새생명 교단에 속해 있었지만 내쳐졌고 결국 끝은 죽음이었다. 이런 상황을 봤을 때 오히려 토마스를 반기는 찰리가 이상할 정도이다.
하지만 리즈의 적대적인 태도에도 토마스는 계속해서 찰리를 찾아오고, 찰리는 친절하지만 선을 긋는 듯한 태도를 유지한다.
이런 지지부진한 상황이 계속해서 이어지며 토마스의 '구원'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찰리의 딸, 엘리이다. 찰리에게 소중한 존재 중 하나인 엘리의 등장은 곧 그에게 ‘구원’이 내려올 것이라는 생각을 자아내게 만든다.
엘리는 자신을 버리고 떠난 찰리를 증오한다. 그리고 그것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인물이다. 어떻게 보면 엘리가 가장 솔직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면 찰리는 에세이를 쓸 때 솔직함을 강조하지만 자신의 모습을 절대로 드러내지 않고, 리즈는 찰리가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다고 말하지만 그의 의지와는 반대로 그가 살기를 바란다.
그리고 토마스는 사실 교단의 돈을 훔치고 도망친 자신의 의견대로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렇게 모순 투성이인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솔직함을 가지고 있는 엘리는 파란을 가져온다.
엘리는 끊임없이 찰리의 가장 드러내고 싶지 않아 하는 부분을 건드렸고, 종국에는 찰리를 비롯한 리즈, 메리(리즈의 엄마), 토마스까지 파멸로 이끈다. 아니, 이끄는 듯하다.
엘리에 의해 찰리와 다시 만난 메리는 찰리에게 숨기던 엘리의 탈선을 들켜버린다. 또한 리즈는 자신을 속이고 엘리를 위한 돈을 모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엘리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토마스의 말을 녹음해 토마스의 부모님과 교단에 보낸다. 이런 행동은 이들을 파멸로 이끄는 듯 보이지만 메리는 찰리와의 대면을 통해, 리즈는 실망하여 떠나지만 다시 돌아오는 것을 보면, 또 토마스가 흥분한 듯 찰리에게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도리어 엘리의 솔직한 행동이 그들을 구원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찰리의 모습을 자신의 SNS에 올리는 엘리의 행동을 시작으로 찰리는 각종 외부에서 오는 자신에 대한 혐오감을 온몸으로 받게 된다. 자신이 자주 시키던 피자집의 배달원의 놀라 달아나는 모습을 보며, 토마스가 자신에게 구원을 내리기 위해 찰리의 사랑을 부정하다 끝내 숨겨놨던 찰리에 대한 혐오감을 내비치는 모습을 보며 결국 자기혐오를 터뜨려 버린다. 자신의 강의를 듣던 학생들에게 카메라를 켜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는 지나가는 새들에게도 먹을 것을 나눠주던 심성을 가진 이었다. 즉, 찰리는 다들 악마라고 하는 엘리의 행동들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엘리의 솔직함이 다른 이들에게 구원이 됐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자신 역시 남에게 가감 없이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도리어 솔직함을 드러냈다는 것을 깨닫는다.
깨달은 찰리는 엘리에게 계속해서 그가 완벽하다 말해주고, 끝끝내 엘리가 읽어주는 엘리 자신이 쓴 '모비딕'에 대한 에세이를 들으며 자기혐오를 버리고 엘리에게 직접 걸어감으로써 스스로를 구원한다.
이 영화 속 찰리는 '모비딕' 속 에이허브 선장이 되기도 하고 모비딕이 되기도 한다. 에이허브 선장이 복수심에 불타는 것처럼 자신(모비딕)에 대한 혐오감을 갖고 있다. 하지만 결국 엘리가 지신의 에세이 속에서 불쌍하다 평했던 에이허브 선장(찰리)은 결국 솔직하게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모비딕(찰리)에 대한 혐오를 버리며 스스로를 구원하게 된다. <더 웨일>은 결국 구원은 누구에게서 내려오는 것이 아닌 스스로의 솔직함에서 나오게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본 영화의 내용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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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왔다가도 가는 건가 봐
제목과는 다르게 영화는 ‘어느 멋진 아침’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주인공에게는 평범한 일과를 수행하는 아침이다. 신경의 기능이 퇴행하는 병에 걸린 아버지가 열쇠를 찾지 못해 현관문을 사이에 두고 실랑이를 벌인다. 좋아하셨던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화장실에 가시는 것을 돕고, 안부인사를 드린 뒤 그의 집을 나선다. 통역가로서 자신의 업무를 하고, 아이를 돌본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볼 법한 죽음이나 낯선 외계생명체의 발견 같은 드라마틱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주인공은 상념에 빠져 있거나 약간은 권태로워 보일지언정 대상화된 우울에 빠져 있지 않다.
미아 한센 러브 감독의 <어느 멋진 아침>은 마치 그가 생각하는 삶의 정의를 찬찬히 들려주는 영화같다. 영화 속 이야기는 긴 일대기가 아니다. 상실과 사랑을 담아내는 이야기라는 감독의 말처럼, 영화는 일년이라는 기간을 지나면서 아이를 기르는 것, 전에 알던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에 빠지고 약간의 양심의 가책, 쾌락과 실의를 경험하는 것, 그리고 이별을 준비하는 과정을 모두 보여준다.
<어느 멋진 아침>은 에릭 로메르 감독의 사계절 연작을 비롯한 작품의 유산을 물려받은 연출과 레아 세이두의 해가 갈수록 깊이를 더하는 연기력, 붙었다가 떨어지고, 다시 연결되는 관계 구조로 들어차 있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이를 통해 ‘멋진 아침’은 매일 찾아오는 것일수도, 방황 끝에 도달하고 싶은 목표 지점이 될 수도, 존재하지 않을 것 같다가도 문을 활짝 열어 두면 맞이할 수도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본 리뷰는 하이스트레인저 씨네랩에서 초대받은 시사회에 참석 및 관람 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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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폭행 피해자의 상처와 결단
씨네랩의 초대로 개봉 전 시사회로 먼저 관람하고 작성된 리뷰입니다.
'아줌마'라는 말을 들으면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이미지가 있다. 이기적이고 고집 있고 예의가 없는 촌스러운 이미지가 얼핏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사실 남성을 지칭하는 '아저씨'라는 말도 부정적인 이미지가 떠오르기도 하지만 왠지 더 어감이 좋지 못한 건 '아줌마'라는 단어다. 여러 미디어나 사람들 사이에서 무수히 전해지는 예의 없는 아줌마에 대한 이야기들은 현대 사회에서 부정적인 이미지로 만들어져 왔고 그렇게 소비되어 왔다. 하지만 그것은 일부의 모습이 확대 재생산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일반화의 오류다. 많은 아줌마들이 그들의 자리에서 자신의 가족을 위해 일을 하거나 무언가를 하고 있다. 제 3자의 눈에 그들의 모습은 부정적인 이미지가 먼저 보이지만 그들은 그들 나름의 삶과 공간을 지키고 있다.
만약 시장에서 일하는 어떤 아줌마가 성폭행을 당했다고 한다면 그걸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어떨까.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아줌마에 대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을 선뜻 쉽게 믿지는 못할 것이다. 사실 그 피해에 대한 명확한 증거나 증인이 없다면 더더욱 그런 의심은 짙어질 수밖에 없다. 생각보다 깊숙이 박혀있는 그 고정관념의 이미지는 꽤 강력하다. 분명히 피해자인 사람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깨끗하지 않다. 그 피해자가 아줌마라서 피해 사실의 신뢰성을 의심하거나 피해를 받았음에도 그 정도는 참고 넘기라는 의견도 생겨난다. 그런 시선들 때문에 피해받은 이후 어떤 사람들은 그 피해에 대한 최소한의 대응조차 포기하기도 한다.
시장에서 일하는 중년 여성, 오복의 이야기
영화 <갈매기>는 시장에서 일하는 중년 여성에게 벌어진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주변에 무수하게 스쳐 지나가는 아줌마들을 떠올리게 된다. 그 존재는 가까운 엄마 또는 이모와도 가깝다. 우리 주변에 아주 쉽게 볼 수 있는 존재들이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그저 평범하게 보이는 중년 여성 오복도 그렇게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줌마다.
영화는 시장에서 생선을 파는 일로 세 딸을 낳아 기르고 이제 둘째 딸의 결혼을 앞두고 있는 오복(정애화)이 겪는 일을 차분히 보여준다. 둘째 딸(고서희)의 결혼식 준비에 약간은 들떠있는 모습의 그는 시장 사람들과 저녁 술자리에 참석할 정도로 시장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던 인물이다. 그가 어느 날 저녁 술자리에 참석했다가 같은 시장 사람인 기택(김병춘)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그 사건 이후에 오복의 행동과 감정은 매우 어둡고 절망적으로 보인다. 그가 주변 사람, 심지어 가족에게도 그 사실을 선뜻 이야기하지 못하는 모습은 안타깝게 느껴진다. 영화는 피해 이후 오복의 시선을 줄곧 보여주며 그의 뒷모습을 영상에 담는다.
영화 속 오복은 왜 자신의 피해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못할까. 아마도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자신을 향한 비난과 시선이었을 것이고 그것으로 인한 두려움과 혼란이 그에게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결정하기 어렵게 했을 것이다. 이제 나이가 든 중년인 자기 자신의 모습과 결혼을 앞두고 있는 딸에게 나쁜 영향이 가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영항을 주었을 것이다. 피해 직후 오복의 얼굴에 드리운 그늘이 카메라에 그대로 잡힌다. 그의 표정과 행동을 가만히 보여준다. 그저 혼자 앓고 있는 그의 주변에 있는 가족들은 그가 그저 몸이 아프다고만 생각한다. 혼자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고 혼자 출혈이 난 흔적을 지우면서 그 모든 것을 감당하는 모습에서 무력감이 느껴진다.
영화에는 성폭행 장면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그저 잠깐의 검은 화면 전환으로 간단하게 넘어간다. 그런 잔인한 장면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기보다는 그 사건 이후 오복의 표정과 행동으로 그 피해에 대해서 설명한다. 빨간 피가 묻은 속옷을 목욕탕에서 씻는 오복의 표정은 마치 감정이 없는 것처럼 텅 비어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어두운 방에 누워있는 그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하다. 그의 표정과 피 묻은 속옷을 봤을 때, 그가 누군가에게 나쁜 일을 당했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다. 영화는 끝까지 직접적이고 충격적인 이미지를 배제한다는 점에서 여타 비슷한 종류의 영화들과는 다른 시선을 가지고 있다. 오직 그 인물을 비추면서 그 사건으로 인한 파장에 집중하고 있다.
피해자 오복의 시선으로 제시되는 피해의 잔상들
오복의 모습을 통해 피해자가 느낄 수 있는 답답함과 상실감이 잘 담겨있다. 이를 테면 그나마 가장 가해자와 관계가 가까운 어르신에게 가서 사과를 받아달라는 요청을 하지만, 제대로 된 사과를 받지 못한다. 가해자와 친한 이들은 오히려 오복을 이상한 사람 취급한다. 그리고 영화의 후반부 시장의 다른 사람들에게 증언을 해달라는 부탁을 하러 다니면서 힘들게 부탁하는 모습에서도 그 답답함을 느낄 수 있다. 그런 답답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작지만 오복은 그 피해에 대한 사과를 받으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다.
영화 속 시장 사람들은 정부 혹은 지자체와 시장의 권리나 보상에 대한 투쟁을 하고 있다. 그래서 시장 사람들 간에 발생한 불미스러운 일에 대해 그냥 덮고 넘어가길 바란다. 각자의 보상금에 영향이 있을까 봐 오복에 대한 생각보다는 자기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행동한다. 오복이 받은 심한 상처는 얼마 전까지 같은 곳을 보고 같이 투쟁했던 그 집단에서 마저 치유받지 못하고 오히려 오복은 그들에게 계속된 거절과 비난을 받는다. 특히, 영화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대부분 그 사건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심지어 오복의 남편(이상희)이 술에 취해 성폭행 피해를 받은 아내를 보고 좋았냐고 웅얼거리기는 모습은 충격적이다. 그렇게 오복을 외면하는 그들을 비추는 화면에선 피해자인 오복보다 그들이 더 죄인 같고 초라해 보인다.
오복이 나이 들고 보잘것없는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그가 성폭행이라는 행위를 당했다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생각이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 일을 무심하게 생각해버린다. 우리 주변에도 그저 시장에서 생선을 파는 아줌마인 오복과 같은 일을 겪는 이들이 꽤 있을 것이다. 꼭 성폭행이 아니더라도 어떤 피해를 받았다고 해도 온전히 도움이나 위로를 받기 쉽지 않은 현실이다. 은연중에 자리한 나이 든 여성, 아줌마라는 색안경은 사람들의 올바른 생각을 방해한다.
오복은 어린 시절 다른 형제자매의 교육을 위해 자신은 돈을 버는 것에 집중했다. 결혼 후 세 명의 딸을 낳고 그 뒷바라지를 위해 시장에서 생선을 파는 일을 했다. 날개가 있음에도 육지 근처에서만 생활하는 갈매기처럼 그는 시장과 집이라는 그만의 울타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삶을 살았다. 영화의 제목인 갈매기는 오복이 살아온 삶과도 닮아있다. 영화는 사건 이후, 늘 육지 근처에서만 지내던 오복이 날개를 피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길을 가기까지의 과정이다. 그것을 돕는 건 아직 시집을 가지 않은 두 딸뿐이고, 남편은 전혀 그를 돕지 못한다.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가는 오복, 그 가치를 보여주는 영화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오복이 다른 시장 상인들에게 증언을 요청하려고 각 상인들의 집을 하나하나 방문하는 장면이다. 마치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에서 주인공 산드라(마리옹 꼬띠아르)가 자신의 직업을 되찾기 위해 동료들을 하나하나 만나서 설득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을 떠올리게 하는데, 산드라가 그랬듯 오복도 거절이라는 벽에서 희망을 찾으려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포기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각각 찾아가 설득하는 모습은 영화의 초반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허망한 표정을 짓던 오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영화의 엔딩 타이틀이 올라가면 다양한 생각이 스치게 된다. 내 주변에 있는 아줌마들을 나는 어떤 시선으로 바라봤을까. 어디선가 1인 시위를 하는 누군가를 봤을 때 나는 그 사람이 왜 그런 시위를 하는지 관심을 기울인 적이 있었던가. 피해자가 하는 말을 얼마나 신뢰했던가. 그들의 숨겨진 노력과 감정, 행동에 관심을 가진 적이 있었나. 영화를 연출한 김미조 감독은 중년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그가 피해자가 되었을 때 어떤 감정과 행동을 하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영화가 어두운 주제를 가지고 있음에도 오복이 한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꽤 흥미롭고 긴장감이 넘쳐 계속 집중하며 영화를 보게 만든다. 무엇보다 다양한 화두를 던지는 여성영화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흥미롭게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영화는 지난 21회 전주 국제 영화제에서 한국경쟁 대상을 공동 수상한 영화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간단한 리뷰가 포함된 movielog를 제 유튜브 채널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주로 말 위주로 전달되기 때문에 라디오처럼 들어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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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기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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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공자>의, 귀공자에 의한, 귀공자를 위한 영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필리핀에서 불법 복싱 경기를 뛰며 어머니 수술비를 마련하던 복싱 선수 ‘마르코’(강태주). 어느 날, 평생 본 적 없는 한국인 아버지가 보낸 변호사가 마르코의 앞에 나타나고, 그는 아버지가 자기를 찾는다는 말에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마르코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목숨을 건 추격전에 휘말린다. 비행기에서 잠깐 대화를 나눴던 정체불명의 남자 ‘귀공자’(김선호)는 곧장 마르코의 숨통을 조여 온다. 마르코의 이복형인 재벌 2세 ‘한 이사’(김강우)도, 필리핀에서 우연히 마르코와 만났던 ‘윤주’(고아라)도 제각각의 이유로 마르코를 쫓기 시작한다. 이처럼 영문 모를 추격전의 끝에서 마르코는 자기 인생을 바꿀 충격적인 진실을 마주한다.
또 한 번의 변주
한국형 누아르의 진수를 보여줬던 <신세계>. 빛이 너무 강했기 때문일까? 박훈정 감독의 작품은 언제나 <신세계>와 비교될 운명이었다. 실제로 몇몇은 <신세계>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박훈정 감독은 꾸준히 변화를 시도했다. 누아르라는 장르 밖으로 나가지는 않되, 그 안에서 변주를 줬다. 일례로 <마녀>는 <신세계>와 달리 여성 주인공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관객에게 어필했다.
<낙원의 밤>은 서사적인 측면에서 변화를 꾀했다. 한국형 누아르의 관습적인 이야기를 거부했다. 의리와 정을 강조하는 사나이 대신 같은 트라우마를 지닌 두 남녀에게 주목했다. 우정처럼 보이기도 하고, 가족처럼 보이기도 하며, 이성 간의 사랑 같기도 한 이야기를 보여줬다. 덕분에 <낙원의 밤>은 서정적인 누아르였다.
박훈정 감독의 신작 <귀공자>도 마찬가지다. 이번 변화의 핵심은 캐릭터다. 공들여 만든 '귀공자'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장르, 이야기, 메시지를 마음껏 가지고 논다. 귀공자가 한 인물의 이름일 뿐만 아니라,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이기에 가능한 시도다. 다만 성공적인 변화인지는 의문이다. '귀공자'에 너무 힘을 준 나머지, 전반적인 균형까지는 챙기지 못했다.
귀공자의 영화
귀공자. 처음 보거나 들으면 꽤 어색한 제목이다. 근래에 잘 쓰이지 않는 말이라서 오글거리거나 과한 느낌도 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생각이 조금 달라진다. 이보다 적확한 제목도 없는 듯하다. 따져 보면 이 영화는 어떤 맥락에서든 귀공자의 영화가 맞기 때문이다.
사전적으로 귀공자는 "귀한 집 아들. 또는 귀한 집 젊은 남자를 이르는 말"이다. 실제로 <귀공자>에는 눈에 보이는 귀한 집 아들과 숨겨진 귀한 집 아들이 있다. 한 이사는 눈에 보이는 귀공자다. 재벌 2세인 그는 이복여동생 '가영'(정라엘)과 치열한 경영권 다툼 중이다. 마르코는 숨겨진 귀공자다. 필리핀에서 병에 걸린 어머니와 함께 하루하루 연명하는 그. 마르코는 한 이사의 또 다른 이복동생이자, 귀한 집 아들로 밝혀진다.
<귀공자>는 기본적으로 이들의 추격전이다. 한 이사는 쫓고, 마르코는 쫓긴다. 한 이사는 급하다. 심장병으로 죽어가는 아버지를 살려 내서 유언 내용을 고쳐야 한다. 그래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마르코를 사로잡으려고 한다. 그의 건강한 심장을 이식하면 아버지를 살릴 수 있으니. 아버지를 만나는 줄 알았던 마르코는 이내 필사적으로 도주한다. 평생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고 살던 그가 이복형을 위해 순순히 죽을 이유는 없다.
귀공자에 의한 영화
두 귀공자의 갈등을 틈타 속셈을 알 수 없는 세 번째 '귀공자'가 등장한다. 그 역시 귀공자의 사전적 정의에 부합한다. "생김새나 몸가짐이 의젓하고 고상한 남자"이기 때문이다. 오프닝 장면에서 그는 마치 제임스 본드 같다. 깔끔한 패션과 헤어스타일을 자랑한다. 일 하는 솜씨도 프로다. 신속 정확하게 목표를 처리한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속물적이다. 명품 구두에 피가 튀면 크게 화내며, 빗방울이 떨어지자 양복이 젖을까 봐 추격을 멈추기까지 한다. 그 덕분에 귀공자가 본모습인지, 귀공자를 동경하는 경박함이 진짜 정체인지 알기 어렵다.
그의 행적은 이러한 양면성을 반영한다. 러닝 타임이 지나도 그의 속셈은 오리무중이다. 그는 마르코를 한 이사에게 데려가던 사람들을 습격한다. 마르코를 빼낸 후에는 몸값으로 천만 달러를 요구하며 한 이사를 협박한다. 그렇다고 마냥 마르코를 돕지도 않는다. 스스로를 친구라고 소개하지만 정작 마르코에게 총을 겨누기도 한다. 선과 악이 분명한 한 이사와 마르코 사이에서 '귀공자'는 물음표가 가득한 영역에 발을 딛고 있다.
영화의 전체적인 콘셉트도 그의 양면성과 맞닿아 있다. '귀공자'의 계획이 끝까지 베일에 싸여 있다 보니 영화 분위기도 그의 행보에 따라 달라진다. 마르코가 추격전에 휘말리는 전반부는 진지한 누아르에 가깝다. 그런데 '귀공자'가 난입하는 순간부터 분위기가 달라진다. 피 튀기는 액션과 만난 그의 유머와 기행이 무거움과 경박함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균형을 이룬다. 박훈정 표 누아르가 블랙코미디로 넘어가는 전환점인 셈이다.
귀공자를 위한 영화
이들 세 귀공자가 모이면 영화는 마침내 본심을 털어놓는다. 그 중심에는 한국인과 필리핀인 사이 혼혈 '코피노'가 있다. 전반부는 마르코의 일상을 자세히 비춘다. 그는 불법 복싱으로 어머니 치료비를 마련하다가 끝내 범죄를 저지른다. 아버지의 도움은 없다. 이 대목은 코피노에게 무관심한 한국 사회를 비판한다. 마르코와 한 이사의 만남도 문제를 고발한다. 한 이사는 마르코를 잡종이라 부르며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어머니가 필리핀 사람이기 때문. 이는 서서히 이슈화되는 동남아 차별의 한 형태를 보여준다.
단순히 문제를 제기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영화적 상상력으로 문제를 해결하기에 <귀공자>의 시도는 더 인상적이다. 후반부에 '귀공자'는 자기도 코피노라고, 피 튀기는 추격전도 인질극도 다 자기가 계획한 일이라고 고백한다. 그 순간 귀공자 3명의 관계가, 익숙한 재벌가 다툼은 다시 쓰인다. 차별하는 한국인과 차별받는 코피노, 그리고 차별적인 사회 구조를 뒤엎으려는 코피노가 새롭게 보인다. 마르코의 진짜 정체를 둘러싼 반전도 허를 찌른다. 귀공자라는 허상조차 막지 못하는 차별이 존재하는 현실이 무겁게 다가온다.
일말의 아쉬움은 있다. 모든 코피노를 하나의 정체성 안에 가두는 섣부른 일반화가 눈에 띈다. 원색적인 언행을 걸러내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귀공자>의 시도는 여전히 인상적이다. <슬픈 열대>가 본래 제목인 이유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상업영화에서 코피노라는 소재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경우가 흔치 않기 때문이다.
귀공자만을 위한 결과
하지만 <귀공자>의 결과물은 기대 이하다. 과감한 시도는 좋았으나, 의도가 스크린 위에 온전히 구현되지는 않았다. 귀공자라는 키워드를 강조하려다 놓친 캐릭터가 많다.
고아라가 연기한 윤주가 대표적이다. 강렬한 첫인상과는 달리 그녀는 사건의 배경과 전개를 설명하는 기능적인 인물에 불과하다. 퇴장도 작위적이다. 추격전의 흐름을 한 번 더 꼬기 위해 갑자기 사라진다. <마녀>와 <낙원의 밤>에서 매력적인 여성 주인공을 만든 전력이 있다 보니 이러한 활용법은 의아하기까지 하다.
'귀공자'라는 캐릭터를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파생된 문제도 있다. 반전의 임팩트를 극대화하기 위해 그에게 모든 역할을 몰아준 결과 다른 두 주인공은 그저 소모된다. 우선 매력적인 마스크를 지닌 신인 강태주를 찾아 놓고도 마르코를 제대로 써먹지 못했다. 그를 진중하고 수동적인 캐릭터로 설정하다 보니 친구가 되어야 할 '귀공자'와의 합이 잘 맞지 않는다. 복싱이라는 소재를 액션 영화가 살려내지 못한 것 역시 실망스럽다.
한 이사 역시 전반부와 후반부의 괴리가 두드러진다. 김강우의 광기 어린 연기는 인상적이지만, 그는 '귀공자' 주도로 장르가 전환될 때 일관성을 잃어버린다. 전반부에는 무게감 있는 사이코패스였지만, 후반부에는 무게 잡는 척만 하는 평범한 악역으로 전락한다.
이에 더해 액션 누아르를 표방하는 영화치고 액션씬의 임팩트가 약하다. 카 체이싱 장면의 경우 템포가 다소 느리다. 차 안에 있는 사람을 비추는 앵글이 고정되어 있고, 차체를 비추는 앵글은 자동차 광고를 보는 듯하다. 그 결과 역동감이나 박진감이 부족하다. 잔인하게 피 튀기는 액션도 인상적이지 않다. 계속해서 흔들리는 카메라 때문에 정확히 어떤 사건이 화면에서 벌어지고 있는지 파악하기 어렵다.
박훈정 감독은 개봉 전 기자간담회에서 "차별받은 이들이 차별하는 이들에게 한 방 먹이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라고 밝혔다. 귀공자와 코피노, 두 키워드를 엮어낸 스토리에서 그 의도는 분명하게 읽혔다. 하지만 그 의도가 스크린에서 적절하게 펼쳐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 결과 이번에도 박훈정 감독의 변주는 절반의 성공으로 보인다. <신세계>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는 날도 다음을 기약한다.
Poor 형편없음
달리 말하면 김선호의, 김선호에 의한, 김선호를 위한 영화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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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MFF 데일리] 젊은 음악가에게 보내는 편지
세상에는 정답 없는 일들이 많다. 영화와 음악도 그렇다. 일반적인 규칙이나 경향성의 갈래는 있지만, 단일한 규칙이 공통으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며 취향의 영역도 존재하니까. 이런 길을 가는 건 어렵지만, 결국 자신의 마음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를 면밀히 살피며 가야 하는 길일 것이다.
영화 <당신의 모든 것> 주인공 서준(강찬희 분)은 아직 그 길의 초입에 서 있는 존재다. 명확하고 카리스마 있는 선생님 은정(김규리 분)이 가르치는 내용은 그에게 잘 흡수되지 않고, 클래식을 듣고 싶지 않아 하기도 하고 지긋지긋하다는 표현을 쓸 만큼 클래식에 짓눌려있는 동시에 클래식이 자신의 유일한 길이라 생각해 매달리고 있다. 재즈를 기계적으로 거부하지만 우연히 하게 된 친구들과의 합주는 처음부터 자기 옷처럼 들어맞는다.
이런 구도에서는 어느 한쪽을 정답처럼 바라보고 싶어하는 마음이 쉽게 올라온다. 친구들과 자유롭게 어우러지는 재즈의 매력을 내세우고, 은정의 꼿꼿한 태도를 마치 클래식만 고수하는 콧대 높은 사람의 재수 없는 편견으로 치부하기 쉽다. 그러나 이 영화는 어느 한쪽을 정답으로 몰아가는 낡은 해법이 아닌, 자기 길을 찾아가는 젊은이의 미욱하고 서툰 여정으로 풀어냈다.
한 음만 쳐도 곧바로 “다시.”라는 말로 서준의 연주를 잘라내며, 은정이 서준에게 가르치고자 한 것은 명료하고 정확한 형식미 쪽이다. 웅얼거리지 말고 손가락에 바늘을 세운 듯 날카롭게 치라는 말은 마치 서준의 인생에 대해 던지는 일갈처럼 보이기도 한다. 은정의 이런 말은 크게 틀리지 않았다. 은정은 콩쿠르 무대에서 요구하는 인재상을 확실히 알고 있고, 서준의 장점과 단점도 명확히 알고 있다. 다만 서준이 스스로 생각하여 찾아내기를 요구하는 은정의 방식은 서준이 흡수하기엔 너무 다른 종류일 뿐.
은정이 몇 번이고 요구한 대로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하는 과정에서 서준은 계속해서 도구를 활용한다. 메트로놈은 당연히 사용해야 하는 도구라지만, 그 밖에도 끈으로 눈을 감아 가리거나 얼음 주머니를 손에 갖다 대고, 소주를 입에 털어 넣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번번이 실패한다. 은정의 가르침을 내치지도 못하지만 수용하지도 못한 채, 정리되지 못한 감정이 이따금 과격하게 분출되어 상황을 악화시킨다.
그러나 모든 젊은 이들은 성장해 간다. 서준의 성장 과정에는 ‘악보에 없는 나만의 이야기를 들려주라’며 악보보다 대화가 중요하다고 말해주는 친구와, 그 과정을 함께하며 서준 안의 음악을 끌어내고 서준에게 믿음을 이야기하는 든든한 연인이 있고, 분명한 기준을 갖고 꼿꼿한 등을 보이는 선생님이 있다. 아직은 피해의식 없이 라이벌을 바라보기도 어려워하고 자기 감정조차 주체하지 못할 만큼 서툰 모습이지만, 음악과 관계 안에서 그는 차차 자라갈 것이다.
이 영화는 우리 누구나 한 번쯤 겪는 젊은 날의 미숙함을 다정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원석처럼 투박하게 빛나는 서준의 시간을 주변 사람들의 면면이 다정하게 다듬는데, 이는 배우들의 호연으로 훌륭하게 구현된다. 무대 위 아이돌의 모습부터 어두운 시절을 거친 캐릭터 연기까지, 그간 청춘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표현해온 배우 강찬희의 시간이 이 영화에서도 미숙한 청춘의 기쁨과 슬픔을 올올이 빛나게 한다. 은정을 맡은 배우 김규리가 진중한 발성과 단단한 눈빛으로 메트로놈처럼 딱딱 영화의 박자를 휘잡고, 지수 역할 배우 한성민 또한 서준보다 한 걸음 성숙하고 든든한 조력자로서 무게를 더한다. 영화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클래식과 재즈 음악 또한 마치 각각의 등장인물처럼 서준의 성장을 자극하며, 관객의 귀도 즐겁게 한다.
영화를 보는 동안 나는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후배 시인에게 쓴 편지 모음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떠올렸다. 길을 찾아가는 자에게 해주고 싶은 말, 이 영화가 그 책과 닮은 마음을 품고 있다고 느껴졌기에. 오늘도 영화와 음악처럼 정답 없는 세계를 유영하며 제천국제음악영화제를 주목하고 있을 젊은 이들에게, 책의 한 구절을 인용해 이 영화와 함께 전하고 싶다.
“당신은 젊고 출발선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부탁하고 싶습니다. 당신의 가슴속에 있는 풀리지 않는 문제들을 인내로 대하십시오. 그 문제들 자체를 폐쇄된 방이나 알지 못하는 언어로 쓰인 책처럼 사랑으로 대하려고 노력하십시오. 당신이 얻지 못한 답을 찾아내려 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당신은 아직 그것을 경험하지 못했으니까요. 모든 것은 경험입니다. 당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직접 살아보십시오. 언젠가 자신도 모르는 새 해답 안에서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해낼 것입니다.” (45p,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라이너 마리아 릴케)
[20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상영시간표]
9월 7일 토요일 16:00 세명대 태양아트홀
9월 9일 월요일 10:00 세명대 태양아트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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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리뷰/결말포함] 어린이집,유치원 선생님인가요? 아이가 있으시다고요? 당신도 오해 때문에 주변에서 버림받은 적이 있나요?! 전 아직도 그렇습니다...
#매즈미켈슨#칸_남우주연상#영화리뷰
이 영화 '더 헌트' 라는 작품으로 매즈 미켈슨은 칸에서 남우 주연상을 받습니다. 간략한 내용은 아이의 거짓말로 인해 오해를 받으며 유치원 교사 루카스가 상황이 점점 악화되고 사람들 속에서 자리를 잃어가는 내용입니다구독?부탁드려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Nqd...영화 '더 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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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스파이의 아내> 메인 예고편
태평양 전쟁 직전, 그들의 운명은 영원히 바뀌었다.
아시아에 전운이 감돌던 1940년, 무역상 유사쿠는 사업차 만주국으로 향한다. 이곳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참상을 목격한 유사쿠는 현실을 바꾸기 위해 직접 나서고, 유사쿠의 이러한 위험한 행동은 일본에 살고 있는 아내 사토코의 일상에도 영향을 미친다. NHK TV 드라마를 영화로 다시 만든 작품으로 2020년 베니스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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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엑소시스트 : 믿는 자> 1차 예고편
호러 명가 #블룸하우스 가 선사하는 공포의 바이블✝